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의 유심 기획과 한국적 사유의 발현
홍승진(서울대학교)
1. 문제 제기
본고는 만해 한용운이 잡지 유심(惟心) 을 기획한 방식을 고찰함으로써, 향후 님의 침묵 으로 이어
지는 그의 문학 세계 저변에 한국적 사유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해명하고자 한다. 한용운은 1913년에 조선불교유신론 을 발간하고, 1914년에 대장경을 발췌하여 불교대전 을 편찬하였으며, 1918년에 유 심 을 펴냈다. 이후 1919년 3 1‧ 운동 참가로 수감 생활을 겪은 뒤에 집필한 시집이 님의 침묵 이다. 이를 보면 님의 침묵 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목에 잡지 유심 이 놓여 있음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다.
이처럼 한용운이 편집과 발행을 도맡은 잡지 유심 은 한용운 문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매체임에도, 그 잡지에 관한 연구는 다소 부분적인 측면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선행 연구에서는 유 심 을 불교 잡지로 규정하였다. ) 불교 외의 사상적 지향성을 보이는 인물들이 유심 필자로 참여하였 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잡지를 단순히 불교 잡지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심 의 불교적 성격도 ‘어떠한’ 불교인지를 보다 더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유 심 지의 기획은 한용운이 다양한 사유의 맥락들과 얽혀 있음을 보여주기에, 유심 의 기획 방식에 관한 연구는 님의 침묵 을 낳은 만해의 사상적 토대를 더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 이다
본 논문은 유심 에 실린 글과 그 글의 필자 전체를 분석하여 잡지의 의미망을 조선불교와 천도교와 대종교의 세 가지 사상적 맥락으로 범주화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는 유심 필진 각각이 잡지 발행 당시에 어떠한 사상적 ‧ 학술적 그룹 속에서 활동하였는지를 밝히고, 각 그룹의 필자들의 글에 공통적으 로 나타나는 특성을 파악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잡지 이름인 ‘유심 의’ 함의, 잡지를 둘러싼 한용운의 사상적 교류와 인적 네트워크, 그 교류의 종합체로서 발현된 한국적 사유의 특징 등을 해명하고자 한 다.
2. 한국 수양 전통의 회통 ― 조선불교와 천도교와 대종교
유심 은 불교잡지가 아닌 수양잡지를 표방하였다. 한 신문기사는 “한용운 씨가 근대 청년에게 수양
의 眞諦를 계시고 야 獨力으로 창간 것 이” 유심 이라고 소개하였다. ) 또 다른 신간소개에 서는 유심 이 “유일 수양잡지로 其名이 漸高”해간다고 언급하였다. ) 유심 은 신문광고를 통해서도 스스로의 성격을 “수양잡지 라고” 천명하였다. ) 유심 을 불교잡지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유심 발행과 같은 시기에 불교 교단의 유일한 기관지가 발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유심 이전에는 신문관에서 발행한 수양잡지가 있었지만, 유심 이 나온 시점에 유심 이 “유일한 수양잡지 였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심 에 필자로 참여한 최남선은 소년
(少年) (1908년 11월 창간, 1911년 5월 폐간 에서) 청춘(靑春) (1914년 10월 창간, 1918년 9월 폐간) 으로 이어지는 수양잡지를 그가 대표로 있던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서 간행하였다. 유심 제1호가 정 확하게 청춘 이 폐간되던 시점인 1918년 9월에 발행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유 심 을 불교잡지의 흐름이 아닌 수양잡지의 흐름 속에 위치시켜놓고 보면, 한용운이 이 잡지를 기획하였 던 의도가 더욱 명료히 드러난다.
제1호 제2호 제3호
崔麟 「是我修養觀」
崔南善 「同情바들必要잇는者ㅣ 되지말라」
柳瑾 「修進」
李光鍾 「惟心」 「善養良心」 「靜坐法」
寓山 頭陀, 朴漢永, 石顚 「優曇鉢花再現於世」 「惟心은卽金剛山이안인가」 「陁古兀의詩觀」
李能和 「宗敎와時勢」
金南泉 「心論」 「心의 性」
康道峯 「反本還源」
徐光前 「家庭敎育은敎育의根本」
金文演 「自己의生活力」
桂東 山人, 林圭 「學生의衛生的夏期自修法」 「人格修養의初步」
印度 哲學家 타쿠르 「生의實現」 「生의實現 (二)」
菊如 (양건식) 「悟!」 「悟!」
白龍城 「破笑論」
權相老 「彼此一般」 「彼何爲者오」
威音人 「惟心에」
小星 (현상윤) 「몬져理想을셔우라」
洪南杓 「勤勞라」
위의 표 중에서 최린, 최남선, 유근, 박한영, 이능화, 임규, 양건식, 권상로, 현상윤은 청춘 제14호 (신문관 창업 10주년 기념호 에) 집약된 신문관의 인적 네트워크에 해당한다.5) 이들 중에서 불교계 인물 은 박한영, 이능화, 양건식, 권상로이다. 최린은 천도교계 인물이며, 유근은 대종교계 인물이다. 이들은 최남선과 임규가 운영의 핵심을 맡은 신문관을 통하여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상윤은 신문관, 천도교, 대종교와 관계가 있다. 요컨대 이들의 연관성은 신문관을 중심으로 불교와 천 도교와 대종교의 흐름이 결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두연은 신문관에서 출판한 서적들의 상당 부분이 “조선의 사상과 언어, 종교, 속담, 요리 등, 이른 바 ‘조선 것 으로’ 구성된다 고”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신문관에서 간행한 학술서 10권 중에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와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 , 주시경과 김두봉의 말의 소리 와 조선말본 , 대종교의 서적인 신단실기 와 삼일신고 등이 조선의 사상과 언어를 다룬 것이라고 보았다.6) 이를 미루어보면, 유심 에 필자로 참여한 불교계 인물은 단순히 불교인이라기보다도 ‘조선적’ 불교를 지향한 이들로서 재 조명될 필요가 있다. 류시현에 따르면, 최남선과 이능화와 권상로는 1910년대에 ‘조선 이라는’ 단위에 입 각하여 불교를 연구하였는데, 이는 일본 및 중국불교와 변별되는 조선불교만의 특성과 장점을 규명하였 다는 점에서 조선학 연구의 일환에 해당한다고 하였다.7) 이와 같이 신문관의 특징은 조선학 연구에 있 었고, 이와 연관이 있는 유심 의 불교계 인물들은 불교를 조선적인 사상 ‧ 종교로서 인식하는 데 천착 하였던 것이다.
신문관의 인적 네트워크에 나타나지 않은 유심 의 불교계 필자들도 그러한 관점에서 효과적으로 이 해해볼 수 있다. 박한영 ‧ 백용성 ‧ 김남천 ‧ 강도봉 등은 조동종 전통의 일본불교로부터 임제종 전통의 조 선불교를 지키고자 하였던 흐름 가운데 있었다.
정신 ‧ 사상의 조선적 정체성에 대한 유심 의 지향성은 불교의 테두리에서 나아가 한국의 자생적 ‧ 토 착적 사유라 할 수 있는 천도교 및 대종교에까지 이른다. 천도교인 최린과 대종교인 유근을 필두로 최 남선, 이광종, 임규 등이 이러한 흐름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토착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서 중요한 점은 이 범주에 속하는 인물 각각이 명확하게 스스로를 천도교인 또는 대종교인으로 표명하 지 않을 수도 있으며, 한 인물이 천도교와 대종교의 두 흐름에 걸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등의 학문적 모임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왕 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의 폐단을 극복하는 동시에 서구 일본- 문명의 침입으로부터 조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천도교와 대종교는 유불도 ‧ 샤머니즘 ‧ 단군신앙 등과 같은 한국의 오랜 사유들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그와 같은 전통들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적극적 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3. 개벽사상으로서의 수양론
1)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의 수양
“吾人이 최고지위를 점야 최대令名은8) 享은 물질적 문화에만 止이 안이오 其 根本과 源泉이 되
良心을 善養에 在다 노라”9)
5) 청춘 의 필자 구성 및 인적 네트워크는 권두연, 앞의 책, 470~477쪽에서 자세히 정리하였다.
6) 권두연, 앞의 책, 329~330쪽.
7) 류시현, 「1910년대 조선불교사 연구와 조선학의 토대 형성」, 한국 근현대와 문화 감성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4, 39쪽.
8) “최대令名은 은” ‘최대令名을 의’ 오기인 듯하다 — 인용자 주.
9) 李光鍾, 「善養良心」, 惟心 제2호, 1918. 10, 36쪽.
物質文明은 人生究竟의 文明이 아닌즉 다시 一步를 進야 精神文明에 就믄 自然의 趨勢라 是로 由 면 物質文明이 人에 對야 幾分의 毒害를 與믈 推想기 不難도다 믈며 外地全盛의 物質文明의 餘波가 急潮와 가치 輸入, 輸入이라고 나니보다 寧히 侵入이라고 만한 朝鮮의 人이 엇지 그 毒害를 免기 容易리오 現今의 朝鮮人은 文明創造者도 아니오 繼續發明者도 아닌즉 아즉 被文明時代라 지 니 被文明時代에 在야 相當 修養의 實力이 無 者 驚感浮動야 滿腹의 心事가 金錢狂이 아니면 곳 英雄熱이라 . . .
徒勞의 金錢狂과 虛僞의 英雄熱은 다만 不平과 煩悶을 增加 而已니 何益이 有리오 是 立志不固 의 人이 갓 物質文明의 現象에 沈醉야 虛榮心을 挑發 所以라 故로 何人이라도 心的 修養이 無 면 事物의 使役者 되기 易니 學問만 有고 修養이 無 者 學問의 使役이 되고 知識만 有고 修養이 無 者 知識의 使役이 되나니라10)
“腦者 神之機關也라” . . . “天下 事物이 無因이면 不會니 汝之神은 無因而能生死乎아”11)
“前家의 梧桐은 法律的으로 形質的으로 그 주인에게 공헌 가치 幾圓의 金錢에 불과나 도덕적 으로 정신적으로 隣家의 余에게 惠波12) 及믄 실로 금전을 초월지라”13)
“극단적인 유물론자는 사람의 심리 작용은 경험의 흔적 인상이 뇌 속에 각인되어 생겨난 것일 뿐이라 고 말하며, 극단적인 유심론자는 반대로 세계 일체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데에서 비롯하며 마음이 아 니면 사물이 없다고 하여 양자 모두가 곧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에 빠진다.”14)
2) 동서양 전통 철학을 넘어서는 내재적 신성의 사유 이능화가 유심 에 실은 글은 표면적으로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의 종지를 소개하고 비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세 종교의 당대적 한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먼저 조선 유교는 주자학 수 입 이전(신라 ‧ 고려 과) 이후 조선 의( )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자유사상의 시대였으나 후자에 이르러 속박 사상의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후자의 선비들은 주자의 축음기, 남송(南宋) 유학의 복사판 [搨影板]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 불교는 조선왕조의 압박으로 인하여 대승이 아닌 소승에 그쳤으나, 오늘날에는 개개인을 교화 ‧ 제도하는 데 만족하지 말고 사회를 개선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는 최근 들어 교리보다도 세력의 확장에 기울어져 ‘기독교만능주의 를’ 고취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이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면에 서구 제국주의 라는 정치적 논리가 도사리고 있음을 경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15)
“驚歎 만 無盡無量의 現象이 永遠의 法則에 從야 活動 此 絶對 世界에 반다시 其를 支配며 其를 創化 神이 有리라 그리야 其 神은 全知全能인 吾人의 精神作用과 唯一根底의 靈能이리라 卽 吾人은 小 神인 大 神의 所事를 執行 者로 吾人의 一切業務 摠 是 神聖 天職일지라”16)
“人의 人된 所以는 獸에 離하지 안이하는 肉이 안이오 神에 進向할 靈에 在하니 修養의 第一步는 獸에 離하지 안이하는 身軆에 置하나 修養의 根抵17)는 神에 進向할 精神에 置하지 안이치 못할지니 修身의
10) 韓龍雲, 「朝鮮靑年과 修養」, 惟心 제1호, 1918. 9, 6~7쪽.
11) 白龍城, 「破笑論」, 惟心 제2호, 1918. 10, 36~37쪽.
12) “惠波”는 ‘專波’의 오기로 추정된다 — 인용자 주.
13) 「前家의 梧桐」, 惟心 제3호, 1918. 12, 9쪽.
14) 李光鍾, 「靜坐法」, 惟心 제3호, 1918. 12, 19쪽.
15) 李能和, 「宗敎와 時勢」, 惟心 제1호, 1918. 9, 33~35쪽.
16) 崔麟, 「是我修養觀」, 惟心 제1호, 1918. 9, 18쪽.
本이, 이에 立하고 養德의 源이, 이에 發하느니라.”18)
“소위 神祕者 皆 吾人이 爲智識의 所限고 又 不肯可以硏究야 人々이 神祕之어 我亦神祕之로 다”19)
현상윤은 이상(理想)을 품는 것이란 “천국의 極樂園을 능히 지상에도 건설 수 잇다는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확실히 낙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0)
3) 신체와 감각의 현실에 대한 긍정 임규는 학생 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에서 “자기의 미숙 학과를 연습면셔 신체의 건강법도 강구 고 일변으로 정신수양에 주의를 가야 . . . 인물이 일층 상진(上進) 자 가” 되어야 한다고 요청한 다.21)
“身心에 엇지 二元이 有하리오 . . . 古來로 고행수도, 금욕단식, 그 身軆를 惡視하야 정신의 위안을 구하고쟈 하는 수양은 아모 功效도 無한 邪道”22)
“수양이라는 것은 육체와 정신을 固宜 함께 돌보는 것이라 . . . 정신의 나는 그 능력이 멀리 몸뚱이 의 나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로다”23)
4) 자유와 평화의 확장을 향한 진화론
“일체의 해탈을 득코자 자 먼져 자아 해탈지라 . . . 자아를 해탈믄 我의 자유에 在 이오” . . . “자기의 실천이 無면 허다 세월을 經더래도 前定의 이상향에 도달 日은 無리니 결국은 자기의 노력에 의야 心을 修며 性을 養야 實踐躬行의 향상을 圖메 在니“24)
“事에 臨하야 屈하지 안이하는 용자의 정신은 금일의 면학할 바이로되 그 殺伐粗暴, 身命을 視함을 草芥와 如히 하는 혈기에 至하야는 결코 피하지 안이치 못할지오”25)
“必 相讓相助야 互相間 발달을 期圖지오 不然 卽 生存競爭 裡에 立야 종내 退步를 면치 못지 니 此에 기인야 비로소 인류의 同情이라 것이 有니 동정은 즉 良心이 발현 단서라 노
라”26)
5) 민족성에 대한 自他 및 强弱의 관점
“人은 自來의 기회만을 待 者ㅣ 아니오 능히 기회를 促進고 時勢 창조 者ㅣ이리오”27)
“다만 究竟의 弱者와 究竟의 强者ㅣ 世上에 本無한즉 昨日의 强者ㅣ 或 今日의 弱者ㅣ며 今日의 弱者ㅣ 或 來日의 强者ㅣ리니 强弱이 을 밧고 날은 禍福이 한 임자를 밧고날이라”28)
17) “根抵”는 ‘根柢’의 오기인 듯하다 — 인용자 주.
18) 林圭, 「人格修養의 初步」, 惟心 제2호, 1918. 10, 24쪽.
19) 李光鍾, 「靜坐法」, 앞의 글, 15쪽.
20) 小星, 「몬져 理想을 셔우라」, 惟心 제3호, 1918. 12, 34쪽.
21) 桂東山人, 「學生의 衛生的 夏期 自修法」, 惟心 제1호, 1918. 9, 42쪽.
22) 林圭, 「人格修養의 初步」, 앞의 글, 22쪽.
23) 李光鍾, 「靜坐法」, 앞의 글, 20쪽.
24) 「自我 解脫라」, 惟心 제3호, 1918. 12, 3~4쪽.
25) 林圭, 「人格修養의 初步」, 앞의 글, 23~24쪽.
26) 李光鍾, 「善養良心」, 앞의 글, 34쪽.
27) 「遷延의 害」, 惟心 제3호, 1918. 12, 6쪽.
28) 崔南善, 「同情 바들 必要 잇는 者ㅣ 되지 말라」, 惟心 제1호, 1918. 9, 23~24쪽.
“자기의 생활 방침을 자기가 변득(辨得)기 불능고 타인을 의뢰은 토우(土偶) 목우(木偶)와 여(如) 무기체(無機體) 물(物)이니”29)
“徹悟 식견, 웅대 기상이 富 민족은 우승의 지위를 점령고 少 민족은 열패의 치욕을 자초 니 문명의 우열은 그 식견, 기상의 多少의 현상이니라 . . . 생존은 인생의 대희망이오 활동은 우주 의 대원리니라”30)
“로히 발흥야 니러나는 국민의게는 반드시 무슨 보아만31) 이상이 잇고, . . . 오늘날 我利 알 고 남 잇는 줄은 죠곰도 모르는 열강국의 叢中에셔 호을노 人道 주장고 정의를 절규는 져 米國 사람의게는, 십육칠세기경에 멀니 영국으로부터 이상적 생활을 作爲키 위야 신대륙으로 건너오던 (청 교도)32)들의 진실되고 결백 神子的 이상이 그 사상의 근17세기경 저를 일운 것”33)
류시현에 따르면, 현상윤은 제 차1 세계대전(1914~1918) 말부터 서구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반성하 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동양과 서양을 ‘약자 강자/ ’ 또는 ‘야만 문명 의/ ’ 이분법으로 판단하던 이전과 달리, 그 무렵 그는 동양의 정신문명과 서양의 물질문명 각각이 나름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인식하였다는 것이다.34)
“그 보수주의 그 썩고 썩어서 구린 가 물큰물큰 나는 「석가나 공자나 야소가 될 수 업다 나가 엇지 감히 석가나 공자나 야소가 될 수 잇나 하는」 부패적 사상 나약적 퇴보적 절망적 고식적 病死적 구습을 快革고 「석가나 공자나 야소도 別人이 아니다 나도 면 그네와 가치 된다 그네와 가치 여 야 겟다 되여야 겟다」는 自任的 정신 적극적 활발적 전진적 實地적 진취적 향상적 정신 곳 다시 말면 生的 爲的 일심으로 勤勤勞苦여야만 복이 유 장래 神聖한 장래 쾌락한 장래가 우리의 압예
驅步驅步로 나옴니다”35)
4. 결론
본 논문은 유심 에 실린 글과 그 글의 필자 전체를 분석하여 잡지의 의미망을 조선불교와 천도교와 대종 교의 세 가지 사상적 맥락으로 범주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심 필진 각각이 잡지 발행 당시에 어떠한 사상 적 ‧ 학술적 그룹 속에서 활동하였는지를 밝히고 각, 그룹의 필자들의 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파악 하였다 이를. 통하여 잡지 이름인 ‘유심 의’ 함의 잡지를, 둘러싼 한용운의 사상적 교류와 인적 네트워크, 그 교 류의 종합체로서 발현된 한국적 사유의 특징 등을 해명하였다.
29) 金文演, 「自己의 生活力」, 惟心 제1호, 1918. 9, 40쪽.
30) 權相老, 「彼何爲者오」, 惟心 제3호, 1918. 12, 31쪽.
31) “보아만”은 ‘볼만한 을’ 의미하는 듯하다 — 인용자 주.
32) 괄호 앞에 ‘protestant’에 해당하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지 않다 — 인용자 주.
33) 小星, 「몬져 理想을 셔우라」, 앞의 글, 35쪽.
34) 류시현, 「일제강점기 현상윤의 문명론과 조선 문화 연구」,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문화연구 제62집,
2017. 12, 170~176쪽.
35) 洪南杓, 「勤勞라」, 惟心 제3호, 1918. 12, 4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