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제2강 『노자』에 관하여
제3강 『노자』와 무위 1
제4강 『노자』와 무위 2
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제9강 상상력과 과학
제10강 『노자』와 자연
제11강 『노자』와 성인 1
제12강 『노자』와 성인 2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
◆ 『노자』를 대하는 잘못된 독법 반갑습니다. 앞으로 8주에 걸쳐서 제목이? 안 적혀 있어요. 혼돈으로부터의 탈주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노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될텐데, 먼저 노자하면 저는 사실 시중에서는 철학자로 떠오르기 쉽지만 저는 노자하면 놀자로 떠올라요. 노자를 자꾸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ㄹ을 붙여서 ‘놀자’ 대신에 몸으로 노는 게 아니라 머리로 노는 거지요. 단어를 가지고, 개념을 가지고. 노자라고 하는 책은 지금부터 대력 2300년 이전에 태어난 책이죠. 워낙 오래된 책이다 보니까 또 우리말로 돼 있지 않고 한자로 돼 있죠. 그러다보니까 번역의 곡절도 있고 시대마다 노자를 읽던 방식도 다르고 눈이 달랐고.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유교담론이 커다란 상처를 입고, 거기에 대한 대안적 담론으로써 19세기 말부터 노자가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도올 선생님이 워낙 독특한 강의와 어법과 그리고 상당히 세련된 해석을 통해서 노자를 많이 소개했고. 그리고 도올 선생님 강의 속에서는 서양 철학적인 문제의식과 동양 철학적인 문제의식이 같이 만나는 지점에서 많이 이루어지다보니까 굉장히 철학적으로 읽혀 왔어요. 그런데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그 방향이 역전됩니다. 달리 말하면,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 노자를 읽었던 시각은 이른바 서양에서 말하는 철학 학문 분야 혹은 그 방식에 맞춘 노자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어요. 그랬다가 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담론계에서는 이른바 진보주의 담론이 방향을 잡지 못 하고 상당히 수그러들고 미국을 거쳐서 들어온, 이른바 프랑스 철학이지만 사실은 미국의 여과를 거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사상이 거의 전 담론 분야를 장악했다고 표현했던 건 애매하고 유행하다시피 상당히 많은 호응을 받았는데. 오히려 거꾸로 노자의 경우는 그 해석이, 역사적인 시각을 통해서 노자의 본 텍스트의 의미 그리고 시대마다 달리 해석되었던 주석서를 통해서 어떻게 읽혀졌나를 보는 관점으로 이동했습니다. 특히, 90년대 중반에 우리가 흔히 노자의 가장 뛰어난 주석서라고 하는 왕필의 현학, 그 당시에 노자를 해석했던 철학 사조를 현학이라고 하는데, 현학적인 사조마저도 상대화시켜서 봐야 한다는 담론이 뜨면서 저도 마찬가지로 그런 분위기에 있어 학위 논문을 「노자」와 「하상공」이라고 하는, 가장 이른 두 주석서죠, 두 주석서를 비교하는 주제로 학위를 땄습니다. 저 때에 그와 같은 방식의 연구가 상당히 유행할 때였고요. 주석사가 다시 부흥하게 된 계기는 90년대 초반까지, 특히 70,80년대를 거치면서 노자를 만든 시각은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 속에서 보편적인 논리나 가치와 담론을 철학적인 언어로 잘 발견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90년대 들어서면서 많이 달라졌죠. 사실 IMF가 터지면서 많이 어렵긴 했지만, 그 이전 과거에 비하면 경제적으로 굉장히 풍요로워졌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감이 생겼고, 그리고 구태여 서양적인 방식이라는 것과는 다른 우리 동아시아 문화의 고유한 무엇. 혹은 역사적인 그 무엇을 단순히 서양의 보편과 대립시키거나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목소리가 처음 일어난 시기가 그때였습니다.
7,80년대에 일으킴 담론이 사실 국가 주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강했다면 90년대 일어난 고전의 재해석은 상당히 다원적인 경향이 많았고 반드시 보편적인 논리에만 매몰돼 있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까 훨씬 더 본래 텍스트의 목소리를 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텍스트들에 비해서 노자나 장자의 텍스트는 연구자 숫자가 굉장히 적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경우는 조선조에 유학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경우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보니까 유학이 주류담론이었다 할지라도 지역별 특색이 많았다면 조선반도는 상대적으로 작죠. 정치적으로도 통합돼 있었고. 그래서 주류사상과 다른 방식의 논의를 한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훨씬 어려운 조건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오히려 유학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하지 못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을 해석하는 방식이 서구와는 또 다른 중국과는 또 다른 방식이 많이 나왔고요. 노장을 해석하는 해석이 실제 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논의를 따져 보면 굉장히 다양해요. 하지만 조금 나아가서 보면 한국사회처럼 노자를 해석하는 시각이 상당히 균질적인 데도 드뭅니다.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서 노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국에서 훨씬 균일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조금 차이가 있다면, 서양철학을 하신 분들이 노자를 보는 것과 동양철학을 하신 분들이 노자를 보는 시각과 상당히 선을 긋기 시작한 때도 90년대 중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걸 민족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고, 객관적인 동양 담론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지점에서 시작했는데, 다행인 것은 최근에 그와 같은 시각이 세계적으로 상당히 붐을 이루고 있고. 그 전에는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영미권과 프랑스 쪽 연구 성과도 많이 번역이 되어서 소개되고 그래서 최근에 학자 충원은 적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더 풍부한 논의 속에서 노자가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아쉬운 건, 동양철학이 현실의 문제와 씨름하는 고리를 상실하게 됨에 따라 동양철학 담론이 많은 부분에서 공허함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저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아주 좋게 표현하면, 노자는 천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요. 왜냐하면 노자로 학위하는 사람마다 말하는 노자가 달라요. 다양하다는 얘기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어떤 모양새를 갖고 있냐면, 노자가 만병통치약입니다. 이게 가장 적당한 표현이에요.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분들은 노자를 읽으면서, 인류최초의 페미니즘 사상가라고 선언해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환경 문제가 뜨면, 노자가 최초의 환경 철학자래요. 그 다음에 어떤 문명, 제도, 규범의 문제가 서두화되면 노자는 애초부터 유가의 도덕적 전제주의, 엄격주의를 비판하면서 나온 사상이기 때문에 ‘굉장히 다원적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 혹은 동아시아 사회의 어떤 문제가 되는 현실이 있다고 하면 노자는 거기에 대한 反. 그래서 나름의 대안이 있는 것처럼 얘기되는 게 한국에서 노자 담론의 모습니다. 그런데 만병통치약은 어디서 파는지 아시죠? 약국에서 안 팔죠. 시장통에서 이른바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물질이 들어있어서 쇼를 보여준 다음에 잘 팔리는 것처럼, 달리 말하면 실제로 현실의 문제와 토론하고 대화하는 위치에서 사상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만병통치약이 시장에서 팔리는 것처럼 유가도 마찬가지지만, 노장 철학이 실제 현실의 담론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오로지 그냥 안티, 반. 따라서 “뭔가가 있을 거다”에서 끝나냐. 왜 그러하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물론 우리나라 학자의 수준이 낮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최근 번역서 나온 걸 보시겠지만, 과거에 고전번역이다, 혹은 최근에 번역이 나오더라도 20년, 30년 전에 텍스트들이 번역돼서 나오지만, 요즘에는 6개월 전에 나온 책들 2,3개월 후에 바로 나오기도 하고. 지금쯤 출간되는 책들이 올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번역돼서 출간된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서구사상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학문하는 분야가 있다 하더라도 동시적인 사유를 우리가 펼치고 있다는 겁니다.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뭔가 필요성에 의해서. 저들이 부딪치는 현실과 우리가 부딪치는 현실이 문화적, 역사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수위는 똑같다는 거죠. 그런데 바로 이러한 배경이 오늘 첫 번째 강의 제목, 제목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죠? 소설 제목이에요.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이죠. 단편 소설 제목인데, 소문의 벽.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에 대한 이야기, 특히 예전에 강의를 나가면 두 가지 질문을 많이 들어요. 첫 번째는 그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담론들을 노자 텍스트를 통해서 읽어낼 수 있느냐라고 하는 진지한 얘기가 있다면, 어떤 구절을 읽었는데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맞느냐고 질문을 해요. 이상한 방식의 질문이죠. 맞느냐 틀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를 올바로 봤느냐 안 봤느냐의 물음으로 바뀐단 말이에요, 왜? 한문이라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진 교재는 한문이 되도록 없고 나와 있는 번역문들을 그대로 실었어요. 제가 구태여 번역을 안 하고.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특별히 오역이다 싶지 않은 부분들은 번역서를 활용하는 게 좋죠. 그래야만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한문을 놓고서 서로 틀리니 맞니 하는 것은 전문적 학자가 하면 되는 거고,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있다고 한다면 번역서를 놓고서, 어떤 번역어가 더 좋다, 아니다 하는 방식으로 토론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부제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누구의 노자인가’라고 돼 있죠. 많이 들어본 방식의 어법이죠? 제가 센스가 많다 보니까 그런 방식의 언어에 강해요. 그 내용이 뭐냐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 다 소문으로 들은 거예요. 왜, 한문 원전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적다. 그리고 한문 원전을 볼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도 노자는 역사적으로도 합의된 바가 없고, 현재적으로도 합의된 해석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노자는 천 개의 얼굴을 가졌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런 책 중에서 가장 좋게 볼 수 있는 것이 다양한 주석서들을 동반하고 있는 좋은 번역서들이 많이 나왔어요, 지금은. 왕필본만 하더라도 여러 개가 있고 관점본도 최근에 두 세 가지 나왔고. 그 다음에 가장 빠른 노자라고 하는 박정본 노자도 아주 꼼꼼한 번역이 얼마 전에 출간됐습니다. 번역이 상당히 좋아요. 그러다보니까 여러 가지 텍스트들을 같이 비교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주석서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노자라고 하는 말을 곱씹으면서 스스로 생각을 할 때 아주 좋은 번역본이 이 김영옥 선생님이 번역했던 노자와 21세기 보다는 이 책이 훨씬 더 일대일과 책과 대응하기엔 좋습니다. 어디를 펴든 거의 순 우리말로 돼 있기 때문에, 물론 한자로 돼 있는 부분은 넘어가고 한글로 돼 있는 부분만 딱 봐도 대체적으로 고등학교 졸업한 분들이라면 다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번역문은 굉장히 쉬운데 “노자가 철학자래, 그러니까 뭔가 센 게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거꾸로 잘못 생각한다는 거죠. 저는 책을 읽을 때 나쁜 습성을 갖고 있는데, 그래도 제가 철학 박사를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머리로 잘 안 읽히는 책은 나쁜 책이라고 생각해요. 저자가 표현을 못 했거나 그걸 안 봐요. 제가 서양현대철학을 읽을 때, 제 머리로 다 이해된다는 건 쉽지 않죠. 나름대로 연구를 해 가지면서 읽어야죠. 그런데 동양철학을 읽을 때 제 머리로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제가 알지 못하는 굉장히 독창적인 사고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분의 표현이 상당히 아직 나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아니면 별 볼일 없는 얘기일 수도 있죠. 어느 쪽이냐는 건 좀 더 생각을 하고 반성을 해 봐야 하는 문제니까 그건 판단을 못 하겠어요. 그런데 일단 같은 한글로 쓰는데,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어요. 저는 학자로서 토론해야 하지만 여러분은 “아 내 머리가 나빠서” 이렇게 하시면 안 되고 “나를 이해시켜줘”라고 요구를 하셔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문하는 방법이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도올 선생님이 번역한 「길과 어둠」. 제목까지도 풀었잖아요. 이 책이 아주 좋아요. 저도 이 책을 세 권 째 사는 거예요. 첫 번 째 것은 하도 많이 낙서를 해서 안 보다가, 이사 가는 와중에 잃어버렸고. 얼마 전에 책을 사서 옆에다 필기도 안 하고 그냥 내용만 읽으면서 우리말식으로 어떻게 하면 이걸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라는 소재로 가끔씩 이용하기도 합니다. 자, 그런데 부제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누구의 노자인가” 라고 한 이유는, 노자 시대에는 환경문제라는 게 없었어요. 당연히 환경 철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처방으로써 혹은 철학적 사유로서 재해석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건 맞죠. 하지만 노자가 환경 철학자나 혹은 페미니스트다 혹은 반문명론자다 라고 표현하는 방식은 일단 부적절합니다. 왜? 다 현대어거든요. 그렇게 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 시각의 혹은 우리 현실 문제를 가지고 텍스트를 보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그 당시의 노자가 그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돌아가야죠. 25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야 하고 그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학계에 계신 분들이 많이 연구를 해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곤란하다는 걸 우린 대충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일단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거의 문맹률 제로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아주 나이가 많으신 90에 가까운 분들도 60,70,80살이 되어서 한글 공부하셔서 글 읽는 분들이 많아요. 특히 인터넷 때문에. 여러분들 많이 보셨죠? 이건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에요. 한 언어공동체에 있는 사람들 태반이 책을 읽고 대화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엄청난 겁니다. 고대 중국으로 가면 몇 사람이나 책을 볼 수 있었을까? 확인이 안 되죠. 문자를 읽고 쓰는 인간은 무지무지하게 적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노자」라고 하는 책이 지금처럼 기계로 찍어 나와서 서점만 가면 살 수 있고, 서점도 갈 필요가 없죠. 인터넷 들어가서 신청하면 책이 온단 말이에요. 그것도 나갈 때보다 더 싼 값으로. 우린 굉장히 신기한 세상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기본적인 사실만도 다른데 우리는 우리가 독서하는 행태, 공부하는 행태, 생각하고 토론하는 방식을 거기다 나도 모르게 대입시켜서 마치 동시대처럼 사유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우리는 장점이라고 20세기 내내 칭찬받아 왔죠. 하지만 결론은 뭐냐? 별 얘기 없더라. 공허하더라. 왜? 워낙 문제가 다르니까. 그래서 오늘 강의의 제목이 “소문의 벽”인 까닭은 일단 노자와 관련된 기존의 상식을 걷어내고 내 눈 속에 혹은 내가 낀 색안경을 벗고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할까를 조율하는 것이 오늘 강의의 목표입니다.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1_02.htm ◆ 노자의 기본적인 사상 처음부터 원문을 읽어나가면 어려우니까 에피소드 세 가지를 가지고 얘기해보죠. 이 세 가지가 2500년 동안 논란이 많았던 문장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오늘 듣게 될 내용은 상당히 독특한 해석입니다. 제 해석이 아니라 2000년 전의 해석입니다. 노자 22장을 보면 哭則全, 枉則直 곡즉전, 왕즉직이라는 짧은 구절이 나와요. 번역이 도올 선생을 번역을 따 왔어요.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무슨 얘기에요? 알 수가 없죠. 그럼 가장 똑똑한 천재 주석가라고 했던 왕필 주석서를 읽어보죠. 이 책은 노자가 기원전 4,3세기쯤에 만들어졌다고 가정하면, 이 사람이 249년에 죽었으니까 기원후 3세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럼 600년 차이가 나죠. 지금부터 600년 전이라고 하면 언제예요? 1400년, 임진왜란 즈음이 되겠네요. 그 때랑 지금과 엄청 다르죠. 천재 왕필이라고 해서 노자의 뜻을 정확히 읽었을까? 지금 여러분들이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선생의 책을 보면서 한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양반들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동시대인이 사유하는 것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마찬가지의 생각 정도를 갖고 보셔야 해요. 자, 한번 읽어 볼까요.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 밝음이 완전해진다.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으면 그 옳음이 드러난다.” 원문보다 더 어려워요. 어려우면 일단 다시 그 보다 조금 더 앞에 나온 하상공이라는 책에서 주석한 내용을 보죠. “자신을 굽히고 대중을 따르며 제멋대로 하지 않으면 온전해진다. ‘왕(枉)’이라고 하는 글자는 구부린다, 굽힌다는 뜻이다. 자신을 구부리고 남을 펴주면 서서히 자기 자신이 저절로 곧아지게 된다.” 조금 더 이해가 쉽죠? 쉽게 말하면, 아주 쉬운 표현으로 하면 자기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고 낮출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늘 그런 문장을 생각할 때는 거꾸로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이런 방식의 표현을 듣는 사람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올라갈 때까지 내내 꼴등만 했어요. 간신히 중학교 졸업할 때 인문계 고등학교에 턱걸이로 미달로 입학했단 말이에요. 대학도 미달로 합격해서 간신히 졸업한 사람. 만약에 그런 사람인 경우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잘났다, 잘난 체 하는 사람 아마 드물 겁니다. 그런데 전통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평등한 개인들의 사회가 아니라 신분적 굴레가 막혀 있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엠티를 갔었어요. 강원도 어딘가에 굉장히 오래된 고택이 있었는데 어떤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종갓집인 것 같아요. 아 제가 본 게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본 거네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현실이 왔다갔다 해요. 비슷한 걸 본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 본 것 같네요. 웃기려고 한 거, 더 웃으실 줄 알았는데 안 웃으시네. 그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어떤 사람이 저처럼 엠티를 가서 잘못 들어가서, 정원이 너무 고풍스러우니까 신기한데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니까 6,7살 갓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나이의 조그만 애가 한복을 입고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동시에 눈이 마주쳤더니, 이 사람이 쭈뼛하잖아요. 일단 남의 집인 것 같은데 들어갔으니까. 그 순간 꼬마는 당당하게, “웬 놈이냐!” 종갓집 양반의 모습인 거죠. 우리가 볼 때는 그게 코믹하고 우스운 장면처럼, 옛날에는 저랬나봐 정도이겠지만 만약 당시 조선사회에 그랬다고 하면, 상민이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양반인 대갓집 도령한테 한 소리를 들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바로 땅에 엎드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몸감이 다르다는 거죠. 이 시대에 낮춰야 한다, 그 꼬맹이가 낮추는 법을 배우겠습니까? 그런 미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하는 조언이에요. 그런데 그런 걸 아주 리얼하게 보여주는 해석이 있습니다. 보통 노자 해석서에서는 이 텍스트를 제외시켜요. 너무 리얼하니까. 저는 당연히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회남자」라고 하는 책인데, 한 무제의 삼촌뻘 되죠. 유안이라고 하는 사람. 나중에 반역으로 몰려서 죽게 되는데 그 사람이 회남지역의 왕을 했었어요. 그래서 회남자 혹은 회남왕이라고 불리는데 이 사람이 남긴 책이라고 해서 회남자라고 불립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도가, 혹은 황로학계열을 집대성한 책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 중에 ?도응훈? 편이 있는데, 맨 마지막에 세 개 에피소드만 빼놓고 나머지 전체가 하나의 역사적 일화를 제시하고 그 제시를 통해서 노자가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끝나요. 달리 말하면, 이야기 보전의 노자 주석서라고 볼 수 있죠. 왕필이나 하상공보다 훨씬 더 실제 대화에서 예를 들면서 적은 주석서라고 볼 수 있어요. 하나를 읽어보죠. 【진(晉)의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조(曹) 나라에 들렀는데 조 나라 군주가 무례하게 행동했다. 조군의 대부였던 이부기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 주군께서 진의 공자에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중이를 옹립하여 진 나라에 복귀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조 나라를 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전에 덕을 베푸는 게 좋을 것입니다.”】 친절을 베풀라는 거죠. 【그래서 이부기는 중이에게 항아리에 음식을 담아 보내고 또 벽옥을 바쳤다. 중이는 그 음식은 받았으나 벽은 돌려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이가 진 나라로 돌아가자 군사를 일으켜 조 나라를 쳐서 승리하였다. 중이는 삼군(三軍)에게 명하여 이부기가 사는 동네에는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曲則全, 枉則直.”】 이러면 훨씬 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사람이라고 하는 게 우리 일상인의 삶은 다르죠. 일상인의 삶 중에 가장 힘든 건 매일 똑같은 삶이 반복된다는 것. 지겹잖아요. 일도 똑같이 해야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돈도 안 벌리고. 뭔가 미동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거죠. 그리고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자신이 향유하는 게 적고. 지금도 그럴진대, 과거에는 신분의 굴레에 갇혀서 아버지가 노비면 나도 노비고. 끔찍하죠. 그런데 정치인들은 우리와는 사는 방식이 다르죠. 물론 이때 정치인이라는 게 지금처럼 나름대로 정치판에 들어가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고나면서부터 신분이 그러하니까 정치를 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그렇게 번역을 안 하지만, 이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 좋게 번역해서 선비(士)라고 하죠. 사(士)라고 하는 말은 2500년 동안 시대마다 의미가 굉장히 다릅니다. 그런데 공자도 사(士)출신이고,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사람들도 사대부, 선비들이었죠.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仕 이게 무슨 뜻이죠? 벼슬살이하다. 관직에 나아가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신분이자 직업이에요.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士계급 이상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일반인들의 얘기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거죠.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이 말은 나중에 주희가 권모술수의 대명사라고 엄청나게 비판했던 부분이에요. 왕필이 해석했던 부분은 조금은 누그러뜨린 해석이에요. 처세술적인 얘기로 다가가는 중간쯤에서 멈추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상공의 주석에서는, 훨씬 구체적으로 니 스스로를 굽힐 줄 알아야 니가 대접받을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다. 라는 얘길 하는데. 회남자 ?도응훈?에 나오는 얘기는 철저하게 그런 사례를 들고 있죠. 달리 말하면, 니 자신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굽힐 때는 굽혀야 하고, 나갈 때는 나가야 하고. 하지만 노자는 기본적으로 굽히고 겸손하고 자기를 아래에 두면서 더 나아가고 더 뻗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정치이론을 갖고 있는 것이 노자라는 책입니다. 이런 논리는 음울한 얘기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일어나요. 현대 사회에서도. 요란한 사람치고 실수가 잦아요. 누가 잘나간다고 하면,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고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면 실수한단 말이죠. 그때 달라들어서 개떼같이. 바로 이런 논리라고 하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노자라는 텍스트를 얘기하면서, 정말로 아름다운 책. 고도로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면서 사변적이면서 아름다운 책이라고 많이 얘기해요. 그런데 주희는 유가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언설을 보면서 이런 방식의 언설을 하는 책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권모술수라고 단칼에. 장자는 그나마 괜찮은데 노자는 위험하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 피곤하겠죠.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또 한 가지 예를 보죠. 에피소드 두 번째입니다. 28장. 이것도 엄청나게 최근 특히 4,5년 동안 유명한 구절입니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그 숫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계곡이 된다. 여기서 계곡이라고 하는 것은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큰 강물로 변하고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 그 물들이 이루어낸 커다란 물을 뜻합니다. 밑에 많은 걸 거느리고 있는 걸 말하는 거죠.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최근의 해석은 여성주의 담론이 뜨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 담론과 많이 시켜서 노자는 양을 중시하는 유가와 달리 음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졌고 여성적 가치 즉 낮출 줄 알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포용적이어서 노자철학은 페미니즘적이거나 혹은 여성적 가치를 선향한다고 막 칭찬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냥 읽어 보세요. 그냥 읽으면 모르는 게 정답 아닙니까? 어떻게 압니까? 주석서를 보죠. 왕필은 어떻게 주석하느냐. “수컷은 앞서는 부류이고 암컷은 뒤처지는 붙이이다. 천하에서 가장 앞서는 것들은 반드시 뒤처지게 됨을 알기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에 두지만 앞서고, 계곡은 사물을 구하지 않지만 사물이 스스로 돌아가고, 어린아이는 꾀를 쓰지 않지만 스스로 그러한 지혜에 합치한다.” 일단 왕필의 주석을 보면, 여기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성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자(雌)가 나오지만 남성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옹(雄)도 나오고. 그런데 두 가치에 대해서 태도를 취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성인과 어린아이예요. 계곡이고. 따라서 이건 여성적이냐, 페미니즘적이냐 하는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난 줄 알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자기를 낮추고 절제하고 뒤로 물러서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웅과 자에 대비시킨 것 뿐입니다. 그런데 저 혼자 쭉쭉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망하기 쉽고 오히려 자기를 뒤에 둠으로써 앞에 나가는 전략을 말하고 있죠. 하상공 것은 더 구체적입니다. “‘수컷’은 존귀함을, 암컷은 비천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비록 자신의 ‘존귀함’과 ‘드러남’을 안다 할지라도,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즉 수컷의 ‘강함’을 버리고 암컷의 ‘부드러움’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마치 물이 깊은 계곡으로 흘러들 듯이 세상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 자, 훨씬 더 구체적이죠. 여기에 나온 얘기는 여성적 가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처신하고 행동의 원칙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통치집단에 속한 것이고 오히려 잘난 척하는 것보다 겸양할 줄 알고 상당히 탄력적으로 처신할 수 있는 사람이 실질적인 효과를 본다는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도응훈?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조간자(趙簡子)라고 해서 원래는 진나라인데 나중에 진나라가 조위, 한이라고 하는 세 나라로 분리되죠. 그걸 삼진이라고 하는데 이게 403년에 일어났고 이때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죠. 이때는 당시의 진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던 여섯 개의 유력한 가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 집안의 간자라고 하는 사람이 양자라고 하는 사람을 자신의 계승자로 지목하는 일화가 나옵니다. 【조간자(趙簡子)가 양자(襄子)를 후계자로 정했을 때 동알우(董閼于)가 “무휼(無?)은 출신이 미천한데 후계자로 정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간자가 대답했다. “양자는 나라를 위해 부끄러움을 참아 낼 수 있는 사람이네.”
끔찍하죠?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 한나라 때 이 텍스트를 읽었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집단의 지식인들은 우리가 페미니즘적이다, 여성적 가치라고 했던 그 부분이 그런 게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노자가 멋있게 보이나요? 멋있는 해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자라고 하는 책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도덕이죠. 예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노자에 대해서 이런 비유를 많이 썼어요. 長生久視之道(장생구시지도) 장생구시, 장생이라고 하는 말이 지금처럼 웰빙시대를 맞아서 평균연령이 높아지니까 90까지 100까지가 아니라 정치인들은 우리와 사는 방식과 달라요. 웬만큼 담배 안 피고, 술 적게 마시고, 운동 잘 하고, 하더라도 오래 못 살 가능성이 높아요. 왜, 과로사. 교통사고, 일반인들이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거예요. 안 그러면 웬만하면 갑니다.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은 드물잖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정치인은, 못 먹어서 죽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칼 맞아 죽는 거죠. 장생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웰빙이 아니라 칼 맞아 죽을 수 있는 사람의 상황을 염두해 둬야 한다는 겁니다. 중국 황제의 평균 수명이 12,13살이에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시겠죠? 두 세 살일 때 황제로 등극해서 채 걸어 다니지도 못 하는 나이 대에 황제가 바뀌는 바람에 죽은 황제들이 무지하게 많다는 겁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세 사람을 합쳐서 120년 인가? 청나라가 지배했던 전체 기간 가운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세 사람이 지배했던 기간이 반이라고 하더라고요. 옹정제는 십 몇 년 한 것 같은데, 강희제, 건륭제는 둘 다 육십 년이죠? 둘 백 이십년. 엄청나죠? 그런 사람들을 다 합쳐서 계산하더라도 12,3살 밖에 나온다고 하는 건 나머지 황제들이 얼만큼씩 재위했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스무 살 넘어서 황제가 돼도 온갖 세력 때문에 제대로 못 하는데 열 살도 안 된 황제가 황제이겠습니까? 그냥 이름이지. 장난감일 뿐이죠. 그런 상황에서 장생, 평균 수명이 12,3인 나라에서 장생을 얘기한다는 건 절박한 얘기죠. 같은 얘깁니다. 오랫동안 눈 부릅뜨고 세상을 봐야한다는 뜻이니까 살아있다는 얘기예요. 이게 오늘처럼 웰빙시대를 맞아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는 거죠. 노자라고 하는 책은 아름다운 책이기 보다는 끔찍한 책, 참혹한 책,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들어있는 책이라고 먼저 읽으셔야 해요.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니죠. 우주론이나 다양한 얘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단면적으로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사상의 출발은 바로 이 논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1_03.htm ◆ 『노자』를 제대로 읽는 법 다음에 읽을 부분이 가장 유명한 구절이죠. 에피소드 세 번째입니다. 이 구절은 노자를 읽어보지 않았던 분들도 한번 쯤 지나가는 말로 들어봤을. 여기쯤 오신 분들은 한번 쯤 들어보셨을 구절이죠. 알 수 없는 기호처럼,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 문장을 읽고 나서 무슨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도, 명과 같은 용어들이 당시에 문화적 지층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또 철학사적으로. 그런 게 있으니까 수정하는 거고 후대에 주석서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거죠. 그런데 기이하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왕필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왕필의 해석은 본래의 맥락과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이 구절 속에는 왕필 당시 철학적 논쟁이 그대로 들어가 있어요. 맥락이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 번 볼까요. ‘왕필’ : “말할 수 있는 도와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사事나 형形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니 항상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는 말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다.” 보통 이렇게 해석하고 20세기 해석은 이렇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누구 말이죠? 비트겐슈타인의 말입니다. 서양에서 20세기에 와서 발견된 진리가 2500년 전에 관문을 타고 넘어간 한 노인네가 발설하고 갔다는 것 자체를 부각시키면서 대단한 철학자로. 노자가 서구 사회에서 대접받게 된 중요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어철학에 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언어에 관한 문제의식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언어 철학적인 언어와 실재의 관계를 따지는 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얘기냐? 먼저 이 해석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혹시 여러분들 후안 때 나온 허신이 편찬한 『설문해자』를 들어보셨죠? 『설문해자』는 한자사전입니다. 『설문해자』가 나오게 된 배경은 잘 아시죠? 진시황이 무너지고 유방과 항우가 투쟁하던 때에 유방이 먼저 하명성에 입성할까 하다가 후환이 두려워서 근처에 진을 치고 남아요. 항우가 온 다음에 폼을 잡으면서 들어갔어요. 그리고나서 거기에 불을 질렀죠. 영화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때 엄청나게 많은 문헌이 사라졌다고 해요. 오히려 진시황 분서갱유 때문에 문헌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보다도 항우가 지른 불 때문에 더 많이 사라졌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책을 소유하는 걸 금지하고 없애버렸다. 하지만 중앙에 모읍니다.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는 거죠. 그때 모아둔 상당히 많은 문헌들이 불타버린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걸 분서갱유라고 하는 네 글자로만 딱 표현하진 않는데.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그 이후의 한대, 문자 없이 행정과 통치가 불가능하죠. 그러다보니까 당연히 그 당시 머릿속에 외우고 있던 것을 다시 만든 텍스트가 금문 텍스트예요. 그런데 그 이후에 일군의 학자들, 예를 들면 공자가 살던 집에 공사를 하다가 벽에서 무너져서 보니까 고문서가 발견됐다고 해서 예서체가 아닌 그 이전의 글자체로 돼 있는 고대 문헌들이 발굴이 돼요. 상서도 고문 상서가 발견되고. 당시에 이걸 가지고 이념적 정치적 기반이 달랐던 두 학자 집단의 논쟁을 금고문 논쟁이라고 하는데, 선문해자라고 하는 책은 기본적으로 고문파에 속하는 작품인데 왜 사전으로 만들었느냐? 옛날 한자잖아요. 그래서 그게 어떤 의미라고 사전적인 방식으로 추정을 한 거예요. 그래서 만든 한자 사전이 설문해자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서 한자를 분류하는 육서라는 원칙이 나오죠. 왕필이 말하고 있는 주석 문장 속에는 바로 육서를 구성하고 있는 용어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무지무지 중요한 거예요. 지사, 조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사事나 형形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니 항상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할 때, 상형, 조형이라고 돼 있지만, 지사가 들어와 있어요. 달리 말하면, 이 속에는 문자학적인 언어학적인 고민이 들어 있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말을 해석하는 틀의 원맥락에 닿아 있으면서도 사실은 당시의 논쟁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걸 언의(言意)지병이라고 하는데 보통 언어철학하면 언어와 실재를 다룬다고 해서 특히 박이문 선생님이 『노장사상』이라고 하는 책 속에서 비중 있게 다뤘죠. 노자가 철학적인 사유가 굉장히 풍부하다고 칭찬까지 했었는데. 이때 말하는 언의라고 하는 것이, 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뜻. 이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이걸(意) 영어로 쓰면 meaning, 단어의 뜻이 아닙니다. 의도, 의향이라는 intent의 뜻이에요. 이건 공인된 언어가 아니지만 지금 많은 학자들이 그 쪽으로 가고 있는데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이 노자의 주석서를 썼으니까 도가적인 철학자다? 전혀 아닙니다. 왕필은 본래 역학을 과학전통으로 이어받았던 집안 학문의 계승자고, 삼국시대 당시에 조조 정권과 굉장히 가까운 인척관계였다. 왕천이 왕필의 할아버지뻘이 되는데, 그 가문의 후학을 이룬 사람이에요. 역학 중심이었고. 그리고 240년부터 249년에, 조 씨의 위나라에서 일군의 유학자들이 나름대로 뭔가 개혁적인 정치를 펼치려고 모종의 운동을 하는데, 이 시기를 정시(正始)라고 합니다. 정시는 주역 용어입니다. 이 글자를 그대로 보세요. 이게 연호인데, 처음을 바로잡는다. 즉, 한나라가 망했죠. 한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공자의 가르침, 오경을 통해서 문명을 실현하려고 했던 유학자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따라서 당연히 고민을 하죠.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진리가 잘못 된 거냐? 아니다. 우리가 공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공자라고 하는 말은 오경의 저자로서, 이 문명의 토대를 만든 사람으로서 인식됐어요. 오경 속에 담긴 말이 있고 그 말을 통해서 성인이 전달하고자 했던 뜻이 있었던 거예요. 한대문명이 망한 것은 그 뜻을 우리가 제대로 못 이뤘기 때문에. 그래서 이걸 빙자해서 논쟁이 붙어요. 여러 가지 파가 있죠. 언부진이론이라고 해서 ‘말은 뜻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라는 방식의 해석을 고수하는 사람. 이건 새로운 방식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말이 의도를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유가문을 통해서 새로운 방식의 유교문명을 건설하자고 하는 이른바 정치적 표어가 되는 거예요. 이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뭐냐? 거꾸로 있는 것 같죠. 왕필의 전체 저작 순서에 의하면 처음에 노자를 하고 그 다음 주역을 하고 그 다음 논어를 합니다. 그걸 삼현경(三玄經)이라고 해요. 사실 나중의 삼경에서는 노자, 장자, 주역이라고 하지만 왕필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삼현경은 노자, 주역, 논어가 삼현경이에요. 그래서 왕필시대를 현학이라고 하는 거고. 이런 식의 말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렇다면 왕필이 이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사실 여기서는 미완이에요. 나중에 주역에 들어가서, 왜냐하면 왕필은 주역이 가학인 사람이고 따라서 노자는 당시에 유행했던 텍스트예요. 왜 유행했냐.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누르기 위해서 조조의 아들이었던 조비가 도덕경을 열심히 읽으라고 선전을 했어요. 이른바 이교주의자를 누르기 위해서 노자를 많이 읽을 것을 권장했고. 말하자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 자체의 철학적 의미가 뭐냐가 아니라 노자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수단이에요. 예를 들면, 도올 선생이 노자를 강의하면서 ‘인간과 지식의 화해’ ‘인간과 자연의 화해’라는 얘기를 하잖습니까? 목적은 노자에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있는 거죠. 노자를 빙자해서 현실의 문제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데에 목적이 있잖습니까. 도올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거죠.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노자의 주석을 했으니까 노자의 사상적인 실체가 있고, 그걸 통해서 왕필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노자가 당시에 지식인들 사이에 토론하고 대화하는 매개가 되는 텍스트였다는 거죠. 그런데 정작 마음에 안 드는 구절에는 주석을 안 해요. 하상공과 비교해보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주석을 안 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죠. 어떤 짧은 구절에는 길게 주석을 해요. 무슨 말이냐? 원래 텍스트에 없던 이야기들, 왕필의 이야기가 엄청 들어간다는 거죠. 주석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그대로 재현하거나 보관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노자를 빙자해서 말하는 거예요. 더구나 이런 방식의 전통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게, 노자는 한 무제 이후에는 특정 시대 도교 집단 이외에는 이단입니다. 이단.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 혹시 교회 다니시는 분이 있고 절에 다니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불교를 자기 신앙으로 가진 분들에게 불교 경전은 진리의 말씀이죠. 이런 분들에게 성서를 열심히 읽으라고 하면 대충대충 읽죠. 그냥 재미삼아 본다거나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보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한 무제 이후에 도가라고 하는 쪽은 도가라고 하는 학술적 연구조직이 있어본 적이 없어요. 전부 유가 지식인들이 심심풀이 삼아 주석을 했거나 혹은 개인적 취향으로 했거나 혹은 도교적인 뭔가에 의해서 주석을 하는 부류이지, 논어나 맹자 부류의 책들 즉 공자의 진정한 뜻을 우리가 체득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주석서를 다룬 바가 없어요. 마치 논리학 연습 교재와 같습니다. 특히 청대에 노자 주석서가 나온 걸 보면 전혀 상관이 없는 여러 주석서를 한꺼번에 짬뽕해서 노자집회라는 책을 만들어요. 논어집주라는 책을 굉장히 체계적인 작품입니다. 당시까지 있어왔던 주석서를 다 갈라서 나름대로 분명한 체계와 의도 속에서 편찬한 책이 사서집주라면, 노자집회라는 책은 그냥 여러 가지 주석서를 모아둔 거예요. 그리고 ‘도가도 비상도’를 이렇게도 해석해보고 저렇게도 해석해보고. 굉장히 다양한. 유교경전이라는 틀 속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비교하자면 내년, 후년에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보는 사람들은 만날 밤새서 책을 보니까 머리 아프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소설 책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여기 오신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처음 얘기 들어보니까 삶의 변화를 위해서, 일 년 열두 달 계속 이 강의 들으라고 하면 들으시겠어요? 여기서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아마 석달 만 지나면 지겨워서. 쉽지가 않습니다. 떠드는 저도 지겨워요. 해마다 이 강의를 계속한다? 지겨워서 못할 거예요. 저도 몇 년 동안 쉬었다 하니까 조금. 얘기가 바깥으로 샜는데.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내용은, 본래의 구절에 맞는 방식으로 가지만 사실 말로 할 수 있는 것, 언표될 수 있는 것은 지사조형과 같이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태에 관해서만 해당되니까, 이건 무형의 보이지 않는 것이란 말이죠. 意는 뭘로 얻어야 해요? 마음으로 얻는 거예요. 따라서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죠. 말은 수단적인 의미예요. 그래서 나중에 왕필의 자신의 언어이론을 설명하면서 得意忘象(득의망상), 뜻을 얻었으면 주역의 상을 잊어라. 이 표현을 그대로 가면, 앞에 주석한 거랑 다른 얘기가 나옵니다. 즉, 언어라고 하는 것은 공자의 진정한 의도를 간취하는데 있는 거지 문자 그 자체에 매일 이유가 없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해석학적 모험에 대한 천명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겠다는 표어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를 그대로 보관하고 밝히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왕필의 언어관이 드러날 뿐이에요. 공자의 말씀을 담은 텍스트를 새롭게 즉 과거에 어떻게 해석했다고 해서 그게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공자의 진정한 뜻을 얻어야 해요. 하지만 공자의 말이라는 것이 오경 속에 논어 속에 들어있으니까. 논어는 공자의 뜻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거죠. 뜻을 얻기 위해서 주석의 상을 입히고, 말을 입히는 것처럼. 결국 득의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 문명질서의 비전이 되는 공자의 비전을 잡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왕필은 언어와 의미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하상공은 굉장히 다르게 해석합니다. “경술經術과 정교政敎의 도를 말한다.” 즉,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경전을 연구하고 경전의 의미를 토론하고 그 속의 내용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과정. 이건 당연히 문서나 언어로 하죠. 그리고 정교, 정교는 정치와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얘기한다면 정치와 행정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건 교령이고. 즉, 황제는 말하지 않습니다. 황제는 문서를 통해서 옥쇄를 꽝 찍잖아요. 그럼, 온 지방에 문서가 파급돼서 사회 시스템이 움직여지는 거죠. 이건 뭐에 의존합니까? 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거기 나와 있는 것처럼, “무위無爲로 정신을 기르고 무사無事로 백성을 안정시키며,” 이게 하상공 텍스트의 기본 의도인데. 무위는, 마음의 평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건 제왕학의 경전입니다. 하상공의 책은 제왕을 위한 책이에요. 수많은 신하를 다스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감정에 휩쓸리거나 쉽게 흥분하면 안 되니까. 신을 기른다고 하는 것은 아주 투명한, 냉철한 판단력. 현대어로 말하면 이성을 언제든 잃지 않아야 하는 상태예요. 나중에 한의학과 연결되면 오늘날 기공의 원리가 되는 내용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 “무사無事로 백성을 안정시킨다” 사(事)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보통 일이 없다고 번역하죠. 특히 맹자에서는 사(事)라는 글자가 유사(有司), 일이 있으면 담당 관리가 있다고 번역되거든요. 사가 그냥 일로 번역하면 안 돼요. 이건 국가에서 벌이는 사업이에요. 반드시 백성이 동원됩니다. 그냥 일 하는 게 없다는 게 아니라, 무사하면 백성들이 안정돼요. 백성들이 안정된다는 건 뭡니까? 단순해요. 당시의 백성의 삶은 겨울에 군사훈련받고 여름엔 농자 짓는 거예요. 농자 지을 때 부역 나가면 안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유사한 겁니다. 이 의미를 우리처럼, 이라, 사태 보편적으로 넓게 해석하면 안 되면, 일을 벌인다는 건 백성들에게 짜증난다는 거예요. 내 고향 땅을 떠나 먼 데까지 가서 고생하면서 돌 나르고 목숨 걸고 싸워야 하죠. 이런 일을 왜 합니까? 엄청난 인센티브가 주어질 때가 아니면 안 하죠. 바로 거기로 넘어가는 것이 법가의 해석방식입니다. 백성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인센티브다. 현대어죠, 당근과 채찍. 이게 바로 상벌론이고, 노자는 거기까지는 표현하지 않아요. 굉장히 에센스라고 할까요? 그런 말들만 표현합니다. 여기 나온 내용은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정치의 비법은 말로 전달해줄 수 없다는 거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법이 말로 전달됩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치적으로 처세하는 것들은 말로 가르쳐줄 수 없다는 거죠. 『회남자』(淮南子) 「도응훈」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다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장자에 나오는 얘기가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이 순서가 여러분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데, 전국시대의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라는 말과 장자에 나오는 윤편과 환공의 고사. 이런 얘기입니다. 왜 환공이 등장하느냐? 환공은 춘추업대가운데 천 번째 패자입니다. 성공한 정치인이란 말이죠. 왕은 아니지만 왕을 대리해서 천하를 다스렸던 사람이 패자죠. 그 사람이 어쨌길래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 그 배경에 대한 얘기로 권위가 있는 거예요. 중국 문장을 읽을 때 제일 눈여겨 봐야하는 게, 문장이 대단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나와 있는 인물이 대단하냐 아니냐가 더 중요해요. 왜. 센 놈이 나올수록 그 이야기가 센 얘기가 되는 거고, 저 같은 사람이 출현해봤자 아무도 안 봐요. 예를 들어, 제가 성공시대를 써봤자 누가 사보기나 하겠습니까? 똑같은 거예요. 제가 IT벤처해서 일본에 1억 달러를 수출한다, 책 쓰면 쫙 팔리죠. 제가 아무리 노자에 대해 번역본 잘해봤자 천 권 팔리면 많이 팔릴 거예요. 값어치를 그렇게 비교하면 곤란하지만, 사회적 관심사로서는 비교가 안 된다는 거죠. 마찬가지 잣대를 써야 해요. 환공이 한번은 처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어요. 상황 자체가 기이한 설정이에요. 만날 수가 없죠, 왜 거기 가서 책을 읽습니까. 화가의 의도가 들어가 있는 거죠. 장자 속에서 그런 기이한 만남이 많이 연출돼요. 그게 장자의 탁월성이죠. 책을 읽고 있으니까, “전하 무엇을 읽고 있습니까?” “성인의 말씀을 읽고 있다.” 그랬더니, “성인이 어디 있습니까?” “죽었다.” “그럼 성인의 찌꺼기를 읽고 계시군요.” “니 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하니까 수레바퀴 깎는 얘기를 하면서, 이때 수레바퀴라고 하는 건 여기가 꽂는 부분을 얘기하는 거예요. 가운데 축을 꽂아야지만 잘 굴러가지 않습니까? 수레받기에 관한 비유는 ‘하나가 서른 몇 개를 통솔한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상징하는 당시의 기본적인 비유입니다. 이걸로 복잡하게 해석하는 건 곤란해요. 『사기』를 보면 학자가 이걸로 대화를 하면서 새롭게 오게 된 재상이 자기 아래쪽의 부하를 얼마나 잘 관리를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니까 이 사람이 바로 캐치를 하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건 군과 신하를 관계를 표현하는 기본적인 은유예요. 그게 여기 나오는 거예요. 윤편이라고 하는 사람이 수레바퀴 깎는 장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군주의 치술수에 관한 묘리를 뭔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시키는 거고 수레바퀴라는 은유를 통해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치술의 묘리라고 하는 것이 자기의 경험으로, 자기는 수레바퀴를 깎았으니까 그걸 통해서 얘기하겠다. 오래도록 정교하게 깎으려고 하면 너무 많이 깎아서 달리다가 빠지고, 빨리 깎으려고 하면 뻑뻑해서 끼어지지 않아. 이걸 어떻게 깎아야 하는지 자식 놈한테 말로 전달이 됩니까? 안 되죠. 그건 자기가 자득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 나이까지 제가 깎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인이 남긴 말도 찌꺼기에 지나지 않고 성인이 전달하려고 하는 진정한 뜻은 거기에 없을 거다. 살았잖습니까? 말이 되잖아요. 요즘말로 하면, know-how죠. 포정의 고사에서도, 포정이 하는 말을 듣고 위의 문후가 “내 너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깨달았다.” 양생의 도가 나오니까 웰빙?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장생. 당시 위나라가 진나라가 팽창정책을 쓰면서 고립돼 있었어요. 영토가 자꾸 줄어들고. 그래서 수도를 옮기고 부흥정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성공한 군주가 바로 문후인데, 맹자가 만나는 왕이잖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 등장하는 거예요. 괜히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부흥에 성공했던 독특한 군주죠. 그 성공의 비법을, 그 책에서는 포정에게 배웠다고 외치는 거예요, 나중에. 그러니까 말이 되는 거죠. 양생이 장생이라는 말과 똑같은 거고, 당시 양생은 웰빙이 아니라 내 몸을 지키는 건 곧 국가를 지키는 거고 부국강병하는 요체를 말하는 거죠.
가장 유명했던 노자의 구절이, 이건 저의 해석이 아니라 다 있는 해석이죠. 읽고 나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반전, 평화, 형이상학, 신비주의 용어 하나 없이 그냥 읽으니까 쉽죠? 쉬운 게 맞는 거예요. 고전을 읽을 땐. 20세기 우리가 해석한 건 의미가 없느냐? 없다고 말하면 곤란하죠. 당시의 문제가 이런 문제였다면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읽어야 해요. 문제는, 그와 같은 해석의 역사적 반성의 과정을 거치진 않고선 노자가 페미니스트다, 환경주의자라고 하면 공허한 담론이 돼요. 그런 게 뭘로 가느냐? 우리는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도 책에서 그런 얘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적어도 서구과학의 끝까지, 꼭 상 받는 걸로 기준을 삼을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열댓 명 나왔다, 그 다음에 신과학을 얘기한다는 건 말이 되는데 아직까지 우리가 수입한 서구과학이라는 것이 많은 부분 미흡하잖습니까? 그런데 저쪽에서 ‘서구과학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동양으로’ 하니까 가보지도 않고서 ‘동양 뭐?’하면 공허한 얘기가 되는 거예요. 노는 마당이 같은 차원에서 얘기돼야지만, 즉 문제 자체, 현실 자체가 다른 상황에서 내 현실이 아닌데 아무리 고민해봤자 영양가가 없다는 거죠. 따라서 지금 여기서 하는 얘기는 그동안 해석한 노자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잘못됐다가 아니라, 제대로 그런 문제를 사유하기 위해서. 단순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서 연구를 할 때, 예를 들면 칸트를 통해 개발 받을 수 있는 분야가 강점이라고 하면 칸트를 파야죠, 그런데 칸트가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를 백 년이고 이백 년 파봐야 나올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까? 철학자마다 시대마다 자기가 실험했던 대상과 문제가 다른데, 노자가 만병통치약으로 회자되는 한 노자에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노자가 주로 고민했지만, 지금까지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커다란 부분을 제대로 확인하고 끌어와야죠. 노자를 하기로 했지만, 노자라는 텍스트를 별로 안 좋아해요. 제가 공부한 과정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노자는 얼마나 노자가 안 좋은 책이었길래 수많은 유학자들이 좋은 책으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의 역사를 갖고 있는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