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내가 본 함석헌





내가 본 함석헌 책읽기

2006. 5. 13.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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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

조우석 |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또 한 권의 믿음직한 함석헌 평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읽을거리 『내가 본 함석헌』을 이번 호를 포함해 두 차례로 나눠 리뷰한다. 실은 "한 10여 회라도 썼으면…" 싶은 마음이다. 『내가 본 함석헌』은 험했던 우리 시대에 흔치않은 두 인격인 함석헌과 김용준의 만남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평전 이상의 평전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중 세월이 좋아지면 수십 권의 함석헌 평전이 나오겠지만, 그 어느 책도 이 텍스트를 비껴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도 든다.

그만큼 소중한 증언자인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정말 내게 각별한 분으로 남아 있다. 게으른 탓에 그 어른을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여러 계기로 내게 다가왔다. 이를테면 그가 관여했던 1980년대 신과학운동 관련서를 보며"중진 화학자의 이런 탄력적인 과학관이라니…" 하며 그를 단단히 입력했다. 당시 학계 지원사업이 활발했던 핵심 공간이 대우빌딩 뒤 대우재단빌딩. 그때 그곳은 문화부 기자의 주요 출입처 가운데 하나였다.

그곳에 간혹 들릴라치면 그곳의 간판스타인 국제정치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동주 이용희 선생과 함께 김용준, 그분의 손길이 느껴졌다. 젊은 내가 지적 자극을 일정하게 받았음은 물론이다. 당시 막 뜨던 도올 김용옥의 맏형이 그 어른이고, 거의 깝친다는 수준이었던 도올의 스타 기질이란 알고 보면 '장형 콤플렉스'라는 점, 어렸을 때 엄한 장형으로부터 숱하게 종아리를 맞았다는 일화도 재단 후배로부터 전해 듣고 웃었던 기억이 선하다.

김용준과 김용옥이 동향인 천안 출신이라서 친근감을 가졌으나, 김용준의 사람됨에 관한 일화 역시 우연치 않게도 천안 분으로부터 들었다. 그분은 신문기자 대선배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의 이계익 전 문화일보 부사장. 연세와 상관없이 가장 유연하고 탄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분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장관을 역임했지만, 내가 알기에는 한국전쟁과 관련한 그중 리얼하고 잘 쓰인 논픽션의 저자다.

거의 30년 전인 1978년에 선보인 『소양강 뱃사공』(정우사)이라는 매력적인 책. 그 많은 편집국 후배들 중 당신께서는 내게 그 책을 서명해주는 친절을 베푸셨다. 예의 삼아 읽어야 했던 그 책은 험한 현대사의 복판을 걸어야 했던 바로 앞 세대의 삶에 관한 너무도 많은 정보가 담긴 보물단지로 다가왔다. 지금의 나는 그 책을 한국전쟁 시기의 중요한 기록 중 하나로 꼽는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거의 백미에 속하는 당시 전쟁상황의 일상사를 다룬 표현이다.

명문 배재중 1년생인 소년 이계익은 창졸지간에 잃은 아버지 유해를 천안여중 옆의 둑방에 가매장을 한 뒤 인근 시골 광덕에 내려간다. 그게 개전 바로 한 달 전후. "새우젓독 같은 시커먼 폭탄을 주르르 쏟"(19쪽)는 B29폭격기의 공습을 일상으로 여기며 마을 우물가에서 잡아들인 갯붕어의 배를 따던 그는 2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 인민의용군을 마주친다. 놀라와라. 장총 한 자루씩을 등에 맨 채 "괴뢰와 더불어 싸워 죽은/ 우리들의 죽음을…" 하는 군가를 부르고 남진을 하던 그들은 배재의 이웃 이화여중 출신 패거리였다.

"'너, 나 모르겠니? 기억 없어?' 이웃한 여중의 5학년 간부였다면서 반갑다는 기색이었지만,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모두 자원한 의용군이라고 했다. 쑥물을 들인 후줄근한 무명군복이 땀과 먼지에 찌들어 궁상스러웠다. 가슴, 어깨, 등에 얽힌 위장망에는 시든 풀잎이 몇 개씩 늘어져있었다. 장총을 짚고 선 계집애, 따발총을 거꾸로 둘러맨 계집애, 그것도 없는 애는 약통을 걸쳐메고 있었다."(23쪽)

전쟁의 일상에 관한 디테일로 이만한 글을 나는 본 일이 드물다. 중요한 것은 저자다. 개전 초기에 아버지를 잃었고, 막내 동생마저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 봐야 했던 그는 10대 시절 '전쟁 마당의 들개'로 추락한다. 마을 공회당 구호양곡을 팔아먹는 것 따위야 여반장이었다. 급기야 천안 한 교회의 책을 훔치다가 붙잡히고 만다. 그때 운명처럼 만나게 된 '이계익의 밀리에르 신부'가 다름 아닌 청년 김용준이었으니!

"'이 세상에 악인은 따로 없습니다.…' … 딱히 무슨 뜻인지 짚이지 않는 대목도 많았으나 계속되는 그 이야기는 서서히 뜨거운 강물이 되어 나의 발끝에서부터 차 올라오는 것이었다. 드디어 가슴 어깨 그리고 머리까지 물 속에 잠기는 듯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젊은 분은 나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뜨거운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내일 천안중학교로 와서 나를 찾으세요. 화학을 가르치는 김용준입니다.' '…' '아니면 저녁시간에 교회로 오세요. 영어 공부들을 하고 있으니까…'"(84-85쪽)

김용준이라는 인격을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까. 또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것이 이토록 우연이면서도 절묘할 수 있을까. 전쟁 직후의 그런 사정은 『내가 본 함석헌』에도 내비치고 있다. 즉 1951년부터 3년간 김용준은 천안에서 화학, 독일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때 김용준은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23쪽)을 만난다. 함석헌이 강연차 그 학교에 내려왔던 것이다. 당시 함석헌을 처음 뵐 때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33쪽)고 털어놓았던 김용준은 지금 천안중앙장로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김용준이 무교회주의자 함석헌 추종자라는 이유로 이단으로 찍혀 교회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그게 1950년대 시절의 얘기다. 이러저런 이유로 『내가 본 함석헌』은 앞의 내 판단대로 인격과 인격이 만난 '두 겹의 평전'이다. 다음 호에는 그렇게 교직되는 인연 속에서 바라본 함석헌의 모습을 리뷰하겠지만, 다소 인용이 길었던 이번 호의 잠정적인 주제는 간단하다. 우선, 만날 사람은 만나게 돼 있다는 점이다. 사람살이란 때론 그토록 오묘하다.

또 교육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평균적이고 산술적인 실력 끌어올리기가 아니다. 상대의 그릇을 발견하는 행위일 뿐이다. 또 그걸 재확인해주는 보증작업이다. 이계익을 김용준이 발견하고, 그 김용준을 함석헌이 재확인해주고…. 그러면 함석헌은 누구인가.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20세기 인물 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를 꼽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내가 본 함석헌』은 그 모습이 그런대로 입체적으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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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

조우석 |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halfguy@hanmail.net





『소양강 뱃사공』의 저자인 10대 이계익이 운명처럼 '이계익의 밀리에르 신부'에 다름 아닌 20대 청년 김용준을 마주치고, 그 김용준은 함석헌이라는 문제적 인물과 조우를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돼 있다고 나는 지난 주 이 지면에서 말했다. 그 점에서 『내가 본 함석헌』은 사람과 사람, 인격과 인격이 만난 '두 겹의 평전'이었다. 교육이라는 것도 상대의 그릇을 발견하는 마주침의 행위일 뿐이라는 비약 아닌 비약까지 내친 김에 해봤다.

『내가 본 함석헌』 역시 그런 만남으로 가득 차 있다. 함석헌이 함석헌인 이유는 세상이 다 알듯 다석 유영모와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했던 오산학교에 함석헌은 3학년으로 편입했고, 그때 두루마기에 고무신 차림의 교장인 다석을 마주친 것이다. "전 생애를 통해서 크게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게 함석헌의 회고인데, 그 말의 무게를 거듭 음미해볼 만하다. 그건 쌍방향이다. 다음 다석의 말도 기억해두자.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 만나기 위해서였던 가 봐." 함 선생님은 류 선생님의 이 한 마디 말씀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왔다고 류영모 선생님의 1주기를 기념하여 모인 자리에서 고백하였다."(92쪽)

우리의 20세기 지성사에서 다석과 함석헌이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나는 종종 한다. 다소 거칠게 말하면 20세기란 서구 근대학문의 이식사에 다름 아니고, 그것은 대학이라는 제도를 통해 지식권력의 자리를 차지해왔다. 피할 수 없었던 과정이었지만, 그것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식민성이야말로 우리를 괴롭히는 핵심 요소다. 다석과 함석헌은 우리의 부끄러움 내지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씻어주는 위안이다.

그 점에서 구한말 민족종교 이후 다석-함석헌으로 이어지는 족보야말로 '20세기의 장외場外 사상사'의 줄기로, 장차 거듭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퀘이커교도였던 두 분이 어떤 형태로든 기독교라고 하는 수입 종교와 얽혀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바로 그런 근대성의 측면 때문에 민족종교가 갖고 있는 한국 사상의 원형은 근대적 변용과정을 거칠 수 있었고, 이후 20세기로 이어진다는 게 내 판단이다.

어쨌거나 『내가 본 함석헌』에서 유심히 들여다 본 대목은 함석헌의 인간적 약점에 대한 서술이었다. 다석 역시 함석헌에 대해 실망을 안는 계기가 되었던 한 여성과의 스캔들 말이다. 혹시 그 여자문제를 마치 없던 일처럼 처리했다면, 이 평전은 '우러러보기도 힘든 함석헌'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면서, 국내 평전들이 저지르는 우상화 함정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있었다.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123쪽)는 구체적인 서술을 포함해 3개 절節에 걸친 서술은 인간 함석헌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대가 오모 여인이라는 것, 그 여성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함석헌의 취사를 돕던 사람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일 것이다. 정권의 사주를 받은 함석헌의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써서 재야세력의 핵심인 함석헌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는 90년대 말 필자가 근무했던 신문사까지 찾아와서 함석헌이 얼마나 호색한인가를 내게 강조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당혹스러웠고, 근거 없는 호색한의 이미지를 잠시 주입시켰음을 고백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영모) 선생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1960년 9월 30일자)."(127쪽)
그 편지는 함석헌이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신학자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때 함석헌은 환갑 나이였고, 단 한 번 외도로 그런 고통을 겪었다. 그의 나이 열일곱에 결혼했던 부인이 일생을 문맹으로 마쳤다는(133쪽) 점도 나는 이 평전에서 처음 알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함석헌을 종교적 성인 반열에 올려놓고, 그의 윤리를 재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옳다. 내 경우 이 평전을 통해 비로소 사람 함석헌이 친근하게 느껴졌음을 고백한다.

그런 함석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저자는 "나는 함석헌을 서슴없이 '정신적 낭만주의자(Spiritual Romantist)'라고 부른다"(39쪽)고 말한다. 포괄적인 규정으로는 공감할 수 있다. "워즈워스뿐만 아니라 셸리, 바이런, 브라우닝 등 19세기의 낭만주의 시인들을 즐겨 읽었다는 이야기와 또 "나는 낭만주의자이지, 별 수 없어."라는 그 자신의 고백"(34쪽)에 대한 인용도 그걸 뒷받침한다. 흥미롭다. 저자는 그 말을 주로 멘탈리티에 대한 규정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함석헌의 공적 생애가 만개한 1960년대,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역시 현실정치에 대한 인식에 앞섰던 낭만주의 멘탈리티가 아닐까 싶은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싶다. 그러나 함석헌은 동시에 1인 저널리스트이자, 노장사상과 인도사상에 대한 해석자이기도 했으며, '고난의 역사론'이라는 독자적인 사론을 가졌던 재야 한국사 연구자다. 무엇보다 그는 걸출한 시인이기도 했다.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 우리는 함석헌 연구의 첫 발을 뗀 것뿐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가 못 났고, 그 도발적인 타고르가 못 났다. …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 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같이 다 곪아버릴 수밖에 없었다."(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넘어』 머리말 재인용,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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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가 본 함석헌|작성자 stupa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