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초기 동학의 영적 기록: 회상영적실기 최종성

 

[기조발표 제 부2                2발표] 2020 한국종교학회 기조발표 요지문

초기 동학의 영적 기록: 회상영적실기

                                                                                                                                 최종성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1.     조선시대 민중을 위한 획기적인 문화 창달이 두 가지 있었다.[1]) 하나는 개국 후 50(1443)이 지나 면서 창제된 한글이고, 다른 하나는 망국 전 50(1860)에 창도된 동학이었다. 한글이 국가왕실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어 민중에게 배달된 하향식의 문화성과로서 어문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면, 동학은 민간 차원에서 개발되어 지역의 민중에게 수평적으로 퍼지면서 영적 소통을 실현시켜 주었다 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민중들은 한글 자모를 깨우쳐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원활히 할 수 있었고, 또 시천주(侍天主)의 주문을 통해 신인 간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2.     그런데, 동학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른바 갑오년(1894)의 동학이 그것이다.[2]) 당연히 동학년은 갑오년이고 녹두장군이 끈 전장,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타오른 농민군, 깃발 나부끼는 들판이 압도한다. 이보다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수운(水雲)으로 대변되는 경신년(1860)의 동학 이 자리한다. 동학의 지리적 풍경은 피 끓는 함성이 가득한 들판이 아니라 촛불 밝혀 기도에 전념하 는 고요한 산중으로 바뀐다. 각기 저마다의 동학에 대한 풍경과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혁명(전 쟁 과) 영성이 제대로 화해되지 않는 한 경신년의 동학은 몇몇 종교인들만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그들의 기억마저도 희미해지고 말 것이다.

3.     주지하다시피 갑오년에는 1)한반도를 둘러싸고 청 일이· 각축하는 대외적인 흐름 정치적( 환경) 2)조 세 및 토지의 모순에 반발하는 농민운동의 물줄기 경제적( 환경 와) 3)영적인 스승이 입은 억울함을 해 소하려는 신원운동의 맥락 종교적( 환경 이) 한 군데에서 만났다. ‘동학란 이든’ , ‘동학혁명 이든’ , ‘농민전 쟁 이든어떤 명칭을 사용하더라도 동학의 영적 자원이 간과되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러한 종교 적 원천이 어떻게 활용되고 배분되었는지 살피는 것이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브루스 링컨의 말 대로, 폭력적 수단만 가지고는 혁명이 성사되기 어려우며, 이데올로기적인 설득과 정서적인 환기를 제공하는 종교적 담론의 힘이 결부될 때 사회의 재구성이 용이해진다고 할 수 있다.[3]) 동학을 소수 지도부만의 문제로 혹은 형식적인 외피로 간단히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적어도 자신들의 목소리 (vox populi)를 하느님의 소리(vox dei)로 믿으며 응집할 수 있게 했던, 그래서 저들의 목소리가 군현 단위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장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을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동학군을 이끌었던 전봉준이 서울로 잡혀와 공초했던 내용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동학을


수심경천(守心敬天) 하는 도()로 파악하고, 그러한 동학에 크게 매료되었다고 진술한다. 아울러 불 가항력적인 괴질 콜레라 로부터( ) 벗어나는 길도 동학의 경천수심(敬天守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4]) 녹 두가 동학의 핵심으로 파악한, ‘하느님을 공경하며 모시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 이야말로수운이 역설 한 시천주와 상통한다. 마른 땅의 녹두(綠豆)를 촉촉이 적셔주며 생장시킨 것이 최제우가 몰고 온 영 적 비구름(水雲)이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4.     초기 동학도들에게 기억되는 영적 천재의 자취는 어떠했을까? 시천교계열의 두 교단에서 발간한 두 도설서(圖說書), 『회상영적실기(繪像靈蹟實記) (』 시천교총부)와 『시천교조유적도지(侍天敎祖遺蹟圖志) (』 시 천교본부 가) 단연 주목된다. 그림과 문자로 교조의 자취를 설명하는 방식은 『석씨원류(釋氏源流),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 『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바이다. 아마도 동학 교조의 신이한 행적과 일대기를 주제별로 정리하고 신성의 감화, 영적 수련, 상서와 이 적 등을 도해로써 쉽게 설명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잊혀진 종교사를 새삼 일깨우고 그것을 영적인 삶 의 원천으로 삼도록 교화하려는 의도가 강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동학 2대 교주인 해월에게는 3, 즉 구암(龜菴), 송암(松菴), 의암(義菴)으로 대표되는 3 제자가 있었다. 송암 손천민(1857-1900)이 처형된 뒤 일본으로 망명했던 의암 손병희(1861-1922) 1906년 귀국하여 구암 김연국(1857-1944)과 손잡고 천도교를 창건하면서 동학은 본격적인 종교조직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한때 의암의 측근으로서 고락을 함께했지만, 끝내 천도교로부터 출교를 당한 일진회 장 이용구(1868-1912)가 그해 시천교를 창립하고 대례사(大禮師) 직에 앉음으로써 동학의 분립이 본격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천도교 대도주를 역임하던 구암 김연국이 1907년 손병희와 불화를 거 듭하다 결별한 뒤 자신의 손으로 출교시켰던 이용구의 시천교로 들어가 최고 교직인 대례사가 되는 얄궂은 운명의 반전을 겪으면서 동학 진영은 더욱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병세 악화로 일본 고베 지역 스마(須磨)로 건너가 요양하던 이용구가 1912 5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잠재되어 있던 시천교의 알력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1913년에 이르러 송병준이 이끄는 시천교본부 견지동의( 송파시천교 와) 김연국을 따르는 시천교총부 (가회동의 김파시천교 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던 시천교 계열의 두 교단은 19155개월 상간으로 초기동학의 역사를 다룬 도설서를 앞 다투 어 내놓게 되는데,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회상영적실기(繪像靈蹟實記) (』 시천교총부, 1915 7) 가 그 하나이고 그 맞수격인 『시천교조유적도지(侍天敎祖遺蹟圖志) (』 시천교본부, 1915 2월 가) 또 다른 하나이다.

『회상영적실기 는』 총 51개의 도설을 다루고 있는데, 철저하게 영적 스승인 수운(1-24)과 해 월(25-51도 에만) 내용을 국한시키고 있다. 반면 『시천교조유적도지 는』 수운(1-25)과 해월(26 -54) 이외에도 해산 이용구(55-69도 와) 제암 송병준(70도 의) 도설을 추가하여 총 70개의 도 설을 구성하고 있다. 전자가 구암 김연국의 서사를 배제한 채 오로지 신앙적인 모델로서 스승들의 과거 이적에 주목하였다면, 후자는 과거의 종교적 유산을 이어받은 후예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각 시키려 이용구와 송병준을 추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과거 해월과의 친연적 관계로 치자면 당 대에 시천교총부의 구암 김연국이 단연 압권이었을 테고, 그러한 도통적 연원에 취약했던 시천교본 부 입장에서는 이용구와 송병준의 행적을 교조들의 유적에 병행시키는 것이 여러모로 효과적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책의 구성에 있어 『시천교조유적도지 는』 도설 전체의 목차를 제시한 뒤 곧바로 70개의 도설을 차례대로 설명하며 끝을 맺고 있을 뿐 서문이나 발문을 싣고 있지 않다. 반면, 『회상영적실기』는 51 개의 도설을 전개하기에 앞서 당시 시천교총부를 이끌던 지도부 6명의 서문을 제시하면서 발간 배 경과 맥락, 그리고 책의 취지와 가치 등을 역설하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당시 『회상영적실기』의 서 문을 작성한 이는 교주인 구암(龜菴) 김연국(金演局)을 비롯해, 그를 따랐던 성도사(誠道師) 용암(龍菴) 김낙철(金洛喆), 경도사(敬道師) 인암(仁菴) 최유현(崔琉鉉), 경도사(敬道師) 청암(淸菴) 곽기룡(郭騎

), 신도사(信道師) 연암(淵菴) 김낙봉(金洛鳳), 신도사(信道師) 신암() 원용일(元容馹) 등이었다.

도설의 내용에 있어 『시천교조유적도지 는』 그림 이미지의 묘사가 정밀한 것에 비해 설명 내용이 다소 간략한 편이다. 반면 『회상영적실기 는』 도상이 다소 거칠지만 설명 내용이 상대적으로 긴 편이 다. 도설의 문헌만을 고려하자면 『시천교조유적도지 는』 한문 문장으로만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데 비해, 『회상영적실기 는』 한문으로 주제문과 찬문(贊文)을 작성하고, 연이어 국문의 번역(찬문 번역은 제외 을) 싣고 있다. 이러한 상호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책 모두 주제와 관련된 장면과 내용을 선택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지면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도설의 맥락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원천으로서의 역사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시천교조유적도지』의 경우에는 동일교 단에서 같은 시기에 출간한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 (』 시천교본부, 1915), 『회상영적실기』의 경 우에는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 (』 시천교총부, 1920)를 각각 배경에 두고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고 본다.

5.     앞서 언급했듯이, 『회상영적실기 는』 6편의 서문과 51개의 도설로 이루어져 있다. 수운과 관련된 도 설이 24(1-24)이고 해월을 다룬 도설이 27(25-51)이다. 도설은 대개탄생-수도-각성-전발-피 체 죽음 묘역- - ’ 등의 순서로 전개되며 주제에 따라 초자연적인 상서, 현몽, 이적, 감응, 예시 등의 요 소들이 개입되어 있다. 『회상영적실기 에』 수록된 도설 목차는 아래와 같다.

6.     동학의 영적기록으로서의 『회상영적실기 를』 이해하기 전에 동학의 영성에 대해 간략하게 생각해보고 자 한다. 서구 개념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종교 전통의 동서를 막론하고 하나로 수렴되는영성 의개념을 도출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동학의 인간학적 견지에서 보자면 영성은 진정한 인간 되기, 곧 자기 진정성- (self-authenticity)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는 생래적으로 자동적 으로 주어지는 인간(human being)이 아니라 어떤 각성과 공부를 통해 스스로 진정한 인간이 되려 는(being human) 노력과 관련된다. 불성(佛性), 천리(天理), 이마고 데이(imago dei) 등은 인간이 자기 진정성을- 찾아가는 데에 있어 모본과 준거가 될 만한 것들이었다. 동학으로 보자면 그것이 시 천주(侍天主)으로 응집될 수 있다. 수운이 설명했듯이, 하느님 모심은 단순한 숭배나 일반적인 시중 듦이 아니라 신성의 내면화(內有神靈), 내적 신비의 외재화(外有氣化), 그리고 신인합일의 영속화(各知不移) 등을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었다. 하늘을 모심으로써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경지를 체화하고, 기가 감응하고 심이 통하는 삶을 영속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7.     그렇다면 『회상영적실기 에서는』 영성, 혹은 영적인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동학의 영성과 관 련해 『회상영적실기 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얻기는 쉽지 않으나 몇몇 서()의 내용이 주목된다.

먼저, 시천교총부에서 경도사를 지낸 청암 곽기룡이 작성한 서문에는 천지영성(天地靈性)과 대성인 지영성(大聖人之靈性)을 언급하고 있다. 곽기룡이영성 이라는단어를 직접 사용하고 있어 주목되는 데, 당대 교단 내부에서도영성의 생활 과’ ‘세정 세속 의( ) 생활 을대비시키며 영성을 독립적으로 사용 하고 있는 사례가 있어 그리 낯선 표현은 아니었던 듯하다.[5]) 교조의 삶에서 상서, 감응, 비술, 이적 등이 계속된 것은 천지와 합덕한 교조의 품성이었기에 가능했고, 이러한 성인의 영적 본성을 『회상 영적실기 를』 통해 더듬어 볼 수 있다는 취지이다. , 교조의 인생은 천과 동행하는 삶이었고, 『회상 영적실기 는』 동학 후예들이 영적 표본으로 삼을 만한 원천들을 싣고 있다는 것이다.

! 이 책 중의 몇 개의 그림과 기록이 바로 두 성사와 대교주의 비밀스런 것과 신령스러움을 제시한 것에 지 나지 않으니, 즉 천지의 영성(靈性) 중 만분의 일일 따름이다. 오직 우리 후학 된 자가 이 그림을 공손히 우러 러보고 이 기록을 엄숙히 읽으면 숙연히 공경함이 일어나고 황홀하게 깨달음이 있을 것이니 곧 대성인의 영성 일부분만이라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구암문인.( 경도사청암 곽기룡 근서)

! 是卷中幾條繪像實記, 直不過兩聖師及大敎主秘題靈示也. 卽天地靈性萬分之一耳. 爲吾後學者, 拜瞻是圖, 莊讀是記, 肅然起敬, 然有覺, 則大聖人之靈性, 亦可以窺一斑矣.(龜菴門人 敬道師淸菴 郭騎龍 謹序)

두번째로 경도사 인암 최유현의 서문에서도 교조의 인생은 천지와 더불어 묘함을 공유하며 천지 와 동행하는 삶이었다고 진단하고 『회상영적실기 를』 통해 천인일치의 신비를 중생들에게 보편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본 실기에 실려 있는 것은 곧 몇몇 예를 들어 후세에 전해줌으로써 단지 우리 스승과 천지가 그 묘함을 함께 했었음을 증명코자 하는 것이다. … 오직 우리 구암 장석만이 바로 이 근원에 접하여 그 종지를 홀로 얻었다. 따라서 선사 당시의 비밀스럽게 숨긴 유적을 모두 모아서 마음으로 온갖 법을 전달하여 종류별로 다 갖추게 함 으로써 이 책을 인쇄하게 되었다. 그런즉 두 스승과 지금 우리의 장석 구암 이( ) 그 체와 용이 서로 들어맞고, 앞 뒤로 일치하니 어찌 공경히 칭송치 않겠는가! 오호! 이로부터 오만 년을 지내는 동안 항하사와 같은 중생이 영 적의 여러 예를 볼 수 있게 되어 모두 천인의 한 이치를 우러르게 되었으니, 어찌 본서의 그림과 기록에 힘입 은 바 아니겠는가? (구암문인 경도사인암 최유현 근서) 而載在本記者, 則示以幾例, 遺諸後世, 而只證我師與天地同其妙矣. … 惟我龜菴丈席, 直接斯源, 獨得其宗, 先師當時之秘藏遺蹟, 咸蒐彙輯, 心授万法, 類別悉備, 乃有斯編剞劂之擧,然則兩師與今我丈席, 用相符, 前後一致, 豈不欽頌哉! 嗚呼! 自玆以往經五万斯年, 恒沙衆生, 得見靈蹟之數例, 咸仰天人之一理, 豈非賴乎本書之繪記也哉! (龜菴門人 敬道師仁菴 崔琉鉉 謹序)

세번째로 시천교총부를 이끌었던 교주 김연국의 서문은 『회상영적실기 를』 통해 성인의 영적 자취 를 공표하고 전수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싣고 있다. 스승을 지근에서 오랫동안 모셨던 경험이 있는 교단의 책임자로서 그는 교조의 참된 자취 영적 가( ) 수운과 해월을 경험하지 못한 후예들에게 잊히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대중들이 상상하고 공경하며 앙망할 수 있도록 영적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회상( ), 취지를 분명하게 밝힌 기록을 덧붙이게 해서 실기( ) 하나의 도설서를 완성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지금 성인께서 떠났으니, 참된 자취가 적막하니 후학들이 어찌 법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그 참된 자취 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함을 걱정하였고, 또 도유들이 알 수 없다고 여겨 탐탁지 않아 하며 버릴 것을 걱정하여 그 자취를 묘사할 것을 명하여 대강을 여러 제자들에게 주어 더욱더 지극한 자취를 마음에 새기게 하였다. 그 럼으로써 공경하고 앙망함을 만대에 전하여 영원히 법의 집의 하나로 삼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취의 말미암 은 바를 그림으로 그려 완성하게 되었다. 그림이 비록 다 그려져도 세대가 점점 내려가고, 그 사람이 적멸에 따라 들어가게 된다면, 그림은 말을 할 수 없고 그 내용도 분명히 전해지지 않아 그 본래적인 취지를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또 다시 그 일을 기록하여 덧붙일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취의 말미암은 바를 기록 하여 덧붙인 것이다. 실기가 이미 완성되어 두세 명이 세상에 공표되기를 원하여 나에게 서문을 쓰기를 요구한 까닭에 마침내 서를 써서 그 만분의 일을 이를 따름이다. (구암 김연국 근찬) 今者聖人去, 眞跡寂矣. 後學烏可效法? 嘗憂其眞跡之不傳於後世, 而又悶於道儒之以爲不可知而等棄, 命其跡描寫之, 槪以授諸子益印至跡, 而敬仰傳於萬代, 而永爲法戶之一也. 圖之所由以成者矣. 圖雖成劃, 世愈降焉, 而其人隨寂, 畵不能語, 而傳不得明, 恐不能盡其旨. 又命其記事而付之, 記之所由以付者矣. 『實記』旣成, 二三子欲公於世, 而要余序之. 故遂序其萬一云爾.(龜菴 金演局 謹撰)

8.     『회상영적실기 는』 교조의 탄생에서 죽음 이후까지의 영적 자취에 대한 예조, 상서, 비술, 감화 등을 상세하게 싣고 있다. 그중에서도 천성산기도, 경신년득도, 도통전수도, 적조암기도 등에 관한 도설이 주목된다. 이들 도설은 신성의 예비 신승헌천서도( ), 신성의 체험(천성산기도도, 시수천명도, 궁을영부 도, 은암강관도, 조암강도도), 신성의 전승 도통전수도( , 하몽전발도 을) 담고 있으며, 이런 사건과 경험 속에 강렬한 신적 감응(降話, 降筆, 降管, 扶鸞, )이 내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9.     동학은 경신년(1860) 산중에서 시작된 영적 각성, 들불 같은 갑오년(1894)의 혁명과 전쟁, 그리고 전인미답의 새로운 근대적 환경에서의 분열 등을 차례로 겪어야 했다. ‘영성-전쟁-근대성 으로점철 되는 초기 동학의 경험에 대한 이해와 기억도 제각각이었다. 이런 와중에 1) 동학은 영성보다는 전 쟁, 산중의 고요한 기도보다는 깃발 나부끼는 들판의 함성, 수운보다는 녹두장군이 대중의 이목을 받고 있다. 2) 그러나 동학의 온전하고도 균형 있는 이해를 위해서 신앙적 원천으로서의 영적 기록 들에 대한 발굴과 정리도 필요하다고 본다. 3) 그런 의미에서 주류교단으로부터 배제된 시천교 계열 에서 발간했던 영적 기록물인 『회상영적실기 와』 『시천교조유적도지 를』 주목할 만하다. 4) 여기에서 는 『회상영적실기 에』 실린 영적 천재의 자취에 주목하였고, 그 중에서도 천성산기도, 경신년득도, 도 통전수도, 적조암기도 등의 도설을 살펴보고자 했다. 6) 그것은 동학도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간, 즉 자기 진정성을- 모색하는 동학적 영성의 모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1] ) 최종성, 『한국 종교문화 횡단기』, 이학사, 2018, 80-81.

[2]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미래사, 1992, 90.

[3] ) Bruce Lincoln, DiscourseandtheConstructionofSocie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p. 3-11.

[4] ) 『全準供草』(17285), 재초.

[5] ) 『龜岳宗報』 4(侍天敎報社, 1915.2) <勸誘文林>란에 실린 임우탁의宗敎人의 立言이라는 글 속의靈性의 生活과 世情의 生活의 如何를 館라 는제하의 내용을 참조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