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알라딘: 김용옥, 노자: 길과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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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용옥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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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생물과, 철학과, 한국신학대학 신학과에서 수학하고 대만대학, 동경대학에서 철학석사학위를 받고, 하바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다시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 6년의 학부수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고려대학, 중앙대학, 한예종, 국립순천대학교, 연변대학, 북경대학, 사천사범대학 등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제자를 길렀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등 90여 권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베스트셀러들을 통해 끊임없이 민중과 소통하여 왔으며 한국역사의 진보적 흐름을 추동하여왔다. 그는 유교의 핵심 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와 <효경>의 역주를 완성하였으며, 그의 방대한 중국고전 역주는 한국학계의 기준이 되는 정본으로 평가된다. 그의 <중용>역주는 중국에서 번역되어(海南出版社) 중판을 거듭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신학자로서도 권위 있는 성서주석서를 많이 저술하였고, 영화, 연극, 국악 방면으로도 많은 작품을 내었다. 현재는 우리나라 국학國學의 정립을 위하여 한국의 역사문헌과 유적의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 또 계속 진행되는 유튜브 도올TV의 고전 강의를 통하여 그는 한국의 뜻있는 독서인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저서, <우린 너무 몰랐다>,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금강경 강해(개정신판)>,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노자가 옳았다>는 모두 그의 새로운 국학의 여정을 예고하는 역작들이다. 접기


최근작 : <동경대전 2>,<동경대전 1>,<노자가 옳았다> … 총 9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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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동경대전 2>,<동경대전 1>,<이성의 기능>등 총 110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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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2014-07-27 공감 (0) 댓글 (0)





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올린 글에서 '공부와 학습'에 관련된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이미지-버전으로 올린다. 이 또한 오프라인용 글쓰기를 위한 '베이스캠프'이다. 당시 글을 쓴 계기는 북매거진 <텍스트>에 실린 한 서평이었지만, 몇 호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호 <텍스트>에는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 창, 2004)에 대한 서평도 실려 있었는데(서평자도 쓰고 있지만, 이 책이 ‘최초의 평전’이라는 건 다소 믿기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가?), 백범의 '나의 소원' 중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언제 읽어도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 대목을 옮겨본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반 세기도 더 전의 글이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불행한 것은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보다 근본적인 건 계급적 적대인가?). 그런데 그걸 키워줄 수 있는 건 자연과학이 아니라(예컨대, 인간복제가 아니라) 문화이고 문화의 힘이다(그렇다면, 백범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이 아니라 ‘문화’이다. 우리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독서문화이고 출판문화이다(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 ‘문화’가 아니다. 날림출판은 문화가 아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즐거움의 향유는 사실 유교적 전통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알다시피 공자의 어록인 <논어>는 즐거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지 않는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여기서 ‘익히다’란 말은 (1)(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기 위해) 암기/습득하다 (2)(생활 속에서) 실천하다 등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러시아어 번역은 이 대목을 “배우고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옮기고 있다(세메넨코의 번역). 러시아어본에 따를 때, 군자(君子)란 ‘자기완성’의 인간이고, 유교는 자기완성을 위한 종교이다. 문제는 무엇이 ‘완성’인가라는 점. 무엇이 배움의 완성이고 자기완성인가?



열심히 사서삼경(혹은 육법전서)을 암기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시에 패스하는 것이 배움의 완성인가? 그건 어떤 단계(혹은 집안의 부흥)를 뜻할 수는 있을지언정 ‘완성’으로는 좀 모자라 보인다(요즘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고시도 ‘자격증화’되었다고 하니까).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막연하다(사실 막연하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익힌다’는 말을 보다 적극적/구체적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비록 공자가 ‘학이시교지(學而時敎之)’라고 말하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교(敎)’자는 너무 딱딱하긴 하다). 왜냐하면, 배움의 완성은 가르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논리인데, 군자의 모델로서의 공자야말로 (자신이 배운/터득한 걸) 가르치는 사람 아닌가? 더불어 실습(實習), 즉 실제로/진짜로 배운다는 건 무엇인가? 자신이 배운 걸 해보는 것인바, 교사들의 ‘교생 실습’이란 자신이 배운 걸 실제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걸 말한다.














직접 가르쳐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배운 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군자가 된다. 즉, ‘자왈(子曰)’ 이전에는 공(孔)선생도 군자도 없는 것이다(군자이기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에 군자이다). 이것이 배움의 변증법이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가르침으로써이다(가르칠 수 없는 앎은 완성된 앎이 아니다). 그러니까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곧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이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동무’란 말처럼 북한에서 너무 자주 쓰기 때문일까? 그래서 ‘동무’ 대신에 ‘친구’를 갖게 됐듯이, 우리는 주로 ‘학습’하는 대신에 ‘공부’하는 것일까?).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는 ‘비변증법적’이다(거기에 대비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유물변증법 ‘학습’일 것이다).



























변증법적인 ‘학습’의 ‘배우다-가르치다’란 의미쌍을 조금 확장하면(물론 '가르치다-배우다'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이지만 여기서는 거기까지 나가진 않도록 하겠다), ‘얻다-베풀다’가 될 것이다(배움은 얻음이고, 가르침은 베풂이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 것은 무엇을 베풂으로써이다. 그리고, 그것은 덕(德)이란 말이 진정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베풂으로써 덕을 쌓는 것이니까 말이다(김용옥은 ‘덕(德)’을 ‘얻음’으로 옮긴다).



그러한 사정은 ‘읽다-쓰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혹은 책을) 씀으로써이다(지젝은 라캉에 대해 계속 씀으로써 비로소 라캉을 읽는다. 즉, 읽기 위해서 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 사이의 바르트식 구별은 사소하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이어야 하며, 그리고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렇다.



<도덕경>에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나오는데(이 ‘대기만성’은 ‘인과응보’와 함께 중학생때 교내 가훈전시회를 위해서 급조해낸 우리집 가훈이었다. 사자성어 사전에서 뜻이 좋다고 골라낸 것인데, 그 ‘인과응보’에 나는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대기만성’이라나!), 그 뜻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이다(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크지 않다!). 즉, 큰 그릇이란 무한을 가리킨다. 아무리 큰 유한도 무한보다는 작기 마련이기에 가장 큰 유한이란 곧 무한인 것. 해서, “큰 그릇의 바깥은 없다!” 공자가 말하는 성인, 곧 군자도 마찬가지이다.





군자란 완성된 인간이지만, 그 자기완성이란 건 미래완료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정 완성된 인간(=가장 큰 유한)이란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인간(=무한)이다. 그래서 ‘자왈’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사르트르)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해서, 앙가주망은 그런 자동사적 글쓰기와 대립/모순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부른바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다소 상식적인) “컨텍스트의 바깥은 없다”와 등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텍스트-무한은 곧 컨텍스트 아닌가?)
























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란 ‘즐거운 계몽주의’이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교양의 양생(養生)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그것이 한편으론 시인 이성복의 말을 빌자면(그는 한동안 경전 공부를 했었다), ‘세상과의 연애’이다: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 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앞도 뒤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세월 속에서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 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은 것입니다.” (이성복, '세상과의 연애')

물론 매일같이 읽고 쓰는 우리의 ‘공부’, 혹은 ‘학습’이 당장에 좋은 세상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백범의 표현을 빌면,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은 데리다의 ‘민주주의’만큼이나, 혹은 ‘메시아’만큼이나 더디게 (하지만 언젠가는 예기치 않게) 올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울음’ 또한 당장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詩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이성복, '아들에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작부들과 물수건과 속쓰림은 또 그 나름대로 자동사이다. 울음이 그러하듯이. “한 여인이 웬 서류 봉투를 손에 쥐고 흐느끼며, 흐느껴 울며 갔다 콸콸대는 물소리 같은 울음을 거푸 울며 여러 번 길을 건너갔다 아무한테도 그 울음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세상 끝까지 울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듯이 울며 갔다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 꽃핀 벚나무의 검은 가지처럼 검은 길을 그 울음으로 적시며”(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7')

우리는 그렇듯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에 대해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면서 다만 기다려볼 따름이다. 배우고 가르치고 베풀면서 고대해볼 따름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날을. 하지만 그때의 “가장 아름다운 나라”는 “가장 큰 나라”와 마찬가지로 경계와 구별이 없는 나라일 것이니, 세계 자체와 등가일 것이다(우리나라=세계). 우리 나라도 너네 나라도 없는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진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초월론적 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 매일같이 변기에 물을 갖다 부으면서, 세상을 밥 먹듯이 구원하면서, 읽고 쓰고 떠들면서, 속쓰림을 참아가면서, 사랑하면서 실연하면서, 가끔은 못살겠다고 도망치면서, 저항하면서 이를 갈면서, 이빨을 갈면서, 즐겁게 아주 즐겁게…



06.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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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2 공감 (5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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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도올 김용옥 13경 번역작업.




지금 박상익 교수가 번역한 책을 읽고 있다.
'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쉽지 않은 역사서지만, 매끄러운 번역에 감사하며 읽고 있다.

박상익 교수가 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책이 있어 쭉 살펴보았다.

국내외 번역의 현주소와 나름대로의 제안을 내놓았다.

우선 중국은 서역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일본은 메이지유신 시대 서양의 장점을 흡수하기 위해서 번역하면서
그 나라 학문연구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서유럽도 이슬람 점령지를 재탈환하면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 문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번역경시 풍조에 대해서도 말한다.

1. 번역은 학문성과로 인정받지 못함
2. '매춘교수' 또는 '기지촌교수'들의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주어 취합한 날림 번역의 문제
3. 번역료의 문제 : 원고지 1장당 1,300원 정도의 헐값

위 문제들은 1985년도에 출간된 도올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으로, 박상익 교수도 도올 김용옥을 계속해서 인용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서유럽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 문명을 통해 받아들였다는 부분이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슬람 문명이 발전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이슬람 문명에 의해 번역되어 흡수, 발전되었고,
나중 서유럽이 이슬람 점령지를 재탈환할 때 발견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 문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게 되었고, 그 결과 르네상스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상익 교수의 말대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지금의 '잃어버린 100 년'이
'잃어버린 200 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 많은 번역가들의 노고를 날로 받아먹는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스, 로마 고전의 원전을 번역하고 있는 천병희, 강대진 교수와
이 책을 쓴 서양사 부문의 박상익 교수,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도올 김용옥 선생님

이 분들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수상한 시절을 헤쳐나갈 수 있는 해답은
인문학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인문학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번역가들이 인정받는 시대도 곧 올 것이다.



- 도올 김용옥 번역 작업 리스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1985) - 번역의 문제제기
화이트헤드 : 이성의 기능(1998)
금강경강해(1999)
노자 도덕경 : 길과 얻음 (2000)
요한복음강해(2007)
큐복음서(2008)
논어한글역주(2009)
효경한글역주(2009)

도올 김용옥 비판서들 중에 학문적 성과를 예로 들면서,
아직까지 제대로 이룬 것이 않느냐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여럿인데,
이 사람들은 위에 말한 대로 번역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강의하실 때
자기 소원이 13경을 번역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작업에 돌입하신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끝까지 완수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 13경
<주역><서경><시경><주례><예기><의례><춘추좌씨전><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논어><효경><이아><맹자>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
민족문화추진위에서 고전 국역사업을 계속해서 진행하는 중이다.
역사 좋아하는 분들은 위에서 모든 국역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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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튼 2009-11-04 공감 (2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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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배

노자, 길과 얻음/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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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24. 15:48

 이웃추가

1.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생이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앞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 뭇 묘함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

 

2.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됨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못생김이다.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좋음의 좋음됨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좋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친하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은 지어지면서도 잔소리 아니하고 낳으면서도 가지려 아니하고 하면서도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살 생각 아니한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 생각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3.
현명한 이를 숭상치 말라! 백성들로 다투게 하지 말지어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말라! 백성들로 도둑이 되게 하지 말지어다. 욕심낼 것을 보이지 말라! 백성들로 그 마음이 어지럽게 하지 말지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게 하고, 그 뜻을 부드럽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 늘 백성으로 앎이 없게 하고 바램이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함이 없음을 알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4.
길은 빔으로 가득하니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도다. 그윽하도다! 온갖 것의 으뜸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는도다. 맑고 맑도다! 있는 것 같도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네. 상제보다도 앞서는 것 같네.

 

5.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온갖 것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어질지 않다. 백가지 성의 사람들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같고 대피리같도다. 속은 비었는데 구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오는도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다.

 

6.
골의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 한다. 가믈한 암컷의 아랫문은 바로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어 있는 것 같도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곡신(谷神)이란 골짜기 가운데의 빈 곳이다. 형태나 그림자가 없고, 거스르거나 어기지 않으며, 낮은 곳에 처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함을 지켜 시들지 않으니, 만물이 그것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되 그 형상을 보이지 않으니 지극한 존재다. 낮은 곳에 처하면서 고요함을 지키고 있어 이름을 지을 수가 없으므로 현빈(玄牝)이라고 부른다. 문이란 현빈이 말미암는 곳이다. 그 말미암는 바의 근본은 태극과 더불어 한 몸이므로 천지의 근본이라고 부른다. 있다고 말하려고 하니 그 형상을 볼 수 없고, 없다고 말하려고 하니 만물이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므로 '겨우겨우 이어진다'고 했다 모든 사물을 이루어 주면서도 힘들지 않으므로 '쓰는 데 힘들이지 않는다'고 한다.(왕필주석)

 

7.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너르고 또 오래 갈 수 있음은, 자기의 삶을 조작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 아닌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8.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도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길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짐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다스림을 좋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함을 좋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도다.

 

9.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때에 그침만 같지 못하다. 갈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을 가득 채우면 그를 지킬 길이 없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10.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 능히 떠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기를 오로지 하고 부드러움을 이루어 능히 갓난아기가 될 수 있겠는가? 가믈한 거울을 깨끗이 씻어 능히 흠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롭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밝고 또 밝아 사방을 비추면서 능히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길은 생겨나고 덕은 쌓아가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란 것을 지배치 않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네.

 

※움직이는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기운을 모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와 같게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때를 깨끗이 닦아내어 흠 하나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꾀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자연이 변화하는 대로 저절로 따를 수 있겠는가? 사방을 환히 알면서도 작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낳아주고 길러주며,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일을 하지만 뽐내지 않으며 길러주지만 부리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 한다.(임채우)

 

11.
서른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머리에 모인다. 그 바퀴머리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가 됨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12.
다섯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다섯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말 달리며 들사냥질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감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상(爽)은 어긋나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입의 기능을 잃게 하므로 '상'이라고 했다. 저 귀 눈 입 마음은 모두 그 타고난 본성에 따라야 하는 것인데, 성명(性命)에 따르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그러함을 해치기 때문에 눈 멀고 귀 먹고 입맛 버리고 미친다고 했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바른 길을 막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요상한 행동을 하게 한다고 했다. 배를 위한다는 것은 사물로 자신을 기르는 것이고, 눈을 위한다는 것은 사물에 의지해 자기가 부림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눈을 위하지 않는다.(왕필주석)

 

13.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사람은 항상 욕이 되기 마련이니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요,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한 것이다.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나에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나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르르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자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14.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荑)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미(微)라 한다. 이희미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아니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하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것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없는 모습이요 것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를 일컬어 홀황하다 하도다. 앞에서 맞아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를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의 길을 잡어 오늘의 있음을 몬다. 능히 옛 시작을 아니 이를 일컬어 길의 벼리라 한다.

 

※(도는)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소리도 없고 메아리도 없으므로,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고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더 이상 나의 귀 눈 몸으로는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캐물을 수 없고, 섞여서 하나이다. 없다고 말하려고 하니 사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려 하니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모양이 없는 모양이며, 사물이 없는 형상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황홀이라고 이른다.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이 만물의 근본이다. 비록 지금과 옛날이 같지 않고 때가 바뀌고 풍속이 변했지만, 참으로 모두 이(무형무명의 도)에 말미암아 치세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옛날의 도를 가지고 지금의 일들을 다스릴 수 있다. 아득한 옛날이 비록 멀지만 그 도는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지금에 있어도 옛날의 시원을 알 수 있다.(왕필주석)

 

15.
옛부터 길을 잘 실천하는 자는 세미하고 묘하며 가물하고 통한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이 없다. 대저 오로지 헤아릴 길이 없기에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한다. 머뭇거리네. 겨울에 살얼음 내를 건너는 것 같고. 쭈물거리네. 사방의 주위를 두려워 살피는 것 같고.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 흩어지도다. 녹으려 하는 얼음과 같다. 도탑도다. 그것이 질박한 통나무 같고. 텅 비었도다. 그것이 빈 계곡과 같네. 혼돈스런 모습이여. 그것이 흐린 물과도 같도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천천히 움직여서 온갖 것을 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길을 보존하는 자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채우려 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새로이 이루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 도를 얻은 이는 미묘하고 그윽히 통달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지만 억지로 말해보자면 마치 살언 겨울강을 건너듯 조심하고,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경계하듯 신중하며, 찾아온 손님처럼 엄숙하다가도, 얼음이 녹듯이 푸근하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질박하며, 계곡같이 비고, 혼탁한 듯 세속에 섞여 있다. 누가 능히 혼탁하게 섞여있음으로써 천천히 맑게 할 수 있겠으며, 누가 능히 가만히 놓아둠으로써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그득 채우려고 하지 않으니, 무릇 채우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덮어둘 뿐 새로 만들지 않는다.(임채우)

 

16.
빔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 대저 온갖 것은 풀처럼 쑥쑥 자라지만 모두가 결국에는 각기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것을 또 일컬어 제명으로 돌아간다 한다. 제명으로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을 짓는다. 늘 그러함을 알면 온갖 것을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고 공평하면 천하가 귀순한다. 천하가 귀순하면 하늘에 들어맞고, 하늘에 들어 맞으면 길에 들어 맞는다. 길에 들어 맞으면 영원할 수 있다. 위태롭지 아니하다.

 

※완전히 비우고 아주 조용함을 지키라. 만물이 다 함께 자라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되돌아감을 보나니, 저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기 그 뿌리로 다시 되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고요해지니 이를 일러 명(命)을 회복한다고 하고, 명을 회복하면 영원하게 되며 영원함을 알면 밝다고 하나니, 영원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게 흉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영원함을 알면 통하게 되니, 통하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왕이 되고, 왕이 되면 하늘과 같게 되고, 하늘과 같으면 도를 얻게 되며, 도를 얻으면 오래갈 수 있으니, 평생 위태롭지 않게 된다.(임채우)

 

17.
가장 좋은 다스림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친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한 곳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그윽하도다! 다스리는 자는 그 말을 귀히 여기는 도다. 공이 이루어지고 백가지 성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일컬어 나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고 하는도다!

 

18.
큰 길이 없어지니깐 어짐과 옳음이 있게 되었다. 슬기로움이 생겨나니깐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육친이 불화하니깐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있게 되었다. 국가가 어지럽게 되니깐 충신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19.
성스러움을 끊어라. 슬기로움을 버려라. 뭇사람의 이로움이 백배할 것이다. 어짐을 끊어라. 옳음을 버려라. 뭇사람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다. 교사스러움을 끊어라. 이로움을 버려라.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 셋은 문명의 장식일 뿐이며 족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돌아감이 있게 하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을지니 사사로움을 적게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20.
배움을 끊어라. 근심이 없을지니. 네와 아니요가 다른 것이 얼마뇨? 좋음과 싫음이 서로 다른 것이 얼마뇨? 사람이 두려워 하는 것을 나 또한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으리. 황량하도다! 텅 빈 곳에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네. 뭇사람들은 희희낙낙하여 큰 소를 잡아 큰 잔치를 벌리는 것 같고, 화사한 봄날에 누각에 오르는 것 같네. 나 홀로 담담하도다. 그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아니함이 웃음 아직 터지지 않은 갓난 아기 같네. 지치고 또 지쳤네.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왜 나홀로 이다지도 부족한 것 같은가? 내 마음 왜 이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혼돈스럽도다. 세간의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 홀로 흐리멍텅할 뿐일세. 세간의 사람들은 잘도 살피는데 나 홀로 담담할 뿐일세. 담담하여 바다같이 너르고, 거센 바람 일 때는 그칠 줄을 모르네. 뭇사람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 홀로 완고하고 비천하여 쓸모가 없네. 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온갖 것을 먹이는 엄마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21.
빔의 덕의 포용만을 오로지 길은 따를 뿐이다. 길의 것됨이 오로지 황하고 오로지 홀하다. 홀하도다 황하도다! 그 가운데 모습이 있네. 황하도다 홀하도다! 그 가운데 것이 있네. 그윽하고 어둡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네. 그 정기가 참으로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아니하니 이로써 뭇 처음을 살필 수 있지. 뭇 처음의 모습을 어찌 알랴! 이 길로 알 뿐이지.

 

22.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파이면 고이고, 낡으면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고, 많으면 미혹하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하나를 껴안고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니 밝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니 빛난다. 스스로 뽐내지 않으니 공이 있고, 스스로 자만치 아니하니 으뜸이 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 아래 그와 다툴 자가 없다. 옛말에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진다 한 말이 어찌 헛말일 수 있으랴! 진실로 온전할지니 길로 돌아갈지어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곡즉전 왕즉직, 와즉영 폐즉신, 소즉득 다즉혹)

 

23.
말이 없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이렇게 오래갈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서랴! 그러므로 길을 따라 섬기는 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길을 구하는 자는 길과 같아지고 얻음을 구하는 자는 얻음과 같아지고, 잃음을 구하는 자는 잃음과 같아진다. 길과 같아지는 자는 길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얻음과 같아지는 자는 얻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겨이 얻으리. 믿음이 부족한 곳에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말은 적은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사나운 바람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퍼붓는 소나기는 하루를 다하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천지다. 천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이는 도와 동화되고, 덕을 추구하는 이는 덕과 동화되며, 잃을 일을 좇는 자는 잃어 버리게 된다. 도와 하나가 되면 도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덕과 같아지면 덕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를 잃는 일에 같이 하면 바로 잃어 버리게 되니, 믿음직스럽지 못하므로, 불신이 있다.(임채우)

 

24.
발꿈치를 올리고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 옳다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길에 있어서는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살이라 한다. 세상은 그것을 혐오할 것이다. 그러므로 길이 있는 자는 처하지 아니하리니.


25.
혼돈되이 이루어진 것이 있었으니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겼다. 적막하고 모습이 없네. 쓸쓸하도다. 짝없이 외로이 서서 함부로 변하지 않는다. 가지 아니하는 데가 없으면서도 위태롭지 아니하니 가히 하늘 아래 어미로 삼을만 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해, 그것을 글자로 나타내어 길이라 하고, 억지로 그것을 이름지어 크다고 하네. 큰 것은 가게 마련이고, 가는 것은 멀어지게 마련이고, 멀어지는 것은 돌아오게 마련이네. 그러므로 길은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의 주인 또한 크다. 너른 우주 가운데 이 넷의 큼이 있으니 사람이 주인이 그 중의 하나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을 본받는데, 길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을 뿐이다.

 

※서(逝)는 가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두루 돌아다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서'라고 했다. 원(遠)은 끝닿는 것이다. 두루 다니면서 끝까지 가지 않은 바 없어서, 한쪽으로만 치우쳐 가지 않으므로 멀어진다고 했다. 가는 바대로 따르지 않고, 그 몸은 우뚝 서 있으므로(즉 도는 독립해 있으므로) '반(反)'이라고 했다.(왕필주석)

 

26.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안정한 것은 조급한 것의 머리가 된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종일 걸어다녀도 무거운 짐을 내려 놓지 않고, 비록 영화로운 모습이 보이더라도 한가로이 처하며 마음을 두지 않는다. 어찌 일만수레의 주인으로서 하늘 아래 그 몸을 가벼이 굴릴 수 있으리요? 가벼이 하면 그 뿌리를 잃고, 조급히 하면 그 머리를 잃는다.

 

27.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좋은 말은 흠이 없다.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잘 맺는 자는 끈을 쓰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늘 사람을 잘 구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늘 사물을 잘 구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잇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며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아니하면,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요체라 한다.

 

28.
그 수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계곡이 된다. 하늘 아래 계곡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떠나질 아니하니 다시 갓난아기로 되돌아 간다. 그 밝음을 알면서도 그 어둠을 지키면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하늘 아래 모범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어긋나질 아니하니 다시 가없는데로 되돌아 간다. 그 영예를 알면서도 그 굴욕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골이 된다. 하늘 아래 골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이에 족하니 다시 질박함으로 되돌아 간다. 통나무에 끌질을 하면 그릇이 생겨난다. 성스러운 사람이 이 그릇을 써서 세상의 제도를 만들고 따라서 그 우두머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큰 다스림은 자르지 않는 것이다.

 

※수컷은 앞서는 성질을 가진 분류이고, 암컷은 뒤쳐지는 붙이다. 세상에서 앞서려고 하면 반드시 뒤쳐지게 됨을 알기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에 두지만 앞서고, 계곡은 사물을 부르지 않지만 사물이 스스로 돌아가고, 어린아이는 꾀를 쓰지 않지만 저절로 자연의 지혜에 합치한다... 크게 짓는다는 것은 천하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 것이므로 자르지 않는다.(왕필주석)

 

29.
천하를 먹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를 보면 나는 그 먹지 못함을 볼 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도무지 거기다 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는 자는 패할 것이요, 잡는 자는 놓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물의 이치는 앞서 가는 것이 있으면 뒤 따라가는 것이 있고, 들여 마시는 것이 있으면 내 뿜는 것이 있고, 강한 것이 있으면 여린 것이 있고, 작게 꺽이는 것이 있으면 크게 무너지는 것이 있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극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한 것을 버리고 과분한 것을 버린다.

 

※만물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성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따를 수는 있어도 작위할 수는 없고, 통할 수는 있어도 붙잡을 수는 없다. 사물에는 일정한 본성이 있는데 (억지로) 작위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사물은 오고 가는데(즉 자기 나름대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붙잡으려하기 때문에 필히 놓치게 된다.(왕필주석)

 

 30.
길을 가지고 사람의 주인을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를 강하게 하지 않는다. 무력의 댓가는 반드시 자기에게 되돌아 오기 마련이다. 군대가 처한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겨나고, 대군이 일어난 후에는 반드시 흉해가 따른다. 부득이 해서 어려움을 잘 구해줄 뿐이지 무력으로 남을 취하지 않는다. 좋은 성과가 있어도 자고치 아니하며 좋은 성과가 있어도 뽐내지 아니하며 좋은 성과가 있어도 교만치 아니한다.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단지 부득이해서 그러했을 뿐이니, 성과를 올렸다고 해서 강함을 나타낼려 하지마라. 모든 사물은 강장하면 할수록 일찍 늙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길답지 아니하다고 한다. 길답지 아니하면 일찍 끝나버릴 뿐이다.

※장(壯)은 무력으로 사납게 일어나는 것이니, 군사로 천하에 강포함을 비유한 것이다. 사나운 바람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를 다하지 못하므로, 사납게 일어난 것은 반드시 도에 맞지 않으므로 일찍 그친다.(왕필주석)

 

31.
대저 아무리 정교한 병기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것을 혐오할 뿐이니 그러므로 길이 있는 자는 그것에 처하지 않는다. 덕을 갖춘 사람은 평상시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전쟁시에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무기란 것은 도무지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며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부득이 해서 그것을 쓸 뿐이다. 전쟁의 결과에 대해선 항상 담담초연한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개가를 올려도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일 뿐이다. 대저 살인을 즐기는 자가 어떻게 하늘 아래 뜻을 얻을 수 있겠는가? 고례에 길사때에는 왼쪽을 높은 자리로 하고 흉사 때에는 오른쪽을 높은 자리로 하는 법이다. 부관장군은 왼쪽에 자리잡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잡는다. 이것은 곧 상례로써 전쟁에 처하란 말이다. 사람을 그다지도 죽였으면 애통하는 마음으로 읍할 것이다. 전쟁엔 승리를 거두어도 반드시 상례로써 처할 것이다.

 

32.
길은 늘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지만 하늘 아래 아무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 제후 제왕이 능히 이 길을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스스로 질서 지워질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면 단 이슬이 내리듯이, 백성들은 법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제 질서를 찾는다. 스스로 그러함에 제동을 걸어 비로소 이름이 생겨난 것이니, 이름이 이미 생겨난 연후에는 대저 또한 그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침을 알아야 위태롭지 아니할 수 있다. 길이 하늘 아래 있는 것은 온갖 계곡의 시내들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33.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아는 자야 말로 밝은 것이다.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 말로 강한 것이다. 족함을 아는 자래야 부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래야 뜻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자리를 잃지 않는 자래야 오래 가는 것이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래야 수하다 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꾀를 쓰는 것은 그 꾀를 자신에게 쓰는 것만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힘을 쓰는 것은 그 힘을 자신에게 쓰는 것만 못하니, 스스로에 밝으면 사람들이 그를 피하지 않고(혹은 다른 사람들도 밝게 알 수 있고) 자신에게 힘을 쓰면 다른 사물을 고칠 필요가 없다.(왕필주석)

 

34.
큰 길은 범람하는 물과도 같다. 좌로도 갈 수 있고 우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이 이 길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데도 그 길은 잔소리 하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름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만물을 입히고 먹이면서도 주인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다. 늘 바램이 없으니 작다고 이름할 수도 있다. 만물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가는데 주인노릇을 하지 않으니 크다고 이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5.
큰 모습을 잡고 있으면 천하가 움직인다. 움직여도 해를 끼치지 않으니 편안하고 평등하고 안락하다. 아름다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손을 멈추게 하지만, 길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도무지 담담하여 맛이 없다. 그것을 보아도 보기에 족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들어도 듣기에 족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써도 쓰기에 궁함이 없다.

 

36.
장차 접을려면 반드시 먼저 펴주거라. 장차 약하게 할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 주거라. 장차 폐할려면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해주거라. 장차 뺏을려면 반드시 먼저 주거라. 이것을 일컬어 어둠과 밝음의 이치라 하는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게 마련이니라. 물에 사는 고기는 연못을 튀쳐나와서는 아니 되나니, 나라의 이로운 기물은 사람에게 보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將欲廢之, 必固興之(장욕폐지 필고흥지)

 

※강압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을 제거하려고 하면 마땅히 이 네가지로써 해야 한다. 이는 사물의 본성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해치게 하는 것이니, 형벌을 빌리는 것을 능사로 삼아 사물을 해치지 않으므로 '미명(微明)'이라고 한다. 충분히 펴고 흡족하게 해주었는데도 다시 펴려고 하면 여러 사람들에게 빼앗김을 당하게 되지만, 이와는 달리 상대에게 부족하게 펴주어서 다시 더 펼침을 구하게 하면 오히려 상대에게 보탬이 되고 자신은 위태로워진다.(왕필주석)

 

37.
길은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제후와 제왕이 만약 이를 잘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장차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누가 교화한다고 무엇을 하려 한다면 나는 그 놈을 이름도 없는 통나무로 때려 눕힐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는 대저 또한 욕망이 없을지니, 바램이 없어 고요하면 하늘 아래 인간세가 스스로 질서를 찾아갈 것인지.

 

※道常無爲, 而無不爲(도상무위 이무불위)

 

38.
윗덕은 덕스럽지 아니하다. 그러하므로 덕이 있다. 아랫덕은 덕스러우려 애쓴다. 그러하므로 덕이 없다. 윗덕은 함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서 함이 없다. 아랫덕은 함이 있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한다. 세속에서 말하는 좋은 어짐은 함이 있으되 무엇을 가지고서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좋은 옳음은 함이 있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한다. 좋은 예법은 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팔꿈치를 잡아 내동갱이 친다. 그러므로 길을 잃어버린 후에나 덕을 얻는 것이요, 덕을 잃어버린 후에나 어짐을 얻는 것이요, 어짐을 잃어버린 후에나 옳음을 얻는 것이요, 옳음을 잃어버린 후에나 예법을 얻는 것이다. 대저 예법이란 것은 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믿음의 엷음이요 모든 어지러움의 머리다. 시대를 앞서 간다 자처하는 자들이야말로 길의 허황된 꽃이요, 모든 어리석음의 시단이다. 그러하므로 어른스러운 큰사람은 그 도타움에 처하지 그 잃음에 살지 아니한다. 그 열매에 처하며 그 꽃에 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부실덕 시이무덕)

 

※상덕은 덕스럽지 않으니 그래서 덕이 있고, 하등의 덕은 덕을 잃으려 하지 않으니 그래서 덕이 없다. 상등의 덕을 지닌 사람은 무위하여 의도를 가지고 작위하지 않고, 하등의 덕을 지닌 사람은 작위하되 일부러 한다. 상등의 인은 작위하지만 일부러 하지는 않고, 상등의 의는 작위하면서 일부러 하며, 상등의 예는 자기의 행위에 응답이 없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시킨다. 그러므로 도를 잃어 버린 후에야 덕이 있고, 의를 잃어 버린 후에야 인이 있으며, 인을 잃어 버린 후에야 의가 있고, 의를 잃어 버린 후에야 예가 있으니, 저 예라는 것은 충직스러움이 사라지고 혼란으로 가는 시초이다. 남보다 앞서서 안다는 것은 도의 꽃, 즉 화려함이면서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래서 대장부는 후덕하게 행동하고 각박하지 않으며, 그 열매에 처하고 꽃에 머물지 않으므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이다.(왕필주석)

 

39.
옛날에 하나를 얻은 사람들은 그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이치에 도달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말갛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코, 하늘의 기운은 하나를 얻어 신령하고, 땅의 골은 하나를 얻어 빔으로 차고, 만가지 것은 하나를 얻어 생겨나고, 제후와 제왕은 하나를 얻어 하늘 아래를 평안히 다스린다. 이는 모두 하나로써 이룰 뿐이다. 하늘은 하나로써 맑지 못하면 갈라질 것이요, 땅은 하나로써 편안치 못하면 짜개질 것이요, 하늘의 기운은 하나로써 신령치 못하면 가물 것이요, 땅의 골은 하나로써 비어차지 못하면 마를 것이요, 만가지 것은 하나로써 생겨나지 못하면 멸할 것이요, 제후와 제왕은 하나로써 고귀하지 못하면 실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으로 뿌리를 삼고, 높음은 낮음으로 바탕을 삼는다. 그러므로 제후와 제왕은 늘 스스로를 일컬어 고독한 사람이라 하고 부족한 사람이라 하고 불곡한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함으로 뿌리를 삼는다 함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주 가마를 타는 것은 가마를 아니타니만 못하다. 녹녹하여 옥석같이 빛나기를 삼가고 낙낙하여 보석같이 빛나기를 삼가라.

 

※일은 숫자의 시초이자 사물의 궁극점이다. 각각의 사물들은 일이 낳은 것이니 일이 만물의 주가 된다. 사물은 모두 각각 이 하나를 얻어서 만들어지니, 만들어진 뒤에는 하나를 버리고 만들어진 데에 거한다. 만들어진 데 거하면 그 근원, 즉 하나를 잃게 되므로, 갈라지고 흔들리고 없어지고 말라버리고 소멸되고 쓰러진다.(왕필주석)

 

40.
그 반대로 되돌아 가는 것이 길의 늘 그러한 움직임이다. 약한 것은 길의 늘 그러한 쓰임이다. 하늘 아래 만가지 것들이 있음에서 생겨났는데,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도다.

 

41.
훌륭한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열심히 그를 실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중간치기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긴가민가 할 것이다. 그런데 하치리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깔깔대고 웃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치리들이 웃지 않으면 내 길은 길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전해 오는 말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밝은 길은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것 같고,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것 같고, 윗덕은 아랫 골 같고, 큰 결백은 욕된 것 같고, 너른 덕은 부족한 것 같고, 홀로 서 있는 덕은 기대 있는 것 같고, 질박한 덕은 엉성한 것 같다. 큰 사각은 각이 없으며, 큰 그릇은 이루어 진 것 같지 않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습은 모습이 없다. 길이란 늘 숨어 있다. 길이란 늘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 대저 길처럼 자기를 잘 빌려 주면서 또한 남을 잘 이루게 해 주는 것이 있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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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像無形(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덕약곡, 태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투,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큰 도는 평평하지 않은 것 같고 : 뇌는 깊은 웅덩이이다. 크게 평평한 도는 사물의 본성에 따르기 때문에 사물을 잘라서까지 평평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평평함이 보이지 않으므로 도리어 깊은 웅덩이 같다. 최상의 덕은 아무 것도 없는 골짜기 같고 : 그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아 마음에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흰 것은 때 묻은 듯 하고 : 흰 것을 알되 어두운 것을 지키는 것은 아주 희어야 가능하다. 솔직한 진실은 틀린 것 같고 : 질박한 참모습은 그 참됨을 자랑하지 않으므로 마치 사실과 위배되는 듯하다.(왕필주석)

 

42.
길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는데 셋은 만가지 것을 낳는다. 만가지 것은 어둠을 등에 지고 밝음을 가슴에 안고 있다. 텅빈 가운데 기름 휘젖어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고독과 부족과 불곡인데 제왕과 제공들은 이것들로 자기를 부른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란 덜어내면 보태지고 보태면 덜어지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칠 뿐이다. 모든 강폭한 것은 제명을 살지 못하는 것이니 나는 이것으로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는다.

 

43.
하늘 아래 가장 여린 것이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한 것을 앞달린다. 사이가 없는 곳에 까지라도 아니 들어감이 없다. 나는 이로써 함이 없음의 위대함을 안다. 말하지 아니하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이로움을 하늘 아래 미치는 자가 없다.

 

44.
이름과 내 몸, 어는 것이 나에게 가까운 것이냐? 내 몸과 재화, 어느 것이 더 귀중한 것이냐? 얻음과 잃음, 결국 어느 것이 병이냐? 이 까닭으로 심히 아끼다간 크게 쓰게 되고, 많이 간직하다간 반드시 크게 망하게 되리.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으리. 그리하면 머리가 되고 또 오래 가리.

 

45.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이 보인다. 그 쓰임이 낡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찬 것은 빈 듯이 보인다. 그 쓰임이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고, 크게 정교로운 것은 졸한 것 같고, 크게 말하는 사람은 더듬는 것 같다. 뜀으로 추위를 이기고, 쉼으로 더위를 이기는데, 그래도 쉬어 깨끗함이 하늘 아래 바른 것이다.

 

※大成若缺 其用不弊(대성약결 기용불폐), 大盈若沖 其用不窮(대영약충 기용불궁), 大直若屈(대직약굴), 大巧若拙(대교약졸), 大辯若訥 (대변약눌)

 

46.
하늘 아래 길이 있으면 전장에서 달리는 말도 되돌려 똥구루마를 끌게 하는데, 하늘 아래 길이 없으면 아기밴 암말조차 전장에서 해산을 한다. 족함을 모르는 것처럼 인간에게 큰 화는 없다. 바램을 계속하는 것처럼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족함을 아는 족이야말로 늘 족한 것이다.

 

47.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를 알고 창밖을 내다 보지 않아도 하늘의 길을 본다. 나갈수록 멀어지고, 알수록 적어진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다니지 아니하여도 알고, 드러내지 아니하여도 드러나고, 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문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문을 엿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不出戶 知天下) : 사물마다 종주(본질과 근원) 되는 것이 있으니, 길은 다르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고, 생각은 갖가지이나 이르는 곳은 하나다.(왕필주석)

 

48.
세상이 말하는 배움을 하면 매일 불어난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길을 하면 매일 줄어든다. 줄고 또 줄어들어 함이 없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함이 없는데까지 이르면 되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하늘 아래를 다스리는 것은 항상 일이 없음으로 하라. 일이 있는데 이르게 되면 하늘 아래를 다스리기엔 부족하리로다.

 

49.
성스러운 사람은 항상스런 마음이 없다. 오로지 백가지 성의 사람들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삼을 뿐이다. 좋은 사람은 나도 그를 좋게 해 주고,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나는 또한 그를 좋게 해 준다. 그러하므로 나의 좋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믿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나는 믿을 뿐이다. 그러하므로 나의 믿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하늘 아래에 임할 때에는 늘 화해롭다. 하늘 아래를 위하여 늘 그 마음을 혼돈되이 한다. 모두 귀와 눈을 곤두 세울 때, 성스러운 사람은 그들을 모두 어린아이로 만든다.

 

50.
삶을 떠나면 죽음으로 가게 마련이다. 삶의 무리가 열에 셋이 있다면, 죽음의 무리도 열에 셋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 움직여 죽음의 땅으로 가는 기회 또한 열에 셋이 있다. 대저 왠 까닭인가? 그 삶을 살려고 하는 발버둥이 너무 후하기 때문이다. 대저 듣건대,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뭍으로 다녀도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지 아니하고, 군대를 들어가도 갑옷을 입거나 병기를 차지 아니한다. 코뿔소가 그 뿔을 드리댈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내밀 곳이 없고, 병기가 그 칼날을 내리 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대저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그 죽음의 땅이 없기 때문이다.

 

51.
길이란 생긴 그대로의 것이다. 덕이란 얻어 쌓는 것이다. 것이란 드러내는 것이다. 세란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가지 것들은 길을 높이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다. 길의 높음과 덕의 귀함은 대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길이란 생긴 그대로의 것이요 덕이란 얻어 쌓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길은 온갖 것을 기르고 자라게 하는가 하면 멈추게도 하고 또 독을 주기도 한다. 또 길러 주고 덮어 감싸주는 것이다. 낳으면서도 자기 것으로 아니하고, 되게 주면서도 거기에 기대지 아니하며, 자라게 하면서도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는 것이다.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도생지 덕축지 물형지 세성지)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생이불유 위이부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사물이 생겨난 후에는 길러지고, 길러진 뒤에는 형체를 이루고, 형체를 이룬 후에는 완성된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가? 도다. 무엇을 얻어 길러지는가? 덕이다. 무엇으로 인하여 모양을 이루는가? 물(物)이다. 즉 사물의 종류에 의해 각자의 형상이 정해진다. 타고난 종류대로 따르기만 하므로 사물은 형체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처해진 형세대로 맡기므로 사물은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무릇 사물이 생겨나는 소이와 공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모두 말미암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말미암는 바가 있다는 것은 결국 도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므로, 끝까지 미루어보면 또한 도에 이른다. 그 인한 바를 따르므로 각자 알맞게 된다.(왕필주석)

 

52.
하늘 아래 시작이 있었다. 그러니 그 시작으로 하늘 아래의 어미를 삼으라! 이미 그 어미를 얻었을진대, 그 아들도 알아야 한다. 이미 그 아들을 알았을진대, 다시 그 어미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면 몸이 없어질 때까지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얼굴의 감정의 구멍을 막고 사타구니의 욕정의 문을 닫아라! 그 몸이 다할 때까지 다함이 없을 것이다. 구멍을 열고, 일로만 바삐 건너다니면, 그 몸이 끝날 때까지 구원이 없을 것이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연약함을 지킬 줄 아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드러내어 다시 그 밝음으로 되돌려라! 네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이 곧 향상됨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53.
나에게 조금만큼의 지혜가 있어서 하늘 아래 큰 길을 행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샛길로 빠질까봐 두려울 뿐이다. 큰 길은 매우 평탄하고 쉬운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하나니, 조정의 뜨락이 심히 깨끗할 때 백성들의 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는 텅텅 비어있다. 정교로운 무늬비단옷을 입고 시퍼런 칼을 띠에 두르고 마시고 먹는 것을 싫도록 하고 가진 재화에 남음이 있는 그자들은 누구인가? 도둑놈이라 하는 것이다! 길이 아닐진대!

 

54.
잘 심는 자의 것은 뽑을 수 없고, 잘 껴안는 자의 것은 뺏을 수 없다. 이 길의 사람들은 자손들이 제사 지내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 그 길을 내 몸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참되며, 그 길을 내 집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남음이 있으며, 그 길을 내 마을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자라며, 그 길을 내 나라에 닦으면 그 덕이 곧 풍요로우며, 그 길을 내 하늘 아래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두루한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써 몸을 볼 것이요, 그 집으로써 집을 볼 것이요, 그 마을로써 마을을 볼 것이요, 그 나라로써 나라를 볼 것이요, 그 하늘 아래로써 하늘 아래를 볼 것이다. 내 어찌 감히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안다고 말하리요? 이 때문일진대!

 

55.
덕을 머금음이 도타운 것은 바알간 아기에 비유될 수 있다. 벌이나 뱀도 그를 쏘지 않고, 맹수도 그에게 덤비지 않고, 날새도 그를 채지 않는다. 뼈가 여리고 근이 하늘한데도 꼭 움켜쥐면 빼기 어려우며, 암수의 교합을 알 까닭이 없는데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로지게 꼴린다. 정기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매일 하루가 다 하도록 울어제키는데 그 목이 쉬질 않는다. 조화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화를 아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늘 그러한 삶에 덧붙이는 것을 요상타 한다.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사물은 강장하면 곧 늙어 버리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길답지 않다고 한다. 길답지 않으면 일찍 사라질 뿐이다.

 

56.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감정의 구멍을 막고, 그 욕정의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엉킴을 풀며, 그 빛이 튀지 않게 하며, 그 티끌이 고르게 되도록 한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고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친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로울 수도 없고, 해로울 수도 없으며, 귀할 수도 없고 천할 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만 하늘 아래 귀하게 되는 것이다.

 

57.
나라를 다스릴 때는 정법으로 하고 무력을 쓸 때는 기법으로 하고 천하를 취할 때는 무사로 하라! 내 어찌 그러함을 알겠는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 아래 꺼리고 피할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이 이로운 기물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나라나 가정은 점점 혼미해져가고, 사람이 기교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괴한 물건이 점점 생겨나고, 법령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도적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함이 없으니 백성이 스스로 질서를 찾고, 내가 고요하기를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게 일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하게 된다. 나는 바램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백성들은 스스로 통나무가 될 뿐이다.

 

58.
그 정치가 답답하면 답답할수록 그 백성은 순후해진다. 그 정치가 똘똘하면 똘똘할수록 그 백성은 얼얼해진다. 화여! 복이 너에게 기대 있도다! 복이여! 화가 너에게 숨어 있도다! 누가 저어 가없는 근원을 알리! 세상에 절대적인 정상이라곤 없오. 정상은 늘 다시 비정상이 되게 마련이요. 그리고 또 좋음은 다시 나쁨이 되기 마련이요. 사람의 어리석음이 너무 오래 되었도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모나면서도 가르지 아니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자르지 아니하며, 곧으면서도 뻗대지 아니하며, 빛나면서도 튀쳐나지 아니한다.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화혜복지소기, 복혜화지소복) : 누가 잘 다스린다는 것의 표준을 알겠는가? 다만 바르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형상으로 이름 지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둑어둑하게 천하가 크게 교화되는 이것이 그 표준이다.(왕필주석)

 

※光而不燿(광이불요) : 밝지만 비춰내지 않는다.

 

59.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끼는 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 대저 오로지 모든 것을 아낄 줄 알면 모든 것이 일찍 회복되는 것이다. 일찍 회복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덕을 거듭 쌓으면 못 이루는 것이 없고, 못 이루는 것이 없으면 그 다함을 알지 못한다. 그 다함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 나라를 얻는 그 어미는 너르고 오래 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뿌리깊고 단단한 길, 오래살고 오래 보는 길이라고 한다.

 

60.
큰 나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조리기 같이 하라. 길로써 하늘 아래에 임하면 그 귀신들도 영력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실은 그 귀신이 영력을 아니 부린다함이 아니요, 그 귀신의 영력이 사람을 해하지 아니한다 함일러라. 그 귀신의 영력이 사람을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스러운 사람 또한 사람을 해하지 아니한다. 대저 귀신도 사람도 서로를 해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덕이 귀신과 사람 서로에게 쌓여가는 것이다.

 

※신도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못한다. 사물이 타고난 천연을 지키고 있으면 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신이 신령스러운 줄 알지 못하게 된다.(왕필주석)

 

61.
큰 나라는 아랫물이다. 그래서 하늘 아래의 모든 윗물이 흘러들어 오는 곳이며, 하늘 아래의 모든 숫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써 자기를 낮춘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에게 자기를 낮추면 작은 나라에 믿음을 주고, 작은 나라는 자기를 낮추면 큰 나라에 믿음을 얻는다. 그러므로 하나는 자기를 낮춤으로 취할 수 있고 하나는 자기를 낮춤으로 취하여 질 수 있다. 큰 나라는 사람들을 밑에 두고 거느리기를 좋아할 뿐이며 작은 나라는 사람 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랄 뿐이다. 대저 양편이 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진대, 큰 나라가 마땅히 자기를 낮추기를 잊어서는 아닐될 것이다.

 

62.
길이라는 것은 만가지 것의 속 깊은 보금자리요, 좋은 사람의 보배며, 좋지 못한 사람도 지닌 것이다. 아름다운 말은 시장에서 사람을 홀리며 고매한 듯한 행위는 사람의 위선을 더할 뿐이다. 사람의 이러한 좋지 못함도 모두 길에서 나온 것일진대 내 어찌 외면할 수만 있으랴! 그러므로 천자를 옹립하고 삼공을 세우는데 비록 보석을 두손으로 바쳐들고 사두마차행렬을 앞세우며 융성한 헌례를 다해도 그것은 가만히 앉아서라도 이 길을 헌상하느니만 못하다. 옛부터 이 길을 귀하게 여긴 뜻은 무엇이었든가? 구하면 이 길로 얻고 죄가 있어도 이 길로 사함을 받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하늘 아래 귀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니.

 

63.
함이 없음을 함으로 삼고, 일이 없음을 일로 삼고, 맛이 없음을 맛으로 삼는다. 작은 것에 큰 것으로 갚고, 적은 것에 많은 것으로 갚으니, 원한을 덕으로 갚을 뿐이다. 어려운 것을 쉬울 때부터 도모하고, 큰 것을 미세할 때부터 도모하라! 하늘 아래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쉬운데서부터 지어지며, 하늘 아래 아무리 큰 일이라도 반드시 미세한데서부터 지어지느니.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끝까지 큰 일을 하는 법이 없으면서도 늘 큰 일을 이루어간다. 대저 가볍게 응낙하는 것은 믿음이 적고, 너무 쉬운 것은 반드시 큰 어려움을 몰고 온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온갖 것을 늘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끝내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 무위로 거하고, 말하지 않음으로 가르치며, 담백함으로 맛을 삼으니 이것이 다스림의 극치다. 大小多少, 報怨以德(대소다소 보원이덕) : 작은 원망이라면 보복할 만한 것이 못 되고, 큰 원한이라면 곧 천하가 죽이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같이 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 덕이다.(왕필주석)

 

64.
사물이 흔들리지 않을 때 가지고 있기 쉽고, 드러나지 않았을 때 도모하기 쉽다. 그 연약할 때는 바스라지기 쉽고, 눈에 띄지 않을 때는 흩어지기 쉽다. 그것이 드러나기 전에 하고 그것이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라! 아람드리 나무도 털끝같은 싹에서 생겨나고, 아홉층의 높은 투각도 한 줌의 쌓인 흙에서 일어나고, 천리의 걸음도 발아래서 시작한다. 할려 하는 자는 반드시 패할 것이요, 잡으려 하는 자는 반드시 놓칠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기에 패함이 없고, 잡음이 없기에 놓침이 없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늘 다 이루어질 듯하다가 꼭 패한다. 끝을 삼가기를 늘 처음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패하는 일이 없을지니.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지 아니함을 배우고 뭇사람이 지나치는 본바탕으로 돌아간다. 이리하여 만가지 것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65.
예로부터 길을 잘 실천하는 자는 길로써 백성을 똑똑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길로써 바보같이 만든다 백성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나라의 복이다. 이 둘을 아는 것이야말로 또한 늘 그러한 본받음의 틀이니, 가믈한 덕이라 일컫는다. 가믈한 덕이여! 깊도다! 멀도다! 이 세계와 반대로 돌아가는구나! 그런 뒤에야 다시 큰 따름에 이를지니.

 

66.
강과 바다가 온갖 시내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온갖 시내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백성의 위에 서려는 자는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고, 백성의 앞에 서려는 자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위에 처해 있어도 아랫백성이 무겁다 아니하고, 앞에 처해 있어도 뒷백성이 해롭다 아니한다. 그러므로 하늘아랫 사람들이 즐거이 그를 추대하면서도 싫어하지 아니한다. 항상 그는 다투지 않으니 하늘아랫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다툴 건덕지가 없는 것이다.

 

67.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내 길이 너무 커서 같지않다고들 빈정댄다. 그런데 오로지 크기 때문에 같지 않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 말대로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보잘 것 없는 것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나에겐 세 보배가 있는데 이를 늘 지니고 지킨다. 첫째는 부드러움이다. 둘째는 아낌이다. 셋재는 하늘 아래 앞서지 않음이다. 부드럽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아끼기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하늘 아래 앞서지 않기 때문에 온갖 그릇 중에 으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부드러움을 버리고 용감하려고만 하고, 아낌을 버리고 널리 베풀기만 하려하고, 뒤를 버리고 앞서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것이다! 대저 부드러움으로써 싸우면 이길 것이요, 그것으로써 지키면 단단할 것이다. 하늘이 장차 사람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부드러움으로 그를 막아줄 뿐일 것이다.

 

68.
장수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력을 쓰지 않는다. 잘 싸우는 자는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맞서지 않는다. 사람을 잘 쓰는 자는 자기를 잘 낮춘다. 이것을 일컬어 않음의 덕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쓰는 힘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하늘에 짝한다 한다. 이것은 모두 예로부터 준칙이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선위사자불무, 선전자불노, 선승적자불여)

 

69.
병가의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는 주인이 될 생각을 아니하며 손님이 될 뿐이요, 나아갈 때는 촌으로 함도 삼가고, 물러날 때는 척으로 한다고. 이것을 일컬어 감이 없이 가고 팔뚝이 없이 내동댕이 치고 무기가 없이 무력을 쓴다고 한다. 이러하면 곧 무적인 것이다.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보다 적을 가벼이 여기면 나의 세 보배를 거의 다 잃을지니. 그러므로 접전하는 군대가 서로 비등할 땐 애통해 하는 자가 이기느니.

 

70.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 하늘아랫 사람들이 능히 아는 사람이 없고 능히 행하는 사람이 없다. 말에는 그 뼈대가 있고 일에는 그 사리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대저 그것을 알지 못하니 나를 알 까닭이 없는 것이다. 나를 아는 자도 거의 없고 나를 본받는 자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겉에는 남루한 갈포를 입고 속에는 아름다운 옥석을 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71.
알면서도 아는 것 같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 같은 것은 병이다. 대저 오로지 병을 병으로 알고 있으면 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병이 없다. 병을 병으로 스스로 깨닫고 있기 때문에 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72.
백성이 다스리는 자의 권위를 두려워 하지 않으면 결국 가장 두려운 것이 오고야 만다. 백성이 사는 곳을 들들 볶지 마라! 백성이 사는 것을 지겹게 느끼지 않게 하라! 다스리는 자들이 자기 삶을 지겹게 느끼지 말아야 백성들도 자기 삶을 지겹게 느끼지 않는 법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자기를 알면서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아끼면서도 스스로 높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73.
감히 무엇을 하는데 용감한 자는 죽임을 당한다. 감히 무엇을 하지 않는데 용감한 자는 산다. 둘다 용기는 용기다! 그런데 하나는 이롭고 하나는 해롭다. 하늘이 미워하는 바 누가 그 까닭을 알 수 있으리요?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늘 매사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늘의 길은 다투지 아니하면서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아니하는데도 저절로 온다. 천천히 하면서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또 너르다.

 

※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용어감즉살 용어불감즉활)

 

74.
백성들이 죽음조차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음으로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는데도 이상한 짓을 하는 놈이 있다면 나는 그 놈을 붙잡어서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항상 죽임을 관장하는 자가 있으니 죽인다면 그마저도 죽여야 할 것이다. 대저 죽임을 관장하는 자를 대신해서 죽이는 것을 일컬어 목수를 대신해서 자귀질을 한다고 한다. 목수를 대신해서 자귀질을 하는 사람치고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75.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그 윗사람들이 세금을 너무 받어 쳐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굶주리는 것이다. 백성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윗사람들이 너무 꾀를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그 윗사람들이 너무 그 사는 것을 후하게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대저 오로지 사는 것에 매달려 있지 아니하는 자가 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자보다 슬기로운 것이다.

 

76.
사람의 생명은 부드럽고 약하며, 사람의 죽음은 단단하고 강하다. 만가지 것, 풀과 나무는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한데, 죽으며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러하므로 군대로써 강하게 하려하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나무도 강하기만 하면 꺽이는 것이다. 나무에서 딱딱하고 커다란 것은 밑으로 내려가기 마련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위로 올라가게 마련이다.

 

77.
하늘의 길은 그것이 활을 펴는 것 같도다! 높은 것은 아래로 누르고, 낮은 것은 위로 들어 올린다.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보탠다. 하늘의 길은 남는 것을 덜고 부족한 것을 보태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의 길은 그러하지 못하다. 오히려 부족한 것을 덜어내어 남는 것을 받들고 있는 것이다. 누가 능히 남음이 있으면서도 하늘 아래 모자람을 보태 받들 수 있으리오? 길이 있는 자만이 그러하리로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하면서 기대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처하지 아니 하고, 그 슬기로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78.
하늘 아래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없다. 그런데 단단하고 강강한 것을 치는데 물을 이길 것은 없다. 물의 쓰임을 대신할 게 없는 것이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기는 것은 하늘 아랫 사람들이 모르는 이 없건마는,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하노라.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말한다. 나라의 온갖 더러움을 한 몸에 지녀야 그 땅과 곡식의 주인이라 할 것이요, 나라의 온갖 상서롭지 못함을 한 몸에 지녀야 하늘 아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와 같이 바른 말은 반대로 들린다.

 

79.
커다란 원한은 아무리 잘 화해시켜도 반드시 그 여한이 남는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어찌 잘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채권자의 왼쪽 어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채무자를 독촉치 아니한다. 덕이 있는 자는 어음거래로 결제하고 덕이 없는 자는 현물거래로 닦아센다. 하늘의 길은 편애함이 없으면서도 늘 좋은 사람과 더불어 하느니.

 

80.
될 수 있는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 온갖 생활의 그릇이 있어도 쓸모가 없게 하라! 백성들로 하여금 죽는 것을 중하게 여겨 멀리 이사 다니지 않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게 하라!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베풀 일이 없게 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끈을 매듭지어 쓰게 하라! 그 먹는 것을 달게 해 주며, 그 입는 것을 아름답게 해 주며, 그 사는 것을 편안하게 해 주며, 그 풍속을 즐겁게 해 주어라! 이웃하는 나라들이 서로 바라다 보이는데, 꼬끼요 소리와 멍멍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왔다갔다 하지 아니한다.

 

81.
믿음이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아니하다. 좋은 사람은 따지지 아니하며, 따지는 사람은 좋지 아니하다. 아는 자는 떠벌리지 아니하고, 떠벌리는 자는 알지 아니한다. 성스러운 사람은 쌓아두지 아니하니, 힘써 남을 위하면 위할수록 자기가 더 있게 된다. 힘써 남에게 주면 줄수록 자기가 더 풍요롭게 된다. 하늘의 길은 잘 이롭게 하면서도 해치지 아니하고, 성스러운 사람의 길은 잘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한다.

 

※聖人之道 爲而不爭(성인지도 위이부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