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남곡추천 0조회 1420.06.18 05:00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 진보와 자유에 대한 근본적 통찰
나는 과거의 진보가 사회적‧ 물적‧ 제도적 진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바탕이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서 물질적 부가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절차나 제도로서 뿌리를 내린 사회에서는 ‘인간 자체의 진보’ 즉 ‘의식‧문화의 진보’가 사회적 진보를 견인하는 시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슨 ‘의식(마음)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류(流)의 사고방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대적 비중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사구시적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중심민주주의는 근대에서 지금까지 대세(大勢)다.
그 모순에 대항해서 사회주의가 출현했지만, 실패했다.
개인의 해방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해방은 자기 이익추구의 자유가 핵심으로 된다.
이른바 자기중심적인 소인(小人)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력의 근원이다.
관념적이고 이중적이며 전근대사회의 지배논리로 작동한 허위의식인 이른바 군자(君子)를 부정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소인(小人)의 질서다.
자기중심성과 이익추구를 보통 사람의 속성으로 인정하고, 침범을 막는 규범과 계약 등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신의 고도한 행위능력 때문에 자신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설 것이 요청된다.
핵전쟁의 위험과 기후 환경의 격변 등이 그 절박함을 나타낸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질이 다른 자유를 추구하는 이른바 군자(君子)의 보편적 출현을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다.
이제는 개개인이 일상의 삶 속에서 아마도 ‘자기 혁명’을 하는 과정이 더 중요한 시대인지 모르겠다.
목숨을 거는 비장한 결단이 아니라, 자기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기쁨이 이 혁명의 동력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거룩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실현을 위한 즐거운 과정으로 되는 것이 이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어떤 성인(聖人)보다도 공자의 사상은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상상력과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과학적으로 인간의 현실, 특히 의식(意識)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간이 진화할 목표를 군자(君子)라는 인간상(人間像)으로 표현하였다.
군자(君子)라는 용어는 원래는 특정한 지배적 신분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공자는 이 말을 일정한 인격과 정신적 성숙을 기준으로 신분계층과 관계없이 사용하였다.
이 자체가 엄격한 신분계급사회에서는 조용하면서 평화적인 혁명이었다.
그러나 소인(小人)과 군자(君子)라는 단어는 그 동안의 여러 왜곡과 오해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현대 감각에 맞는 용어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자주적 인간
<공자(孔子) 말하기를,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1-1)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주체적’ ‘자주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자립(自立)의 의미가 중요하게 포함된다.
남에게 굴종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당당히 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집이 강하거나 자기주장을 여간해서 꺾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는 것은 가장 범하기 쉬운 착각이다.
이런 사람은 누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거나,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화(怒)가 나는 경우가 많다.
노(怒)는 노예(奴隸)의 마음(心)이 합성된 단어다.
다른 사람의 생각 때문에 자신이 마음의 평정을 잃고 심하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자주성을 뺏기는 상태다.
2) 단정(斷定)하지 않는 인간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4편)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인문운동이 최전선(最前線)이 되는 것도 이것이 최대의 테마로 되기 때문이다.
단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면 자유롭고, 진취적이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고, 구동존이(求同存異)하는 사람으로 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단정은 도덕적으로 하자(瑕疵)가 있는 사고방식이라기보다, 전혀 근거 없는 반(反)과학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연재 첫 장에서 상세히 이야기한바가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사귀지 말며, 허물이 있거든 거리낌 없이 고칠 일이다.”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1편)
무겁다는 것은 중심(重心)이 잡혀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그래야 권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忠)과 신(信)을 바탕으로 한다. 이른바 관료주의나 권력을 앞세운 권위주의(權威主義)와는 질이 다른 것이다.
학즉불고(學則不固)야말로 진정한 권위의 바로미터다.
‘배워도 완고하지 않는 상태’ 더 나아가 ‘탐구할수록 더 유연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언제든 잘못이 있으면 기탄없이 고칠 수 있는 자유인이며,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풍요로운 인간이며, 흔들리지 않음과 유연함이 조화된 진취적인 인간인 것이다.
3) 기쁨이 동력인 인간
<공자(孔子) 말하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1편)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6편)
배우는 것과 그것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기쁨(說)이며, 진실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즐거움(樂)이며,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심 이 모두가 기쁨이 바탕인 것이다.
군자(君子)를 움직이게 하는 바탕은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기쁨인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작가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연상케 한다.
“소명(召命)이란 자기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허기(虛飢)가 만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 특히 현대의 사회운동의 동력(動力)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감이나 변치 않는 강고한 신념체계’가 아니라 내면의 기쁨이라야 지속적이고 진실할 수 있다.
아마도 지금 많은 NGO 단체나 시민운동 등에서 활동가는 보이지 않고 실무자만 보인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운동의 동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나타내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된다.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 안회를 평한 다음 구절은 이 시대의 진취적 운동가나 참다운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핵심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공자 말하기를, “어질구나, 회(回)여! 한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산다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回)는 그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구나!
어질구나, 회여!“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이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4) 보편적 인간-편을 가르지 않는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子曰 君子 不器 (2편)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보편적이되 편벽하지 않고, 소인은 편벽하여 보편적이지 않다.”>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2편)
그릇(器)은 고정되어 있어서 용도가 결정되어 있다. 사람이 어떤 한가지로 고정되어 기물적(器物的) 인간으로 되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오히려 어떤 그릇도 채울 수 있는 무고정(無固定)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위정(爲政)과 관련해서 보면 만일 어떤 정치가나 혁명가가 기물적 인간으로 된다면 그 폐해는 엄청날 것이다.
시스템을 경시하거나 실무적 능력을 무시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그 완고함이나 배타성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불기(不器)는 주이불비(周而不比)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다.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려는 보통의 경향을 넘어설 때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있고, 개인의 이익이 높은 가치로 보호되는 현대에서 이러한 인간상을 지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의 생명력이 여러 가지로 억압되던 시대에는 그 개인의 생명력을 해방하는 것이 가장 큰 테마로 된다. 따라서 오늘 날의 개인주의는 그런 점에서 인간과 사회의 진화에 필수적인 과정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과 같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되면 오히려 생명력을 훼손하는 결과로 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반(反)하게 된다.
개인주의를 경과하고 있는 현대는 바로 이런 점에서 공자의 시대보다도 훨씬 이 주이불비(周而不比)라는 테마와 직면하고 있다고 본다.
누구하고나 어떤 세력과도 타협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며, 오히려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이익 또는 진리가 어디 있는가를 끝까지 추구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지만 태연하지 못하다.
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 >(13-26)
비교감, 우열감, 상하감으로부터 자유로우면 태이불교(泰而不驕)가 된다. 그러나 마음 속에 이것들이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교만(驕慢)은 비굴(卑屈)의 쌍둥이 형제인 것이다.
특히 경쟁과 비교, 우열을 수직화하는 사회가 넘어서어야할 인간화의 가장 큰 테마다.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는다.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15-21)
군자의 사회성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다.
군자의 긍지는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소인의 자만심은 아집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집과 아집이 만나면 다투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당당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집이 없는 사람을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가장 당당한 사람이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옳다’라는 고정된 견해가 없이 ‘무엇이 진리인가’를 끝까지 구명하려 는 태도는 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편을 가르지 않는다.
소인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파당을 만든다.
지금은 같은 편이지만 상대편이 사라지면 같은 편 안에서 다시 편이 갈라진다.
작게는 개별적 삶에서 크게는 국가나 세계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런 삶이 반복되어 왔다.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끊임없이 다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실제로 자신은 그 길과는 반대로 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조건이나 환경 탓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어 왔지만 그런 상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일까에 대해 공자의 이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 바탕에는 공자의 “자신과 다른 것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 攻乎異端 斯害也已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긍이부쟁矜而不爭은 태이불교泰而不驕와 통하고, 군이부당群而不黨은 주이불비周而不比와 통한다.
5)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4편)
< 군자는 위로 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달한다 君子 上達 小人 下達>
사람이 동물로부터 진화하여 만물의 영장으로 된 것은 그 지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거대한 문명을 일으키고 반면에 인류존속 그 자체의 위기를 일으키고 있는 그 바탕에는 이 인간의 지능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인간의 지능의 사용 방향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존속과 번영 그리고 자연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을 가장 좋게 수행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지능을 통해 자연을 이용하여 물질적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스스로의 제도를 개혁하여 자유나 평등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자연과의 모순이나 사회적, 국가적 갈등이 그 가공할 능력 때문에 엄청난 위험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인간의 능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능력 즉 인간의 지능을 더욱 고도화(高度化)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의 외부 즉 자연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사용한 그 능력과 조화되도록 스스로의 내부를 변혁하는데 그 지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인간의 출현 자체가 하나의 비약이었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비약, 즉 의식혁명을 예상하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실현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과거 성현이라 알려진 분들은 모두 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를 그 근본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하신 분들이다.
공자도 그 한 분이시다.
공자가 제시한 군자(君子)라는 인간상은 바로 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의 전형이다.
인간이 그 지능의 사용을 어떤 방향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가 결정된다.
군자(君子)는 상달(上達)하고 소인(小人)은 하달(下達)한다는 이 구절은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군자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려는 지향을 뚜렷이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자기중심성 속에 머무르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른 동물의 자기중심성과는 다르게 인간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주위에 더 많은 피해를 주게 된다. 이것이 소인의 하달(下達)이다.
이 피해의 정도는 그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다. 공자 당시보다도 지금의 폐해는 더 심각한 것이다. 이제는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군자의 상달(上達)은 인류 진화의 방향을 보여준다. 이제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인류가 소인으로부터 군자로 진화하지 않으면 그 자신의 존속마저 위협받게 되는 시대로 된 것이다.
(佛家에서는 중생에서 보살로의 진화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공자를 비롯한 성인이 제시한 길이 인류보편의 과제로 되고 있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6) 사이좋음의 바탕
<군자는 화합하되 같게 하려 아니하고, 소인은 같게 하려 하되 화합하지 못한다.”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13편)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요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의 하나이다.
군자와 소인을 나누는 말 중에 대표적인 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군자는 사람의 실상에 조응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아집에 바탕을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성격, 지능 , 취향, 환경 등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여 자기중심적으로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실상에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경우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를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자기를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워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상에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소인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부동(不同)을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 같아도 막상 그런 경우를 당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부동(不同)을 마음 속으로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억지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사이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아집이 없으면 사람과 사이가 좋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에게나 좋아함을 받는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이쪽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궁극적인 화합의 길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불선자(不善者)는 미워하게 된다.
공자도 이것을 지적한다. 즉 그 화(和)가 불선(不善)을 받아들이거나 타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자공이 묻기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한다면 어떻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한 자가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자가 싫어하는 것만 못하다”
子貢 問曰 鄕人皆好之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7)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겸허한 인간
<공자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아니한 사람을 보면 나 자신을 스스로 살펴야 한다."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4-17)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쉬운 말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잘 안된다. 어진 사람을 보면 흠이 없나 찾으려하고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비난하는 마음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배울 스승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공자의 이 말을 깊이 새겨볼 만하다.
배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고함이나 오만이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얕보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인간으로서 진보는 어렵다.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았을 때 비난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쉽지만 잘 보면 그 싫어하는 요소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內自省)고 한 것이다.
자신 안에 그런 요소가 없다면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심정과는 다른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서 용인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남이 잘 못하는 것을 보면 내 안에도 그런 요소가 없나 살펴보는 삶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길인 것이다.
<공자 말하기를, “그 직위에 있지 아니하면 그 정무를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증자 말하기를, “군자는 생각함이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曾子曰 君子 思不出其位>
이 말들도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에서 정상적인 비판이나 언로(言路)를 막으려는 사람들에게 오용될 소지는 있지만, 그 본 뜻은 먼저 자신의 일에 충심(忠心)을 다하라는 의미로 읽히면 좋을 것 같다.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이 옳은 것처럼 착각하는 얍삭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8) 꾸준히 진화하는 인간
<공자 말하기를,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뜻이 섰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함이 없게 되었고, 쉰 살에 분수를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그대로 들리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2-4)
자율적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데 이렇게도 성숙의 단계를 밝히고 있는 성현이 있었을까 하는 감동을 맛본다.
열 다섯이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다.
스스로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세우기 시작할 나이다.
선진국의 경우는 이 때부터 본인들이 선택하기 시작한다.
서른이면 자립하는 나이다.
경제적 자립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성숙함이 있다.
그리고 50이면 자신의 분수를 아는 나이다.
졸저(拙著)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에서는 지천명을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로 말하였는데, 그 후 논어를 더 자주 접하고, 인문운동의 도구로 많이 활용하다보니까, 이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자 사상의 바탕을 볼 때, ‘진리를 알았다’라는 해석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분수(또는 소명)를 깨달았다라고 보는 것이 공자의 뜻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순(耳順)은 아집을 넘어서는 것이다.
누구의 어떤 말도 들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말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단계가 되면 자유인으로서 인격의 완성을 이처럼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극대화하는 풍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멋대로의 세계'로 되는 경우가 많아 결국 다른 사람과 부딪치게 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만나게 되면 심한 부자유를 느끼게 되어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멀게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욕구의 질이 바뀌는 것이다.
대체로 40대까지는 자신이 자립하고 자신을 확립하는 시기라면, 즉 튼실해지는 시기라면 50부터는 부드러워지는 시기로 보인다.
‘자립’ ‘일관성’과 ‘유연함’이 한 인격 속에서 어떤 단계를 거쳐 성숙하게 조화되는가에 대한 모범을 보이는 것 같다.
결코 옛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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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대하여
남곡추천 0조회 46818.11.19 10:37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오래 전에 썼던 글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보에 대하여(1)
진보는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고, 수 없이 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지만, 인류는 ‘자유 확대’의 길을 걸어 왔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자연계의 제약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자유’ ‘억압과 착취,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사회적 자유’ ‘의식을 가진 고등생명체인 인간만이 갖는 관념의 부자유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는 관념계의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인류는 진보의 길을 걸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말하는 ‘진보의 위기’나 ‘보수의 위기’ 등은 정체성이 애매한 현실 정치권력의 향배에 관한 것일 뿐이다.
진보든 보수든 그것이 위기라면 사실이 아니라 관념에 지배되는 ‘낡은 것’의 위기일 뿐이다.
지금은 좋든 싫든 세계화의 시대다.
자국 안의 모순이 세계의 모순과 점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간다.
전쟁, 양극화, 지구생태계의 위기 등 현상들 배경의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인간의 고도한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인 의식 사이의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 확대를 향한 진화의 길에서 인간의 지적능력은 눈부시게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자연의 법칙들을 이해하고,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적 자유를 획득하는데서, 또 사회적 모순을 이해하고 사회적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제도를 진척시키는데 있어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왔는데, 그러한 능력들이 자기중심적 의식과 결합하고 그것을 넘어서지 못함으로서 지금의 위기를 낳고 있거나 오래된 모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인류의 종(種)적 위기를 배수진으로 하면서 이제 ‘관념계의 자유(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를 인간 진보의 최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지점까지 역사가 나아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능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의식체계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부자유의 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성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유 욕구를 신장하는 길이어야 진정한 것이다.
즉 즐거워서 자발적으로 그 변혁을 이루어가는 것이 미래 혁명의 핵심이다.
물론 국가간 모순이나 계급모순 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모순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과거와는 전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진보적 노력과 인간의 의식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해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내가 젊어서 운동을 할 때는 ‘조사 없이는 발언권 없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실사구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의 운동가들에게는 ‘생활 없이는 발언권 없다’라는 말을 더 보태고 싶다.
새로운 세상을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100명에 한 명 만 있어도 그것은 엄청난 것이다. 그들은 주위로부터 신뢰를 받고, 주위를 사랑하며 주위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전략도 넘어서는 최고의 혁명 전략이다. 아니 혁명 그 자체다.
요즘은 연습장이 넓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협동 생산이나 단순소박한 생태적 삶의 실천, 마을공동체 운동, 기부와 자원봉사 등은 대단히 좋은 연습장으로 되고 있다.
나는 기부와 자원봉사를 자발적인 ‘풀어놓음’으로 부르고 싶다. 풀어놓음으로서 자타가 함께 풍성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단결과 투쟁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연습의 장이 되어야 진실한 것이다.
노동조합 특히 대규모 노동조합이나 공공 노조가 기득권에 머무르거나 조합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자리 나누기 ‧ 노동시간 단축 · 임금이나 연금의 격차해소 등을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도덕성을 발현함으로서 자본과 정부로 하여금 비정규직 문제와 실업문제를 해결하도록 강하게 견인해낼 수 있어야 한다.
투쟁 따로, 새로운 사회 만들기 따로가 아니라, 이것을 큰 하나로 통합하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부자도 즐겁게 당원이 되고 싶어하는 진보정당이 출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계속)
완고한 진보는 형용모순이다 2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선 ‘시대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선진화’와 ‘인간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화란 물신(物神)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의미와 동물계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존재로 인간이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화의 내용이 인간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화의 정치’와 ‘시장의 인간화’ 그리고 ‘의식문화혁명’이 서로 삼투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요즘 대선 국면에서 나오는 통합, 연정, 경제민주화, 복지, 정의 등의 잇슈들은 사실 이러한 과정의 일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진보세력이 이런 테마들을 앞에서 견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의 세계와도 맞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도 맞지 않는 과거의 틀들로부터
한 쪽 발만 벗어나고, 다른 발은 과거의 틀에 묶여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을 무슨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심정이 되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을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특정의 이데올로기나 정파의 입장을 진보라고 혼동해 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진보는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고정된 틀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한 때 어떤 이데올로기나 실천이 유효했다면 그 시대는 그것이 진보다. 그러나 시대와 사회가 바뀌었는데도 낡은 생각이나 정서에 묶여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보가 아닌 것이다.
요즘 ‘완고한 진보’라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말은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완고는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의(公義)는 완고하지 않다. 사의(私意)나 사욕(私慾)이 끼어들 때 완고하게 된다.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성숙도가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능력이나 덕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새로운 시대의 진보를 위하여 몇가지 말씀을 드려볼까 한다.
첫째는 폭력혁명에 대한 미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요즘 공개적으로 폭력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미련이 이념 뿐만 아니라 정서 속에 남아 있는 경우는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도 또 다른 단정(斷定)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새로운 세계는 ‘지적 혁명’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급격하고, 폭력적인 혁명은 아니지만, 인간의 질적 진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혁명의 주체는 ‘지식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인은 과거 시대에 회색분자로 비아냥받던 계급으로서의 인텔리겐챠가 아닌 공인(公人)을 말한다.
‘세계가 즉 자연과 인간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 그리하여 독점이나 자기의 폭을 넓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싶어지는 인간’ ‘자신의 생각은 사실과는 별개라는 것, 따라서 내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이 진정한 지식인입니다.
나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나 계급 · 민족 속에서 이런 지식인 즉 새로운 시대의 혁명 주체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아마도 이런 주체들이 그 생산과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제도나 시스템을 바꾸거나 새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있는 현상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둘째는 ‘민주집중제’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부르죠아 민주주의의 위선과 기만에 반대해서, 실질적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위해서 민주집중제가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었던 때도 있었고, 아직도 이념이나 정서 속에 또는 습관이나 관행 속에 남아 있는 것도 같다.
민주집중제는 ‘민주’보다는 ‘집중’에 방점이 찍히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것이다. 즉 독재를 낳게 되어 있다.
부르죠아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달성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대단히 높은 성과다. 이것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진보적 입장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시대였다면, 이런 말은 대단히 반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계속)
새로운 진보정당 3.
더 나아가 지금과 같은 ‘누가 옳은가’하고 토론해서 결국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런 방식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진보가 선두에 서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연찬해서 가급적 전체가 일치한 견해에 도달하는 방식의 ‘연찬민주주의’(적절한 명칭이 없어서 제 임의로 사용합니다. 화백민주주의라고 하면 그 내용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우선 진보적인 정당 안에서 이런 시도를 하고 이것이 문화로 자리잡으면, 이것은 민주주의 역사에 획기적인 일로 될 것이다.
이것은 우성(優性) 인자이기 때문에 이런 정당이라면 처음에는 비록 소수당일지 몰라도 정치를 ‘권력쟁탈의 장으로부터 사람의 자유를 확대하는 조화의 예술로’바꾸게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요즘 아무리 ‘통합’과 ‘상생’을 이야기해도 이런 내용이 없으면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비록 소수당이라도 ‘조화의 정치’를 선도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무슨 ‘조화’나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굴종이나 예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록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변하지만, 미래 사회의 주체라는 주인의식으로 약자의식이나 피해자의식을 넘어서는 것이 진보정당의 도덕적 힘이 되어야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억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러다보면 어느덧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정당으로 될 것이다.
셋째 계급투쟁론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야 한다.
계급 발생을 비롯한 계급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원시공동체 사회를 지나면서 계급제 사회로 되고,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그 투쟁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되어서 역사가 진보해 온 것도 사실의 한 면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것을 자본주의의 초기에 역사발전의 일반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이 마르크스다.
그 이후 유물사관과 그에 바탕을 둔 계급투쟁론이 사회진보의 이론적 실천적 지침으로 되어 왔다. 물론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의 사상이론이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 근본 이론은 오랫동안 사회변혁의 이론적 실천적 기둥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계급이 있고, 투쟁이 있다. 또 그 사회의 계급구조나 제도가 사람들의 의식(意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이라거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단정(斷定)하는 것으로 과학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회의 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기 특히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나 그것이 사회변혁의 주된 요인으로 되는 시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다수 민중이 포섭되어 진정한 자주성과 자유로운 정신이 사회구조에 의해 막혀 있을 때는 그것을 투쟁에 의해서 전복하는 것이 진보의 목표가 되고, 실제로 그런 시기도 거쳤다.
그러나 마지막 계급투쟁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한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하면서 나는 그러한 사상이론들이 검증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으로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옳지도 않고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이루고 싶어하는 진보주의자들이라면, 낡은 사상이론의 주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내가 주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는 여러 가지 정서나 욕망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보편화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나 자본가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세계 인류의 지금의 보편적 의식이나 보편적 욕구에 부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현실에 맞지 않을까?
따라서 지금의 세계 변혁을 위해서는 의식(意識)의 선도성(先導性)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목표를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계급의 해방’에서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으로 높여 잡아야 한다.
물론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을 해방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은 ‘물신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목표에 부분으로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은 그 자체로 사회적 균형을 잡아간다는 점에서 진보적이지만, 물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동력으로는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만 해도 자영업자의 수가 600만에 가깝다고 듣고 있다.
‘계급투쟁이 곧 진보다’라고 하는 인식이나 정서에서 벗어날 때, 사실의 세계가 보여 오지 않을까. 그럴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보운동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계급조화론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맞다고 본다.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실 분들도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계급적 모순을 호도하여 투쟁을 약화시키고 지배계급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음모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라면 자본가까지도 견인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과 도덕적 힘을 가지고 계급조화론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보가 목표로 할 수 있는 사회가 현실적으로 무계급사회가 아니고 계급조화사회이기 때문이다. 끌려가는 조화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조화인 것이다. 조화라고 해서 투쟁을 배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 계급 특히 대기업의 탐욕과 독점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고 변화를 유도하는 입법과 제도적 장치를 위해서 투쟁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계급조화론은 우리 시대의 경제정의(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바탕에 설 때 진보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새로운 사회의 비전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계급조화론을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 이니시어티브를 가지고, 또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길이 무계급사회, 무소유사회라고 하는 인류의 이상향을 향한 현실적 도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궤변이라고 또는 백일몽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나 자신의 부족한 경험과 사색이지만 가장 진지한 자세로, 또 한국의 진보운동에 대한 충심으로 되는 애정을 가지고 이런 말씀을 드린다.
내가 옳다는 생각은 없지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의 지평을 열어가시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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