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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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道는 자기를 잊는데 있다.
15-04-03
<논어>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仁이 멀리 있는가? 내가 仁하고자 하니 곧 仁에 이른다”(술이 7 30) 아무리 애를 써도 仁하게 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내가 仁하고자 하니 바로 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가? 仁은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군자가 지향해야 할 덕목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공자는 그 仁이라는 덕이 그저 내가 仁하고자만 하면 仁에 이른다고 하니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자의 가르침이 仁에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 곧 불도의 핵심은 무엇일까? 도겐은 「현성공안」에서 佛道를 따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도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만법에 증험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불도를 배우려면 경전이나 교리 혹은 수행을 배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겐은 불도를 배우는 건 자기를 배우는 것이며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보통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아완성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도겐은 자기를 배우는 건 자기를 잊는 것이라고말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를 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떨 때 우리는 자기자신을 잊곤 하는가? 무언가에 푹 빠져 있을 때 다시 말해 음악이나 영화 그리고 그림에 빠져 있을 때 우린 자신을 잊을 수 있곤 한다. 이렇듯 자기를 잊는 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물이나 존재가 주체가 되어 다가올 때 그러하다. 이를 도겐은 만법이 주체가 될 때라고 말한다. 다시 <현성공안>을 들여다보자.
“자기를 움직여 자기 활동으로 만법을 수증하는 것이 미궁이고, 만법에 나아가 자기를 수증하는 것이 깨침(證)이다”.
이는 곧 자기가 중심이 되어 행하는 활동이 미궁이라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하는 행위는 우리자신이 중심이 된다. 도겐의 견해에 따르면 그래서 우리의 삶이 미궁 속에서 헤매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도겐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깨침 안에 살아가려면 나 자신을 잊어야 한다고..... 그게 우리가 미궁에서 벗어나 깨침을 사는 길이라고.....
도겐은 학도용심집에서 “내가 능히 법을 움직일 때 나는 강해지고 법은 약해진다. 법이 들어와서 나를 움직일 때 법은 강해지고, 나는 약해진다. 불법은 바로 이 두 구절에 있다. 지금 참선을 배우는 자는 이를 전수하여 참된 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도겐이 말한 ‘자기와 만법의 관계’를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내가 법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법이 나를 움직이는 길로 나아가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법이 나를 움직이도록 자기 자신을 법에 맡기라는 것이다.
법에 자신을 내어맡김은 앞서 말한 仁에 자신을 맡김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仁하고자 하니 곧 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중심에서 만법중심에로 전향될 수 있을까? 도겐은 학도용심집을 통해 ‘법이 나를 움직임(法轉我)’에로의 전환은 참선학도參禪學道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수행을 통해 법을 이해하는 자세에 서면, ‘법法은 강하게 드러나고 나는 비어진다’
이와 같이 도겐은 구체적인 좌선수행을 통해 ‘내가 법을 움직이는 길’에서 ‘법이 나를 움직이는 길’로의 역전이 가능해짐을 가르치고 있다. 만법에 의해 자기가 움직여질 때 우리는 전 우주와 하나가 되고, 거기에서 자기와 타자의 구별은 사라진다. 도겐은 에고이즘(我見, 我慢, 我愛)의 자기극복과 자기부정 없이는 결코 불성의 현성을 체득할 수 없음을 정법안장 곳곳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짐, 그것이야말로 깨침의 상태를 사는게 아닌가. 도겐은 이를 신심탈락이라 말한다. 아만에 차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탈락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자기를 잊는 것’이요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불도를 살아갈 수 있다.
도겐에게 있어 깨달음은 그리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진실된 마음으로 佛道를 사는가이다. 佛道를 배우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한다면그는 이미 불도를 살고 있는 것이다. 불도는 멀리 있는게 아니라 내가 불도를 걷고자 하면 바로 거기에 불도가 있다. 아, 이제 조금 “仁하고자 하니 곧 仁에 이른다”는 의미를 알 듯 싶다. (20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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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갈등을 타고 오르는 것이다
2015-03-23
수행은 갈등을 타고 오르는 것이다.
최현민
보통 수행자들은 갈등을 끊어버리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끊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그 끈끈한 끄나풀들은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떨쳐버리지 못함에 대한 절망과 좌절 실망으로 수행하지 않을 때보다 더 깊은 늪 속에 빠지게 될 위험마저 있다. 아, 나는 도저히 수행이 안 되는구나하고 말이다. 수행을 오래한 사람 중 이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물론 그 갈등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처신이 달라져야 하지만 여기서 나는 묻는다. 왜 갈등을 수행의 방해요인으로만 생각하는가? 마치 장애물로 인해 물이 흐를 수 없듯이 마음 안에도 갈등이 있으면 우리의 종교적 생명이 차단되고 막힌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우리가 지닌 갈등들은 우리가 수행할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의 일부이기도 한 갈등을 없앤다는 건 자신의 일부를 없애는 꼴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갈등을 없애려 애쓰기 보다 우리의 욕망을 더 큰 가치에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함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다시 말해 갈등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보다 본질적인 면에 우리 마음을 쓸 때 우리의 수행이 한걸음 더 전진해 갈 수 있다. 빼기보다는 더하는 쪽으로 마음을 쓰는 것 말이다. 무엇을 더해야 하나. 우리 안에 숨겨진 빛을 밖으로 발산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八正道를 행함’에 있다고 가르쳤다. 팔정도는 戒靜慧의 삼학이 균형잡힌 가르침이다. 공자의 경우는 다름아닌 仁에 길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다. 곧 仁에 길들임이야말로 인간성 전체를 길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본능을 억제해서 길들이는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가치에 마음을 둠으로서 자연히 본능의 힘을 정화시키고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더 큰 것에 가치를 둘 때 우리는 본능에서 벗어나 도가 지배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학자는 공자를 실패의 스승이라고 일컫는다. 「논어 헌문」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예화가 나온다. 자로가( 통금시간에 있어 )노나라의 석문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석문의 문지기가 물었다."어디에서 왔습니까?" 자로가 대답했다. "공씨의 문하에서 왔습니다.“ 문지기가 한마디 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하는 사람 말이지요?“ (子路宿於石門. 晨門曰: “奚自?” 子路曰: “自孔氏.” 曰: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헌문」)
동시대 사람인 석문의 문지기의 증언에서 드러났듯이 공자는 당대에 실패함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공자는 자신의 실패에 좌절하고 절망치 않고 자신의 失敗를 실패(失牌)로 되감을 줄 아는 이였다. 이처럼 공자는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는 곧 실패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는 존재였고 실패야말로 공자를 공자로 만든 모티브가 되었다. 공자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道는 다름아닌 聖王 곧 요순임금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성왕의 가르침에 마음을 두고 살았다. 여기서 마음을 둔다는 것은 성왕의 가르침을 마음을 새기고 이를 그리워하면서(念)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갈등을 느끼고 실패를 하면서도 그 갈등을 타고 또 넘는 것이다.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인 도겐은 갈등이야말로 불법을 전수해 준 하나의 힘으로 본다. 어떻게 갈등이 불법을 전수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분별의 세계에 떨어지는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끊임없이 수행을 하도록 우리를 촉구하는, 다시 말해 발보리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이 분별심에 떨어졌다는 자각이야말로 우리를 또 다시 수행에로 초대하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정법안장』「갈등」에서 “갈등이야말로 불법이어서 갈등을 지니고 갈등을 자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정법안장을 전한 자는 영산회에서 가섭대사 뿐이다. 그로부터 28대를 거쳐 보리달마에 이르렀다. .....성자(聖者)들은 갈등의 근원을 잘라내는 참학(參學)을 지향한다고 말하지 갈등을 갖고 갈등을 잘라내는 것을 참학하지 않는다. 〔그들은〕갈등을 통해 갈등을 타고 오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더구나 어떻게 불법이 갈등으로부터 갈등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알겠는가?
갈등의 葛이나 藤는 덩굴풀로서 선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속박하는 것, 문자언설 또는 번뇌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래서 등나무의 덩굴처럼 엉켜 있는 망상심의 근원을 잘라버리는 것이 佛道라고 생각해왔다. 도겐의 스승인 천동여정은 “덩굴의 덩굴손이 덩굴을 감는다”고 설한 바 있다. 여정으로부터 갈등의 불법에 대해서 배운 도겐은 “이같은 설법은 지금까지 古今에서 보고 들은 적이 없다. (여정)고불이 처음으로 이를 보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겐은 “덩굴풀(胡廬)의 덩굴이 덩굴을 감아오르는 것이야말로 불조(부처와 조사)가 불조에게 전해준 것이라고 보면서 불법은 갈등이 갈등을 타고 상속되어왔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불법을 전수받는 것은 곧 갈등을 전수받는 것이라고 본 도겐은 석존이 점화하여 가섭에게 전수한 것이나 달마가 제자에게 전수한 피육골수 역시 갈등의 전수를 통해서 라고 해석한다. 이와 같이 갈등을 끊어버릴 번뇌가 아니라 불법의 세계로 나아갈 불도사법의 핵심으로 본 도겐에게 있어 갈등의 전수야말로 불법전수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갈등을 타고 나아가라.” 우리가 지닌 갈등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 갈등보다 더 큰 가치에 우리의 마음을 두자. 이처럼 우리가 더 큰 원의에 마음을 둘 때 우린 어느새 갈등을 타고 올라선 자신을 발견케 될 것이다. 욕망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온 마음을 둠으로써 갈등을 타고 올라가자. “갈등을 타고 올라라. 그것이야말로 佛道 正傳 곧 불도가 바르게 전해지는 길이다“라는 도겐의 가르침이 오늘 나를 또 한번 강하게 내리치는 죽비소리로 들린다. (201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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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지닌 매력
2011-06-01
며칠 전 ‘타종교인으로서 불교에 호감을 갖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써 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았다. 기자는 ‘호감’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내가 불교에 대해 지닌 감정에 비하면 훨씬 강도가 약한 용어이다. 호감이란 관찰자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면서 ‘왠지 모르지만 좋게 여기는 감정’ 정도의 강도를 담은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자신이 불교를 단순히 관찰자의 처지에 서서 호감을 갖고 바라보는 정도를 넘어 참여자의 입장에 서서 불교를 배우고 있다고 본다. 물론 나는 학문적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불교학도이지만, 불교학도이기 전에 수도자로서 수행전통을 지닌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자 마음먹었던 것도 단순히 학문적 접근을 통해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보다는 수도자로 살아가는 나 자신의 삶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쪽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수행의 전통을 중심으로 한 불교는 수도자로서 살아가는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묻게 만드는 또 하나의 화두로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내게 주는 매력이다. 안주하지 않고 大疑團을 품고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묻고 또 묻는 수행자들이 있는 불교는 그래서 내게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일본 유학시절 나고야에 있는 愛知尼僧堂에서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참선수행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때의 체험은 지금도 내게 아주 소중하게 남아 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까지, 식사와 좌선 사이의 중간 휴식 15분씩을 제외하고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었던 체험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앉아있음’에 익숙해져 갔다. 몸의 앉음이 서서히 마음의 앉음으로, 더 나아가 내 전존재를 거기 앉아 있도록 해주었다. 나의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거기 그 자리에 앉아있게 해 준 것이다. 아마 함께 좌선했던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법당에 그토록 오랫동안 앉아 있게 만든 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를 衆力修行 大衆威神力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내가 거기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스님들과의 인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겠는가? 시공을 넘어 내 의식세계를 스쳐갔건 그렇지 않았건, 내 삶에서 만났던 모든 존재들 간의 인연의 맥이 있었으므로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같이 불교는 석존으로부터 이어온 좌선수행 전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의 심연을 드려다볼 수 있도록 그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우리를 존재의 진리로 초대하고 있다고 본다. 세상풍파에 시달려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방향감각을 잃은 채 떠밀려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석존께서 가르치신 좌선수행은 자신의 존재성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한다.
나는 이러한 수행의 길이야말로 불교가 참종교로서 그 맥을 이어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불교적 진리가 나로 하여금 불교를 단순히 내 밖의 타종교가 아니라 내 삶의 일부로 초대하여 그 세계에 깊이 심취하게 만든 이유이며 불교를 공부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혼탁한 사회에서 종교가 해야 할 일은 그 혼탁함이 남에게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바로 나자신에게서부터 나온 것임을 자각케 하는 일이라고 본다. 이를 자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고요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일일 것이다. 현대인들이 불교의 禪수행에 관심을 갖고 선방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 혼탁한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다시금 정화해 보려는 내적 갈구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불교가 이러한 현대인들의 갈망에 부응하여 더욱 많은 이들이 그 길에 동참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참선수행의 기회를 제공해주기를 희망해 본다.
또한 진흙 속에서 피어오른 수련처럼 釋尊으로부터 諸祖들로 正傳되어온 兀兀地와 같은 端坐冥想의 전통, 그 佛法을 면면히 이어가는 참 불제자들이 늘어나서 혼탁한 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종교로 거듭 나기를 부처님 오신 날에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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