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천교수의 함석헌과 『노자』 강좌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제2강 『노자』에 관하여
제3강 『노자』와 무위 1
제4강 『노자』와 무위 2
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제9강 상상력과 과학
제10강 『노자』와 자연
제11강 『노자』와 성인 1
제12강 『노자』와 성인 2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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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함석헌과 『노자』 |
◆ 함석헌의 ‘노자’ 읽기 자, 오늘 제목은 “철학자인가 정치가인가”라고 되어 있는데, 그 동안 주로 읽었던 것이 하상공 주와 왕필 주를 소재로 하면서 어떤 식으로 변화돼 있는가. 달리 말하면 본래 정치가들 사이에서 읽힌 책이 지금에 와서 노자하면 철학자라는 타이틀이 붙게 된 거죠. 우리는 본질적으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노장 사상 자체가 과연 철학적이냐? 정치적이냐? 당연히 섞여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방식의 노자 읽기가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가. 상식이 되어있는가를 검토하는 것. 사실은 노자 원전을 읽는 것보다 지금 우리들이 읽고 있는 노자에 관한 책들이 어떤 시선으로 쓰여졌는가를 이해하는 게 사실 더 중요한 일이거든요. 제가 중국철학을 전공했지만, 중국철학을 공부할 때 희한하게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공부하다보니까 본격적으로 전공을 찾기 전에, 우리 사회에서 중국 철학과 관련된 내용을 생산하고 있는 현대신유가에 관한 부분부터 먼저 공부를 시작했어요. 세미나 팀에서. 그러니까 내 주변에서 혹은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까지도 어떤 시각과 입장을 갖고선 고전들을 읽고 있는지 이미 정체를 어느 정도 나름대로 판단한 다음에 어떤 식으로 읽어야 되겠다는 관점을 가지고 접근한 거죠. 현재도 상대화시키고 과거도 상대화시키고. 그러다보니까 노자가 어쩌고 저쩌고 라고 한 것 특히 논어나 노자를 비교해 보면 두 가지가 상당히 다르다. 다른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고. 그러다보니까 『철학에서 이야기로』(김시천)와 같은 책을 쓸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다 출판되어 있지 않고, 라는 책에 몇 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옛글 고쳐 씹기 함석헌 기념사업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도덕경이라고 해서 한 두 장 누락된 게 타이핑돼서 실려 있어요. 그걸 출력해서 읽어보시면, 우리가 알고 있던 노장 얘기가 여기서 나왔구나 하며 새삼 감탄하게 되실 거예요. 그 중에 몇 가지도 오늘 확인하게 될 거고요. 그 중 상당 부분이 도올 김용옥 선생이 노자 강좌를 하면서 많이 채용하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면서 어떻게 그것이 누적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노자 읽기를 본다” 뒤에 부제로 붙어 있는 것은 제가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강의를 접하고 제가 처음 썼던 논문의 제목이에요. 이 양반의 노장 해석을 어떤 방식으로 붙여야 하는가. 이 양반의 노장 해석은 한국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나오기가 어려워요. 독특한 지형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노자에 대한 주석서는 다 독특하기 때문에. 다 다르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제안한 하나의 표현이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를 만들어보았거든요. 어떤 분이 논문을 쓰면서 이걸 쓰더라고요. 천 개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무한수를 말하는 거죠. 주석서가 나올 때마다 색다른 노자가 창조된다. 다른 얼굴이 들이밀어진다는 뜻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제가 학위논문을 쓰면서 제안했던 표현이죠. 그러다보니까 함석헌 선생의 노자읽기의 독특성은 정확한 질문의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자를 다양하게 읽는다. 다원주의가 존중받는 시대에 백 명이 모이고 천 명이 모이면, 천 개의 노자, 백 개의 노자가 만들어진단 말인데 소통이 가능하겠습니까. 도대체 뭘 소통하느냔 거죠. 따라서 고전을 읽는다고 할 때 고전에 대한 정확한 번역. 번역자들은 정확한 번역을 해야 하죠. 하지만 정확성이라는 척도는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노자를 의미 있게 읽는다는 작업은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낸 함석헌 선생의 노자 해석의 독특성 혹은 특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창조적 해석이 있다기보다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한국사람 대다수가 알고 있는 노자라는 사람과 노자라는 책과 관련된 말, 언설, 이미지를 창조한 데 있다. 그 당시에는 새롭지만 지금에 와서는 누구에게나 상식이 돼버린. 상식의 창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게 제가 철학공부를 하는 모토예요. 저는 철학이 철학으로서 끝까지 있는 한 무의미하고 철학적인 방식이 언어와 내용, 삶의 양식이 상식으로 퍼져나갈 때 의미 있는 철학, 살아있는 철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역할이라는 것이 불건전한 상식을 몰아내고 건전한 상식을 정초하는 과정이 철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고전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게 바로 그런 겁니다. 동아시아 철학자들이 철학적인 활동을 했다고 하면 어떤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을 도출해내고 그러한 건전한 상식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고 행동에서 득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 이론적 노력이 동아시아 전통철학의 내용일 것 같아요. 오늘 그것을 바로, 함석헌 선생이 어떤 방식으로 했는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의 고전읽기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논어는 물론이고 노자는 물론이고 맹자, 중용, 다른 모든 문헌들에까지도 확장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논의의 주제는, 지금 여기에서 노자나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 삶 속에 어우러진 노장을 읽는다는 것인데 그것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오늘의 가장 커다란 주제입니다. 그러면 함석헌 선생님의 노장읽기를 이야기할 때, 이 분이 어떤 위치를 갖느냐는 당연히 전제해야겠죠. 1페이지 맨 밑을 보면 시작됩니다. 함석헌의 노장 읽기는 19세기 이래 동아시아 전교의 특징인 서구 종교(기독교)와의 화해적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게 특징적인 겁니다. 문제는 화해적 만남이 중요해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본 사람은 많이 느끼겠지만, 도올 선생의 노자 강의는 화해적이지 않습니다. 동양철학의 핵심 특징은 화해론. 자연과 인간의 화해. 인간과 인간의 화해. 지식과 삶의 화해. 이런 3대 화해를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노자 철학의 화해적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어둠의 세력으로 부각이 되죠. 대비시킨단 말이죠. 저는 그런 대비효과가 동양적 사유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나쁘다, 좋다는 판단은 할 수 없죠, 하지만 읽는 방식이, 분명히 도올 선생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와 노장 사상을 대비시키는 방식이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의 노자 해석은 대비가 아니라 그 자체가 화해적 방식입니다. 노자를 만난 까닭 자체도 화해적이고. 원래 이 분이 노자라는 책을 읽어보지 못 했다가 스승이진 유은봉 선생님께 선물로 이 책을 받았죠. 그걸 평생 갖고 읽으셨다고 해요. 이때 비로소 함석헌 선생님은 비로소 동양학에 입문하신 거죠. 두 번째는, 조선조의 ‘노장’ 읽기 전통의 연장에 서 있다는 점입니다. 19세기부터 기독교와의 화해적 만남을 주선하는 이 분위기는 함석헌 샌생님의 고유한 특징이 아닙니다. 19세기 말부터 이미 서구 선교사가 시도했고 동아시아에서도 많이 이용을 했습니다. 불교도 이용했고 유교도 이용했지만 도교, 노자도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런 방식의 이해가 사실은 전통 조선사회에서는 사실 노자는 이지단서였습니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의 머릿속에서는 사실 이단까지는 아니었죠. 동서 문명의 대화라는 축에서 양자를 소통시키려 하셨으니까. 특히 종교적인 내용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그 읽는 태도의 방식이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유림이 노자나 장자를 읽고 대했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 학계라는 좁은 울타리에 계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최초의 문제의식 자체가 한국의 현실과 대화한 하나의 ‘이야기’로써 출발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대중성을 가질 수 있었고 현실성을 가질 수 있었어요. 나름대로 개인의 진정성, 당신께서 갖고 있는 뛰어난, 함석헌 문체라고 함석헌 선생의 문장은 다르게 평가받기도 하잖습니까. 그런 등등의 것들과 그 분의 이력이 다 포함된 거겠죠. 이와 같은 점들은 사실 우리가 많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가서 연구해보시면 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두 세 부류로 갈라져요. 1] 하나는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 가운데 도가를 연구하는 사람이 해요. 또 몇 권의 책들이 나와 있는데 그 분들이 누구냐. 신학대학 소속이 꽤 있어요. 그리고 목사님이거나.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게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를 들면 누구지. 장자에 관한 주석서도 많이 내고, 갑자기 이름이 떠오르질 않네. 감리교 계통의 목사님이 신데, 이연현주 목사님. 그 분만의 독특한 개인적 기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리고 신학계에 계신 분 가운데서 그와 같은 주제로 학위논문을 따신 분들이 꽤 많아요.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신학 하시는 분들 가운데 노자를 연구하는 분들이 꽤 있다. 꽤 특징적이죠. 이게 함석헌 선생만의 독특성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장해석의 중요한 지류를 타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현실성을 가질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와 같은 성격 때문에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해석이 어떻게 다르냐. 노자 해석의 역사 과정 속에서 독특성, 차별성, 새로움은 무엇이냐고 묻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건 함석헌 선생의 해석방식의 기조와도 맞지 않습니다. 그 분은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함석헌 노자 해석에 접근해 나가야 하느냐. 그 다음 3페이지를 보시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물음을 제기해야 합니다. 첫 번째, “무엇이 새로운 것인가”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던진 글, 내용, 화두들이 얼마나 우리와 닮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함석헌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다르단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우리는 이미 그가 해석해놓은 마당 위에서 노자를 읽고 있기 때문에 함석헌과 나와의 차이를 연구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 된다는 거죠. 내가 알고 있던 내 모습의 원주소가 여기 있었구나. 하지만 다 기억나는 게 아니잖아요.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를 따져 봐야겠죠. 그 다음에, 그가 말하고 있는 독창성은 얼마나 진리에 가까운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람들 사이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가이다. 노자를 통해 페미니즘이나 생태 사상의 접속을 시도합니다. 그럼 노장 철학에 생태주의나 페미니즘의 심오한 철학이 있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죠. 노자를 통해서 생태와 페미니즘 문제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노자 철학 자체에 무슨 대단한 얘기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만약 들어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그 분의 철학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구분해야 하거든요. 대한민국에 철학자가 나오지 못 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새로운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라 원전 중심으로 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 아까 수박 주고 가신 이진경 선생님, 『자본론 읽기』그건 자본론을 얼마나 제대로 읽었느냐 아니냐를 얘기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한국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현실 속에서 이진경이라고 하는 사상가가 자본론을 어떻게 읽었는가 라고 하는 점에서 평가해야 하잖습니까. 『노마디즘』도 마찬가지고. 그런 문제로 요즘 여러 지면에서 논쟁이 붙기도 하는데.
하지만 번역 용어를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고 쓰는가 하는 것은 여기 듣고 있는, 프랑스 사람을 위해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게 아닌 이상, 한국 사람을 위해서 번역하기 때문에 번역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의 파장도 고려해야 하고 그 의미의 파장을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는가가 바로 그 책을 내고 쓰는 사람의 자기 생각이 들어가는 거죠. 그가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땅과 호흡하는 철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런 방식의 질문을 던지는 데 인색하다고 생각해요. 많이 좋아 졌어요 요즘에는. 저를 소개할 때, 동양철학자라고 하거든요. 옛날에는 철학가냐, 철학자냐, 철학인이냐를 가지고 대학 강단에서 별의별 논쟁을 많이 했거든요. 대한민국에 철학자는 없다, 철학가가 있거나 철학인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방송가 같은데서 소개할 때,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에게 소개할 때는 철학하는 사람, 주로 철학자라고 편하게 불러요. 많이 언어의 민주화가 된 거예요.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지막으로 함석헌 선생이 노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였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귀 기울였는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이야기예요. 이 지점은 뭐와 다르냐면, 제가 『철학에서 이야기로』 책을 쓰면서 첫 번째 챕터 제목이 ‘철학 만들기에서 철학하기’ 라는 걸 구분했습니다. 즉, 동양철학은 철학이 아니에요. 하지만 철학이 아닌 그 무엇의 내용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철학적인 방식을 부여함으로써 철학적인 위상을 획득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런 책들을 쓰신 분들이 하는 이야기예요. 서양의 철학하는 사람들이 관심 있게 읽는다. 그 다음에,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이 철학적 관심으로 대해줬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무게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달리 말하면, 서양 철학적인 용어들, 쉽게 말하면 도(道하)라고 하면 이게 실체라고 하는 용어로 해석될 때만 이게 철학이 되는 거예요. 도 자체는 철학이 안 된다는 거죠. 이게 바로 신빙성입니다. 실체라는 말은 노자에 안 나오잖아요.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만 우리는 철학이라고 인정한단말이에요. 그냥 도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되죠? 불합리하다, 비과학적이다. 그래서 하는 얘기가 ‘안녕히 계세요’ 그렇잖아요. 도망가야 하잖아요.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 신비주의로 빠지게 되는. 달리 말하면, 도와 실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실체가 되는 거고, 가까이 있지 않으면 철학이 아니라고 하는 판단의 근거는 사실 판단의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저쪽에 있다는 거죠. 중요한 건 뭐냐. 노자라는 텍스트에 대해서 실체니, 로고스니 하는 어려운 용어들을 자꾸 결합시키는 노력도 중요하죠. 새로운 재해석을 제공하는 행위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 자체가 텍스트의 맥락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고 당시 사회의 어떤 결들을 전해주고 있는지를 먼저 귀 기울여보는 것. 이것이 먼저 돼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런 것 때문에 과거를 보세요. 과거에는 주석사 연구를 안 했어요. 90년대 들어서 비로소 주석사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바로 그런 것들이 철학이라는 개념 지형도가 바뀌는 것과 맞닿아 있는데. 뭐가 달랐느냐.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동양철학을 하는 분들은 철학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 했습니다. 90년대 넘어서면서부터 동양철학도 대등하다고 얘길해요. 같은 과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서양 철학 하시는 분들이 동양철학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 “동양철학은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좀 문제가 있어.” 했다는 거죠. 하지만 장구한 기간 동안 논문이 축적되고 어려운 용어들이 동원되고 해석이 쌓이게 되니까 이제는 “아” 이것만 가지고는 이해를 못 하거든요. “실체, 로고스” 하니까 “오” 이렇게 되는 거죠. 사실은 이게 선생님들이 그랬다기보다도, 그렇게 이야기해야지만 듣는 사람들이 철학이라고 인지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런 것들은 이제는 아니라고 보는 거죠. 옛날 선생님들도 생각이 많이 바뀌어서 그렇지 않고, 도 자체에 맥락적 의미가 무엇이냐.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방식으로 질문의 방식이 바뀝니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님의 읽기는 그와 같은 ‘해석적 읽기’가 아니라 ‘참여적 읽기’예요. 삶 속에서 대화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 분은 귀를 기울인다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인데, 해석이라는 말은 헤르메스가 말을 보여주는 거잖습니까. 달리 말하면, 말 하는 자에게 권력의 무게가 실려 있어요. 해석학의 특징은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무게가 듣는 사람에게 있어요. 말하자면, 노자에 대해 이야기한다하더라도 함석헌 선생 당신이 새로운 노자를 창조해서 그걸 들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가 귀를 기울이는 자고 또 자기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들에게 전해주는 거예요. 무게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삶이라고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함석헌 선생의 해석은 다른 겁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들이야말로 전통동아시아철학이 갖고 있었던 나름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러한 접근 방식을 따라 읽을 때야말로 함석헌을 따라서 함석헌을 해석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함석헌 선생이 당시에 페미니즘을 말했다, 과학을 말했다고 하지만 무엇을 말했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단 말입니다. 즉, 함석헌 선생이 어떤 방식으로 귀를 기울였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말했는가. 그럼 우리가 노자를 가지고 페미니즘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그 방식에 대해서 배우는 겁니다. 즉, 철학 용어가 아니라 철학하기의 모델로서 함석헌을 읽는 게 더 타당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상당히 함축적으로 이미 하고 계세요, 직접. 3페이지를 보면, 특히 이 두 단락은 다른 분야를 연구하시는 분들에게 상당히 도움 되는 구절입니다. 제가 왜 말하기가 아니라 귀 기울임으로 해석했는지도 이걸 보면 맥락이 나옵니다. [사실 이날까지의 옛 글에 대한 모든 해석은 권위주의, 절대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사실 강의라고 하는 공간만큼 권위적인 게 없어요. 만약에 제가 노자 전문가라고 하는 소문을 못 들었으면 여기 오실 리가 없잖아요. 강의를 들을만한 이유가 없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옛글을 고쳐 씹는 데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지금 있는 종교로부터 올 반대이다... 그럴 때 제일 문제되는 것은 권위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서는 석가나 예수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코 형식에 거리끼지 않았다. 또 저쪽을 숭인시키자는 것이 목적 아니었다. 그들에게 권위는 영(靈)에 있었지 글이나 제도에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새 해석을 하고 깨쳤다. 그리고는 옛날의 전통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하지 않노라고 했다.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었다.”(, 21-22쪽)] 이 표현은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는다는 한 마디는 서구에서 그 유명한 해석학자들의 논의와 동일한 격에 속하는 무게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문장은 더 재밌습니다. [나는 노자·장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숲 속에 깃들인 뱁새’ 같이 ‘시냇가에서 물 마시는 두더지’ 같이 날마다 그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개념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고전과 나의 대화고 그 자체가 삶의 과정이다. 이런 말들은 지평융합이 이미 돼 있는 경지가 아닐까요. 가다마가 말한 지평융합이 이미 돼 있는 거예요. 지평융합은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하는 새로운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 해석학은 신앙도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내용이 당연히 섞여 있는 거죠. 하지만 말이 쉽잖습니까. 함 선생님의 말이. [나는 일제시대에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나려 하다가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위대한 사상에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 몇 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 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5-6쪽)다.] 멋있잖습니까. 말을 이렇게 멋있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사람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외모가 잘 생겼는가 못 생겼는가가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이 아름다워야 하고 그가 하는 행동, 그가 하는 말, 입 속에서 향기가 나와야 해요. 향기 있는 말과 향기 없는 말은 마음으로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말을 하는 데 향기가 난다,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금 앞에 읽었던 단락에서 “ 그들에게 권위는 영(靈)에 있었지 글이나 제도에 있지 않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왕필이 뜻을 해석하기 위해서 문자를 버릴 수 있다, 이건 득의 망상. 이미 장지를 원용해서 왕필이 말하는 해석학의 태도와 동일합니다. 이런 점들이 놀라운 거예요. 경전에 대한 해석 태도라는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고도로 발전돼 있어요. 우리는 서양의 논리 방식에만 익숙해 있다보니까, 동아시아는 그걸 논증적으로 하는 방식이 적었잖습니다. 하지만 이미 들어있다는 거죠. 이 때 “권위는 영(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성인 공자의 뜻, 오경 속에 살아 숨 쉬는 성인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체득한다면 오경 속에 들어있는 문자, 글자는 잊어도 된다. 이게 왕필의 태도입니다. 마찬가지의 태도를 지금 함석헌 선생이 갖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게 성서 해석학과 관련해서 자유분방하게 하는 것과도 연관 있지만 적어도 그 맥락 없이 이런 건 통하는 자세라는 거죠. 제가 여태까지 했던 얘기들이 왜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대단하다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하자면 저는 배우거든요,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되게 쉬운 말로 적혀 있지만 나름대로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게 드러나니까요. 다른 한편에서 보면, 노자에 대한 번역서나 해석서는, 요즘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가 노자를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함석헌 선생의 노자만큼, 저는 최근에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읽은 것들과 비교해봤을 때 함석헌 선생이 훨씬 더 일관되고 진솔하고 쉽고 공감이 되고 나름대로의 근거도 있고. 그래서 굉장히 훌륭한 작품, 철학적으로도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 ◆ 함석헌 ‘노장 읽기’의 역사적 연속과 불연속 자, 그럼 이제 함석헌 선생님이 상식을 창조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의미를 부여하면 다 끝이냐? 그게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역사적인 시각으로 전향해보면, 상식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굉장히 중요한 한국 땅이라고 하는 지형도와 맞닿아 있는 중요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 그 점이 그의 위대함을 더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이겠죠. 즉 그 연속과 불연속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이 그 다음 부분입니다. 6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의 부분들은 앞 시간에 많이 한 얘기이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정리 차원에서 현재는 조금 달라졌는데 제가 이 글을 쓸 당시가 몇 년 전이었으니까, 처음 학위 논문을 시작할 때 이런 식의 제안을 했으니까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중복되는 것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결들을 잡는다면은 대략 지금에 와서도 노자나 장자를 해석하는 절, 특히 노자를 해석하는 절이 훨씬 더 복잡한데 한 여덟가지 정도로 분류를 할 수가 있어요. 첫 번째는, 제왕지술(帝王之術) 혹은 법가적 해석 특히 무위를 치술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갈래가 소수이긴 하지만 있습니다.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爲無爲, 則無不治.); 2장,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없는 교령을 행한다.”(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 새롭게 발견된 『황제사경』(黃帝四經), 韓非子, 申不害 등등] 특히 이러한 건 황로학 붐과 더불어 일어나면서 이러한 정치적 재해석이 상당히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말하는 황로학은 정치사상으로서의 황로학을 중심으로 이야기 합니다. 한나라 초기를 지배했던 통치사상으로서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황로학이 앞에도 뒤에도 껴 있지만 여기서는 황로라는 말이 한 대에서의 전반기의 황로와 후반기의 황로라는 말이 조금 달라요. 즉, 동일한 황제의 노자라고 하는 두 문헌군, 혹은 황제와 노자를 숭앙하는 시조를 따지는 학문 풍토 혹은 학술 운동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적어도 그 글자 자체만 놓고 본다면 한 대와 후 한 대에 이것이 의미가 많이 바뀌는데 그 의미가 바뀌는 과정이 도교적인 성격이 충분히 더 강화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상공 주석의 경우도 철학적인 입각점, 방향은 한 초에 청정무위 사상을 중심으로 돼 있다고 했죠. 하지만 치신 사상등과 같은 것이 굉장히 깊이 들어가 있고, 표현 중에 불사(不死)가 나옵니다. 불사라고 하는 사상은 사실은 고대 중국 도가 사상에는 없던 거예요. 나중에 신설술기라고 하는 신선사상이 들어오고 나서 그 영향으로 인해 이 전통에 들어오게 됩니다. 선진 도가의 중요한 용어는 뭐냐. 불사가 아니라 장생(長生)이에요. 우린 이걸 구분해야 해요. 장생과 불사는 다릅니다. 그럼 뭐가 다르냐. 특히 불사를 이야기할 때 두 가지 방식의 불사가 있어요. 하나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하는 영혼, 영혼불멸론과 연결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몸 자체가 죽지 않는 거예요. 신선이 되는 거죠. 서구에서는 영혼불사로서의 immortality가 중심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영혼과 몸은 뗄 수 없는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몸이 죽으면 안 돼요. 그래서 신선이라고 하는 건데, 장생은 달라요. 장생은 몇 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존연령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죽을 사람이 대낮까지 활달하게 활동하는 날 죽는 날 갑자기 죽는 거예요. 물론 수(壽)를 다하고 나서. 대략 한 120년. 의학적으로 가능한 수가 한 120살 정도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을 보면 다 꽤 오래 살았어요. 황로학(黃老學) 및 도교적 해석은 치신치국(治身治國之道) 및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전통입니다. 이렇게 불어버려요. 장생과 불사가. 노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가져다가 유덕화가 나오는 영화의 제목으로 할 때 ‘천장지구’라고 했잖습니까. 천지는 장구하다고 할 때 천장지구. 그게 천지가 장구하다는 것은 무지하게 오래간다는 거잖습니까. 그것처럼 인간도 오래 간다는 것은 명 안에서의 생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걸 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양생에 해당하는 겁니다. 양생이라는 의미도 전한 시대에서 후한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특히 신선술과의 결합과정에서 의미의 폭이 상당히 바뀌게 딥니다. 그래서 도교 전공하는 분들 가운데서도 이 구분을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구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그 다음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게 현학(玄學) 혹은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특히 왕필이 노자를 해석했던 방식을 후대의 학자들이 기무론이다, 무를 중시하는 철학이라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때 무가 형이상학적 절대 무가 아니라는 걸 지적하고 싶어요. 특히 이런 걸 추적할 때 중요한 점은, 아라비아에서 발명한 게 0이잖습니까. 0이라는 개념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진짜 개념이거든요. 고대 중국의 수학책을 보면, 제가 뒤져봤어요. 중국에서 0이라는 걸 개념적으로 흡수하게 되는 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입니다. 즉 공(空)개념을 흡수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하나는 막대기 하나놓고, 막대기 두 개 놓으면 2고 막대기 세 개 놓으면 3이에요. 그럼 0은 막대기 없다. 이게 0이에요. 개념으로 정립돼 있지 않는다는 거죠. 0이라는 개념이 정립돼 있을 때 형이상학적 무라는 개념이 이해되거든요. 조사를 해보니까 중국에서 상당히 늦게 0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만 가능하다는 거죠. 특히 회남자 책을 보면 유와 무를 둘러싸고 겹쳐놓고서 복잡한 논리식을 만들어놓은 게 꽤 있는데 그때 무에 관한 규정이 나와요. 넝쿨 있죠, 만물이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엉켜 있는 상태를 무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와 무라는 개념은 존재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식적이고 개념적인 틀이라는 거죠. 무엇이라 규정한 수 없다. 그래서 무명유형이라는 말이 쓰이는 까닭이 분명한 형체가 지각되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 이름 붙일 수 없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왕필이 도를 해석하면서 무명유형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쓰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거든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많이 가미된 건 사실이에요. 왕필 대에 들어가서. 특히 이 도가 주역의 태극으로 해석됩니다. 제가 엊그저께 서점엘 나가보니까 조선시대 서명 선생이 지은 『도덕지귀』라는 책이 있는데 아주 꼼꼼한 주석과 더불이 번역이 돼 있어요. 굉장히 연구를 많이 하신 전공자들이 했기 때문에 참고가 될 만한데, 거기서도 도를 태극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건 왕필이 없었으면 불가능한데, 바로 이 왕필 식의 새로운 형이상학적이고 현학적인 해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필 식의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해석이 노자의 주이고 노자의 원이라고 확장합니다. 그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거죠. 이것도 있었지만 다른 부분도 있었다고 말하는 거죠.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처세술 혹은 권모술수라는 이단으로서의 해석. 이 얘기는 사실 앞에 나와야 하는데, 제왕지술과 같은 건데. 제왕지술로 읽는 사람은 노자를 읽을 때 의리적으로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읽고선 말 안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권모술수적 성향을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말과 붙어 있게 되는 겁니다. 이때 이단은 종교적 이단이 아니라, 말하자면 온전한 삶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거죠. 그 다음 다섯 번째, 신과학 혹은 신비주의적 해석. 80년대에 노자가 유행하게 된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이 무위를 해석할 때 엔트로피를 이용해서 해석하시죠. 우리나라에서는 신과학 운동과 연관 있고 특히 프리쳐 카프라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 문제는, 과학을 얘기하지만 이때 주장되는 동아시아의 사상들은 과학이 아니라 신비주의로 이해된다는 것을 놓치면 안 돼요. 신비주의는 불합리하다는 거죠. 불합리하지만 뜬금없이 갑자기 통찰을 준대요. 많은 책들이 그렇게 돼 있어요. 우린 이런 논리에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신비주의라고 몰아붙일 때, 종교학 하는 사람들은 몰라도 철학하는 사람들이 신비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그럴듯하게 높여주면서 철학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고, 아마존에 들어 가고 ‘노자와 타오이즘’ 이라고 쓴 책들을 보면 mysterious 혹은 mystericism religious 라고 붙어 있는 책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왜냐하면 노자 속에 철학적인 내용이 있다고 말하지 노자라는 텍스트가 철학책이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드물어요. 얼마 전에 독일 출신 학자 가운데 욀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이 도덕경을 번역하면서 굉장히 재미난 책을 썼어요. 읽어보니까, 노자에 나온 테마를 상당히 새롭게 재해석하는 문인인데, 나중에 세미나 하게 되면 그런 세미도 느끼실 거예요. 장자에 나오는 우화를 해석하는 게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것이거든요.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데. 그걸 근원학적으로 접근해 들어가서 그럴듯하다 싶을 정도로 해석하는 게, 사실 그런 것을 위해 주석서를 보는 건데, 외국인들이 가끔씩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경우들이 많다니까요. 고문헌에는 해박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출간된 책이에요. 『노자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들』『Religious and Philosophical Aspects of the Laozi』(Csikszentmihalyi, Mark (Edt)) 라고 하는 편집된 책이 있어요. 이 책에 대한 서문을 써달라고 제안 받았다가 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읽느냐. 그건 곤란하다. 즉, 이 사람들은 노자에 대해 Philosophy를 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 여섯 번째, 문화사적 종교사적 해석. 이 부분이 굉장히 넓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묶어버린 까닭은 우리나라 학자층이 좁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런 식의 해석을 하는 사람은 중문과에 계신 분들이거나 전문번역가인데. 예를 들면 소병(簫兵), 『노자와 성』과 같은 책이 대표적입니다. 문제는 뭐냐. 노자에도 나오는 용어들이 당시의 문화적 지형도와 동격으로 해석해버리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의 주석학적 전통에서 나오는 용어의 전통과 틀릴 수도 있어요. 반드시 고문자학이 주석사와 꼭 일치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전을 갖고 공부하던 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와 조건이 다르다는 거죠. 이런 부분은, ‘아 저런 방식으로 읽을수도 있구나’라고 하는 게 좋지, 철학과 곧바로 연결시켜서 왜 저기랑 여기가 다르냐고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섯 번째와 관련해 소개할만한 책이 있는데, 노먼 J 지라드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혼돈신화’를 해석한 책이에요. 고대 중국에도 이른바 창조, creation myth가 있었다는 걸 논증한 책인데. ‘창조신화’ 이 사람이 그 다음에 두꺼운 책을 썼는데 제임스 레게라고 하는 동아시아 고전을 많이 영역했던 사람을 다룬 책이에요. 그런데 제임스 레게 같은 사람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는가를 당시 빅토리아 시대를 훑으면서 쓴 책이거든요. 굉장히 비중있는 사람이고, 콜로라도 대학인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사람 얘기를. 그리고 『철학에서 이야기로』에 약간 소개돼 있기도 하죠. 일곱 번째가 소박한 유물변증법과 역사유물론의 중국적 기원, 즉 마오이즘. 193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대륙중국에서 많이 강조했던 노자를 보는 해석이었죠. 여덟 번 째, 유가적 다윈적 해석. 함석헌 선생님이 포함되기도 하고 저도 포함돼 보고 싶은 부류에 속하는데. 이게 조선시대 노장읽기의 방식입니다. 특징이 두 가지입니다. 첫 째는 유가적이다. 왜 그러냐.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는 절성기지, 절인기의 즉 도덕성을 의존하지 마라. 그 다음에 지적, 합리적, 반성적인 삶의 방식은 최고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잖아요. 그런데 유가적 해석이라고 붙일 수 있는 까닭은, 그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책을 갖다가 유학의 타락한 점, 사회의 불투명하고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는 방식의 논리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어요. 절성기지나 절인기의를 말하지만, 그런 도덕성을 가지고 사회의 도덕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 용어를 쓴다는 게 역설적이라는 거죠. 이게 유가적인 겁니다. 왕필이 유가적인 이유도 그런 점에서 성립되는 거예요. 지난 번에도 봤잖아요. 상현, 불상현. 노자 연구는 현명하다고 판단되는 놈들을 정치나 행정관료로 임용하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하상공은 말 번지르르하게 하는 부류에 속한 사람을 임용하지 말라고 그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왕필은 어떻게 했었죠? 제대로 될 사람을 임용하면 다툼이 없을 거니까 숭상하지 않게 된다고 말을 바꾸잖아요. 그럼 무슨 뜻입니까. 재능있는 사람을 임용해라. 동일한 노자의 구절을 하상공과 왕필은 전혀 다른 방식의 의미로 바꾸어 버립니다. 왜곡이 아니라, 그가 유가이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절인기의, 절성기지와 같은 반문명적 혹은 반주지주의적 혹은 반도덕적 이런 식의 표현을 통해서 오히려 도덕성을 세우고 사회성을 높이는 데 이용한다. 그래서 이건 분명 유가적입니다. 그리고 다원적이죠. 노자의 기본적인 뜻. 공자를 얘기하면서 성인의 뜻을 이야기하지 왕필의 책을 읽어가면서 성인의 뜻과 같은 얘기 안 나옵니다. 물론 노자지략이라는 책 속에서 노자의 핵심저인 내용을 숭본의식말이라는 표현으로 집약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방법론적인 차월인 뿐이에요. 즉, '공자와 같은 성인의 위대한 뜻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와 같은 태도가 노자를 읽는 데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노자라는 책은 얼마나 새롭고 의미 있는 통찰을 얻어낼 수 있느냐는 정도만 중요하지, 도덕성과 같은 핵심적인 부분은 이미 있는 거예요. 이렇게 비유하면 될 것 같아요. 노자라는 프로그램이 있고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 과거에 도가겠죠.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활용하는 게 아니라 이 프로그램을 깔아서 상대되는 다른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못 하도록 제어하는 장치로서만 이용한다는 거죠. 내용은 상관없이. 그래서 이 유가적, 다원적 해석의 특징은 바로 비판철학의 기능. 유가철학 자체에는 비판철학으로서의 논리적 무기가 상당히 적어요. 즉, 사회비판으로서의 무기는 많지만 철학 대 철학이 싸울 때 그걸 비판하는 논리적 무기는 상당히 적어요. 왜냐. 이미 진리의 말씀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실천의 문제예요. 그런데 도가 쪽이나 장자를 한번 읽어보세요. 자기 철학은 무엇이다고 하는 것보다는 수많은 타자에 대해서 다른 족에 대해서 비판하고 조소하고 풍자하고 은유하는 내용이 훨씬 많잖습니까. 당연히 비판의 논리가 더 많이 들어있죠. 그래서 노장철학의 기본적인 특징은 유학자끼리 싸울 때 유학을 가지고 유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노장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할 때만 써요 주로. 이것이 바로 노장전통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용당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유학은. 노자는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많지만, 유가는 상대적으로 이념지향성격이 분명한 데 비해서 노장철학은 이념지향적인 성격이 모호해집니다. 충과 효를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이야기 하는 유가가 충효를 비판할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노자를 원용해서 비판하는 건데. 그런데 그때 비판하는 게 제대로 된 충효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거잖아요. 같은 용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상대방을 비판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생각하시면, 노장이 얼마나 효과적인 전술적 무기였는가. 그래서 노장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노자와 장자의 도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걸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는 게 훨씬 더 정확한 판단입니다. 노자나 장자를 이용하고 활용했지 노자나 장자라는 철학 자체를 승화하거나 그걸 펼치려고 했던 바가 적었다는 겁니다. 그건 도가, 예술철학으로 가면 쫙 펼쳐지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