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8

지구인문학으로 읽는 김지하의 생명철학 김재익(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2020 한국종교학회 창립50주년 발표. 2020. 11.28.[한국종교분과2분과 4발표]

지구인문학으로 읽는 김지하의 생명철학

김재익(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1.

1990년대의 한국의 환경운동은 한살림운동으로부터 촉발된다. 7~8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모두의 이목 이 쏠려 있을 때, 유독 그들은 변절이라는 오명을 받더라도 ‘생명’이라는 화두를 세상에 던져내었다. 미래 의 길이 바로 생명에 놓여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생명이라는 테제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대표되는 서구식 근대에 대한 성찰의 결과였고, 자연을 대상화하여 끝없는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 관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우려를 일찍이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한살림선언」(1989.10.29.)에 녹여내었다. 나아가 이들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안한다. 

주요섭은 “한국사회운동사에서 처음으로 문명 전환 이야기를 만들고 썼던 한살림은 30여년전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를 사회운동 과제로 제시했다”  )고 말한다. 이른바 ‘개벽’을 부르짖 으며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외쳤다. 이러한 외침은 아직도 이어진다. 바로 우리 주변에 위치 한 한살림매장을 통해서 말이다. 필자도 한살림의 조합원으로 이러한 뜻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는다. 한세 대를 거쳐서 지속적으로 하나의 사상이 조용하게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미치고 있는 것이 또 있을까싶다. 필자는 한살림선언, 한살림운동 등의 이러한 생명운동은 삶의 구체성에서 시작되었기에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운동의 주역들이 농민운동과 협동운동을 통해 구체적인 삶속에서 의지하고 있었 기에 지금까지의 성과가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 역적으로 행동했다(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것이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기후변화와 생태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하나의 구호이다. 이는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루에서 열린 리우 지구 정상회의(Rio Earth Summit)에 서 채택되기도 했다. 생태문제에 대한 이러한 접근 이외에도 도시계획이나 비즈니스 전략으로도 활용되 고 있다. )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생태문제나, 도시계획이나 당면한 문제에 있어서 가치 중 심주의적인 것이 지양된다는 것이다. 또한 가치의 부분이 탈각되기에,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체인식 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을 당면한 문제에 방법론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일종의 두 가지 경로(兩行)를 걷고 있다고 본다. 미리 말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지구인문학’에서도 표방하 는 바이다. 

조성환과 허남진이 주장하는 ‘지구인문학’은 토마스 베리의 ‘지구공동체’개념을 경유하면서도 ), 다중

심주의적인 형태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인문학을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여 인문학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분야” )라고 말한다. 물론 이 러한 주장이면에는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중심주의 그리고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것임이 깔려있 다. 

이러한 ‘지구인문학’적인 틀에서 한살림선언과 운동은 현대 한국의 주요한 사례로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한살림의 운동의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했던 김지하의 생명철학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김지하 는 한살림선언의 핵심 필진 중 하나였고, 개벽에 대한 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생명운동을 문화의 차원으 로 승화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김지하(金芝河, 본명 김영일(金英一), 1941년 2월 4일 ~ )는 전 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의 사위이며, 1970년대 유신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 다. 주지하듯이, 1980년대 이후로는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동서양의 철학을 종횡하여 ‘생명사상’을 제창 하고, 생명운동을 펼친다. )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 많은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중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1991)는 글은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준 필화사건이기도 했다. 필자의 좁은 식견과 능력으로 본 발표에서 김지하에 대한 사상을 일갈하는 것은 당연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본 발표에서는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정리하는 것을 목표 삼았다. 

본론에 앞서 박경리 작가의 글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박경리 선생은 「작가는 왜 써야 하는가」라는 화제로 다음과 말한다.

생명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수태와 사망이라는 매우 단호한 해답이 나와 있지만 결코 결론일 수가 없는 깊고 깊은 생명의 비밀이라든지 오묘한 우주의 질서, 생성과 소멸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인 존재라는 것, 측량할 수 없는 느낌의 세계에서 행복과 불행의 추상적 대 상을 향한 인간의 갈등과 오뇌(懊惱) 같은 것, 이러한 문제들은 여전히 건너갈 수 없는 피안인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안은 진실을 향한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이며 궁극적인 뜻에서 언어 는 그와 같은 진실과 소망의 강을 건너는 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6) 

김지하의 남녘땅 뱃노래라는 글이 떠올랐다. 남녘과 뱃노래 등등의 은유적 표현이 위치한 곳이 바로 박경리 선생이 위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은 내가 서있는 지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그곳은 저 추상의 세계가 아닌 바로 구체적 삶의 지평이 위치한 바로 이곳에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전 제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했다. 이러한 전제는 한살림운동의 출발이자 한살림운동의 주체들이 고민하였던 바이기도 하다. 

2. 밥 지구인문학의 틀에서 보는 김지하의 생명사상 중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그의 인식

이다. 그는 “생명이 실체가 아니라 생성” )이라고 말하며, “‘숨겨진 질서’가 ‘드러난 질서’로 물질화하고 이 ‘드러난 질서’ 안에서 끊임없는 생성변화가 진행된다”8)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생명은 실체와 속성을 지닌 존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관계와 생성의 차원에서 언급된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이해를 극명하 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밥”이다. 

김지하는 밥을 “우주 생명의 창조적 활동을 뜻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생명의 결실을 생명 자신이, 즉 생명 활동의 주체인 생명 자신이 먹는다는 것을 뜻한다.” )라 말한다. 이는 해월 최시형이 말하는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以天食天)”는 구절을 밥으로 변용한 것이다. 실상 여기서 말하는 밥은 생명의 다름 아니다. 그에 따르면, 밥은 ‘제사’와 ‘식사’에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데, 종국에는 “제사가 바로 식사이고, 식사가 바로 제사”10)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영(靈)으로서 생명으로 볼 수 있다. 제 사는 밥을 먹는 죽은 사람의 의례이고, 식사는 밥을 먹는 산 사람의 일상이다. 밥을 먹는 귀신은 곧, 생명 을 먹는 귀신이며 나아가 생명을 먹는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이 생명을 먹는 것과 귀신이 귀신을 먹는 것, 영이 영을 먹는 것” )이 바로 밥이자, 식사이자, 제사라고 말한다. 

김지하에게 ‘밥’은 개벽이다. 밥이 인간의 모든 생명활동의 총체인 동시에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 아 있는 한울님인 내 속에 밥을 생산해내는 과정, 즉 생명의 순환 과정 일체에 삼라만상과 천지 만물의 활 동이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며, 그 활동 과정과 그 활동 내용과 그 활동 결과―이것이 바로 밥으 로 표상되고 밥으로 압축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 이러한 밥은 전(全) 지구적이며, 전 우주적인 차원에 서의 활동이다. 이러한 맥락을 통해서 「한살림선언」에서는 “생명의 진화는 생명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환 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보는 다윈(Darwin)류의 진화가 아니라 미시적 생명이 거시적 환경과 공진화하면 서 자기를 초월하고 동시에 자기를 조직화 하는 창조적 활동이다”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 또한 김지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밥의 본질·밥의 생명적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올바른 인식이 곧 근원적이고 새로운 세계관 창출의 제일보이며, 밥을 그 본성에 따라 공동체적으로 나누는 적극적 실천이 바로 생명의 본래 있는 그대로의 고향에로 모든 중생이 귀의 하려 하는 ‘선적(禪的)지향’이며 ‘굿’이며 ‘후천개벽’이 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밥이란 생산활동과 또한 그 결과를 수렴하는 활동 전체의 기본 특징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

는 가시적 형태로 되어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볼 수 없는 불가시적인, 계속해서 운동하는 거대한 힘입니다.13)

이에 따르면, 밥, 다시 말해 생명은 닫혀있는 폐쇄된 체계 아니라, 열려있는 개방된 체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김지하는 ‘밥상’을 강조한다. 우리 역사에서 밥상이 갖는 인간의 신분적인 인정에 대한 사례를 언급하며 가부정적인 사회에서 억압받았던 여성의 인권을 환기시킨다14). 밥을 통해서 김지하는 생명에 대한 근본적이며 민중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밥상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것 으로서 민중적인 인식과 또한 민중적 실천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향아설위-제사 방식의 혁명 수운 최제우 선생의 대각득도일인 4월 5일을 기념하며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97년 이천의 작은 마을에 서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설하였다. 벽을 향해서 위패를 놓고 벽 쪽에 있는 위패 앞에다 놓는 멧밥의 위 치를 제사를 지내는 주체 앞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른바 향벽(向壁)설위에서 향아설위를 설행한 것 이다. 김지하는 이를 틈으로 설명한다. 선천시대의 향벽설위는 오랜 세월 동안 지배해왔던 문화 양식이었다. 그러한 제사를 지내는 자와 제사를 받는 자에 틈을 내고, 그리고 그 틈을 통해서 생명의 밥을 약탈후 독점했고, 결국에는 이원적 분리가 되었다고 말한다15). 이에 향아설위는 그 틈에 또 다시 틈을 낸 것으로 써, 이원적 분리를 상쇄시키고, 일원화했다는 귀결을 담고 있다. 물론 독점과 약탈의 주체가 무엇인지는 언급이 없어 이해하기 난해하지만, 그가 말하고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일원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 으로 보인다. 

‘밥에 담은 생명운동의 밑그림 김지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의 진정한 본성을 우리가 인식하고 공동체적인 나눔과 섬김의 실천을 민중적 차원에서 조

직적으로 과학적으로 해나감으로써만 제3세계의 ‘민중 해방 운동’과 소위 ‘선진’ 공업 사회에서 일고 있는 ‘평화 운동’ 그리고 우리의 ‘민족 통일 운동’을 이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지구적 차원, 우주적 차원에 있어서의 민중을 주체로 하는 전 중생계적인 ‘새로운 개벽 운동’, ‘후 천개벽운동’, ‘생명운동’의 제일보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통해서 서양과 동양을 이미 넘어서는, 선천적인 분리, 동양이냐 서양이냐 

하는 선천시대적인 분리를 이미 넘어서는 후천 시대의 새로운 지구적·우주적인, 전 민중적인 새 로운 차원의 인식과 실천의 방향이 ‘밥’이라는 한마디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해를 밑거름으로 해 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16)

 

13) 위의 책, 254쪽.

14) 위의 책, 255쪽. 

15) 위의 책, 270-273쪽. 

16) 위의 책, 266-267쪽.

밥은 생명이고, 밥상공동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인식과 실천적 의미를 담은 김지하의 의도가 충분히 드

러난다. 밥맛, 그것은 삶의 맛이라고 했다. 삶의 맛을 위한 밥에 담긴 김지하의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체적 삶의 지평 위에서 언급된 밥에 대한 김지하의 표현을 간략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 

  

밥상

독점

향유

제사와 식사의 분리

제사와 식사의 일치

악마의 틈

틈에 틈

생명의 틈

이분법적

일원적

향벽설위

향아설위

선천시대

후천시대

혼밥

밥상 공동체

밥맛=살맛



밥은 하늘입니다.

                          - 김지하 -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3. 

김지하의 생명운동의 배경에는 생명의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의 기후변화와 기후위기를 초래 한 것은 결국 서구근대문명의 한계이자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초래되었다고, 그는 확신한다. 또한 그는 소 유와 욕망 그리고 끝없는 경쟁이라는 서구의 삶의 문법이 우리의 곁에서 죽임의 그림자로 다가왔다는 것 을 ‘죽임의 문명’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이러한 위기를 그는 생명의 세계관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재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승환의 통찰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근대 이래의 진보의 신화에 갇혀 생명과 삶의 근본의미를 무시하는 과학적 생명관은 무척 위 험하다. 그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생명을 맹목적으로 신비화하거나 자신이 지닌 한줌의 신념에만 매달려 생명의 실제 내용과 역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독선이다.”17)

더 나아가 박이문은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전제만으로는 환경에 대해서 그리고 그냥 생명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다” )고 혹평한다. 박이문의 인식으로는 “환경(생태)문제 해결은 개관적 현실에 바탕을 둘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19)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물활론적 세계관이나 신화적 세계 관은 더 이상 그대로 계승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이러한 주장의 끝에 박이문이 제시한 것은 결국 생명 문제는 결국 윤리문제로 귀결 된다는 것 )과 이론적 논쟁보다 사소하지만 아주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 는 것 )이다. 박이문 선생의 짧은 글을 통해 살펴본 터라. 그의 과학철학적 입장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필자의 능력의 한계를 먼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불구하고, 필자가 언급하고자 했던 것은 생명윤 리나, 환경윤리적인 측면에서 김지하의 전체론적인 세계관이나 그의 생명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통찰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사회적 성화」나 「한살림선언」을 통해서 김지하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 에 무한 긍정을 보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 과학기술의 문명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그리고 다 가올 또 다른 과학기술의 혁신을 어떻게 창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필자는 여전히 큰 고민으로 남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