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님 의’ 철학과 ‘지금-여기’ 한국 페미니즘 박지은(서강대학교 철학과)

 [한국종교분과 12발표]

‘님 의’ 철학과 ‘지금-여기’ 한국 페미니즘

박지은(서강대학교 철학과) 

1. 들어가며

가히 폭발적인 시대이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그 어느 때와 견주어 보더라도 가장 폭발적인 전개 중에 있다. 충돌하고, 소리치고, 생동하고 있으며, 치열하게 살아있다. 이를 ‘페미니즘 리부트(reboot)’라 호명하기도 한 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페미니즘은 서구식 페미니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귀속되어 있다거나, 사회 갈 등을 조장하는 ‘빨간 맹아(萌芽)’로 작용할 뿐이라는 회의적인 시선들과도 마주하곤 한다.

한국 페미니즘은 이러한 시선들로부터 스스로를 규명해야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지금’, 그 리고 ‘여기 에서’ 생동하고 있는 한국 페미니즘―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2010년대 중반 다시 태동한 ), 그리고 한국의 사회문화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페미니즘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한 ‘사유 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 ‘언어 의’ 단서를 오구라 기조의 저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에서 확인하였다 그는. 해당 저서에서 한 국 사회를 관통하는 ‘리 기- 시스템 을’ 제시하고 그것을, 한국 사회 내부로 가져와 설명한다 이. 글 역시 ‘지금여기 한국’ 페미니즘을 규명하는 작업에 있어서 오구라 기조의 방법론과 그가 말한 골자를 기반으로 하고자 한다 즉. 한국 사회문화 전반과 현재의 한국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어떠한 철학적 언어를 살펴보고, 그것을 바 탕으로 한국 페미니즘 내 담론들을 전개하는 일련의 과정이 될 것이다.

2. ‘님 의’ 철학 : 리기 시스템으로 본, 한국의 도덕지향성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에서 오구라 기조(2017)는 ‘리 와’ ‘기 로’ ‘도덕 지향적 인’ 한국을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도덕지향성 이란’ ‘도덕성 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이것을 “모든 언동을 도덕 으로 환원하여 평가 하는”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몰도덕적(amoral)이고 현실주의적 경향이 강한 일본과 달리 경제 정치 국제관계, , , 등의 거시적 차원 과 더불어 개인을 둘러싼 일상의 미시적 차원까지 도덕이 자리하고 있는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근원적 특성 으로 기능한다. 그는 한국의 도덕지향성은 전통적으로 추구해왔던 리(理) 지향성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하 며 한국사회, 구조 전반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리 와’ ‘기 를’ 기반으로 한 해석을 제시한다. 이때 ‘리 는’ 상 승  지향적 구조와 직결되는 순선하고 형이상학적인 도덕성으로, ‘기 는’ 상승을 위해 제어되어야 하는 형이하 학적 물질성으로 설명되는 기본적 시스템이 그 바탕이 된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이러한 리 기-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님 과’ ‘놈 의’ 구분이다. 오구라 기조(2017)에 따르면 ‘나 라는’ 중심을 기준으로 할 때, ‘님 이란’ 도덕을 체현한 ‘리 의’ 상징이라면 ‘놈 은’ 그와 반대 위치에 놓 인 ‘기 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도덕지향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님 이’ 되고자 하는 상승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놈 으로의’ 추락을 경계한다. 이러한 ‘님 과’ ‘놈의 구분은 도덕적인 구조를 넘어 일반 사회적· 차원으로도 확장 된다. 일상어 속에서 ‘님 과’ ‘놈 의’ 호명이 가져오는 심상 간의 차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보았을 때 한국 사회에서 ‘님 은’ 소위 주류(主流), 주체로서, ‘놈 은’ 비주류, 객체로서 가시적·묵시 적으로 이해되며, 한국 사회의 도덕지향성은 곧 ‘님 으로의’ 지향성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때문에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철학은 다시 말해 리 기- 시스템을 기조로 하는 ‘님 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3. ‘님 의’ 철학으로 본 ‘지금 여기- ’ 한국 페미니즘

‘님 의’ 철학이라는 언어로서 ‘지금 여기 한국- ’ 페미니즘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먼저 한국 페미니즘의 새로운 태동과 전개를 ‘님 의’ 철학적 관점에서 돌아보는 것부터 선행하여 현재, 한국 페미니즘 내에서 활발하 게 논의되고 있는 세 가지 담론―탈코르셋 비혼 비출산· · ―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님 의’ 철학을 더 구체화하고 동시에, 한국 페미니즘에 대해 규명하는 시도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현재의 한국 페미니즘은 2015년 메르스 갤러리에서 비롯된 여성들의 경험적 발화 그리고,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을 기점으로 ‘다시’ 태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2)

2015년 중동발 전염성 질병인 메르스 발발 당시 개설된 메르스 갤러리 )는 한국, 페미니즘 내에서 국내 ‘최 초 로’ 온라인상에서 여성들의 집단적인 경험이 발화되었던 공간으로 회자된다. 당시 성행하였던 온라인상의 여성혐오 표현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일상, 속의 여성혐오에 대한 경험적인 발화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다수의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삶 에’ 대하여 발화하고 공유하는 장이 형성되었다. ) 혐오표현의 객체로 자리 했던 여성들이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경험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통해 발화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 이듬해인 2016년, 강남역 번화가 건물의 공용 화장실에서 남성 범죄자에 의한 여성 살인 사건이 발생 하였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묻지마 살인 으로’ 보도되었으나 범죄자가, 화장실에 숨어 있는 동안 남성들이 몇 차례 화장실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들어온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 그리고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 는” 범죄자의 범행 동기 발언으로부터 해당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 로’ 다시 명명되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에 여성혐오의 실재를 일깨운 촉매가 되었다 특히.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살아온 경험에 대하여 반추하고 공유하며 ‘우연히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는’ 역설적인 문장으로 한국 사회 내 여성혐오의 실 태를 비판하였다 관련하여. 당시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 포스트잇이 천여 건 넘게 게시되기도 했다.

“여자친구에게 “너는 조심해 라고” 말하는 내가 너무 미웠다. #여성혐오범죄”

“우연히 살아남았다. 나의 이야기가 될 일이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인식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애도를”5)

2015년 메르스 갤러리, 그리고 2016년 ‘강남역 사건 은’ 여성들이 사회적 발화의 장을 형성하고 전개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각과 자기 고백적 발화 공감을, 통한 연대의 장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로부터. 촉발된 한국 페미니즘의 리부트란 젠더, 권력관계에서 객 체로 위치해 온 여성들이 자각을 통해 주체 즉, ‘님 으로의’ 상승을 향한 변혁을 시도함으로써 태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한국 페미니즘의 전개에 관해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 담론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사 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여성성과 그것을 ‘수행 하도록’ 하는 사회적 규범을 사회구조적인 ‘코르셋 이라고’ 정의하 고 이를 적극적으로 탈피하고자 하는 탈코르셋 담론이 있다.

오구라 기조(2017)는 얼굴을 리기의 관계에 따라 ‘리의 얼굴 과’ ‘기의 얼굴 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전자는 ‘보는 얼굴’, 후자는 ‘보여지는6) 얼굴 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여성 남성의- 젠더화된 신체 규범을 사 유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의의 전개가 가능하다. ‘리의 얼굴 은’ 평가로부터 독립적인 ‘주체의 얼굴 인’ 반면, ‘기 의 얼굴 은’ 평가에 종속된 ‘객체의 얼굴 과’ 같다. 또한 얼굴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초월하여, 육체성을 총칭하 는 의미로서 ‘신체 의’ 층위로 확대하면 전자는, 평가와는 독립적인, ‘평가될 필요 없는’ 신체로, 후자는 평가에 종속적인, ‘평가 되는 것이 당연한’ 신체로 위치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신체는 어디에 속하는가? 여성의 신체는 평가의 대상으로서 ‘객체의 신체 로’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신체는. 남성 신체와 여성 신체로 각각 젠더화 되고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 남성 신체는 강인한 정복하는- , 공적 공간을 대표하는 신체로 규정되는 반면 여성 신체는 연약한정복당하는, 사적 공간에 머무는 신체로 위치한다. 더불어 여성 신체는 남성 신체와 달리, 남성적 시선이 내 면화된 관음주의 속에서 성적 대상화의 객체가 되기도 한다 여성. 대상 불법촬영 범죄, ‘n번방’, ‘박사방’ 등 디 지털 성 착취 및 유포 사건 역시 이와 연결되는 지점에 있다 이는. 젠더화된 신체 규범이 문제의식 없이, 왜곡 된 형태로 용인되어 온 결과이다.

따라서 남성 신체는 ‘리 에’ 가까운 ‘님 의’ 신체 즉, 평가로부터 독립적인 보편의 신체로 상정되는 반면 ‘기의 신체 로서’ 여성 신체는 대상화 되고 타자화 되며 부위별로, 등급을 매기듯 파편화됨으로써 항상 평가와 재단 아래 놓인다 이처럼. 전통적인 여성 신체는 ‘님 의’ 신체로 위치하기 어렵다.

현재 한국 페미니즘 내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탈코르셋 담론은’ 이러한 질서에 대항하는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리 기- 시스템으로 해석하자면 이는 전통적으로 ‘기의 얼굴’, 보여지고 평가되어야 하는 객체적 대상물 로 간주되어 온 ‘여성적 신체 들이’ 직접 리의 진영으로 나아가서 ‘님 이’ 되고자 하며, 종국에는 ‘보고-보여지 는’ ‘리의 얼굴 과’ ‘기의 얼굴 사이’ 간극을 타개하려는 움직임과 같다 이는. 거친 젠더 이분법을 바탕으로 남성

 

5)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나무연필, 2016

6) ‘보여지는 은’ 정확히 하자면 비문이나, ‘보임 의’ 객체가 된다는 의미를 말하고자 저자가 사용한 표현을 그대로 인 용하였다.

적 ‘리 의’ 세계와 여성적 ‘기 의’ 세계를 나누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비혼/반혼 ) 담론―여기에서는 특히 이성애적 결혼 관계에 대한 것―이 있다. 오구라 기조 (2017)는 한국 공동체를 혈연 공동체로 묶는 것은 ‘피 즉’ 혈통이며 이것은, 공동의 환상에 의해 성립되는 ‘리’ 의 질서라고 보았다 특히. ‘부계의 피 를’ ‘리 의’ 질서로 중심화하여 그 혈통의 분화와 연결을 도식화한 결과물 로서 족보는 ‘리의 장치 라고’ 정의하였다 사실. 족보 그 자체는 현시점의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명시적 위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여전히, 부계 성을 따르는 것이 지배적인 한국 사회 문화에서는 족보의 기능이 압축 적 상징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계 성을 따른다는 것은 부계의 ‘피’, 즉 부계 혈통 안으로 편 입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부터는 모계 성을 따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민법 제781조에서 제 항1 “자는 부의 성과 본 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 제 항3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라고 명시된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모계 성은 여전히 예 외적인 규정일 뿐이다. 이 점에서 부계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리 의’ 질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재함을 알 수 있다 또. 일상에서 흔히 통용되는 말로 아버지의 가족은 ‘친(親)가’, 어머니의 가족은 ‘외(外)가 로’ 불린다는 점에 있어서도 ‘리 의’ 질서로 정렬된 한국의 가족 제도를 살펴볼 수 있다.

비혼 반혼/ 담론은 이러한 부계 중심의 혈연공동체 속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편입된 여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다 남성 즉. , 혈연 공동체 내 기존 구성원과의 결혼을 통해 여성은 일종의 ‘제도적 합일 을’ 이루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비 혈연적 존재로’ 자리한다 부계의. ‘피 를’ 공유하지 않은 외부인인 셈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족보 안에서 현대적으로는, 부계 성을 따르는 문화 속에서, 여성의 존재는 사실상 부계 중심 혈연 공동체에 덧붙여진 곁가지와 같다. ‘리 의’ 질서에 완전히 편입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 지만 동시에 아내 며느리라는· 부차적인 역할에 따라, 부계 중심 혈연 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하여 ‘리 의’ 질서 속에 ‘편입된 것처럼 봉사할’ 것이 요구된다 결혼한. 남성은 대체적으로 모계 중심 혈연 공동체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요구받지 않는, ‘백년손님 이라’ 불려온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때문에 현재 한국 페미니즘의 비혼 반혼/ 담론은, 살펴본 바와 같이 여전히 부계로 상정되는 ‘리 의’ 공동체 속 여성의 위치에 대한 인지―즉 개인적, 층위로는 설명되지 않는, ‘리 기 구조적- ’ 층위의 문제에 대한 자각과 도 같다 따라서.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족보문화 즉, 부계 중심으로 설정된 ‘리 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비혼 여성 1인 가구들 이 응집하여 장기적인 삶을 ‘따로 또 같이 살아갈’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추세 역시 여성, 스스로 비 혈연 공 동체라는 새로운 ‘리 를’ 형성하는 형태와 같다.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리 로’ 대표되는, 남성-남편의 혈연 공 동체에 편입되는 전통적인 결혼 제도 내 여성의 삶과는 구별되는 형태이다.

마지막으로 다룰 비출산 담론은 여성이 생득적으로 가지게 되는 재생산―즉 출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그 중에서도 출산을 ‘선택하지 않을 권리 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선택이다 앞서. 결혼 제도를 통해 아 내로서의 여성은 부계 중심의 ‘리의 가족 에서’ 곁가지와 같은 존재로 위치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아내 로서의 여성에서 더 나아가,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어떻게 위치하는지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구라 기조(2017)는 한국 사회 내에서 어머니는 전형적인 ‘기 의’ 존재로 여겨져 왔다고 말한다 즉. 어머니는 수직적 인 위계질서로 대변되는 ‘리 의’ 세계를 용서와 긍정으로 치유함으로써 ‘기 의’ 세계를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리 와’ ‘질서 로’ 상정되는 아버지와는 상반되는 역할이다. 이와 유사한 ‘엄격한 아버지 와 상냥한 어머니 라는’ 유비는 오늘날에도 역시 통용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리 의’ 세계와 ‘기 의’ 세계가 지니는 공간성을 고려했을 때, ‘리 의’ 세계에 대응되는 아버지와 ‘기’ 의 세계에 대응되는 어머니 사이에서 리 지향성을 기준으로 하는 위계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것에는 ‘리 와’ ‘기 가’ 동시에 존재하지만 리, 지향성을 추구하는 한국보편의 철학을 고려했을 때 그러하다 리. 지향성에 따라 ‘리 의’ 세계는 보편이 되고 공적, 공간 역시 ‘리 의’ 세계 위에서 상정된다 자연히. ‘기 의’ 세계는 이차적이고 사 적인 공간으로 자리하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젠더화된 공사분리의 구조와도 같다. 사적 공간에서 ‘가정의 천 사 로서’ 아이들과 남편을 치유하고 돌보는 것 즉, 근현대의 현모양처 담론과도 떼어서 볼 수 없다.

바로 그 ‘리 지향성 기반의’ 질서와 젠더화된 리 기- 세계 분리를 거부하는 한 형태가 비출산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출산, 그리고 출산 뒤에 따르는 양육이 마땅히 여성과 남성 공동의 문제 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그 당사자로 상정되는 것은 여성이다 특히. 출산으로 획득되는 ‘어머니 라는’ 지위는 모 성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하여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공적 공간에 등장하는 것을 잠재적으로 제한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문제를 꼽아볼 수 있다 이는. 공적 공간에서 경제적인 노동을 하 는 가장 즉, ‘리 의’ 전형 아버지 남성과- 비교했을 때 사적, 공간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기 의’ 전형 어머니-여성 에게 가중된다 물론. 과거에 비해 남성 육아휴직 비율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10)를 고려했을 때 그 변화는 감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적 차원에서 확인되기 어려운 구조적, 층위에서 고착된 젠더 역할 모형이 여전히 존 재한다 이로. 인해 비출산을 선택함으로써 ‘기 의’ 세계에서 이야기되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현재 페미니즘 내의 화두인 것이다 더불어. 대다수의 여성들이 비출산을 선택함에 있어 경력 단절을 이 유로 든다는 점에서, 비출산이란 여성들이 공적 공간인 ‘리 의’ 세계로 나아가 ‘님 의’ 지위로 상승하고자 하는 적극적 선택의 발로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담론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한국 페미니즘의 정체성은 단지 ‘페미니즘 이라는’ 대문자에서 파생되 는 것이 아니라 ‘한국 이라는’ 역사적 사회문화적, 기반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 와 같이 현재 한국 페미니즘의 주된 담론들이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리 기- 시스템 그리고, ‘님 의’ 철학을 바탕 으로 사유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이러한 담론들이 논의되는 장이 주로 한국 페미니즘 내부라는 점에서 역시 그러하다 북미와. 유럽 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페미니즘에서는 위의 담론들 특히, 비혼과 비출산에 대한 논의들을 찾아보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이에 대하여 윤김지영 교수는 해외, 특히 북미나 유럽권에서도 이 와 유사한 형태의 운동이 전개된 바 있었으나 현재 해외 선진국들은 남성 없는 결혼과 출산이 이미 제도적으 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은 대대적인 (이성 결혼제도의) 거부 운동이 일어나는 건 어려울 것11) 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양자가. 페미니즘이라는 대문자 정체성은 공유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사회문화적 기 반에서 발생하는 차이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한국 페미니즘은 단지 서구식 페미니즘을 답습 하는 형태가 아니라, 한국의 사회문화적 기반에 대한 자각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 내부의 독자적인 논의

 

10)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0년 상반기 육아휴직자 통계 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남성 육아휴직자는 1만 4857명 으로 전체 육아휴직자 가운데 24.7%에 이르렀다. 육아휴직자 4명 중 1명은 남성인 셈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 다 34.1%나 증가했다. 출처는 “올해 육아휴직자 4명 중 1명 ‘아빠’”, 『서울 신문』, 2020년 8월 13일자,

2020.10.28. 검색

11) “[나는 강남역 세대입니다③] 비혼 비연애 비출산 비섹스· · · '4B' 운동이 분다”, 『여성신문』, 2020년 5월 1일자,

2020.10.28. 검색

를 이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혁의 전개 과정 안에서 한국 페미니즘은 갈등의 시발점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로부터 “한국 페미니즘은 사회적 분란을 조장한다 라는” 주장도 다분히 제기된다. 그러나 오구라 기조(2017)에 따르 면 지배적인 질서의 전복 즉, ‘리 가’ 전환되는 데에 있어서 갈등은 필수적이다 사회. 질서를 ‘리’, 그 안에서 이 루어지는 사회문화적 움직임을 ‘기 라고’ 한다면 도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한국 페미니즘은 기존의 성차별적 질서인 ‘리Ⅰ’의 지배 국면에서는 탁한 ‘기 라고’ 여겨졌던 여성들의 주변 부적 시선이 새로운 성 평등적 질서인 ‘리Ⅱ’의 국면을 맞으면서는 맑은 ‘기 로’ 자리함으로써 생기는, 변혁을 위한 일면의 갈등이다 또. ‘님 으로’ 위치하지 못하고 객체로 종속되어 있던 여성들이 기존의 피라미드형 권력 관계를 무너뜨리고, 그것을 다시 편평하게 쌓아올리고자 하는 회복과 재구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 국 페미니즘과 그것을 둘러싼 갈등은 단지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서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변혁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4. 마치며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님 의’ 철학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 한국- ’ 페미니즘의 태동과 전개를 살펴보았 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리 기- 시스템 안에서 한국 페미니즘이란 ‘님 으로’ 나아가는 지향성을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또 실현하고 있다. ‘리’-‘님 의’ 세계 바깥에 위치했던 여성 및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님 으로’ 상승 하고자 하는 지향성이 대두된다는 지점에서 지향성을 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국 사회를 지탱 하고 있는 차별적 배제적인· ‘리 를’ 포용적인 ‘리 로’ 전복시켜 ‘님 의’ 사회로 진보하도록 하는 변혁을 시도한다 는 점에서 그 자체로 지향성을 적극적으로 실현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인 출신 성 범죄자에게 죗값을 물은 미투 운동과 여성 연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시행을’ 이끈 불법촬영 규탄 시위,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이룬 낙태죄 폐지 시위 그, 외의 수많은 움직임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변혁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규명하는 사유와 작업이 한국 페미니즘을 둘러싼 회의적인 시선 들에 단편적으로나마 답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페미니즘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 ―‘혐오 전쟁’, 폭넓은 연대의 부재 등―이 남아있다 수면. 아래 있던 물살들이 파도가 되어 바위를 부수고 있 지만 그에 안주하지 않고 그 다음 파도를 고대하며, ‘님 으로의’ 변혁을 향해 그 다음 물음을 던져야 할 때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가? 그 변혁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님 의’ 철학이 규명해야 할 새로운 숙명이 될 것 이다.

참고 문헌

- 단행본 오구라 기조 저, 조성환 역,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모시는 사람들, 2017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나무연필, 2016

- 인터넷 뉴스 기사

“올해 육아휴직자 4명 중 1명 ‘아빠’”, 『서울 신문』, 2020년 8월 13일자

“[나는 강남역 세대입니다③] 비혼·비연애·비출산·비섹스 '4B' 운동이 분다”, 『여성신문』, 2020년 5월 1 일자

- 법령 국가법령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