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국가폭력과 한국사회의 트라우마 김동춘

 국가폭력과 한국사회의 트라우마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 도입

20세기 한국인들은 일제 말 징용과 징병, 일본군 성노예 동원, 해방 후 좌우 대립과 분단, 한국전쟁, 이후의 베트남 전쟁, 그리고 군사정권의 억압과 폭력과 광주 5.18 등을 집단적으로 체험했다. 이 폭력 의 경험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혔으며, 그것이 한국사회의 건강성을 크게 손상 하였다. 분단, 전쟁, 군사독재 시간에 벌어진 국가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여러 과거청산 기구 의 진상규명 활동, 사법당국의 재심과 보상 결정,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명예회복 등의 방법으로 진행 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겪어온 정신적 외상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인 실태 조 사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 의해 공식적인 인정, 집단적 치유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모 든 상처는 오직 개인의 질병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개인이 감당하고 치료해야할 일이다. 분단과 전쟁의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 증상이 의학적 사실을 넘어서 사회적 사실로 되고, 과거청산이 법적인 처리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의제가 되어야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남북한의 분단은 무엇보다도 좌우 이념 대립으로 동족, 심지어 가족 간에 죽고 죽이는 일들을 수 없 이 많이 만들어 냈고, 지금까지 그 적대의 상처를 남기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자기 눈앞에서 부모나 형제가 총 칼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거나, 그러한 일을 직접 경험했던 남북, 좌 우 양측에 의한 피학살 유족들은 억울함과 분노, 수치심을 갖고 살아왔다. 즉 가공할만한 폭력현장에서 벌레 취급을 당한데서 오는 극도의 무력감과 자기 비하, 국가권력의 부당한 행사를 겪고도 국가에 대해 가해 책임을 묻거나 가해자 처벌을 요구할 수 없는데서 오는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부모 형제가 억울 하게 죽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 등이 이들의 정신에 남아있다.

국가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여러 과거청산 기구의 진상규명 활동, 사법당국의 재심과 보상 결정,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명예회복 등의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다.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와 PTSD 증상이 의학적 사실을 넘어서 사회적 사실로 되고, 과거청산이 법적인 처리의 차원을 넘어서 사 회적 의제가 되어야하고, 화해 치유의 과정이 사회적으로 전개될 필요성이 절실하다.

2.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의 정신적 상처

1) 집단학살 피해 한국전쟁당시 피학살자들과 그의 가족들, 군사정권 하의 고문과 폭력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 광주

5.18 당시폭도 로지목된 사람들과 가족들이 모두가 그런 말도 안되는 충격을 당한 사람들이다. 모든 국가폭력 피해 중에서 학살, 고문 피해는 가장 충격적인 것이며, 그것은 당사자들의 정신 도덕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려 그의 평생을 옥죈다.

한국전쟁 전후 자기 눈앞에서 부모나 형제가 총 칼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거 나, 그러한 일을 직접 경험했던 피학살 유족들은 억울함과 분노, 수치심을 갖고 살아왔다. 즉 가공할만 한 폭력현장에서 벌레 취급을 당한데서 오는 극도의 무력감과 자기 비하, 국가권력의 부당한 행사를 겪 고도 국가에 대해 가해 책임을 묻거나 가해자 처벌을 요구할 수 없는데서 오는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부모 형제가 억울하게 죽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 등이 이들의 정신에 남 아있다. 그래서 생존자들은원통하고 분한 생각이 솟구쳐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느낌을 갖고“, ” 식사를 하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대화를 하다가도 그 생각만 나면 정신을 잃는증세를 보였다. .경에 의해빨갱이 로        몰려서 죽은 것도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사건 이후 수십년 동안빨갱이 가 족 으로        지목되어 번듯한 직장을 가질 수도 없었고, 계속되는 사찰과 감시, 사회적 차별을 당했다는 사 실 자체도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이들 유족들은 무기력감, 공포, 대인기피, 침묵, 그리고 과민증을 보였다.

그래서 한국전쟁 그 자체로부터 상처를 입은 5,60년대 한국인들은 대체로내부 망명[1])과 망각, 기복 주의 신앙에의 집착을 통해 전쟁 분단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했고, 그 중 피학살자들은 가해자 즉 국가 의 편에 섬으로써 생존의 길을 갔다. 그것은신분정화 의   일종이었다. 피학살 유족들이 좌익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교회에 간 것도 그 중 하나였지만, 남성의 경우 군 입대가 대표적인 신분정화, 신분세탁 행 동이었다. 한국전쟁기 제주도 4.3 피해자들의 군 입대 선풍도 그것이었다. 들은 자신의 가족을 국가 안 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국가가 공식 사용하는 빨갱이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일부 피학살 유 족들은 빨갱이를 성토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두려워 선 거 때마다 무조건 여당을 지지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의 정치 사회적 위치를 국가의 주류나 핵심에 두기 위한 자기방어, 자기변호의 몸부림이 었다. 즉 차별의 구조, ‘빨갱이 담론 을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 헤게모니의 제약 아 래서 행동의 반경을 설정하는 셈이다. 피학살 유족들이 희생자들이띠끌만한 잘못도 하지 않았던’ ‘순수 한양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상당한 교육수준을 갖고 있거나 사회단체에 가담한 경력이 있 는 유족들도 별 차이가 없었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불순분자라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 함으로써, 가 해자인 국가의 인정을 받으려 하였다. 여기서 바로 피학살자 진상규명 운동 과정에서 보도연맹 유족들 에 대한 여타 유족들의 거리두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학살사건 이후부터 보도연맹 가족들은 빨갱이라고 시골 동네에서는 이웃 사람들이 농사 품앗이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그들의 자녀들은 공무원도 못되고 육사도 못가고 회사에 들어가도 인사발령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피학살 유족들은 자신은 순 수양민이기 때문에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들을 차별하였다. 즉 당신들 (빨갱이) 때문에 우리순수한 양민 이함께 빨갱이 취급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 이들순수 양민 들이좌익 활동가 유족이나 보도연맹 유족들을 물리치는 이유였다.

사건 이후 거의 60여년 지난 시점의 조사에서도 제주 4.3 피해자 중 설문에 응한 70명 중 68.6% PTSD 장애를 겪고 있었고, 52.9%가 우울증을 겪고 있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 군.

. 미군에 의한 피학살자 가족들의 대부분은 감정조절이 안되어 대인관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심리적 충격. 대인기피, 화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치료경험이 없는 사람이 85%에 달했다.

2) 고문 등 인권침해 피해

지난 군사정권 시절 고문 등의 현장에서 이들을 거의 짐승, 벌레와 같은 존재로 취급당했으며, 피해 자들은 스스로를 인간이하의 존재로 느꼈다. 고문은 권력에게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는 일이고, 인간의 자존감과 자아를 철저하게 붕괴시키기 때문이다.켰다. 그리고 사건 이후 수십년 동안 권력과 사회가 이 들에게 가한 존재 부인( 빨갱이, 간첩 은) 이들을산 송장’, ‘금치산자혹은 국가 내의 식민지 백성, 천민 이나 노예처럼 살았다. 누구도 그들과 함께 하려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반공지 상주의 사회에서 빨갱이, 폭도, 간첩으로 지목되어 산다는 것, 그것은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로부터 퇴출 을 의미하였다.

고문을 당하고 살아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육체적 정신적 상처는 평생 따라다닌다. 그리고 고문 등 국 가폭력을 가한 국가가 이 문제를 인정하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모든 법과 제도를 고치고, 관련자를 처 벌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병든 국가는 계속 사회를 병들게 한다. 조작간첩 사 건 피해자 김철씨는수개월 동안 밀폐된 고문실에서 일제강점기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독립군을 고문 했던 방식으로 고문을 당했다 고말했다. 그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끔찍했던 고문실은 그 자체가 공 포다.

이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가족과 이웃을 불신하고,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여 자살하기도 했고, 가 족의 죽음이나 친구들의 고통을 보고서도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즉 국가폭력이 계속 정당화되는 사회에서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수치심을 갖는다. 남들은 죽었는데 자기 손자 살아났다 는 수치심, 가족을 돕지 못했다는 수치심, 폭력에 굴복했다는 수치심, 고문 앞에 동료들의 이름을 불었 다는 수치심이 그것이다. 전쟁 기 피학살자 가족들도 그렇지만 민주화 운동 유가족들도 혈육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데 대해 자책감을 갖고 있다. 정보기관이 가족을 협박할 경우 수배자인 가족을 자수시키거 나 군 입대 시킨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삶과 생각은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 즉 폭력을 당했던 그날 그곳에 머물러있다. “피해의 현 재성, 그 자리에서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이 갖는 고통의 극단이다.... 정신활동이 그곳에 멈추어 있다는 것, 어떤 자질한 행복이나 감정을 잘 느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조작간첩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절정이다”. 사실 베트남 참전군인과 성폭력 피해자들의 체험에 주로 기초한 미국의 PTSD 라는 지표자체가 한국에서 이들이 겪었던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과 고통을 측정하기에는 부적절한 지표 일지 모른다.

조작 간첩, 인권침해, 및 고문 피해자들의 경우는 본인이 직접 피해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 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모든 나라의 모든 형태의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공포와 피해의식, 사회의 냉대와 차별, 이웃과의 단절, 실질적인 불이익 때문에 자신이 겪은 일에 일체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같은 종류의 피해를 겪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 다. 이들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아도 언제나 죄인처럼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과거 자신이 당했던 부당한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이 어느 정도 규명되고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어도 여전히 정상적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서투르다.

앞의 진실화해위 조사 중 피학살 가족의 경우 PTSD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20% 정도에 불과했으나, 군사정권 하의 인권침해 피해자들의 경우 조사 대상자 58명 중 43% 25영이 PTSD 증상을 앓고 있 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중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8명이나 되었다. 이들 학살 피해자의 59%, 인권침해 피해자들 중 68%는 외상 경험에 대해 침투적이고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기억이 났다고 답하고 있다. 한편 광주 5.18 피해자들 역시 사건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과잉경계에 의한 피해의식, 무기력 과 희망상실 등 만성화된 트라우마티즘으로 고통받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2006년의 조사에서는 당사자 들의 경우 41.6% PTSD를 경험하고 있으며, 부상자들의 경우 45.2%가 중간이상의 PTSD를 경험하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의학연구소의/              고문피해자 213명 대상의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6 % 163명 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고문을 포함한 다른 형태의 국가폭 력을 입고 생존한 사람 중 48.8% PTSD로 고통받고 있다. 이것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생존자 중 41.6% PTSD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과 비교해볼 때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한편 이 조사에서 조사 참여자인 고문피해자의 11.3%가 정신 분열증 진단을 받았다고 응답하였는데, 이는 한국인 평생 유별율 인 0.5%에 비해서 매우 높은 수치이다. 그리고 조사 참여자들 중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52 명으로 응답자의 24%를 차지하였다. 특히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들은 전체 43 17(39.5%)이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들은 3,4 회 정도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고, 10회 이상인 경우 도 2명이 있었다.


억울하게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은 그 억울함을 벗어나기 위한 일에 병적으로 집착을 한다. 즉 폭력의 트라우마는 자신의 해결되지 않는 원통함, 분노를 풀기위해 피해자임을 벗어나기 위해 집착 을 가져오게 된다. 자신이나 가족이 간첩이나 빨갱이로 몰려 학살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나 는 간첩이 아니다’, ‘는 빨갱이가 아니다 라고계속 외치면서, 오직 그 멍에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사력을 다한다.

3) 가해 군인들이 겪는 트라우마

전쟁에서 동료가 죽는 것을 목격한 군인 일반, 상부의       명령을 받아서 할 수 없이 살인과 고문을 저 지르는 군인. 경찰도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군인 중 20% 2004년 당시 의 조사에서도 부정적인 심리적 충격에서 고통받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수백만명 중 몇 퍼센트가 외상에 시달려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정부가 한번 도 조사조차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 첨전 한국군도 공포증에 시달린다는 증언이 있 다, “풀밭 위를 걷다가 다리를 잃은 수 많은 동료 부하를 봤기 때문에 풀밭을 걸어가지 못하는 증세가 있다 고                 한다.        미군의 경우 이라크와 아프칸 전쟁에 투입된 군인들 30%PTSD 증후군을 보인다는 보고서가 있고, 10만명당 미군 자살률은 이들의 2005년의 12.7명에서 2008년에는 20.2명으로 두배가 까이 늘었다.

전투 현장의 군인들에게 적은 사람이 아닌 존재, 즉 괴뢰, 빨갱이, 오랑캐 공비, 개 등으로 비인간화 됨으로써 살인에 대한 심리적 거부반응을 완화한다. 그리고 적군의 사살하는 것은 전우인 내 동료를 죽 인데 대한 복수 행위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어 살인의 부담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다. 군인들에게 전쟁은 승리하고 정복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존을 위한 전투로 기 억되고 있으며, 공포 그 자체다.

학살 현장의 가해 군인이 겪었던 트라우마도 상상 이상이다. 80 5.18 당시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 입되었다가 이후 시민에게 총을 겨눴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시민을 사살하라는 상관의 지시에 반항하 다 구타를 당한 군인이 이후 29년째 정신병원을 전전하였다. 보훈처는 군 복무로 인해 정신병이 생겼다 는 객관적 근거가 없다고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법원은 정신적 피해를 인정하고 불법행위로 동원된 데 대해 보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5.18 진압 63대대 출신 임00씨는 "5.18에 투입된 63대대 제대 장병 350명 중 적어도 150명에서 100명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고" 말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상이군인이 된 사람들 역시 소모품으로 간주되었던 것에 대한 분노, 존중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존심의 상실로 우울증을 겪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상관에 대한 분노도 있다. 그것은 전쟁 이후 이들이 버려지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빠지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부상당한 자 신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무가치한 존재로서의 느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미래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이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분노를 폭력을 표출하기도 했다. 5,60년대까지 우리 국민들은 손목에 쇠갈코리를 달거나 의족에 의지해 절둑리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폭언을 하는 상이군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린 국가에 대한 분노의 표 출이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외침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는 아직 이들 군인의 정신적 피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후 참전군인, 상이 군인에 대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졌지만, 이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상이군인의 고통은 물 리적 자원 연금 과( ) 교환되고 국가수호의 상징적 자본이 된다. 따라 고통의 정도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등급화), 전유됨으로써 전쟁의 참상에 대한 도덕적 호소가 금기된다. 상이와 용사가 국가에 의해 대중 의 기호로 표상됨으로써 개개인의 존재는 가려져 있다. ... 전우들이 전사하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데 대 한 양심의 가책을 갖고 있다. 대중매체는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상흔의 이야기로 전도시 켜 버린다. 이들의 육체적 상흔은 국가에 의해 반공주의 혹은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내세워진다. 그러나 전쟁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군인들에게도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베트남 파병 군인이나 한국전쟁 참전군인 등 국가를 위해 전투에 나섰으나 지휘관 급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누려도 이들은 사실상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상징에 더욱 집착을 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이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이들은 자신의 과거의 활동을 정당 화하고 자신의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국가에 더욱 집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민주화 이후 5.18 항쟁의 주도세력이나 민주화 세력이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에 대해 더욱 강한 피해의식과 소외감을 가진 나머지 반공, 발전, 국가주의에 더욱 집착을 하게 된다(윤충로, 2007). 국가 를 위해 싸우다가 피해를 입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로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기를 열망하는 참전 군인 은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들처럼 국가 폭력의 행사에 가해자의 일부로 참여하기도 한다. 그것이 국가라 는 정체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에서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해서는 물론 참전자들 대상의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 기 때문에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한국에서는 사건이후 오래 시간이 지속되어도 만성적인 트라우 마를 겪는 사람이 많고, 학력이 낮거나 계층적으로는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즉 사회적으로는 그러한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정치체제가 분단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 고, 사회적 배제나 무관심이 지속되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국가나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들의 트라우마가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상이군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신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학력, 경제력,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한 경우 더욱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광 주 5.18 피해자의 경우도 항쟁에 끝까지 참여했던 주로 바닥 출신 사람들, 사건 이후에도 노동자나 사 무판매직에 종사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당시 학생이었던 사람 등에 비해 훨씬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국가, 사회전체 차원의 트라우마와 도덕적 아노미

개인뿐만 아니라 굴욕적인 식민지 체험, 외적으로부터의 공격, 대규모 재해나 따돌림 등을 집단적으 로 겪은 국가나 민족, 사회일반 그리고 특정 지역사회도 그와 유사한 정신 상태, 즉 공포와 슬픔, 과민 한 반응과 공격성, 과거 부정과 기억의 삭제,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과도한 집착 증세를 보일 수 있고, 또 위축 불신 희망 상실 등 도덕적 손상을 입을 수 있다. 20세기 한국인들은 일제 말 전시 동원, 해방 후 좌우 대립과 분단, 한국전쟁, 이후의 베트남 전쟁, 그리고 군사정권의 폭력과 광주 5.18 등을 집단적으로 체험했다. 이 폭력의 경험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 것이며, 그것 이 한국사회의 도덕적 손상을 가져온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국가나 사회 전체가 전쟁이나 폭력의 상처를 입고 이후에도 그와 같은 전쟁 폭력이 지속되거나, 이후 에 가해 국가나 가해 세력이 그것을 부인할 경우에는 피해 국가의 트라우마는 지속된다. 일본의 한국 과거사 부인이 한국인들에게 이와 같은 영향을 줄 것이고, 광주 5.18 가해세력이 5.18에 대해 사과하지 않거나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여전히 승승장구 하면서 권력과 부를 누리고, 항쟁이 북한군의 소행이 라고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매체가 존재할 경우 광주 시민 일반은 더 큰 상처를 입는다.

한국사회 전반의 사회적 정신병리, 특히 반공주의 콤플렉스는 20세기 최대의 재앙이었던 한국전쟁에 서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나, 남북한의 분단과 주기적인 적대 관계에 의해 강화 유지되었고, 멀리는 식 민지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다. 식민지의 억압, 전쟁의 공포는 모든 한국인에게 원초적인 상처를 안겨 주었는데 한국전쟁과 분단은 바로 식민지의 미청산 즉 국민국가 건설의 실패라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

. 서구적 표준을 설정하고 식민지를결핍 으로만보는 태도, 식민지를예외적 일탈 로보면서 돌아보 지 않으려는 태도가 모두 여기에 대당한다. 식민지와 분단은 민족과 국가의 좌절. 분단은 서로가 민족 = 국가를 자처하는 과잉 상징화하게 된다. 분단 상태에서 남북한 자신과 민족을 동일시함으로써 상대방 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특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코리안이나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도 모두 식민지 트라우마, 역사 적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의 경험은민족적 리비도 의흐름이 단절, 억압되는 것을 의 미한다. 그래서 역사적 트라우마는 집단 전체의 성향이나 인격을 왜곡시키고 집단적 광기와 같은 현상 을 만들어 낸다. 오늘의 한국은 식민지, 전쟁, 분단의 한 세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심각한 외상을 입 은 사회라 볼 수 있고, 그것이 국가와 국민의 행동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북한, 빨갱이에 대한 공포와 공격성은 강자인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심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영어구사능력에 따라 지위가 좌우되고 능력이 평가받는 것, 미국의 유명대학 졸업장이 한국에서 대학교수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은 일종의 식민지적 멘탈리티가 지금까지 한국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력이나 주류매체가 여전히빨갱이’, ‘종북 담론을구사하는 것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며, 사회전반으로도 이들 희생자들에 대한 공감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평행하는 두 개의 세계로 구분되면, 한 쪽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세계의 고통에 대해 아무련 연관 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들도 도덕적인 아노미 상태에 서 벗어날 수 없다. 정의의 훼손, 국가 범죄에 대한 분노도 일어나지 않고, 피해자에 연민의 감정도 생 겨나지 못하도록 사회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설사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 다는 생각 때문에 심각한 무력감을 갖게 된다.

트라우마가 국가나 사회 전체 차원에서 발생하면 피해자 가해자/ , 처벌 보상의/ 구분을 넘어서 법적 정 치적 도덕적 문법으로 거론되어야 하며,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사회전체가 치료, 치유의 대상이 될 것 이다. 정치가 가장 중요한 치료제가 될 것이다.

4. 진상규명, 재심판결 등과 트라우마 극복의 가능성

학살사건, 고문 등 피해가 포함된 조작간첩 사건 등에 대한 국가차원의 진상규명, 그리고 피해자들에 대한 민사상의 보 배상이. 어느정도 진행되었다. 국정원(NIS), 국방부, 경찰청의 과거사 기구들과 진실화 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의 조사는 그동안 은폐된 인권침해 사건들의 실체를 규명함으로써 피해자들의 구제와 명예회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특히, 이 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지난 수십년 동안의 학살, 고문 피해자들의 주장과 인권단체들 의 고문조작 피해 자료들이 상당수 진실로 밝혀졌다. 그 결과 피해자들이 부분적으로 구제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일부는 재심을 통해 배상을 받았다.

한국의 대다수 학살, 고문피해자들은 검찰이나 공안기관의 강압적인 수사와 이후 판결이라는 절차를 거쳐간첩 이되었고, 장기간 감옥 생황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첫걸 음은 우선 의문사 위원회(The Presidential Truth Commission on Suspicious Deaths) 혹은 진실화해 위원회 활동을 통한 사건의 진상의 규명이고, 이렇게 얻어진 진실을 통해 재심 판결을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다. 즉 이들 피해자들은 검찰과 법원이라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국가기관의사법절차 를통해 간첩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피해를 구제받기 위해서는 그 절차를 거 꾸로 되밟아야 한다. 이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지 않는 한 이로 인한 법적, 심리적, 사회적 고통은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상규명 사건에 대하여 재심권고를 하였다. 검찰이 과거사 사 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의 피해회복을 위해 직접 재심을 청구한 사례가 500여명에 육박했다. 많은 사건이 무죄로 확정되었고, 나머지는 무죄판결 후 상급심에서 진행 중이거나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아직 개시결정이 나지 않거나 개시 결정 후 재심 진행 중에 있다. 재심법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여 재심사유인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 호7 , 422조에 의해 재심개시결정을 하였고, 실체 판단에 들어가서는 전부 무죄 선고를 하였다. 그리고 무죄 확정 판결 후 진행되는 민사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도 법원은 위원회의 결정 및 재심법원의 판결을 증거로 채택하고 1)체포, 구속과 정의 위법, 2)경찰과 검찰 수사과정의 위법 고문( ), 3)공판절차 및 형사판결의 위법으로 세분화하여 국가 배상 판결을 인정하고 있다.

즉 한국에서 과거의 고문사건 자체와 그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후유증에 대해 국가차원의 체계적인 조사나 예방조치는 거의 없지만, 개별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 결정이 나오고 있고, 피해 자들에 대한 배상 작업은 비교적 잘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보도연맹 학 살 사건, 제주 4.3 사건에 대해 사과했으나 군, , 국정원 등 가해기관은 제대로 과거 사실을 인정하거 나 공식적인 사과하지 않았고, 그리고 재판과정에서의 법원이 여러 가지 방식의 태도 변화가 있어서 피 해자들에게는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재심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은 고문, 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을 고통에 빠트린, 국가에 의 해 조작되어 공식화된 진실을 뒤집는 과정이다.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간첩으로 조작된 구체적인 상황에서부터 당시의 정치적 맥락, 법적 논리,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짚어나가야 한다. 재심 에 이르는 과정은 이와 같이 불법감금과 고문,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해야 하는 과정이다. 물 론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문수사실의 고통스런 상황을 재연해야 했다. 그 리고 고문에 굴복하여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허위자백을 한 그 순간의 그 무력감과 비참함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그런데 당시의 사건 조작, 고문, 기소, 판결 등을 통해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어낸 가해자나 정치적 목 적으로 그러한 일을 기획하거나 명령을 한 사람 상당수가 아직 살아있는데, 당시의 지휘 명령계통예 있 었던 사람들에 대한 수사를 하지는 않고, 오직 피해자들이 수십년 전의 상황을 복기해서 무죄를 증명하 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가해자 중에서도 수사기관에 의한 고문사실을 고백해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윽박 질러 그러한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있던 검사나 판사들이 경찰이나 공안기관의 수사관보다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을 갖고 있지만, 이후의 재심사건에서는 이들에 대한 수사를 거의 생략하고 진행된다.

무죄판결은 한국사회에서 비시민(non-citizen), 사실상불가촉천민’(untouchable)과 같은 존재인 간 첩에서 인간으로, 이름 석자를 가진 보통 시민으로 되돌아오는 결정이다.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 외상 경험으로 인해 무력감과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던 이들이 이제 자신의 내적인 힘에 눈을 뜨면서 외상이전의 삶보다 높은 자존감과 가치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정서적 둔감함 예민함 이 줄어들면서 타인에 대한 친밀감, 연민, 동정 등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을 수용하게 되고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이들을 외면했던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도움을 주는 활동까 지 하게 된다.

그런데 재판과정에서 이들의 상처를 덧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사건 당시에서 고문 조 작을 통해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던 검찰이 사과나 반성을 하기는커녕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항소, 상 고를 하는 일이다. 재심 법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법정에서는 '할 말 없다 거나' 고개를 푹 숙이던 검사 가 돌아서서 항소 상고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라며" "굳이 상급심 판단을 받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기계적으로 항소 상고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 말한다. 즉 검찰은 자신의 과거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 겠다는 말이다. 검찰의 이러한 태도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이고, 그들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행위다.

그러나 재판을 통한 재심은 국가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조치일 따름이다. 고문이나 잔학행위 가해자 인 국가는 사건 별로 유족들이 재심을 하도록 하기 이전에 일괄적으로 이런 사건을 처리했어야 한다. 의문사위원회나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상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국가차원의 공식 공개 사과, 그리고 포괄 적 배상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국가차원의 공개 공식 사과나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피해자나 생존자들은 개별적으로 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게 되었고, 무죄결정을 받은 이후 국가에 손해배 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였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법원은 국가기관이지만, 행정부가 아 니므로 개인 소송 당사자의 사건에 대해서만 심리와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배상 역시 판사의 판 단에 의존한다. 여기서 국가차원의 일관되거나 형평성 있는 조치를 기대할 수 없다. 둘째로 법원은 오 직 권리행사를 한 피해자들의 요구에 반응할 따름이며,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 따라서 과거 고문 피해를 당하고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을 하지 않았거나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겪은 진실과 일치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얻지 못한 피해자, 그리 고 그것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법원으로부터 무죄결정을 받기를 원하지 않아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사람 들은 법원으로부터 무죄 결정을 받지 못한다. 즉 피해는 동일한 것이지만,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은 사 람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즉 법원은 일관성과 보편성의 관점에서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결정이 되기에는 결함이 있고, 배상액수 에서는 판사마다 판단의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배상액수가 합리적이거나 공평한 기준에서 결정되 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법원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의 주체이기도 하므로 가해의 주체가 자신의 과오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반성이 없이, 또다시 과거의 판결을 뒤집는다는 것도 모순인 측면이 있다. 개별 판사들이 사과를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의 공식사과, 즉 사법부의 공식사과는 아니기 때문이 다.

그래서 피해자 유족이나 생존자들이 법원을 통해 재심을 요청하거나 배상을 청구할 때는 법원의 이 러한 한계를 미리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즉 피해자 개인의 차원에서는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몰라 도, 국가가 공직적으로 이 결과를 받아들어 어떤 법과 제도, 관행을 고치는 것이 아니므로 유사한 피해 자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어떻게 하면 학살, 고문 등 국가의 잔혹행위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약간이라도 원상회복의 느낌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회가 복원될 수 있을까? 진상의 규명과 무죄의 결정, 국 가의 잘못 인정, 피해자 배상은 그것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지언정 원상회복, 진정한 과거사 정 리와는 거리가 멀다. 가해자 처벌이 없다면 정의의 수립을 기대할 수 없고, 피해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치유의 과정이 결합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음은 물론 사회의 도덕적 질서의 복원 도 기대할 수 없다.

우선 법원의 무죄판결이 국가의 사과를 의미하는지가 의문이다. 일부 법관의 개인적 사과표시가 국가

의 공식적 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국가가 이렇게 내키기 않은 방식으로 사건의 실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해자의 처벌은 말도 꺼내기 어렵다. 가해자를 규명하기도 처벌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 을 규명할 의지도 처벌할 의지도 없는 국가는 여전히 그것은 사실상 범죄라고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국가가 그러한 잘못을 앞으로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2000년대 이후 국정원 등 이 국민을 사찰하거나 간첩조작 사건을 일으키고, 선거에 개입하는 일이 재발한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특히 이명박 정부 하에서 국정원과 검찰은 탈북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조작되기도 했으나 관련 자들 중에서 처벌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과거 인권침해나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은 가해자 처벌 없이는 진정한 과거청산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거나 가해 기관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잘못된 관행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들 개인이나 기관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적반하장 격으로 가해 사실을 부인하거나 오히려 이들에게 2차 가해를 가하기도 한다. 고문사건 재심 사건에서 검찰이 항소나 상고를 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선 이후 검찰이 과거 방식 으로 권력자의 입김에 따라 정치적인 수사를 계속하거나 국정원과 보조를 맞추어 간첩조작에 가담하는 것도 그 예이다.

한편 피해자 개인의 상처의 치유는 결국 그들을 따돌렸던 사회가 그것을 반성하고 이들을 다시 품어 줄 때 가능하다. 이웃과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은 이들 피해자들에게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재심 무 죄결정을 담은 판결문은 간첩 혹은 '간첩의 가족 이라는' 누명을 벗겨주는 유일한 입증자료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판결문 하나로 이들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기는 어렵다. 이웃은 오히려 "보상금을 얼마나 받으 려고 그러느냐 식의" 싸늘한 시선만 보내는 경우가 많다. 진실화해위는 간첩조작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주민들을 참여시킨 다음 위안잔치를 주선하곤 했다. 자치단체, ·, 마을주민이 참여하는 잔치는 당사 자들의 수십 년 된 응어리를 푸는데 법원 판결 이상의 효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웃들은 이들를 흔 쾌히 받아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내 형을 간첩으로 몰아세운 사람들에게 거짓이라도 좋으 니 사과 한번 받는 것이 유일한 바람 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재판을 통한 무죄 결정, 배상결정은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필요한 절 차이기는 하나 그것은 잘못하면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고, 국가나 사회가 진정한 반성을 통해 거듭하는 절차를 차단하는 바람막이 장치일 수도 있다.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주장, 그리고 사회정의와 도덕성 회복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면 재판을 통한 구제는 이런 한계에서 벗 어나지 못할 것이다.

5. 시민사회와 사회적 치유

반공 반북,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자행된 과거의 잘못된 공권력 행사의 모든 진실이 알려지고, 가해자 가 사과를 하거나 응분의 처벌을 받으면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어느정도 극복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 했듯이 군, 경 등 말단의 가해자도 일종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사법 정의, 피해자 보배상 조치를 통해서 전체의 트라우마가 극복되기는 어렵다. 피해자 보상이나 배상은 하나의 치유와 복원이 될 수 있지만, 권력이나 가해자가 제대로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사과하지도 않은 채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보상조치 를 실시할 경우 그것은 상처를 지속시키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적대와 폭력을 가져왔던 바로 분단 체제 아래의 힘의 불균형이 시정되고, 피해자들 간에 불신도 해소되어야 한다. 억울한 처지에 대한 사 회적 인정과 공감이 일어나면 모든 피해자의 닫힌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끊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 다.

한국처럼 식민지와 내전이라는 대참사를 몸으로 겪었고, 여전히 분단 상태에 있는 경우에는 국가나 사회의 욕망 자체가 크게 좌절된 이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국가나 사회 전체 차원에서의 사회적 치 유가 중요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정의, 특히 응보적 정의보다는 복원으로서의 정의가 중요하다. 억울한 피해자나 말단 병사 등 폭력의 하수인이었던 가해자들의 상처는 우선 국가가 사실을 인정하거나 잘못된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그에 합당하는 응분의 조치를 취해 줄 때 어느정도 치유될 수 있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분단극복, 평화, 통일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 판문점 정상회담, 그리고 남북한 화해와 평화의 시도는 최고의 분단 트라우마 치유제라 할 수 있다. 남북간의 군사정치적 적대가 해소되고, 지난 70년 동안 남과 북에서 분 단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남북한 정부로부터 적절한 위로를 받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북 간의 화해 이전에 남남 간의 화해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남한 내부의 화해는 분단과 전쟁이 초래한 각종의 부정의를 바로 잡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남한 사회 내에서의 국가와 국민,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관계의 회복, 민주주의의 질적인 심화를 통해 서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 내에서의 화해와 치유의 노력도 계속되어야 한다. ‘진실의 힘같은 단체는 고문피해자들 에 대한 치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광주와 제주의 트라우마 센 터의 역할도 의미심장하다. 행안부에서는 국가적 트라우마 센타 설립을 위해 용역도 발주했으나 구체적 으로 착수하지는 않고 있다.

특히 종교단체나 종교지도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 기독교 등 중교 종교단 체는 과거의 국가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도 그것을 막는 역할을 하지 않거나 오히려 가해의 편에 섰듯 이, 사건을 해결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에도 언제나 비켜서 있었다. 특히 6.25 한국전쟁 기간 동안 동족 간에 전쟁이 발생하여 수만, 수십만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발생했는데, 종교기관 혹은 종교자들이 자신이 어느 한쪽의 편에 선 피해자라는 이유로 권위주의 정권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면서, 화해보다는 적대의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한국의 제도권 교단이 얼마나 우리나라 대중들의 고통, 우리 민족의 진정 한 평화 통일에 무관심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교단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런 정도의 고통 과 비극이 있었다면, 적어도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풀자고 제안하는 종교 지도자, 그러한 담론 정도는 본격적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다. 용서 화해 등과 관련된 주제에 기여하는 데서 남아 공화국은 물론이고 독일 등 외국에서는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의 역할도 매우 컸다. 그런데 한국의 각 종 교단체의 성직자들 중에서 한국전쟁으로 이렇게 사회가 심각하게 찢어져,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 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 자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일까?



[1] ) 최인훈의 [회색인 에서] 전후 젊은이들의 사고를 지칭할 때 사용한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