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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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서언 52. 한국적 영성을 찾아서
2016-09-28
한국적 영성을 찾아서
최현민(영성생활편집인)
지난 51호에 이어 이번 호에도‘한국적 영성을 찾아서’를 주제로 삼았다. 51호에서 오지섭 교수님은‘한국적 영성 찾기’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한국적 특성은 고정된 실체일 수 없으며 유동적이고 진행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오랜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적인 것을 찾는 작업은 전통과 현재를 연결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특히 서구문화 전통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도교가 한국 토양에 이식된 상황에서 한국적 영성에 관한 논의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서구적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도 어언 230년이 흘렀다. 과연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온 후 우리 전통종교문화와 어떤 교류가 있었는가.‘토착화’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지만 그리스도교가 이 땅의 종교문화 속에 얼마나 토착화되었는지 미심쩍다.
외래문화가 들어와 고유한 그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 문화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과연 한국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종교문화 속으로 녹아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
한국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이신 심상태 신부님은 오랫동안 토착화 문제에 천착해오셨다. 최근에 서울 신학대학에서 <아시아 맥락에서 하느님 이해하기>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은 내게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적 틀 속에 있다. 한국 신학은 우리 문화 속에 면면히 흘러온 종교와 영성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국적 토양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겠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네 삶의 자리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면, 우리의 실제적 삶, 곧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적 가치관 아래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현실을 지탱해가고 있는가?
매일 접하는 TV, 신문, 핸드폰 등의 매스 미디어의 소식들은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직결된 정보들이다. 이렇듯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논리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처럼 일상을 자본주의적 가치관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떻게 우리 안에 자리할 수 있을까? 현실에 머물 곳이 없다면 내세에 대한 희망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현실 가운데, 우리 삶의 중심축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리 잡게 할 수 있을까?
이즈음에 나는 우리 선조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들의 삶을 지탱해온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우리 선조들은 동아시아 종교전통(유불도)의 가르침 속에서 하늘(天)에 대한 외경심을 갖고 일상을 묵묵히 살아왔다. 그들의 일상 안에는 동아시아의 종교영성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 영성 안에서 성찰했고 이를 후손인 우리에게 전수해주었다. 과연 우리는 전수받은 전통문화에 얼마만큼의 관심을 갖고 이를 자신의 신앙 속에서 되새김하며 영성적 통합을 위해 노력해왔던가.
나는 지금껏 그리스도신앙이 이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현실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온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것은 단순히 동아시아 종교영성을 지식으로 배움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영성 속에 녹아든 삶의 지혜를 배우고 그것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 접목하는 일이다.
유가에서는 우리 마음 안에는 인심人心뿐 아니라 도심道心이 있다고 가르쳐왔다. 인심이 세상 것에 마음 쓰는 것이라면 도심은 우리의 본성에 마음 씀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은 우리의 욕망, 곧 인심을 끊임없이 자극해왔다. 온 마음이 인심에 가 있으면서 도심은 그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매몰된 채 수장되어 버렸다. 동아시아 종교 영성은 인심과 도심의 관계에 대해 깊은 성찰과 혜안을 전수해왔다.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래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마는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현세적 욕망은 충족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커져만 간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우릴 궁극적 행복에로 이끌어갈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 산다는 건 세상적인 것이 내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음을 이미 맛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음을 이미 아는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30년간 동양영성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동양영성에서 말하는 궁극적 행복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그것과 깊이 통교할 수 있음을 자각해왔다. 그것은 유불도 삼교 역시 참된 행복은 인간의 욕망을 비워냄을 통해 얻게 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영성에서 배운 깨달음은 내게 예수의 행복관이야말로 참된 행복관임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동양영성의 지혜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삶의 지혜와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 그러한 확신을 준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 현실 속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상대화할 수 있는 내적 힘이 길러져야 한다. 다시 말해 내 마음에서부터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상대화시킬 만큼 내공을 쌓을 필요가 있다.
어떻게 내공을 쌓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전통에 면면히 이어져온 영성의 길에 맛들여가면서 우리 문화의 바탕을 이루어온 동아시아 종교영성을 조금씩 배워 접목시켜 나가는 길은 그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 안에서 한국적 영성을 뿌리내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영성생활2009가을 38호 (지금 여기를 사는 영성)
2010-10-25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은...
최 현 민
들어가면서
톡톡톡.... 세상을 향해 가냘픈 부리로 쪼아대는 병아리 소리, 바로 그 순간 어미닭은 새끼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정확히 그 자리를 감지하고 밖에서 쪼아준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 어미와 새끼가 안팎에서 서로 쪼는 것을 불가에선 줄탁동시(줄啄同時)라 한다. '줄'은 병아리가 알껍질을 쪼는 것을 가리키며 '탁'은 어미닭이 쪼는 것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송(宋)나라 때의 선어록인 《벽암록(碧巖錄)》에 등장한다. 제자가 부화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 순간, 마음의 껍질을 자신의 가냘픈 부리로 쫓고 있는 그 순간, 스승의 큰 부리가 동시에 같은 곳을 향해 쫓아줌으로써 제자는 마음의 껍질을 깨고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스승이 제자가 무르익어감을 알아보고 일격을 가함으로써 제자가 의심을 타파하고 깨침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도와줌을 의미한다. 깨침은 이렇듯이 ‘지금 여기’라는 시공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의 ‘지금 여기’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떤 수행을 하십니까? 우리는 앉고 걷고 먹는다. 그렇지만 부처님, 누구나 앉고 걷고 먹지 않습니까? 우리는 앉을 때 우리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걸을 때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먹을 때 우리는 먹고 있다는 것을 안다.
걸을 때 걷고, 먹을 때 먹는 것이 수행이라니 그게 어떻게 수행이냐 라고 반문할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부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수많은 망상 속에서 걷고 먹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몸은 ‘지금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과거에 매여 있거나 미래의 근심 걱정에 쌓여 살아가기가 태반사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는 인간이 만든 개념의 시간일 따름이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뿐.... 그러나 우리는 늘 과거나 미래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가지 않나?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 그것이 바로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나 미래 속으로 줄랭랑쳐 버리는 마음을 어떻게 ‘현재’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상 곧 누구나 앉고 걷고 먹는 일상 행위를 하나의 명상으로 삼으셨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되고 이를 통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숨겨져 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八正道) 중 하나인 정념(正念)의 ‘念’이라는 한자를 보면 위는 今으로 ‘지금’이며 아래는 心으로 ‘마음’을 의미한다. 곧 念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 되겠다. 이와 같이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하는 수행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정념수행의 핵심인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정념수행을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곧 ‘깨어있는 마음’으로 해석한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는 것은 책을 읽을 때는 책에, 먹을 때는 먹는 것에, 차를 마실 때는 차에, 걸을 때는 걷는 것에 온 마음을 다해 사는 것을 말한다. 플럼빌리지에 가면 다음 글귀가 돌에 새겨져 있다. “나는 이미 도착했네(I have arrived).” 그 곳에 사는 스님들은 다음 노래를 즐겨 부른다.
나는 이미 도착했네(I have arrived)
나 고향에 있네 (I am home)
나 지금 여기 있네 (In the here In the now)
나는 든든하고 자유롭네 (I am solid I am free)
나 궁극의 진리에 머무르리 (In the ultimate I dwell)
재작년에 플럼빌리지에서 일주일간 피정한 적이 있다. 그 때 거기에 온 수행자들과 그 곳 스님들과 함께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그래,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나의 집이요 고향이 아닌가? 그저 질주하며 살아온 지나온 삶, 어디를 향해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달리고 또 달려왔는가? 플럼빌리지에서 틱낫한 스님은 설법하신 후 늘 그 곳에 온 수행자들과 걷기명상 곧 행선(行禪)을 함께 하신다.
넓은 벌판과 자두나무가 심어진 과수원 사이를 1시간 정도 함께 천천히 거닌다. 조금 느리게, 그리고 숨쉬기와 발걸음을 조화시켜가며 걷고 있노라면 마음 또한 느긋해짐을 느끼게 된다. 발이 땅에 맞닿는 느낌 곧 발바닥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걷노라면 세상 어느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는 마음이 되어 버린다. 걷는다는 것 이외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걷다보면 진정 걸음을 즐기게 된다. 어디를 가기 위한 걸음이 아니라 걷기 위한 걸음.... 언제 그렇게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내 걸음은 늘 목적 지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이지 않았던가? 학교를 향해, 직장을 향해 그리고 무엇을 하기 위해 바삐 걸어오지 않았던가?
내가 걸어온 걸음들, 내가 남긴 삶의 발자국들.... 나의 성급함과 조급함을, 걱정과 근심을, 슬픔과 절망을, 지침과 피곤함을 걸음과 몸짓에, 목소리에 담아 세상에 퍼트리며 살아온 지난 시간들.... 쉴 새 없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니는 원숭이마냥 이리저리 춤추는 마음의 흔들림 속에 살아온 삶의 흔적들... 갈라진 생각과 망념들, 그 미망의 세계 안에서 뜀박질하며 살아온 나를 본다. 자두나무로 가득찬 플럼빌리지 언덕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며 아, 이 모든 것을 내려놓자고 다짐 또 다짐해본다.
내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을 과거나 미래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마음을 두고 걸어보자. 누군가 이런 의문이 들지 모르겠다.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라면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말인가?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둔다는 건 과거를 되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나 미래를 설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지난 일을 후회하고 미래의 걱정이나 두려움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을 때 과거나 미래에 대한 통찰 또한 생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걷기명상은 걷는 것 이외 다른 어떤 목적도 다 내려놓고 오직 걷는 것에 마음을 집중한다. ‘지금 여기’라는 시공에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두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걷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걷는다. 수단으로서의 걸음이 아니라 걸음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걷는다. 이 걸음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 안에 녹아있는 ‘지금 여기’의 영성을 살펴보았다. 그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2. <코헬렛> 속에서의 ‘지금 여기’
종전에 ‘전도서’로 불리웠던 코헬렛은 정경성 논란과 내용상 오해의 여지가 많은 구약성경 지혜문학 중 하나이다. 신학자들은 이 책이 한 사람에 의해서라기보다 어느 편집자에 의해 코헬렛의 어록이 모아져 완성된 것으로 본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 2) 온통 인생과 세상의 허무만을 말하는 듯한 이 책이 어떻게 정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코헬렛의 저자는 과연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전해주고자 했을까?
코헬렛 저자가 말한 인생의 허무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 허무라면, 이 책이 정경으로 채택되었을지 만무하다. 코헬렛에 나오는 ‘헛되다’(히브리어 ‘헤벨’)라는 단어는 원래 ‘입김’ 또는 ‘숨’처럼 금방 없어지는 것, 찰나적인 것, 오래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코헬렛은 이 단어를 반복해 씀으로써 인간이 인생에 대해 품은 온갖 집착들의 ‘무상함’을 말하고자 함이라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한다. 코헬렛은 누구보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향락과 술에 빠져보기도 하고 돈을 많이 벌어 막강한 권한을 누려보기도 하고(1-9절)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누리고 싶은 즐거움을 다 누린(2,10) 행운아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결국 “내가 이 손으로 한 모든 일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은 결국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절)라는 고백을 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다. 절망한 코헬렛은 급기야 “나는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2,17.18.20.23절 참조)는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24-25절에 와서 그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2,24 참조)는 반전의 발언을 한다.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인간의 한계와 무상함을 깊이 체득한 코헬렛은 세상의 것이 다 허무임을 자각했다. 삶의 한계를 체험한 그는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충실히 사는 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 터득한 것이다. 인간존재의 한계를 깊이 인식한 그는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사는 비결은 ‘현재’를 사는 지혜를 터득함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사는 것,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만큼 현재에 올인하는 것, 그것만큼 지혜로운 삶은 없음을 깊이 자각한 것이다. 바로 이 지혜가 담겨 있기에 코헬렛은 성경의 지혜문학의 일부로 전해져 온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바치는 기도 속에는 ‘영원’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영원무궁세....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마치 ‘영원만을 지향하는 종교’인양 생각하기도 한다. 세상 것은 다 헛되니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라.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원은 ‘지금 여기’를 떠난 시간개념이 아니다. 지금 여기 곧 현재가 배제된 영원은 구원과 거리가 멀다. 지금 여기에서 죽어도 될 만큼 ‘현재’를 충만하게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적 삶을 사는 것이다. ‘현재가 바로 선물인 것이다(Present is present).’
어느 한 카드 광고에서 카드 이용액을 늘리기 위해 인용한 말 중 ‘카리페디엠(Carpe Diem)’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문구는 현란한 조명아래 춤추는 한 젊은 남자가 인생과 청춘을 즐기라고 하면서 외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본래 의미는 흥청망청 인생을 즐기란 뜻이 아니다.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인공 키팅(John Keating) 선생도 이 말을 자주 썼다. 그는 첫 시간부터 파격적인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카리페디엠’을 말한다. 카르페 디엠은 라틴어로 ‘현재를 잡아라’ 혹은 ‘오늘을 살라(seize the day)’ ‘이 순간에 충실하다’라는 의미이다. 그 영화에서 키팅 선생은 자신과 학교측의 교육방침의 차이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난다.
영화 속의 학부모와 교장들의 카르페디엠과 키팅의 카르페디엠의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다. 전자가 사용한 카르페디엠에는 미래 시제가 포함되어 있다. 즉, 미래의 현실을 즐기기 위해 ‘지금의 현실을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학생들이 처한 현실적 억압을 정당화시키려는 슬로건이었다. 이에 반해 키팅이 말한 카르페디엠은 문자 그대로 ‘지금 바로 여기’의 현실을 말한다.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함이 교육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때 전자의 주장은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현재는 ‘지금 여기’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사는 것, 그런 ‘현재’가 축적되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가?
3. 예수의 가르침 안에 녹아든 ‘지금 여기’
살아가면서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상 가치 속에 길들여져 왔다. 그 안에서 각자 행복을 찾고자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추구해온 것들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체험하곤 한다. 코헬렛 저자가 말하듯이 세상 가치를 추구할 때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뿐임을 느끼곤 한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하신다. 메타노이아(Metanoia) 곧 회개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 회개의 방향성에 대해 제시한 것들이 많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25-37)는 그 중 하나이다. 이 비유 중 조연급에 해당되는 두 인물 제사장과 레위사람에 주목해 보자. 추측컨대 사제는 아마도 성전 봉사의 기간을 마치고, 그의 동네인 예리고로 돌아가는 길이었을지 모르겠다. 사제나 레위인 모두 (마치 못 볼 것을 본 양)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고 성경을 전한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 시체를 만지지 않는다(레위21,1).
그들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죽어가는 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쓰러져 있는 사람보다 자신들의 일이나 관습 이 더 중요했다.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관습’이나 그들이 행해야 할 어떤 ‘일’에 있었기에 ‘지금 여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이에 반해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했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과 사마리아인의 차이이다.
루가복음서에는 나병에서 치유 받은 열사람 이야기가 나온다.(17, 11-19). 열 사람 모두 나았지만 그 중 한 사람만이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 예수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7-19절)
아홉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추측컨대 그들은 자기 가족이나 친구, 친지에게 병이 나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아니면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갔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에 의한 것임을 잊어버린 것이다. 무엇이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지를..... 자기 안에 발생한 하느님의 일을 알아본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만이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난 일을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앞서 살펴본 두 비유를 통해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있다. 결국 지금 여기를 하느님의 연관성 속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인 것이다.”
토마스 키팅 신부님은 “영적 성장에서 가장 큰 장애 중 하나는 숨은 동기를 지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무의식적 동기가 정서 프로그램화되어 우리의 행동동기의 원천으로 자라나고 사회화 과정으로 점점 복잡화되고 강화되어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조정하는 거짓자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 안에 형성되어온 무의식적 동기의 정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자아로 인해 만들어진 정서프로그램은 점점 업그레이드되어 복잡하게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사람도 ‘길들여진 습관’에 의해 행동했을 것이다. “습(習)이란 사물을 접하면서 생긴 일정한 방향성을 명령하는 몸의 기억이다.” 이와 같이 습관의 힘에 의해 빨리 작동해버리는 거짓자아, 정서프로그램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 키팅은 향심기도를 통해 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행복의 정서프로그램이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함을 자각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이다. 코헬렛이 그랬듯이....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하느님, 당신 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이 얼마나 방황했나이까?”하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하느님만이 우리 행복의 참된 근원임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깊이 동의하는 것이 바로 향심기도이다. 행복의 정서프로그램이 작동하려 할 때 그것을 떠나보내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대한 동의와 지향을 두는 것이다. 우리의 동의와 지향의 상징으로 향심기도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다만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활동하심을 동의하는 지향의 상징일 뿐이다. 이와 같이 거룩한 단어를 가볍게 떠올림으로써 부상하는 정서들을 떠나보내고 ‘지금 여기’에 하느님의 현존에 깊이 동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향심기도도 불교명상이 중시해온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동생 마리아가 자기 일을 도와주지 않음에 대해 불평했을 때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은 많은 생각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한 가지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주관으로 남을 판단할 때 우리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지 못한 채 살아가기 쉽상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동생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촉구하신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를 사는 길이요 하느님의 현존에 머무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오면서
이번 7월에 영주 선비문화촌에서 종교대화를 위한 종교전문인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석사를 방문했다. 입구에서 내려 극락을 의미하는 안양루를 통과해 조금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수백년을 지켜 온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우뚝 서 있었다. 무량수전 안에서 밖을 향해 바라다 보이는 소백산의 능선,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곳마다 곱게 겹쳐진 능선들과 아름다운 정경은 그야말로 “여기가 바로 서방정토 극락세계, 영원의 세계로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정한 정토, 하느님 나라는 저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가 실현해 가야 할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다.
요즘 부쩍 도보여행자들이 많아진 것 같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나 제주도 올레길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는 스페인 북부에서 시작하여 성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성지 '까미노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세계적인 도보여행길이다. 산티아고 교회에 가기 위해 800킬로미터를 걷지만 순례자들은 두 발로 걸어온 길 그 자체가 예배이고, 기도였다고 말한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그들이 ‘순례의 과정이 곧 목적’임을 자각한 것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쓴 한 저자는 말한다. “카미노는 과정이 곧 목적이다. 첫 한 발짝이 이미 충족이다.....카미노는 제 안으로 길을 내는 영원한 진행형이다. 그러니까 그냥 걸어라. 몸에 맡기고 마음에 맡기고 곧은 길 곧게, 굽은 길 굽게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 수백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고, 뜨거운 태양 볕에 살을 태우면서 산티아고를 찾은 순례자들은 그 길을 걸으며 결국 자신들의 순례는 산티아고에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를 향해가던 그 걸음, 걸음에 있음을 깨닫는다. 순례의 걸음처럼 그렇게 삶의 하나하나에 일념으로 투신해서 산다면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지 않겠는가? 다만 오로지 찰나 찰나에 오체투지하는 삶, 다른 여타의 것들을 탈락시키고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을 오체투지하는, 그런 진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많아지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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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2009봄 37호 (관계 회복을 향한 영성)
2010-10-25 12:23 READ : 430
관계 회복을 향한 영성
최현민들어가면서
2006년 건학 100주년을 맞이한 동국대학교는 '지식기반사회와 불교생태학'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그 때 강사로 초청되어 오신 헬레나 노르베리 호리(Helena Norberg Hodge, 1946년 -)여사의 강연은 내게 무척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노르베리는 1970년 중반에 학위논문을 위해서 인도북부의 라다크에 가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그녀는 현대사회의 진보의 물결이 들어가지 않았던 당시 라다크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엄혹한 기후와 거친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 놀랐다. 노르베리는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행복감을 갖게 했는지 궁금해져서 라다크에 머무는 기간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녀는 행복이 결코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종전에 자신이 가졌던 가치관의 전환이 왔음을 고백했다. 그 전에 그녀는 세계의 진보와 발전의 방향은 어쨌든 불가피한 것이고 그 흐름 속에서 삶의 나날이 힘들고 빠르게 느껴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다크의 생활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가졌던 수동적 태도가 자연과 문화를 혼동한 데에서 기인한 것임을 자각했다. 자신의 가치관이 인간의 본래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산업사회가 가져온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세계의 진보와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불가피하기에 그 흐름 속에서 겪게 되는 나날의 힘겨움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절제가능한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노르베리가 지적하듯이 현대산업사회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상을 향해 줄달음쳐가고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허덕거리며 뒤쫓아가기 바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속화되는 발전의 물결 속에서 현대인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상품가치를 지닌 전문인이 되기 위해 자기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부단히 자신을 좋은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애써가면서 인간도 점점 상품화되어가고, 인간관계 또한 상품교환의 형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전문화 추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시대가 요구하는 전문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성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전문화, 중앙집중화, 자본과 에너지집약적 생활양식은-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간의- 힘의 균형이 깨져가는 현실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족 간의 관계가 와해되어가고 생태계가 파괴되어가는 현실은 이러한 힘의 균형의 깨짐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이 뒷면에 총체적인 우리의 관계망이 무너져 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생명체이건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망 속에서만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있다. 관계의 사슬이 끊어질 때 결국 생명체의 존속은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운 먹이사슬에서도 잘 드러난다. 생명체의 사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연이 파괴되었을 때 모든 생명체는 위협을 받는다. 모든 생명체의 사활이 걸린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태환경 살리기 운동에 뛰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단지 자연의 파괴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 관계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각 분야의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파괴된 관계성 회복을 위해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직시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영성적 측면에서 '관계회복'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현대에 들어서서 많은 사람들이 명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관계단절로 인한 영혼의 빈곤함을 느끼게 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현대인들은 쫓기는 듯한 현대생활 속에서 영혼의 쉼터를 찾는다. 그들은 어느 정도 물질적 풍요를 얻었지만 타자와의 연대기반이 점점 와해되어 가면서 마음의 빈곤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일어나는 명상의 붐과 무관하지 않다. 곳곳에 명상을 가르치는 곳이 부쩍 늘어가고 있음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명상을 가르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그 방법들 중에 우리는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야 할까? 이 물음과 연관지어 현대사회 안에서 성행하고 있는 신영성운동에 대해서 고찰해보고, 이를 불교나 그리스도교 영성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신영성운동
오늘날 이 곳 저 곳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는 명상방법들 중 신영성운동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많다. 신영성운동-뉴에이지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 신영성운동은 1970년경부터 주로 선진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개인주의적 종교운동을 말한다. 신영성운동의 출현은 과학만능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몰락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합리주의에 근거한 과학발전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왔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과학만능주의는 생태계 파괴와 핵전쟁 위협, 인간성의 상실 등의 폐해를 낳았다.
이러한 과학만능주의의 한계가 드러내자, 그 기반이 된 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새로 등장하게 되었다. 신영성운동은 바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하여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다원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에 기반한 신영성운동은 기존의 구원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신영성운동은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다원화를 통한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신영성운동은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적 사상을 용광로 속에 넣고 융합시켜 통합체로 만들고자 한다.
신영성운동은 초자연적 힘이나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는 대신, 자율적 개인의 각성에 의한 영성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종교가 인간 본래의 영성을 억압해 왔다고 보고,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영성개발이 요청되는 시대임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신영성운동은 인간의 초월능력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킴으로써 신중심에서 우주적 인본주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인들이 신영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현대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많은 현대인은 종교교단 조직에 구속되기를 싫어한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신영성운동은 종교교단조직 대신 네트워크를 통해 각 개인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방법을 취한다. 이와 같이 개인의 영성개발을 위해 신영성운동은 지속적인 공동체성보다 매스미디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신영성운동이 공동체보다 개인에 중점을 두는 것이 따뜻한 인간관계보다는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현대사회의 특성과 맞닿아 있다.
그들은 인간의 무한한 잠재적 능력을 개발하자고 주장한다.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부의 신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뉴에이지에서는 환생(還生)을 강조한다. 즉 그들은 인간이 환생을 거듭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영성운동에서는 환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성을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통한 의식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자기완성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일 때, 과연 이것을 궁극적인 자기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안에 능력을 무한히 키워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함은 무엇을 위함인가? 이것이 과연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자기완성인가? 우리는 필연적으로 함께 살아갈 공동체적 운명을 타고 났다. 이는 우리가 지향할 자기완성은 결코 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각 개인의 신격화를 목표로 하는 신영성운동은 우리의 문제인 관계성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2. 불교전통 안에서의 관계영성
1) 연기(緣起)
뉴에이지 명상은 인도사상이나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참선이나 수양 요가 등을 큰 비중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불교의 명상을 뉴에이지 명상의 한 부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 명상과 신영성운동의 그것은 분명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뉴에이지 명상이 개인주의에 기초했다면, 불교 명상은 삼라만상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연기사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사상은 삼라만상이 상호 깊은 연관 속에 있다는 자각에 기초하고 있다. 틱낫한은 연기를 interbeing이라고 해석한다. 한 장의 종이는 종이 아닌 요소로 되어 있다. 종이 아닌 요소들이란 구름 비 나무 햇빛들을 말한다. 이 요소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종이는 더 이상 종이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한 장의 종이와 나무 태양 물 목수 등의 종이 아닌 요소들의 관계는 삼라만상이 상호연관 속에 있다는 연기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보통 사람은 장미는 아름답고 쓰레기는 더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금 꺾어서 꽃병에 꽂은 장미는 아름답지만, 며칠이 지나면 장미 역시 쓰레기의 일부가 됨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장미와 쓰레기는 공존한다. 장미 없이 쓰레기가 있을 수 없고 쓰레기가 되지 않는 장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 관계 속에 있다는 연기(緣起)야말로 불교의 근본진리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가면서 연기사상은 다양하게 설명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경전인『화엄경』에서는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중첩되는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말하고 있다. 법계연기의 세계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를 통해 설명된다. 상입이란 스스로 혼자 존재할 수 없는 무실체적인 존재자가 서로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화엄의 제3조인 법장(法藏) 스님의 설법에서 상입은 사면이 거울로 되어 있는 방 가운데에 놓여 있는 횃불 모습에 비유된다.
한 거울 속에 다른 거울의 상이 들어오면 무수히 많은 횃불의 상이 거울에 비추어지게 된다. 이 때 한 거울에 다른 거울의 상들은 서로 교차하지만 하나하나의 상이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거울에 나타나는 무수한 상들이 서로 합쳐지듯이 모든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또한 하나의 상이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 않듯이 하나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의 있음을 방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화엄세계에서 말하는 사법계 중 마지막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이다. 이것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상즉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깨닫지 못한 범부의 눈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이지만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사람이 산이고 산이 물이고 물이 사람이 된다. 서로 장애됨 없이 모든 것이 상통하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바쇼오(芭蕉)가 지은 하이쿠 중 “개구리가 연못에 퐁당 뛰어드는 소리”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개구리가 연못에 뛰어들었는데 그 때 소리가 들렸다”로 이해한다. 즉 연못과 개구리 그리고 개구리가 연못에 뛰어들 때 나는 소리가 각각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쇼오의 하이쿠에는 개구리도, 개구리를 바라보는 주체도 사라지고 오직 연못 속으로 뛰어들며 개구리가 내는 소리만이 있다. 개구리라는 객체도, 개구리를 보는 주체도, 연못과 그 속에 뛰어드는 개구리라는 존재 간의 경계도 다 사라지고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우주의 소리만이..... 이와 같이 개구리가 연못 속에 뛰어드는 그 찰라의 순간을 표현한 바쇼오의 하이쿠는 사사무애의 세계 바로 그것이다. 우리도 기도나 명상에 깊이 들어갈 때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10여 년 전 일본에 유학했을 때 비구니 스님들과 일주일동안 참선수행을 함께 한 경험이 있다. 신체적 고통과 잡념들로 무척 힘들었던 수행이긴 했지만 참 소중한 체험이었다. 참선 마지막 날, 수행이 끝남을 알리는 큰 북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 안에 너무도 크게 울려 북소리와 내가 하나가 된 가슴벅찬 느낌이었다. 그 순간 북소리와 나의 경계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북소리가 내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기까지 품고 있던 삼라만상의 모든 것-북이 있기까지의 모든 존재-이 하나가 되었다. 마치 개구리가 연못 속에 뛰어들며 낸 소리처럼, 북소리는 나와 북과의 경계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존재, 1주일간 수행의 고락을 함께 나눈 모든 스님들과의 존재의 벽도 허물어버렸고 법당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가 사라진 사사무애의 세계를 현현케 했다.
이와 같이 연기사상은 존재하는 무엇 하나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불교명상을 통해 우리는 모든 장애가 사라진 사사무애의 경지에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인 깨달음은 단지 내적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이 실제의 삶 안에서 구체적인 실천행으로 이어질 때 가능하다. 부처님은 연기를 깨달으셨지만 그분을 불교라는 구원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당신의 구체적 삶 속에서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자비행이다.
2) 연기의 깨침을 통한 자비행
연기에 대한 깨달음의 완성은 자타불이(自他不二)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우러나는 삼라만상을 향한 자비행에 있다.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제10도는 입전수수(立廛垂手) 곧 마을에 들어가 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궁극적 깨달음이란 공(空)의 세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자비행을 실천함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자신의 깨침을 자비실천을 통해 드러내는 이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 부른다.
보살은 깨달은 자이면서도 중생들의 구체를 위해 부처가 됨을 보류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보살의 자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화로 『유마힐소설경』의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에 나오는 유마거사를 들 수 있다. 병에 걸린 유마거사에게 그 이유를 묻자 “중생이 앓기 때문에 보살이 앓는다”고 답한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픔이 남아있는 한, 자신의 아픔도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유마거사가 자기 몸과 중생의 몸이 한 몸임을 통찰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중생의 병이 다 나아야 나의 병도 낫는다'는 유마거사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중생의 아픔을 몸으로 함께 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적 사랑을 느낀다.
대승불교는 연기와 무아의 깨달음을 통해 드러난 동체대비적 실천행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비행은 인간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향해 열려 있다. 동체대비를 실천하신 구체적인 예로 천성산 지킴이신 지율스님을 들 수 있다.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투하여 단식하셨던 스님의 단식투쟁에서 우리는 “자연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라는,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신토불이(身土不二)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연기와 자비를 통해 불교 전통 안에 깃든 관계적 영성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연기적 깨침은 나와 남을 가르는 울타리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나라는 존재의 무아성을 깊이 자각할 때 나와 네가 둘이 아님(不二)을 깊이 자각하게 되고, 여기서 자비심은 나올 수 밖에 없다. 즉 연기의 깊은 자각은 자비행을 낳는다. 이것이 불교명상이 지향하는 궁극적 세계이다. 이러한 불교의 관계적 영성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을 가능케 한다.
2. 그리스도교의 관계 영성
1) 예수의 깨침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자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한 주간동안 그분의 삶을 회고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40만의 인파가 명동성당을 찾아가 그분을 추모하는 현상이 생겼다.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곳을 찾게 했는가? 이에 대해 한 신문 사설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생전에 김 추기경이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양심의 소리를 내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을 놓았듯, 그의 죽음은 겸손에 바탕한 사회통합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했다. 정파 이념 지역 빈부 종교로 나뉘어 분열과 대립,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 저변에는 통합과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김 추기경이 성(聖)의 세계에서 현실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공정한 판단을 하고 이를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었기에 가능했다. (세계일보 2009년 2월 20일)
또 다른 신문에서는 "이 현상을 통해 종교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읽을 수 있다. 그동안 제도권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깊어졌던 것은 종교의 현실과 우리 사회의 기대 사이에 놓인 괴리 때문이다. ...21세기를 사는 세속사회가 목말라하는 가치가 종교라는 이름에 투영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한겨레신문 2009 2.21)
이와 같이 김수환 추기경님의 돌아가심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분은 생전에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돌아가심으로 더욱 빛을 발하시며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새롭게 되살아나심을 체험케 하였다. 많은 이가 그분을 추모하는 이유에 대해서 각계각층이 내놓은 해석들 중 공통되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셨던 그분의 삶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는 김 추기경님을 통해 다시금 사랑의 위대함을 재발견하게 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의 사랑의 나눔이라는 이 보편진리의 근원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곳에서 그리스도교는 탄생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재는 척도, 최후심판의 척도라고 말씀하셨다. 즉 최후에 우리의 삶을 재는 잣대는 내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느냐에 달렸다는 의미이겠다.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사랑을 실천하셨다. 이에 대해 우리는 쉽게 그분은 본래 그런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분은 본래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예수께서 온전한 인성을 지니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생활을 처음 시작하시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당신이 깨달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선포 외에 다름이 아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로잡힌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로다. (이사 61, 1-2, 58,6)
예수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실천함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신 것은 바로 당신을 파견하신 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드러난 예수의 행적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해 지극한 연민을 지니심이야말로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비심은 그분으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도록 촉구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 안에 바로 가난한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한 의미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compassion)이란 말은 <함께 고통을 겪다, 함께 아파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cum patior>에서 생긴 것이다. 즉 여기에 근거하여 '같이' 'together'란 의미의 접두사 'com'과 '열정' 또는 '수난'이란 뜻의 'passion'이 합쳐져, '같이 아파함'의 뜻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겪는데 하느님의 자비의 참된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넘어서 당신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신다.
이는 예수 안에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사랑을 베품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깨달으셨고, 이를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간의 상관관계는 우리의 본래성에 대한 깨침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2) 본래성에 대한 깨침
우리는 예수의 인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성에 대해서도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상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우리의 본래성을 그저 교리적인 것으로 괄호 속에 넣어버리고 실제로는 죄인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온 것이 사실이다. 보물도 꼭꼭 싸서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겨두면 그 빛을 발할 수 없듯이, 우리의 본래성 또한 그러하다. 그 본래성이 빛을 발하기 위해선 덧씌웠던 포장을 벗겨내고 닦는 수행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하느님의 모상-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으심으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듯이 말이다.
왜 예수께 가능했던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본래성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자비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을 타고 났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 우리 또한 하느님 자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게 될 때 우리 자신도 그 자비의 본성을 지녔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이로서 우리도 자신의 신성도 발현케 될 것이다.
올 1월에 이스라엘에 다녀왔는데 겨울임에도 따뜻해진 날씨 탓인지 벚꽃이 피었다. 전에는 꽃이 아니었던 것이 때가 되니 꽃으로 피어난다. 시절이 도래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드러내는 자연 속에서 존재의 진리를 본다. 삼라만상이 제 때가 되어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냄을 불가(佛家)에서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한다. 우리의 본래성이 피어나는 그 자리,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불성(佛性)의 현현(顯現)'이라 하고 그리스도교식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모상의 드러남'이라 할 수 있겠다.
14세기 탁월한 관상가였던 루이즈부로크(John Ruusbroec, 1293-1383)는 인격의 핵심은 내재적이거나 근원적 본성(intrinsic fundamental nature)으로 보기보다, 존재(being) 자체 혹은 ‘존재함(is)'으로 본다.(Rob Faesen, "John Ruusbroec as a Major Contemplative Christian Author" Sino Christian Studies No 3, Jun 2007, p.70.)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라기보다 우리 존재를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모상을 구현해 나감에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거져 주어진 본래성을 삶을 통해 구현시켜 나갈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의 본래성을 이해할 때, 인간은 한번의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계속 창조되어 가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작업이 과거의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듯이(creatio cintinua), 우리의 존재성도 창조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속적 창조의 방향성에 대해서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모델로 제시한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 함은 그것이 내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정체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존재함이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살아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지니셨던 이마고 데이(Imago Dei)는 그분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예수 안에 완성된 하느님 모상은 그분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골로사이서 3:9-10에서 예수를 통해 완성된 인간상이 우리와 거리가 먼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참된 가능성으로 주어졌음을 말한다.
그리고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 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와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축인 예수가 지닌 사랑의 의미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예수의 자각과 연관지어 살펴보았다. 예수께서 깨달으신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그분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자신의 본래성 안에 드리운 인성과 신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당신 인성을 통해 자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셨듯이, 우리 또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할 때 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자비의 삶을 살아갈 수 잇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 실천은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어 남에게 베푸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래성을 구현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자비 자체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인 하느님 모상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살아내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사랑을 사는 길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삶은 우리의 본래성을 드러내는 길이며 이를 통해 오늘날 총체적으로 우리 삶에 어그러진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명동성당 주변에 모여든 것은 단지 김 추기경님을 뵙기 위해서만도 아니고, 이 사회에 참된 지도자의 부재로 인한 갈증에서만도 아닐 것이다. 김추기경님 안에서 그간 잊고 살아온 우리 자신의 본래성을 보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만나고 싶었던 그리움이 우리의 발길을 명동성당으로 향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분의 모습 안에서 우리가 지닌 본래 모습을, 그분의 삶 안에서 우리가 닦아야 할 수행의 길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본래성을 깊이 자각하게 되고 그 자각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자비행으로 꽃피워간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관계 영성인 것이다.
나오면서
지난 1월에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국제세미나에 참석차 이스라엘에 다녀왔다. 세미나 중 예루살렘의 가톨릭 묘지에 묻혀있는 오스카 쉰들러의 묘지를 참배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곳에 마침 쉰들러 리스트에 있던 두 분이 자리를 함께 해 주셨다.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쉰들러 리스트에 두 분의 이름이 있었다. 몬더러 나첨(Monderer Nachum)와 그의 아내 월훼일러 유제니아 (Wohlfeiler Eugenia)가 바로 그 분들이었다. 나첨은 오스카 쉰들러 무덤 앞에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다음 회고록을 낭송하셨다.
"내 삶을 구해준 분이 여기 쉬고 계신다. 나만이 아니라 나의 아내인 유제니아도...그는 우리를 구제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중매인이기도 했다.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60년전 그의 공장에서였다. 그가 1300명의 다른 유대인을 브런리즈 캠프(brunnliz camp)에서 구출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6년전에도 우리는 외국 교육자 구룹과 함께 여기에 섰다. 바로 그날은 우리의 결혼 50주년을 기념한 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 10명도 초대해 그들에게 소개했다. 지금 우리는 자유인이다. 우리 두 사람이 지금은 10명이 되었다. 쉰들러 리스트에는 130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쉰들러는 1300명만 살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 아니 유대인의 미래를 살린 것이다.
오스카 쉰들러 한 사람의 자비행은 많은 사람의 목숨이 구했고 유대인들의 후손에게로 이어지는 역사를 낳았다.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이들은 죽은 후에도 우리네 가슴 한 가운데에 계속 살아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 할 본래 모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