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붓다
나눌수 없는것을 나누는 아픔
October 17, 2018, 1:38 am
» 바이칼호수 알혼섬에서 기도순례하는 밝은누리의 생명평화순례단
“조선족, 고려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다 한겨레입니다” 생명평화 순례 중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북측 사람들이 우리 길벗들에게 한 말이다. 같은 말을 쓰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조선족이세요, 고려인이세요?”라고 물었다가 들은 말이었다. 그렇다! 조선족, 고려인, 조선사람, 한국사람 이라는 구분은 우리 근현대사 아픔과 상처를 지속하는 구분일 뿐이다. 이 땅 곳곳에 서려 있는 원통함을 풀고 상처를 치유하길 기도하는 순례에서 또 중요한 걸 배웠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며 살던 많은 이들이 스탈린 시대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중앙아시아로 실려 갔던 열차다.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었던 원통함이 서려있다. 이미 공감했던 생각이지만, 해원이 필요한 현장에서 들으니, 마치 그 원혼들이 우리를 일깨우는 듯 했다. 그 열차 안에서, 분단체제가 강제하고 조장했던 경계심은 서서히 풀려갔다. 김치와 밑반찬을 나눠 먹고, ‘반갑습니다’ ‘휘파람’등 북녘에서 즐기는 노래도 함께 불렀다. 러시아와 중국 사람들도 함께 했다. 열차에서 친구가 된 러시아 모녀는 러시아 민요와 춤을 가르쳐 주고, 정차하는 역에서 함께 노래하고 춤췄다. 삼일학림 학생들은 신명나는 사물놀이로 화답했다. 기차를 타고 가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겼다. 생명평화 바람이 한라에서 백두를 넘어 중국과 러시아, 시베리아까지 불었다.
지난여름 ‘밝은누리’와 생명평화 길벗 100여 명이 백두산과 명동마을,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를 다니며 생명평화를 구하는 순례를 했다. 전쟁 위기가 극심했던 2017년 가을에 시작해 천일기도 하는 중 다녀온 거다. 그동안 세월호 합동분향소, 제주 4.3평화공원, 광주 5.18민주묘지 등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에서 기도했다. 한라산과 백두산, 지리산과 금강, 한강과 두만강 등 이 땅 생명들의 아픔과 희망이 서려있는 곳곳을 다니며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영세중립화 통일과 동북아생명평화, 전 지구적인 반전 반핵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촉구하는 마음을 나누었다. 20세기 끝자락을 겨우 붙잡는 통일이 아니라, 21세기 새로운 생명평화 문명을 여는 통일이 되길 기도한다. 그것은 삶의 일상적 토대인 ‘마을’에서 실현되고, 농촌과 도시,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생태적 삶’을 품는 것이리라!
알혼 섬에서 빠져들 듯 바라본 바이칼호수는 백두산 천지와 같은 감흥을 주었다. 광활한 땅에 펼쳐진 물과 높은 산 위에 담긴 물이 하나 되어 다가오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바다와 호수라는 구분도 사라졌다. 장엄한 자연에서 그런 구분은 어리석었다. 고려인, 조선인, 한국사람, 조선사람 이라는 구분도 그렇다. 결국 곱게 어울려 아름다운 물결을 이룰 것이다. 산과 바다, 남과 북, 자연과 사람이 곱게 어우러지는 생명평화가 한라에서 백두 넘어 동북아와 온 누리를 물들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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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에서 길이 열린다
October 18, 2018, 3:35 am
다음달 4일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종법사 대사(취임)식이 거행된다. 지난 18일 선출된 전산 김주원(70) 종법사가 12년간 재임한 경산 장응철 상사에 이어 앞으로 6년간 원불교를 이끌게 된다. 취임전부터 그의 행보가 남다르다. 우선 익산 원불교중앙총부 광장에서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하던 대사식 관행을 깨고, 1300명을 수용하는 실내에서 거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과시식 행사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또 종법사 위에 올라서도 총부내 식당에서 모든 대중들과 똑같이 식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권위’를 내려놓고 대중속으로 걸어들어갈 뜻으로 보인다. 대사식을 앞두고 18일 중앙총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 비장한 각오를 보이듯 그는 삭발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모든 게 부족해서 그 부족을 채우려 출가하고서도 늘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 자리에 앉히니 ‘이게 내 자리가 과연 맞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의 첫일성은 겸허했다. 그러나 그는 전주 한옥마을에서 나고 자라 전주고 2학년 때 교동교당에서 원불교를 접한지 얼마되지않은 스무살에 출가한 이후 원불교 교정원장 등 요직을 거쳤고, 이미 12년 전에도 종법사 후보로 꼽혀 언젠가는 원불교를 이끌 인물로 꼽혔다. 그는 내성적이지만, 소신이 분명한 것으로 교단 내에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예전에 교단 내 소임을 할 때는 법을 엄정히 세워야한다는 생각만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미쳐 잘 생각치 못했는데, 법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것이니, 사람을 상하는 일은 피해야한다”고 말했다. 정치·사회적으로 적폐 청산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떤 것이든 불의를 쳐서 세운 정의는 오래가지 못한다. 상대의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선 간디 같은 정치인도 있지않은가. 그것이 바로 도인의 심법이다. 현실 정치인들이 그런 심법을 쓰기는 쉽지않겠지만, 정의와 불의를 넘어선 큰 덕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원불교 스승들의 말을 빌어 남과 북에서도 그런 큰 국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산(2대 종법사 송규) 종사는 ‘언제 남북 통일이 되겠느냐’는 물음에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라고 했는데, 과거 서로 ‘뿔 달린 도깨비’로 알던 상대에 대한 미움이 봄 눈 녹듯 녹고있는 요즘 현실을 보면서 어른들이 말하는 때가 오고 있음을 느낀다. 남북 사이에 감정은 오랫동안 서로 죽고 죽이며 쌓인 것이서 이를 풀어내려면 3가지를 해야한다고 대산(3대 종법사 김대거) 종사께서 말했다. 첫째 대참회다. 과거는 어두운 시대라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증오하고 업을 지었으니 한쪽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전체가 함께 대참회해야한다는 것이다. 둘째, 해원을 해야한다. 서로 죽이고 죽였으니, ‘네가 먼저 미움을 풀어라’고 하지말고 서로 함께 풀어야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사면이다. 원망심을 녹일 뿐 아니라 용서를 해줘야한다는 것이다.”
전산 종법사는 원불교의 창립정신을 ‘무아봉공(無我奉公·나를 넘어 공익을 위함)이라고 했다. 그는 “대산 종사께서는 이를 ‘남을 나로 알고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면서 “나라는게 끼면 사람을 만나도 뭔가 벽이 있어 소통이 안되는데, 남을 나로 알면 항상 그의 마음이 느껴져서 특별히 뭘 하려하지않아도 상대에 대한 세정이나 이해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또 “원불교의 수도는 산속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곳곳마다 부처 아닌 이가 없고, 일마다 불공 아닌 것이 없다)으로 일 자체가 수도가 되는 것”이라며 “내 욕심을 놓으면 모든 일이 수양이 된다”고 했다. 그는 우울의 시대를 맞은 청년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하자 이 부탁으로 말을 맺었다.
“청년들의 아픔을 생각하면 답답하다. 그럼에도 절처봉생(絶處逢生)이다. 꽉 막힌 길에서 새 길이 열리는 법이다.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능력이 없다고 한탄만한다면 길이 열릴 턱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를 던져 사력을 다한다면 어찌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인간이 살아온 역사가 어려움 속에서 그렇게 길을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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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힐링하우스 연 백양사
October 19, 2018, 1:35 am
» 백양사 영혼의 힐링하우스. 사진 김종오
붉게 물든 단풍처럼 영혼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죽은 자와 산자들을 동시에 위로하기 위한 신개념 힐링하우스가 천년고찰에 등장했다.
전남 장성 고불총림 백양사다. 백양사는 20일 오후6시 영혼의 힐링하우스 점등식 및 아트 페스티발이 펼쳐진다.
백양사 경내 명부전과 납골당이던 영각당을 리모델링해 마련된 ‘영혼의 힐링하우스’는 영가를 모셔 음적인 인상을 풍겼던 명부전을 통유리창으로 바꾸고 아름답고 은은한 채광으로, 대웅전을 바라보는 위치에 지었다. 430기가 봉안되는 이 집은 건축가 윤경식 씨가 ‘영혼이 한 치 티끌 없이 부유하는 모습’에서 착안해 형이상학적 모양으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조계사 주지 시절 가을 국화 축제를 시작해 서울의 명물로 만든 백양사 주지 토진 스님이 펼친 일이다.
토진 스님은 “영혼의 힐링하우스는 일반적인 납골당과 달리 미얀마 쉐다곤 황금파고다에서 영감을 얻어 납골함 디자인을 원뿔형으로 제작했다“면서 ”건물 내에서 고인의 생전 음성과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도록 내부시설을 추가하고, 냉난방시설을 가동해 사시사철 언제든지 가족들이 찾아오기 편하게 배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관식엔 제22회 장성백양단풍축제와 함께 진행된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박동규 시인의 헌시를 시작으로 하상호 서화 아티스트의 스테이지 퍼포먼스, 이주은 명창의 창작 판소리 및 협연, 이완이 첼리스트의 연주와 협연, 이수진 현대무용가의 무용과 협연, 이현정 피아니스트의 반주 등이 이어진다.
한창 붉게 물든 단풍을 즐기기 위한 백양단풍축제는 11월 2일부터 11일까지 10일간 백암산 백양사 일원에서 열린다. 축제 기간에 백양사 쌍계루와 일광정은 음악공연장이 된다. 축제 첫날부터 통기타 공연부터 국악, 클래식, 팝페라, 버스킹, 포크 콘서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매일 열린다. 쌍계루는 맑은 연못 위에 서있어 전국에서 단풍철 사진작가들이 주로 찾는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백양사에서는 단풍나무 아래에 사진전과 시화전이 열리고, 천연염색 을 비롯해 천연비자비누 만들기, 국립공원 숲속체험, 종이꽃 만들기와 같은 체험 코너도 마련된다.
백양사는 오는 27일 오후1시엔 백암산 산신제와 당산제에 이어 오후4시부터 일주문주차장에서 사하촌 마을 주민들을 초청해 마을잔치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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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꺼내지못하게 한 성철스님
October 20, 2018, 9:34 pm
» 성철 스님이 원영(맨왼쪽) 법정(오른쪽에서 두번째) 원택(맨오른쪽) 스님과 서있다.
성철 스님1912~93)이 열반에 든지 25년이 됐다. 성철 스님은 팔공산 성전암에서 철조망을 치고 정진하고, 해인사 백련암을 찾아온 신자들에게 3천배를 시키는 등의 신화적인 일화들이 주로 전해진다.
그런데 성철 스님 열반 25주기를 맞아 성철 스님의 새로운 면모들이 나타난 인터뷰집이 출간됐다. ‘성철 큰스님을 그리다’<성철>(장경각 펴냄, 유철주 지음)이다. 이 책은 성철 스님을 가깝게 모신 16명의 출가자들과 성철 스님과 인연이 있는 20명의 재가자들을 인터뷰한 것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은 “큰스님이 열반한 뒤 다른 상좌들이 텔레비전에 인터뷰한 것을 보고, 다들 ‘큰스님이 무서웠다’고 얘기하지않고 ‘자상하고, 공부 길을 잘 일러주셨다’고 해 ‘큰스님이 두 분 계셨나. 나는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다른 상좌스님들은 다르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성철 스님을 모시고 산 제자들간에도 경험이 다르고, 스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 놀랐다는 것이다.
이 책엔 1953년 성철스님에게 출가해 맏상좌가 된 천제 스님과 만수 스님 등 초기 제자들이 나와서 성철 스님이 1960년대 후반 백일법문을 하면서 불교계에 혜성처럼 등장하기 전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천제 스님은 6남매 출가자로 유명하다. 속가 장남인 그가 성철 스님에게 출가한뒤 5명의 동생들도 모두 출가한 것이다. 그는 부친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49재를 모시면서 그곳에 주석해있던 성철 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천제 스님은 성철 스님이 당시엔 신자들에게 3천배를 시키지는 않고, 1천배를 시키거나 상황에 따라 절을 시켰다고 한다. 또 성철 스님의 부친이 방문했을 때 부친이 좋아하는 수박도 대접하면서 나름대로 효도를 다했지만 스님의 권위를 위해 속가 부모에게 하심할 수는 없다고 해 부친이 불편했을 때도 자신을 대신 문병 보내고, 장례식 때도 자신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천제 스님은 성철스님이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었던 점을 전했다.
» 모두 출가한 맏상좌 천체스님 6형제와 함께 한 성철 스님
“요새도 그렇지만 전에도 돈이 있는 분이나 권력 있는 분이 절에 와서 예불을 드리면 스님들이 목탁을 치고 불공을 드린다. 기도하러 온 사람들은 대접을 받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그러나 큰스님은 이런 방식은 불공이 아니라고 했다. 불공하러 온 사람은 반드시 공양간에서 음식을 해 나르도록 하고 직접 예배를 해 자기 신심을 돈독하게 해서 부처님께 성의를 보여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자기변화와 발전이 있는 것이 진정한 불공이 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스님들을 고용한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 가야산 정상에 오른 성철 스님과 상좌 원택 스님
통상 6개월간 한다는 예비승려 단계인 행자를 무려 10년간이나 하며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만수 스님은 “큰스님은 책방인 장경각에 한번 들어가면 몇 시간 동안은 꼼짝도 안했고, 또 어린 행자들과 함께 직접 목탁을 잡고 예불을 올리고 108참회와 능엄주 독송을 했다”고 회고했다.
또 성철 스님은 한문 경전을 읽으려면 문리를 터득해야한다며 처음 대학-중용-논어-맹자 순으로 사서를 보게 했다고 한다. 만수 스님의 회고다.
“<논어>를 다 읽고 큰스님께 말씀을 드리니 ‘子曰 可以行而行 不可行而不行 (자왈 가이행이행 불가행이불행) ’을 풀이해 보라 했다. 글자 그대로 ‘가히 행할 만하면 행하고 행하지 못할 것 같으면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 드렸더니,큰스님께서는 ‘좀 더 분명히 대답하라’고 하시더니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 반드시 행할 것만 행하고 안 해도 될 것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야’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행자로서 하지 않아야 할 것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 것 같다. 요즘 보면 스님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다녀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가. 큰스님은 그런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셨다고 생각한다.”
» 제자들과 경주 남산에 오른 성철 스님
1950년대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을 찾아간 이래 평생 성철 스님을 사표로 수행해온 김덕이 보덕화 보살(2015년 별세)은 백수를 앞둔 나이에도 성철 스님의 철저한 삶의 자세를 전했다.
“성철 스님은 쌀을 한톨이라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않은만큼 근검절약했다. 그리고 성전암에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에게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은 절대 땅에 놓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신도들이 성전암에 올라갈 때는 공양물을 땅에 놓지않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쉬었다. 또 성철 스님은 당신 앞에서 절대 돈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평생 돈을 멀리했기 때문에 신도들에게도 이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성전암 살림이 어려운 것을 알았던 신도들은 할 수 없이 성철 스님 몰래 시봉하는 스님들에게 시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쓴 유철주 작가는 “지금까지 성철 스님이 스님들에게 ‘책을 보지 마라’한 것으로 전해져왔지만, 실제 성철 스님은 제자들이 처음 입산하면 나름의 커리큘럼에 따라 처음 2년 정도 경전 공부를 시키고, 불교에 대해 안목이 생기면 선방에 가도록 했다”면서 “인터뷰에 응한 성철 스님의 제자들의 얼굴이 참 깨끗한 것을 보고 수행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성철 스님의 맏사제 천제 스님이 돈을 받지 말고 법보시용으로 만들 것을 제안해 서점에서 판매하지않은 비매품으로 출간해 성철 스님 열반 25주기 추모기간에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는 추모객들에게 배포하기로 했다.
성철 스님 25주기를 맞아 오는 24일부터 28일까지 해인사 백련암에서 4일4야 추모 참회법회, 27일 해인사 사리탑에서 추모 삼천배 정진, 28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25주기 추모재가 봉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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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실패가 아니다
October 22, 2018, 5:07 am
엘런 코헨이 지은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따로 있다’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글을 탐험하던 왕이 코코넛을 자르다가 실수로 자신의 발가락을 자르고 말았다. 함께 동행 하던 사제가 소리쳤다. "왕이여, 행운의 징조입니다"사제의 말에 화가 난 왕은 그를 구덩이 속에 던지고 여행을 계속했다. 다음 날 왕은 신전에 바칠 제물을 구하던 식인종 부족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 때 식인종 사제가 왕의 발가락이 없는 것을 보았다. 제물은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왕은 풀려나게 되었다. 비로소 왕은 사제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구덩이로 돌아가서 깊이 사과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께서 저를 이 구덩이에 던진 것이 저로써도 커다란 행운이었으니까요"사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왕이 물었다."어째서 그렇소?"사제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만약 제가 왕과 함께 있었다면 그 식인종들이 저를 제물로 썼을 테니까요“
+
인생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실패했다고 내일도 실패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오늘 승리했다고 내일도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화를 바꿔 복을 만드는 일은 내 삶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사느냐에 달렸습니다. 실패를 인정하고 왜 실패했느냐를 분석하여 다시 도전한다면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경험이 될것입니다.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자만이 진정한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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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 세상을 품다
October 23, 2018, 7:05 am
» 서울 조계사 앞마당에서 열린 제1회 간화선대법회 모습
한국불교 선승들의 모임인 전국선원수좌회((공동대표 현묵·의정 스님)가 주최하는 제3회 간화선대법회가 오는 26~30일 오후2시 부산 금정수 두구동 홍법사에서 봉행된다. 홍법사 설법전은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간화선대법회는 2013년 4월 조계사에서 처음 열렸을 때 연인원 수만 명이 운집할만큼 큰관심을 불러왔고, 2회는 대구 동화사에서 열린 바 있다.
‘선禪, 세상을 품다’는 대주제로 열리는 이번 법회에서는 설법 전에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 독송을 함께 하며 청법 전 30분 동안 좌선 실참을 하고, 설법 후 즉문즉답 시간에 청중들 법사에게 질문해 답을 들을 수 있다.
» 제1회 간화선대법회에 참가한 대중들
간화선 대법회는 1,2회 때는 주로 70세 안팎의 노승들이 설법했던 것과 달리 60대 안팎의 중진 선승들이 전면에 나서 주목된다. 이들은 각자 구체적인 법문 주제를 갖고 나선다. 26일엔 대흥사 동국선원 유나 정찬스님이 ‘선, 명상을 뛰어넘다’를, 27일엔 선원수좌회 공동대표 의정스님이 ‘선, 현실 정토를 꿈꾸며’를, 3일째인 28일에는 로 선원수좌회 의장 월암스님이 ‘선, 행복의 지름길’을, 4일째인 29일에는 선원수좌회 선림위원인 원인스님이 ‘선, 마음을 치유하다’를, 마지막 날인 30일에는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스님이 ‘선, 풍요로운 삶’을 설법한다.
의정스님은 “선수행이 결국은 인간의 최고의 행복을 위해 한다고 할수 있는데도 조사선은 한마디로 평상심이 바로 도라는 것”이라면서 “평상심이 도가 되도록 실천할 뿐 아니라 현실을 적극적으로 긍정해 현실을 정토로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 대구 동화사에서 열린 제2회 간화선 대법회 모습
월암스님은 또 자신이 설법할 행복에 대해 “불교에선 행복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구경(최고의) 행복이은 안심입명일 것”이라며 “옛 조사가 말하기를 삶 그대로가 수행이고, 삶 그대로가 깨달음으로 발현해야한다고 했으므로 무심하고 마음에서 일이 없다면 눈 앞의 현존 삶 그대로가 행복이고, 지금 견문각지하는 이 자체가 깨달음의 현전”이라고 밝혔다.
한편 조계종 선원수좌회 부설 (재)조계종 선원수좌 선문화복지회는 조계종 선승들 2천여 명이 선승들의 건강복지 후원과 선문화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해 현재 경북 문경 봉암사와 함께 문경세계명상마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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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해볼수 있는 행복법
October 24, 2018, 4:58 pm
행복해지는법
일 주일에 세 번 이상
하루 삼십 분 이상 운동하라.
몸이 당신에게 행복감을 안겨줄 것이다.
하루를 마무리 할 때마다 좋았던 일을 떠올려 보라.
자주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라.
식물을 가꾸어라.
그들이 그대에게 생명의 행복감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것이다.
미소를 짓고 반가운 인사를 하라.
박장대소를 자주 하라.
매일 자신에게 선물을 하라.
매일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어라.
우울한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뿌리쳐라.
화가 나서 미칠지경일 때 베개에 화풀이하라.
옷을 잘 입고 외모를 단정하게 하고
귀족이 된 기분으로 살아라.
매일 유머 한가지를 외우고 써먹어라.
식사할 때 우아하게 먹으라.
가끔 가구 배치를 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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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는 괴로움을 즐기는 이유
October 25, 2018, 1:00 am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거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오후 다섯 시쯤 되면 뭔지 모를 이상한 평안이 찾아왔다. 아마도 곧 캄캄한 밤이 되면 모두가 나만큼 캄캄해질 거라는 생각이 그 해거름 녘을 가장 평화롭게 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때의 감정을 더듬어본다. 그 시절 도서관에서 루 살로메의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빌려 읽었다. 책 내용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방황과 고민으로 가득했던 책의 전체 분위기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퍽 매혹적으로 다가왔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한 문장이 책의 마지막에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라는 말이었다. 책을 다 읽고 뭔가 대단한 기분으로 목사님에게 가서 질문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요?” 목사님은 성경은 읽지 않고 쓸데없는 책에 빠져 있다고 호되게 꾸중하셨다. 그 후로 루 살로메의 끝나지 않은 방황을 마치 내가 나서서 이어가야 할 것처럼 내적인 방황이 깊어 갔다. 대체 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여기서 왜 이렇게 힘들게 헤매고 있을까? 어차피 죽을 건데 힘들게 살지 말고 죽은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으면 어떻게 될까? 끝없는 질문들이 속으로만 계속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스물두 살 때 교회 언니에게 ‘큐티’라고 하는 성경 읽기 방식을 소개받았고, 그날부터 거의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는 놀기 좋아하고 게으르고 누가 억지로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하는 내 기질로 봤을 때 지금까지도 이처럼 꾸준히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오랫동안 훈련되고 길들인 어떤 습관의 힘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나는 어떤 습관을 잘 갖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속적으로 큐티를 해오는 것은,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한 것을 기록하면서 내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 주소를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회퍼의 말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큰 배경을 보고 비로소 그 배경 속 어디 즈음에 내가 왜 서 있는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큰 배경을 보는 것과 같았다. 나의 성경 읽기는 마치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서워하다가 하나씩 표지판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다행한 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길에서 누군가 다가와 ‘여기 이쪽’이라고 안내해주는 길표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이 텍스트에 어드레스가 있는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내게 말을 걸어오시는 특별한 말 걸기였고, 나 역시도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만의 말 걸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지나 대학원에서 상담을 공부할 때였다. 자존감에 대해 공부하던 중에 ‘wanted baby’와 ‘unwanted baby’가 언급되었다. ‘wanted baby’는 임신을 원하는 부모가 태중에서부터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태어난 그 아이는 자존감이 높지만, ‘unwanted baby’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부모가 태중에서부터 아이를 원망하기 때문에 아이의 자존감이 낮다는 내용이었다. 수업 중에 자신이 어떤 아이로 태어났는지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되짚어 가면서 대화하는 시간에 뜻밖에 많은 학생들이 ‘unwanted baby’였음을 고백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외할머니 손에 맡겨져서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부모와 떨어져 지냈으니 그 상황만 생각해도 나는 ‘unwanted baby’였다. 그런데 문득 그즈음 읽고 묵상했던 에베소서 1장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우리가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한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사도 바울의 찬송으로 고백된 내용이었다. 나는 내 육체의 부모로부터는 ‘unwanted baby’였고, 내 영적 부모인 하나님으로부터는 ‘wanted baby’였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그만큼 하나님의 원함이 부모의 원치 않음보다 더 강했다고.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후로도 지속적인 성경 읽기와 이런 주소 확인들을 거듭하면서 여러 순간의 크고 작은 흔들림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눈에서 배에 채우는 읽기로
목욕을 시켰는지 목에 뽀얗게 분을 바른 아이가 있다. 사람의 알인 아이가 하나 해질 무렵 골목길 문간에 나앉아 터질 듯한 포도 알을 한 알씩 입에 따 넣고 있었다. 한 알씩 포도라는 이름이 그의 입 안에서 맛있게! 지워져 가고 있었다. 이름이 지워져 간다는 것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 아이는 마지막 한 알까지 다 먹었다. 마침내 포도라는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다. 아이가 말랑말랑하게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이름이 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제 자러 갈 시간이었다.
〈포도를 먹는 아이〉라는 시다(정진규, 《알詩》).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성경을 읽는다는 것도 포도 알을 한 알씩 입에 따 넣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포도 알을 입안에 넣었을 때 포도의 에너지가 구체화하듯이 말씀도 단지 눈으로 읽는 글자가 아니라, 입에 넣고 먹어서 배에 채우고 소화를 시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 실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흘려 읽는 책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으로 매일 섭취해야 할 음식처럼 성경을 대하기까지 내게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항상 글자에 굶주려 있었던 어린 날에는 부엌에 놓인 성냥갑 뚜껑의 커다란 글자부터 시작해서 동그란 약통 뚜껑에 쓰인 ‘안티푸라민’이라는 글자, 그리고 할아버지가 읽는 〈매일미사〉까지 거의 닥치는 대로 읽어댄 것 같다. 성경도 주일학교에서 주는 질 좋은 연필과 공책을 받기 위해서 항상 친구들보다 앞서서 열심히 읽었다. 그렇지만 당시 성경은 내게 ‘그냥 읽는 책’이었다.
그러다 20대에 들어서면서 시작한 큐티를 통해 성경은 그냥 읽는 책이 아니라, 책을 읽은 내가 그렇게 ‘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책을 읽어서 아는 것으로 그칠 수 없었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이 ‘진짜 독서’인 큐티의 지난한 과정인 것이다. 이 힘든 과정을 우리는 신약의 요한과 구약의 에스겔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요한은 박해 중에 갇힌 섬에서 천사를 통해 작은 책을 갖다 먹으라는 요청을 받고 그 책을 먹었다(계 10:9-10). 에스겔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겔 2:8-3:3). 요한과 에스겔이 책을 먹는 과정을 보면서 읽는 행위가 단지 눈에서 그치지 않고, 먹어서 소화해야 할 중요한 음식임을 깨닫는다. 그들이 책을 먹자 그것이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쓰게 되었다는 것은, 성경을 읽은 이상 입안에서만 달콤한 맛을 즐기는 데 그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경을 읽은 내가 성경의 내용이 되고, 더 나아가 그 내용을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왕들에게 다시 전해야 했는데(계 10:9-10), 그 내용은 씹으면 씹을수록 쓰디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는 읽을수록 더 잘 소화하고 완전히 체화해야 하는 부서짐의 힘든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 큐티를 할 때는 거의 매번 귀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들릴 정도로 나의 성경 읽기는 밀어로 쓰인 연애편지를 읽는 것 같았다. 개인적인 기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밀월 기간이 다른 사람보다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대통령 한 분의 죽음 이후로 내적인 파열들이 심해지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사지육신이 아픈 것처럼 나의 큐티는 단어 하나에도 곧잘 발끈하거나 반대로 쉽게 움츠러들곤 했다. 그리고 4·16을 지나면서 총체적으로 개인 성경 읽기에 변화를 가져왔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이 더는 나 혼자서의 읽기가 될 수 없고, 읽는 순간 그것을 쓴 자와 더불어 공적인 사귐의 자리가 마련되고 더 나아가 내가 전하려는 자들과도 더 큰 나눔의 공적장소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읽어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에 대한 답이 궁색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내가 읽은 것에 대해 내 기쁨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도 같이 웃을 수 있는 공적 즐거움이 있어야 했다. 함께 즐거워하기, 그것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 위해 먼저 우는 자리에 서는 것부터였다. 하지만 청소년 시절의 지독한 궁핍과 방황 속에서 빠져나와 어느 순간 삶의 견결한 평화들을 누리기 시작한 자로서 다시 혼돈과 눈물과 신음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말씀을 먹었을 때 입에 달았지만 배에 내려갈수록 쓴물이 올라오는 것과 같은 시간들이었다.
끙끙 앓아가며 점점 알아가기
요 몇 해 동안 내 성경 읽기의 분위기를 말한다면, 평론가 김현의 책제목처럼 ‘행복한 책읽기’에서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옮겨간 것 같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확신을 말하며 사는 것이 미안하고, 방황하는 사람들 속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은 채 저기를 보고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결핍을 주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권여선의 《봄밤》이라는 소설을 보면 알코올 중독으로 지독한 고통을 견디며 죽어가는 동생을 외면하던 신앙 좋은 언니가 마지못해 병원을 찾아가서 “막내야, 기도해! 언니도 기도할게.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 영원히…”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심코 소설을 읽다가 ‘기도’ ‘하나님’ ‘사랑’ ‘영원’이라는 단어들을 접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 은혜롭게 사용되는 단어들이 이 세계 사람들의 언어로 다시 번역되어 읽힐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계언어처럼 이상하게 들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단어가 지닌 한계가 아니었다. 다만 그 단어가 말해진 장소가 평소 교인이 발을 들여놓기 꺼려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단어를 말하는 교인의 실제 마음이 단어들과 조금도 화합하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기도해” “나도 기도할게” 라는 이 말이 실제 그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 곁으로 한 뼘도 다가서지 못한 채 왜 이렇게 ‘겉도는 말’이 되었을까. 그동안 우리는 듣기 거북한 단어들을 하나씩하나씩 제거해버리고, 어느 순간 우리끼리 우리 안에서만 맴도는 말들에 만족해하면서 우리에게 기분 좋은 단어 몇 개를 쉬지 않고 재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끼리 있을 때는 뭔가 대단한 말 같지만 실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교회 안에서만 ‘맴도는 말’의 소비자들이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고통이라는 현실에 겉도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성경 읽기는 점점 더 괴로운 과정을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견딜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기도’라는 말에, ‘사랑’이라는 말에, ‘영원’이라는 말에 맴돌지 않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태 전 여름, 기차 안에서 문학잡지를 읽다가 소설가 한강의 작품에 대한 인상적인 평론을 읽었다. “학문이 의사처럼 사회적 징후를 관찰하고 진단할 때, 문학은 환자로서 최선을 다해 사회를 앓는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에 앞서 이 세상을 가능한 넓고 깊게 경험해보려 애쓰는 문학은 경미하거나 부분적인 증상(symptom)으로만 파악되는 다음 세상을 먼저 앓아버린다. 그럴 때 문학은 글이 아니라 차라리 몸이고자 한다.”(신샛별, 〈창작과 비평_여름〉, 2016)는 글이었다. 그는 한강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미리 세상의 증상을 앓아낸 것을 같이 앓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밑줄을 치며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적어도 문학은 지금 그 나름으로 문학의 구실을 하려 애쓰고 있구나 하며 안도했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읽기는 소설 읽기와 무엇이 어떻게 다르며 또 같을지를 생각하며 조금은 불안했다. 작가들이 이것은 글이 아니라 차라리 몸이고자 하는 심정으로 시대와 함께 끙끙 앓아내며 쓴 작품을 그와 동일한 고통으로 대하는 독자들의 성숙한 태도는 우리의 성경 읽기 자세를 충분히 고쳐 앉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고 있는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시선이 오늘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잘 보고 있는가? 함석헌 선생은 “앎은 앓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은 이 세계 사람들의 죄로 끙끙 앓고 계시는 하나님의 앓음을 알고 있는지 묻고 있는 말이다. 혹자는 큐티에 대해 굳이 ‘개인 성경 읽기’라는 단어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사(私)적인 성경 읽기의 범주에 가둬두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묵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사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큐티를 통해 개인의 영성이 깊어지면 그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고 그 앎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내 마음과 시선이 같이 따라 움직이는 삶을 의미한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하나님의 신음과 현실세계의 앓음을 알고 또 같이 앓게 될 것이 분명하다.
《드웰》(dwell, 성서유니온)이라는 책의 서문에 영성이라고 부르는 ‘들숨’과 선교라고 부르는 ‘날숨’이 설명되어 있다. 여기엔 하나님과 함께 사는 들숨의 삶과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참여하는 날숨의 선교에 대한 실제적인 고찰이 담겨있다. 이 ‘들숨’의 영성과 ‘날숨’의 선교는 성경 읽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영성과 선교, 이 둘은 별도로 구분하여 설명될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서 “세상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선교적 영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 읽기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경건의 독서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이 경건이 실현되어야 할 공적 장소에서의 참여적 독서, 세계감(世界感)적인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感)을 잡는 읽기
세계감(世界感), 한 시인의 글에서 발견한 단어였지만 지금 우리의 성경 읽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바른 관점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이 세계와 나를 온전히 느끼는 ‘감점’(感點)의 회복이 더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 읽기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좋은 것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땅의 신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관계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싶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그들이 맛본 좋은 것으로 이 땅의 어느 한 자리가 좋게 바뀌는 선교 현장이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처음 성경 읽기의 즐거움은 내 삶에 제대로 된 각(覺)을 세워주었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소를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覺)은 올바른 관(觀)을 씌워주었다. 더 깊은 성경 읽기를 통해 이 세계를 하나님 나라의 안목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의 성경 읽기가 관(觀)으로 세계를 분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따로 놀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가는 감(感)을 잡는 독서이기를 소원한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감(感)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매일 성경을 읽는 괴로움에 즐거이 참여한다. 이렇게 나는 매일 성경 읽기를 통해 조금씩 더 앓아가며 더 알아가는 중이다.
김주련
읽는 인간이고 싶다. 읽다가 쓰고 다시 읽고의 시간이 쌓이면서 계절이 읽히고 내가 읽히는 것이 좋다. 성서유니온에서는 <매일성경> 편집과 책을 만들다가 지금은 대표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읽고 있다. 지나면 지금 여기서의 나는 어떻게 읽힐까 두려워하면서.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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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의 행복
October 26, 2018, 1:53 am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어려운 형편으로 결혼하지 못하고 12년 동안 함께 사는 남편이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간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수술 시기도 지나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 얼마 동안 집에서 요양하다가 1달여 만에 다시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그 후 3주쯤 지난 후에 병원에서 그녀가 일하는 식당으로 생명이 며칠 안 남았으니까 퇴원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녀는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성 통곡을 했다. 눈물을 훔치고 생각했다. “곧 남편이 죽는데 마지막 선물은 없을까?”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 남편이 가끔 말했다. “빨리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데.” 그녀는 결혼식이 남편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면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데 남편을 가장 기쁘게 해 줄 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결심을 들은 남편의 직장 동료 택시 운전기사들이 자기 일처럼 준비해줬다. 직장 동료 부인들이 음식을 장만했고 운수 회사 사장이 주례를 맡아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은 눈물 바다가 되었다. 형부의 손을 잡고 입장하던 그녀가 신랑의 휑한 얼굴을 보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진통제를 맞고 서 있던 신랑도 눈물을 흘렸다. 하객들도 그 장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흐느꼈다. 그렇게 결혼식을 마치고 얼마후 남편은 숨을 거뒀다. 그 후 여인은 외롭고 힘들 때마다 앨범을 꺼내 결혼식 날 남편의 모습을 보면 신비한 힘과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
왜 행복이 없는가? 그 이유는 참 사랑과 희생이 없었기 때문이고 자신이 받으려고만 하고 주려고 하지 않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불행이 있다면 그 불행의 원인은 내 책임도 상당히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가장 큰 문제는 자신에게 사랑이 없는 문제임을 자각하는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가장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기도제목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함으로 내 손안에 있는 행복을 얻어 누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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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 스님의 곰
October 28, 2018, 9:43 pm
곰돌이 푸같은 인상의 용수 스님이 <용수 스님의 곰>(스토리닷 펴냄)이라는 책을 냈다. ‘나를 일깨우는 친절한 명상’이란 부제만 봐도 우리가 아는 그 ‘곰’은 아니다. ‘곰’은 티베트말로 ‘명상’이란 뜻이다. 원래 티베트어 ‘곰’은 익숙해지고 지견을 터득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선한 마음과 깨어있음을 기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 표지엔 곰 한마리가 두 발로 서 있다. 마치 사람처럼 서 있는 이 그림을 보노라면, 단군신화에 나온 곰 이야기도 동굴에서 이처럼 인간다움에 익숙해지고 지혜로워진 것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글은 용수 스님이 매일 아침 에스엔에스에 띄워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글귀들을 모든 것이다. 마치 새벽에 옹달샘에서 길어온, 전혀 오염되지 않는 약수 한사발 같은 글들이다. 용수 스님은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한 재미교포 출신이다. 그는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유타주립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2001년 우연히 티베트불교의 정신지도자 달라이라마의 강연을 들은 뒤 티베트불교에 귀의해 페마 왕겔 린포체를 만나 출가했다. 그후 남프랑스 티베트불교 선방에서 4년간 무문관 수행을 했고, 한국에 들어와 화계사, 무상사 등에서 수행하며 유나방송에서 명상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는 티베트 닝마파 한국지부인 세첸코리아를 설립해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수행자인 미티유 리카르 스님, 샤카파 법왕 사캬 티진 스님을 초청해 법회를 열며 티베트불교를 한국에 전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용수 스님의 글은 우선 친절하다. 많은 이들이 불교는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만, 그의 글은 이런 생각을 단숨에 날린다.
<스스로에게 친절하세요>
다 포기하고 싶고
환멸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삶의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휴식하세요.
하루 정도는 무기력과
멍 때리기를 허용하세요.
스스로에게 친절하세요.
하루가 지나면 다시
열심히 해볼 용기와 힘이 생길 것입니다.
현대인은 많은 스트레스, 노이로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상처로 인한 혐오와 증오도 적지 않다. 이로 인한 사회적 범죄도 문제지만 개인의 내면을 물들인 이런 미움으로 인해 우선 가장 고통 받는 이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그 자신이다. 따라서 용수 스님은 우선 자신을 구제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오래된 미움을 없애는 법>
미운 생각을 굴리면 자신만 힘듭니다. 미움을 없애려고 하면 미움에 힘을 부여합니다. 미움에 마음을 쉬듯이 저절로 일어나고 가라앉게 지켜봅니다. 험담을 하면 미움을 더 확고하게 만듭니다. 감정이 실린 말을 자제합니다. 같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래도 현재 상황이 너무 힘들면 지혜롭게 친절하게 피하는 것도 방편입니다.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미음은 조금씩 해체할 수 있습니다. 기분 좋을 때나 할 수 있을 때 짧게 사무량심 자비수행을 합니다. 이 사람도 나와 똑같이 행복을 원하고 행복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 행복하기를….
티베트불교의 최고 장점은 생각을 바꾸어 불행감을 행복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불안한 심리를 평화로운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용수 스님이 글 몇마디로 전해주는 마음의 태도가 바로 그렇다. 그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진언을 외우지 않더라도, 오직 ‘감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진언보다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진언>
돈이 없으면 몸이 건강해서 감사합니다.
몸이 아프면 아직 큰 병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큰 병이 있으면 아직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
곧 죽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서 감사합니다.
모욕을 당하면 인욕수행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상황이 좋든, 안 좋든>
일이 잘 풀릴 때는 수행자이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범부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명상가이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범부입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잘 알아차릴 때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한 안 좋은 상황이 혜택을 주는,
수행을 깊어지게 하는 좋은 상황입니다.
사실은 좋은 상황도 안 좋은 상황도 가짜입니다.
지나가는 허깨비입니다.
상황이 좋든, 안 좋든 큰 일로 만드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상처로 고통 받거나 심리적인 불안이 있으면 어서 그로부터 벗어나기만을 갈구한다. 그런 갈망이 고통과 불안을 더 크게 하기도 한다. 용수 스님은 명상이 진통제와는 다른 것임을 말해준다.
<명상이란>
명상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은 고통을 인정하고 느낄 수 있는 용기입니다.
삶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아픔이 있습니다.
행복하고 싶지만 참된 행복은 찾기 어렵습니다.
명상은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명상은 고통을 닦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삶이 썩 좋지 않습니다. 이 좋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명상입니다. 썩 좋지 않은 것에
불만을 내려놓고 괜찮아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환영하고 직면하면 고통이 딱딱하지 않고
어디서 찾을 수도 없고 연기처럼 흩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수행입니다.
슬픔, 불안, 분노, 불행 자체가 나쁘지 않습니다.
수행을 돕는 벗입니다.
용수 스님은 미국에서 자라고 서양과 동양의 사상을 접맥하며 쉽게 풀어내는 신세대 수행자지만, 성취를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을 경계한다. 책 제목 ‘곰’처럼 익숙해지고,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려움, 괴로움, 실패, 고난, 실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이어가라고 권한다.
<겨울 눈 속에 씨앗이 있다>
천 번의 어려움 뒤에 성취가 옵니다.
천 번의 괴로움 뒤에 평화가 옵니다.
천 번의 실패 뛰에 성공이 성공이 옵니다.
천 번의 고난 뒤에 행복이 옵니다.
천 번의 실수 뒤에 잘 하게 됩니다.
밤이 다하면 새벽이 옵니다.
일어서십시오.
인내하십시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마음공부줄 놓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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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식으면 열정도 식는다
October 29, 2018, 2:22 am
감정표현의 중요함
심리치료에서는 감정 표현을 하고 살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강조합니다.
감정을 숨기고 사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참으로
곤혹스런 주문입니다.
왜 그렇게 강조하는가?
감정은 근육같아서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약해지면 열정도 사그라듭니다.
몸짱인 사람들은 어디든 가려 하지만
몸에 힘이 없는 사람들은
집 밖으로 안 나가려 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감정 표현은 열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앵무새를 실험한 결과
평범한 문장을 배울 때보다
욕을 배울 때 열의를 더하더랍니다.
감정 표현이 열정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자기 안에서 낯설고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기겁을 하고 다시 묻어버립니다.
그런 분들은 놀라기를 잘하고
자칫 불면증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묻어버린 감정 에너지가 밤새 춤을 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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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성주간의 님 조오현스님
October 30, 2018, 1:54 am
» 지난 5월 입적한 조오현 스님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른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서울 강남구 압구정 2길 60 엠지타워 3층 <불교평론>은 시인·소설가·불교계 인사들의 사랑방이다. 만해 한용운의 잡지를 복간해 15년간 펴내다 2015년 폐간한 시문학잡지 <유심>의 산실도 이곳이다. 두 잡지 모두 지난 5월 입적한 조오현 스님이 창간했다. 이곳에선 출판기념회 할 곳조차 마땅치않은 시인들이 <유심>의 폐간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출간북토크나 문학모임이 잇따라 열린다. 매달 한 번씩 대중들이 세상과 불교계의 이슈를 가지고 모이는 ‘열린논단’도 내년 3월 100회를 맞는다.
내년이면 창간 20돌을 맞는 <불교평론>을 홀로 지키는 홍사성(68) 주간은 마치 살롱 마담처럼 지금도 시문학인들을 응대하는 게 주업이다. 지난 23일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이밥홍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황색인’을 쓴 소설가이자 펜클럽회장을 지낸 이상문 선생의 사무실이 인근에 있는데, 이곳을 찾는 시문학인들에게 주로 그가 점심을 사고, 홍 주간이 차를 산다고 시문학인들이 붙여준 게 ‘이밥홍차’다.
» '이밥홍차'모임 중인 문형렬 소설가와 홍사성 주간, 이상문 전펜클럽회장(왼쪽부터)
영정사진 모시고 출퇴근 때마다 향
그런 분주함 속에서도 홍 주간에게선 허허로움이 느껴진다. 조오현 스님이 입적한 뒤 홍 주간은 다비식 때 쓴 영정사진을 가져와 100일만 모셔놓고 치우리라 다짐했다. 차마고도 순례까지 가서 허전함을 달래고도 왔다. 그러나 100일이 지나고 200일이 다 되어가지만 영정은 치우지 못하고 출퇴근 때마다 향을 사른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란 만해의 ‘님의 침묵’이 바로 홍 주간의 마음인 듯하다.
홍 주간은 승려 출신이다. 그는 “여법하게 사는 스님들에게 도리가 아니다”며 이를 애써 감췄지만 이를 빼고서 그와 조오현 스님의 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16살에 금강산 건봉사와 설악산 신흥사 주지였던 성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0여년 동안 출가자로 살았다. 그 시절 홍 주간이 <풀과별>이란 잡지에 ‘내원암’이란 시를 쓴 것을 보고 이미 등단한 시인이었던 조오현 스님이 서울 나들이 길에 일부러 찾아 ‘시를 잘 써보라’고 격려해 준 적이 있었다. 시를 매개로 한 최초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몇 년 뒤인 1975년 조오현 스님이 홍 주간의 은사인 성준 스님에게 ’건당’을 했다. 동진출가 당시 은사가 대처승이었던 조오현 스님이 성준 스님을 은사로 삼아 조계종 승적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조오현 스님이 홍 주간의 ‘사형’이 된 것이다. 성준 스님이 1978년 열반한 뒤 49재 때 열린 문도회의에서 홍 주간은 스승을 잇는 신흥사 주지로 조오현 스님이 추천됐다. 홍주간도 뒤늦은 나이로 들어온 조오현 스님은 문도 내에서 기반이 없었지만 최연장자인데다 시를 쓰는 분이 신흥사를 이끌면 멋진 일이 생길 것만같아 행복했다. 그런데 홍 주간은 정작 자신은 환속을 선언했다. 그는 “엄격했던 은사 스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대중들의 눈높이만큼 중노릇을 해낼 자신이 없어서였다”고 했다.
» 서울 강남구 신사동 <불교평론> 사무실에서 매달 한번씩 사회와 불교계 이슈를 가지고 강연을 듣고 토론을 벌이는 열린논단 모습
필화 때도 책임지면서 간섭은 안해
환속한 홍 주간은 반도체회사에서 일하다 1982년 <불교신문> 기자로 ‘불교계’로 돌아왔다. 승복을 입고 조계종단의 학비 지원을 받는 ‘종비생’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만큼 불교계에 입은 은혜를 4년만 갚자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불교방송> 설립에 참여하는 등 불교계에 다시 뼈를 묻고 말았다. 그는 불교계에서 일을 하면서 전형적인 일 중독자였다고 한다. 부하들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 모습을 잘 아는 지인들이 요즘 그를 보면 “속한이 부처가 됐다”는 농담을 던진다고 한다. 그는 “다 큰스님의 큰 품 덕”이라고 고백한다.
그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사실상 <불교티브이> 고위직에서 잘려 설악산에 내려갔을 때였다. 조오현 스님은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라고 했다. 선어록에 나오는 이 말은 ‘오늘 죽어도 괜찮고, 내일까지 살면 더 좋고’라는 뜻이다. 조오현 스님은 “그대로 다녔으면 술 취해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 아니냐”고 했다. 홍 주간이 훗날 낸 첫 시집 <내년에 사는 법>도 이 ‘선어’를 딴 것이다.
홍 주간은 1999년 불교평론지가 필요하다며 조오현 스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차례의 청에 조오현 스님은 “꼭 필요하다면 절을 팔아서라도 해야지”라며 지원했다. 조오현 스님은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도 편집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불교평론>의 비판적 글이 ‘필화’로 번졌을 때도 조오현 스님은 책임은 자신이 졌지만 일체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유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교 얘기를 따로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가 <유심>에서 뛰놀게 했다. 스님들이 “불교 포교도 아닌 데다 무슨 돈을 그렇게 쓰느냐”고 군소리를 하면 “불교계가 세상에 입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갚는 것이다”고 했다. 홍 주간은 “큰스님의 그릇은 범인들이 헤아리기 어려웠다”며 일화를 전했다.
» 조오현 스님이 조실로 있던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의 선방 결제와 해제 때가 되면 찾아와 객비를 받아가던 한 유랑승이 조오현 스님의 다비식장에서 조오현 스님의 무애자재한 삶을 표현하는 무애춤을 추고 있다.
» 다비장에서 무애춤을 추던 유랑승을 꼭 껴안아주며 눈시울을 붉히는 홍사성 주간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설악산에서 선방 결제나 해제 때면 유랑승들이 몰려들었다. 종단에선 승려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객비를 못 주게 했다. 그러나 큰스님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를 제지하는 문도에겐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저 사람들은 객비 몇 푼 얻으면 그만이지만 너희들은 그 돈 아껴 어디다 쓰노?’라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또 한번은 사무실 보조원을 채용했는데 엉뚱한 실수 투성이어서 홍 주간이 그만두게 하려 했을 때였다. 조오현 스님은 “너처럼 잘난 놈은 어디 가서든 먹고 사는데, 저 녀석을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겠느냐”고 했다. 홍 주간이 “도저히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자 “청소라도 시켜라”며 그 청년의 월급은 따로 챙겨주는 것이었다.
‘설악산 스님’이란 시에서 ‘속은 진작 다 죽고 껍데기만 겨우 살아 있는, 한 만년쯤 된 고목나무’로 조오현 스님을 표현한 홍 주간이 마침내 눈시울을 적셨다. “늘 외롭게 홀로 지내던 큰스님이 가끔 전화를 했다. 벗들과 술을 마시던 중이어서 ‘여기 지방이다’고 둘러대곤 했는데, 큰스님은 다 알면서도 늘 ‘그러냐’고 했다. 이제 누구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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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이 나를 살게한다
October 31, 2018, 2:17 am
딸아이가 한국을 무척 그리워합니다. 이 어미의 욕심은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여기서 자라는 딸이 한글을 알고 한국말을 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주변의 교포들은 얘기했지만 우리 가족과 친지들의 사랑, 한국의 냄새, 맛, 소리들을 내 자식이 모른다면 견딜 수 없이 외로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 돌이 지났을 때부터 거의 빠짐없이 해마다 한국을 다녀왔지요. 어미의 욕심으로 딸은 이제 그리움이 주는 아픔도 함께 지니게 됐네요. 이미 채워진 것은 더 이상 그리움이 아니고, 그래서 우린 계속 그리워할 것을 만들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움은 ‘그리다’라는 말에서 온 것 같습니다. 마음에서 그리고 있으니 그리움입니다. 몸과 마음 깊이에 있지 않는 것은 생기 있게 그릴 수도 없고, 그리워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타계한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슈는 그녀의 창작의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그리움이라고 답했지요.
그런데 그리운 것들은 대부분 말로는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엄마가 그리워하는 여름의 소리가 무엇인지, 가을의 색깔이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서야 알 턱이 없겠지요.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창호지로 들어오는 아늑한 겨울 햇빛과 온돌입니다. 따스한 색깔의 장판지가 깔린 정갈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는 그 편안함! 비가 많이 오는 축축한 함부르크의 겨울날 배라도 아프면 정말 내 작은 몸 하나 비빌 곳이 없어 서럽기조차 한데 뜨거운 물을 담은 고무 물주머니를 배에 대고 털목도리로 칭칭 감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한 동네에서 20년 이상을 살다 보니 단골이 된 터키 아저씨의 야채가게 ‘당근’과는 각별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가게 문을 닫기 전에 장을 보지 못할 듯 한 날엔 제가 아침 출근길에 장을 봐놓으면 아저씨는 제 물건을 다른 터키 가게에 건네놓고 저는 퇴근길에 거기서 찾아갑니다. 날마다 새벽 도매시장에서 떼어오는 채소와 과일들은 물론, 꽃들도 싱싱하고 향기도 진합니다.
며칠 전 파슬리를 사려고 한 단 꺼내서 버릇처럼 향을 맡았더니 전혀 파슬리의 냄새가 나질 않았습니다. 어찌 파슬리 향이 전혀 안 난다고 했더니 주인 아저씨는 양동이에 꽂혀있는 거의 스무 단이나 되는 파슬리를 한 단씩 꺼내 맡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한 단을 맡던 얼굴이 환해지며 제 코 앞으로 들이 밀었습니다. 아, 파슬리의 독특한 향! 아저씨의 얼굴이 활짝 피고, 제 마음도 고마움과 기쁨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말이 많지 않은 이런 소소한 정성이 사람이 더불어 사는 일상에 향기를 주며 마음을 따스하게 해줍니다. 제가 독일을 떠난다면 이 터키 아저씨 가게가 무척 그리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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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평정은 어디서 왔을까
November 1, 2018, 7:28 am
이순신 장군은 차를 마시며 평정심을 지켜 나라를 구했다
» 영화 <명랑>에서
이순신은 덕수이씨 12대손이다. 아버지 이정은 네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는 희신.둘째는 요신. 세째는 순신. 넷째가 우신이다. 첫째 희신은 태호복희의 신하라는 뜻이다.둘째 요신은 요임금의 신하이다.셋째 순신은 순임금의 신하이고 넷째 우신은 우임금의 신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순신의 아버지 정은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탐하기 보다 덕을 베풀고 살기를 바랬을 것이다.
» 전남 보성에 있는 열선루
이순신 장군의 부인은 상주방씨이다.그 당시 보성군수 방진이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무남독녀 딸을 주어 사위를 삼은 것이다. 난중일기 1594년 7월 17일자 기록에는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가 장군을 찾아왔다. 이순신은 접빈진다례 의식으로 차를 대접하였다. 그후 명나라의 장수들이 조선에 올때는 이순신 장군에게 차대접 받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그들이 가져온 귀한 선물중에는 차숫가락과 차항아리등이 있었다. 그처럼 귀한 다도구는 차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선물하지 않는 것이다.
이순신은 전쟁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조상차례는 물론 조정의 역대제례등을 빼놓지 않고 모셨다.차례에 관한 예절을 중시하고 명나라 장수를 영접할때는 접빈진다례를 행하였다.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진정한 다인으로 추앙하지 않을수 없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갑오 1594년 7월 17일 맑음. 새벽에 포구에 나가 진을 쳤다.오전 10시쯤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가 병호선 다섯척을 거느리고 들어왔다.나는 진다례의 자리를 접빈진다례로 베푼 다음 술잔을 서로 권하며 강개한 정을 나누었다.
» 보성차밭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쓴 곳이 바로 보성 열선루이다. 그는 왜군과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보성에서 8일간 머물렀다. 어디에도 군량미가 없었으나 다행히 보성 조성에 6백섬의 군량이 비축되어 있었기에 싸울 수 있었다.
이순신은 위장과 장이 좋지 않아 복통으로 잠못 이루는 밤도 많았다.그때 마다 발효차와 고뿔차를 달여 마시며 복통을 치료하고 전투 준비를 할수 있었다.
보성 대원사에서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이 보성에서 마신차를 지금도 법제하여 이순신 호국다례제에서 올리고 있다. 대원사는 보성녹차의 뿌리이며 보성차의 시배지이다. 서기 503년 백제 무녕왕 3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백제고찰인 대원사 극락전 주변에는 고차수가 자연상태로 자라고 있다.
» 전남 보성 대원사 경내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침착하게 태산처럼 무겁게 행동하라.”
이순신장군께서 옥포해전을 앞두고, 죽음의 두려움에 떠는 전라 좌수군 병사들에게 내린 서릿발같은 말씀이다. 나무들은 보통 하늘로 자란만큼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그런데 유독 차나무는 자기 키의 세배까지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이순신은 차를 마시며 차나무처럼 자기 중심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평정심을 잃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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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행 아닌,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
November 4, 2018, 1:06 am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알다가도 모를 존재가 사람이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어디 용한 점쟁이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꿈을 꿨는데, 어떤 의미인지 해몽을 한번 받아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어디 되는 게 있어야죠? 이번에 뭔가 제대로 걸릴 것 같은 분위기여서요….”
평소 빅데이터, 4차 산업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설파하던 그였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빅데이터와 점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그는 중요한 사업 결정을 앞둔 듯했다. 평소 같으면 치밀한 사업 분석과 시장 전반에 대해 두루 살펴본 뒤 결단을 내렸을 그였다. 그런데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고 사업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안 될 때가 있는 법이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처럼, 본인의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그리고 나머지 70%는 운이 지배한다고 믿는 경우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감(느낌)에 확실한 응원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점의 계절이 돌아왔다. 수능시험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탓인지 자녀의 대학 진학을 앞둔 엄마, 결혼 배우자 결정을 앞둔 젊은이, 부부관계에 위기가 온 중년, 연말연초 인사를 앞둔 공무원과 기업 임원, 요동치는 부동산시장에서 거래를 앞둔 투자가들, 직장을 잃은 이들이 남모르게 운명철학관이나 점집 같은 곳을 찾는다. 앞날의 운세와 길흉을 예언한다는 곳 말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누구에게나 반갑지 않은 일이다. 개인의 불안한 심리와 간절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는 곳이 바로 점집이고 운명철학관이다.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을 말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성업 중인 이유다. 평소 점집이라면 소 닭 보듯 지내왔던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약 10년 전쯤의 일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손자를 걱정한 어머니께서 지인의 강권으로 용하다는 점집을 찾았던 모양이다. “손자는 흰색은 피해야 해. 무조건 속옷은 붉은색을 입으라고 해!” 그 점쟁이는 노인보다 훨씬 나이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 반말로 명령했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색깔이 당락을 결정한다고 했다. 수학능력시험 당일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불쌍한 나의 아들은 평소에 입지 않던 팬티를 입어야 했다. 그것도 붉은색으로 말이다. “꼭 이거 입어야 해요? 안 입던 거라 불편한데….”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뜻에 따라서 빨간색 팬티를 입고 시험장에 갔다.
온종일 초조히 기다리다가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녀석에게 결과를 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혼자 있게 내버려두세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내심 손자의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할머니는 실망과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왜 그랬는지는 거의 1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점 얘기라고 하면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런 배경도 모르는 나는 평소처럼 흰색 차량에 태워 시험장에 보냈던 것이다. 흰색을 멀리하라는 주의사항을 전달하지 않았음을 ‘아차’ 하면서 어머니는 혼자 끙끙 앓고 자탄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점쟁이에게 어머니는 아들의 직장 운도 물어봤던 모양이다. “걱정 마! 아들은 70살까지 월급쟁이 할 운세야.” 그토록 용하다는 점쟁이의 단언과는 달리 나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직장을 나왔다. 입사 동기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말이다. 기가 막혔다.
이처럼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소원 성취, 성공을 운명에 의지하는 기복적인 심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인간에게 나타난다. 혹은 선뜻 본심을 털어놓기 어려운 개인 간의 소통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형제간의 재산 분쟁, 집 나간 딸, 매일 구박하는 엄마, 남편의 바람기, 사이코 같은 직장 상사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토로한다. 물론 교회나 절을 찾는 사람도 있고 정식으로 심리 상담을 받거나 정신과 의사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자격증도 없는 전혀 모르는 대상에게 적지 않은 돈을 내면서까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복채란 어떤 의미에서 익명의 대상에게 본심을 털어놓은 비밀 유지 비용일지도 모른다.
데런 브라운이란 사람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소재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유명해진 영국인이다. 그가 제작한 방송 프로그램 <기적을 팝니다>(miracle for sale)를 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근심이 많고 불안해하며, 별거 아닌 것을 쉽게 믿고 의지하는지 알 수 있다.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선진국이란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정말이지 불안한 동물이다. 불투명한 미래가 두렵고, 그 불안을 먹이로 요행의 심리가 비집고 들어온다. 요행을 바라는 심리가 점(占)이라면, 작고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다른 의미의 점(點)을 강조했다.
“여러분은 미래로 향하는 점을 연결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점들은 연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과거의 점들이 어떤 식으로든 미래에 연결된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저 유명한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문의 한 부분이다. ‘점을 연결하라’는 이 연설에서, 그가 말하는 점이란 작은 인연, 작은 땀방울, 작은 성취, 작은 가치, 그런 것들이 연결되어 큰 것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렇다. 나의 과거에 해답이 분명히 숨어 있다. 요행이 아니라 과거 내가 투자했던 것들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점(占)이 아니라 점(點)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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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November 4, 2018, 1:24 am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스스로 반성하라"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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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인간이 되는 첫조건은
November 4, 2018, 1:29 am
"사람이 되려면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고를 반성하는 것이다. 사람이 되려면 자아를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매사를 자기관점으로 살펴서도 안 된다.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매일 세 번 자신을 반성한다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문제도 풀린다."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 펑유란의 <간명한 중국 철학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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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November 4, 2018, 1:33 am
"산 밖에 산이 있고, 사람 밖에 사람이 있다."
-중국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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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된 부처
November 4, 2018, 1:20 am
덜 된 부처
-실크로드 시편4
홍사성
실크로드 길목 난주 병령사 14호 석굴입니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이 겨우 형체만 갖춘
만들다 만 덜 된 불상이 있습니다.
다 된 부처는 더 될 게 없지만
덜 된 부처는 덜 돼서 될 게 더 많아 보였습니다.
그 앞에 서니 나도 덩달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실크로더 여행 시집-사막에서 열흘>(책만드는집 펴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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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구 명훈이의 신은 어디에
November 5, 2018, 3:23 am
» 공원 벤치에 누워있는 노숙인. 사진 <한겨레> 자료
내 친구 명훈이
김 형 태 (<공동선> 발행인, 변호사)
“명훈이 형님은 지난 3월17일 오후 3시42분에 안암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빡빡 깍은 머리는 길게 자라 텁수룩한데 초가을 따가운 햇살에 어울리지 않게 낡은 모직 남방셔츠와 헐렁한 바지. 영락없는 노숙자 차림의 친구 동생은 겨우 몇 살 많은 형의 죽음을 마치 아버지 부음 전하듯 최대한 예의를 다해 이렇게 전했습니다. 병원비며 장례비는 다 구청에서 내주었다더군요.
몇 년 전 명훈이네 허름한 다세대 빌라 집을 처음 찾아갔을 때 마치 좁디좁은 동굴에 들어선 것 같았습니다. 현관문에서부터 거실, 방 할 것 없이 길바닥에서 주워온 헌 옷가지며 가재도구, 고물, 책들이 천정까지 꽉 차 있었습니다.
그 어두컴컴한 데 몸 하나 겨우 눕힐 좁은 자리에 앉아 친구 명훈이가 헤헤 웃으며 사과를 먹으라고 건네는 거였습니다. “형태야, 이거 새벽에 요 앞 아파트 단지에 갔다가 주워 온 거야. 이 멀쩡한 걸 왜 버렸을까. 헤헤헤. 나 먹으라고 버렸나? 헤헤헤”
그때 나도 귤인지 무언지를 사들고 갔던 거였는데 친구가 건네는 사과를 ‘이거 제대로 씻기나 했나’꺼림칙해 하면서 겉으론 맛있는 척 두 개나 먹었더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동네 교회에서 처음 만난 명훈이는 정신이 멀쩡했던 그때부터도 ‘헤헤헤’사람 좋은 웃음을 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수십년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구불구불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철에 안맞는 옷차림에 예의 그 웃음을 웃으며 “차비 좀 주라”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명훈이의 ‘차비’방문은 그 뒤로 십 수년을 이어갔습니다. 언젠가는 좀 미안했던지, 오바마 대통령이 친구인데 곧 큰 돈을 보내주기로 했으니 그때 갚겠다 했던가.
들어보니 젊은 시절 미국서 학위받고 돌아와 결혼도 했고 대학에서 얼마동안 강의도 했던 모양인데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만 겁니다. 그 뒤로는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남동생과 굴속 같은 집에서 길거리 버린 음식을 주워 먹으며 살았습니다. “길 고양이가 내 경쟁자야, 헤헤헤”이런 소리도 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에는 차비가 없어 서울 강북 장위동 집에서 강남역 우리 사무실까지 반나절을 걸어 온 적도 있었지요. 그래도 명훈이는 주은 음식을 집 없는 개나 고양이와 나누고, 부자동네에서 내다버린 쓸 만한 털옷을 한겨울 길거리서 추위에 떠는 노숙자 아주머니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하긴 우리 꼬마 손자 녀석도 친구가 이사 가는 집에서 얻어다 준 그림 동화책들을 열심히 보고 있네요.
명훈이는 냄새난다는 구박 받으며 교회도 빠지지 않고 나갔답니다.
얼마 전에는, 저렇게 거리를 떠돌다 정신병원에 강제수용 되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되고 돌봄이 필요할 거 같아 동 주민쎈터에 대신 도움을 청해 보기도 했지만 본인이 한사코 거절하니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연락이 끊기고 1년여. 친구는 그렇게 갔다는 군요.
형의 마지막을 전하는 정신지체 동생에게 혹 뭐 도와 줄 거 없냐고 묻자 꼭 제 형처럼 헤헤헤 웃으며 연신“저는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였습니다.
저 착한 명훈이네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세상에 강하고 똑똑하다는 이들이 남들을 괴롭히면서도 떵떵거리고 잘 사는 걸 보면서 당신의 섭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그렇지. 당신 섭리를 ‘내가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도 천당 가게 해주시는 데’서 찾으면 당신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을 터.
로마황제의 아들이 아니라 변방 유다 보잘 것 없는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많이 배우고 사람들로부터 대접받는 대사제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시골 목수로.
같이 어울린 이들이라곤 맨, 어부에, 세리에, 창녀에, 문둥병자에, 귀신들린 자들 뿐.
그리고 마침내는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을 참칭해서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강도들과 나란히 십자가에서 마지막을.
예수님 삶 어느 한 자락에서도 우리네 눈에는 하느님의 섭리로 볼 구석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섭리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니 이게 보통 일은 아닙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친구 명훈이도, 그리고 그 동생도, 저 옛날 옛적 예수님 따라다니던 딱 그런 사람들이네요.
이 글은 <공동선 11, 12월호 머리글>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