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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상상력과 과학 | ||
◆ 노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용어의 필요성 이번 주에는 원래 제목과는 한 글자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기와 덕이라고 돼 있었는데, 그러다보니까 전부 사회적인 얘기만 나오고 기(氣)에 대해 다룰 수 있는 얘기가 좁아질 것 같아서 제목을 기와 자연으로 바꿨습니다. 사실상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면 노자라는 책의 본래 이름은 도덕경이죠. 즉 도경이고 덕경이 있단 말이에요. 노자는 도와 덕에 관한 책이에요. 기에 관한 책이 아니에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고 기라는 글자도 굉장히 적게 나오고. 기에 관한 얘기가 표면적으로 나오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하지만 노자라는 텍스트에 녹아 있는 사유방식은 상당부분에서 당시에 성장하는 이른바 기론적 세계관의 논리적 맥락을 그 안에 응축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사실 텍스트 자체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기는 자연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 가지는 노자 원문에 나온 기만 가지고 기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면, 너무나 제한된 맥락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후대에 나온 다른 주석서를 가지고 해석한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시대적 굴곡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자 텍스트에 관한 얘기라고 말하기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여태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기와 관련된 사상이 실제로 중국 과학 사상 속에서 연계돼 확인할 수 있는 분야는 두 개예요. 하나는 천문학, 그리고 하나는 한의학입니다. 그런데 천문학은 이미 석권돼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과학이라고 표현하는 게 사실이죠. 더 적절할텐데.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과학적 성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상대적인 건데. 하지만 한의학의 경우에는 지금도 우리가, 나가면 한의원이 그대로 있고 실제로 임상을 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과학이라는 거죠. 인정을 받고 있고. 따라서 그와 같은 소재를 연결시켜 보는 것이 훨씬 논의가 재밌을 것 같아요. 너무 제한된 내용을 사회적이고 정치 사상적인 함의로만 봤다면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 자연철학적인 맥락을 확장해서 얘기를 끌어가려고 합니다. 물론 이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학계에서 아직 논의되지 않은 부분도 꽤 있고 저의 개인적인 시각이 상당히 많이 반영된 것이 오늘의 주제예요. 노자와 기라는 것이 굉장히 친숙한 것처럼 얘기되는 까닭은 노자 텍스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20세기 중국에서 철학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 확장된 서술의 결과예요. 왜냐하면, 지금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로 많이 자본주의화돼 있지만 스스로는 중국식 사회주의라고 말하죠. 사회주의 사상의 출발은 마르크시즘입니다. 마르크스 사상은 보통 역사적 유물론고 변증법적 유물론 두 가지로 이야기하죠. 그리고 인간의 역사 과정 자체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에서 기반한 법칙대로 운영됐다는 게 그 틀입니다. 그에 의하면 중국 역사도 원시공산제 사회에서 고대 노예제로 가야 하죠. 그런데 문제는 마오가 등장하면서, 이 마오이즘은 중국에 토착적으로 있었다고 주장한단 말이죠. 그에 맞춰야 해요. 그래서 한 때는 공자가 고대 노예제를 대변하는 사람이냐 아니냐 해서 30년대에 사회사 논쟁이 붙기도 했고요. 중국 사회 성격 자체를 마르크스주의 발전 과정 도식의 어디에서 어디까지에 배치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상당히 커다란 논쟁을 했단 말이죠. 노자는, 처음에 우리가 시작했던 것처럼 출생년도가 뭔지 왔다갔다 한다고 했죠. 하지만 중국 철학사 서술이 재미난 건, 50년 이전의 중국 철학사 서술과 50년 이후의 철학사 서술이 바뀌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 이전에 서술된 것은 공자로부터 중국의 철학이 시작됩니다. 그랬던 것이 이른바 밁시스트 역사가에 의해서는 노자로부터 출발해요. 노자와 공자의 관계 문제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지난 번 우리가 살펴봤던 소국과민은 원시적 공산사회의 흔적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돼 왔다고 했었죠.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결합되었길래 그럴만한 소지가 있었는지를 확인했다면. 또 한 가지는, 역사적 유물론은 그렇게 증명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엇으로 증명됩니까. 그래서 기를 물질로 해석해왔어요. 물질로 해석했다는 것이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그런 해석 방식의 영향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무지하게 많이 받고 기를 물질적인 그 무엇으로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에 관한 이야기도 오늘 토론될텐데. 그러다보니까 노자는 공자의 앞선 사람이 돼야 해요. 그래서 보통 사기에 서술된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원시공산제 사회만 있는 게 아니란 유물론 사상의 맹아가 있어야 해요. 그게 바로 노자에 나오는 기입니다. 그게 강조되다보니까 노자가 어떤 기철학적인 배경을 갖는 것처럼 서술해 왔어요. 하지만 사실 텍스트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요인에 의해서 훨씬 더 과장되게 해석돼 왔다는 점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넘어가면, 그런 식의 역사이야기는 막연하게 다가오잖아요 막연함을 조금 덜어주기 위해서, 기, 자연, 도에 대한 고대인의 인식구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인식구조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기를 이해하더라도 어떻게 돼서는 곤란한지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 얘기를 한 번 보도록 하죠. 자,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시면 3쪽에 그림이 나옵니다. 이 그림의 대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굉장히 재미난 이야기를 엮을 수 있어요. 철학이라는 학문이 하늘의 허공에서 추상적인 개념들로만 속되게 표현하면, 맨 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충분히 문화적 증거와 호흡할 수 있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어야 해요. 3페이지를 보시면, 제가 일부러 사진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친숙한 텍스트에서 끌어 왔어요. 왼쪽의 사진은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예요. 오른쪽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죠. 이 사람은 실제 르네상스기에 활동한 사람이고 실제로 서양에서도 해부학이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에 나온 거예요. 이 사람이 베사리우스라고 하는 유명한 해부학자보다 다빈치가 앞서요. 앞서는데,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크게 다루지 않는데, 이 그림 말고도 굉장히 많은 그림을 그렸죠. 그림을 보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죠. 왼쪽의 그림을 보면서 이게 사람 내부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요? 이건 상당히 비상식적이거나 가공, 허구적인 그림처럼 보이죠. 실제로 한의계통 의서들이 서구에 수입됐을 때, 이게 무슨 인간을 그림 그림이냐면서 별의별 악평이 나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오른 쪽 다빈치의 그림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내 몸은 이렇게 생기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만약 내 몸 속의 모습이 이렇게 생기지 않다는 말은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과 똑같은 거죠? 우리가 적어도 상식적으로 볼 때는 오른 쪽 그림이, 사실은 모르죠. 저는 그렇게 안 생겼을지도 몰라요. 열어보면 혹시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폐가 왼쪽에 있고. 열어보지 않고는 모르잖아요.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해부학을 비판하는 많은 분들도 그렇고 서구 의학계에서도, 죽은 사체를 해부한 흔적으로 살아 있는 생체에 관해, 사실 유비적이라는 거죠. 생리학패러다임이 깔고 있는 것이. 그런 방식의 논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약도 그렇잖아요. 사람에게 직접 바로 주는 게 아니라 쥐에게 실험하잖아요. 무슨 죄가 있다고. 대략 1년에 3억 마리가 실험용으로 소비되는 쥐가, 훨씬 더 되나. 엄청나게 많은 생쥐가 인간을 대신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인간에게 실험하죠. 또 이것과 비슷한 예가 인삼. 엊그저께 어떤 선생님을 만나서 재미난 얘기를 들었어요. 강원도의 분이 사업을 하다가 옷장사를 했대요. 이 분이 이 사업을 접고 산 속에 들어가서 조용한 집에, 넓고 집 두 세채 밖에 없는데 들어가서 사시는데 이 분이 집 앞에서 우연찮게 산삼 세뿌리를 발견했대요. 침이 꼴딱 넘어가죠. 그 얘기를 하다가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는데. 제가 여쭤봤어요. 산삼이 실제 효과가 있느냐. 플라시보아니냐. 그건 모른다. 실제로 복용한 사람은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 특히 한의학자들은 효과가 있다고 강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삼과 산삼을 실제 성분 분석을 했을 때, 사포린의 양 차이가, 제가 알기로는, 2.5배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해요. 조금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인삼을 어린애들에게는 안 먹이는 게 좋죠. 그리고 홍삼은 가공을 한 것이기 때문에 먹는데, 저 같은 경우는 인삼을 먹으면 아주 좋은 체질이래요. 소음인이라서. 한 번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보약을 먹으려고 한의원을 갔어요. 제 친구인 한의사가 보약을 먹지 말고 차라리 보신탕을 먹어라. 훨씬 싸고 니 몸에 잘 맞는다. 해서 몸이 안 좋아지거나 여름 되면, 제가 더위를 잘 못 참아요. 그래서 보신탕을 한 번씩 먹어요, 혼자 가서. 다행히 멤버가 있어서. 즐겨 먹진 않거든요. 보신탕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이 한 번 먹다가 그 개다 우리집에서 기르던 개라는 걸 먹는 와중에 들었어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올라와서 토하고 난 뒤에는 못 먹었거든요. 못 먹다가 나중에 약이라고 생각해서 먹으라고 해서 한 두 번씩 먹는데. 요즘에는 2,3년 동안 못 먹었어요. 올 여름에는 한 번 먹어볼까 생각 중인데. 인삼에 대해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사포린이라고 하는 성분 때문에 인체에 엄청난 치료효과가 있고 몸의 기력을 활성시켜주는 뭔가가 있다는 게 근대과학적인 설명 방식이라는 거죠. 그런데 과연 그것이, 인삼이 인간의 몸과 죽어가는 기의 관계를 다 설명하는 것인가 라고 자문해보는 것과도 똑같은 질문일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제목이 우리가 오늘 얘기하려는 것이 기와 자연인데, 이 그림이 어떻게 관련있느냐. 이 얘기가 저도 순간적으로 착상한 건데, 가만히 따져보니까 이와 같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목이 “상상력의 과학은 가능한가” 저는 한의학에 대해 붙인 명칭이 근대과학을 정당화하는 방식의 과학만 과학일 수 있는 게 아니라, 과학은 다양한 방식의 과학일 수 있고 특히 우리가 생각할 때, 상상력이 과학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특히 한의학 책은 상상력 개념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상상력으로 정당화되는 과학일 수 있다는 게 오늘 이야기의 주어입니다. 황당한 이야기죠? 말 조어 자체가. 제가 원래 황당한 조어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읽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페이지에 있는 노자의 구절을 볼까요. 이것도 아주 유명한 구절이에요. 먼저 노자 14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어슴푸레하다고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어렴풋하다고 하고, 만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으니 두루뭉실하다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질 수 없는 것이니 그 때문에 서로 섞여 하나가 된다. 자, 여기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고 하고 들어도 듣지 못 하는 것을 희(希)라고 하고 손으로 만져도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을 미(微)하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미하다, 미세하다’고 하는 표현이 여기서 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의 표현을 보면 마치 서양철학적인 방식의 맥락과 쉽게 연결되기 위해서 ‘추상적’이라고 표현해요. ‘도’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도라는 건, ‘추상적인 거다’고 건너뛰어 버립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유는 고대 중국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하학이나 특히 물리학, 수학, 동아시아에도 수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수나 산술적이었지 기하학과 같은 학문은 없었어요. 나중에 중국이 근대 수학을 받아들일 때도 기하학에 대해서, 도무지 이 놈의 학문체계는 내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 정도로 기하학은 동아시아인들에게 독특한 학문이에요. 그럼, 또 이와 같은 것을 많은 사람들이 무엇과 연결시키느냐면, 주역대사전에 나오는 ‘형이상자위지도’ 라고 해서 형이상(形而上)학이랑 연결시켜요.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형이상’ 이라는 말은 주역 대사전에 나오는 그 말의 맥락 자체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사실 metaphysica 라고 하는 것. 이 본래 말의 출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배열할 때 자연학 다음에 오는 저작 텍스트를 가리키는 거죠. 그래서 자연학 관련 논문 다음에 나오는 논문이라는 뜻이에요. 거기서 다루는 것이 실체를 다루기 때문에, 이걸 형이상학이라고 번역해서 이해하는데. 그럼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실체를 다루는 학문이잖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추상적입니다. 그 실체가 플라톤과 같은 사람에게는 이데아가 되잖아요. 형상이죠. 동아시아에서도 형이상이 나올 때, 형이상학이 도라고 표현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를 실체 혹은 형상과 비슷한 그 무엇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건 잘못된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는 거죠. 형(形)은 감각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지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그 윗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추상이라는 말보다는, 상(象)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할지는 따져봐야 하는 건데 우리는 그냥 이걸 물질적 현상세계로 그냥 넘어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근대와 교통시켜버리는 거죠. 이건 근대에 의한 독해의 전형적 사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유형, 무형 이런 용어를 얘기할 때 형체가 있다, 없다는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즉 숫자 하나, 둘, 셋, 넷, 오렌지가 하나 있고 방울토마토가 하나 있고와 숫자 1은 다른 거죠. 숫자 1이라는 추상개념은 형이상학에 해당되는 거죠. 이런 건 형이하학세계에 속하는 거죠, 구체적인 사물은. 그런데 이렇게 연결시키면 안 되고, 물을 생각하시면 돼요. 이만한 둥그런 냉장고 뚜껑을 열어서 판에다 네모난 얼음을 얼리잖아요. 그걸 뜯어서 물 속에 집어 넣어보세요. 그럼 물과 얼음이 구별 되나요? 잘 보면 보여요. 그런데 똑같이 무색인 물은 잘 안 보여요. 그때 형체가 있는 것은 얼음이고 형체가 없는 것은 물이죠. 유형과 무형의 관계는 그렇게 이해해야 해요. 실제로 굉장히 경험적인 사유를 했던 것이 고대인들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여기서 견,문이 불 자에 구성당하고 있죠. 시청과 견문은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어요. 본다는 것은 실제로 보는 행위를 가리켜요. 하지만 견은 보아서 안다는 뜻입니다. 인식을 전제하는 용어예요. 견문은 그냥 본다, 듣는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듣는 과정을 통해서 분명히 알았다는 뜻입니다. 견 자가 나오는 것은 분명히 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그냥 본다는 건, 못 볼 수도 있어요. 한자의 용례가 기본적으로 그렇게 쓰인다는 걸 생각하시면 우리가 단순히 눈으로 어떤 사물을 응시한다고 해서 그 사물을 반드시 안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중요한 건, 고대 중국에서는 감각 자체가 인간의 객관적인 인식을 제대로 성립시키지 못 하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전제는 없습니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특히 기론적 세계에서는, 이 세계 모든 본질은 이미 현상 자체를 통해 드러나 있는 거예요. 즉, 보이는 것 속에 이미 보이지 않는 게 드러나 있어요. 보이는 것 속에 본질이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示(시) 보기만 할 뿐이지만 見(견) 보고서 아는 사람은 다른 거죠. 이 본다를 “알아본다”고 하면 됩니다. 알아본다. 알아본다는 감각도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 신체가 반복적으로 했던 경험의 제약을 상당히 많이 받죠. 우리 시각이 굉장히 객관적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런 실험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면, 저도 글을 보고서 실제로 해봤거든요. 인종이 다르잖아요. 예를 들면, 백인들에게 흑인들 열 명을 세워놓고서 한 사람 얼굴을 보여주고, 그 다음 한 사람씩 지나가게 하고 “당신이 아까 본 사람이 열 명 가운데 누구냐?” 라고 하면 잘 못 맞춘답니다. 열 명에 아홉은 못 맞춘대요. 마찬가지로 한국인도 서양 사람은 못 맞춘대요. 그런데 한국사람은 백인은 잘 맞춰요. 왜냐. 브라운관을 통해서 상당히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데 흑인은 잘 못 맞춰요. 지난번에 어떤 신문기사에선가. 누가 장치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집어 넣어서 실험을 했다는데. 인간의 감각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감각을 얼마나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느냐는 나의 능력의 문제. 그래서 ‘눈이 밝다’(明) 이건 지혜롭다는 뜻이기도 하잖습니까. 특히 노자 텍스트에서 명은 신적인 지혜의 소유와 같은 거예요. 하나는 해고 하나는 달이잖아요. 해와 달은 온 천지를 다 비추는 거예요. 다 아는 존재예요. 해와 달이 천지를 다 비추면서 다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지혜를 갖는 게 명이에요. 엄청난 단어죠. 인간이 이걸 갖고 있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 표현하는 말이, 신명(神明)이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보통 무속인이 신명났다고 말하지만 사실 신명은 본래부터 아주 친밀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용어가 어디에 들어가 있느냐. 덕(德)에 들어가 있어요. 덕이라는 글자가 고대에서는 뭐와 연결되느냐면. 제가 약간 조야하게 그렸는데, 도철무늬라고 하죠. 특히 상형, 청동기에 이런 게 많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덕 자의 원형이고 이건 해와 달의 눈에서 왔다. 신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해요. 왜 청동기 속에 이게 그려져 있는가도 설명되고, 덕이 신명의 힘을 가진 사람이 발휘하는 거라는 거죠. 이 주체는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사람이고 태양 신화와도 연결됩니다. 도덕경 속에 들어가 있는 덕이라는 용어의 출시는 그것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런데 도덕경이 가진 성격은 그 앞의 것과 달리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 힘이 어디서 오느냐. 도덕경은 내가 도를 따름으로써 덕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책이라는 뜻이라고 했죠. 그런데 그 덕을 얻는 방식이 天. 즉 나의 혈연적 조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을 다스리고 자연을 움직이는 입법을 따름으로써 힘을 갖는다는, 즉 정치적으로 권력의 정통성을 다른 곳으로 바꼈다는 거죠. 이런 역할을 공조했던 사상이 음양오행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추연의 음양오행설은 왕조의 교체 정당성을 자연철학적으로 천명한 거예요. 원래부터 자연철학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사실 혁명이론이죠. 정치 교체이론을 얘기한 건데, 당시에 기론, 도론이 한꺼번에 개화하면서 한데 종합됐기 때문에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와 같은 움직임의 배후에, 이 때 배후를 meta라는 뜻으로만 이해하지 않으면 돼요. 그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면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은 보이지만 사과를 떨어지게 하는 그 힘은 보이지 않죠. 하지만 그것이 꼭 추상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사과를 놓으면 떨어진다는 것은 도에 의해서라고 표현한다는 거죠. 특히 회남자에는, 길짐승이 뛰어다닐 수 있고 날짐승이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다 도에 의해서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런 것을 지배하는 원리라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자꾸 meta라는 방식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때 관계가 실제 현상과 어떤 방식의 용어로 표현하는 게 적절한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거죠. 지난 20세기에는 서구 근대과학을 흡수하고 배워야 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친한 척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면 이제는 그 텍스트 자체를 오해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내부 맥락 속에서 그것을 그대로 이해시킬 수 있는 용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과정에서 이 얘기를 다시 해보자는 겁니다.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9_0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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