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동학 천도교의 신관과 ‘님 의’ 영성 김용휘1)

 동학 천도교의 신관과 ‘님 의’ 영성 김용휘1)

1. 머리말

동학 천도교의· 신관에 대해 아직 많은 논란이 있다. 연구자들에 따라 동학 천도교의· 신관을 ‘일신관 으로’ , 때로는 ‘범신관 으로’ , 또는 이 둘이 결합된 ‘범신론적 일신관’, 또는 ‘범재신관 으로’ 제각기 다르게 해석한다. 심지어 신관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2) 수운 초기의 초월성이 강하던 신관이 해월에게 오면서 초월적인 경향이 배제되고 내재적인 경향만을 수용함으로써 범신관을 전개하였으며, 의암은 그것을 성리학적 논법으로 더 체계화함으로써 인격성을 제거하여 인내천 신관을 확립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3) 이러한 논의가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동학 천도교· 신관을 외형적으로만 너무 단순하게 바라본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단순하게 규정해 버리면, 해월시대부터 동학교인들은 한울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생 각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천도교. 시대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교인 들은 한울님을 나와는 엄연히 다른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고 신앙을 해 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물 론 천도교의 역사 속에서 교단, 내에서도 한울님에 대한 관념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인내천 을’ ‘사 람이 한울님이지 사람 외에 따로 한울님이 없다 는’ 무신론으로 해석하는 교인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이돈화의 초기의 글에 근거하여 비록 무신론은 아닐지라도 한울님은 인격적 의지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고집 하는 교인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4)

 

1) 대구대 자유전공학부 조교수.

2) 대표적으로 최동희는 水雲의 신관은 초월적 인격신관으로 보고 있으나, 海月에 와서는 汎神論으로바뀐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義菴에 와서는 “天의 종교성을 없애고 철학적 체계를 갖추려고 했으며, 신앙의 대상이 아니고 단지 천지만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한 원리, 혹은 근원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 하여 탈인격화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최동희 유병덕․ , 韓國宗敎思想史 3 , 연세대출판부, 1999)

3) 이혁배는 수운의 신관에서부터 백세명에 이르는 신관을 분석하면서 초기 수운의 신관에는 초월성과 내재성이 같이 있지만 그래도 초월성이 더 강하던 신관이 해월에게 오면서 초월적인 경향이 배제되고 내재적인 경향만을 수용함으로써 범신관을 전개하였으며, 의암은 그것을 성리학적 논법으로 더 체계화함으로써 인격성을 제거하여 인내천 신관을 확립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후의 이돈화와 백세명 역시 수운의 초월적 경향을 포괄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지만 사실상 범신관에 가까운 신관에 머물렀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수운의 신관이 지닌 초월적인 경 향과 내재적인 경향 중에서 전자가 배제되고 후자만이 부각, 발전되어 왔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혁배는 이것이 정당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전적 근거에 입각하여 발전시키지 못하고 당시 시대적 정신과 상황에 지나 치게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라고 다소 비판적으로 보면서 초기의 신관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최근 천도교 일각의 움직임을 의미있게 언급하고 있다 이혁배.( , 「동학 신관에 대한 연구」, 종교학연구 , Vol.7, 1988)

4) 야뢰 이돈화에 의하면, 至氣라고 하는 우주의 실재가 무한한 진화를 거쳐 인간이라는 의식을 가진 존재를 내놓 았고, 신의 관념은 그런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무궁의 관념 또는 전 진화의 과정을 스스로 관조하는 “지기적 생명의 자기 관조 라고” 한다. 그러므로 至氣라고 하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외에 따로 의지와 의식을 가진 초월적이고 인격적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이돈화, 新人哲學 ) 그러나 이렇게 보면 이돈화의 한울님은 신앙의 대상으로서 성립되기 어렵다. 비록 일신론처럼 어떤 절대자 창조주로서의․ 인격적 실

 

그러나 실제로 수도와 신앙을 열심히 하는 교인인 경우에는 내게 모셔져 있는 영적 존재(內有神靈)로서 한 울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물론. 그 존재가 바깥에 초월적으로 어떤 형상을 가진 초자연적 인격신이 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천도교인은. 한울님을 내 몸에 모셔져 있는 영적 존재로서 때로는 나의 정성스런 기원 (誠願)에 감응하며 때로는, 영부를 내리기도 하고 강화의 가르침도 내려주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리고 한울님 은 나의 생명활동은 물론 천지만물을 운행 화생시키는․ ‘우주의 근원적 생명 이자’ 만물 생성의 기운(至氣)이라 고 이해한다.

지금까지 동학 천도교의· 신관에 대해 오해가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동학 천도교를· 종교라는 알맹이에서 바 라보기보다는 경전의 문구만 따지거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사상만을 추출하여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동학 천도교· 신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경전과 법설의 몇몇 구절만 가지고 따 져서는 안 되고 동학 천도교인들이, · 생활 속에서 직접 행하고 있는 수도와 신앙의 차원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경전의 구절과 법설도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함께 그 법설이 행해진 발화적 맥락도 함께 살펴보 아야 한다.

2. 수운의 시천주 체험과 그 의미

동학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 , 1824-1864)의 ‘시천주(侍天主)’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런데 이 자각은 단순한 사색이나 이성적 추론을 통해 얻어낸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얻어낸 것이다. 수운 의 한울님 체험은 일의적이지 않았다 이. 점이 동학 천도교의· 신관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들게 하는 이유이 다 수운은. 처음에는 한울님을 바깥에서 인격적인 상제의 목소리로서 경험했다.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 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5)

「포덕문 에서는」 처음에 귀에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논학문 에서는」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 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 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之敎 視之不見 聽之不聞)라고 또 다른 체 험을 기술하고 있다. 귀에 들리던 목소리로 체험하던 한울님을 이제는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外有接靈之氣)’ 과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內有降話之敎)’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월(최시형, 1827-1898)은 “밖 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음과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음을 확실히 투득해야 가히 덕을 세웠다 말할 것이 며 그렇지 않으면 탁명이나 했다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6)이라고 했다 초월적인. 상제로 체험되던 한울님 체 험이 깊어지면서 밖으로는 기운의 떨림으로 체험되고, 안으로는 강화(降話)의 가르침으로 체험되었던 것이 다 이것이. 나중에 시천주 ‘시(侍)’의 풀이에서 ‘내유신령(內有神靈)’과 ‘외유기화(外有氣化)’로 정식화된다. 수운의 깨달음은 한울님이 실재하되 저, 하늘에 계신 초월적 인격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기(靈氣)

 

체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마음에 감응하는 영적 정신적․ 실재로서는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수양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야뢰 역시 초기의 입장과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이런 靈的 感應體를 인정하고 靈蹟과 奇蹟 역 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천도교는 신에 대한 은총을 간구하기보다는 자기 마음의 수양을 통한 자력적 신 앙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래서 인본주의 종교이긴 하지만, 그 마음의 至誠에 때때로 감응하는 영적 실재를 부정 하진 않는다. 물론 그 실재는 至氣라는 우주에 편만한 氣이다.

5) 최제우, 동경대전 , 「포덕문」

6) 최시형, 해월신사법설 , 「심령지령」

로서 우주에 두루 존재하며 그, 영기가 나를 낳고 또한 내 몸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깨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울님은 사변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며 바로, 내 몸에 모셔져 있음을 기운과 신령으로 체험해야 하는 존재이다. 소춘 김기전은 시천주 체험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주문을 외우려 할 적에 맨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이 ‘송주 에’ 대한 의욕이다. 어 떻게 하든지 이 주문 속에 씌어 있는 그대로의 지기대강(至氣大降)을 얻고 내유신령을 증 험하고 지화지기(至化至氣)를 체득해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욕이다. 그래서 이 삼칠(三七) 자를 체험해 보는 일을 자기 평생의 일대사(一大事)로 꼭 인정하는 그것이다. 삼칠자의 체 험은 곧 시천주의 체험이요, 시천주의 체험은 곧 내유신령의 무궁생명의 체득이니, 이것이 인간 일생의 큰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7)

한편 김경재는 수운의 시천주 체험은 “단순히 정신과 구별되는 신체의 체험이 아니라 그것이 통합된 구체 적이고 전일적인 몸으로 체험되고 그, 생명체 심령의 중심부에서 체험되며 그, 몸 안에 신령한 궁극적 실재가 현존한다는 체험 이라고” 한다. 이 체험을 통해 인간생명을 영험하게 하고, 투명하게 하고, 황홀하게 만들면 서 일상적인, 인식론적 주객구조를 돌파하게 하는 체험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한다.8)

동학 천도교는·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사불명(無事不命)하는 한울님의 실재성을 믿고 그 한울님을 내 몸에 서 내유신령(內有神靈)과 외유기화(外有氣化)로서 체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외유접령지기와 내유강 화지교를 체험함으로써 ‘시천주 의’ ‘참뜻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경천(敬天), ’모심 의‘ 실천은 바로 이 체험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모심 에’ 대한 세 번째 풀이인 ‘각지불이(各知不移)’는 한울님의 내유신령과 외유기화가 나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한울로부터 옮겨져서는 나의 생명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자각하는 것이다 또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옮길 수 없는 자기만의 독특성을 깨달아 실현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 다 그래서. 수운은 시(侍)를 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의, , 세 차원에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9)

수운의 한울님 모심 체험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나중에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즉 한울님 마음이 본래 나의 마음(心靈, 心卽天)이라는 자각으로 또, 최종적으로는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 라는’ 본래 나와 한울 이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는 것, 즉 인내천(人乃天)의 자각으로까지 그 체험이 확장되고 깊어진다. 이런 점을 잘 살피지 않으면 동학 천도교의· 신관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앞에서처럼 일의적으로 파악하거나, 시대 에 따라 신관이 바뀌었다고 오해를 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동학 천도교의· ‘한울님 개념은’ 일의적이지 않다 체험이. 깊어짐에 따라 또, 수도의 단계에 따라 한울님에 대한 관념이 깊고 풍부해지며 최종적으로는, 비이원성, 영원성, 무궁성에 대한 자각으 로 나아간다는 것을 잘 살펴야 하겠다.10)

4. 해월 최시형의 ‘님 의’ 영성 시천주는 내 안에서 신령한 한울의 생명과 신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내가 전체 우주의 뭇생명들과 깊이 연

 

7) 소춘김기전선생문집 편찬위원회, 소춘김기전선생문집 3 , 국학자료원, 2011, 137쪽. 8) 김경재, 「수운의 시천주 체험과 동학의 신관」, 동학연구 제4집, 29쪽.

9) 최제우, 동경대전 ,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10) 여기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졸고, 「동학 신관의 재검토 수양론적- 관점에서 본 신관」, 동학학 보 , 제 권 호9 1 2005년 6월.

결되어 있다는 주체의, 존엄성과 생명의 연대성에 대한 자각이다.(內有神靈, 外有氣化) 또한 이런 생명의 연대 성과 떨어져서 나의 생명의 유지될 수 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다.(各知不移) ) 이 시천주가 해월에게 가서 는 의미의 확장이 일어난다 수운의. ‘님 은’ 이제 내유신령과, 외유기화, ‘오심즉여심 의’ 무궁성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까지도 확장된다.

해월은 스승으로부터 이 천도의 이치와 시천주의 체험을 전수받는 한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기 위 해 수배를 피해 도망을 다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수도에 정진했다 이. 수도의 과정을 통해 그의 눈 은 점점 더 깊어져서 단지 물리적인 세계의 형상을 보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이 드러나기 이전, 그 공간 안에 담긴 생명의 흐름과 신성을 보기 시작했다. 그에게 자연은 산과 강과 들로 이루어진, 많은 부분이 텅빈 창공 으로 이루어진 그런 물리적 세계가 아니었다.

그에게 자연은 생명의 끊임없는 유동과 숨겨진 높은 의식적 차원들과 빛나는 신성으로 가득 찬 살아있는 세계였다 심지어는. 그 안에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에도 생명과 의식이 잠복해 있는 그, 자체로 존 중받아야 할 아름답고 거룩한 ‘물(物)’이었다 그에게. 생물 무생물이라는,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더 본질 적인 차원에서 그들은 비록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안에 생명과 의식을 함유하고 있는, 나아가 본 래 우주의 하나의 영을 함유하고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하늘(天)이었으며 ‘님 이었다’ . 이를 그 는 ‘물물천, 사사천’(物物天事事天)  )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물 과’ ‘일 자체를’ ‘님 으로’ 본 것이었다 이. 물에는 무기물까지 포함하는 것이며 일을, ‘님 으로’ 보았다는 것은 인간의, 노동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 다.

이런 감각은 점점 더 예민해져서 아침의 새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천주 의’ 소리로 느꼈고, 어린아이가 나막 신을 신고 땅을 쿵쿵 밟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였다 이제. 그에게 자연은, 천지는, 말 그 대로 어머니였으며, 아버지였다. 생명은 육신의 부모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다.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생명 은, 그리고 영은 하늘로부터, 천지로부터 온다. 그렇기에 천지가 나의 부모인 것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그에 겐 부인할 수 없는 진실로 느껴졌다. 그는 그것을 마치 잃어버린 부모를 다시 찾은 감격으로 ‘천지를 부모님 처럼 섬겨야 한다 고.’ 역설했다.13)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차원의 환경론자들이나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봐야한 다는 생태론자들과도 엄연히 구분될 뿐 아니라 원리적, 차원에서 ‘건칭부곤칭모 를’ 언급했던 성리학자들과도 구분된다 해월은. 천지의 더 깊은 차원을 들여다 본 것이다. 아직 주름져서 펼쳐져 있지 않은 드러난, 차원을 가능하게 하는 숨겨진 질서를 불연이면서, 기연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만물 화생의 이치 를’ 그는 온몸으 로 체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월에게 천지자연은 비어 있는 공간도 아니고 기본, 입자들의 단순한 물리적 총합도 아니다.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우주적 생명이자 모든, 만물을 낳는 생명의 근원 영적, 활력과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유기 적 생명체일 뿐 아니라 받들어 모셔야 할 ‘님 이었다 또한’ . 그 님은 나의 마음과 기운에 감응하는 하늘마음이 자 하늘기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수운의 시천주는 해월에 와서 그 의미가 확장되어 모든 만물이 거룩한 하 늘을 모시고 있으며 나아가, 천지 자체가 하늘님이라는 사유로 확장되면서 생명철학적 성격이 분명해졌다. 한편 해월은 시천주라는 표현보다는 ‘심즉천’ )과 ‘양천주’ )를 더 강조한다. ‘내유신령 보다는’ ‘심즉천 을’ 강조하는 해월에게 ‘천 은’ 초월적 절대자라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내재하고 있는 마음의 본체 또는, ‘심령 의’ 의미가 일차적이다. 그에게는 마음이 곧 가장 일차적으로 모셔야 할 거룩한 ‘님 인’ 것이다. 마음을 떠나 따로 섬겨야 할 ‘님 이’ 없다. 마음이 편치 못하고, 탐욕과 분노, 두려움과 원망 같은 온갖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 있 으면서 공중의 하늘만 섬긴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서 늘 맑고 밝고 온화하고 편안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 모든 일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 보호하기를 갓난 아기 보호하듯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고 했던 것이다. ) 마음이야말로 가장 먼저 모시고 섬겨야하 는 ‘님 이었던’ 것이다 해월의. 유명한 삼경(三敬), 즉 경천 경인 경물은· · 섬겨야 할 ‘님 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 다고 하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삼경에서 첫 번째인 경천이, 공중의 하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의 중심인 마음을 섬기는 것이란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 해월에게서 무엇보다도 앞장서서 섬겨야 할 님은 바로 가난하고 빈천한 자들이었다. 가장 소 외받고 억압받는 이들이 그에겐 가장 받들어 모셔야 할 거룩한 ‘님 이었다’ . 노비, 백정, 종들은 말할 것도 없 고, 당시 며느리들도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벼짜는 며느리가 한울님’  )이라는 유명한 법설 을 남기기도 하였다.

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기 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 하니」 ,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하는 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 하니」 ,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하늘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18)

이 ‘베짜는 한울님 의’ 일화는 계급과 귀천, 남녀노소를 떠나 모든 차별적 관계를 혁파하라는 것이며, 특히 당시 남존여비의 현실에서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적 시선을 거두고 ‘님 으로’ 높여 받들라는 엄중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유교적 가부장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 바로 동학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누구보다도 무시당하고 차별받던 아이들에게 주목하여 “아이가 바로 한울님”이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매를 맞고 학대당하는 아이도 많았다 어린이의. 인권이라는 것은 없었다. 영아사망률도 높 았고 한집에서, 보통 7-8명의 아이들을 낳기에 오늘날같이 아이들을 애지중지할 여유가 없었다. 해월은 그런 애물단지같은 천덕꾸러기 “아이들이 바로 ‘한울님 이니’ 절대로 때리지 말라” )고 하였다 굉장히. 평범한 가르 침 같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혁명 같은 가르침이었다. 실제로 해월의 이 가르침이 1920년대 김기 전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요컨대 해월은 천지를 곧 ‘님 으로’ 보는가 하면 모든 사물 하나하나를 ‘님 으로’ 보고 특히, 천대받는 며느리, 어린이, 빈천자를 ‘님 으로’ 보았다. 또한 수운의 ‘내유신령 을’ 나와 다른 초월적 존재로 보기보다는 본래의 나 의 심령으로 이해함으로써 나의 마음을 떠나 한울이 따로 없고 마음이, 곧 한울(心卽天)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내 마음을 ‘님 으로’ 섬기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상의 수도로서 역설했다. 이러한 해월이 천지만물을, 빈천한 자를, 여성을, 어린이를 한울 님 으로‘ ’ 높여 섬기라고 함으로써 계급해방, 여성해방, 어린이해방, 나아가 생태 해방을 촉구하게 되었다.

5. 맺음말

동학 천도교의· 한울 님‘ ’(天)을 기존 연구에서는 범천론 범재신론, 등으로 규정하곤 했다 심지어는. 기독교와 같은 초월적 일신관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수운의 천은 그의 체험이 깊어짐에 따라 우주적 영기, 그 리고 내 안에 내재한 거룩한 영으로 상정된다. 나아가 그 영과 나의 본심이 하나라는 자각(오심즉여심)을 하 면서 나의 본질과 우주적 본질의 동일성에 대한 자각 영원성에, 대한 자각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동학·천도교 의 ‘한울님 개념은’ 일의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체험이 깊어짐에 따라, 수도의 단계에 따라 한울님에 대한 이해가 깊고 풍부해졌다 그러므로. 그 다양성과 중층성을 본체와 현상 주체와, 객체 인격성과, 비인격성의 관 계를 통해 잘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동학의 ‘한울님 이해에서’ 특징적인 것은, 해월의 시대에 와서 이 ‘님 에’ 확장이 일어나면서, 천지를 곧 받들어 모셔야 하는 ‘님 으로’ 보는가 하면, 모든 사물 하나하나를 ‘님 으로’ 보고, 특히 천대받는 며느리, 어 린이 빈천자를, ‘님 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특히. 마음을 님으로 보고 그, 마음을 한울님으로 잘 받들어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도의 요체로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삼경(三敬)의 첫째 경천은, 곧 마음 을 공경하는 것을 의미했다. 삼경의 경천 경인 경물은· · 섬겨야 할 ‘님 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동학의 ‘님 의’ 영성은 단순한 신학 존재론이, 아니라 ‘만물공경 의’ 생태적 영성으로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한 해 방의 철학으로 나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