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김시천 제3강 『노자』와 무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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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노자』와 무위 1

◆ 『노자』와 무위


▲ 노자 해석의 다양성

원래 처음에 예고했던 것과는 조금 순서가 바뀌었죠. 바뀐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개념에 대한 의미, 맥락을 짚어보는 작업을 하고 나면 뒤에 것을 얘기하기가 더 편할 것 같고, 여기에 대한 이해가 사실은 노자 철학의 이해 전반과 완전히 엇갈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좀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를 먼저 하고 나면, 나중에 원래 하려고 했던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훨씬 더 많은 다른 얘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목이 좀 특이하죠. 마키아벨리즘인가, 아나키즘인가? 제목을 잘 뽑아요 원래 제가. 그런데 좀 낯설죠. 예를 들면 동아시아 사상에서 마키아벨리라고 이른 바 별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노자가 아니라 한비자죠.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흔히 무시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한비자의 정치술적인 사상이 도가의 형이상학적인 배경을 깔고 나왔다라는 식의 얘기는 철학사에서 흔히 하는 얘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무위를 해석할 때와 한비자의 무위를 이야기할 때는 전혀 달리 해석해요. 바로 그 부분에 관한 고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테고요.

또 하나는 아나키즘이라는 용어인데요. 아나키즘이라는 말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어 들어오는 바람에, 상당히 논의에 대한 헌탁이 큰 데요. 원래는 희랍어에서 온거죠. 권위의 중심이 되는,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없다는 뜻인데요. 정부가 없다라고 하는 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 아나키즘이 최근에 부활하고 있죠. 동아시아 근대 사상을 이야기할 때도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고요.

특히 노자와 관련해서 아나키즘은 중국 공산당 초기 멤버였던 진독수(천두슈 , 陳獨秀)가 노자 사상을 지칭하면서 노자에 들어있는 아나키즘 요소 때문에 젊은이들을 혁명의 대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비판하는 글이 「신청년」에 개재되기도 했다고 해요. 제가 원 텍스트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요.

크릴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 무위에 대한 해석의 기조는 20세기 초반 거휘로부터 오는 것에 가까울 거예요. 아니면 그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게 했던 어떤 주석적인 근거가 그 이전 문헌들 속에 있던가. 분명히 그런 방식의 해석의 기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생각하려고 하는 고대 텍스트로서의 노자, 그것만 갖고 애기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누가적 해석을 하든 도가적 해석을 하든 전혀 불가능해요.


▲ 무위의 본래 의미

자 그러면 아주 쉬운 얘기부터 시작을 해보죠. 보통 무위라고 하는 말을 無爲, 쉬우니까 한자로 써볼게요. 그냥 풀면 함이 없다인데요. 그런데 실제 위라고 하는 말은 두가지의 뜻을 갖고 있죠. 하다, 그리고 되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무위란 말을 그대로 텍스트의 맥락속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좋은데 우리의 뇌리 속에는 두 글자가 첨가되어 반드시 같이 들어와요.

自然 이 말이 들어오지 않아도 이 말을 끼고 해석을 하는거죠. 이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무위자연이란 말이 같이 나오는 텍스트는 후안시대 철학자 왕충의 책에서 비로소 나오고 한 대, 전한 시대 문헌 어디에도 이 두 가지가 같이 등장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중요해요.

그런데 더 재미난 것은, 사실 이 두 가지가 붙기 쉬워요. 과거 전통 속에서 무위자연이란 말이 붙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데 지금 우리들이 자연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두 가지를 붙여 읽으면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自然 이 말이 서양의 nature의 번역어로 쓰이게 되면서 비롯되는 문제에요. 自然이라는 말이 무엇과 대립되느냐 文明. 이것과 대립되는 방식으로 생각을 하죠.

그래서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는 노자는 문명비판, 누가로 대변되는 이른 바 예교주의자들 혹은 문명론자들에 대해서 자연을 옹호하는 자연주의자라고 거의 도식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족보가 없는 해석이에요.

오늘 이런 개념에 대한 의미 맥락들을 자연스럽게 따져보게 될텐데요. 自然과 文明 이 말은 기본적으로 연속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아주 쉽게 알고 있는 맹자의 사단설을 생각해보세요. 왕필이 노자를 해석하면서 그와 같은 기조가 그대로 들어와요.

사단설이라고 하는 것을 쉽게 풀이하면 단초라고 하는데요. 본래 맹자가 그런 말을 쓸 때의 용어 방식은 뿌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아요. 식물적인 은유로 하는거에요.

말하자면 인간을 한 그루의 나무, 혹은 식물에 비유한다면 내 씨앗 속에 도덕적인 마음이 활성화 된다거나, 보통 발한다고 하죠. 그렇게 될 수 있는 장치가 내 몸속에 유전자처럼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거에요.

그것이 적절한 상황, 환경, 체험에 의해서 적절하게 물이 들어가고 햇빛을 받고 할 때 싹이 점점 커 나가는 것처럼 자라나는 것이에요. 사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당위에 의해서 혹은 억지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발화하듯이 내 몸속에 드리워져 있는 도덕적인 프로그램이 주변 환경에 따라서 적절하게 발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아요.

그렇게 이루어진 인륜적 질서가 바로 문명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자연에 반하는 것입니까 자연에 순하는 것입니까. 유가학자들이 꿈꾸었던 세계라는 것은, 어떤 인력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장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회적 질서에 구현하려고 했던 곳 바로 공맹유학전통이에요.

순자에 들어가서 상당히 인위적인 개입, 제도적인 간섭과 같은 요소들이 많이 등장해요. 공맹전통에 대해서 신조가들이 그렇게 옹호했던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던 것이고 이런 점은 최근에 진화론적인 용어로 해석할 때 훨씬 더 부드럽고 쉽게 해석됩니다. 이것은 잠시 접기로 하고요.

무위라고 하는 말은 노자에서 두 가지 용어를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도와 관련해 서술할 때의 무위를 빼놓고 인간과 사회와 관련해서 무위가 두드러지게 쓰이는 경우는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이 의미를 잘 곱씹어 보세요. 과연 이런 요소가 있는지.

無爲而無不爲 무위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해도 결국 무위는 자기가 하고자 했던 것을 못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럼 그 의미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생각이 될겁니다.

爲 ― 則無不治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효과 중심으로 생각하는 건데요. 다른 아주 비견한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와이프랑 자주 싸워요. 결국 싸움의 끝은 화해잖아요. 부부간에 힘든 것이 아침에 싸워도 저녁에 꼭 얼굴을 봐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화해를 해요. 저희 집 사람도 철학과 출신입니다. 그래서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누가 잘못을 했는지 따져보자 하면서 그 날 일부터 십년 전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 얘기까지 다 나와요. 그러니까 부부간 싸움에서 합리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인 경우가 많죠. 그래서 방법을 바꿨어요 한동안. 막 뭐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미안한 표정만 지으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화해를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되는 거죠. 그게 한동안은 써먹혔죠.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니까 말을 안 하면 ‘너 불만 있냐?’ 그러죠. 이제 약발이 안되는 거죠. 여기에서 무위라는 것이, 계속 말을 통해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보자. 그 origin을 따져봐서 니 잘못이면 니가 미안하다고 하면 되고, 내가 받아주면 되고 그렇게 해서 해소되던 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안되요. 사실 연애할 때는 됐는데 결혼하니까 바로 안 되더라구요.

이 말은 무위라는 글자가 황제가 정무를 보는 용상, 의자 뒤에 금박으로 붙어 있다고 했죠. 누구의 행위인가를 바로 직결해 해석할 때, 그 이후에 사대부들이 쓰는 해석이라든가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예를 들면 불교의 열반을 해석할 때 무위라는 용어를 쓰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죠.

하지만 선진 텍스트에서 무위는 특히 노자에서 무위는 이것이 대표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반문명의 대명사가 되고요. 따라서 노자는 자연주의자이고 문명대신에 환경을 인위대신에 자연을 이런 방식으로 도식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바로 20세기 동양철학 해석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서구철학의 반대급부로 도식적으로 해석해온데 있어요. 저쪽은 악이고 우리는 선이에요. 이와 같은 사고를 조장했던 대표적인 논리가 바로 중체서용론이고 동도서기론이에요.

그러니까 기술문명, 과학문명이 결국 1, 2차 대전 혹은 식민지 지배와 같은 폭력을 낳았다면 한국에서 말하는 도 중국에서 말하는 체 이런 것들은 우위의 것이다. 따라서 중체서용론, 동도서기론에서 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근대 철학적 용어로 따진다면 주체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해요. 거기에 온갖 것을 더하면 내용물이 공허합니다 사실. 추상적이잖아요. 이 사람들이 정치적인 용어로 특화시켰을 때는 그것이 주권이고 주체고, 민족이 되는거죠. 나중에 그걸로 엮어내려고 했던 것이요.

그걸 뒤집었던 이택후가 서체중용론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사람만 독특해요. 그런데 서체중용론이라고 하는 이택후의 말은 일반적인 중체서용론의 논리와 거꾸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용이 똑같아요. 왜냐하면 이택후라는 사람이 중국 정신 혹은 중국 문명의 핵심이 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또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다 끝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선진시대의 무위라는 말이 <노자>에만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노자>하면 무위, 무위자연이 너무 특화되다 보니까 마치 노자이외에는 무위를 이야기 하지 않은 것처럼, 분명히 텍스트 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 삭제시키는데 문제가 있죠.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와 같은 커다란 지형도를 살펴봄으로써 <노자>의 무위가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 무위의 기원

1페이지를 보시면 거기 유가문헌에서도 몇 번씩 나와요. 하지만 특별히 대단한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들을 해왔죠. 그런데 현대 무위 연구에서 독특한 분수령을 이룬 사람이 H.G. 크릴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시카고 대학에 있던 사람인데요. 우리말로 번역되어있지 않은 <What is Taoism>라는 책에 논문들을 묶어서 냈는데요.

이 사람에 의하면 거기 한 번 보세요. 글 가운데 무위의 기원에 관하여 라는 글을 썼어요. 이것이 중국이 아닌 외국에서 나온 황로학과 관련한 최초의 논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무위가 <노자>에는 12번 <장자>에는 56번이 나오는데요. <노자>는 50%, <장자>는 32%가 통치와 관련한 맥락에서 쓰입니다. <장자>도 그렇다고 하는 것은 특이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장자 네 편에는 무위라는 말이 세 번 밖에 안나와요. 그래서 <장자>의 무위 개념이 아주 독특하고 장자가 말하는 무위개념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유의미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충분히 현대사회에서도 계승할 수 있는 개념내용들을 갖고 있다면 노자의 무위 개념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저항해야할 형식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크릴은 이와 같은 빈도수를 통해서 유학 쪽에서는 무위와 관한 관심이나 활용이 적었던 반면 오히려 노장 쪽에 자주 빈출하는 것을 보죠. 크릴이 이 논문을 쓸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구조가 본래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라고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던 말이죠. 그런데 크릴은 그 설을 따지지 않고 고사변파의 목소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노자>가 기원전 3세기경에 편집돼 문헌이라는 것 것을 지지해요. 따라서 이 사람 성격에 의하면 <장자>가 <노자>보다 앞선 책이에요. 그 논리에 따르면 장자 속에는 굉장히 관조적인 내용들이 풍부하죠. 분명히 엄존합니다. 따라서 훨씬 관조적인 지형도에서 <노자>는 특별한 어떤 관점을 특화시켜서 나온 도가라고 하는 해석을 이 사람은 지지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위라고 하는 개념의 기원은 <노자>나 <장자>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라 신불해(申不害) 라고 하는 이른바 형명법술(刑名法術) 혹은 형명지술(形名之術). 형명법술은 조금 있다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하고요. 형명지술을 달리 말하자면 신하를 다스리기 위한 방법이에요. 형명지술은 통치술이면서 요즘 식으로 하면 부하직원을 관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형명지술을 이야기했던 신불해로부터 그 이후에 이른바 주술적 무위라고 할 수 있는, 통치술로서의 무위라는 개념이 발화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지형도 속에서 한나라 무제 때 이른바 과거제도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다는 것이 크릴이란 사람의 주된 논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과거제도라는 것이 유학에서 주장하는 제도처럼 알고 있죠.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써. 하지만 유학이 주장했던 선발제도는 천거제에요. 유학은 천거제죠. 그것을 나쁜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얘길 하는데요. 달리 말하면 아는 사람을 추천해서 쓰는거에요. 그럼 뭡니까. 끈이론이죠.

끈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하는거에요.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끈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한다는 것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을 쓸 수가 없죠. 모르는 사람을 썼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압니까. 거혈량이라고 하잖아요. 거혈량. 지혜롭고 도덕적인 사람.

그리고 충분히 그 위인됨을 확인해봤기 때문에 따라서 저 사람을 공직에 앉혀놓아도 딴짓할 리가 없다. 이것이 기본적인 기반이에요. 그리고 자기와의 관계. 따라서 조절할 수도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 모르는 사람은 통제 못하죠.

법관은 모르는 사람을 통제해야 한다에 기초해 있어요. 그러니까 선발하는 거죠. 그리고 상호경쟁과 감시, 이것이 한비자의 신하통치술의 핵심입니다. 요즘에 그런 책이 많이 나오잖아요. 처세에 관한 것. 처세에 관한 것이 한편으로는 필요성 자체를 완강하게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런데 갈수록 처세의 문제가 도덕적인 처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처세와 관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무한경쟁의 틀 속에서 처세로 귀결되다 보니까, 사실 전통사회와 우리의 문화적인 풍토와 윤리적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그것이 완전히 나쁜 말로 들리는데요. 전통사회에서는 문화적인 기제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중국 역대, 조선조 역대 관료들의 부패라고 하는 문제는 있죠. 하지만 그것은 베버가 이야기했듯이 오히려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지 않습니까. 전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똑같은 것처럼.

그래서 유학이라는 학문의 진정한 정신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반 시민윤리 차원이라고 하기보다는 공직자 윤리에요. 부패방지를 위한 심신수양이지, 우리는 심신수양할 기회가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하기도 버겁단 말이죠. 심지어.

그래도 술 마실 때는 즐거워야하는데 그래서 폭탄주라는 문화 웬만하면 익숙하시죠. 요즘은 기업에서들 잘 안마시고 그러는데요. 폭탄주 문화를 퍼뜨린 것이 군인집단하고 법조계 그것이 경제계까지 왔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한동안 폭탄주를 즐겨하는 사람이 있어서 먹어봤는데 소맥은 괜찮더라구요. 제일 많이 먹었던 것이 열다섯 잔까지 먹어봤는데 아침에 부담이 적어요. 양주랑 먹을 때 비해서. 저는 독주가 맞는 것 같아요. 술 그렇게 많이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닭갈비나 꼼장어 놓고서 맥주 마시고 소주 마실 때는 친구랑 편한 사람들이랑 매일 공자왈 맹자왈 이야기하니까 즐겁단 말이에요. 그런데 폭탄주 마시고 좋은 술 마시는 자리는 그 술자리는 거의 정치이거나 아부해야하고 잘 보여야 하고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 자리죠. 사실은 잠자는 시간 빼놓고는, 결혼하면 잠자는 자리도 힘들죠.. 잠자는 시간까지 합쳐서 스트레스 속에서 사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심신수양? 불가능하죠. 주어진 일이나 어떻게 편하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같은 사람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 있죠. 땡땡이. 땡땡이가 좀 있어야 하는데. 장자가 말하는 소요라는 것이 당시 서민들에게 적용된다면 요즘말로 땡땡이에요. 너무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땡땡이라는 말에 대해서 의미부여를 해야 해요. 우리의 삶의 입장에서 고전을 읽어야지요.. 조금 나아간 얘기네요.


▲ 무위를 이해하는 네 가지 방식

3페이지 보면 에임스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선진 제자백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용어가 무위이고 특히 순자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무위는 군주의 덕이 드러나는 행위방식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또 확인해 볼 겁니다.

더군다나 슬린저랜드라는 사람은 무위를 주제로 해서 책 한권을 썼어요. 이 사람이 뭐라고 평가를 하냐면 자기수양과 관련되는 공통의 개념적 은유이자 정신적 이상을 표현하는 용어라고 상당히 기존의 해석과 가까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공통의 용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논어에서부터 모든 텍스트들에는 거의 다 무위가 들어 있고 예를 들면 <여씨춘추전>에는 무위가 안 나와요. 이렇게 한 두 문헌을 빼놓고는 대개 다 무위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면 무위가 같은 뜻이겠느냐 다르다는 것이죠. 노자의 무위말고 훨씬 다양한 무위의 세계가 있는데 선진시대로부터 한 대까지만 제한하더라도 대략 네 가지 정도 의미의 무위를 추출할 수 있어요.

물론 이것은 천이라든가 도와 같은 우주론이라든가 형이상학을 제외하고 인간과 관련한 분야에서 얘기할 때만 네 가지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네 가지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주술, 두 번째는 소요, 세 번째는 양신, 네 번째는 덕화입니다. 대략 출전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죠.

주술이라는 표현은 회남자의 한 편명입니다. 이것은 에임스라는 사람이 그 편을 번역을 하고 논문을 쓰면서 사용했던 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해요. 이것은 뭐라고 번역했냐면 Art of Rulership. 군주 노릇하는 예술, 총체적이라는 것이죠. 주술은 굉장히 폭넓습니다. 이 논의 속에서 크게 보면 양신이 주술에도 포함이 되죠. 하지만 양신이 반드시 주술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에 빼긴 했습니다. 노자에서는 주술과 양신이 대표적입니다. 천과 도에 관한 서술적 용법 빼놓고는 주술과 양신이 가장 기조적으로 커요. 하지만 본 텍스트에서는 주술쪽이라면, 하상공 주석에서 두 가지를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부분은 양신과 주술입니다.

그리고 소요는 <장자> 소요에 나오는 포현입니다. 그래서 소요 방식의 무위개념이 다른 것과 차별되고 독특합니다.

그리고 양신은 나중에 도교 계열로 이어져서 굉장히 신비주의화 되고 다양한 방식의 갈래들이 나옵니다. 요즘말로 쉽게 말하자면 명상술이에요. 다만 우주론 혹은 기론 그 다음에 당시의 의학사상 등과 긴밀한 연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양신이라는 용어를 쓴 겁니다. 즉 정신을 기르는 것과 관련된 것이죠. 그래서 무위가 정신을 기르는 행태를 표현하는 말 혹은 그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도 나옵니다. 장자에서도.

그다음에 덕화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유가적인 개념입니다. 유가적인 개념에서 본다면 군주의 덕이 온 천하에 실현되는 것 그것은 곧 치의 상태를, 치천하를 이룬 거죠. 그것이 곧 덕화고 그와 관련된 것을 무위라고 표현합니다. 논어에도 나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고, 왕필이 <노자>를 해석할 때 무위 개념은 바로 그것과 연결하는데 있어요.


▲ 함석헌의 무위 해석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또 한 가지 주제이기도 합니다. 4페이지를 보시면 먼저 두 가지를 묶었는데요. 제가 원래대로 하면 주술과 양신을 묶는 것이 훨씬 좋아요. 그런데 왜 주술과 소요를 묶었느냐 하면 대비를 위해서입니다.
부제가 무엇이냐면 현실과 초월의 이중주라고 했죠. 무위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말 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어요. 그것의 당시의 정치의 지형도를 반영하고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이에요. 현재 우리 학계에서도 두 가지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두 분의 주장을 올려놓았는데요.

어떤 분은 모든 문명적 요소의 부정과 자유방임이라고 무위를 해석해요. 이것이 바로 기조입니다. 이 기조를 우리나라에 퍼뜨린 것은 함석헌 선생님의 해석이 가장 큰 역할을 했는데요. 함석헌 선생님도 본인이 독창적으로 했다기 보다 톨스토이가 노자를 번역까지 하려 했었고 꽤 많은 글을 썼어요. 그런데 함석헌 선생님이 톨스토이 평화사상에 심취했었죠.

톨스토이마저도 노자의 무위를 극찬하는 것을 보면서 그 쪽을 연결시켰고 특히 함석헌 선생님이 그런 예를 들었죠. 50년대 초반, 일제 때 동원전쟁 때문에 민둥산이 된 우리나라 산에 조림사업을 하기 위해서 영국의 유명한 산림전문가를 초빙을 했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공항에서 출국하기 직전에 기자회견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의 자연을,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let it be 라고 답했다고 하죠.

그래서 도올 선생님은 노자와 20세기 강의할 때 let it be 음악 틀면서 노래까지 했잖아요. let it be 우리말로 하면 뭡니까. 냅둬유. 간섭하지 마라, 건드리지마라 라고 하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사회에서는 노장사상하면 자연주의, 환경, 생태 쪽으로 연결하는 교두보를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 것들이 우리사회의 중요한 계기였던 거죠. 노자나 장자라는 텍스트 속에 환경에 관한 고민 전혀 없는데 말이에요.

우리에게 소중한 노자나 장자는 함석헌 선생이라는 얘기에요. 얼마나 파급력있습니까. 제가 책 몇 권 쓰는 것보다 함석헌 선생이 한 번 얘기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힘을 가진 담론이라고 하는 거죠.

노자의 원래 텍스트가 이렇고 저렇다는 학적인 것보다 실제로 우리 삶속에서 노자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노자가 무슨 진리를 갖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자에 빙자해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거죠.

그 이야기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가 아니라 인간 누구나 같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데, 노자를 통해서 환경을 아껴야되고 그것은 간섭하지 않는 데 있고, 또 마찬가지로 독재가 국민의 삶에 간섭하지 않을 때 그들의 삶이 풍성해질 수 있다.

바로 함석헌 선생의 무위 개념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불간섭과 그리고 치자, 정권의 국민에 대한 불간섭. 즉 자유와 민주죠. 달리 말하면 우파담론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담론의 대명사 속에서 역할을 해온거죠. 오늘날에 그 지형도가 깨지고 나니까 약간 복잡해졌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홍세화 선생님의 해석입니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오히려 다석 유영모, 함석헌, 그리고 문익환 선생님 같은 이런 분들이야말로 한국에서 계승할만한 의미가 있는 중요한 보수주의자들이다. 참 맞는 것 같아요. 그럼 요즘 말하는 보수는 뭘까요. 참 알쏭달쏭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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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3_02.htm

◆ 주술로서의 무위 개념 이해


▲ 주술의 무위

바로 네 가지로 들어가도록 하죠. 이 부분이 굉장히 재미난 동양철학적인 감수성이 아니면, 서구적인 철학에서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라거나 에피소드에 가까운데요. 사실 동양철학은 딱딱한 논리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적법하지 않을까 해요. 그래야지 문학과의 연계성도 쉽게 확보할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면 텍스트를 이것은 철학책이다라고 규정하고 읽으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회자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다른 데로 빠지면 안되니까 계속 가죠.

먼저 주술의 무위부터 보죠. 주술의 무위는 조금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형명법술을 보통 원리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형이라고 하는 글자가 아주 독특한데요. 이 形 (형)은 보통 모양 (형)이라고 우리가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이것은 보통 刑 과 혼용되거든요.

刑 (형)은 뭐에요. 형벌이죠. 그래서 이것은 옛날에 춘향전 할 때마다 나오는 칼 쓰고 있는 것 있죠. 그거거든요. 그래서 이 形(형) 자는 인간의 신체라는 뜻도 들어있어요. 그래서 形神 (형신) 혹은 무협지 보면 神形(신형)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단 말이에요. 이것이 몸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形神(형신), 神形(신형)이죠.

그런데 이 형명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크릴에 따르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면 퍼포먼스 (performance) 수행이란 뜻입니다. 수행. 어떤 목적이 있는 혹은 의도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것 그래서 形(형)은 사실은 인간의 신체라고 하는 것도 되지만 특정한 목적을 따라서 인간의 신체를 활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 그러니까 행위라는 뜻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는요.

刑(형) 이 형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요. 이 形(형) 이라는 글자가 形名이라고 할 때는 이른바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혹은 군주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신하들이 행해야하는 모든 활동이라는 뜻이기도 해요. 따라서 규범화 된 코드화된 행동들을 지칭하는 말이 形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形爲 (형위) 라고 구분하자고 한 분도 있었습니다. 논문으로 나온 것은 아니고 사석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런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유가를 대표하는 말이 유위라면 도가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장자적인 소요의 무위가 있고 그 다음에 형위가 있죠. 우리는 지금 이런 방식으로 텍스트를 해석하지는 않죠. 중요한 것은 고대인들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관점을 다른 것이에요.

예를 들면 법가들에게 있어서는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하고 마누라하고 어떻게 무슨 말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요. 다만 그 드러난 행동, 드러난 행동이 그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에 부합하는 행동이냐 아니냐만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 의미에 부합하는 말이 바로 形 이고 따라서 거기에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는 刑을 가하는 것이에요.

形名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지난번에도 제가 간략하게 얘기했지만요. 어떤 군주가 있어요. 특히 요즘 무협TV라든가 중화TV 이런 데 보면 선진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죠. 무협드라마, 무협영화.

거기 보면 회의하는 장면을 잘 보세요. 회의하는 장면을 잘 보시면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신하들이 좌우에 늘어서 있으면 무슨 사안이 생긴다 하면, 이 형명지술에 의하면 군주는 무언, 말 할 필요가 없어요. 또 어떤 의견을 제출할 필요도 없어요.

그것을 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무지라고 하죠. 無知(무지). 사실 무지라고 하는 말은 안다라는 뜻보다는 판단이라는 뜻에 가까워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어떤 아이디어도 제출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에요. 무위하는 것이죠.

그러면 지난번에 예를 들었던 것처럼 제가 어떤 나라의 군주에요. 신하들이 쫙 있는데 갑자기 옆나라에서 쳐들어온다 라고 사태가 일어났어요. 그럼 이 문제를 어이할꼬? 하면 A라고 하는 문신이 제가 그 옆 나라에 가서 저 쪽을 출병시켜서 지난번에 우리와의 맹약을 지켜서 배후를 치도록 하면 저들이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장군인 A라는 사람이 나서서 제가 5,000의 군사를 이끌고 어디를 가서 성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또 어떤 사람이 저에게 3,000만 주신다면 뒤로 돌아가서 기습공격을 해서 저들을 무너뜨리겠습니다.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에게 거기에 맞는 관직과 직책을 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名(명)이에요, 名. 그래서 어떠어떠한 직무를 담당한 누구라고 해서 군대의 출정을 할 때 장군에게 온갖 긴 명칭을 줘서 내보내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 名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리고 적을 격투했다, 이 사신은 갔다가 왔는데 설득하지 못해서 오히려 그 나라와 우리나라가 더 사이가 벌어졌다. 그러면 形과 名이 수행한 결과가 일치하지 않죠. 그러면 벌을 주고 오히려 관계가 돈독해지고 저쪽에서 출병을 제 때하는 바람에 이쪽에서 빨리 회군하게 됐어요. 그 때에 장군 A라는 사람이 가서 딱 지키고 있었고, B라는 사람이 가서 급습을 해서 엄청난 타격을 줘서 오히려 저들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우리가 배상금을 받게 됐다. 커다란 승리, 전과를 올린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수행결과와(形) 그 사람이 본래 제안했던(名) 내용, 직무수행, 직무와 비교를 해서 形 과 名 양자가 일치하면 상을 주고 불일치하면 벌을 주는 것이죠. 그래서 形名은 상벌이에요. 바로 가장 기본적인 형명지술로 이야기되는 것이 주술입니다.

오른쪽 6페이지에 보면 레오.S. 장이라고 하는 분이 황제사경이라고 하는 책을 연구하면서 이 주술개념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를 했는데요.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경쟁국가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천하에 대한 유일한 지배에 이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며, 모든 사람의 평안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마련된 정책들’

이것 전체가 주술이에요. 이 속에서 중요한 것, 그 속에 무위라는 개념이 들어간 까닭이 무엇이냐면 이 모든 행동들을 할 때 이 사람은 권력의 중심으로서 가만히 있는 것이지, 자기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올바른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적절한 전략들’
그 다음에 세 번째.
‘정치 투쟁에서 군주의 지위를 강화하고 관료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기술 또는 전술’ 이것이 특히 형명지술을 얘기하는 것이죠.
그 다음 네 번째.
‘군주가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충분한 정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 훈련 또는 수양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 이것은 바로 양신과 바로 연결되는 부분이에요.

주술이라고 하는 개념은 가장 커다란 개념이에요. 하지만 주술이라고 하는 것을 달리 말하면, 군주가 천하를 통치하고 유지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모든 술수와 전략, 정책들을 통칭하는 거라면 그러한 주술, 군주로서의 테크닉을 수행하는 과정에 군주의 행동이 드러나는 양식을 지칭하는 표현은 바로 무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무위라고 하는 개념이 주술이라고 하는 이른 바 군주 통치술에 행위 방식으로써의 개념, 그것이 특히 노자나 한비자, 신불해와 같은 사상가들의 책 속에 드러나는데 5페이지 보면 박스 속에 들어 있는 문장이 있죠.

이것은 신자라고 해서 신불해라고 하는 사람의 단편들을 모아 놓은 책인데요. 거기에 나오는 중요한 구절이에요.
【통치자는 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으니, 거울은 무위하지만 아름다움과 추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통치자는 균형을 잡는 저울과 같으니, 저울은 무위하지만 무거움과 가벼움이 저절로 얻어진다. 통치자가 이러한 방법에 따라 다스리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일삼는 것이 없게 된다. 일삼음이 없음에도 천하는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
거기에서 일삼음이 없음이 무사, 이것은 무위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비유를 보세요. 거울이라고 하는 비유가 나오고 저울이라고 하는 비유가 나오죠. 거울이 사물을 비출 때 뭐합니까? 거울은 가만히 있는데 그냥 비춰지는 것이죠. 또 저울이 뭘 합니까? 이것은 양팔 저울을 얘기하는 것이에요. 양쪽에 매다는 그것에 의해서 균형이 잡히는 것이지 저울 중심인 자기는 가만히 있어요. 그러니까 무위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왜 거울과 저울이 나오느냐하면요. 이것은 이제 양신과도 관련된 내용인데요. 여기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이라고 하는 표현, 그것이 본문에서는 미오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고대 일반적인 용어로 따지자면 好惡(호오)입니다.

好惡(호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보통 감정이라고 번역하지만 고대 용어로 해석하자면 情(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철학 연구할 때 가장 핵심적인 화두가 무엇이냐면 성도 아니고 리도 아니고 정이에요. 정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인 틀 속에서 자꾸 이것을 감정이라고 해석하다보니까 오해하게 되는데요. 저 문장 속에 들어있는 문장의 맥락을 한 번 곱씹어 보세요.

이것은 인체와도 관련되어있고 천지하고도 관련되어 있고 인간의 삶, 인간관계, 정치, 예술, 모든 것하고 직결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본성의 문제를 따질 때 성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목은 인성론이지만 고대어에서는 정이 그 핵심 내용이에요.

‘통치자는 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으니 거울은 무위하지만 아름다움과 추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것은 好惡로 바꾸어서 해석해도 똑같습니다. 이 문장의 맥락을 이해할 때 아주 쉬운 상황은 군주가 신하에게 보고를 받는 상황에서 생각하시면 되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다른 용례, 용법들을 소개해드릴게요. 첫 번째로 是非(시비)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보통 도덕적인 옳고 그름이라고 해석을 하죠. 그렇죠? 특히 유가에서 말하는 시비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이라고 해석을 해요. 그런데 이것은 틀린 해석이에요.

그렇게만 해석할 수가 없고요. 특히 맹자가 말하는 사단(四端)에서도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드러나 있죠. 이 시비지심을 우리는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이렇게 해석을 하죠. 그런데 이것은 틀린 해석이에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시비지심은 사양지심 수오지심과 더불어 내 몸 속에 내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즉 나의 감정기제가 발화하는, 드러나는, 표현되는 프로그램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맹자가 말하는 시비지심의 뜻은 무엇이냐면 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저 행동은 옳아 저 행동은 잘못됐어 라고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는 마음이 아니라 감정이에요, 감정.

예를 들어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노무현 정부 때 한미FTA를 실시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와아 하고 박수치며 ‘옳소!’하죠. 그게 是에요. 농민들, 축산업하는 분들, 요즘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하면 축산업하는 분들 어떻겠어요. 조류독감 때문에 난리 나있는데 하면서 벌써부터 이것이 非에요. 기분이 어때요. ‘이 더러운 세상, 아니다!’ 하는 마음이에요.

시비지심이라고 하는 것이 옳고 그름의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맹자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수천만인이 나에게 옳다하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 돌아봐서 내가 옳다면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하는 방식의 마음가짐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따져보니까 ‘아, 이것은 진리야, 이런 것이 아니라 신념, 감정, 합리적 판단 이런 것들이 드러선 감정 전체를 얘기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법가로 가면 그런 심리적 근거에 관한 것들은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아까 형명을 얘기했지만 그 수행한 행동의 결과形가 그 사람이 본래 맡았던 직무名 와 일치한다 그러면 是에요. 非 는 불일치한다에요. 따라서 是非는 굉장히 건조하고 행정적인 용어에요.
법가에서 말하는 도덕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국가 통치를 하는 데 있어서 군주의 자리를 지키는 데 있어서 그 수행한, 제안된 내용이 일치하느냐 아니냐 불일치의 여부만 판정하는 것, 그것이 옳고 그름이에요. 사실 대부분의 행정 관료라든가 정치인들은 그와 같은 기준에 의해서 사고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대 텍스트를 읽을 때 글자가 같다고 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어야 되고 그런 부분에서 읽어야 되요.

그런데 이 是非(시비)라고 하는 것, 이것도 정입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모든 힘과 관련된 형태들은 전부 다 정으로 귀결되는데 그 정의 가장 근원적인 두 가지 방식, 양태는 호와 오에요. 긍정적인 방식의 감정과(好), 부정적인 방식의 감정(惡).

내가 어떤 사태에 대해서 싫다 그르다 옳다 맞다 이런 식으로 할 때 내 몸속에서 움직이는 가장 쉬운 것은 뭡니까. 싫은 것이에요. 미운 것이에요. (惡) 그리고 좋은 것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好)

나중에 노자를 해석할 때 왕필이 이 용어 (好惡)를 쓰면서 그와 같이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칠정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감정의 다양한 기제들과 연결되어있지만 그 모든 감정기제를 딱 두 가지로 압축해서 말하면 좋은 것과 싫은 것이에요. 단순하잖아요.

인간의 행동의 동인이 바로 이 호에 있다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유가는 저 호의 감정을 조절해야 된다, 금욕해야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야 될 때 화를 내는 것이죠. 화 내야 할 때 화 안 내면 바보되죠.

쉽게 생각해보세요. 제가 지나가는 데 누가 제 머리를 딱 때려요. ‘야 반갑다’ 기분 나쁘잖아요. 그런데 딱 봤더니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그러면 맞은 것이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빴지만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반가운 감정이 되죠.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뒤에서 딱 때렸을 때 가만히 있으면 ‘병신’ 하면서 또 때려요. 딱 때렸는데 모르는 사람이라면 인상을 팍 쓰면서 마치 싸울 기세로 호르몬이 분비가 되겠죠. 화를 내야지만 ‘아 쟤도 때리면 꿈틀거리는구나 아니면 잘못하면 맞겠구나’ 하면서 조심을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진화론에서 흔히 하는 단순한 얘기지 않습니까. 이것이 더 원초적으로는 공포의 감정이 가장 근원적이다 라고 얘기를 할 때, 惡(오)와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것처럼 문화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호오의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에요. 그래서 민심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정치를 할 때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 하면 당연히 정권의 정당성이 훼손되고 추진력을 얻을 수 없죠.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잘되잖습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좋은 것인데 사흘 후에 나쁜 일이 될 수 있는 것을 군주는 돌파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특히 호오가 공적인 차원과 사적인 차원이 복잡하기 때문에 이 호오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가 사실은 유가가 가장 골몰했던 부분이에요. 그리고 이 호호의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되느냐 리의 기준이 아니라 인의 기준에서. 이것이 바로 맹자철학의 핵심이죠.

처음에 양양을 만났을 때 왜 하필이면 利를 얘기하십니까 국가가 부강하고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것이 나쁠 게 무엇이 있어요. 그런데 그 배후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내 호호의 기제가 지금 대한민국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고 싫음의 기제가 바로 뭐에 의해서 움직입니까? 돈에 의해서죠.

그것이 내 생명에 해가 되느냐 아니냐는 상관없이 利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곤란한 것이죠. 인의 원리에서 호오를 따질 때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사회에 대한 비전이 유가에는 있었던 것이에요. 그런데 도가에는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비전이 없습니다.

군주의 통치를 안정시킨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찾기가 힘들어요. 물론 일부 다른 편들에서 세부적인 다른 내용이 들어있긴 하지만 근원적인 목적이 거기 있기 때문에 저는 노자철학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 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통치자는 균형을 잡는 저울과 같으니, 저울은 무위하지만 무거움과 가벼움이 저절로 얻어진다.’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 특히 신하들 가운데서 이 사람은 내가 어릴 때부터 동문수학했던 비록 내가 황제지만 친구에요. 그런데 능력이 떨어져요. 다른 사람은 내가 모르지만 능력은 출중해요. 그런데 이 사람을 중용하고 다른 사람을 가볍게 대해요.

또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저쪽 지방에서 엄청난 홍수가 나서 국고를 이용해서 당장 백성들에게 식량을 내줘야 하는데 무언가 다른 일 때문에 다른 걸 해야 되요. 경중을 따질 줄 아는 것. 이런 부분들에 대한 판단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에요. 굉장히 복잡한 사회세력들,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사회는 굉장히 다원화 되어있기 때문에 어떠한 정책을 결정할 때 이것을 몰고 나가려면, 달리 말해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는 찬성하는 쪽이 있으면 반대하는 쪽이 있어요. 그러면 통치자는 양쪽 가운데를 저울질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저울질해야 하는데 신불해 라고 하는 사람이 말하는 거울이나 저울의 비유는 군주의 안정이고 통치권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기준이에요. 즉 리라고 하는 것, 부국강병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내 몸 지키기, 내 나라 지키기 내 정권 지키기의 기준이 되죠. 그러니까 이것은 철저하게 주술입니다.


▲ 無名(무명)의 의미

그런데 이 기제가 훨씬 복잡해지면서 어떻게 발달하냐면요. 우리가 흔히 형명지술과 관련해서 이것이 발전해 나간 것이 무엇이냐면 治 인데 法治. 法治가 是非로 가는 길이에요. 인치가 아니라 법치를 한다고 하는 것은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한비자의 법가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해서 합리주의의 원료처럼 해석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리고 한국사회도 조선조에 당쟁논쟁이라고 해서 그런 것들과 많이 연결시켜서 인치가 아닌 법치를 해야한다고 하는 방식의 논조의 근거로 한비자를 한동안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어서 부분적으로 우리는 法治를 지향해야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노자나 한비자와 같은 계열에서 주장하는 법치라고 하면 철저하게 군주의 신하에 대한 조절이에요. 컨트롤(control)하겠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내가 하면 안되고 다른 사람을 대리로 하거나 법에 의해서 해야 해요. 그래서 법을 명문화 시켜 놓으면 아까 형명을 비교 했을 때 이것이 불일치하는 경우에 어떤 경우에는 사형 어떤 경우에는 곤장 몇 대.

그러니까 내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거해서 다스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면피에요. ‘네 이놈 너는 죽여야 되겠다.’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읊어봐라’ 그러면 법관이 이러이러한 경우에는 이러이러한 벌을 해야됩니다.

이것은 <영웅>에서도 나오죠. 이연걸이 암살을 하러 갔지만 결국에는 진시황에게 천하를 주잖아요. 그 때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끔찍했는데요. 자기가 죽이지 않았던 까닭이 맨마지막에 사막에서 양조위에게 바닥에 쓰인 글자를 펴 보면서 이것 때문에 죽이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참 재미난 기제에요.

이 사람이 조나라 출신이에요. 원래는 사기에 나오는 현가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번안해서 만든 것인데요. 그 구도를 보면 헤겔 변증법적인 구도를 갖고 있어요. 이연걸은 <영웅>에서 이름이 無名(무명)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름이 없는 것은 딱 두 가지가 있어요. 도는 무명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도를 잡고 흔드는 황제는 무명이에요. 그렇죠? 그래서 황제는 시호만 가져요. 어릴 때 이름은 요즘은 정조에 대해서 이산 이름 부르지 조선시대 생각을 해봐요. 어떻게 되겠어요. 이름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성은 없고 이름만 있는 사람이 있죠, 동아시아에. 일본 천황이 그렇잖아요. 그것도 다른 전통 때문에 그런데요. 원래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도 이거나 황제인 경우에요. 그런데 이 무명이라고 하는 사람은 조나라 출신이고 자기 부모가 진나라에 의해서 죽었던 말이에요. 자기 가족 전체가.

그런데 이 사람이 결국에는 칼을 찌르는데 배에 안 찌르고 옆구리로 들어갔잖아요. 피한 것인지 아니면 옆으로 새게 찌른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이 사람이 천하라고 하는 말을 남기고 떠나요.

무명을 달리 말하면 구조로 본다면 이연걸이라는 사람이 천하를 준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네가 이제 천하의 패자다. 그것을 21세기 초반에 영화로 만든 장예모의 천하는 그 때 동아시아가 아니라 지구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중화주의의 대표적인 영화가 되는 것인데요.

무명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알거든요. 무명은 기본적으로 이름 없는, 규정할 수 없는 황제 한 사람에게만 해당돼요. 또 도나 천에 대해서만요. 그러니까 그 영화는 끔찍한 영화고 노자에 나오는 무명이라는 용어를 기가 막히게 푼 것이죠. 무명이 무슨 뜻이냐면 모든 이름을 다 가질 수 있으면서 모든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이에요.

무명은 천지지시오 유명은 만물지모라(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황제는 무명이면서 유명이에요. 하지만 어떤 이름은 아니죠. 황제에게 잘 보이면 너는 재상, 너는 이조판서, 너는 병조판서, 너는 천민, 너는 무엇이라고 황제는 이름을 부여하는 자에요. 그 이름을 부여하는 자가 이름을 가지면 어떻게 되요. 동격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이 없어야 되죠.

그러니까 유무라고 하는 것을 존재의 의미 복잡하게 얘기하지 말고, 실제 쉬운 일상 상황 속에서 생각해본다면 노자의 무위라는 것은 무위지술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듯이 군주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한 총체적인 모든 것, 그 것을 한 대에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황로학이라고 하는 것이죠.

군주의 건강, 신체적인 건강까지 그래서 천하의 화합은 물론이고 황제라고 하는 신체 속의 화합까지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이 바로 황제내경의 기본 정신이에요.

왜 황제와 고대 유명한 신하들이 대화를 하는가 양생을 이야기하는 가 그것은 몸을 다스리는 원리와 국가를 다스리는 원리가 동일한 원리에 근거했다라고 하는 전제에 있어요. 그래서 황제내경은 의학서이면서 동시에 정치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황로학의 정신이고요.

주술이라고 하는 말은 쉽게 말하면 주인 노릇하는 기술이에요. 그 주인도 내 인생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 정권, 황실 이런 데 있어요. 노자에 나온 것처럼 무위이 무불위(無爲易 無不爲) 위무이 즉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어야 되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야 되요.

무위가 그렇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행위적 차원이 아니라 군주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술수와 전략들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해야 정권이 안정되죠. 당연히 그런 부분까지 포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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