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노자』와 무위 2 |
◆ 장자의 무위 인간다움에 관하여 그런데 이렇게 본다고 하면 이 무위라고 하는 개념은 사실 끔찍하죠.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장자가 상당히 장자라고 하는 사람은 특히 내편에 드러나 있는 것만 보더라도 약간 이중적인 사람이에요. 이중적인 사람. 왜 이중적이냐 하면 정신분열적이다 이렇게 표현하기 보다는 장자가 저는 삐꾸라고 보는데, 약간 어긋났다 이것이죠. 장자 내편을 잘 보면 이 사람도 분명히 정권에 참여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고 하는 의식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이에요. 그것은 분명해요. 그런데 특히 이 사람이 大用대용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소요유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얘기가 대붕이 바다 밑에 있다가 구만리 하늘까지 올라가서 좍 날아가서 6개월을 날아가서 쉰다. 그 얘기가 엄청나게 크죠. 그런데 크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기본적으로 1인자에 관한 칭호에요, 1인자에 관한 칭호. 고대 중국에서. 대, 무 이런 것들은 모두 동격이에요. 도하고 같이. 그러니까 이것은 기본적으로 황제, 즉 왕에 관한 이야기에요. 王 그런데 장자의 뒤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특히 손 트는 약 하고 박이었죠. 커다란 박나무가 혜시하고 나오는 대화에서 두 번 등장하죠. 그럼 혜시를 보고 너는 작게 쓰는 법만 (小用) 알지 크게 쓰는 법 (大用)은 모른다 라고 하면서 대용을 이야기하는데 이 대용이라고 하는 것 이 글자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세요. 쓴다라고 하는 것은 쓰는 사람이 있다면 쓰임을 당하는 두 가지가 구분되어 있죠. 이 때 대용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크게 쓰이는 것도 있지만 쓸 줄 아는 사람 그것과 관한 얘기가 주인 것이에요. 그런데 대大자가 붙어 있다. 작은 것과 큰 것을 구분한다 는 얘기는 기본적으로 누구를 지향하나, 달리 말하면 유세와 관련된 논의라는 것이죠. 즉 치자에게 유세하는 방식에 가까운 논의는 분명해요. 다만 이 사람이 말하는 치의 방식이 당시에 법가적인 것과는 조금 방향이 달랐다 라고 하는 부분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그 중요한 구절을 한 번 읽어보시죠. 이 구절을 이해하면 장자가 말했던 그 무위, 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오늘날 가장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커다란 나무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모없다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무하유(無何有)의 마을 밖 드넓은 들판에 심어놓고서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무위하며 지내고 그 밑에 누워서 소요하면서 누워 자지는 못하는가】 그런데 이 구절을 한 번 해석할 때 철학적으로 분석을 하면 대개 틀려요. 이런 것은 역사적으로 분석해야 맞는데. 일단 용을 가지고 얘기를 했으니까 용에 관한 얘기를 해보죠. 用. 저는 장자 철학의 기본은 바로 이 용의 문제를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용은 기본적으로 소유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천하를 소유한 자에게 있어서는 자기는 전부 다 쓰기만 하는 위치에 있어요. 다만 주권을 제대로 갖고 있을 때. 내가 어떤 신하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는 경우에서 나는 쓰기만 하는 사람이에요. 그럼 나머지 모든 사람은 쓰임을 당하는 사람이에요. 쓰임을 당한다고 하는 차원에서 보면 자기는 임용되어야 될 사람이죠. 그것이 仕(사) 이지 않습니까. 즉 사라고 하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잘나봤자 쓰임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납니다. 황제가 아닌 한. 그런데 장자가 살았던 당시는 70몇 제국이 일곱 개로 줄어들었고 특히 장자 철학 속에는 대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정치적, 군사적 각축이 무척 심했던 시대를 살았어요. 그러니까 춘추 시대만 하더라도 전쟁의 참상이 그렇데 대단하지 않았어요. <영웅> 영화를 다시 한 걸 보면 <영웅>에서 볼만한 것은, 볼만하긴 하지만 참 더러운 장면이지만, 활 쏠 때 발 이렇게 해서 엄청난 화살을 좍 쏘면 양조위랑 몇 명이 다 막고 나오잖아요. 그거 다 뻥인 것 아시죠. 거기에 맞는 것 중에 하나, 더 살렸어야 되는 것은 뭐냐하면 진나라가 제나라를 급습할 때 이길 수 있었던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기마 전술이 뛰어났어요. 진나라가 서역 쪽에 가깝잖아요. 그래서 제나라에서 준비를 할 수가 없는거에요. 그리고 말종류도 원래 동아시아 쪽은 말이 작아요. 작고, 그런데 저쪽 서역으로부터 빌어온 말들 같은 경우는 이쪽이 나중에 중동에서도 스키타이족이 그 쪽을 쓸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마전술 때문이잖아요. 그 다음에 몽고가 저 쪽을 강타할 수 있었던 것도 고기 말린 것과 같은 식량, 휴대하기 간편하고 그 다음에 기마술의 뛰어남. 요즘에도 몽고 문화기행 같은걸 보면 쪼그만 애들이 타고 내리고 그런걸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러한 데 과거에는 어땠겠어요. 아예 말 위에서 살지. 적이 쳐들어와요. 그럼 전보가 딱 와서 말을 달려서 준비를 하면 되는데 ‘적이 쳐들어옵니다’ 하니까 앞에 와있어요. 그럼 끝나는거에요. 지금처럼 상비군, 직업군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징발하고 모아서 나갔다가 하는건데 그게 과연 가능하겠느냐 이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속보하고 같이 가요. 그러면 이미 전쟁이 끝나는거죠. 그리고 제나라 같은 경우도 김용옥 선생이 처음에 논어 얘기할 때 산동, 대인이라고 해서 크잖아요. 보통 180 이 정도의 장신이 꽤 많았다고 해요. 진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쪽도 키가 크고 굉장히 커요. 서역 쪽 사람에 가깝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의 칼 옆에 제가 어렸을 때 서보니까 키랑 똑같아요. 그것을 한 손으로 휘둘렀다고 하는데 어떻겠어요. 저랑 최홍만하고 싸운다고 생각해보세요. 군사력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는 첨단무기라든가 인간의 신체에 의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이런 것들 때문에 자꾸 우리가 상상력이 빈곤해지는데 몸의 논리는 적나라한 것이잖아요. 최홍만하고 저하고 싸워서 제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뻔한거죠. 그렇죠. 그렇지만 토론하면 제가 이길 수 있어요. 이게 바로 문치죠. 문치가 무치보다 경쟁이 더 공정할 수 있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입으로 암만 싸워봤자 피 안흘려요. 그렇죠. 그런데 몸으로 싸우면 유혈이 낭자하잖아요. 그렇죠. 무엇이 좋은가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거죠. 그러니까 흔히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영어 성문에 나오는 첫 번째 문장이죠. 그것은 인류사의 비전이고 그것이기 때문에 인간답다고 하는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무력적인 경쟁의 논리를 즉 몸으로 경쟁하는 방식으로 문화가 나아간다고 한다는 것은 곤란한 거예요. 인간은 곧 정신인데. 제가 종교 지지자도 아니지만. 다시 돌아가서 용用이 참 곤란한 것이 장자에 들어가면 공자라든가 이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자기가 임용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딜레마가 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시는 귀족제가 무너져 있지 않았었고 여러 가지 설들이 난무하지만 나중에 후대에 실제로 공자가 대사구라고 하는 높은 벼슬을 했다 뭐 조작이다 아니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벼슬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특히 공자 문하에 있던 많은 문하생들이 벼슬살이를 했잖아요. 위나라의 자로같은 경우에도 출사해서 죽으면서 갓끈을 묶는 비장한 죽음을 보여줬던 것처럼. 공자 문하에 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벼슬생활을 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장자는 어디에도 벼슬 했다는 이야기가 없이 칠원리 옻나무 동산 관리하는 것 했다고 하는데 그게 관리 입니까 그게. 한번 실제로 가보세요. 거의 일반 백성들하고 별다를 바가 없는 벼슬이라면 그것을 벼슬이라고 말할 수 없는거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생각하는 임용에 대한 것 하고는 다른거에요. 듣는 분들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패스한 공무원하고 9급 공무원 시험 패스한 공무원하고 느낌이 다르잖아요. 그렇잖아요. 이게 약간 서로 불편한 얘기인데. 말하자면 장자는 9급 공무원 패스도 아니고 제대로 간게 아니라 그 9급 공무원한테 잘 보여서 ‘내가 주는 찌꺼기 받아먹어’ 이렇게 된 걸 수도 있어요. 그러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패스한 사람들은 노는 물이 다른 거죠. 그런데 그 배경이 과거에는 이른 바 귀족제는 세습의 원리에 의해서 좌우되죠. 이 세습의 원리가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깨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용用이라고 하는 담론이 무척 중요해요. 특히 70여 제국이 7개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얘기에요. 지금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70여개의 한국에 있는 대기업이 망하고 M&A 등등 해서 일곱 개로 통폐합된 거예요. 그러면 회사가 인수 합병되고 할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살아 남는자가 생기고 잘리는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생기죠. 그 구조조정 당한 화이트칼라들 그 사람들을 고대 당시에서 유사라고 얘기하는 거죠. 유사儒士 떠돌이 지식인이고 벼슬길에 나아갈 준비가 되있소 하되 갈 데가 없소. 이 사람들 가운데서 얼마나 뛰어난 인재들을 내가 흡수하느냐 이것이 바로 관건이에요. 부국강병의. 왜 인치의 시대였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을 잘 알아요. 예를 들면 제나라 환공, 최초의 패자覇者죠. 그 다음에 맹자에 처음 나오는 양혜왕 그 다음에 제나라 선왕. 이런 사람들 다 무슨 사람들이냐 그 밑에 엄청난 떠돌이 지식인들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이제는 이 문화가 대부 벼슬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산이 돼서 춘신군과 같은 사람은 그 안에 식객을 3,000명을 거스렸다라고 해요. 식객이 뭐냐 하면 다 유사들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뭘 보고 하는 거냐. 용用 때문에. 자기가 쓰임을 당하고 싶은 거예요. 달리 말하면 취직하고 싶은 거죠. 그것도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 그런데 희한한 것이 당시에는 정규직, 비정규직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죠. 정규직, 비정규직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정년을 하는 것이 정규직이죠. 그렇죠. 그러면 당시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개념은 뭐냐 하면 식읍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자가 고민했던 머리나 내가 고민하는 머리나 현실의 방식, 용어가 다를 뿐이지 사실 그게 그거인거에요.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일ㄴ 데서 해야 되는데. 그런데 공자의 논어하고 장자라고 하는 텍스트를 가만히 비교하면서 읽어보세요. 읽어보면 큰 얘기만 해요. 큰 얘기만. 그런데 공자처럼 적어도 제후에 해당되는 사람들하고 거의 동격으로, 더군다나 맹자는 센 사람들만 만났잖아요. 양혜왕 하고 제선왕은 당시에 가장 센 대표적인 군주였어요. 두 사람 만나서 ‘야 니들 똑바로 해’ 이렇게 얘기했잖아요. 그러면 누가 더 훌륭한 거예요. 그것을 들어준 사람도 대단한 거예요. 그럼 왜 들어줬느냐. ‘나는 맹자처럼 까탈스러운 애도 까칠한 애도 잘 들어줘 그러니까 많이들 와.’ 이거에요. 놀러와예요 놀러와. 그러다보면 눈에 띄는 인재들이 들어오죠. 발탁해서 쓰는 거예요. 맹자 같은 사람은 그런 걸 통해서 자기의 어떤걸 펴려고 하는 거고. 그런데 장자는 어때요. 장자가 관련된 일화들은 다 좀 삐질삐질 해요. 어디 뭐 쌀 꾸러 왔더니 이 인간이 ‘야 내가 조금 있으면 세금을 걷어서 어떻게 하면 줄 테니까 그 때 와라’ 에서부터, 누가 와서 진나라 왕의 사신으로 갔다가 수레 다섯 대 어떻게 해서는 큰 뭘 받아왔다 라고 하니까 야 너 같은 놈 때문에- 진나라 왕은 뒤에 빨아주는 인간들이 가장 큰 벼슬을 받는다 그걸 빨고 왔느냐. 치질. 그런 얘기 하면서 별에 별 거 다 하잖아요. 그게 되게 멋있어 보이죠. 마누라한테 욕 먹기 딱 좋은 얘기죠. 그렇잖아요. 누구는 잘 나가는데 너는 왜 이모양 하면서 말만 세다 이거에요. 그렇잖아요. 어디서? 동네 선술집에서. 동네 포장마차에서. 그러니까 장자라고 하는 사람의 삶의 흔적을 보면 분명히 그와 같은 냄새들이 풍겨요. 그래서 전 이런 말을 좋아하는데 공자가 벌떡 일어서면 맹자가 되는 거고 공자가 푹 주저앉으면 장자가 되는 거예요. 이런 게 천고의 명언이고 동아시아 고전을 읽을 때 우리가 속으로 말하면 안 돼요 원래는. 그렇게 그런 정신으로 읽으면 장자나 나나 비슷해요. 그렇잖아요. 저도 실제로 여기에서는 우주가 어떻고 도가 어떻고 노자 별거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그렇잖아요. 다 노자가 훌륭하다고 하는데 나는 노자가 싫어. 센 얘기잖아요. 집에 가서 노자 얘기하면 졸려 자 이래요. 웃으라고 한 얘기인데 안 웃으시네. 아직 훈련이 덜 돼 있어요.
그런데 장자는 이 얘기를 하는데 이 배경은 뭐냐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추정이 들어갑니다. 보통 전 세계적으로 남자가 남자로써 대접받는 나이는 40이에요 40. 로마에서 집정관이 될 수 있는 나이가 40이었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게 싫어서 서른도 될 수 있는 호민관을 통해서 들어갔다가 집정관으로 올라가잖아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카이사르라는 사람이. 40이라고 하는 나이는 군대 편제에서도 중요해요. 아까 이 당시에 군대 편제가 직업군인이 아니라 국민들, 일반 백성들 가운데 차출을 해서 징용을 해서 군대 차출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농사짓던 사람을 군대에서 써먹으려면 되겠습니까. 안되죠. 6 ?25 때만 하더라도 흔히 우리가 영화를 보면 두 가지 영화를 얘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상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얘길 하죠. <씬 레드라인> 하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 <씬 레드라인>에서는 돌격 앞으로 하는데 안 가잖아요. 그렇죠. 날아오는 데 죽을라고. 미쳤어요 가게. 그런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막- 특히 6?25라든가 2차대전 해서 나온 영화 보세요. 특공대를 가서 포탄이 날아오고 뭐가 날아오든 나가요.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모든 전쟁을 보면 군장교들이 했던 가장 첫 번째 역할이 뭐냐. 전진 앞으로 할 때. 뒤로 돌아가는 뒤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거예요. 이것은 전쟁문화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겁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회군을 해서 로마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관리하에서 8년 동안 자신이랑 같이 있었던 휘하군들하고 정서적 유대 엄청나죠. 계속 전쟁을 했던 사람들이니까 베테랑 아닙니까.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에서도 그런 대화가 오가는 게 나와요. 한 사람은 아프리카 이런 데 파견 돼서 훈련시키고 이런 역할을 했던 송강호가 둘이 막 하다가 전쟁 때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누가 빨리 총을 뽑느냐가 아니라 누가 정신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기는데 있다. 이 얘기가 무슨 얘기냐면 정말 가슴 아픈 얘기지만 경주 울산 지역에서 학도병들을 대거 모아서 총을 쏘게 했잖아요. 특히 북한쪽에서도 다리를 나무에다 묶어 놓고서는 총을 쏘도록 만들기도 했고. 영화에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런 장면도 나오고. 그럼 남쪽은 다르겠어요. 방아쇠 당기는 법만 가르치고 사격 몇 번 해보고 가서 전쟁에 들어간 사람들이. 총소리 들어보셨죠. 실제로 사격장에 가서 총을 쏘다 보면 연습한 사람들은 다른데 실제로 빵 쏘면 귀가 멍해서 거의 끔찍해요. 그런데 빵 쏘는데 앞에 사람이 선혈이 낭자해서 죽어간다. 이건 끔찍한 거 거든요. 그런데 전쟁 당시에, 총알이 날아오는데 돌격 앞으로 한다고 나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래서 계산에 의하면, 통계자료에 의하면 6?25당시에 한국 내전 당시에 소요된 총알의 숫자가 실제로 발사가 돼서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거나 죽음으로 몰아간 총알이 10만발 당 한 발이래요. 그럼 무슨 얘기가 되겠어요. 기관총 갖다 놓고 허공에다가 막 갈겼을 때 지나가던 참새가 총 맞아 떨어질 정도의 확률과 가까운 것이란 얘기죠. 이게 무슨 얘기냐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실이에요. 제대로 못 쐈다 이렇게 우길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똑같다는 거죠. 그런데 장자는 여기에서 지금 뭐라고 얘길 하냐면. 장자가 아마 자기의 원숙한 사상적 체계를 세웠을 때가 30대에서 40대를 지나면서였을 거예요. 40이 되면, 요즘에는 남자들이 서른즈음에라고 하는 노래 있죠. 스물아홉에서 서른 살 넘어갈 때 참 마음이 그런데. 저는 그 때 별 느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서른아홉에서 마흔 넘어갈 때 비정규직도 아닌 매 년 4개월 계약직 강사. 학위는 박사인데. 그것도 우주를 얘기하고 도를 얘기하고 이런데 그러니까 매일 떠드는게 갓 들어온 신입생들 앞에서 무슨 얘기인지도 몰라요. 한자 써도 알지도 못해. 듣기 싫어하죠. 졸지 말라고 하면서 강의 하는 이 처량 맞은 내 신세. 이게 젊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나이가 먹으니까 강의도 힘들어요. 예전에는 진리에 대해 밤새서 논문도 쓰고 무언가 해낸 것처럼 했는데 지금은 의무 방어전 밖에 안 해요. 학회지에 실어야 되니까. 돈 받은 게 있으니까 논문 내야지. 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신체적인 것도 저하되고 삶의 조건도 각박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돼있다는 것. 그러니까 여기처럼. 여기는 조는 분 하나도 없죠. 더군다나 탁 얘기하면 웃을 준비가 돼 있죠.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준비는 안 되어있고 웃을 준비만 되어있어요. 강의의 반을 웃기기 위해서 준비해간다는 거죠. 여기랑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죠. 그런 강의를 하다보면 특히 심한 경우 학생들과 안맞는 경우 벽에다 대고 염불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사실 인문학이 사회에 대해서 발언하는 거지 염불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염불하는 상황이에요. 책 내봤자 읽지도 않고. 그런 상황에서 딱 마흔이 되니까 아.. 누구네 집에는 차가 뭐였다가 얼마 전에는 체어맨으로 바꿨다더라, 누구는 아파트가 몇 평이래드라, 심지어 얘기 들어보니까 제가 초등학교 학생들을 과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애들도, 그게 벌써 7,8년 전 일이에요, 아파트 평수가 같은 애들끼리 몰려다닌다면서요. 강남에서는. 그런 얘기가 돌고 그랬잖아요. 그럼 전 뭐냐 이거죠. 자괴감? 그런데 저는 성격이 낙천적이라서 별로 그런 것 가지고 고민 안하는데 어쨌든 공부는 하고 싶고 하는데 자꾸 다른 일들을 해야지만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런 것들이 참 힘들다는 거예요. 몸으로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자괴감이 들고 서른 즈음에가 아니라 요즘엔 마흔 즈음에. 여자 분들은 그렇죠. 일찍 결혼하신 분들 같은 경우에 애들이 중학교 입학하고. 초등학교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 혼자고 아침에 애들 보내고 남편 보내고 나면 갈 데도 없고. 수다 떠는 것도 잠시지. 무언가 자기 만족감을 행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우울증에 빠지기 쉽고. 남자들은. 직장인들은 똑같죠. 새벽같이 출근해서. 일곱시까지 출근해서 네시이후에 퇴근하자 라고 얘기했더니 일곱시까지 출근해서 밤 열시에 퇴근하고. 한국 사회의 구조가 그렇고 시스템 자체를 그렇게 만들다 보니까 그럼 남는게 무엇입니까. 단순하죠. 뭐죠? 심근경색 아닙니까 남자는. 여자는 우울증이고. 그런데 장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울증이 날아가는 것 같아요. 달리 말하면 이 사람도 우울증 환자인거에요. 스트레스고. 자기도 하고 싶은 게 있고. 천하를 이야기해요. 천하도 아니라 천지를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자기는 그러니까 이 우주의 비밀을 깨우친 사람이고 크게 쓰는 법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크게 쓰는 법을 아는데 나를 크게 안써줘. 그러니까 이제 그런 표현들은 거기에 관한 원숙한 경지에 올랐을 때 쓰는 표현일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나름대로. 그런데 문장을 보시면 여기에는. 오히려 이 그림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회화적 이미지로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림을 잘 그리면 좋은데 잘 못 그리니까 대충 그릴게요. 아름드리 나무가 있어요. 옹이도 많고 가지도 삐뚤삐둘 한 나무에요. 그러니까 쓸모가 없어요. 장자에 보면 나무를 비유해서 이것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서너차례 나오죠. 그래서 어떤 산에 있는 커다란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베어지지 않아서 오래 살았고. 어떤 거위는 잘 울어서 아니 울지 못하는 거위이기 때문에 빨리 죽기도 했고.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장자 얘기는 용用 쓰임을 당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굉장히 절박한 문제에요. 그런데 사실 이 당시에 용이라고 하는 문제가 뒤틀려 있다는 게 무엇이냐면 달리 말하면 정규직에 있던 사람이 전부 비정규직으로 바뀐 거예요. 쉽게 잘릴 수 있다는 말이죠. 잘린다는 것은 목숨도 관련되어 있고 내 집안 자체의 안위가 관련되어 있어요.
그럼 내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서 다 발휘하면 되느냐. 내가 조그만 일개 군소국가의 장군이에요. 적이 쳐들어왔어요. 내가 워낙 지모가 탁월하고 무용이 탁월해서 작은 3,000의 군사로 20,000명의 군대를 제압해서 물리쳤어요. 개선장군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환영 받겠죠. 그 다음 부터는 군주의 질시를 받아요. 그 조그만 나라에서 당신이 이제 우리의 희망이요라고 하기 시작하면 저 용렬한 군주는. 그럼 그 다음 번에 흔히 사기에 보면 그런 식의 일들이 무척 많습니다. 다시 저 쪽에서 전열을 가다듬어서 들어와요. 그러면 딱 일으킨다고 선전을 내고 나서 먼저 사신을 보내죠. 작년에 우리 둘째 왕자가 그 전쟁에 나왔다가 죽었다. 그 놈을 보내라. 그러면 퇴각하겠다. 그리고 조공을 해라. 그러면 이 군주는 이 장군을 버리면 나라의 안위가 장기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지금 쟤는 눈엣가시야. 나보다 더 인기가 있어. 언제 쟤가, 뭉친 군부세력들이 쿠데타를 해서 나를 물리칠지 몰라. 그러니까 주변에서 ‘보냅시다 그리고 또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냐.’ 보내요. 이 사람은 죽어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로 많이 일어나는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뛰어나지도 말고 너무 못나서도 안 돼 요. 이런 정서는 사실 중국 지식인들이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특히 혼란 시에 난세에는. <안씨가훈> 이라는 책을 보면 그런 얘기가 나와요. 네 앞에 열 다섯 명 정도의 상사가 있고 네 밑에 열다섯명 정도의 쫄다구가 있는 중간 정도의 직책을 하라. 재산도 어느 정도만 갖고 많이 갖지 마라. 이런 식의 얘기들이 나와요. 구조조정을 할 때 어떻게 하는지 눈으로 보셨죠. 그래서 요즘에는 많이 바뀌어서 전반적으로 숫자를 맞춰서 한다면서요. 그런데 그간 대한민국에서 했던 구조조정의 방식은 꼭대기 몇 개. 아래에서 좌라락. 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하죠. 이게 당연한 거에요. 중간에는 워낙 다양한 방식의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자른다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챙겨줄 수 있는 뭐가 있으니까. 위에는 나가잖아요. 그래서 공직자들 나가면 다른 데 가 있잖아요. 밑에 사람들은 정말 힘들죠. 그러니까 밑에 있어도 안되고 맨 위에 있어도 안되고 중간만 하라. 이런 방식의 난세에는 모름지기 중간만 하라고 하는 식은 바로 살아남기 위한 논리이고 바로 장자식의 논리하고 가까운 거에요. 그러니까 장자가 자기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처하겠다. 有用無用之間 라고 대답을 해요. 산에서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나무꾼이 그걸 베지 않으니까 ‘왜 이 큰 나무를 베지 않으냐’ 그러니까 ‘쭉정이도 많고 옹이도 많고 가지도 삐뚤빼뚤해서 재목으로 쓸모가 없다.’ ‘아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저렇게 수를 늘릴 수 있었다.’ 내려와서 장자가 친구 집에 묵었는데 주인이 장자를 대접하기 위해서 거위를 잡으려고 시종이 와서 묻죠. ‘주인 나리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그랬더니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그러니까 제자 한 명이 밤새도록 고민을 하죠. 그 다음 날 아침에 ‘스승님 어저께 나무는 쓸모없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았지만 어젯밤 거위는 쓸모없기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은 유용과 무용 중에 어느 쪽 입장이십니까. 그러니까 장자가 그래요.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 처하겠다.’ 그 다음에 도가 어쩌구 저쩌구 어려운 얘기가 나와요. 그러면 그건 딱 접고 빼는 거에요. 거기에서 도가 왜 나옵니까. 달리 말하면 그걸 물어본 애가 바보라는 얘기에요.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할 문제를 논리적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바보라는 식의 얘기니까 도로 튀는거에요. 그러니까 고전문헌에 나오는 도를 가지고. 도는 뭐에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라는 글자를 암만 얘기해봤자 어차피 전달이 안돼.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안읽어도 된다는 얘기에요. 그럼 앞 뒤 맥락을 보면 그 얘기가 무엇인지 정황 파악이 되요. 정황파악. 그러니까 통찰이 필요한 얘기라는 거죠. 그리고 달리 말하면 처세의 문제에서는 내가 능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다 하더라도 군주가 나를 얼마만큼 인정해줄 수 있느냐 한도 내에서 움직여야 된다는 거예요. 뒤편으로 가면 사신 갈 때 어떻게 하면 저 사람 성격이 상당히 괴팍하고 성질이 더럽고 그런 사람을 모시고 사신을 수행해야 되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들이 계속 이어지잖아요. 그러면서 그런 맥락에서 조삼모사 얘기도 나오고. 그게 뭡니까. 바로 용의 관계에서 내가 신하 노릇할 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의 고민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와 같은 목소리와 동일하게 장자가 지금처럼 저런 얘기를 해요. 당신은 지금 저 커다란 나무가 쓸모없다고 하는데 나는 저 나무를 무하유 들판에다가 심어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없이 어슬렁거리겠다. 일단 이 얘기를 생각해보시란 겁니다. 이 속에는 특정한 문학적 장치이기도 한데 장자가 일정한 나이가 됐고 나름대로의 성숙한 비전을 얻었어요. 그러면 사회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을 때의 나이에요. 장정이에요. 이런 사람이 낮에 농사짓다가 해가 뜨니까 그 주변에 어슬렁거리면서. 그게 무슨 이야기냐면 그림을 멋있게 그리면. 이 당시에 밭이 중심이었으니까 밭이 펼쳐져 있어요. 그리고 저 밑에 초가집이 있고 여기에 와이프가 열심히 밥을 짓고 있는 거겠죠. 그 다음에 아침에 일어나서 일을 했어요. 해가 너무 쨍쨍하니까 잠시 쉬어야 돼. 올라가서 나무 주변을 어슬렁 어슬렁거리는 거예요. 조금 있으면 집사람이 밥을 가져오겠죠. 우리 농촌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상황은 첫 번째. 남자가 집에 있어야 된다. 전쟁에 끌려 나가지 않았다는 얘기고. 부역에 동원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실은 아주 일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환상적인 삶이에요. 달리 말하면. 오늘 날의 조건에 따진다면 연봉이 꽤 괜찮은 확실한 정규직 그 다음에 국민연금까지 안정적으로 수급되어 있는 상황의 삶의 모습과 같다는 얘기에요. 여기에서 무위한다는 것은 어슬렁거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뜻이지만 다시 말하면 이 때 이 나무는 나의 생명을 상징하는 거거든, 나의 생명. 내가 用 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군주가 나를 쓰는 것은 나의 재주를 쓰는 것이지 나의 생명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켜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나는 나의 재주로 인해서 잘 살기도 하고 못 살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끔씩 나의 생명을 해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인데 사회적 생명과 생물학적 생명이 있죠. 특히 이런 식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이 일차적이죠. 전쟁에 동원되지 않는다. 부역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일차적인 나의 삶의 조건. 생활 조건이 안정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삶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안정적인 삶에. 거기에다 여유를 부려요. 농사를 짓다가. 그리고 ‘그 밑에 누워서 소요하면서 누워 잠을 자지는 못하는가.’ 나의 생명을 나의 신체적 생명이 요구하는 노동을 하면 쉬어야 되고 다시 또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되고 그 속에 어떤 걷힐 것이 없이 여유로움이 있고 뭔가 느긋함이 들어 있어요. 여기에서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라 전쟁시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국가 질서 속에 이른 바 명의 체계로 흡수되어가는 중앙 집권화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자기 삶의 생명의 온전함 자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는 뜻이 마구 여기저기를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 나오는 소요라는 말은 이 주변을 빙빙 도는 거예요. 즉 자기 생명의 중심, 삶의 중심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거기서 여유롭게 자신의 삶을 구가하는 것.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러기 위해서는 부여에 동원되지 않아야 해요. 여기에서 말하는 무위는 그와 같은 나의 삶에 대한 간섭에 대한 거부의 정신이 들어있는 것이죠.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한 지킴, 보전이라고 하는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고. 따라서 소요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오늘날에도 상당히 의미가 있고 여기에는 저항의 정신이 들어있고 다원적인 삶에 대한 가치에 대한 긍정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삶, 내 생명에 대한 긍정의 의식이 있고. 그래서 짧은 구절이지만 용 用 의 굴레 속에 휘둘리는 부분도 있지만 장자 속에는 이와 같이 가장 일차적인 인간다움의 삶의 근거에 관한 이야기가 무위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무위는 상당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방식의 얘기라고 할 수 있어요. --- ◆ 양생과 덕화로서의 무위 그 다음에 양생과 덕화라고 하는 차원인데요. 박스 부분은 지난번에 읽었던 부분입니다. 당시에는 이 두 가지 입장이 다 있었던 모양인데. 장자에서도 形은 곤란하고 神을 긍정하는 방식의 논의를 기본적으로 하죠. 이렇게 결정되어 버리는데. 신을 이해할 때, 정신을 기른다. 자꾸 신비주의로 가는데. 신비주의로 가는 것은 곤란하고. 신은 무정無情이에요, 무정. 제물론에 보면 장자와 혜시가 하는 대화가 나옵니다. 사람에게 정이 없다면 어찌 그 사람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얘기하니까 장자는 그럴 수 있다 라고 얘기를하죠. 그 정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매이지 않고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장자의 철학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무정無情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이 무엇인가 이해해야 되고 정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가 무엇인가 이해해야 해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를 이해하는 방식이 무정에 근원적으로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요. 정 情 이라는 글자를 파자하면. 파자가 반드시 좋은 방식은 아닌데 어떤 경우에는 파자를 할 때 상당히 재미나요. 그리고 이 파자는 클로우드 라 라고 하는 프랑스 신부에요. 그 신부가 파자하면서 해석한 내용인데 너무 멋있어서 제가 그대로 갖다 씁니다. 정 情 자를 파자 하면 마음 심 心. 생 生. 생 자는 어떻게 만들어진 글자냐 하면. 대지가 있어요. 뿌리가 있습니다. 봄이 돼서 햇빛이 비치고 눈이 녹아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싹을 틔우죠. 점점 자라납니다. 열매까지 내리고. 이것이 생 자에요. 생 자라고 하면 보통 낳다라고 얘기하지만 식물적인 이미지에서 추출된 글자라는 걸 알 수 있죠. 생 자가 그리스의 phsis 라는 말과 상당히 어원이 유사해요. 생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식물적 생장이라는 의미가 그대로 개입되어 있는거에요. 더군다나 식물을 보세요. 봄이 되면 푸른색, 여름 되면 꽃이 피고, 가을 되면 누런색으로 바뀌고. 푸릇하죠. 특히 단풍이 들었을 때를 우리가 뭐라고 하죠. 울긋불긋 하지 않습니까. 생명의 색깔은 총천연색이에요. 진화론으로 들이대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보이는 자연의 색깔은 그야말로 총천연색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만들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색의 아름다움 자체.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는 과정에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느냐 좋은 느낌을 주느냐 하는 차원에서 보면 자연적인 것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단丹입니다. 단은 당시에 수은, 광물을 얻기 위해서 땅을 파고 들어갔더니 그 안에서 붉게 번쩍 번쩍이는 광물을 찾아낸 거에요. 그러면 단은 광물적인 이미지이지만 다시 말해 인간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피의 색깔, 붉은 색이죠. 생은 식물이니까 푸른색이란 말이에요. 울긋불긋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것 아닙니까. 나무가 자라고 생장하고 하듯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공간이 천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세계에서. 즉 감정이라고 하면 무엇이냐면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내 마음이라고 하는 공간, 신체 전체를 얘기합니다. 손으로 물리적으로 만져지지 않는 속의 범위죠. 몸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약동이고 발동이고 생명의 움직임이에요.
이 정은 어떻게 움직이느냐. 구멍을 통해서 움직입니다. 혼돈이라고 하는 설화를 얘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해석을 합니다. 특히 원가가 대표적으로 의미를 망쳐 놓은 사람인데. 혼돈설화같은 경우에 제가 원가의 해석을 거부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보통 그렇게 얘기하죠. 토마스 불핀치가 그리스신화를 체계화하기 전까지 그리스신화는 단편적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불핀치가 체계화했어요. 물론 그리스에서도 신통기 등 계보를 그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 않습니까. 원가가 했던 역할도 그와 같이 중국 신화라고 하는 책을 쓰면서 계통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더더군다나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중국에서 신화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거의 사실은 후안시대 이후에요. 회남자라든가 산해경등에서 그런 요소들이 있지만. 그 작은 요소들이 훨씬 다양한 이야기로 살이 붙어서 커다란 네거티브를 형성하게 된 과정은 다 후안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앞에 고전적인 신화를 원가는 당시의 소수민족들의 무속적인 창가라든가, 민요라든가 이런 것들을 채취해서 살을 붙여서 재구성한 것이 중국신화전설이라고 하는 책의 기본적인 틀이에요. 굉장히 오래 전으로 끌고 갔다고 하는 거죠. 그런 얘기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요즘에 그와 같은 방식, 그 책속에 들어 있는 얘기들을 비판하는 식의 얘기들도 우리나라에서 실제적으로 나오고 있죠. 단군신화가 성립되었을 때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갈라져있던 세 다양한 것이 하나로 뭉뚱그려졌고.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한민족, 이런 것들이 성립된 것처럼 지금 원가의 작업은 본인이 의도했든 안했든지 중화민족의 뿌리를 만들어내는 신화작업이에요. 본인이 의도했든 안했든. 철학의 책에서 그와 같은 중국은 없다라고 했던 이유가 거기서 오는건데. 이 사람은 혼돈설화를 거인사체신화겸 천지창조신화로 해석을 해요. 원가는. 거인사체신화는 전 세계 다른 문명권에서도 보이는 거죠. 커다란 최초의 거인이 죽어서 눈은 해와 달이 되고. 이것이 반고신화에도 그대로 들어있지 않습니까. 원가는 혼돈이 죽은 이후의 과정을 거인사체신화로 해석을 하고 그 앞에 과정은 반고신화와 연결해서 천지창조설화와 연결시켜요. 반쯤은 사기라고 봅니다. 왜 사기이냐. 신화학적으로 무의미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다원적인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을 하나의 맥락에 고정시킴으로써 이른바 근대민족국가의 기제와 맞닿는 방식으로 썼다는 것이죠. 글들 보면 굉장히 그런 냄새들이 많이 나거든요. 물론 원가라는 사람 개인이 나쁘다는 차원이 아니라 근원적인 작업의 한계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혼돈신화를 보면 거기에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면. 혼돈이 신이었다 이것이 아니라 혼돈과 관련된 다른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얼굴이 없다는 것이에요. 얼굴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칠규. 일곱 개의 구멍이 없다는겁니다. 그래서 신화가 그렇죠. 숙과 홀이 있는데 남쪽과 북쪽의 신이죠. 이 사람이 중앙의 제인 혼돈에게 놀러가요. 너무 융숭하게 잘 대접을 해주니까 둘이 고마워서 우리가 한 번 뭔가 보답해야 되지 않겠냐 하면서 둘이 상의를 해서 만날 때마다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주었더니 7일이 되는 날 죽었다. 무엇이 완성된 겁니까. 얼굴이 완성된 거예요. 우리가 얼굴이라는 말을 쓰는데 실제로 그 기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얼골이라면서요. 얼골. 얼은 영혼이라는 뜻이고 골은 뼈대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영혼의 형상이고, 영혼의 뼈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이 무엇이냐. 사실은 얼굴은 표정이에요. 이 때 표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표정의 말이 무엇인가보세요. 내 얼굴에서 비쳐지는 표정이라는 것은 희노애락을 드러내는 것. 감정적 표현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움직임이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에요. 내 생명의 움직임이. 아까 지나가는 사람이 쳤다라고 하는 예를 들었죠. 산길을 가는데 갑자기 집채 만한 호랑이가 나타나요. 거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나오죠. 그 다음에 결혼 했는데 아기를 낳았어요. 보는 순간 얼굴이 펴지죠.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인간의 표정은 거의 똑같죠. 문화를 초월해서 인종을 초월해서 똑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몸 자체가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데. 문제는 왜 하필이면 얼굴 없는 혼돈이 얼굴을 갖게 되는 순간 죽었느냐. 그럼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뭐냐. 그것은 결국 무정이라는 얘기입니다. 표정이 없는 사람이에요. 혼돈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럼 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설명을 했죠. 그럼 그때 일곱 개의 구멍이 무엇이냐. 그것은 기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집사람이랑 한참동안 싸웠어요 제가. 그런데 술먹 고 들어가서 집사람한테 뭐라고 얘기를 해도 들은 체 만 체 안 해요. 그럴 때 귀에다 대고 ‘여보야 사랑해’ 하면 잠깐 씨익 웃고 자요. 이 때 들어오는 이것이 뭐입니까. 언어도 기입니다. 언어도 기에요. 아무리 옆에서 빌고 화해하자고 해도 반응이 없어요. 기분 나쁘고 계속 화를 내. 옆에서 ‘우리 그만 헤어지자’. 그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해보세요. 10년 동안 사귀었는데 애인이. 여자 친구가 남자친구가 ‘우리 안 맞는 것 같애. 헤어져’ 하면 어디로 들어옵니까. 끔찍하죠. 사랑해, 하고 헤어져라고 하는 물리적으로 따지면 어차피 파장이 다른 방식의 떨림이 들어오는 식인데. 그 기가 나를 죽이고 살려요. 그러니까 심한 경우에는 베르테르는 빵.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입으로 뭐가 들어가요. 오늘 먹은 것은 너무 맛있어. 그런데 이것은 너무 맛없어. 이건 먹으면 죽어. 어떤 건 달고 어떤 건 쓰고. 똑같이 뭐가 드나드는 겁니까. 기가 드나는 거예요. 눈으로 드나드는 것도 마찬가지. 제가 한 번 남산 쪽에 집사람이랑 같이 가끔씩 데이트를 하러가고 그랬는데. 한 칠순에 가까운 노인네 두 분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까 그렇게 보기 좋아요. 괜히 마음이 푸근해진다는 말이죠. 그리고 제가 아기를 안 가졌을 때는, 아기가 없을 때는 몰랐는데 집사람이 임신하니까 왜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임산부가 이렇게 많은지. 그 전에는 하나도 몰랐는데 그렇게 눈에 많이 띄더란 말이에요. 그다음에 주변에 아는 사람 가운데 어떤 분들이 이혼을 했어. 가만히 보니까 주변에 이혼 하고 혼자 사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보거나 마음속에 공감되는 게 없으면 안보인다는 말이죠. 이미 우리 삶 자체가 가족 구조도 다양해졌고 삶의 구조가 다양해졌지만 그래도 변치 않는게 하나 있습니다. 귀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어떤 기제에 따라 움직이느냐 호오의 기제에 따라 움직입니다. 호오 기제는 생물학적인 선택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선택도 받아요. 훈육의 과정을 통해서. 달리 말하면 호오라고 하는 것은 문명과 자연의 구분도 없고 단순히 좋으냐 싫으냐는 차원의 두 가지 양가적인 기제만 있는거에요. 이 속에는 문명과 자연을 구분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기계에서 만들어진 알약같은 것을 먹어서 내 신체가 유지되는건 어떻건 똑같지만.
문제는 무엇이냐. 기라고 하는 것은 좀 다르죠. 기계에서 만들어진 것 하고 인간이 느끼는 기라고 다르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차원이 있어요. 기라고 하는 것이 국내 과학적 개념으로 특정의 대상으로 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대적이어서입니다. 무엇에 상대적이냐. 바깥의 것으로 잴 수 없다는 것이에요. 내 몸으로 잴 수 있습니다.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손을 넣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죠. 감기 걸렸을 때는 미지근한 물에 손을 넣어도 차갑고 떨려요. 건강할 때는 시원하죠. 그렇잖아요. 동일한 기운을 내가 지금 느끼는 건데. 그래서 기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주변 환경, 사회 환경 인간관계까지 포함해서 내 생명이 반응성을 주고받는 매개가 되는 것이 기에요. 가장 빠른 용례가 무엇이냐면 혈기입니다. <논어>에도 나오는 말이죠. 혈기 血氣. 그래서 이 기의 원초적 모델이 사실은 인간의 몸을 순환하는 피가 아니었겠는가. 이것이 보다 추상화되고 다양한 경험적 내용들이 되면서. 기라고 하는 보다 추상적인. 그리고 이 기의 본래의 출신은 무엇과 관련이 되냐면 호흡이랑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기는 고전 글자에서는 숨쉬다고 하는 용례로 쓰이는 경우도 꽤 있어요. 그러니까 리듬이죠. 달리 말하면.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통해서 왔다갔다 하느냐. 숨 쉬는 것 코로 하죠. 음식물을 먹고 마시는 것. 우리는 음식물을 먹는다 그 다음에 배설한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사실은 천지의 기운과 소통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거예요. 내 몸은 고립된 하나의 폐쇄계가 아니라 천지와 소통하는 체계에요. 그리고 이 소통하는 체계가 무엇을 통해서 소통하느냐. 내 몸속에 있는 아홉 개의 구멍을 통해서. 눈, 코, 귀, 입 그리고 배설구까지. 천지의 기운을 들어오고 나가는 거예요. 이것이 원활하지 않을 때 내 몸의 화는 깨지는 거죠. 이 때 기가 천지의 기운과 내 몸이 기운이 서로 소통 왕래할 때 내 몸 속에서 움직이는 현상 전체가 정에 해당합니다. 특히 힘을 중심으로. 호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예를 들면 <춘추>라든가 이런데서 감정 같은 것들을 오미 같은 것들을 설명할 때 나오는 것을 보면 내 몸의 기운이 쭉쭉 위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까. 내 몸 자체의 기의 배치구조가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감정상태의 변이에 따라서 내 몸속의 기의 배치가 달라지는 거예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감성내지 감정이 아니라 내 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신체적 현상 자체가 어느 정도 표현이 됐을 때 감정이 되는 것이죠. 특히 얼굴을 통해서 읽을 수가 있는 거고. 그러니까 얼굴이 굉장히 짜증난 얼굴인데 앞에 가서 아무리 얘기해봤자 안되지 않습니까. 지금 얼굴에 짜증나고 그렇다는 것은 지금 내 신체 상태가 좋은 때가 아니니까 되도록 말걸지마라. 귀찮게 하지 마라. 이 얘기잖아요. 그것은 엄청난 언어에요. 그런데 지금 근대사회라고 하는 것은 그런 표정을 무시하고 살라는 것이거든요. ‘법대로 해’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자가 말하는 무정이라고 하는 건. 달리 말하면 인간이다라고 하는 존재는 감정적인 동물이다. 이 표현은 아니죠. 내 몸속에 움직일 수 있는 내 기의 배치가 엄청나게 소용돌이처럼 휘돌고 있는데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고 다양한 방식의 것들이 있고. 그리고 서로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가 있어요. 저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표정이고 정인거에요. 정이 얼굴에 드러나 있는 것이 표정이니까. 그런데 군주는 그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감추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無情. 마음을 들키지 말라는 얘기에요. 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하는 훈련, 가장 커다란 것이 바로 神 이에요. 정신, 정신을 길러야 되요. 이것은 사실 끔찍해요. 저 같은 경우는 좋으면 얼굴이 펴져서 숨기지를 못해요. 싫으면 싫은 감정을 별로 숨기지 못해요. 일단 얼굴이 딱 굳어지고. 그것이 굉장히 심한 편이거든요. 나이를 먹어가니까 조금은 달라지긴 하는데. 체질적인 차이도 있어요. 한 번 잘 보세요. 사회적으로, 특히 화면에 노출되는 사람들. 연극 배우나 탤런트들을 보면 신기한 것이. 감정조절 하는게 쉽지 않다는 얘기죠. 본인이 직접 체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를 보고 그런 것들을 표현해낸다고 하는 것이. 특히 제가 그런 전율을 별로 못 느꼈었는데 피아노라고 하는 영화를 보고나서 연기라고 하는 것이 저렇게 위대한 거구나 하면서 절감했던 적이 있어요. 벙어리로 나오지 않습니까. 주인공이 말을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표정과 몸짓 이외에는 기댈 것이 없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읽히는 거에요. 연기자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저는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정치에서는 거꾸로죠. 감정이나 내면의 생각 같은 것들을 일체 드러내지 않고 숨겨야지만 된다고 하는 논리에 들어 있는 거예요. 큰 일을 해야될 사람은. 그런 사람을 뭐라고 하죠. 후안무치라고 하고 조금 정서적으로 표현하면 무정하다고 하는 거예요. 양신론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판단을 할 때 감정적인 것에 내가 휘둘리기 시작하는 순간 들리지 않아요.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하고 바른 얘기를 하더라도. 그래서 어떻게 본다면 저 무정하다, 혹은 정신을 기른다라고 할 때 조금 좋은 말로 표현할 때 냉철한 이성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하는거에요. 그래서 아까도 거울에 비유하죠. 내가 냉철한 이성적 상태를 잃어버리면, 저 사람이 정말 옳은 얘기 하는지 바른 얘기인지 판단이 안됩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거울처럼. 이것을 표현하는 말이 허정虛靜이에요. 허정. 내 마음 속에 걱정이나 근심같은 것들이 싹 비워진 상태고 그 다음에 감정적인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마치 수면이 고요한 평정한 상태를 이루고 있는 상태가 정이고. 그래서 허虛는 비운다라는 뜻에 가깝다면 靜정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 그래서 거울 같은 마음을 뜻해요. 허정한 정신이라는 말은 오늘날로 한다면 냉철한 이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정치적인 아웅다웅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니까요. 그래서 그 속에 담아내는 기와 관련한 다양한 논의들이 붙어있기 때문에 훨씬 더 복잡한 데 이것은 나중에 조금 더 보완하기로 하고요. --- ◆ 왕필의 무위, 이상적인 통치자의 덕목 마지막으로 이 부분도 상당히 바람직한 얘기기도 한데, 무위하면은 유가에서는 근데 기이하게도 공자의 말 속에 요임금을 얘기하면서 무위를 얘기합니다. 그 다음에 맹자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대유위(大有爲)라고 얘기합니다. 도대체 이 관계가 뭐냐, 알기가 쉽지 않죠. 흔히 얘기할 때 군주가 모범을 보여서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요임금이 남쪽을 바라보고서 가만히 공손히 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면서 무위라는 말이 나오죠. 거기에 관한 왕필의 주석입니다. 16쪽을 보죠. 커다란 박스가 있죠. 여기를 조금 길게 읽어볼게요. 이 속에는 왕필이 노자라는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무명도 도가도비상도 무위 이런 식의 얘기들이 농축되어 있어요. 오로지 성인(聖人)만이 하늘과 같은 덕이 있도다. 성인이라는 것은 이 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고대의 군주이자, 공자. 이 때문에 공자께서 “오로지 요 임금만이 하늘을 본받았구나”라고 칭탄한 것이니, 이는 당시에 요 임금만이 하늘에 필적할 만한 도를 온전히 실현하였다는 뜻이다. 또 공자께서 “높고 높아라”라고 한 것은,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에 대한 칭탄한 것이다. 자 잘 보세요. 형체가 없고 무형, 이름이 없는 것, 무명. 누구에 대한 얘기에요? 요임금에 대한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게 뭐 형이상학적이니 하는 실체니 뭐니 하는 이런 식의 아니란 얘기에요, 왕필의 논의를 읽을 때는. 그 다음에. 대저 어떤 이름을 이름짓는다 하는 것은, 밝게 드러낼 만한 훌륭한 것이 있거나 또는 길이 보존할 만한 은혜로운 것이 있을 때이다. 그런데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서로가 따르기 마련이고, 명분(名分)이란 바로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랑에는 전혀 사사로움이 없으니 거기에 어떤 은혜로움이 개입되겠는가? 또 지극한 아름다움이란 본래 치우침이 없으니 도대체 어디에서 이름이 생겨나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하늘과 같은 덕으로 교화를 완성한 저 요 임금의 도는 본래 그러함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 자식만을 사사로이 하지 않고 자신의 신하였던 순을 임금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흉포한 자는 스스로 벌을 자초할 것이요, 훌륭한 자는 스스로가 공을 세울 것이다. 따라서 공적이 이루어졌다해도 그 명예를 세우지 아니하고, 벌이 가할 때에도 형벌에 맡기지 않는 법이다. 백성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어찌 또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이 부분의 맥락을 가만히 보면, 무명, 무위, 무형. 노자를 주석하면서 왕필이 썼던 많은 용어들이 여기에 요임금의 덕을 형용하는 말로 나와요. 따라서 왕필에게 있어서 무위라는 것은 무명 이런 것들은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델을 형용하는 용어들이에요. 하늘을 얘기하더라도 하늘과 같은 덕의 의미고, 도를 얘기하더라도 도와 같은 덕, 최후의 경지, 바람직한 이상향을 대표하는 용어일 뿐이에요. 그것을 담지한 요?순 임금들을 포장하는 용어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가 하는 방식은 무사하고 무위해요. 그럼 무사하고 무위하다는 말은 왕필은 당시 어떻게 받아들였느냐. 이게 또 앞의 것과 똑같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얘기할 것이 있는데요. 왕필은 맹자와 같은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무위(無爲)에서 군자가 유위라는 말과 대치됩니다. 특히 한나라 초기에 군주는 무위하고 신하는 유위하다. 이거는 장자 『천도』편에 나오는 얘기에요. 군주의 행동방식을 무위라고 하고, 신하의 행동방식을 유위라고 얘기해요. 그러면 그 신하하고 신하를 다스리고 통제해야할 일을 군주가 하는 거죠. 그럼 이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야기는 몇 가지가 있는데, 백성들의 안정에 보탬이 되는 바람직한 정책들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끌어안지 않고 이름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사하고 무형하다고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또 한 가지 굉장히 강조되는 게 있어요. 바로 선양이죠. 유학의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자상속이 아니에요. 유학은 기본적으로 선양의 정신이에요. 즉 아버지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덕 있는 사람이 덕 있는 사람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거예요. 흔적을 자꾸 남기는 것, 유업을 쌓는 다는 것은 나의 무언가를 승계시킨다는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이 속에서는 그게 가장 중요하게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이 말이 왜 무지하게 중요하냐. 왕필에게 있어서는 무위가,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名得其所’ 공자가 악곡을 정리하면서 어디 갔다가 온 뒤에 각각의 음악들이 제 자리를 잡았다는 표현으로 쓰는 말인데 왕필은 이것을 무위에 대한 말로 해석해요. 그리고 주석서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데. 조씨의 위나라 정권이 등장하면서, 특히 조비에 이어서 황제가 되고 나서 관리임용정책을 바꿔 버립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품중정법, 구품관인법이라고 해요. 이 앞에는 거한량이에요. 거한량이라는 말하고 이거 하고는 다른데 사실 내용은 비슷한 거예요. 사실은 지방이나 중앙에서 이제 덕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추천해서 관직에 임명하는 것이 거한량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거는 중정이라고 하는 관리를 따로 둬요. 그래서 중정관이 사람을 추천을 하는데, 구품으로 추천을 해요. 그래서 처음에 출발이 몇 품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나중에 시중까지 올라가더라도 한계가 있어요. 처음에 오품에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런데 그 사람은 1품까지 올라갈 수 있고. 그럼 뭐랑 비교가 되겠습니까. 집안의 배경과 관련이 있겠죠. 나중에 그렇게 변질이 돼요.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앞에 이미 그런 인사권, 그 추천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이 한의 유신들이에요. 그러니까 조씨 정권의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죠. 따라서 이 법을 받아들임으로 해가지고 한나라에 충성하려는 마음이 적고 새로운 정권에 참여할 의지가 강한 사람들을 관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든 제도가 바로 이거예요. 달리 말하면 한의 유신들과 신흥세력들의 틀을 열어준 것이 이 제도예요. 그러고 나서 시간이 지나가니까 그 내부에서도 이미 그 귀족사회에서도 다 정해져 있어요. 왕필 같은 경우는 뭐라고 하냐면 제 능력에 따라서 임용된다면 사람들이 다투는 일이 없을 거다라는 얘기를 해요. 사실 제대로 된다면 똑같이 상관이 없는 건데 힘 센 자가 장군으로 임용하면 좋고, 문사에 뛰어난 사람을 행정관리로 임용하면 딱 좋을 텐데, 인사가 공정하지 않으니까 능력과 재능에 따라 사람들을 임용한다면 다툼이나 숭상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게 바로 ‘부상현’이라고 하는 노자 구절에 대한 왕필의 주석이에요. 즉 이거는 인사문제와 관련된 얘기에요. 다시 말하면 무위에 관련된 것은 관리 임용권이에요. 관리의 선발, 임용, 두 번째는 인사관리, 고과를 통해서 관리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것들. 무위라는 것이 중요하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알맞은 자리를 주는 것, 그래서 왕필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가문적 배경에 따라서 벼슬이 주어지는 것, 예를 들어 원소 같은 사람에게 당시에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원래 대귀족이지 않았습니까. 조조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지만, 환관의 아들이라는 핸디캡이 있었죠. 귀족세계에서 동등하게 대우 받기에는 핸디캡이 있었죠. 하지만 이 사람은 나중에 황건적의 병력을 진압하고 나서 남은 병사들을 자신의 병력으로 끌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득세한 사람이잖아요. 왕필은 후한에 굉장히 유력한 가문이었다가 후한 말기에 무너지고 조위 정권에 참여했지만 나중에 반역죄에 연루되어 커다란 처벌을 받았죠. 왕필은 그 반역자의 이름으로 죽었던 사람으로 죽은 사람의 후사로 들어간 자의 아들이기 때문에, 유력한 가문 출신이지만 뒤가 그런 사람인거에요.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비교할 사람은 마땅치 않네, 얘기 안 해도 아시겠죠. 대단한 배경이 있는 것 같지만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왕필은 자기가 대단한 재주가 있다고 했던 사람이고, 기록을 보면 굉장히 잘난 척을 많이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젊은 나이에 고관대작들하고 청담을 하면서 추상적인 담화를 하면서 왕필을 당해낸 사람이 없었다는 일화가 무지하게 나오니까요. 그만큼 쎘다는 말발이 쎘다는 얘기죠. 근데 역시, 정치적으로 득세하지는 못했어요. 정시영간에 잠깐 참여하기는 했지만 결국 다른 개파에 밀려 제대로 힘을 받지도 못했고. 그런 사람들이 무엇을 얘기합니까. 합리적이고 투명한 인사를 하라고 얘기하죠. 그러니까 제대로 된 훌륭한 사람을 재상에 앉힐 때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모든 인사가 합리적이고 투명할 때, 적재적소에 쓰이게 되는 것이다. 무위라는 것이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란 얘기죠. 하지만 이 속에는 무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황제, 성인 같은 황제를 전제하고 하는 얘기에요. 성인이란 말을 당연히 sage라는 말로 번역하니까 그렇지 않은데 성인이란 말이 문인에 나온다면 그것은 당?금 황제와 동격입니다. 무조건 그렇게 읽어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성인에 대해 비난 섞인 얘기를 하는 것은 황제를 욕하는 거예요. 그렇게 읽어야만 글이 쉽게 읽힌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속에는 도가와는 다른, 한?진 시대 노자적인 방식의 술수가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게 전제가 군주가 가진 적이에요. 즉 도덕적 카리스마라고 번역하면 딱 좋을 거 같아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얘기하겠지만 이것도 역시 우주론적인 차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보시면 되요. 제가 어떤 나이든 분을 알고 있는데, 대학 교수시지만 굉장히 험난하게 사신 분이에요.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데도, 웃는 얼굴이 굉장히 선하신 분이에요. 그 웃는 얼굴을 보면, 저도 그렇게 마음이 여유로워 져요. 그런 사람을 우리는 보통 쉽게 덕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죠. 그런 분이 뭐 좀 해달라고 부탁해달라고 하면 왜 안 해주겠어요. 그리고 그런 분들은 저에게 도움 되는 일 아니면 부탁 하지도 않아요. 바로 그와 같은,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내가 인덕이 부족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그 때가 바로 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러지 못할 때 사용하잖아요. 그것을 사회적으로 요즘 정량화하는 추세가 돼서 관혼상제 때 누가 많이 오느냐, 얼마를 내고 가느냐를 비교하잖아요. 그런데 그거가지고 덕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리를 측정하는 거죠. 덕을 측정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가 없는 거죠. 그래서 왕필이 말하는 덕화의 무위라는 것은 다음 공자를 얘기하면서 더 하겠지만 완전히 다른 얘깁니다.
그리고 이 무위가 가능할 수 있던 중요한 기제는 왕필은 왕충 이후의 사람이에요. 따라서 이 속엔 자연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요. 왕필은 무위자연이란 말 자체가 가능한 사람이거든요. 그건 무슨 얘기냐. 거기 15페이지에 인에 관한 얘기가 나오죠. 노자가 인의를 공격했다. 텍스트 상으로 분명하죠. 왕필의 주석은 어떠냐. 인(仁)이란 것은 만들어 세우고 베풀어 변화시키니, 은혜가 있고 억지로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만들어 세우고 베풀어 변화시키면 사물들은 제 참된 본성을 잃게 된다... 저절로 그렇게 부모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효라면, 바로 그 자연스럽게 되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 인이다. 정통적인 유가의 발언입니다. 인이라는 감정의 모델을 효로부터 끌고 왔죠. 왜 이 말이 당시에 발언하기 쉽지 않았느냐. 또 질곡이 있고, 딜레마가 있어요. 왕필이 살았던 당시의 100년 동안의 정치사를 생각 해 보세요. 조조는 한 시대에 충 했죠. 농간은 했지만 자신이 황제를 뒤엎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조비는 황제를 뒤엎었죠. 충을 말할 수 없어요. 여기서부터 효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중림칠현가운데 불효라는 이유로 완적은 죽을 뻔 했고, 해강은 죽는 단 말이에요. 불충이라는 말을 안 써요. 조위라는 정권 자체가 군주에게 ‘충’하지 못했기 때문에 ‘효’를 얘기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나한테 충성하지 않으면 부모한테 효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하면서 죽여버린다는 말이에요. 이 표현을 오늘날에 대입해서 해석하면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담론하고 똑같은 거예요. 다 민주주의를 얘기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공격할 때, “반민주적”이다 라고 하면 상대방을 모욕주고 공격하기에 딱 딱 좋은 방식의 표어란 말이에요. 그만큼 혼탁하다는 얘기에요. 오늘날이 민주주의를 많이 얘기했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의미한 것처럼, 왕필은 그 당시에 인이니 얘기했던 것들이 실질적인 내용이 빠져버린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으니까 무의미한 담론으로 남은 거예요. 그래서 왕필은 효를 복권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역이 저절로 우러나는 감정, 자연에 속해있다고 얘기하는 거죠. 즉 이거는 무슨 규범을 세우고 표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무언가, 가장 바람직한 특히 엄마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고 길러주는 마음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 그게 뒤바뀌어 있는 거죠. 사실은 효가 아니라 자가 모델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바뀌었느냐. 유학의 한계죠. 권위주의가 들어있기 때문이죠. 기제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내리사랑이지만, 자식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질서유지의 수단이란 말이죠. 효는 분명히 자연적인 거지만, 노력이 필요한 감정이라면 자의 감정은 노력하지 않아도 흐르지 않습니까. 사회적 현상에서 보면 효를 거래관계로 본다는 사회적 경고가 나오기도 해요. 사실은 부모와 자식이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느냐 라는 설명이 필요한 건데, 사실 요새는유치원, 유아원에서 대리양육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연적 정을 제대로 반향시킬 수 있는 조건을 우리가 못 만들고 있잖아요. 효가 자연적 감정이 아니다.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감정에 비해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감정에 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고 진화론에서 얘기하는 것 같은데 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 가정 속에서 살을 부딪치고 같이 살아왔던 가정의 정도가 그것을 결정하는 거고 실제로 사회적 삶을 영유하는 과정을 통해서 부모자식간의 관계는 평생 동안 유지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다 달라요. 따라서 그런 관계가 옅어지고 희미해지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제대로 물을 주는 여건이 못 되기 때문에 더 시들해 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무위라는 것은 자연에 바탕을 두는 겁니다. 그리고 황제가 무위할 때 자연적인 것이 막히지 않고 제대로 소통되는 거예요. 그것을 근거로 해서, 바로 똑같습니다. 요임금 순임금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 인(仁)이 되는 거고, 정치적 방식으로 하면 무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속으로 가면 능력 있는 사람을 제대로 써라.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 가지 장치들이 기제 되어 있는데 순자에 의해서 예치라는 것으로 대표됐던 한나라의 유학이 맹자의 심성론 적인 기반으로 전회하는 틀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왕필이 최초의 신유학자라고 생각을 해요. 현학이 아니라, 신유학의 전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현학은, 달리 말하면 노자에 대한 해석은 당시의 정권에서 권장했던 텍스트를 통해서 유가의 담론으로 전환시킨 의미가 있고, 예치적인 입장에 있던 현학을 맹자의 심성론적인 학문으로 전향시킨 데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타고난, 정확한 노자의 주석서이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아니라, 당제의 사상계 자체에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문헌이라고 하는 거죠. 유가도 아니고, 단순히 도가도 아니고 당시의 시대의 정신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위가 하나의 단일한 개념이 아니에요. 그리고 단일한 개념이 아니고 네 가지 정도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내부의 지칭들도 당시의 제도나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요. 따라서 추상적이고 논리적으로 무위가 어떻다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실 하나 마나한 방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 |
2021/05/23
김시천 제4강 『노자』와 무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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