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김시천 제10강 『노자』와 자연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0_01.htm

제10강 『노자』와 자연


◆ 자연(自然)에 대한 이해


▲ 자연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이라는 말과 부딪치게 되는데, 자연은 지난 번에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조금 소개드렸죠.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자연이라는 말은 거의 99% nature라는 서양 번역어로서 자연이에요. 자연이라는 말이 한자로 쓰면, 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혹은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와 같은 말을 80년대부터 계속 얘기해왔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을 원래 맥락대로 제대로 쓰지 못 해요.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서술적 용법으로만 쓰인다는 말은 100% 정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진시대 중반부를 겪으면서 자연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게 돼요.

하지만 주로 많이 쓰는 용례는 서술적 용법이 더 강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럼 지금 우리가 쓰는 자연과 가까운 말은 뭐냐. 5페이지를 보시면. 저는 이 번역을 자연이라는 말을 ‘스스로 그러하다’고 번역하면 이상하니까 ‘스스로 그러한 세계’라고 표현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본래 맥락의 의미를 드러내 줄 수 있으니까.

자연계라는 말은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인간적 개입을 하더라도 건드릴 수 없이 늘 그러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이 자연이에요.

이와 같은 이중적인 의미를 자연이라는 말을 갖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같은 것은 산천초목, 혹은 천지 혹은 만물. 이러한 표현들이 우리가 쓰는 자연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것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쓰는 자연이라는 표현은, 요즘은 생물학 위상이 높아져서 생물학적 의미의 자연을 생태계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물리학에서 말하는 자연이라는 말은 물질이 운동하고 신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서양 사람들도 반드시 그러한 의미로 쓰는 건 아닌데.

우리는 그와 같은 말을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다보니까, 굉장히 일의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까 굉장히 단순한 의미로 축소시켜 받아들인다는 거죠.

그런데 이 자연이라는 말이 노자에서 분명 나옵니다. 특히 두 번. 중요한 구절에서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5페이지 하단을 보시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또 한 번은 아자연이라고 해서 백성들이 나 스스로 그러하다, 나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뜻의 의미로 자연이란 말이 한 번 더 나온다고 했죠. 그 의미는 제가 저번에 얘기했었습니다.

그럼 오늘 봐야할 것은 바로 이 맥락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하면서 도와 자연이 나오니까 도와 자연이 제일 중요한 용어처럼 생각되시겠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기서 더 중요한 건, 네 개의 문장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법이라는 글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꾸 실체 중심으로 생각하고 텍스트를 분석하다 보니까 거기에 무게가 가 있는 거예요.

법이라는 말은 여기서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질서의 모습들은 땅에 있다. 그 땅이 자기 나름대로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그 무언가가 하늘에 있다. 하늘은 도에 있고 도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는 그 무엇에 관한 별명일 뿐이다‘하는 정도의 함축으로 들어가 있어요.

이 속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땅 없이 살 수 있나요? 없죠. 하늘이 없이 대지의 생명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앞에 있는 것은 뒤의 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얘기예요.

그런 가운데 최종적으로 나오는 자연은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에요. 자연이라는 표현자체가 나오는 맥락이 바로 그 맥락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법해야 할 그 무엇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방식의 구절을 통해서 동아시아에서도 자연법사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서구적인 의미의 자연법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 속에 법이라고 하는 관념도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자연과 조장

그렇다면 이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사실은 뭐냐.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건 틀린 질문방식이라는 겁니다. 왜냐. 물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물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해서 자연스럽다, 자연하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가 없죠.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펌프를 만들어서 그런 짓을 하다보니까 자신들이 개입하면 다 되는 줄 착각해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힘의 원리로 설명되잖아요. 자연이란 건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제가 자연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 텍스트들을 검색해 봤어요. 시경이나 서경, 맹자, 주역, 춘추좌전에는 자연이란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나오느냐. 장자에 나오고 여씨춘추에 나오고 노자, 관자, 순자에서 나옵니다.

즉 천지에 관심이 많은 문헌들에 자연이란 표현이 나와요. 특히 여씨춘추에는 씨앗에서 싹이 트는 현상을 자연이라고 서술하기도 하고.

더 중요한 사실이 뭐냐. 이 자연이 자연물에 대해서 서술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란 말이 서술하는 대상이 인간이더라. 인간과 관련된 문맥에서 자연이란 말이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더라.

이 말은 자연이라는 말이 표현하려고 하는 무엇인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그 무엇과 관련되더라.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속에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은 있을 수가 없어요. 사실 동아시아에는 문명과 자연의 구분 자체가 없었어요. 근대가 만들어낸 도식입니다. 그리고 구분할 수 없다는 게 요즘 많이 얘기하는 담론이잖아요.
그런데, 6페이지 맨 아래에 새로 시작되는 부분을 보세요. 자연이 사람과 관련되어 나올 때 같이 등장하는 용어들이 무엇이냐. 마음 심(心), 본성 성(性), 참 진(眞), 재주 재라고 하지만 바탕 재(才), 정 정(情)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과 관련되는 중요한 용어와 관련해서 자연이라는 말이 등장하더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특히 장자에서는 이 자연이라고 하는 말이 다른 글자와 연동돼서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7페이지를 보면, 자연이라고 하는 말이 함축하는 건 뭐냐. ‘늘 변함이 없는 것’ 상(常 )자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계절의 순환이에요.

요즘은 우리가 그걸 깨고 있지 않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야 하는데 여름과 겨울만 있고 봄과 가을이 줄어들잖아요.

제가 얼마 전에 봄, 가을 용 옷을 샀는데 삼 년 째 지금 일주일도 못 입어요. 이 얼마나 커다란 경험이에요. 그런데 이 속에는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 한 또 다른 중요한 함축이 들어 있어요.

사계절의 변화가 분명하다는 건 몬순기후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열대지역에서는 없죠. 남극, 북부에는 없다는 거죠. 그냥 여름과 겨울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굉장히 특이해요. 그럼 사계절의 기온 온도차를 촉발시키는 건 뭡니까. 계절풍이잖아요. 우린 바람의 아들이에요. 아 바람의 자녀라고 해야죠.

그래서 나를 길러준 건 99%가 바람이라는 건 굉장히 과학적이라는 거죠. 그리고 동아시아 자연철학을 만들어 준 99%가 바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람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기(氣)니까.

그렇게 본다면 이 자연이라는 말의 함축은 ‘늘 변함이 없는 것’ 즉 인간이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자연이라는 것은 사물 하나 하나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늘 내가 따라해야 하는, 그래서 인순이라는 중요한 용어가 나오는데 인순이라는 용어는 장자에도 나오지만, ‘신도’라고 하는 철학자의 텍스트 속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도라는 사람은 철학사에서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최근에 연구가 좀 되는데, 그 사람이 쓴 책인 『신자』라는 책이 있는데 편 이름에 ‘자연’ 편이 있기도 해요.

그 ‘자연’ 편의 중요한 골자 중 하나가 오늘날로 따지면 사회과학적인 이야기예요. 사회적 현상의 합법체적인 그 무엇에 대해서 자연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 자연의 인순, 맞추어서 인간의 삶을 영위해야한다는 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신도라는 철학자의 기본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럼 자연이라고 하는 말의 반댓말이 뭔가를 알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자연의 반댓말은 문명이 아니라 ‘조장(助長)’입니다. 송나라 사람들은 꼭 정신없는 사람들로 나오죠. 송나라 사람이 어리숙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출신들이, 상인이라는 상 자가 상나라 상(상) 자 잖아요. 장사에 능한 사람들이에요.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방식으로 얘기하는데.

어느 날 씨를 뿌려놨는데 안전하니까 아버지가 피곤하다고 해서, 딸이 어떻게 했어요? 쑥, 쑥.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나무야 피곤하니까 누워서 자라” 이 정도면 괜찮은데, 그게 아니라 빨리 자라라고 쑥쑥 뽑았더니 다 말라 죽었죠.

자연의 반댓말, 손댈 수 없는 것을 손댄다는 말이 ‘조장’이고. 그래서 잘 자도록 도와준다는 얘긴데, 잘 자라도록 도와주지 말고 내버려둬라. 이게 생태주의자들의 말이잖습니까. 자연의 반대는 조장이라는 거죠.

우리가 조장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잖아요? 조장한다는 게 어떤 거냐. 지금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해서 오존이 자꾸 줄어들잖아요. 그리고 광우병 많이 걸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거고.

사실 더 중요한 건, 질병과 관련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오히려 빈곤이 더 큰 문제고, 못 먹으면 질병에 걸릴 소지가 많죠.

그 다음 또 하나는, 인구의 밀집도가 더 중요하다고 해요. 얼마 전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인간이 풀어야 할 난제 중 첫 번째가 빈곤이었고, 두 번째가 질병 가운데서도 전염성이 아니라 만성질병.

예를 들면, 남자들 요즘 흔히 죽는 질병이 ‘심근경색’, 여성은 ‘우울증’ 이런 게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난제라고 얘기가 되는 만큼.

전염성 질병 가운데 더 끔찍한 게, 사실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게 AI 같은 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알 수 없는 물질이 공기 중을 통해서 퍼진다. 근데 인간들은 공기 중에 퍼지는 것들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생물학 무기를 만들죠.

누가 만듭니까. 커다란 나라들이 만들죠. 핵무기 죽을 줄 알면서 만든다는 거죠. 왜 못 합니까. 참 단순한 거예요 사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한데, 단순한 걸 해결못 하는 건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핵무기 폐기하면 되는 거고, 생화학 무기 안 만들면 되는 건데, 왜 만듭니까. 돈 때문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벌 수 있는 돈의 방식과 벌지 말아야 할 돈의 방식은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경제적인 논리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위험합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분명히 효율성이 있고 많은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제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촉발시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이용되고 있지 않잖습니까. 거기에 대해 입막음 한다는 건 곤란하죠. 즉,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문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조장하는 걸 하지 말아야 해요.


▲ 장자의 기심(機心)

이 논리는 무엇과 연결되는가. 지난 시간에 제가 장자의 기심(機心)에 관련된 문제를 기회가 되면 얘기한다고 했죠. 기계적인 마음. 혹은 편리를 추구하면서 이게 문명 비판의 그 무엇처럼 얘기되는데.

그 자료와 그 노인네가 이야기하는 맥락을 잘 보면, 특히 장자 속에 든 논리는 몸의 논리예요.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자연 자체.

다른 텍스트들과 비교해 보세요. 논어나 맹자 속에는 기술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아요. 장자 텍스트를 보면 달인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잖아요. 강호의 달인들이 수없이 많아요.

무명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노자에. 무명은 황제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전에 말씀드렸죠? 하지만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이렇게 보시면 돼요. 특히 주성치 영화가 그걸 구현하고 있어요. 만두 만드는 사람도 달인이에요, 공 차는 사람도 그렇고. 대단하잖아요. 버스가 가는데 늦어서 출발을 못 하니까 날아서 창문으로 들어가는 걸 연출하는 것, 이런 사람들 다 달인인데.

이런 사람들은 그냥 넥타이 메고 가는 일반 사람이고 심지어 거지, 노숙자가 갑자기. 이런 세계를 장자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강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본다면 장자 철학 체계 속에서는 기술, 뭔가에 달한다고 하는 것이 유가에서는 단 한마디밖에 없습니다. 문(文을 통해서 달하는 거예요. 문을 통해서 인간의 문명세계를 밝히고 인간의 도덕세계, 윤리세계를 밝히고 인간다움을 구현한다는 것 외에는 별로 없어요.

하지만 장자의 세계에서는 온갖 다양한 機에 대한 達의 경지가 있다는 거죠. 그걸 道라고 표현하고.

그럼 장자는 기술적인 차원의 것들을 훨씬 더 많이 주장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장자가 문명을 비판한 사람이라고 보느냐는 거죠. 그 속에는 우리가 문명과 자연을 대립하는 구도로 우리가 읽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장자의 실제 세계는 자연과 조장이라고 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유했던 사람이라고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이 기심이 편리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장자를 보면, 어떤 노인네가 수영을 기막히게 해요. 물어요. 도대체 어떻게 수영을 하길래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노인네가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마라’ 니가 몰려고 하지말고 물살에 몸을 맡겨라. 참, 말은 쉽죠. 그게 보통의 노력을 통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훈련을 해야 하잖아요.

그 속에는, 내 몸 자체에 들어있는 자연성 자체가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논리라는 거죠. 기심은, 인간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을 키우는 방식은 좋다는 거예요.

그럼 자동차가 나쁜 것이냐? 움직일 수 있으니까 좋은 거라는 거예요. 자동차 타고 어딜가서 부모님도 만나고. 요즘 KTX 선전할 때 그렇잖아요. ‘당신을 보내세요’ 물론 매연을 뿜는다는 나쁜 점이 있지만 적어도 인간 사회에서 본다면 자식이 부모간의 정은 무한히 가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굉장히 바람직할 수 있어요.

걸어서 부모님 한번 뵈러 간다? 사실 못 가잖아요. 그래서 어느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장자의 시대에는 공해도 뭐도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의 몸이 갖고 있는 가능성이 생산력의 전부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력의 전부인 세계에서, 다른 기물을 통해 그러한 가능성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장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에 석회를 바르잖아요. 그걸 왜 합니까.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거예요. 이성보다 위대한 것이 인간의 감각이에요. 감각의 세계를 우린 다시 한번 구현해야 하는데.

특히 여기서 요구하는 감각은 나아간다면 어떤 부분까지 가느냐, 저 사람을 딱 봤을 때, 지금처럼 대신에 우리를 보장주는 건 법체계,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계약서대로 하면 돼요. 이게 근대세계예요. 사회계약론에서는 다 필요 없고, 계약대로 하면 돼요. 계약 당사자가 우리인데, 우리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계약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계약을 잘 해야 돼요, 우리는. 계약은 함부로 할 게 아니에요. 과거는 법적인 장치를 통해서 인간과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계약이 아닌 면대면의 관계였고, 사람 대 사람 친분의 관계였을 땐 어떻게 합니까? 내가 사람을 잘 알아봐야 해요.

견물을 이야기하면서 알아본다는 것이, 저 밖에서 지금 어떤 일이 있어 라고 전달했단 말이에요. 그럼 들었다. 이게 아니에요. 저 놈이 지금 제대로 말하는지 거짓말하는지에서부터.

그러니까 신(信)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는 신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신용은 어디서 옵니까? 계약서에서 오는 거예요. 그럼 과거에는 신용이 어디서 옵니까? 계약서가 없으면? 말 뿐이잖아요.

말만 믿고 해야 하는 세계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이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그렇게 살던 세계의 사람들. 지금 우리가 갖는 생각과는 굉장히 다른 것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씨춘추』에서는 자연이라는 용어와 하여금, 시킬 使(사)가 대립되는 용어로 나와요. 우리는, 이미 본래 텍스트 맥락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근대의 눈을 갖고서 좋아하는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해왔던 거예요. 지금에 와서 그럴 필요 없잖습니까?

텍스트는 이미 자기 스스로를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잘못 본 것뿐이죠. 그래서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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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氣)의 세계


▲ 자연과 인간

그럼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데, 자연이 인간의 몸과 직결돼 있더라. 특히 인간의 본성과 중요하게 연결돼 있더라. 이건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철학적 사유, 동아시아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대전제예요. 감히 넘어설 수 없는.

그런데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만약 유학자들이 유전자 조작이나 배아 복제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연구하게 해 달라고 신청했을 때, 과연 허락을 했을까, 안 했을까.

어떻게 답변을 했을까. 이런 부분이 우리가 텍스트 훈련을 통해서 공부하고 말 해야 하는 부분인데, 공자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자가 그 당시 맥락에서 했던 말을 우리는 지금 현재 당면한 현실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지식인들이 요구받는 질문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같이 고민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되는 거고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게요. 몸과 자연의 관계를 얘기할 때 아주 단순한 사실부터 얘기하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텔레비전을 보면 6시부터 7시 까지 어린이를 위한 시간이잖아요. 그 당시에 봤던 만화영화 주제가들을 다 외워요. 지금도.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게, 아톰도 기억나고 황금박쥐가 끝날 때 그걸 봐서. 이겨라 승리호, 당려라 봉개호 라고 해서 노래가 좋지 않습니까?

한 번은 제가 고등학교 때 세 시간동안 제가 알고 있는 노래를 쫙 불렀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노래 가운데 제가 제일 좋아했던 게 영화에 삽입된 곡인데, 전자인간 아람이 아라치에게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그게 제 기억에 남는 좋은 노래예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숙제를 안 하고 계속 티비를 보니까 어머니가 하는 말이 “숙제 다 했냐?”죠. 그랬다가 여덟시 오십오 분이 되면 텔레비전에서 말이 나오죠.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라고 쫙 나온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잡니까? 어머니, 아버지 안 계시면 계속 오고, 어머니, 아버지가 주무시면 다시 켜서 이어폰 끼고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그 속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하다. 그래서 저녁 10시가 되면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라. 군대가 그렇잖습니까. 아홉 시 반에 점호하고 열시되면 잔다는 거죠.

그런데 한의학적으로 얘기하면, 이건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왜 그러냐. 저는 맞다고 생각되는데,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이 생체실험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 사람이 생활한 거예요. 바깥 사람들과 통화를 하면서 체크는 한 거예요.

이 사람이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며 행위를 반복하다보니까 하루의 패턴 주기가 24시간을 전후로 해서, 길어야 20분 30분에서 큰 경우에 1시간의 오차밖에 없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인간의 몸 자체가 24시간 움직인다는 거예요. 자고 일어나는 생활 자체가. 그 생체 시계가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있다고까지 하니까요.

이건 인간 이전에 생명체가 발생할 때부터 우리 몸 속에 각인돼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처음에 인류학자, 생물학자에 의하면 아프리카 중부 어느 지역에서 현생 인류가 탄생해서 퍼져 나가서 다양해졌다고 하는 건 일반적으로 하는 얘기지 않습니까.

그것도 짧은 시간이 아니죠.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이루어졌는데. 특히 우리같은 경우는 사계절의 순환이라고 하는 것. 가장 대표적인 증거 중 하나가, 봄이 되는 저는 별로 안 좋아요. 여자들은 봄이 되면 살랑살랑거리죠. 남자는 가을이 되면 허전해지고. 보통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봄 하면 더 중요한 게 뭐냐. 바로 노인네들이에요. 실제로 가보면, 사고사로 죽는다거나 질병으로 죽는다는 경우는 사시사철이 없지만. 노인네가 돌아가시는 때가 특히 2월 말에서 4월 달이 많다는 사실을 많이 겪는 것 같아요.

제가 부조금을 내러 가는 게 그때가 가장 많으니까. 그게 바로 음양의 교차를 통해서 한의학을 설명하잖아요. 이 얘기를 적용하면, 한의사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여름은 낮이 길고 밤이 짧아요. 그래서 여름엔 잠을 덜 자도 괜찮대요. 겨울은 밤이 길고 낮이 짧잖습니까. 그래서 겨울에 몸 잘못 움직이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잠을 많이 자고 여름엔 잠을 적게 자도 괜찮다는 것이 한의학에서, 음양오행론에서 하는 말이에요.

생체고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에 내 삶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연 세계가 움직이는 입법에 내 삶을 맞춰 나간다면, 여름엔 좀 적게 자도 됩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 똑같이 일어나서 똑같이 출근한다. 저는 그래서 아침 강의를 잘 맡으려고 하고, 저는 늦게 자니까, 그럼 늦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어머님과도 대학 다닐 때 되게 혼란했던 게, 새벽 2시, 3시, 4시에 자서 10시에 일어나면 6시간 밖에 못 자는 거잖아요. 어머니 눈 속에 저는 잠꾸러기예요. 저한테 맨날 “10시되면 불 끄고 자” 그러신단 말이에요.

집사람은 저랑 체질이 달라요. 집사람은 10시에서 11시가 되면 천근만근으로 눈을 누른대요. 아침에 딱 깨요. 그렇게 일어나래요. “너와 내가 생활패턴이 다른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데.

요즘엔 애기가 잠들어야지만 제가 책을 볼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또 그렇게 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강사였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직장인이었다면 아침마다 아주 힘들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또 일찍 자게 돼요, 피곤하니까.

완전히 못 고치는 건 아닌데. 문제는 제 몸의 패턴이 어느 시간에 책을 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걸 아는데 억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잖습니까. 동일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공부를 할 때 제가 훨씬 효율적으로 시간력이 달라지는데. 이렇게 몸이 개인적으로 다 다르단 말이죠. 이런 걸 보통 한의학에서는 체질이라고 하죠. 그것이 근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내 몸 속에도 시계가 있고 자연이 우리에게 준 시계. 그건 그냥 생기는 게 아니잖습니까. 태양과 지구의 자전이 있으니까 생체 시계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사계절이라는 몬순기후가 일이년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을 거쳐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나의 적응 기제에 영향을 줬을 테고 나는 거기에 적응돼 있을 거예요.

그런데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동일한 시간에 자고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죠. 몸이 안 좋다면 몸이 좋아질 때까지 더 자는 게 당연한 거예요. 저 사람 대단하다, ”아픈 걸 무릅쓰고 일 하러 나간다.“ 이게 사십 대에 갑자기 푹푹 쓰러지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본주의를 운용하는 시스템은 건강과 정말 안 맞아요. 의학발달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의 생활시스템을 구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야 합니다.


▲ 士氣(사기)와 血氣(혈기)

이런 텍스트들로 배울 수 있는 건 그런 내용입니다. 시간도 달리 생각해야 하고. 자, 9 페이지를 보세요. 보통 우리 군대를 다녀온 남자나 여자분들, 군대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제식훈련이죠. 제식훈련이 군대 제도에 도입이 돼서 운영된 것은 18세기 정도. 얼마 안 된 일입니다.

괜히 안 되는 일을 하는 이유가 실제 그렇게 해서 훈련을 시킨 사람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한다고 해요. 총 배운다고 더 잘 싸우는 것도 아닌데.

문제는, 기와 관련해서 士氣(사기)와 血氣(혈기)라는 글자는 요즘 우리도 쓰는 말이죠. 기와 관련해서는 가장 빠른 용례를 보이는 게 혈기예요. 혈기는 논어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혈기가 방자하다는 말을 하잖아요. 혈기가 방자한 중고등학생들을 건드린 적이 이승만 정권에 있었는데 이번도 또 건드렸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나이를 먹으면 혈기가 죽잖아요. 할 말을 못 해요.

그런데 혈기가 방자한 사람은 상대방이 강자로 나오면 나올수록 더 커지잖아요. 그게 혈기예요. 기가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원초적인 힘이에요.

그 다음에 기와 관련해서 이것이 조직적으로 이용되는 걸 가장 쉽게 보여주는 말이 ‘사기’라는 표현이에요. 선비의 기운입니까? 아니에요. 사기예요. 특히 제식훈련을 통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사기죠.

예를 들면, 일반 훈련소에서 하는 건 아니지만 간부를 훈련시킬 땐 권투를 많이 시켜요. 서로 싸우는 거잖습니까. 해 봐야지만, 맞아 봐야지만 맞아도 견딜 수 있다. 때려보지 않은 사람은 못 때려요. 그렇지 않나요?

저는 사기라는 말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 했는데. 한 영화를 보다가 그 느낌을 받았어요. 탐 크루즈가 출연했던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신식 훈련을 받은 일본 군대가 총을 갖고 있고 숲 속에 있는데, 사무라이들이 말을 타고 건너 오는데 대형 브라운관에서 보니까 이게 실제 장면이지 않을까.

사무라이가 쓴 갑옷을 보면 악마의 얼굴처럼 짐승 얼굴처럼 무섭게 해놨잖아요. 저렇게 하면 두렵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브라운관에서 실제 장면처럼 보니까 총알가진 사람이 오줌을 지리고 도망가고, 무너지고, 제가 사기가 뭔가를 그걸 보면서 그대로 느꼈어요.

저런 인간들 속에서 공자가 튀어 나온 거예요. 당시 사(士)라는 개념이 어떻게 바꼈느냐.

그렇게 사무라이들이 좍 몰려오는데, 한 사람이 하늘 천, 따 지하는 걸 연상시키면 공자가 얼마나 혁명적인 사상의 궤변자인지가 설명됩니다.

이건 제가 설명한 게 아니라, 학자 이름을 까먹었는데, 루이스라는 사람이 한 얘기예요. 공자가 당시 사상계 지형도에서 볼 때 얼마나 특이하고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의 변천을 낳았는지.

인(仁)개념 자체가 사실은, 남자답다는 말이 요즘 바뀐 것과 똑같아요. 옛날에 남자답다고 할 때는 어깨가 딱 있고 키도 이만해야 하고 얼굴도 남자답게 부리부리하게 생겨야만 멋있는 거잖습니까.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잘 나가는 연예인들은 어때요? 예쁘장하게 생겼잖아요. 마치 공자의 시대에 인이라는 글자의 내용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뀐 것과 동일한 방식의 변화를 공자가 열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사라고 하면 씩씩하고 사나운 걸 느끼는 게 아니라, 되게 부드럽게 생각하잖습니까. 우리는 공자의 후예인 거죠. 자꾸 얘기가 딴 데로 새는데.


▲ 기(氣) 용어의 기원

기(氣)라는 말은, 동아시아가 계절풍 기후였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용어예요. 기라는 말의 기원이 뭐냐. 여러 가지 방식의 설명이 있단 말이에요.

그 중 첫 번째는, 운(雲)기라는 표현이 나와요. 구름 운자입니다. 기 가제가 구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운기가 구름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기라고 하는 말의 원형이 구름으로부터 온 게 아니냐. 기상적인 무언가로부터 온 게 아니냐는 설도 있고.

또 하나는 곡식,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지 않습니까. 그 기운, 생명의 기운. 머리가 아플 때 그거 쐬면 좋은 거 아시죠. 아침에 일어나서 눈이 피곤할 때 커피를 한 잔 타서, 호호 불면 따뜻한 증기가 올라오잖아요. 거기에 눈을 대면 피로가 조금 풀려요.

과거에 기를 설명할 때는, 근대 과학 특히 물리학이 유행했기 때문에 물리학을 염두에 두고 천문학, 기상뿐만 아니라 물리학적 우주 패러다임과 관련해서 기를 설명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기는 질료, 실체, 원질,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을 갖다 붙였어요. 요즘에는 그와 같은 설명은 곤란하다고 한다. 왜냐.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기론이 성립해가는 중요한 과정 중에 관자라는 중요한 문헌이 나오는데, 거기서 인간 생명의 중요한 기원을 얘기하면서 정기신을 얘기해요.

이게 회남자로 가면 정신, 형체라고 해서 이원화합니다. 이때 형체는 실제 우리들의 물리적 몸을 지칭하는 거예요. 동아시아에서는 서양에서 말하는 정신과 육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에요.

물론 분명한 의미로 서양적인 이분법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을 구분하긴 했어요. 그런데 정신적인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적인 거냐? 그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요. 다 물질적인 겁니다.

우리는 지금쓸 때, 정신(精神)이라는 표현을 쓰죠. 이건 같은 거예요. 온갖 사물에는 그 속에 생명의 기운이 있는데 이 생명의 기운을 인간이 흡수하면 기가 되는 거고 이 기가 내 몸속에서 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신(神)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

마음적인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精子(정자). 이건 생명의 씨앗이잖아요. 물질적인 거예요. 달리 말하면, 이런 표현을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라는 근대적인 용어를 가지고 들이대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 방식이라는 거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분 자체가 없었고, 이건 본래 하늘로부터 오는 거고 몸뚱이라를 구성하는 형은 땅으로부터 온다는 게 동아시아인들의 사유예요.

내 몸은 천지의 구현입니다. 김용옥 선생님이 표현하는 걸 보면 통찰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떤 책에서 지나가는 말로, 이 분이 호주에 가서 디자인에 관해 강의를 했다면서, 디자인이란 하늘의 원리를 땅에 구현하는 것이다, 즉 천의 질서를 지상의 세계에 구현하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표현했는데.

달리 말하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하늘의 원리가 땅을 통해 나를 디자인 한 거예요. 이같은 사유를 회남자 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죠. 이 두 눈은 하늘의 해와 달이고 내 몸속을 흐르는 혈관은 강이고, 내 몸속을 흘러 다니는 것은 기운이에요. 여기 바람이 흘러 다니듯이 강물이 흘러가듯이 내 몸 속에 기운이 흘러 다닌다고 합니다.

전부 다 이 속에는 물과 바람의 이미지가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은유적으로 투영돼 있습니다. 상당히 어떤 부분은 은유적인 장치를 통해 인간의 자연 영역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라 보면 돼요.

그래서 기를 얘기할 때는, 물이나 바람을 염두하는 게 좋다는 겁니다. 그런데 물이 고여있으면 어떻게 되죠? 썩어요. 기와 혈은 계속 내 몸을 흘러야 해요. 막혀요. 그럼, 뚫는 게 침이라는 거죠.

그럼 어디를 어떻게 뚫어야 하는가. 이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가 없잖아요. 기는 안 보이는 거니까. 특히 체포를 통해서만 가능하지 않습니까. 원래 진맥이라는 것도 굉장히 여러 방식으로 했잖습니까.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진맥을 했었는데 점점 이론화되고 발달하다 보니까 그냥 손목에 하는 걸로 결판났고. 그건 나름대로 임상과 이론화로 병행되면서 축출된 결과물이겠죠.

자, 9페이지에 있는 명대(明代) 장개빈이라고 하는 의학자이고 의학이론가의 그림을 보면, 큰 몸의 틀 속에서 보는 것도 그렇고 이 속에 나와 있는 것도 실제로 해부를 통해서는 하나도 검증이 안 돼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이런 것들이 나와 있느냐. 그건 결국, 침을 놓기 위한 혈자리가 사실은 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고 이런 건 다 촉각적인 것들이고, 촉각적인 것을 통해 알아낸 것을 가지고 실제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침을 놓기 위해서는 눈으로 봐야 되고, 그렇잖습니까? 손가락으로 재야하고.

달리 말하면, 이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자연철학적으로 인간의 몸 속을 돌고 있는 기가 어디가 막히냐 정체돼 있느냐는 식의 표현으로 언어가 구성돼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와 같은 세계가 있다면 그걸 자연철학적인 용어로 한다면 ‘자연’이에요. 자연은 자연인데,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 인간이 따라야 한다는 막연한 애매모호한 커다란 이야기 덩어리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것의 주인공을 기라고 하는 순간, 굉장한 파급력 즉 응용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 주어지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 감응

그런데 제가 기를 강조하면서 자꾸 인간과 관련한 쪽으로 몰아가는 이유는, 이 기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 개념으로 볼 수 없고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과만 연결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하냐.

단순한 예를 들어 볼게요. 우리는 기를 감지하죠. 한겨울에 이 책상이 있을 때, 한겨울에 이 책상을 만지면 굉장히 차갑게 느껴져요. 그런데 여름에 만지만 굉장히 시원하게 느낀단 말이죠.

이때 '감지‘하는 이건 사실 서구적인 표현으로는 감각한다지만 우리는 감응한다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했죠. 감응은 내 몸속의 기와 내가 감응하는 사물의 기운이 소통되는 과정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에요. 기의 변화예요.

이런 용어는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것과 똑같아요. 양자역학에서 대상이라고 하는 걸 확정할 수 없다고 하고, 왜냐하면 개입하는 순간, 아주 극미한 세계이기 때문에 측정하기 위해서 개입하는 순간 이미 그 운동성이 다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측정자체가 굉장히 객관적일 수 없다고 얘기하잖습니까.

객관적 관찰 자체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식의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기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 사물과 내가 만나는 순간, 서로 기를 주고받을 때 나는 저 사물에 영향을 미쳐요. 저 사물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순간 내 몸의 기의 분포가 변합니다. 이런 걸 감응론이라고 합니다. 객관적 수치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이 하는 말까지도 포함되는 거예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오랜만이다”라고 하는 거랑 옛날에 듣기 싫어했던 “야, 속살”이라고 하면서. 들어오는 기운이 다르잖습니까.

그 말이 내 귓청에 울리는 순간, 내 몸속의 기가 쫙 퍼지면서 옛날에 내가 저 친구한테 괴롭힘 당했던 기억이 갑자기 쫙 올라오면서 반응이 생기는 거예요. 감응하는 거죠. 그 사람도 마찬가지죠.

기의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객관화 혹은 수량화보다도 대면하는 순간 변화의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속에는 반드시 뭐가 매개되어야 하느냐. 물론 이 컵과 이 컵이 만나는 순간에도 뭔가 있죠. 이건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이건 인간이 알 수 있는 범위의 문제가 아니에요.

여기까지 기를 적용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 기와 관련된 용어가 출현한 맥락을 잘 보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즉 인간과 물과의 관계 속에서 기 개념이 적용된다는 거예요.

즉, 인간이 알아낼 수 있는 영역 안의 신호들만 우리는 체크할 수 있다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는 자외선을 보지 못 하잖아요. 귀로 들을 수 있는 파장의 영역도 제한돼 있고. 파장 밖에 있는 소리들은 못 알아듣잖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미지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 거죠.

마찬가지로, 다른 사물들은 다른 사물과 감응하는 방식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관과 다른 종류로 감응하겠지만 그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응의 수단과는 다른 방식의 언어 틀이기 때문에 결국 기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

기를 물리학적 패러다임으로 해석하는 건 잘못된 해석 방식이고, 인간이 반드시 개입된 관점에서 기 의미를 해석할 때만. 한의학이 살아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의 몸이 매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맥진이라고 할 때, 그 정보를 어떻게 도무지 얘기해주기가 어려워요. 그렇잖아요.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런 부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을 때의 중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증거를 사기의 편작찬공열전이라고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어요.

그 편은 사마천 당시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표현 체계, 개념 체계를 반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창공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임상보고서가 들어가지만, 편작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상당히 신화적으로 되어 있어요.

편작이 원래는 여관에서 심부름꾼하는 관리인으로 지내고 있었죠. 그때 장상공이라는 어떤 사람이 의사였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이 거기를 자주 출입하다가 편작의 됨됨이가 괜찮은 것 같아서 약을 주면서 이 약을 상지수에다 개서 먹으면 특별한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해서 그걸 다 먹었다니, 담장 밖에 너머 사람들까지 보이더라.

눈으로 딱 보면, 이 사람 내부가 어떻게 돼 있더라는 것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편작은 그것 때문에 오해 받을까봐 진맥을 통해 알게 됐다고 해요.

저는 “상상된 신체”라고 하는 표현을 착상하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어요. 일본학자는 편작이 투시술을 갖고 있어서 시각적인 지식의 중요성이 상당히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맥진과 관련된 이론은 편작 이전의 이야기 속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아요.

창공은 한나라 문제 때 실존인물이라고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편작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릅니다. 이 차이는 뭐냐. 창공은 진맥을 하면서 환자의 증상을 의경 속에 들어 있는 증상들과 대조해봄으로써 이 사람 병이 뭐다라는 방식으로 진맥을 해요.

그런데 편작은 그런 것 없이 딱 꿰뚫어 봤다고 나와요. 이 때 꿰뚫어 봤다고 할 때, 진맥을 통해서 알아봤다고 하는 표현은, 달리 말하면 맥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아직 개념화를 갖지 못 했을 때 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눈으로 본다’ 자기를 신비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니까.

따라서 촉각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일 수도 있었다는 거죠. 하지만 그 용어의 실체는 진맥이었고 그것은 촉각으로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속에 들어있는 자체가 확립돼 있지 않을 때의 현상이 신화화된 것이고 그것이 용어를 갖고 구체화됨에 따라 비신화화되었을 때 상황 자체가 이상한 방식으로 조율돼 있는 게 아닌가.

거기까지 설명한다면 이 신체의 그림 자체가 왜 그렇게 그려져 있는가는 물론이고 한의학의 발전과도 맞는 설명방식이 아닌가. 그리고 그 배경에 있는 것이 기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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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0_03.htm

◆ 음양오행의 신화와 역사


▲ 음양오행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기화하는 세계는 조금 전에 얘기 드렸어요. 음양오행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 더 얘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음양오행은 기와 별도로 탄생된 론이에요. 음양오행을 앞으로 끌어가면 어떤 사람은 주역과도 연관시켜서 음양사상이 무지하게 오래됐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해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때 체계화되었는가. 어느 때쯤에 결합되어 의미 있는 구조를 획득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한데,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분명히 음양오행론이 나름의 논리와 체계를 갖고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관자라는 책을 보면 음양오행론이 나와 있고, 여씨춘추에서도 음양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등장하죠.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기와 인간의 몸과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져보신 적 있나요? 왜 하필이면 인간의 혀는, 몇 가지 맛을 구분하죠?

매운 맛은 미각 세포가 하는 게 아니라 통증으로 느끼는 거죠. 네 가지입니다. 왜 인간이 네 가지 맛을 구분할까. 이건 좀 어렵죠. 더 쉬운 예를 들어 볼게요.

밥을 먹기 전에 여름에는 어떻게 하고 먹어야 하죠? 냄새를 맡아보잖아요. 이게 쉰 건지 안 쉰 건지. 코가 왜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감각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뭘 구분합니까.

내 몸속에 들어와도 되는 건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인간 감각의 기본이에요. 눈이 하는 역할이 뭡니까. 내 몸이 가도 되는 곳과 안 될 곳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저기 나타나는 것이 사잔지 사람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눈이 있는 거죠.

감각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도대체 눈이 여기 왜 달렸는가.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보기 위해서 달린 게 아니잖아요. 코가 왜 달려 있어요. 이게 먹어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달리 말하면 이 코가 그것을 분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차이를 감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코가 진화했다는 얘기와 똑같은 겁니다.

음양오행론이라는 것이 인간의 몸과 관련해서 중요한 함축이 뭐냐. 원소주기율표가 물질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물리학적인 방식을 통해 사물을 분류한 책이라면 거기엔 내공이 빠져 있어요.

한의학이 추구했던 사물의 분류체계는 내 몸과의 감응 관계 속에서 사물을 분류한 거예요. 독이 뭡니까. 먹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다른 동물한테는 상관없을 수 있어요.


▲ 감응

감응이란 것이 왜 중요하냐. 철저하게 인간적인 용어이기 때문이에요. 감각한다? 사물의 형태를 알아보는 것이 도대체 뭐가 중요합니까.

이 지(知)라는 용어가 독초와 먹을 수 있는 풀을 구분하면서 나와요. 즉, 인간이 알아야할 지식은 형이상학적이고 수학적인 걸 이해하기 위해서 지 능력이 발달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서 적응을 위해서 뭔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 구분의 기준이 뭐냐. 내 몸과의 감응관계 속에서 나에게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각기관이 있다는 거죠.

무슨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꾸 그런 쪽으로 가다보니까 몸에 해로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진리를 위해서 먹어야 해요. 그렇잖습니까. 특히 책이 그렇잖아요. 그 어려운 걸 갖다가.

문명이 엄청난 지식체계 위에 구축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면서도 책을 봐야 하지만. 특히 철학책 꼭 읽을 필요 있습니까? 있죠.

당연히 있죠. 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무엇이 해도 되는 것인지 중국적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제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먹어도 되고 무엇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어떤 행동은 해도 되고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에요.

행위의 영역과 물리적 영역에 관한 언설들이 전혀 격차 없이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뭘 통해서요? 특히 입을 통해서. 이 입이라고 하는 것이 먹으면 죽는 게 있어요. 마찬가지로 여기선 나가면 안 되는 게 있어요. xx야. 이건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구멍의 인간학이라고도 하는데, 혼돈을 얘기하면서 칠규라는 하는 게 거기 왜 등장하느냐. 칠규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죠. 첫 번째는 우리가 소통하는 곳이에요. 여기는 다 위기로 막혀 있기 때문에 기가 분명히 감응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안과 밖에 통하는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아홉 개의 구멍만이 안과 밖이 드나들면서 소통해요. 그런데 드나들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지라고 하는 거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지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지는 같은 거예요. 과학과 인문학이 별개 차원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이 접목돼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론이 가진 중요한 함축이에요. 기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간학이면서 자연학이에요. 인간과 자연자체가 분리될 수 없는 방식의 사고를 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과거에는 그런 걸 정당화하는 논리가 오늘날에는 신화적인 논리고 비과학적인 언어라 규정돼 있기 때문에 그런 언어를 쓰는 것이 설득력이 없는 거죠.

문제는, 우리가 경험 세계 속에서는 그때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과 똑같아요. 그들이 느끼는 기나 우리들이 느끼는 기나. 조금 차이가 있죠. 우리가 조금 더 더러운 기운 속에 살아요. 공기도 더럽고 말도 훨씬 더러워졌고.

하지만 인간 대 인간 속의 환경은 엄청나게 개선된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여기서 저한테 말도 못 붙일 사람이 많고 제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분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강사랍시고”하면서 속으로는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러실 분이 여기 계시진 않겠지만.

저 사람이 사람이다 라고는 생각하는 관계로 우리가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는 거죠. 그 부분은 인간이 성취한 진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몸의 논리 차원에서는 아직 미비합니다. 그렇게 얘길하죠. 현대 의학의 위대함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긴 수명을 누리게 됐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이야기하는 분들은, 빈곤의 퇴치가 인간의 수명을 늘게 하는데 가장 도움을. 아프리카는 평균 수명이 삼십 대 초반 심지어는 이십 대에 죽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하루에 죽어나가는 인구가 만 명인가 십만 명인가.

어느 한 쪽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는데, 우리가 싸워야 할 건 그런 것이죠. 결국 어떤 텍스트를 읽든 간에 그것이 과거에 이랬다 저랬다는 중요하지 않고 기의 논의를 감응을 이룬다는 것은 내 몸의 논리를 통해서 체험하고 검증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기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딱지를 받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적어도 전통과학사회에서의 기가 말하는 바대로 살고 있고 그리고 맞으니까.

다만 우리는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신화적인 논리로 윤색되어 있고 유비적인 차원으로 각색되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어야 해요.

따라서 그 기준을 근대 과학에서 가져온다는 건 곤란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어디로부터? 내 몸의 경험, 내 몸의 판단으로부터 검증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본초라는 책 속에서 이런 것들을 완벽하게 체계적으로, 린네가 분류표 만든 것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분류학적인 뭔가가 있어요. 오히려 실험실에서 인삼의 성분인 사포닌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런 식의 연구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맥을 잘못 짚은 거라는 거죠. 그것도 필요해요. 그것이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질에 대해 대화하는 공통 용어들이니까. 공통 용어체계에 내가 동참해야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 있고 약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우리는 과학적 표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한의학이 해명되었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거죠. 동의학의 처방이 무슨 성분이 발견됨으로써 약효가 입증되었다가 아니라 그 약효라는 것은 먹으니까 병이 나았다는 거예요. 여기서 가져가야지 왜 실험실에서 그걸 찾습니까.

달리 말하면, 한의학 세계에는 실험실 의학이라는 것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각 개개인 한의사들이 자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환자를 다루면서 했던 임상적인 축적을 체계화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가야하죠.

왜 전통적으로 맥진을 해 왔는가. 그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 속에 든 게 기(氣)라는 것이고 표현한다면, 기의 운동이고 기의 흐름이고. 그리고 그건 우리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정작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모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방구를 꼈다. 방구를 뀌면, 소리 없는 방구가 독하죠. 소리 없이 나를 괴롭히는 냄새가 있을 때 내가 왜 거기에 얼굴이 찡그려지고 기분이 나빠질까를 생각해보세요.

그게 들어오는 순간 내 몸이 감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순간 좋은 향수를 뿌린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향긋한 향내가, 특히 요즘은 아카시아향이 좋잖아요. 창문을 열어 놓으면 향이 들어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도대체 감각한다는 것이 사물의 객관적인 정보나 성질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분류하지 않으면, 방구냄새 나면 나가야죠. 창문을 열거나.

그래서 제가 아까 얘기했던 게, 인간의 감응체계를 감각이든 뭐든 정이라는 것도 가장 단순화시켜서 두 가지로 나누면 뭐냐. 好惡(호오)라고 얘기했죠.

이건 감정 즉 심리적인 용어이기도 하지만 자연학적인 용어고 자연철학적인 용어이기도 한 거예요. 호오는 도덕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 인간관계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라 물질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도 감응관계가. 좋은 것, 나쁜 것. 그래서 동아시아의 용어 속에는 자연과 문명, 인의에 대한 구별 자체가 기본적으로 없어요.

그런데 이제 엉뚱한 데다 힘 쏟는 경우가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오행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왜 하필 음양이냐 왜 하필 오냐. 여기에 목숨을 거는데, 사실 그 속에 비밀이 어떤 게 들어 있느냐는 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오행이 성립된 원인 가운데 하나를 지적한 두 분이 있는데, 방박(龐朴)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중국의 학자가 있어요. 17쪽, 18쪽 부분입니다. 17쪽을 보면, 방박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갑골문을 보니까 음양이나 오행이 없더라면서 오히려 거기에 나오는 것은, 은나라의 갑골문을 보니까 상 앞에다 중 자를 붙여서 중상‘중상’(中商)이라고 하고, 나머지 부분을 사방사방(四方). 자기가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거죠.

우리는 사방하면, 동서남북이라고 해서 나를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앞, 뒤를 사방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방향은 기본적으로 모 방자입니다. 네모꼴, 사각형이라는 뜻이에요.

따라서 방박이라는 사람은, 중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방을 통해서 다른 지역을 지칭한다는 표현은 결국 모방의 개념이다.

즉, 모는 우주의 수예요. 그리고 이 모습은 뭐와 닮아 있느냐. 왜 하필이면 거북이의 껍질을 가지고 점을 쳤느냐. 이렇게 생겼잖습니까. 닌자 거북이도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하늘에 구멍이 뚫렸을 때, 기울었을 때 여와가 복천을 오색선으로 하고 커다란 거북이 다리를 싹둑 잘라가지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대서 하늘이 무너지는 걸 막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거북이 다리로 했느냐. 다 상징이 있는 거죠. 우주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건데.

그래서 이 오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우주의 숫자고 우주의 숫자에다 갖가지 내용물을 섞은 거죠. 오만 있느냐? 사방도 있고. 오가 가장 근원적인 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숫자를 다 해서 모든 수에 의미가 부여돼 있어요. 그런데 왜 하필 오냐. 효율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내부를 가리키는 게 오장육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장은 다섯 개고 부는 여섯 개라고 부르느냐. 애매하지 않습니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사유하는 방식이 중요한 거고 내용물이 중요한 거죠.

그걸 지칭하는 자연철학적인 배경을 기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감응이고 인간의 몸 자체가 내부와 외부가 감응하는 관계에 어떤 방식의 감각을 범주화한 것이 있는가. 그런 게 분류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이런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전통적인 맥락에 가깝고 우리들에게도 실효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서 상상력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안하는 거고. 그걸 요즘에 섹시한 표현으로 바꾸면 옐로우 사이언스로 표현하는 거죠. 황색 과학도 가능하다. 백색 과학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서양 과학은 화이트 사이언스라 부르고 동아시아의 과학은 옐로우 사이언스라고 부르자고 농담 삼아 하고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제가 곧 출간할 책의 제목이 옐로우 사이언스예요.

자, 이렇게 해서 오늘 이야기한 것은 노자라는 텍스트에 조금 나와 있는 표현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 별로 얘기할 건덕지는 없어요.

하지만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를 둘러싼 사상도의 지형도 속에서 이런 내용이 당시에 튀어 나왔다. 그 속에는 문헌적으로는 검증할 수 없지만 상당한 경험들이 응축돼 있었고 그런 것들이 노자나 황제내경 텍스트를 통해서 분출되었다고는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자, 오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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