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인간과 평화
: 레비나스의 종교 이해와 과정신학의 인간 실존 방식을 중심으로
김동근(성공회대학교 박사과정) 1. 서론
평화를 말하는 데에 있어서, 특히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말하는 평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까 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종교가 말하는 평화는 무 엇일까 현실의. 종교들은 각각의 가르침과 수행 혹은, 교리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으로, 사람들을 교화시 킴으로써 자기 존재를 세계 속에 위치시키고 있다 위험하게. 단순화하는 시도일 수도 있지만, 종교란 개별자 들의 타자성을 특정한 하나의 체계로 환원하는 계기요, 따라서 그 본성이 ‘자기 확장적 이라는’ 것이다. 만약 평화가 다양성들이, 공존할 수 있는 다문화주의적 의미들도 포함한다고 본다면 이러한, ‘종교 의’ 실존방식 위 에서 ‘평화 를’ 말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전체성의 확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평화를 위협하는 것을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이라고 보면서 시작한다면 폭력을, 추동하는 원인을 팽창하 려는 속성을 지닌 전체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전체성의 팽창과 함께 떠오르는 단어들은 독단과 독선이라는 날선 태도들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다름 아닌 최종적으로 승인되고 완결된 지식이라는 토대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눈빛이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타자성이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있는 계기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그대 로 둠으로써, 알아서 생존하라는 식의 자유로운 경쟁의 장(場)을 마련해주고, 무책임의 장막 뒤로 숨는 것도 큰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을 지시해야 하며 어떻게, 평화는 가능해질 수 있을까.
종교 내에서 평화는 어떻게 발견될 수 있을까 본, 글에서는 우선 종교라는 개념을 지금껏 통념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레비나스가. , 이해하는 종교에 관해 언 급함으로써 그가, 제시하는 종교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토대 위에서 상상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인간을 기존 에 통념적으로 이해되는 종교적 인간의 모습과 비교함으로써 평화의, 시작점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2. 레비나스의 종교적 인간
‘종교가 형성하고 제시하는 인간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종교라는 전제를 가지고 평화를 논하기 위해 던지 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이 이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평화라는 것은 인류 각각의 존재자들의 양 태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개념이요 인류는, 각각의 전통과 관습적 토대 위해서 형성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한다. 『전체성과 무한』(1961)의 1부(동일자와 타
자 의) 「분리와 대화 라는」 장에서 그는 종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존재와 초월적 존재 사이의 관계, 어떤 개념적 공통성이나 전체 성에도 이르지 않는 관계 관계- 없는 관계 를- 종교라고 부르겠다.”1)
레비나스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토대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사실. , 이 대목은 그가 ‘종교 에’ 관한 논의를 하면서,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부분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이해를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우 기 위해 자신의 ‘종교 이해를’ 도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 안에 존재하는 무한의 관념 즉, 무한을 상상 할 수 있는 능력에서 ‘무한 을’ 그 자체로 남겨두려고 한다. 즉, ‘나 에’ 의해 결코 포섭될 수 없는 ‘무한 을’ 묘사 하려 했던 것이다.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를, 시도하며 분석하는, ‘나 는’ ‘동일자’(the same)로써 존재의, 지속을 위해 세계를 파 악하고 통합한다. 이처럼 동일자가 자기의 생존을 확인하며 세계의 여러 대상들을 통합하는 과정을 ‘전체화 의 과정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 ‘전체성 은’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터전인 셈이다 따라서. ‘나 는’ 전체화하는 작 업을 통해 세계 내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사유에서 이러한 전체화 과정은 끊임없이 의심에 부쳐져야만 한다. ‘무한 의’ 관념은 ‘나 로부터’ 분리되어 결코 내게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나의 전체화 과정은 의심에 부쳐지고, 계속적으로 방해받는다.
“만약 전체성이 구성될 수 없다면, 그것은 무한이 그 자신을 통합되도록 내버려 두 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화를 방해하는 것은 자아의 불충분함이 아니라 타인의 무한이 다.”2)
‘내가 가닿을 수 없는 무한 이라는’ 생각은 환원불가능한 관계를 지시하며, 따라서 내가 세계 속의 대상들을 포착하여 확정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여. 타자에 대한 식민화 관계는 애초에 불가능해진 다 이처럼. 레비나스는 이해와 포섭을 기반으로 한 관계 방식이 아닌 서로, 다른 두 항이 타자를, 자기 자신으 로 환원할 수 없지만 깨어지지, 않는 관계의 가능성을 ‘종교 의’ 구조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는 서구의 주체중심철학을 탈피하려고 하였다.
“종교에서는 전체의 불가능성 무한의- 관념 에도- 불구하고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 계가 지속되는데, 이러한 종교가 궁극적 구조다.”3)
레비나스가 ‘종교 를’ 어느 맥락에서 사유했든지 간에 그를,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종교 는’ , 우리가 ‘종교’ 에 대하여 기존에 지니고 있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전승된 도그마를 가지고 있으며, 관리 감독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집단으로써 종교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종교는 ‘절대적인 분리 로써’ 관계를 지시한다. 즉 종교는 가닿고자, , 하는 의존 대상에 결코 가닿을 수 없음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대상과. 맺는 관계 는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에 의해 포착될 수 없는 대상과의 관계가 존재하는데, 레비나스는 이러한 관계를 “종교 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종교 에’ 대한 이해가 지닌 함의는 무엇일까. 여기에
1)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김도형 외 역, 그린비, 2018, p108.
2) Ibid., p107.
3) Ibid., p108.
는 종결된 도그마도 없고, 관리 감독의 체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틈새 가’ 존 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폐쇄성이. 아닌 개방성을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함은, 기존의 ‘종교 에’ 대한 이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종교는 관습과 문화의 산물로써, 구심적 활동을 수행한다. 달리 말해서 자기 주변에 산재 된 세계 내 대상들을 한데 끌어 모으는 힘을 발휘하는 핵으로써 종교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이 가능한 이유는, ‘종교 가’ 초월적 존재를 포섭하고 있다는 ‘믿음 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 다.
고대로부터 초월적 존재와 물질세계 사이의 관계는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와 자 연 재해로 인한 실제적인 위협은 신의 진노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초월적 존재는 민족들의 신으로 이해되기 도 한다. 구약성서를 보면, 전쟁 전에 승리를 기원하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많은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족. 간 전쟁은 민족 신들의 전쟁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시리아 왕의 신하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그들의 신은 산신입니다. 이것이 이번에
우리가 패전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평지에서 싸우면 반드시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4)
열왕기상 20장 23절은 각 민족을 대표하는 신이 전쟁에 함께 출전한다는 당시의 통념을 보여준다. 이 외에 도 쉽게 우리는 고대인들이 유한한 세계와 무한한 세계의 존재를 어떻게 연결지어 생각했는지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종교 의’ 특정한 부분을 보여주는데 무한의, 초월적 존재와 이 세상의 분리된 관계 즉, 절대 적인 분리로 인해서 전체성이 방해받는 관계가 아닌, 이 세상이 초월적 존재와 결탁함으로써 일종의 공모관 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종교 의’ 한 측면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가. , 수행하는 것은 초월과, 이 세계를 하나의 전체성안에서 통합해냄으로써 끊임없이, 타자들을 포섭하고 자기 범주 안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 는, ‘자기 확장적 운동을- ’ 자기 성질로 삼고 외연을 넓혀가는 운동을 지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종교의 에고이즘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교 전통 내 자기 부정성 역시 부정할 수 없 다. 중세 수도원 운동을 비롯하여, 철저하게 자기 부인의 삶을 통해 많은 존경을 받는 성인들도 역사상 존재 해왔으며 귀감적인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과 성인들의 삶 또한 엄격하고도 냉철하게 바라본다면, 그 근본적 동기는 초월자를 향 한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향으로부터 새로운 성찰과 변혁의 가능성이 피어난다. 즉, 신을 유한한 자아 속에서 발견하려는 욕망이, 달리 말해서 초월자를 나의 전체성으로 환원하려는 욕망이, 과거의 역사 속에서 설립된 체계들, 즉 신이 보증한다는 믿음 하에 설립된 기존의 체계들을 허물기도 하고, 새로운 삶의 모델을 생산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변혁의 가능성이 ‘초월자를 향한 욕망 을’ 통해서, 즉, 무한의 영역을 유한의 영역 안으로 환원하려는 에고이즘적 현상을 통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자기 확장적 운동- ’ 자체를 달리, 표현하자면 에고이즘적 운동을 깨뜨리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에고이즘의, 사태 속에서 지속적인 ‘자기 부정 의- ’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로 돌아가서 논의를 이어가보면, 에고이즘적 사태는 결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가치중립적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에고이즘 을’ 존재의 근본 사태로 본다.5) 자
4) 열왕기상 20:23(공동번역본)
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바라보는 자아와 종교의 존재방식은 에고이즘의 원리 속에서 비슷하게 포개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레비나스에 의하면, 에고이즘적 운동은 타자를 지향하면서 시작되지만, 거기에는 타자 를 포섭하고 이해하는 방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타자에 의존된 자기를 확인할 수도 있다 레비나스에게. ‘타자 는’ 나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나와 관계 맺는 ‘타자’ 로 인해서 나는, 나의 이해의 범주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타자 를’ 확인하고, ‘타자 와’ 나 사이의 절대적인 거 리를 확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포섭하려는 나의 합리성과 이성적 사유는 의심에 부쳐진다.
레비나스에게서 에고이즘적 운동은 중립적인 사태다. 오히려 에고이즘적 운동은, 포섭될 수 없는 ‘타자 에’ 의해 틀어지고 휘어진다는 것을 내 앞에 현현하는 타자로 인해서 나는 끊임없이 경험한다. 이러한 사실을 인 식할 때, 에고이즘적 운동은 ‘자기 강화 가- ’ 아닌, ‘자기 부정 의- ’ 계기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절대적인 분리로 인해서 전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초월자와 존재자의 관계가 종교라는 그의 생각은, ‘타자 에게 빚지고 있는 의존된( ) 존재자 와’ ‘타자를 자신의 이해의 틀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자 를’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존재자는 불현 듯 등장하는 타자를 자신의 유한한 사고 내로 환원할 권리가 없다. 그의 에고 이즘적 사태는 끊임없이 그에게 ‘자기 부정 의- ’ 계기를 즉, 자기를 변화시켜야만 하는 숙명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종교는, 에고이즘의 자기 확장적- 성격을,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운동으로 설정하고, 실행
을 촉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이. 레비나스에게서 발견되는 종교와 인간에 대한 생각들이다.
3. 과정신학의 종교적 인간 이해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인간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하고자 했다. 레비나스의 종교 이해를 통해 알 수 있는 인간은, 1) 초월자와의 관계에 있어 ‘절대적으로 분리된 사태 에’ 놓여서 초월자를, 자기의 전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있다 따라서. 2) ‘매일 새로운 사건과 낯섦에로 개방된,’ 즉 ‘절대적인 이질성의 침 입 에’ 저항할 수 없는 상태 속에서 ‘환대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상상하게 한다. 과정신학은, 위에서 살펴 본 레비나스의 종교적 인간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창발 개념을 통해 본 인간에서 발견될 수 있다.
과정신학에서 세계의 근거는 불변하는 실재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을 수행한다. 그리 고 세계는 홀로 창조의 과정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최초의 지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6) 하느님은 세계 운동의 최초의 지향으로서, 방향성을 제시함으로써 끊임없이 세계의 변화과정에 개입한다 즉 초월적. , 존재와 물질 세계가 상호 작용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이 과정신학에서 말 하는 창조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정 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을 거부한다.”7)
5)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김도형 외 역, 그린비, 2018, p71.
6) 존 B. 캅, 데이빗 R. 그리핀, 『캅과 그리핀의 과정신학』, 이경호 역, 이문, 2012, p66.
7) Ibid., p100.
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느님을 절대적인 통제자로 보는 학설의 핵심 이기” 때문이라고 그리핀은 말한다. ) 그 는 “대신에, 과정 신학은 혼돈으로부터의 창조 학설 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창조를 다르게 이해하는 과정 신학의 관점은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이 주는 통찰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지닌 은유 적 통찰은 전체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존재의 출현 즉, 타자가 출현할 수 있는 틈새를 이 세계 가운데 위치해 두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정. , 사상에서 드러나는 창조론은 이러한 전복적인 가능성을 차 단하는 것처럼 보여서 매우 아쉽게 느껴진다 이와. 같은 창조론에도 불구하고 과정, 신학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매순간 시공간으로 파고드는 하느님의 개입을 열어두었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운명적으로 놓여있다. 인간은 과거 의 기억과 씨름하고 그것을, 해석하며 미래로 전진한다 기억은. 인간이 자기를 인식할 때에 제일 근본적인 역 할을 하며 나아가,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반으로써 존재한다. ) 즉 인간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 혹은 ‘자기 초월성 의- ’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곧 과거의 사건들을 토대로 구성된 기억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 을’ 인간의 근본으로 보는 시각은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을 넘어선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세계에서, 우월성을 지닌 인간은 그, 근본을 하느님이라는 초월적 대상으로부터 문화 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기억 으로’ 옮겨두게 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이데아에 불변하는 실체를 둔 존재가 될 수 없다 아래에. 수하키의 말을 옮겨본다.
“초월적 자아는 자신의 과거에 응하여 그 과거로부터 창발(emergence)한다. 그 새 로 창발한 자아는 따라서 역사성을 지닌 자아로서, 자신이 초월한 바로 그 과거에 의 해 이미 주조된 자아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한에서, 자아의 시간적 본성은 마치 하상(河床)에서 계속하여 형성되는 침강(沈降)처럼 지속적인 층들을 만들 어낸다. … 자아는 역사적으로 구성된다.”10)
과정 신학은 인간에게 고유하고도 숭고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세계와. 더불어 자기초월적 변화의 과정 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질문하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인간 의 삶은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합을 향해 나아가는 기계적 진보의 부속품에 불과한가? 라는 질문이 다. 자기 기반을 마련해주는 기억은, 그저 미래를 향한 계기로 전락함으로써, 개인의 고유성은 상실되는가? 과거는 미래를 위한 자연스러운 계기일 뿐인가? 이렇게 단순하게 보기에 삶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층적이 다 만약. 과거가 진보를 위한 계기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하느님의 타자성은 변증법적 계기 속 에서 포착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타자성은 인간의 정 반 합이라는- - 논리적 전체성에 포획됨으로 써, 진정한 의미의 ‘타자성 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과정 신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과거 와’ ‘기억 을’ 이 해하지 않는다.
수하키는, “우리는 과거에 의해 조건지어지지만 그것에, 의해 제한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 과거는 단 순히 미래를 위한 계기라기보다는, 타자성을 향해 개방된 기반으로써 존재한다. 위에서 인용한 수하키의 언 급 중에서 “자신의 과거에 응하여 그 과거로부터 창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만약. 그것이 ‘지금보다 더 나은 장소 를’ 지시한다면 하느님의, 타자성은 기계적 진보라는 개념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버리고 말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이. , 순수하게 ‘자기의 기억 기반 을( )’ ‘재고하거나 새롭게 바라보는 것 을’ 의미한다면, 창발은 현 재 내가 딛고 선 기반을 의문에 부침으로써 시작될 것이다 수하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기 폐쇄적- (self-contained)”이지 않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각각 개방된 자아이며, 무한과 접촉한 세계 속에 개입되어 있다.”12)
자아에게 다가오는 세계 곧, 자아와 관계하는 세계는 “무한과 접촉한 세계 이다 유한한” . 자기의 기반을 의문 에 부치게 만드는 ‘무엇 이’ 인간 개개인에게 다가오고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 이다.
과정 사상의 인간 이해에 대한 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와 관계 맺고 있는 하느님, 즉 무한으로서의 초 월자가 유한한 세계에로 도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래는 결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지금 현재 의 나의 앞에 출현하여 나의, 기반을 문제 삼으며 변화를 요청한다 이렇게. 내 앞에 도래하는 타자들은, 레비 나스에 의하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이다.13) 그들은 다문화세계속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이며, 다원주의세 계 속에서 존재하는 타자들이며 국가의, 질서와 법적인 보호 테두리 바깥의 존재자들이다. “개방된 자아”로서 우리는 타자에게 응답함으로써, ‘자기 를’ 초월하고, ‘자기-변화 의’ 과정을 겪는다.
과정 신학에서 ‘개방된 자아 가’ 의미하는 바는, “타자에게 개방된 주체 라는” 인간 이미지를 제공한다. 따라 서 이러한 주체는 자기의 손으로 막을 수 없는 ‘타자의 도래 라는’ 숙명 앞에 놓여있다. ‘전적인 다름’, ‘갈등을 유발하는 차이’, ‘이질성’ 등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기의 안전한 기반 을’ 의문에 부치도록 만드는 ‘타자성 은’ , 끊임없이 안정을 추구하는 주체에게 다가오고 주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역설적으로 평화는, 나를 위협하는 타자의 도래 혹은 침입을 향해 열려있는 존재자 개념을 통해서 시작되지 않을까. 손으로 막을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타자의 도래로부터 역설적으로 ‘평화 가’ 가능해 진다는 것 이다. ‘전적인 차이 에’ 대한 개방과 숙연함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서 이, 계기를 ‘자기의 변화 의’ 계기로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구성하는 ‘창발 로’ 나아가는 것 여기에서. 평화는 성립되지 않을까.
4. 결론
전 지구적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교 집단의 행동을 보면서,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해서든 심지어- 그것이 폭력적인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관철 시키려는 태도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고자 타자에 대해서 분명하게 경계선을 긋거나, 성벽을 쌓아올린 다. 여기로부터 폭력이 시작된다. 상술했듯이 에고이즘적 종교 현상은,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교 집 단의 기저에도 흐르고 있으며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과잉된 현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이데 올로기는 신적인 권위 즉, 초월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것을, 자기 집단을 강화하기 위해 활용한다.
이렇게 일그러진 종교 이해는 위에서, 살펴본 바 레비나스의 생각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초월자는 결코 유 한한 존재자에 의해 환원될 수 없으며, 거스를 수 없는 ‘거리 와’ ‘분리 를’ 두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레비 나스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신적인 권위는 현실 세계 내에서 ‘자기 혹은’ ‘자기 집단 의’ 강화를 위
12) Ibid., pp71-72.
13)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김도형 외 역, 그린비, 2018, p104.
해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나 를’ 의문에 부치게 하는 권위인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체계에 의해 포착될 수 없는 초월자가 포착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유한 속에서 인간에 의해 상상된 초월일 뿐이다 따라서. 초월자가 어느 과거 시점에 현현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초 월자가 보증하는 어떠한 상태나 세계를 확정할 수 없다. 단지 초월자는 ‘나 를’ 의문에 부치게 하고, ‘저편에’, ‘여기와는 다르게 를’ 상상할 것을 요청한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초월자의 권위는 에고이즘의 확장이라는 사태의 과잉일 뿐이다 달리. 말해, 진리를 확정 함으로써 경계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을 종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 자신의 향유의 정당성 을 위해 초월자를 자신의 전체성으로 환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 종교는 끊임없는 ‘자기-부정 과’ ‘자기 변화 라는- ’ 수행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평화의 시작은 존재자들이 참된 종교적 주체로 설 때, 비로소 가능해지지 않을까. 타자의 도래를 무관심한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개별 존재자는 변화한다 그리고. 이 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안정 성을 확보해주는 자기의 기반을 허물 수 있는 용기이다 내. 삶에 항상 계시되는 타자성을 환대할 용기가 필요 하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종교 에’ 관한 이해가 제시하는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아가, 사람과 자연 사이에 ‘평화 를’ 가능하게 한다. 완전히 자기를 허물 수 있는,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철저하게 ‘자기 비하적 인- ’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시도될 수 있는 ‘평화 는’ 이상적 유토피아를 꿈꾸며 설립 하는 또 다른 것이 아닌, 지금 나의 기반을 부정함으로써, 즉 나의 전체성에 틈을 냄으로써 전망하는 여기로 부터의 ‘평화 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마조리 H. 수하키, 『폭력에로의 타락』, 김희헌 역, 동연, 2011. 존 B. 캅 데이빗, R. 그리핀, 『캅과 그리핀의 과정신학』, 이경호 역, 이문, 2012.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김도형 외 역, 그린비,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