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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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꾸라신불교의 창시자들과 도겐
2010-10-25   1171

가마꾸라신불교의 창시자들과 도겐

1) 가마꾸라신불교의 창시자들의 사상


헤이안시대에서 가마꾸라시대로의 移轉은 급진적 역사의 변화시기이다. 많은 불자들은 시대적 상황을 말법시대적 현상으로 보았다. 平安 末期에 드러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의 허약함과 우매함, 죄많음을 통감했고 강한 현세부정과 피안을 희구하는 마음을 품었다.

가마꾸라불교는 종전의 불교가 이러한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면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보통 가마꾸라신불교의 특징으로는 選擇專修사상을 들 수 있다. 선택전수사상이란 한 가지만을 선택하여 그것만 열심히 닦는 것인데 왜 가마꾸라불교 창시자들은 선택전수사상을 주장하게 되었을까?

그들은 모두 히에이산 출신으로, 거기서 천태본각사상을 배웠다. 그러나 천태본각사상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불교가 중생을 구제하는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不二 絶對라는 사상적 고고함에서부터 상대적인 현실의 세계로 내려올 필요가 있었다. 참된 신심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상황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신이 믿는 바를 구체적으로 구현할지를 문제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당시 천태종은 민중들에게 다가서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당대佛敎가 지닌 문제는 히지리들에게 실존적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시대적 위기감에 실존적 위기감까지 느낀 이들은 새로운 불교를 갈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에 대해서도 강한 확신을 가졌다. 즉 그들이 깨친 바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선택전수사상을 주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렇게 형성된 선택전수사상으로 인해 가마꾸라신불교는 강한 종파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만이 가장 높은 달마이기에 그 외의 것을 포기하라는 배타성이 강한 사상을 펼쳤다. 專修사상은 간단하고 쉬운 실천방법이었으므로 민중들 속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이로서 가마꾸라 불교는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로 탈바꿈해가기 시작했다. 鎌倉佛敎의 대표자로는 親鸞, 道元, 日蓮을 들지만 이들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이로 호넨(法然, 1133-1212)을 꼽을 수 있다.

① 호넨

호넨은 히에이산에 출가해서 승려로 살아가면서 당시 말법시대적 상황에 걸맞는 신앙이 무엇인지 고심했다. 그 후 그는 정토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정토교는 法然 이전에 이미 중국에서 들어온 종파였다. 이는 중국의 曇欒, 導綽, 善導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정토왕생을 위해 염불 뿐 아니라 諸行을 함께 병행하는 실천방법을 썼다. 이에 반해 法然은 당시 일본의 말법시대적 상황에 걸맞는 것으로 염불을 전수사상으로 채택했다. 法然의 사상은 建久9年(1198)에 『選擇本願念佛集』의 찬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확산되어 갔다. 그럼 구체적으로 法然이 구축한 독특한 교의는 무엇인가?

法然은 다른 정토사상가들과 달리 염불을 일종의 관행觀行이나 명상으로 보지 않았다. 만일 염불이 觀行이라면 그것은 범부들이 행하기 쉬운 易道가 아니라 또 하나의 難道일 것이다. 法然은 염불이야말로 阿彌陀佛의 本願에 상응하는 행위였다. 즉 중생구제를 하기 위해 발원된 아미타불의 본원력 신앙은 호넨의 염불의 근저가 되었다. 호넨은 바로 이 아미타불 본원력에 바탕을 둔 專修念佛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法然은 다른 諸行 위에 稱名專修念佛을 둠으로써 새로운 정토종의 면모를 갖추었다. 法然의 敎說은 믿음, 易行, 選擇專修를 강조하는 점에서 널리 민중을 구제하려는 실천적 특징을 지녔다. 이는 法然의 사상에 국한되는 특징이 아니라 다른 가마꾸라불교사상에도 공통된 점이다. 法然을 스승으로 삼은 親鸞에 와서 사상적 독창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② 신란

親鸞은 천태승려로 지낸 20년간의 삶을 마감하고, 建仁元年(1201) 29세에 法然의 정토종에 귀의하여 法然의 가르침을 따라 雜行을 버리고 칭명염불에 정진했다. 그러나 親鸞은 체험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는 깊은 죄악의 바다에 빠져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스스로 깨침을 위한 마음을 내는 것도 불가능하며 자력으로 구원에 나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신란은 자력구원을 철저히 부정하고 염불 또한 정토에 들어가기 위해 공덕을 쌓는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염불도 자기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신란에게 염불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미타불이 우리에게 廻向함으로써만 가능해진 ‘大行’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염불은 非行, 非善이라고 신란은 말한다. 法然도 염불을 단순히 자력이나 자기공덕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親鸞처럼 염불행의 주체를 ‘아미타불’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親鸞은 염불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구제란 수행의 문제가 아니라 자력을 포기하고 오직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는 信心의 문제라는 신란의 자각이 있었다.

그러나 親鸞은 중생은 깊은 죄악에 빠져 있으므로 스스로 진실한 신심을 낼 수 없으며 설사 신심을 낸다 해도 그것이 자신을 구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신란은신심마저도 아미타불로부터 廻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심마저도 아미타불로부터 거져 주어진 선물이라는 信心回向說이 나왔고 우리의 구제는 ‘오로지 阿彌陀佛의 本願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절대적 신앙의 세계가 펼쳐졌다.

이런 점에서 신란에게 있어 전수사상은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란의 사상은 法然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깊은 죄악의 구렁텅이 속에 있는 인간을 구제할 만큼 견고한 신심은 인간 스스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력에서 廻向된 것이라는 親鸞의 관점은독창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法然과 親鸞은 히에이산 衆徒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어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또한 延曆寺와 興福寺 등 구불교 측의 비난과 박해도 받았으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점점 퍼져나갔다. 이와 같이 淨土宗과 淨土眞宗의 開宗은 일본불교가 종래의 귀족불교에서 벗어나 민중불교로 전환되어감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法然과 親鸞의 신불교운동은 당시 주술적 측면이 강했던 일본불교를 신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거기서 자신들의 신앙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추구는 다른 종파에서도 일어났으니 니치렌(日蓮, 1222-1282)도 그 중 한 사람이다. 

③ 니치렌(日蓮)

니치렌은 가마꾸라 불교운동의 마지막인 니치렌종(日蓮宗)을 열었다. 그도 다른 종파의 창시자들처럼 처음에는 히에이산에서 眞言密敎를 배우고 이어 천태를 공부했다. 그는 거기서 『법화경』의 진리를 깨달은 후 거기에만 의지하는 것을 宗指로 한 새로운 불교를 주창하게 되었다.

  사변이나 논리보다 『법화경』신앙을 실천하고 체득할 것을 주장한 니치렌도  호넨이나 신란처럼 선택전수사상을 펼쳤다. 그의 전수사상은 『법화경』창제로, 『법화경』제목인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독송하는 것이다. 日蓮의 창제신앙도 다른 창시자들과 같이 말법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법화경』이야말로 궁극적 진리를 전하는 완벽한 경전일 뿐만 아니라 말법시기에 가장 상응하는 경전으로 보았다. 그래서 말법시대인 가마꾸라시기야말로 『법화경』 신앙에 의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니치렌은 『법화경』의 핵심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제목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묘법연화경』 5자에 전 불교를 통합, 집약하고자 했다. 그것은 제목 그 자체가 경전 전체 내용보다 더 유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치렌은 이 제목을 암송하는 것이야말로 말법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실천행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니치렌이 『법화경』창제를 주장하게 된 데에는 말법사상뿐 아니라 천태본각사상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법화경』제목 안에 영원한 불성을 깨달은 석가모니불, 모든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성으로 이끌어 주는 『법화경』의 진리가 들어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니치렌은『법화경』제목에 석존의 지혜와 능력이 있으므로 제목을 唱하면 佛의 功德의 종자가 중생에게 심어져 성불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천태본각사상을 실천행과 연결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호넨, 신란, 니치렌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은 모두 말법사상을 기초로 하여 선택전수사상을 펼쳤다. 도겐의 지관타좌(只管打坐)도 이들의 선택전수사상과 연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겐은 말법사상에 대한 시각에서는 신불교 주창자들과 다른 견해를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말법사상을 자기 자신의 종교적 근저로 삼기보다 정법을 회복하는데 더욱 주력했다는 점이다. 즉 도겐은 易行을 거부하고 정법이라고 믿은 좌선수행을 선택사상으로 택한 것이다. 이러한 도겐사상은 당대 일본 임제종의 영서와 연관이 있다.
 
호넨의 정토종이나 신란의 정토진종과는 달리 에이사이(榮西)와 能忍( ?-1195 혹은 1196)의 선종은 중국대륙에서 전파된 불교이다. 당시 일본과 송나라는 국교가 개방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인이나 승려들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일본승려들도 입송(入宋)하여 선종을 배우고 돌아오는 자가 적지 않았다. 에이사이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가 입송할 당시 송에는 신수계(神秀系)의 북종선(北宗禪)이 쇠퇴하고 혜능계(慧能系)의 남종선(南宗禪)이 성행했다. 그 중 특히 임제종이 번성하던 시기였다. 그럼 에이사이가 일본에 전한 선에 대해 살펴보자.

④ 에이사이(榮西)

에이사이는 臨濟宗 黃龍派의 승려인 懷敞으로부터 臨濟禪을 배워 이를 전수받아 建久2年(1191)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후 九州에 최초의 선종사원인 報恩寺를 지었다. 에이사이의 禪이 점차 퍼져가기 시작하자, 히에이산 僧侶들은 반감을 갖고 조정에 상소를 올려 에이사이의 禪宗流布에 대한 금지조칙을 내리게 했다(1195년). 이에 에이사이는 히에이산 大衆의 비난에 항변하기 위해 1198년 『興禪護國論』을 저술했다.  그는 거기서 “禪宗을 鎭護國家의 法”이라고 주장하면서 선종을 융성케 하는 일이 곧 나라를 보호하는 일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에이사이는 “히에이산의 開祖인 傳敎大師 最澄도 『內證佛法相承血脈譜』에서 달마 西來의 禪法을 듣지 않았던가? 禪宗이 없다면 傳敎大師도 존재치 않았을 것이고 그가 없었다면 天台宗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여 일본 천태종의 성립도 선종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서 그는 천태종 대중을 설득하고자 했다.

 마침내 에이사이는 천태종 교단에 항변과 타협으로 일시적으로 천태승들을 침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막강한 세력을 지닌 천태종의 영향 아래 있던 수도 교또에서 선종을 유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1199년 鎌倉에 내려갔고 거기서 기대 이상으로 막부로부터 신뢰와 귀의를 받게 되었다. 당시 막부는 京都의 조정세력과 대항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교또에 뿌리내리고 있던 천태종 등의 구불교와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생사를 뛰어넘는 생사관을 설한 에이사이의 禪은 전쟁터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무사계층에게 이상적인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또한 교육수준이 낮은 무사들에게 문자를 중시하지 않고 直觀을 우선하는 선수행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에이사이의 禪이 무사들에게 적합하다는 것이 점차 인식되면서 에이사이 선종은 가마꾸라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1200년에 鎌倉에 壽福寺를 짓고 그 여세를 몰아 2년 뒤인 1202년에는 京都에 진출하여 建仁寺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에이사이는 建仁寺를 禪宗만의 도량이 아니라 天台, 眞言, 禪의 三宗이 아우러진 도량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와 같이 建仁寺를 3宗의 道場으로 만든 점에서 우리는 에이사이의 宗風이 지닌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無住一圓이 평했듯이 “眞言을 겉으로 하고 禪宗을 內行”(『沙石集』卷10)인 ‘禪密兼修’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法然이나 親鸞, 日蓮은 말법사상에 근거하여 신불교를 펼친데 반해, 에이사이는 持戒興禪을 통해 正法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모두 가마꾸라불교의 창시자이면서도 당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를 지녔다. 다시 말해 法然, 親鸞은 말법시대의 신앙체계로 아미타불 신앙을 강조한 데 반해, 에이사이는 당시 불교의 문제점이 破戒와 無戒에서 비롯되었다고 봄으로써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破戒된 戒律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당시 천태종 내에 破戒, 無戒의 분위기가 고조된 것이 바로 에이사이가 계율회복을 주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앞서 우리는 에이사이가 『興禪護國論』을 저술한 것이 천태종 교단이 그를 박해함에 대해서 반박하기 위해서였음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에이사이는 持戒를 강조했다. 그는 이것만이 당시 佛敎의 破戒와 無戒의 現實을 새로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에이사이는 『興禪護國論』에서 宋朝佛敎를 대표하는 禪門의 戒律이자, 持戒를 강조한 『禪苑淸規』를 인용하면서 이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여기서 우리는 에이사이가 주장한 持戒의 意味를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불교는 三學 중 慧만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戒와 定은 소홀히 여기는 분위기였다. 에이사이는 당시 불교의 부패가 戒와 定을 게을리한 데에 기인했다고 보고, 이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持戒의 측면에서 에이사이는 천태종뿐만이 아니라 달마종도 비판했다. 그는 『興禪護國論』 卷 第三 머리말에서 “어떤 이는 왜곡되이 선종을 달마종이라 이름붙히는데그들에게는 行도 없고 修도 없다”고 하여 달마종을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을 받은달마종은 어떤 종파인가? 達摩宗은 에이사이가 활동하던 당시 大日能忍에 의해 창시된 선종의 한 종파이다.  大日能忍은 大日房이라는 房号를 지닌 천태종 승려였으나, 선에 관심을 가진 후 스승없이 홀로 깨달아 禪法을 제창하고 일본달마종의 開祖가 되었다. 能忍은 無師自悟한 점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비난을 받자, 文治5年(1189)에 제자를 宋에 보내어 자신의 저서를 臨濟宗의 楊岐派인 大慧派의 阿育王山 德光(1121-1203)에 보여주고 그 證明을 구했다.

德光은 이를 印證하여 그에게 法衣와 道號를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能忍은 臨濟宗 楊岐派인 德光으로부터 증명을 얻어 그의 法系를 잇게 된 것이다. 또한 달마종 자료인 『成等正覺論』에 따르면 일본달마종은 “佛卽衆生, 衆生卽佛, 衆生本來成佛을 달마대사의 가르침으로 보고, 이에 따라 달마대사를 존경하며 自心卽佛을 믿는 곳에 죄가 멸해져서 복이 생기며, 재앙이 없어져 樂을 얻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能忍이 달마의 가르침을 佛卽衆生, 衆生卽佛로 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이사이의 『興禪護國論』卷中에 의하면 달마종은 “行도 없고 修行도 없고, 본래 번뇌는 없으며 菩提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달마종은 수행과 계율을 소홀히 여길 뿐 아니라 事戒가 없고 事行을 가볍게 여기는 종풍이며 造惡無礙의 무리이고 惡取空의 스승이며 佛法中의 死屍이라는 것이다.

에이사이와 能忍은 선종을 펼쳤다는 점에서 도겐과 관련이 있다. 도겐은 히에이산이 수행을 등한시하고 세속화되어감에 따라 거기를 떠나 에이사이의 제자인 明全에게 갔다. 또한 도겐이 조동종 교단을 설립한 후 能忍이 세운 달마종 사람들이 대거 그에게로 온 점에서 도겐과 능인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럼 가마꾸라신불교 創始者들과 도겐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5) 2) 가마꾸라신불교 創始者들과 도겐의 관계
6)
가마꾸라시대에 출현한 新興諸宗은 말법에 상응한 사상을 펼친데 비해 도겐은 말법관에 의거한 사상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家永三郞은 도겐이 일본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현실을 무시한 채 중국선종만을 답습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도겐은 당시 상황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三時를 보는 관점이 다른 이들과 달랐던 것이다. 도겐 역시 자신의 저술에서 당시 말법악세에 참된 佛法이 사라졌음을 개탄했고, 다른 종조와 같은 시대적 문제의식을 가졌다.

다만 도겐은 三時를 역사적 전개로 보기보다 개개인의 마음에 달렸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三時는 역사의 어느 특정시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나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겐은 당시 일본의 말법시대에 맞는 불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서, 붓다로부터 正傳되어온 佛法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이와 같이 도겐은 시대적 문제의식에 대한 방안을 正傳佛法에서 찾고자 한 점에서 다른 이들과 차이를 보였다. 이와 같이 도겐이 신불교창시자들과 三時에 대한 시각이 달랐다는 점을 고려할 때, 家永의 도겐비판은 한 쪽으로 치우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럼 도겐이 正法으로 보았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좌선’이다. 이는 가마꾸라신불교의 특징인 專修사상의 측면에서 볼 때 신불교 창시자들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親鸞과 日蓮이 『無量壽經』과 『法華經』에서 그 권위를 찾았다면, 도겐은 역사적 전통에 의존했다. 즉 그는 붓다로부터 내려온 깨침의 전통에 대한 역사적 연속성을 그 결정적인 단서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바로 달마의 생명을 유지해온 佛祖의 命脈인 좌선을 통한 正傳佛法이다.

그렇다면 도겐 당시 일본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은 에이사이와 能忍의 주장은 도겐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에이사이는 선사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天台密敎的 側面이 남아있어 그가 제창한 禪의 성격은 純粹禪이라기보다 禪密兼修禪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도겐에게서는 밀교적 측면을 찾아볼 수 없다. 도겐은 히에이산을 떠나 에이사이의 제자인 明全을 찾아가서 禪을 배웠지만, 明全은 에이사이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밀교적 색채 즉 禪密兼修禪的 傾向이 적은 선사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겐의 禪風은 台密的 傾向과 兼修禪을 주장한 에이사이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양자는 事戒와 事行을 중시하는 관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즉 에이사이는 本證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事戒와 事行을 중시하나, 도겐은 事戒와 事行을 本證 그 자체로서 중시했다. 다시 말해 에이사이는 事戒, 事行을 깨침의 수단으로 여긴 데 비해, 도겐은 계율을 지키고 수행함 자체가 바로 證의 世界를 드러냄이라고 보았기에 兩者의 수증관에는 차이가 있다.

그럼 能忍에 대해서 도겐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도겐이 달마종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은 그의 교단 내에 달마종 사람들이 대거 들어온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달마종 사람으로 최초로 도겐敎壇에 들어온 자는 懷奘(1198-1280)이다. 그 뒤를 이어 懷鑑, 義介, 義演, 義準이 도겐의 제자가 됨으로써 일본달마종은 점차 도겐의 僧團으로 흡수되어갔다. 사실 당대 도겐의 교단은 이들에 의해 확립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은 이들에게 정법을 가르치는 것을 얼마나 중요시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교단을 버리고 도겐에게로 가게 했을까? 앞서 에이사이의 達摩宗 批判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달마종의 수증관은 ‘衆生卽佛’이라는 극단적인 卽의 論理에 빠져 持戒와 수행을 무시하는 경향을 띠었다. 에이사이는 달마종이 空見의 무리로서 계율이 없음을 비판했는데, 달마종 사람들이 어떻게 戒行과 수행을 무시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이들도 천태본각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달마종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에이사이의 저서에 나온 것 외에도 달마종 자체 문헌인 金澤文庫의 『成等正覺論』을 들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달마종이 法系的으로는 大慧派의 拙庵德光에 속하나, 宗風的으로는 대혜파와 교섭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大慧派의 宗風이 看話禪인데 반해, 일본달마종은 간화를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成等正覺論』에서는 佛卽衆生, 衆生卽佛, 衆生本來成佛 그리고 自心卽佛을 설하고 있으나 수행론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이 점이 에이사이가 달마종을 비난한 이유였고, 도겐도 에이사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는 建長7年(1255)에 懷奘과 義介가 나눈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義介와 지난 해 同一한 法門의 所談에서 말하기를 (중략)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는 (擧手動足) 一切의 所作 즉 諸法의 生起가 모두 佛法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正見이 될 수 있는가? 이에 和尙(懷奘)은 답하기를 도겐門徒 중 이러한 邪見을 일으킨 한 부류가 있어서 도겐禪師가 義絶하고 門徒를 내보낸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義介와 지난해 같은 법문’은 義介가 도겐에게 오기 전에 속한 달마종을 의미한다. 이들은 선악의 구별도 마다하고 일체의 활동을 불법의 활동으로 봄으로써 事戒, 事行을 경시했음이 위에서도 잘 드러난다. 도겐 생존시 이런 부류가 승단 내에 있어 그들을 문도에서 추방시켰던 것이다. 도겐은 달마종 사람들이 승단에 들어옴으로써 그들에게 훈습된 천태본각적 측면과 造惡無礙의 사상―事戒를 경시하고 事行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떨쳐버릴 과제를 지녔던 것이다. 『正法眼藏』을 보면 달마종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가르친 대목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도겐은 에이사이와 같이 戒의 次元에서 달마종을 비판했다기 보다 그들이 수행을 무시하는 측면을 비판하면서 좌선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도겐의 종교세계가 펼쳐지기까지 일본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가마꾸라신불교 창시자들의 사상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가마꾸라신불교 창시자들은 히에이산 출신으로 천태본각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신란의 아미타불 신앙이나 니치렌의 법화창제는 천태본각사상이 지닌 현재적 구원론과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우리는 도겐의 문제의식이 천태본각사상이 지닌 수행의 무용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살펴보았다. 도겐은 이를 ‘本證妙修로서의 좌선’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빌레펠트는 도겐의 좌선이 중국선종사상의 그것과 유사하나 도겐은 좌선을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祖師에게 정전된 불법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도겐사상의 독특한 점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빌레펠트는 도겐의 좌선관을 親鸞과 日蓮의 경우처럼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도겐의 讀法이라고 해석한다. 도겐이 말한 좌선을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그의 讀法으로 보아야 할지는 앞으로 「佛性」卷을 통해 좀더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