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김시천 제12강 『노자』와 성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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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12강 『노자』와 성인 2

◆ 왕필이 말하는 성인


▲ 왕필의 성인

계속해서 왕필의 성인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가요. 그동안 우리가 주로 다뤘던 것이 전국시대 맥락을 다루면서 제왕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세부적인 정치적인 맥락을 얘기하는 것은 재미없잖아요.

도대체 우리가 읽고 있는 노자주, 노자주석에서 말하고 있는 정치적 담론 즉 왕필에 의해서 재해석 되었다기 보다는 해석의 틀 자체를 아주 바꾸어 놓은 정치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출발을 노자 17장에 보면 태상하지유지라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죠. 최고의 통치자는 아랫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안다고 해석이 되죠.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다만 왕이 있는가 보다 얘기하는 거죠. 정치적인 무관심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죠. 왕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것은 원망할 때뿐이에요. 원망할 일이 없으면 누가 되든 있거나 말거나만 상관이 없고, 있다는 것만 안다는 거예요.

있긴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가 누군지도 알 필요가 없고. 이때가 하상공주에서는 태평이라는 말로 표시하는데 왕필은 전혀 상이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5페이지를 보세요. 여기에 대해서 왕필은 뭐라고 하는지 봅시다.

‘태상’(太上)이란 『주역』에서 말하는 ‘대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태상이란 대인이고, 이 대인은 주역의 대인입니다. 노자 원문 왕필 번역서를 갖고 계신 분들 책 속에는 대인이라는 용어만 나와 있는데, 이 용어는 맹자와 주역에 특히 많이 나오는 용어이고 도가에서는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대인이 구오의 자리인 윗자리에 있기 때문에 ‘태상’이라 한 것이다.

이 맥락을 볼 때 반드시 주역의 대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틀린 해석이에요.

대인이 윗자리에 있을 때에는 무위의 일에 거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그에 의해 지어지면서도 처음이 되려 하지 않기에 아래에서는 그가 있다는 것만을 알뿐이다. 이는 곧 위를 따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 있다는 것만 알아요. 그가 내리는 명령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순리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뿐이에요. 왕필에 따르면 자상치일이라고 얘기도 합니다. 만물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질서를 이뤄낸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왕필의 체계 속에서는 자연이라는 말은 상당히 고원한 자발적인 질서체계가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인간의 마음, 자연, 아까 말했던 리서의 감정, 서의 감정이 인간 누구에게나 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존중하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윗사람을 모시고. 이와 같은 시스템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유가의 정치 시스템의 기본적인 요체인데 왕필은 거기에 낙관적으로 얘기하는 거죠.


▲ 왕필에게 있어서 주역의 괘의 의미

여기서 중요한 것, 이게 얼마나 재미난 일이냐면. 거기서 대인이라고 얘기했지 않습니까. 대인이라는 것이 주역이 건괘 아시죠. 첫 번째 괘입니다. 여기에 여기를 구이라고 하고 여기를 구오라고 합니다.

아래에서부터 차례 쌓아 올라가는 거거든요. 유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괘가 뭐냐 하면, 왕필도 괘를 내서 주석을 굉장히 길게 붙이기도 했는데요. 복괘(復卦), 암울한 기운이에요. 즉 이 때 말하는 음이라는 것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란 뜻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를 계절에 비유하면 이제 막 새싹이 막 돋아나는 상태가 복이에요. 복이 우주의 가장 원초적인 차원의 모습이에요. 시간적인 차원의 모습이 아니라, 논리적인 차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양의 기운이 다시 돋아나는 모습을 상징해요. 그래서 이 복괘를 굉장히 중시하는데 이 복괘를 쓰면서 이 앞의 괘는 박괘라고 해서 꼭대기에 양효가 있고 이거는 소인들을 상징하는 거거든요. 소인들의 기세가 무성해서 군자나 대인이 끝에 몰린 거예요. 그래서 이때는 조심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다시 돌아서 왔다라고 해서 복괘라는 거예요. 동아시아에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존재론적으로 ‘무’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형이상학적인 ‘절대’와 같은 개념은 상상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바로 이런 용어들에 익숙한 왕필에게 있어서 괘는 시(始)를 상징하는 거고 그래서 당시의 지식인들 왕필이 활동했던 시대에 연호가 정시(正始)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왕필에게는 복이라는 하는 것, 당시의 시대를 앞서가는 최고의 문화적 코드라고 할까요.

대한민국 현재에서는 딱 한 마디로 얘기되지 않습니까. ‘경제’ 경제 얘기가 나와서 한 말씀 드리는데, 맹자에 나오는 얘기잖아요. 누구나 다 아는 얘기요. 왕이 맹자를 만났어요. 노인이 먼 길을 마다않고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하필이면 왜 리를 말하십니까 하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면서 왕께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할꼬 그러면 제우들이 앉아서 제 가족과 제 목으로 내려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규모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안돼요. 그러면 뭘 해야 됩니까.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노자에 나오는 이 말을 읽어보세요. 정치적인 맥락에서 말한다면 자기의 이름이 백성들의 입에서 오르내리지 않는 만큼 좋은 거예요. 많이 오르내리는 만큼 나쁜 사람이 된다는 거죠.

왕필을 보세요. 태상이라고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무위에 일에 거예요. 진중권씨가 대통령에게 가서 하고 싶은 말 한마디만 해라. “잠 좀 주무십시오.” 무위하란 얘기 아닙니까. 함석헌 선생이 당시의 독재, 군사정권에게 무위하라. 당신들이 바쁘면 바쁠수록 피곤하다.

바로 무위의 개념을 알린 사람이 바로 함석헌의 목소리고, 이 맥락에서 온 겁니다. 제발 잠 좀 주무십시오. 이게 바로 함석헌 선생님 강의의 힘이었어요. 지금 제가 얘기하는 방식이 함석헌 선생님은 몸으로 실천하기까지 했던 분이기 때문에 파괴력이 더 크죠.

제가 유머러스하게 하는 데도 공감이 오잖아요. 자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 말하는 것은 곧 그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좋다는 거예요. 대통령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록 좋습니다. 그럼 누가 오르내려야 되느냐. 실무자가 오르내려야 옳은 거죠.

왜, 그것은 바로 유위하는 자가 있어야만 무위하는 자가 무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무위의 일에 있어야 할 사람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는 얘기는 그가 무위하지 않고 유위하고 있다는 얘기고, 쓸데없는 일에 간섭한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큰 것을 놓치기 가장 쉽죠.

심지어 보수언론에서도 ‘큰 것을 놓치고 있다.’고 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대인이라는 것은 왕필의 무게가 어디 있느냐. 여기서 태상이라고 했잖습니까. 윗자리에 있다. 두 사람이 나와요.

그래서 대인이 있는데, 용의 덕을 갖춘 이가 인간 세상에 몸을 드러냈어요. 하지만 그는 아직 무엇을 확 펼칠만한 입장이 못 되죠. 하지만 그는 발탁이 되야 해요. 그래서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

여기서도 이견대인이라는 말이 나와요. 이 사람은 황제의 자리에 있고 이 사람은 신하의 자리인데 이 사람은 왜 대인을 만나야 합니까. 뜻만 있으면 뭐해요. 발탁이 되야죠. 공자는 끝까지 발탁이 못되고 마을로 돌아갔지 않습니까.

그럼 황제는 자기 혼자 다 하느냐. 천하를 다시 리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머리와 마음을 비우고 백성의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머리가 꽉 차 있으면 들어갈 데가 없으니까 이상한 얘기가 나오는 거죠. 그러면 머리를 비우고 백성의 말을 잘 알아듣는 용의 덕을 타고난 이를 발탁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대인입니다. 그래서 구이와 구오가 서로 만날 때, ‘물이 고기가 만났다.’라고 하는 거죠. 물과 고기의 만남이 낚시의 얘기가 아니라 황제와 재상, 성군현신의 만남을 은유하는 말입니다. 강태공도 낚시하다 만났잖아요. 그 얘기를 한 번 해볼까요.

강태공이 주나라 문왕을 만나가지고 주나라가 뜨게 되는 초석을 마련했는데, 강태공의 강자가 강족의 수장이란 뜻이에요. 사람의 성이기도 하지만, 강족이라고 해서 반역의 기질이 농후하기 때문에 특별히 관리해야한다고 해서 특히 은나라의 박해를 처참하게 받았던 부족이다라고 했던 강족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문왕이 갇혀 있을 때 밑의 사람들이 가서 접촉을 했겠죠. 괜히 왜 낚시를 합니까. 바늘도 일자를 가지고. 다 아는 얘기지 않습니까. 장자에 나오는 얘깁니다. 내 어저께 아버님을 만났는데 어디에 가면 어떤 분이 있을 것이다. 딱 가보니까 정말 그런 모습의 사람이 있어요.

이러저러한 모습을 만났는데 아 신하들이 그것은 선왕 폐하이십니다. 그렇지 맞지.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어디를 가다보면 현인이 있을 것이니 그를 만나서 써라. 가 봤더니 그가 있어요. 그게 다 뭡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인거죠. 주족 가운데 유력한 사람이 유리에 갇혀 있을 때 구해 준 거에요.

은나라를 압박하고 해가지고. 그러면 거기에 대한 정치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협의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설득을 해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약속을 한 거죠. 어느 날 어디쯤을 지날 터이니 낚시를 하고 있어라. 낚시 바늘도 구부러진 게 아니라 일자를 사용하고 있으면, 저 노인이 기운이 이상하다. 가서 물어봐라.

이 바늘로 낚시가 됩니까. 되죠. 사람 잡는 낚시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거죠. 어젯밤에 꿈에 선왕을 뵈었는데 라고 하면 주변에서 좍 누르는 거죠.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요식행위하는 거죠. 그러나 그게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뭐냐.

그러한 만남, 그런 방식의 협약에 대해서 뜻이 모여졌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이 사회에서 말하는 정무수석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모든 정치라는 것이 사실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 군주 자리의 어려움

내가 아무리 뛰어난 용이라도, 군주의 덕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발탁이 돼서 그 자리에 가지 못하면 있으나 마나죠. 내가 왕이라도 할지라도 제대로 된 민심을 읽고 나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내가 알 수 있는 겁니다.

왜 황제가 외척세력의 발호를 금지하려고 했느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같이 살 맞대고 자는 사람이잖아요. 그 사랑스러운 부인의 말이 아름답게 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때문에 공정한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적다라고 볼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황제의 자리에 들어가면 바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습니까. 현대사회국가에서, 과거에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면 모든 사안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된다는 얘기인데 앞에서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판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성인, 대인은 어떤 존재냐. 거기 보면 문헌전에 나오는 것을 보면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함께 한다. 이 말의 의미는, 하늘은 덮어주고 땅은 실어주는 즉 태상이라는 존재는 백성을 위에서 보듬어 감싸주고 아래에서 민생을 오롯이 해결해주는 그런 문제.

맹자식으로 얘기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항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때에만 성인이 된다는 거죠. 맹자의 논리에서 그렇지 못할 때는 일개의 필부가 된다고 바로 가잖습니까. 왕필의 논리에서는 바로 그와 같은 논리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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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현(不尙賢)에 관한 하상공과 왕필의 해석


▲ 부상현에 관한 하상공과 왕필의 해석

여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무슨 얘기냐면 과거 봉건사회에서 인재등용이랑 연관되는 거예요. 그런데 왕필은 이제 이 군주의 덕을 가진 사람이 왕의 자리에 있으면 태상이 되는 거고 신하의 자리에 있으면 재상이 될 수 있다의 논리를 펴요.

그런데 도대체 신하, 혹은 현신이라는 이 ‘현(賢)’ 이 문제에 대해서 노자에서 강력한 발언이 나옵니다. 부상현이란 표현이 나오죠. 노자 3장을 보면, 6쪽입니다.

보면 성인의 다스림이 어떻게 다른가. 조금 전에 했던 얘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다면

不尙賢, 使民不爭 : 不貴難得之貨
부상현, 사민부쟁 ; 불귀난득지화

使民不爲盜 ;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사민불위도 ;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어질다하는 사람을 상상하지 말라.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게 하지 말라. 어찌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게 하지 말라. 그렇게 하여 백성들이 도둑이 되게끔 하지 말라. 욕심날만한 물건들을 보이게 하지 말라.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이 혼란스럽게 하지 말지어다.

다 조언입니다. 군주에게 제안하는. 여기에 대해서 하상공이란 분은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합니다.

제안하는. 여기에 대해서 하상공이란 분은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합니다.


『河上公章句』 ‘어진 사람’이란 세속에서 말하는 어진 사람으로 언변이 좋고 문장에 능하며 도에서 떠나 권세를 부리고 참된 바탕에서 벗어나 잘 꾸미는 사람이다.

이거는 언제의 상황이냐. 한나라 초기의 상황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당시의 유가는 대접받지 못했어요. 왜냐면 유학은 의리와 형식을 굉장히 많이 따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이야 잘 하죠. 하지만 법가에서는 정책중심으로 몰고, 노자에서는 말을 많이 하면 막히기 십상이니 말하지 말라고 하죠.

“숭상하지 말라”는 것은 후한 녹봉과 높은 관작으로 존귀하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이 당시 한초의 얘기는 유가 특히 예학가들을 상대로 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한고조 때 한 때 딱 발탁되어서 특혜를 받았어요. 원회라고 하는 천 황제가 정월 초하룻날에 자기가 처음으로 황제가 된 것이라고 하는 뿌듯함에 의례를 했어요. 이 얘기를 전에 했었죠? 안 했다면 시간이 나면 하죠.

그래서 한고조 같은 경우는 요즘 티비에서 초한지 무협 드라마를 인천에서 하는데, 초한지를 한 번 보세요. 유방이 되게 방정맞아요. 그렇게 무게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거든요. 항우는 무게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전략과 전술에 능한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이 유방이라는 사람이 원래 소금장수를 보호하던 호위무사출신으로써 협출신에요. 그래서 글을 못 읽어요. 무식한 사람이죠. 그래서 말 잘하고 문장 짓는 사람을 보면 어떻겠어요. 거시기 한 거라고 얘기해야겠죠. 거시기 하니까 유학자들이 또 잔소리만 해요.

‘그것은 형식과 예의에 어긋납니다.’ 귀찮죠. 그래서 유학자들이 대접을 못 받았어요. 그런데 원해율이라고 하는 황제다운 풍모와 의식을 크게 함으로써 내가 비로소 황제가 된 것 같구나. 하고 나서 유학자들이 대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종류의 인간은 높게 대우하지 말라. 높은 벼슬과 녹봉을 주지 말라는 얘기죠. 즉 원문에서, ‘부상현’이라는 말을 하상공주는 그대로 번역했죠. 그런데 본래 이 상현이라는 말은 묵자의 한 편명입니다. 거기에는 상현을 왜 주장하느냐. 7페이지에 있는 글을 읽어보죠.

옛 성왕들이 정치를 할 때에는 덕행에 따라 그에 합당한 지위를 부여하고 지혜로운 이를 숭상하였으니, 비록 농사일이나 기술직에 있는 사람이라해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하여 높은 작위를 주어 높이고 후한 녹을 주어 중히 여기며 적절한 일에 임용하면서 영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러면서 ‘작위가 높지 않으면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고, 녹봉이 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믿지 않고, 정령을 내릴 권한이 주어지지 않으면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삼성’에 취직하려고 하는 이유는 가장 연봉이 높기 때문이죠. 즉 관리가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높은 녹봉,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이다.’라는 소리가 나야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삼대까지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의 부가 해결 되야 되는 거죠.

즉 ‘상현론’이라는 것은 그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먹힐 수 있는 시대. 이것은 변법운동의 핵심이기도 해요. 단 다른 것은 귀족들은 자신의 봉지가 이미 있기 때문에 왕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왕하고 겨룰 수도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들은 왕이 하사하는 녹봉에 의존하기 때문에 말 안들으면 자를 수 있다. 즉 노동 유연성이 개입된 방식의 신하예요. 따라서 충성도가 훨씬 강합니다. 한나라때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요. 그래서 그 다음 번 보면,

하물며 지혜롭고 선량한 사(士)는 덕행이 독실하고 언변에 능하며 도술에 두루 밝은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은 진실로 국가의 보배요 사직의 보필자이다. 반드시 또한 이들을 부귀하게 해 주고 공경하며 영예롭게 해 준 후에야 나라에 선량한 사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때의 ‘상현론’이라는 것은 능력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들, 특히 묵자의 편자 속에 들어있는 표현처럼 농사직이나 기술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할 지라도, 이 사람들은 묵가적인 관점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거죠. 이런 현량들을 발탁해서 벼슬에 봉직하게 하는 것, 이것이 군현 제도 개혁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그런데 하상공 주석에서는 이 상현이 말잘하고 잘 꾸미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달라져 있죠. 당시 어떤 세력을 염두 해 두고 비하하는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아니면 실제로 보면 법가나 도가나 유가 이런 학문의 배우 경력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의 경쟁의 논리로 해석하는 것이 더 쉽겠죠.

그런데 왕필은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 현이랑 재능 있는 사람이다. 왕필이 말하는 재능(才能)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탁월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중에 38장인가 39장에서 보면 ‘힘 있는 사람은 무업에 종사하게 하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은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게 하고…’와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재능들을 포괄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도덕적 탁월성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지난번에 그런 얘기를 했었죠. 조조가 했던 칙서에 보면, 唯才是擧(유재시거), 오로지 재능 있는 사람들을 천거하라. 그러면 내가 쓰겠다. 조조는 기본적으로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능에 따라서 인물들을 발탁했죠. 심지어 뒤가 구렸던 자기 친구라든가 그런 사람들도 재능이 있다면, 저 쪽 정권에 종사했던 사람들도 재능이 있다면 썼다는 거죠. 그래서 왕필이 말하는 방식의 현에 대한 방식은 조위정권의 정책과 방향이 맞는 발언입니다.

받든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귀히 여긴다는 것은 칭호를 높이는 것이다. 즉 높은 벼슬과 그에 맞는 작위를 주는 것을 얘기하는 거죠.

오로지 재능이 있는 사람을 [그에 합당한 직책에] 임용한다면 숭상은 해서 무얼 하겠는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관작이] 주어진다면 어찌 세상에서 말하는 현(賢)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즉 여기서 말하는 현(賢)은 평판을 얘기하는 거죠. 자기가 말하는 재능과 현, 평판을 통해서 과거에 올라가는 것이 구품중정제라고 얘기했죠. 지역 사회에서의 세력이 평판의 정도가 되었다는 거죠.

이른바 ‘현’을 받들고 이름을 떨치게 하는 것은 영예가 그 맡겨진 직책에 비해 지나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한다면 늘 학교에서 서로 헐뜯을 뿐이다.

이런 표현들은 바로 한나라 후한시대에 태양, 앞으로 향후 관리로써 될 사람들을 태학에 모아놓고 오경박사들과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열하게 할 학교 교육기관이 없으면 해석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현이라는 것은 ‘나 잘난 놈이오.’라는 뜻이잖습니까.

그럼 저 사람을 내가 잘났다고 칭찬하면 내가 못난 사람이 되니까 서로 헐뜯을수록 자기의 위치가 올라가니까 헐뜯는 방법에도 참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정말 모자란 사람들은 남을 헐뜯어요. 그런데 남을 다 칭찬하고 그 방식이 절대 맞다 그럼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장점과 단점을 다 알아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더 뛰어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칭찬을 잘 해야 되요. 단점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적거든요. 그런 사람이 사실은 군자, 대인이 돼야 하는 건데.

보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그 쓰임새(用)보다 지나치면 탐욕스러운 자들은 서로 경쟁하게 되어, 벽을 뚫고 비밀금고를 찾아내려고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도둑질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 낼만 한 것을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이 얘기는 지금 제도를 보건데 능력이 있는 그 분야에 합당한 사람이 그 자리에 발탁이 그때 그때 되면 다 알잖아요. 쟤가 나보다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보면 압니다. 그런데 나보다 못한 사람이 된다고 하면,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시대가 아무리 바뀐다고 하더라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래서 왕필은 그 분야와 직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가면 서로 경쟁할 일들이 없어진다는 얘깁니다. 그럼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지 말란 얘깁니까?

사실은 묵자가 주장했던 내용은 그냥 가는 거예요. 다만 어떤 사람을 앉히느냐, 그 차원의 것만 왕필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거죠. 따라서 왕필의 논리는 ‘부상현’이라는 논리를 반박하거나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자의 원문에 유배된 방식으로 해석 하고 있어요. 동조할 수 없단 얘기죠.

왕필이 말하는 인재등용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는, 지난번에 무위라고 얘기했었죠.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고 그에 맞는 적재적소에 그를 배치하는 것. 이것은 유가의 가장 기본적인 황제의 자리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선양론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 왕은 피리고, 나는 피리부는 사나이다

그럼 대체 대인론과 어떻게 연관이 되느냐. 10쪽을 보면 해결이 됩니다. 10쪽 박스의 5장을 보면 ‘성인은 백성을 추구((芻狗:제사지낼 때 사용하던 짚으로 만든 개 인형)처럼 여긴다.’ 풀무귀유를 하면서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죠. 거기에 왕필은 뭐라고 해석 하냐면,

[군주가] 자신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 맡긴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결코 없을 것이다.

기기인물, 이때 기라는 것은 내 몸을 얘기합니다. 내가 가진 생각, 나의 고집을 버리고 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 이고, 이때 ‘리’자는 다스릴 리(理자)입니다.

[그러나] 만약 피리가 소리를 내고자 하는 뜻을 가진다면 ‘피리 부는 자’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할 수가 없을 것이다.(棄己任物, 則莫不理.  則不足以共吹者之求也.)

이 구절의 노자의 맥락이나 하상공주의 맥락이나 같은 초점을 맞추죠. 허위불굴이죠. 풀무는 뭔지 아시죠.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걸로 주름이 접혀 있어서 접었다 폈다 하면 공기가 밀려 나가는 게 풀무잖습니까. 석탄 있을 때, 옛날에 집에서 쌀겨를 많이 뗄 때 바람에 빙빙 돌리게 하는 게 있었죠. 그런 것도 풀무의 일종인데.

이 풀무의 작용이, 안이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오는 모습을 비유하면서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것이 ‘기’죠. 이를 은유를 드는데, 왕필은 이 속에 있는 탁약을 피리로 바꾸면서 탁약유의어위성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피리 그 자체가 만약 어떤 소리를 내야 되겠다.’ 라는 것에 관해서 뜻을 가지게 된다면 부족이공취자지구(不足以共吹者之求). 달리 말하면, 그 피리를 부는 자의 요구에 부응(공) 할 수가 없다. 함께 할 수가 없다. 이 뜻이에요.

자 이 얘기는 재미나게 읽어 봐야 돼요. 유학자들 글이 갖고 있는 매력인데. 풀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천지의 비유라고 했죠. 아까 제왕적 사유에서 본다면 천지에 대한 표현은 제왕 자체에 대한 은유고, 제왕에 대한 이야기는 천지의 질서와 동격이라고 했었죠.

우주의 모습이 바로 제왕의 신체와 동격이니까. 그러니까 풀무도 제왕도 똑같은 거예요. 그 피리를 부는 사람이 있고, 피리가 있어요. 달리 말하면 피리가 제왕이에요. 갑자기 송창식의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이 속에 숨어있는 논리는 ‘제왕은 피리요. 나는 피리를 부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상이죠. 그러니까 맹자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군주와 신하 사이라도 의가 맞지 않으면 떠난다.

그리고 신하는 군주를 위해서 일하지만, 군주가 신하에 대한 대접이 적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군주가 신하를 모시는 것이지, 신하가 군주를 모신다는 것은 맹자의 논리에는 없습니다.

여기서, ‘천하’, ‘천지’라는 것을 하나의 피리, 그 피리가 곧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달리 말하면 거꾸로 가는 거예요. 한비자가 제시하는 것은 만물, 만백성이죠. 만물은 자체적인 신료들이 있어요.

한비자의 논리에 따르면 ‘딱 한 놈만 조져라.’ 라고 얘기를 해요. 예전에 주유소 습격사건 보셨죠. 거기서 보면, 무대포. “나는 여럿이 싸울 때, 무조건 한 놈만 조져.” 그럼 ‘그 놈’이 내가 안 되기 위해서라도 절게 만들잖아요. 그 논리가 참 무서운 건데 무서운 건 그 ‘한놈’이 누구냐.

딱 한 사람이 있다면, 얘도 세 명, 얘도 세 명. 열 사람을 관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딱 세 명만 관리하기는 편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내려가면 행정 조직의 원형이잖습니까.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적 모델이라고 할 때. 그러면 제일 위에 있는 군주는 한 사람만 집중하는 거죠. 그러면 내가 내려가서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것이 바로 한비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런 모델로 이른바 관료제 모델이라는 것이 득세하게 되는데요. 유학자들은 이 논리를 한 술 더 떠서, 자신은 제왕 위에 있어요. 이런 방식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자신은 벗어나 있는 거예요.

왜 의가 맞으면 있고, 안 맞으면 떠나는 거니까. 그러면 이 꼭대기에 있는 제왕을 하나의 피리처럼 여기고 연주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장자의 함지지락어 이래가지고 천지 대자연의 온갖 구멍에서 철뢰 지뢰에서 소리들이 나와 연주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바로 통하는 정신입니다.

거기서는 ‘그러한 소리를 내는 존재가 누구일까?’로 끝나면서 제왕의 존재에 무게를 둬요. 왜냐면 당시에는 여러 세력이 활보하는 난세였기 때문에 제왕의 출현이라는 것은 천하통일이라는 대업,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국의 소리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왕필과 같은, 이미 한나라라고 하는 커다란 천하를 통일 해 본 경험을 갖고 있는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달라요. 더군다나 황제 한 사람을 개변(改變)시킴으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유가의 의식이고, 그래서 주공을 꿈꾸는 겁니다.

공자가 주공을 꿈꾸는 이유는 바로 그겁니다. 제가 처음 인터넷에 에세이로 썼던 글 가운데 하난데, 이 구절을 상대로 해서 유가 정치론에 성군현신론을 한 마디로 하면, 송창식의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다.

그리고 왕필의 이 속에 있는 이야기는 그와 같은 정치적 이념을 제안하고 있는 거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지론, 풀무 얘기하다가 갑자기 이런 식의 얘기가 나오느냐는 거죠. 그래서 지식인들의 모델이 참 재밌어요.

그러면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은 뭐냐. 제왕의 통치에서는 제왕이 마음을 비운다. 홀연한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고 받고 있는 신하들의 보고 속에 있는 12곡직, 옳고 그름, 잘못된 것, 허위 보고를 가려낼 줄 아는 냉철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을 비우는 거예요. 그래서 거울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유학자들이 말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는 수양의 내용은 그냥 비워내는 겁니다. 대신에 그냥 듣는 거예요. 백성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백성의 마음이 나에게 채워지는 거죠. 그래서 뜻(意)이라는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요.

민의를 듣는 것, 이게 바로 심이지 않습니까. 그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 소리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전에 한번 언어이론 얘기하면서 했었죠. 백성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소고기 30개월 이상 월령된 것 수입하지 말라.’고 하면 백성들이, 범문정이라고 하는 송대 개혁정치가, 제가 멋있다고 했던, 유학자들이 그런 멋있는 말을 많이 해요. 더군다나 저처럼 강의실에서 하는 게 아니라.

만약에 지금 실제 국무총리에 있는 사람이, ‘온 천하 백성들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온 천하 백성들이 다 즐거워한 연후에야 내가 즐거워하겠다.’ 하면서 개혁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멋있다고 박수가 나올 만하죠.

그런 건 통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당나라 때 시를 통해서 관리를 선발 할 때,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의 뜻, 그런 방식의 문장은 아무나 조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천하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되죠.

뭐 조금 글 잘 쓰는 사람이 그런 문장을 지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평소 행동거지가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 그런 문장을 지으면 웃기고 있네라고 하겠죠. 그럴만한 문장을 지을 사람이 그런 문장을 지으니까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거죠.

그런 것이 바로 유학에서 말하는 ‘문’의 힘입니다. 문위제도를 표방하면서 송대 유학자들이 행동했잖습니까. 문장이라는 것은 ‘도’를 실어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도’는 나의 , 공자의 ‘도’다.

물론 그런 제도적인 차원의 것, 다른 차원의 것들에 대해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런 비슷한 부분은 똑같이 얘기할 수 있는 게 많아요. 그래서 이와 같은 시각이 가장 제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11쪽에 보시면 두 번째 점 부분 노자 62장 부분에,

“천자를 세우고 삼공을 둔다”
(故立天子, 置三公)

이라고 하는 노자의 원문에 대해 왕필은
“이것이야 말로 도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라고 해석한 반면에, 하상공장구에서는
“선하지 못한 사람들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欲使 敎化不善之人)”

라고 얼버무려요. 즉 달리 말하면, 왕필은 삼경을 두어서, 이 때 삼경 체제라고 하는 것은 황제는 무위하고 삼공이 다하는 거예요. 이른바 재상정치죠. 그런데 하상공장구에서는 공정, 공평무사라는 뜻으로 바꿔버려요. 그래서 삼공이라는 제도 시스템을 구성해 버립니다.

즉 제왕이 아닌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왕은 초월적이라면 유가, 왕필이 말하는 왕은 인간계에 자리하고 있는 으뜸, 그가 존귀하고 큰 까닭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왕이란 자리가 존귀하기 때문에 크고 중요한 것이다 라는 논리, 즉 훨씬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한대(漢代)의 유가하고 송대의 유가하고 청대의 유가가 또 다릅니다. 이 사람들의 방식이. 예를 들면 여기까지만 해도 유가의 기본적인 임무는 군자를 올바르게 보필해서 그가 성군이 되도록 하고 사실은 현신인 내가 다하는 거지만 보좌하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송대, 송명이학으로 들어가면 내가 곧 성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율곡이나 퇴계가 썼던 『성학집요』, 『성학십도』 이런 것은 사대부들이 직접 성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 전에 정조 이산을 그리면서, 정조를 좋게 그리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릴 때, ‘조선은 사대부의 국가’라는 표현이 되게 권모술수로 누그러진 이상한 방식으로 노론의 영수를 그렇게 봤는데요.

(물론 어떤 방식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전 그냥 유가적인 논리에 의해서 말한다면, 조선을 사대부의 국가라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진보라고 봐야 됩니다.

왕 한 사람의 정치라고 본다면 굉장히 위험 한 거죠. 하지만 그 왕이 실제로 위민을 하려고 할 때, 썩은 벼슬아치들에 의해서 전행당하는 상황이라면 달리 봐야겠지만 적어도 공동 통치체제로 나아간다고 하는 발언으로 볼 때는 좋게 봐야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그런 말을 감히 할 수 없었습니다. 불가능하죠. 그런데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방식의 발언이 나왔다. 조선 유학 정신의 위대함이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현실의 정치가 상당히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대응 과정을 보면 우리가 비판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액면 100% 다 할 수 없겠지만 저는 적어도 그와 같은 제도의 발전이라고 볼 때는 의미 있는 방식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유학도 실질적으로 많이 변했고, 그리고 더 커다란 변화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향약 같은 것들을 통해서 새로운 방식의 활동을 벌이는 것은 ‘자기가 곧 성인이다.’ 라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 지역은 내가 다스린다.’는 자치의 이념을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중국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내가 성인이 된다는 의미가, 고대에서는 왕을 성인으로 만들겠다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송명사대부로 들어가면 ‘내가 곧 성인이다.’라고 바뀌어요. 그랬다가 내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이미 있었고, 그러면 황제가 무얼 합니까.

내가 살고 있는 내 지역, 그래서 예를 들면 의사로서도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가 있는 거고. 그리고 이 사람들의 변호의 논리이기도 해요. 워낙 고시의 경쟁이 치열해지니까 떨어지는 사람이 많아지니까 의사가 되기도 하고, 상인이 되는 사람도 있고 훈장이 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지역사회로 내려갑니다.

지역 사회 자체를 자기가 부활시킨다는 것이 기본적인 향약의 정신이기도 하죠. 이런 것들이 그 이후의 다양한 해석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유학적 저변의 확대라는 차원으로 관심이 바뀌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인론이라는 것이 반드시 어떤 완벽한 인격의 체현의 방식으로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적어도 이 제왕, 1인 체제, 혹은 제왕의 신체 자체가 우주의 질서를 가리키는 제왕학적인 체계의 노자를, 성인론 혹은 왕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것으로 해석사를 뚫어놓은 것이 바로 왕필이었고, 그래서 부분 부분에 관한 해석에서 상당히 재밌는 표현들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왕필이 말하는 대인은 궁극적으로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따라서 이것은 공치의 이념이라는 거죠. 어떤 면에서.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을 때, 왜 노자라는 텍스트가 나중에 도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텍스트로 받아 들여 지는 지 설명이 안 됩니다.

특히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어요. 사대부는 황제의 수족이 아니라 황제라는 피리를 연주하는 연주가다. 그래서 공자도 유어에 ‘예의 경지에 노닌다.’ 라는 표현을 쓴 거 아닙니까.

그 때 예를 것은 유괘고, 그 예는 천하의 예를 다스리는 그러한 예입니다.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니란 얘깁니다. 자, 질문 있으세요. 그러면 오늘은 이걸로 얘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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