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노자』와 무위 1 | ||
◆ 『노자』와 무위 원래 처음에 예고했던 것과는 조금 순서가 바뀌었죠. 바뀐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개념에 대한 의미, 맥락을 짚어보는 작업을 하고 나면 뒤에 것을 얘기하기가 더 편할 것 같고, 여기에 대한 이해가 사실은 노자 철학의 이해 전반과 완전히 엇갈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좀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를 먼저 하고 나면, 나중에 원래 하려고 했던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훨씬 더 많은 다른 얘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목이 좀 특이하죠. 마키아벨리즘인가, 아나키즘인가? 제목을 잘 뽑아요 원래 제가. 그런데 좀 낯설죠. 예를 들면 동아시아 사상에서 마키아벨리라고 이른 바 별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노자가 아니라 한비자죠.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흔히 무시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한비자의 정치술적인 사상이 도가의 형이상학적인 배경을 깔고 나왔다라는 식의 얘기는 철학사에서 흔히 하는 얘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무위를 해석할 때와 한비자의 무위를 이야기할 때는 전혀 달리 해석해요. 바로 그 부분에 관한 고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테고요. 또 하나는 아나키즘이라는 용어인데요. 아나키즘이라는 말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어 들어오는 바람에, 상당히 논의에 대한 헌탁이 큰 데요. 원래는 희랍어에서 온거죠. 권위의 중심이 되는,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없다는 뜻인데요. 정부가 없다라고 하는 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 아나키즘이 최근에 부활하고 있죠. 동아시아 근대 사상을 이야기할 때도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고요. 특히 노자와 관련해서 아나키즘은 중국 공산당 초기 멤버였던 진독수(천두슈 , 陳獨秀)가 노자 사상을 지칭하면서 노자에 들어있는 아나키즘 요소 때문에 젊은이들을 혁명의 대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비판하는 글이 「신청년」에 개재되기도 했다고 해요. 제가 원 텍스트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요. 크릴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 무위에 대한 해석의 기조는 20세기 초반 거휘로부터 오는 것에 가까울 거예요. 아니면 그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게 했던 어떤 주석적인 근거가 그 이전 문헌들 속에 있던가. 분명히 그런 방식의 해석의 기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생각하려고 하는 고대 텍스트로서의 노자, 그것만 갖고 애기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누가적 해석을 하든 도가적 해석을 하든 전혀 불가능해요.
자 그러면 아주 쉬운 얘기부터 시작을 해보죠. 보통 무위라고 하는 말을 無爲, 쉬우니까 한자로 써볼게요. 그냥 풀면 함이 없다인데요. 그런데 실제 위라고 하는 말은 두가지의 뜻을 갖고 있죠. 하다, 그리고 되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무위란 말을 그대로 텍스트의 맥락속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좋은데 우리의 뇌리 속에는 두 글자가 첨가되어 반드시 같이 들어와요. 自然 이 말이 들어오지 않아도 이 말을 끼고 해석을 하는거죠. 이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무위자연이란 말이 같이 나오는 텍스트는 후안시대 철학자 왕충의 책에서 비로소 나오고 한 대, 전한 시대 문헌 어디에도 이 두 가지가 같이 등장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중요해요. 그런데 더 재미난 것은, 사실 이 두 가지가 붙기 쉬워요. 과거 전통 속에서 무위자연이란 말이 붙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데 지금 우리들이 자연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두 가지를 붙여 읽으면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自然 이 말이 서양의 nature의 번역어로 쓰이게 되면서 비롯되는 문제에요. 自然이라는 말이 무엇과 대립되느냐 文明. 이것과 대립되는 방식으로 생각을 하죠. 그래서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는 노자는 문명비판, 누가로 대변되는 이른 바 예교주의자들 혹은 문명론자들에 대해서 자연을 옹호하는 자연주의자라고 거의 도식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족보가 없는 해석이에요. 오늘 이런 개념에 대한 의미 맥락들을 자연스럽게 따져보게 될텐데요. 自然과 文明 이 말은 기본적으로 연속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아주 쉽게 알고 있는 맹자의 사단설을 생각해보세요. 왕필이 노자를 해석하면서 그와 같은 기조가 그대로 들어와요. 사단설이라고 하는 것을 쉽게 풀이하면 단초라고 하는데요. 본래 맹자가 그런 말을 쓸 때의 용어 방식은 뿌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아요. 식물적인 은유로 하는거에요. 말하자면 인간을 한 그루의 나무, 혹은 식물에 비유한다면 내 씨앗 속에 도덕적인 마음이 활성화 된다거나, 보통 발한다고 하죠. 그렇게 될 수 있는 장치가 내 몸속에 유전자처럼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거에요. 그것이 적절한 상황, 환경, 체험에 의해서 적절하게 물이 들어가고 햇빛을 받고 할 때 싹이 점점 커 나가는 것처럼 자라나는 것이에요. 사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당위에 의해서 혹은 억지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발화하듯이 내 몸속에 드리워져 있는 도덕적인 프로그램이 주변 환경에 따라서 적절하게 발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아요. 그렇게 이루어진 인륜적 질서가 바로 문명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자연에 반하는 것입니까 자연에 순하는 것입니까. 유가학자들이 꿈꾸었던 세계라는 것은, 어떤 인력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장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회적 질서에 구현하려고 했던 곳 바로 공맹유학전통이에요. 무위라고 하는 말은 노자에서 두 가지 용어를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도와 관련해 서술할 때의 무위를 빼놓고 인간과 사회와 관련해서 무위가 두드러지게 쓰이는 경우는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이 의미를 잘 곱씹어 보세요. 과연 이런 요소가 있는지. 無爲而無不爲 무위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해도 결국 무위는 자기가 하고자 했던 것을 못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럼 그 의미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생각이 될겁니다. 爲 ― 則無不治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효과 중심으로 생각하는 건데요. 다른 아주 비견한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와이프랑 자주 싸워요. 결국 싸움의 끝은 화해잖아요. 부부간에 힘든 것이 아침에 싸워도 저녁에 꼭 얼굴을 봐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화해를 해요. 저희 집 사람도 철학과 출신입니다. 그래서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누가 잘못을 했는지 따져보자 하면서 그 날 일부터 십년 전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 얘기까지 다 나와요. 그러니까 부부간 싸움에서 합리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인 경우가 많죠. 그래서 방법을 바꿨어요 한동안. 막 뭐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미안한 표정만 지으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화해를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되는 거죠. 그게 한동안은 써먹혔죠.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니까 말을 안 하면 ‘너 불만 있냐?’ 그러죠. 이제 약발이 안되는 거죠. 여기에서 무위라는 것이, 계속 말을 통해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보자. 그 origin을 따져봐서 니 잘못이면 니가 미안하다고 하면 되고, 내가 받아주면 되고 그렇게 해서 해소되던 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안되요. 사실 연애할 때는 됐는데 결혼하니까 바로 안 되더라구요. 이 말은 무위라는 글자가 황제가 정무를 보는 용상, 의자 뒤에 금박으로 붙어 있다고 했죠. 누구의 행위인가를 바로 직결해 해석할 때, 그 이후에 사대부들이 쓰는 해석이라든가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예를 들면 불교의 열반을 해석할 때 무위라는 용어를 쓰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죠. 하지만 선진 텍스트에서 무위는 특히 노자에서 무위는 이것이 대표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반문명의 대명사가 되고요. 따라서 노자는 자연주의자이고 문명대신에 환경을 인위대신에 자연을 이런 방식으로 도식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바로 20세기 동양철학 해석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서구철학의 반대급부로 도식적으로 해석해온데 있어요. 저쪽은 악이고 우리는 선이에요. 이와 같은 사고를 조장했던 대표적인 논리가 바로 중체서용론이고 동도서기론이에요. 그러니까 기술문명, 과학문명이 결국 1, 2차 대전 혹은 식민지 지배와 같은 폭력을 낳았다면 한국에서 말하는 도 중국에서 말하는 체 이런 것들은 우위의 것이다. 따라서 중체서용론, 동도서기론에서 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근대 철학적 용어로 따진다면 주체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해요. 거기에 온갖 것을 더하면 내용물이 공허합니다 사실. 추상적이잖아요. 이 사람들이 정치적인 용어로 특화시켰을 때는 그것이 주권이고 주체고, 민족이 되는거죠. 나중에 그걸로 엮어내려고 했던 것이요. 그걸 뒤집었던 이택후가 서체중용론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사람만 독특해요. 그런데 서체중용론이라고 하는 이택후의 말은 일반적인 중체서용론의 논리와 거꾸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용이 똑같아요. 왜냐하면 이택후라는 사람이 중국 정신 혹은 중국 문명의 핵심이 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또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다 끝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선진시대의 무위라는 말이 <노자>에만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노자>하면 무위, 무위자연이 너무 특화되다 보니까 마치 노자이외에는 무위를 이야기 하지 않은 것처럼, 분명히 텍스트 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 삭제시키는데 문제가 있죠.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와 같은 커다란 지형도를 살펴봄으로써 <노자>의 무위가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1페이지를 보시면 거기 유가문헌에서도 몇 번씩 나와요. 하지만 특별히 대단한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들을 해왔죠. 그런데 현대 무위 연구에서 독특한 분수령을 이룬 사람이 H.G. 크릴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시카고 대학에 있던 사람인데요. 우리말로 번역되어있지 않은 <What is Taoism>라는 책에 논문들을 묶어서 냈는데요. 이 사람에 의하면 거기 한 번 보세요. 글 가운데 무위의 기원에 관하여 라는 글을 썼어요. 이것이 중국이 아닌 외국에서 나온 황로학과 관련한 최초의 논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무위가 <노자>에는 12번 <장자>에는 56번이 나오는데요. <노자>는 50%, <장자>는 32%가 통치와 관련한 맥락에서 쓰입니다. <장자>도 그렇다고 하는 것은 특이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장자 네 편에는 무위라는 말이 세 번 밖에 안나와요. 그래서 <장자>의 무위 개념이 아주 독특하고 장자가 말하는 무위개념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유의미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충분히 현대사회에서도 계승할 수 있는 개념내용들을 갖고 있다면 노자의 무위 개념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저항해야할 형식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크릴은 이와 같은 빈도수를 통해서 유학 쪽에서는 무위와 관한 관심이나 활용이 적었던 반면 오히려 노장 쪽에 자주 빈출하는 것을 보죠. 크릴이 이 논문을 쓸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구조가 본래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라고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던 말이죠. 그런데 크릴은 그 설을 따지지 않고 고사변파의 목소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노자>가 기원전 3세기경에 편집돼 문헌이라는 것 것을 지지해요. 따라서 이 사람 성격에 의하면 <장자>가 <노자>보다 앞선 책이에요. 그 논리에 따르면 장자 속에는 굉장히 관조적인 내용들이 풍부하죠. 분명히 엄존합니다. 따라서 훨씬 관조적인 지형도에서 <노자>는 특별한 어떤 관점을 특화시켜서 나온 도가라고 하는 해석을 이 사람은 지지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위라고 하는 개념의 기원은 <노자>나 <장자>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라 신불해(申不害) 라고 하는 이른바 형명법술(刑名法術) 혹은 형명지술(形名之術). 형명법술은 조금 있다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하고요. 형명지술을 달리 말하자면 신하를 다스리기 위한 방법이에요. 형명지술은 통치술이면서 요즘 식으로 하면 부하직원을 관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형명지술을 이야기했던 신불해로부터 그 이후에 이른바 주술적 무위라고 할 수 있는, 통치술로서의 무위라는 개념이 발화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지형도 속에서 한나라 무제 때 이른바 과거제도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다는 것이 크릴이란 사람의 주된 논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과거제도라는 것이 유학에서 주장하는 제도처럼 알고 있죠.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써. 하지만 유학이 주장했던 선발제도는 천거제에요. 유학은 천거제죠. 그것을 나쁜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얘길 하는데요. 달리 말하면 아는 사람을 추천해서 쓰는거에요. 그럼 뭡니까. 끈이론이죠. 끈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하는거에요.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끈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한다는 것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을 쓸 수가 없죠. 모르는 사람을 썼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압니까. 거혈량이라고 하잖아요. 거혈량. 지혜롭고 도덕적인 사람. 그리고 충분히 그 위인됨을 확인해봤기 때문에 따라서 저 사람을 공직에 앉혀놓아도 딴짓할 리가 없다. 이것이 기본적인 기반이에요. 그리고 자기와의 관계. 따라서 조절할 수도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 모르는 사람은 통제 못하죠. 법관은 모르는 사람을 통제해야 한다에 기초해 있어요. 그러니까 선발하는 거죠. 그리고 상호경쟁과 감시, 이것이 한비자의 신하통치술의 핵심입니다. 요즘에 그런 책이 많이 나오잖아요. 처세에 관한 것. 처세에 관한 것이 한편으로는 필요성 자체를 완강하게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런데 갈수록 처세의 문제가 도덕적인 처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처세와 관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무한경쟁의 틀 속에서 처세로 귀결되다 보니까, 사실 전통사회와 우리의 문화적인 풍토와 윤리적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그것이 완전히 나쁜 말로 들리는데요. 전통사회에서는 문화적인 기제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중국 역대, 조선조 역대 관료들의 부패라고 하는 문제는 있죠. 하지만 그것은 베버가 이야기했듯이 오히려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지 않습니까. 전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똑같은 것처럼. 그래서 유학이라는 학문의 진정한 정신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반 시민윤리 차원이라고 하기보다는 공직자 윤리에요. 부패방지를 위한 심신수양이지, 우리는 심신수양할 기회가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하기도 버겁단 말이죠. 심지어. 그래도 술 마실 때는 즐거워야하는데 그래서 폭탄주라는 문화 웬만하면 익숙하시죠. 요즘은 기업에서들 잘 안마시고 그러는데요. 폭탄주 문화를 퍼뜨린 것이 군인집단하고 법조계 그것이 경제계까지 왔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한동안 폭탄주를 즐겨하는 사람이 있어서 먹어봤는데 소맥은 괜찮더라구요. 제일 많이 먹었던 것이 열다섯 잔까지 먹어봤는데 아침에 부담이 적어요. 양주랑 먹을 때 비해서. 저는 독주가 맞는 것 같아요. 술 그렇게 많이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닭갈비나 꼼장어 놓고서 맥주 마시고 소주 마실 때는 친구랑 편한 사람들이랑 매일 공자왈 맹자왈 이야기하니까 즐겁단 말이에요. 그런데 폭탄주 마시고 좋은 술 마시는 자리는 그 술자리는 거의 정치이거나 아부해야하고 잘 보여야 하고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 자리죠. 사실은 잠자는 시간 빼놓고는, 결혼하면 잠자는 자리도 힘들죠.. 잠자는 시간까지 합쳐서 스트레스 속에서 사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심신수양? 불가능하죠. 주어진 일이나 어떻게 편하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같은 사람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 있죠. 땡땡이. 땡땡이가 좀 있어야 하는데. 장자가 말하는 소요라는 것이 당시 서민들에게 적용된다면 요즘말로 땡땡이에요. 너무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땡땡이라는 말에 대해서 의미부여를 해야 해요. 우리의 삶의 입장에서 고전을 읽어야지요.. 조금 나아간 얘기네요.
3페이지 보면 에임스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선진 제자백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용어가 무위이고 특히 순자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무위는 군주의 덕이 드러나는 행위방식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또 확인해 볼 겁니다. 더군다나 슬린저랜드라는 사람은 무위를 주제로 해서 책 한권을 썼어요. 이 사람이 뭐라고 평가를 하냐면 자기수양과 관련되는 공통의 개념적 은유이자 정신적 이상을 표현하는 용어라고 상당히 기존의 해석과 가까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공통의 용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논어에서부터 모든 텍스트들에는 거의 다 무위가 들어 있고 예를 들면 <여씨춘추전>에는 무위가 안 나와요. 이렇게 한 두 문헌을 빼놓고는 대개 다 무위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면 무위가 같은 뜻이겠느냐 다르다는 것이죠. 노자의 무위말고 훨씬 다양한 무위의 세계가 있는데 선진시대로부터 한 대까지만 제한하더라도 대략 네 가지 정도 의미의 무위를 추출할 수 있어요. 물론 이것은 천이라든가 도와 같은 우주론이라든가 형이상학을 제외하고 인간과 관련한 분야에서 얘기할 때만 네 가지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네 가지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주술, 두 번째는 소요, 세 번째는 양신, 네 번째는 덕화입니다. 대략 출전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죠. 주술이라는 표현은 회남자의 한 편명입니다. 이것은 에임스라는 사람이 그 편을 번역을 하고 논문을 쓰면서 사용했던 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해요. 이것은 뭐라고 번역했냐면 Art of Rulership. 군주 노릇하는 예술, 총체적이라는 것이죠. 주술은 굉장히 폭넓습니다. 이 논의 속에서 크게 보면 양신이 주술에도 포함이 되죠. 하지만 양신이 반드시 주술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에 빼긴 했습니다. 노자에서는 주술과 양신이 대표적입니다. 천과 도에 관한 서술적 용법 빼놓고는 주술과 양신이 가장 기조적으로 커요. 하지만 본 텍스트에서는 주술쪽이라면, 하상공 주석에서 두 가지를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부분은 양신과 주술입니다. 그리고 소요는 <장자> 소요에 나오는 포현입니다. 그래서 소요 방식의 무위개념이 다른 것과 차별되고 독특합니다. 그리고 양신은 나중에 도교 계열로 이어져서 굉장히 신비주의화 되고 다양한 방식의 갈래들이 나옵니다. 요즘말로 쉽게 말하자면 명상술이에요. 다만 우주론 혹은 기론 그 다음에 당시의 의학사상 등과 긴밀한 연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양신이라는 용어를 쓴 겁니다. 즉 정신을 기르는 것과 관련된 것이죠. 그래서 무위가 정신을 기르는 행태를 표현하는 말 혹은 그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도 나옵니다. 장자에서도. 그다음에 덕화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유가적인 개념입니다. 유가적인 개념에서 본다면 군주의 덕이 온 천하에 실현되는 것 그것은 곧 치의 상태를, 치천하를 이룬 거죠. 그것이 곧 덕화고 그와 관련된 것을 무위라고 표현합니다. 논어에도 나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고, 왕필이 <노자>를 해석할 때 무위 개념은 바로 그것과 연결하는데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또 한 가지 주제이기도 합니다. 4페이지를 보시면 먼저 두 가지를 묶었는데요. 제가 원래대로 하면 주술과 양신을 묶는 것이 훨씬 좋아요. 그런데 왜 주술과 소요를 묶었느냐 하면 대비를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은 모든 문명적 요소의 부정과 자유방임이라고 무위를 해석해요. 이것이 바로 기조입니다. 이 기조를 우리나라에 퍼뜨린 것은 함석헌 선생님의 해석이 가장 큰 역할을 했는데요. 함석헌 선생님도 본인이 독창적으로 했다기 보다 톨스토이가 노자를 번역까지 하려 했었고 꽤 많은 글을 썼어요. 그런데 함석헌 선생님이 톨스토이 평화사상에 심취했었죠. 톨스토이마저도 노자의 무위를 극찬하는 것을 보면서 그 쪽을 연결시켰고 특히 함석헌 선생님이 그런 예를 들었죠. 50년대 초반, 일제 때 동원전쟁 때문에 민둥산이 된 우리나라 산에 조림사업을 하기 위해서 영국의 유명한 산림전문가를 초빙을 했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공항에서 출국하기 직전에 기자회견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의 자연을,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let it be 라고 답했다고 하죠. 그래서 도올 선생님은 노자와 20세기 강의할 때 let it be 음악 틀면서 노래까지 했잖아요. let it be 우리말로 하면 뭡니까. 냅둬유. 간섭하지 마라, 건드리지마라 라고 하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사회에서는 노장사상하면 자연주의, 환경, 생태 쪽으로 연결하는 교두보를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 것들이 우리사회의 중요한 계기였던 거죠. 노자나 장자라는 텍스트 속에 환경에 관한 고민 전혀 없는데 말이에요. 우리에게 소중한 노자나 장자는 함석헌 선생이라는 얘기에요. 얼마나 파급력있습니까. 제가 책 몇 권 쓰는 것보다 함석헌 선생이 한 번 얘기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힘을 가진 담론이라고 하는 거죠. 노자의 원래 텍스트가 이렇고 저렇다는 학적인 것보다 실제로 우리 삶속에서 노자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노자가 무슨 진리를 갖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자에 빙자해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거죠. 그 이야기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가 아니라 인간 누구나 같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데, 노자를 통해서 환경을 아껴야되고 그것은 간섭하지 않는 데 있고, 또 마찬가지로 독재가 국민의 삶에 간섭하지 않을 때 그들의 삶이 풍성해질 수 있다. 바로 함석헌 선생의 무위 개념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불간섭과 그리고 치자, 정권의 국민에 대한 불간섭. 즉 자유와 민주죠. 달리 말하면 우파담론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담론의 대명사 속에서 역할을 해온거죠. 오늘날에 그 지형도가 깨지고 나니까 약간 복잡해졌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홍세화 선생님의 해석입니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오히려 다석 유영모, 함석헌, 그리고 문익환 선생님 같은 이런 분들이야말로 한국에서 계승할만한 의미가 있는 중요한 보수주의자들이다. 참 맞는 것 같아요. 그럼 요즘 말하는 보수는 뭘까요. 참 알쏭달쏭하죠.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3_0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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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3
김시천 제3강 『노자』와 무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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