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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노자』와 자연 | |
◆ 자연(自然)에 대한 이해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이라는 말과 부딪치게 되는데, 자연은 지난 번에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조금 소개드렸죠.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자연이라는 말은 거의 99% nature라는 서양 번역어로서 자연이에요. 자연이라는 말이 한자로 쓰면, 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혹은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와 같은 말을 80년대부터 계속 얘기해왔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을 원래 맥락대로 제대로 쓰지 못 해요.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서술적 용법으로만 쓰인다는 말은 100% 정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진시대 중반부를 겪으면서 자연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게 돼요. 하지만 주로 많이 쓰는 용례는 서술적 용법이 더 강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럼 지금 우리가 쓰는 자연과 가까운 말은 뭐냐. 5페이지를 보시면. 저는 이 번역을 자연이라는 말을 ‘스스로 그러하다’고 번역하면 이상하니까 ‘스스로 그러한 세계’라고 표현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본래 맥락의 의미를 드러내 줄 수 있으니까. 자연계라는 말은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인간적 개입을 하더라도 건드릴 수 없이 늘 그러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이 자연이에요. 이와 같은 이중적인 의미를 자연이라는 말을 갖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같은 것은 산천초목, 혹은 천지 혹은 만물. 이러한 표현들이 우리가 쓰는 자연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것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쓰는 자연이라는 표현은, 요즘은 생물학 위상이 높아져서 생물학적 의미의 자연을 생태계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물리학에서 말하는 자연이라는 말은 물질이 운동하고 신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서양 사람들도 반드시 그러한 의미로 쓰는 건 아닌데. 우리는 그와 같은 말을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다보니까, 굉장히 일의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까 굉장히 단순한 의미로 축소시켜 받아들인다는 거죠. 그런데 이 자연이라는 말이 노자에서 분명 나옵니다. 특히 두 번. 중요한 구절에서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5페이지 하단을 보시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또 한 번은 아자연이라고 해서 백성들이 나 스스로 그러하다, 나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뜻의 의미로 자연이란 말이 한 번 더 나온다고 했죠. 그 의미는 제가 저번에 얘기했었습니다. 그럼 오늘 봐야할 것은 바로 이 맥락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하면서 도와 자연이 나오니까 도와 자연이 제일 중요한 용어처럼 생각되시겠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기서 더 중요한 건, 네 개의 문장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법이라는 글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꾸 실체 중심으로 생각하고 텍스트를 분석하다 보니까 거기에 무게가 가 있는 거예요. 법이라는 말은 여기서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질서의 모습들은 땅에 있다. 그 땅이 자기 나름대로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그 무언가가 하늘에 있다. 하늘은 도에 있고 도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는 그 무엇에 관한 별명일 뿐이다‘하는 정도의 함축으로 들어가 있어요. 이 속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땅 없이 살 수 있나요? 없죠. 하늘이 없이 대지의 생명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앞에 있는 것은 뒤의 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얘기예요. 그런 가운데 최종적으로 나오는 자연은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에요. 자연이라는 표현자체가 나오는 맥락이 바로 그 맥락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법해야 할 그 무엇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방식의 구절을 통해서 동아시아에서도 자연법사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서구적인 의미의 자연법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 속에 법이라고 하는 관념도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사실은 뭐냐.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건 틀린 질문방식이라는 겁니다. 왜냐. 물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물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해서 자연스럽다, 자연하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가 없죠.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펌프를 만들어서 그런 짓을 하다보니까 자신들이 개입하면 다 되는 줄 착각해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힘의 원리로 설명되잖아요. 자연이란 건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제가 자연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 텍스트들을 검색해 봤어요. 시경이나 서경, 맹자, 주역, 춘추좌전에는 자연이란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나오느냐. 장자에 나오고 여씨춘추에 나오고 노자, 관자, 순자에서 나옵니다. 즉 천지에 관심이 많은 문헌들에 자연이란 표현이 나와요. 특히 여씨춘추에는 씨앗에서 싹이 트는 현상을 자연이라고 서술하기도 하고. 더 중요한 사실이 뭐냐. 이 자연이 자연물에 대해서 서술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란 말이 서술하는 대상이 인간이더라. 인간과 관련된 문맥에서 자연이란 말이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더라. 이 말은 자연이라는 말이 표현하려고 하는 무엇인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그 무엇과 관련되더라.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속에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은 있을 수가 없어요. 사실 동아시아에는 문명과 자연의 구분 자체가 없었어요. 근대가 만들어낸 도식입니다. 그리고 구분할 수 없다는 게 요즘 많이 얘기하는 담론이잖아요. 그래서 특히 장자에서는 이 자연이라고 하는 말이 다른 글자와 연동돼서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7페이지를 보면, 자연이라고 하는 말이 함축하는 건 뭐냐. ‘늘 변함이 없는 것’ 상(常 )자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계절의 순환이에요. 요즘은 우리가 그걸 깨고 있지 않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야 하는데 여름과 겨울만 있고 봄과 가을이 줄어들잖아요. 제가 얼마 전에 봄, 가을 용 옷을 샀는데 삼 년 째 지금 일주일도 못 입어요. 이 얼마나 커다란 경험이에요. 그런데 이 속에는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 한 또 다른 중요한 함축이 들어 있어요. 사계절의 변화가 분명하다는 건 몬순기후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열대지역에서는 없죠. 남극, 북부에는 없다는 거죠. 그냥 여름과 겨울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굉장히 특이해요. 그럼 사계절의 기온 온도차를 촉발시키는 건 뭡니까. 계절풍이잖아요. 우린 바람의 아들이에요. 아 바람의 자녀라고 해야죠. 그래서 나를 길러준 건 99%가 바람이라는 건 굉장히 과학적이라는 거죠. 그리고 동아시아 자연철학을 만들어 준 99%가 바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람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기(氣)니까. 그렇게 본다면 이 자연이라는 말의 함축은 ‘늘 변함이 없는 것’ 즉 인간이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자연이라는 것은 사물 하나 하나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늘 내가 따라해야 하는, 그래서 인순이라는 중요한 용어가 나오는데 인순이라는 용어는 장자에도 나오지만, ‘신도’라고 하는 철학자의 텍스트 속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도라는 사람은 철학사에서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최근에 연구가 좀 되는데, 그 사람이 쓴 책인 『신자』라는 책이 있는데 편 이름에 ‘자연’ 편이 있기도 해요. 그 ‘자연’ 편의 중요한 골자 중 하나가 오늘날로 따지면 사회과학적인 이야기예요. 사회적 현상의 합법체적인 그 무엇에 대해서 자연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 자연의 인순, 맞추어서 인간의 삶을 영위해야한다는 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신도라는 철학자의 기본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럼 자연이라고 하는 말의 반댓말이 뭔가를 알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자연의 반댓말은 문명이 아니라 ‘조장(助長)’입니다. 송나라 사람들은 꼭 정신없는 사람들로 나오죠. 송나라 사람이 어리숙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출신들이, 상인이라는 상 자가 상나라 상(상) 자 잖아요. 장사에 능한 사람들이에요.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방식으로 얘기하는데. 어느 날 씨를 뿌려놨는데 안전하니까 아버지가 피곤하다고 해서, 딸이 어떻게 했어요? 쑥, 쑥.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나무야 피곤하니까 누워서 자라” 이 정도면 괜찮은데, 그게 아니라 빨리 자라라고 쑥쑥 뽑았더니 다 말라 죽었죠. 자연의 반댓말, 손댈 수 없는 것을 손댄다는 말이 ‘조장’이고. 그래서 잘 자도록 도와준다는 얘긴데, 잘 자라도록 도와주지 말고 내버려둬라. 이게 생태주의자들의 말이잖습니까. 자연의 반대는 조장이라는 거죠. 우리가 조장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잖아요? 조장한다는 게 어떤 거냐. 지금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해서 오존이 자꾸 줄어들잖아요. 그리고 광우병 많이 걸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거고. 사실 더 중요한 건, 질병과 관련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오히려 빈곤이 더 큰 문제고, 못 먹으면 질병에 걸릴 소지가 많죠. 그 다음 또 하나는, 인구의 밀집도가 더 중요하다고 해요. 얼마 전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인간이 풀어야 할 난제 중 첫 번째가 빈곤이었고, 두 번째가 질병 가운데서도 전염성이 아니라 만성질병. 예를 들면, 남자들 요즘 흔히 죽는 질병이 ‘심근경색’, 여성은 ‘우울증’ 이런 게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난제라고 얘기가 되는 만큼. 전염성 질병 가운데 더 끔찍한 게, 사실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게 AI 같은 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알 수 없는 물질이 공기 중을 통해서 퍼진다. 근데 인간들은 공기 중에 퍼지는 것들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생물학 무기를 만들죠. 누가 만듭니까. 커다란 나라들이 만들죠. 핵무기 죽을 줄 알면서 만든다는 거죠. 왜 못 합니까. 참 단순한 거예요 사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한데, 단순한 걸 해결못 하는 건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핵무기 폐기하면 되는 거고, 생화학 무기 안 만들면 되는 건데, 왜 만듭니까. 돈 때문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벌 수 있는 돈의 방식과 벌지 말아야 할 돈의 방식은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경제적인 논리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위험합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분명히 효율성이 있고 많은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제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촉발시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이용되고 있지 않잖습니까. 거기에 대해 입막음 한다는 건 곤란하죠. 즉,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문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조장하는 걸 하지 말아야 해요.
이 논리는 무엇과 연결되는가. 지난 시간에 제가 장자의 기심(機心)에 관련된 문제를 기회가 되면 얘기한다고 했죠. 기계적인 마음. 혹은 편리를 추구하면서 이게 문명 비판의 그 무엇처럼 얘기되는데. 그 자료와 그 노인네가 이야기하는 맥락을 잘 보면, 특히 장자 속에 든 논리는 몸의 논리예요.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자연 자체. 다른 텍스트들과 비교해 보세요. 논어나 맹자 속에는 기술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아요. 장자 텍스트를 보면 달인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잖아요. 강호의 달인들이 수없이 많아요. 무명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노자에. 무명은 황제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전에 말씀드렸죠? 하지만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이렇게 보시면 돼요. 특히 주성치 영화가 그걸 구현하고 있어요. 만두 만드는 사람도 달인이에요, 공 차는 사람도 그렇고. 대단하잖아요. 버스가 가는데 늦어서 출발을 못 하니까 날아서 창문으로 들어가는 걸 연출하는 것, 이런 사람들 다 달인인데. 이런 사람들은 그냥 넥타이 메고 가는 일반 사람이고 심지어 거지, 노숙자가 갑자기. 이런 세계를 장자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강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본다면 장자 철학 체계 속에서는 기술, 뭔가에 달한다고 하는 것이 유가에서는 단 한마디밖에 없습니다. 문(文을 통해서 달하는 거예요. 문을 통해서 인간의 문명세계를 밝히고 인간의 도덕세계, 윤리세계를 밝히고 인간다움을 구현한다는 것 외에는 별로 없어요. 하지만 장자의 세계에서는 온갖 다양한 機에 대한 達의 경지가 있다는 거죠. 그걸 道라고 표현하고. 그럼 장자는 기술적인 차원의 것들을 훨씬 더 많이 주장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장자가 문명을 비판한 사람이라고 보느냐는 거죠. 그 속에는 우리가 문명과 자연을 대립하는 구도로 우리가 읽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장자의 실제 세계는 자연과 조장이라고 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유했던 사람이라고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이 기심이 편리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장자를 보면, 어떤 노인네가 수영을 기막히게 해요. 물어요. 도대체 어떻게 수영을 하길래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노인네가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마라’ 니가 몰려고 하지말고 물살에 몸을 맡겨라. 참, 말은 쉽죠. 그게 보통의 노력을 통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훈련을 해야 하잖아요. 그 속에는, 내 몸 자체에 들어있는 자연성 자체가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논리라는 거죠. 기심은, 인간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을 키우는 방식은 좋다는 거예요. 그럼 자동차가 나쁜 것이냐? 움직일 수 있으니까 좋은 거라는 거예요. 자동차 타고 어딜가서 부모님도 만나고. 요즘 KTX 선전할 때 그렇잖아요. ‘당신을 보내세요’ 물론 매연을 뿜는다는 나쁜 점이 있지만 적어도 인간 사회에서 본다면 자식이 부모간의 정은 무한히 가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굉장히 바람직할 수 있어요. 걸어서 부모님 한번 뵈러 간다? 사실 못 가잖아요. 그래서 어느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장자의 시대에는 공해도 뭐도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의 몸이 갖고 있는 가능성이 생산력의 전부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력의 전부인 세계에서, 다른 기물을 통해 그러한 가능성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장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에 석회를 바르잖아요. 그걸 왜 합니까.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거예요. 이성보다 위대한 것이 인간의 감각이에요. 감각의 세계를 우린 다시 한번 구현해야 하는데. 특히 여기서 요구하는 감각은 나아간다면 어떤 부분까지 가느냐, 저 사람을 딱 봤을 때, 지금처럼 대신에 우리를 보장주는 건 법체계,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계약서대로 하면 돼요. 이게 근대세계예요. 사회계약론에서는 다 필요 없고, 계약대로 하면 돼요. 계약 당사자가 우리인데, 우리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계약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계약을 잘 해야 돼요, 우리는. 계약은 함부로 할 게 아니에요. 과거는 법적인 장치를 통해서 인간과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계약이 아닌 면대면의 관계였고, 사람 대 사람 친분의 관계였을 땐 어떻게 합니까? 내가 사람을 잘 알아봐야 해요. 견물을 이야기하면서 알아본다는 것이, 저 밖에서 지금 어떤 일이 있어 라고 전달했단 말이에요. 그럼 들었다. 이게 아니에요. 저 놈이 지금 제대로 말하는지 거짓말하는지에서부터. 그러니까 신(信)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는 신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신용은 어디서 옵니까? 계약서에서 오는 거예요. 그럼 과거에는 신용이 어디서 옵니까? 계약서가 없으면? 말 뿐이잖아요. 말만 믿고 해야 하는 세계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이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그렇게 살던 세계의 사람들. 지금 우리가 갖는 생각과는 굉장히 다른 것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씨춘추』에서는 자연이라는 용어와 하여금, 시킬 使(사)가 대립되는 용어로 나와요. 우리는, 이미 본래 텍스트 맥락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근대의 눈을 갖고서 좋아하는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해왔던 거예요. 지금에 와서 그럴 필요 없잖습니까? 텍스트는 이미 자기 스스로를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잘못 본 것뿐이죠. 그래서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0_03.htm ◆ 음양오행의 신화와 역사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기화하는 세계는 조금 전에 얘기 드렸어요. 음양오행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 더 얘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음양오행은 기와 별도로 탄생된 론이에요. 음양오행을 앞으로 끌어가면 어떤 사람은 주역과도 연관시켜서 음양사상이 무지하게 오래됐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해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때 체계화되었는가. 어느 때쯤에 결합되어 의미 있는 구조를 획득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한데,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분명히 음양오행론이 나름의 논리와 체계를 갖고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관자라는 책을 보면 음양오행론이 나와 있고, 여씨춘추에서도 음양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등장하죠.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기와 인간의 몸과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져보신 적 있나요? 왜 하필이면 인간의 혀는, 몇 가지 맛을 구분하죠? 매운 맛은 미각 세포가 하는 게 아니라 통증으로 느끼는 거죠. 네 가지입니다. 왜 인간이 네 가지 맛을 구분할까. 이건 좀 어렵죠. 더 쉬운 예를 들어 볼게요. 밥을 먹기 전에 여름에는 어떻게 하고 먹어야 하죠? 냄새를 맡아보잖아요. 이게 쉰 건지 안 쉰 건지. 코가 왜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감각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뭘 구분합니까. 내 몸속에 들어와도 되는 건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인간 감각의 기본이에요. 눈이 하는 역할이 뭡니까. 내 몸이 가도 되는 곳과 안 될 곳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저기 나타나는 것이 사잔지 사람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눈이 있는 거죠. 감각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도대체 눈이 여기 왜 달렸는가.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보기 위해서 달린 게 아니잖아요. 코가 왜 달려 있어요. 이게 먹어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달리 말하면 이 코가 그것을 분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차이를 감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코가 진화했다는 얘기와 똑같은 겁니다. 음양오행론이라는 것이 인간의 몸과 관련해서 중요한 함축이 뭐냐. 원소주기율표가 물질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물리학적인 방식을 통해 사물을 분류한 책이라면 거기엔 내공이 빠져 있어요. 한의학이 추구했던 사물의 분류체계는 내 몸과의 감응 관계 속에서 사물을 분류한 거예요. 독이 뭡니까. 먹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다른 동물한테는 상관없을 수 있어요.
감응이란 것이 왜 중요하냐. 철저하게 인간적인 용어이기 때문이에요. 감각한다? 사물의 형태를 알아보는 것이 도대체 뭐가 중요합니까. 이 지(知)라는 용어가 독초와 먹을 수 있는 풀을 구분하면서 나와요. 즉, 인간이 알아야할 지식은 형이상학적이고 수학적인 걸 이해하기 위해서 지 능력이 발달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서 적응을 위해서 뭔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 구분의 기준이 뭐냐. 내 몸과의 감응관계 속에서 나에게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각기관이 있다는 거죠. 무슨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꾸 그런 쪽으로 가다보니까 몸에 해로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진리를 위해서 먹어야 해요. 그렇잖습니까. 특히 책이 그렇잖아요. 그 어려운 걸 갖다가. 문명이 엄청난 지식체계 위에 구축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면서도 책을 봐야 하지만. 특히 철학책 꼭 읽을 필요 있습니까? 있죠. 당연히 있죠. 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무엇이 해도 되는 것인지 중국적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제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먹어도 되고 무엇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어떤 행동은 해도 되고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에요. 행위의 영역과 물리적 영역에 관한 언설들이 전혀 격차 없이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뭘 통해서요? 특히 입을 통해서. 이 입이라고 하는 것이 먹으면 죽는 게 있어요. 마찬가지로 여기선 나가면 안 되는 게 있어요. xx야. 이건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구멍의 인간학이라고도 하는데, 혼돈을 얘기하면서 칠규라는 하는 게 거기 왜 등장하느냐. 칠규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죠. 첫 번째는 우리가 소통하는 곳이에요. 여기는 다 위기로 막혀 있기 때문에 기가 분명히 감응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안과 밖에 통하는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아홉 개의 구멍만이 안과 밖이 드나들면서 소통해요. 그런데 드나들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지라고 하는 거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지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지는 같은 거예요. 과학과 인문학이 별개 차원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이 접목돼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론이 가진 중요한 함축이에요. 기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간학이면서 자연학이에요. 인간과 자연자체가 분리될 수 없는 방식의 사고를 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과거에는 그런 걸 정당화하는 논리가 오늘날에는 신화적인 논리고 비과학적인 언어라 규정돼 있기 때문에 그런 언어를 쓰는 것이 설득력이 없는 거죠. 문제는, 우리가 경험 세계 속에서는 그때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과 똑같아요. 그들이 느끼는 기나 우리들이 느끼는 기나. 조금 차이가 있죠. 우리가 조금 더 더러운 기운 속에 살아요. 공기도 더럽고 말도 훨씬 더러워졌고. 하지만 인간 대 인간 속의 환경은 엄청나게 개선된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여기서 저한테 말도 못 붙일 사람이 많고 제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분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강사랍시고”하면서 속으로는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러실 분이 여기 계시진 않겠지만. 저 사람이 사람이다 라고는 생각하는 관계로 우리가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는 거죠. 그 부분은 인간이 성취한 진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몸의 논리 차원에서는 아직 미비합니다. 그렇게 얘길하죠. 현대 의학의 위대함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긴 수명을 누리게 됐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이야기하는 분들은, 빈곤의 퇴치가 인간의 수명을 늘게 하는데 가장 도움을. 아프리카는 평균 수명이 삼십 대 초반 심지어는 이십 대에 죽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하루에 죽어나가는 인구가 만 명인가 십만 명인가. 어느 한 쪽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는데, 우리가 싸워야 할 건 그런 것이죠. 결국 어떤 텍스트를 읽든 간에 그것이 과거에 이랬다 저랬다는 중요하지 않고 기의 논의를 감응을 이룬다는 것은 내 몸의 논리를 통해서 체험하고 검증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기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딱지를 받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적어도 전통과학사회에서의 기가 말하는 바대로 살고 있고 그리고 맞으니까. 다만 우리는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신화적인 논리로 윤색되어 있고 유비적인 차원으로 각색되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어야 해요. 따라서 그 기준을 근대 과학에서 가져온다는 건 곤란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어디로부터? 내 몸의 경험, 내 몸의 판단으로부터 검증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본초라는 책 속에서 이런 것들을 완벽하게 체계적으로, 린네가 분류표 만든 것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분류학적인 뭔가가 있어요. 오히려 실험실에서 인삼의 성분인 사포닌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런 식의 연구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맥을 잘못 짚은 거라는 거죠. 그것도 필요해요. 그것이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질에 대해 대화하는 공통 용어들이니까. 공통 용어체계에 내가 동참해야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 있고 약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우리는 과학적 표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한의학이 해명되었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거죠. 동의학의 처방이 무슨 성분이 발견됨으로써 약효가 입증되었다가 아니라 그 약효라는 것은 먹으니까 병이 나았다는 거예요. 여기서 가져가야지 왜 실험실에서 그걸 찾습니까. 달리 말하면, 한의학 세계에는 실험실 의학이라는 것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각 개개인 한의사들이 자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환자를 다루면서 했던 임상적인 축적을 체계화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가야하죠. 왜 전통적으로 맥진을 해 왔는가. 그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 속에 든 게 기(氣)라는 것이고 표현한다면, 기의 운동이고 기의 흐름이고. 그리고 그건 우리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정작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모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방구를 꼈다. 방구를 뀌면, 소리 없는 방구가 독하죠. 소리 없이 나를 괴롭히는 냄새가 있을 때 내가 왜 거기에 얼굴이 찡그려지고 기분이 나빠질까를 생각해보세요. 그게 들어오는 순간 내 몸이 감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순간 좋은 향수를 뿌린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향긋한 향내가, 특히 요즘은 아카시아향이 좋잖아요. 창문을 열어 놓으면 향이 들어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도대체 감각한다는 것이 사물의 객관적인 정보나 성질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분류하지 않으면, 방구냄새 나면 나가야죠. 창문을 열거나. 그래서 제가 아까 얘기했던 게, 인간의 감응체계를 감각이든 뭐든 정이라는 것도 가장 단순화시켜서 두 가지로 나누면 뭐냐. 好惡(호오)라고 얘기했죠. 이건 감정 즉 심리적인 용어이기도 하지만 자연학적인 용어고 자연철학적인 용어이기도 한 거예요. 호오는 도덕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 인간관계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라 물질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도 감응관계가. 좋은 것, 나쁜 것. 그래서 동아시아의 용어 속에는 자연과 문명, 인의에 대한 구별 자체가 기본적으로 없어요. 그런데 이제 엉뚱한 데다 힘 쏟는 경우가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오행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왜 하필 음양이냐 왜 하필 오냐. 여기에 목숨을 거는데, 사실 그 속에 비밀이 어떤 게 들어 있느냐는 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오행이 성립된 원인 가운데 하나를 지적한 두 분이 있는데, 방박(龐朴)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중국의 학자가 있어요. 17쪽, 18쪽 부분입니다. 17쪽을 보면, 방박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갑골문을 보니까 음양이나 오행이 없더라면서 오히려 거기에 나오는 것은, 은나라의 갑골문을 보니까 상 앞에다 중 자를 붙여서 중상‘중상’(中商)이라고 하고, 나머지 부분을 사방사방(四方). 자기가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거죠. 우리는 사방하면, 동서남북이라고 해서 나를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앞, 뒤를 사방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방향은 기본적으로 모 방자입니다. 네모꼴, 사각형이라는 뜻이에요. 따라서 방박이라는 사람은, 중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방을 통해서 다른 지역을 지칭한다는 표현은 결국 모방의 개념이다. 즉, 모는 우주의 수예요. 그리고 이 모습은 뭐와 닮아 있느냐. 왜 하필이면 거북이의 껍질을 가지고 점을 쳤느냐. 이렇게 생겼잖습니까. 닌자 거북이도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하늘에 구멍이 뚫렸을 때, 기울었을 때 여와가 복천을 오색선으로 하고 커다란 거북이 다리를 싹둑 잘라가지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대서 하늘이 무너지는 걸 막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거북이 다리로 했느냐. 다 상징이 있는 거죠. 우주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건데. 그래서 이 오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우주의 숫자고 우주의 숫자에다 갖가지 내용물을 섞은 거죠. 오만 있느냐? 사방도 있고. 오가 가장 근원적인 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숫자를 다 해서 모든 수에 의미가 부여돼 있어요. 그런데 왜 하필 오냐. 효율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내부를 가리키는 게 오장육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장은 다섯 개고 부는 여섯 개라고 부르느냐. 애매하지 않습니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사유하는 방식이 중요한 거고 내용물이 중요한 거죠. 그걸 지칭하는 자연철학적인 배경을 기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감응이고 인간의 몸 자체가 내부와 외부가 감응하는 관계에 어떤 방식의 감각을 범주화한 것이 있는가. 그런 게 분류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이런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전통적인 맥락에 가깝고 우리들에게도 실효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서 상상력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안하는 거고. 그걸 요즘에 섹시한 표현으로 바꾸면 옐로우 사이언스로 표현하는 거죠. 황색 과학도 가능하다. 백색 과학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서양 과학은 화이트 사이언스라 부르고 동아시아의 과학은 옐로우 사이언스라고 부르자고 농담 삼아 하고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제가 곧 출간할 책의 제목이 옐로우 사이언스예요. 자, 이렇게 해서 오늘 이야기한 것은 노자라는 텍스트에 조금 나와 있는 표현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 별로 얘기할 건덕지는 없어요. 하지만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를 둘러싼 사상도의 지형도 속에서 이런 내용이 당시에 튀어 나왔다. 그 속에는 문헌적으로는 검증할 수 없지만 상당한 경험들이 응축돼 있었고 그런 것들이 노자나 황제내경 텍스트를 통해서 분출되었다고는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자, 오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