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5

불자들 잇딴 ‘업·윤회’ 부정…왜? - 불교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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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 잇딴 ‘업·윤회’ 부정…왜?

조현성 기자
승인 2014.02.05 16:45
댓글 74

성법 스님 등 “불교 핵심은 무아·연기, 업·윤회로 신도 유인해서야”

최근 출간한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불교서적이 잇따라 출간됐다.

불교경전총론 세존사이트(sejon.or.kr) 운영자인 성법 스님은 저서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와 송광사에서 스님 생활을 했던 스티븐 베철러의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이 그것이다.

스님들로부터 “모든 존재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고 윤회한다. 착한 업을 지어야 한다”고 배우면서도 “나란 존재는 없다. 집착하지 말라”며 무소유를 권하는 법문을 듣던 불자들은 더 혼란스러울지 모른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신도전문교육 필수교재인 <불교개론>에서 업·윤회에 대해 “업은 운명론이 아니다. 내가 지은 업에 따라 돌고 또 돈다. 내가 지은 업에 따라 인간은 윤회전생을 거듭한다. 육도윤회는 내세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순간에도 육도윤회를 거듭하고 있다”며 선업을 쌓을 것을 강조하는 것이 한 본보기이다.

‘나’는 없다면서 가보지 않은 내세를 들먹이며 윤회를 설명하고 착한 행동, 복을 지어야 한다는 이율배반에 고개를 갸우뚱 했던 불자들에게 책은 무엇을 말하나.


▲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7호인 강화 전등사 업경대 (사진=문화재청)
“불교 핵심은 윤회 아닌 무아·연기”

정세근 교수(충북대)는 지난 2008년 발간한 저서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를 통해 윤회의 잘못된 이해를 꼬집었다.

박홍규 교수(영남대)는 <오늘의 동양사상>에 기고한 이 책의 서평에서 정 교수의 윤회 지적에 상당 부분 찬성했다. 박 교수는 “불교가 정치화하고 권력화하며 상업화하고 자본화하는 소위 호국불교라는 전통이나 개인적 기복에 급급하거나 기업화하는 경향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교 특유의 숙명론이나 팔자론을 극복해야 한다. 불교는 논리와 윤리와 심리, 지성과 이성과 비판 정신에 충실한 종교이다. 부처 자신도 제자들에게 자기 말을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불교의 고유정신은 무아와 연기이지 윤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불교는 고유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붓다를 신격화하는 등 힌두교화 되어 인도에서 멸망했다”고 했다.

성법 스님 “윤회는 삶의 모습, 업은 왜곡돼”

최근 출간한 성법 스님 책은 업·윤회를 부정한다. 자극적인 단어를 뽑아 한 권의 책이라도 더 팔기 위해 내세운 것이 아니라 내용이 그렇다. 업·윤회 개념이 신도들을 착취하기 위해 왜곡됐다는 설명이다.

성법 스님은 책에서 “불교에서 윤회는 삶의 모습일 뿐”이라고 말했다.
스님이 윤회를 삶의 모습이라 말한 까닭은 몸과 마음이 나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몸을 이루는 조건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면 죽는다고 할 뿐, 몸과 마음이 조건에 따라 계속 변해가며 현재의 삶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계속 변화하는 마음이 새로운 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윤회 진행상 특징으로 '먼저 몸'과의 삶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그로 인해 전생과 금생이라는 단절된 삶인 것으로 간주될 뿐이지 마음을 중심으로 보면 삶의 과정을 통해 계속 변해가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불교가 윤회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말씀은 옳을지 몰라도 윤회가 불교의 핵심사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스님의 주장이다.

“네 업? 업·윤회로 신도 유인하지 마라”

스님은 “업은 지금도 왜곡돼 불자들의 삶을 좌지우지 한다”고 했다.

이어 “자신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지만 힘에 부쳐 스님에게 해법을 의논하면 “그건 네 업이니 참고 지내라”는 3000년 전 정답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정작 문제는 정답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스님들이 모여 있는 승가, 그 가운데서도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수록 ‘자신의 업’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행태가 만연돼 있다는 지적도 했다.

스님은 “한국불교는 상당 부분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의 개념으로 신도를 유인한다. 신도들은 고달픈 길인 깨달음으로 향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빨리 또 손쉽게 얻으려는 심사로 불교를 믿는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했다. 스님은 “종교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영혼과 순수성을 담보로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스님이 책에서 업·윤회를 비판한 까닭은 힌두교인지 자이나교인지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방편에 물들어 거래하는 듯한 한국불교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 티베트 불화 가운데 12윤회도.
“<금강경> 어디에도 윤회 개념 없어”

성법 스님 이전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책들은 있었다. 지난 2008년 신용산 前 편집장(조계종출판사)가 펴낸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가 한 본보기이다.

신 편집장은 “부처가 말한 윤회는 삶을 지속하는 동안 과거 현재 미래의 업과 그 과보를 말하는 것”이라며 “내세의 뜻을 포함한 윤회 개념은 <금강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인도 아소카 왕이 불교를 수용하면서 힌두교의 윤회론을 가미했고 그 때부터 중국의 대승불교에서 불상이 신격화되기 시작했다는 설명도 했다.

신 편집장은 “한 권의 책으로 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내고 싶었다”며 “<금강경>을 초심으로 새로 읽고 신화 속에 신격화한 부처님이 아니라 깨달음을 성취한 참사람으로 부처를 우리 곁에 모시고 싶었다”고 했다.

스님이던 배철러, 붓다 탐구 끝에 얻은 결론도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을 쓴 스티븐 배철러는 영국인이다. 19세인 1974년 인도 다람살라에서 출가했다. 티베트 불교 명상 수행에서 자유를 찾을 수 없었던 그는 한국에 와서 다시 출가했다. 구산 스님의 제자로 법천이라는 법명을 받은 베철러는 송광사에서 만난 프랑스인 비구니 성일 스님과 1984년 환속했다.

환속한 배철러는 불교를 전하고 이를 행하는 방식이 붓다의 실제 가르침과는 어긋난다는 의심을 품었다. 인간 싯다르타 고타마, 붓다가 과연 누구였는지를 알기 위해 팔리 경전에 집중했다. 배철러가 오랜 탐구 끝에 얻은 결론은 붓다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인간의 삶을 봤을 뿐 업과 내세 개념과는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배철러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최대 관심사였던 붓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신의 위치로 격상됐다고 지적했다.

배철러가 책 제목을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기독교 무신론자가 초월적인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듯 환생과 업의 불교 교리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불교 성직자들이 재가신도에게 행사하는 무조건적 권위도 문제라는 지적과 함께.

배철러는 책에서 불교는 행동과 책임의 철학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면서 “세속 불교도로서 나의 수행은 이 세상, 이 시대에서 삶의 고통에 최대한 진실되고 긴급하게 반응하는 것과 관련 있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니르바나를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이곳 지상에서 팔정도라는 윤리적 틀 안에서 매 순간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홍사성 “윤회 몰두, 힌두교식 불교는 似法”

석가모니는 윤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당시 육사외도 가운데 아지따 께사삼발리의 단멸론을 비판한 것이 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윤회는 불교가 아니다’라는 말이 솔깃하게 들리는 것은 한국불교가 그만큼 부처님 정법에서 멀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불교평론> 홍사성 주간은 ‘정법중흥’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불교중흥의 길은 불교의 외피를 쓴 세 가지 비불교적 태도의 청산에 비롯이 있다. 첫째는 사법(邪法)의 척결이다. 한국불교에는 부처님이 배척하고 비판한 제례주의, 주술주의가 만연해있다. 관상과 사주를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하면 불교의 앞날은 없다. 둘째는 사법(似法)의 차단이다. 겉은 불교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힌두교식, 도교식, 기독교식으로 변용한 교리를 불교라고 우긴다. 정법은 여기서 망가진다. 셋째는 사법(私法)의 극복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불교를 외면하고 편의에 따라 멋대로 해석한 법과 율을 불교라고 내세우면 안 된다. 사법(邪法)과 사법(似法)의 사법(私法)의 발호를 놔두고서는 불교를 불교라 할 수 없다.”

고우 스님 “내가 없으면 업도 죄도 없다”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인과법문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가르침은 독풀을 돌로 누르는 것과 같아서 뿌리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아집을 키운다는 설명이다. 스님은 “본질과 가치를 이해하고 매순간 좋은 생을 살아야 근본이 변한다”고 했다.

스님은 “업은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죄의식이다. 본질을 이해하는 순간 업은 없어지고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된다”며 “업은 실재가 아니라 허구이자 착각의 세계이다. 다른 종교는 원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불교는 업도 없고 죄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저명한 인물 가운데 대다수는 기독교를 불신하지만, 대중에게 그 사실을 숨긴다. 혹시 수입원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업·윤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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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4댓글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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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2020-10-26 00:00:01
더보기조-계-종이 왜 금지어냐? 땡-중들 비리가 많아서 겁나냐? 현제 불교계 신문 방송 언론은 조-계-종 자-승 이란 놈이 독재자 처럼 장악했지. 그런 땡중 비판 안하는 언론은 불교 언론이 아니다. 부끄러운줄 알아라답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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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2020-10-25 23:54:28
더보기한국 불교는 썩었다. 놀음에 빠진 조-계-종 중-놈 부터 시작해서 교리도 엉터리다. 바른 정법인 상좌부불교를 받아들여 니까야를 읽고 위빠사나를 수행하자.답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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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리지 않으면 2018-05-03 16:46:29
더보기그 업으로 윤회에 굴종하게 되지요.답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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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공 2016-10-15 01:31:58
더보기한번뿐인 인생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두려
워하지 않고 지금 현재 순간 순간을 사는게 잘 사는거지.윤회는 그냥 글자가 윤회일뿐답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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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 2016-05-09 12:38:26
더보기不 昧 因 果
중국고사에, 800년대 당나라 중기 때, 백장선사(749-814)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백장선사가 백장산에서 설법을 하는데, 어떤 한 노인이 항상 와서 듣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다른 사람들이 다 물러간 뒤에도 혼자 남아 있기에 백장선사가 궁금히 여겨 물었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고 하니, 그 노인이 말하기를 "나도 과거 가섭 부처님 시대에 이 산에서 살았었는데 어느 날 학인이 나에게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고 묻기에 나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답했습니다. 그 과보로 인해 500년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자비심으로 제도하여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백장선사는 "그대가 나에게 다시 물어보라." 노인이 다시 묻되 "스님께 묻겠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하되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不昧因果)"고 하였다. 노인이 이 말 끝에 크게 깨닫고는 하직을 아뢰면서 말하되&#160;"이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 뒷산 바위 아래 둘 것이니 佛家의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러주십시오."라고 하였답니다.
'不落因果'라는 한마디 때문에 여우가 되었던 사람이 '不昧因果'라는 한 마디를 듣고서 어째서 여우의 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는지, '不落'과 '不昧' 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석가모니 부처님께 와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셨다면 부처님조차 여우의 몸을 받았을까요? 감히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인과에 떨어지고 안 떨어지는 것은 자기 스스 로의 의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치를 환히 아는 사람은 인과에 떨어 진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그 도리도 모르는 사람은 "내가 말을 잘못 했나" 하고 자꾸 의심을 하게 되어 그 의심 하는 자체가 여우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불락'과 '불매'라는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미혹으로부터 생겨나는 의심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불매는 불락이니 불매니 하는 마음이 움직이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에서 분별의 차원을 초월한 不昧 因果라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말 이전의 자리를 보는 정법안목이 필요합니다. 옮답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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