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
얼마 전 도반스님이 찾아와 저에게 공부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스님, 내가 예전까지는 죽음이 두려웠거든. 그런데 재작년부터 공부가 익어가면서 이제 더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어. 그런데 지금은 말야, 삶이 두려워...”
도반 스님이 말을 듣고 잠시간 침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정에도 곧잘 들고, 전체라는 인식이 익었으며, 눈앞이 분명하고, 자신의 몸에 대한 실체화의 관념에서도 상당 부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두려워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태어남과 죽음이 더 이상 자신의 주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생사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가셨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생사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사에 대한 실체화에서 벗어나면, 이제 다음 단계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시 생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가 사실 실체화로부터 벗어나는 공부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생사로 들어간다는 것은 실체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없는 실체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에 대한 인식이 생겨, 생사의 문제로부터 한편으로 자유로워졌음에도, 그것은 여전히 반쪽짜리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사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인연과 조건에 자유롭게 걸려들어가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생사와 삶에 대한 실체화는 벗어났으되, 실체없는 인연의 흐름으로서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이 바로 삶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삶으로 제대로 온전하게 들어가는 것이 바로 그 다음의 공부입니다. 옛 선사들도 공부가 어느정도 무르익은 학인들에게는 좌선의 시간을 줄이라 하였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채로운 경험도 해가고 하면서 공부가 익어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림(保任)이라고 합니다. 보호하여 임한다는 뜻인데, 실체없음이란 깨달음을 잘 보호하면서, 삶의 경계나 흐름에 잘 임한다는 뜻입니다.
<서장>에서 대혜스님이 동봉거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더듬어 찾지 못하는 곳에서 잡을 곳을 잃어버리면, 비로소 조주 노인이 말한 ‘출가하기 이전에는 깨달음에 부림을 당했는데, 출가한 뒤에는 깨달음을 부린다’를 알게 될 것입니다.”
동봉거사를 독려하는 대혜스님의 말씀이나 뜻을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으로 숨한번 작게 내쉬기도 합니다. 그렇게 잡을 곳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깨달음을 부린다는 말을 곧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자체에는 깊이라는 게 없을 것이나, 사람의 공부가 익어가는 정도에는 깊이라는 게 있습니다. 잡을 곳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지금껏 살아온 삶의 수완이나 지혜로써 혹 곧잘 깨달음을 부릴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지극히 희소한 확률입니다. 삶으로 익어가는 데 시간이 따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공부인이 잡았다 놓치고, 보았다 흐려지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이것이 공부인지 뭔지도 모르는 과정을 접한 10대 중반 무렵부터 이 과정이 무수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에야 돌이켜보면 압니다. 그러한 시행착오들이나 반복되는 과정들이 실상 삶으로서 온전히 익어지기 위한 담금질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도반스님이 삶이 두렵다는 말이 알기 때문에 침묵한 것입니다. 태어남과 죽음의 문제가 어느정도 가셨다고 해도, 삶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지금껏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골몰했지만, 막상 생사의 문제가 사라지고 잡을 곳을 잃어버리니, 그렇게 확연해보였던 목표가 사라져버리게 되었으니, 눈앞에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펼쳐지는 삶의 경계 경계가 전혀 생경하게 다가오면서 두려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힘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삶을 원만하게 운용하고, 경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엔 별 수가 없습니다. 그래저 저는 도반스님에게 삶을 어떻게든 잘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내며 자신의 깨달음도 돌이켜보고, 경계마다의 대처도 점검하고 하면서 점차로 삶이 잘 익어지는 과정을 치러낼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고인이 말했습니다.
열반의 마음은 밝히기 쉬워도, 차별의 지혜는 밝히기 어렵다.
涅槃心易曉 差別智難明
차별없음이나 실체없음을 알기나 체험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 차별없는 차별로서, 실체없는 실체로서의 삶의 흐름으로 지혜롭게 녹아들어가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수행이니 말입니다. 차별없음을 말하거나 깨닫는 것이 수행이 아닌 것은 아니나, 진정한 수행이란 이 차별없는 차별을 인연에 알맞은 차별의 방편으로서 원만하게 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작년 봄에 영입한 친구, 금강송 관솔 단주 조계(照界)를 굴리는 이유입니다. 삶의 경계경계를 잘 비추어내면서, 또한 삶의 순간순간을 잘 굴려내겠다는 원력을, 이 조계라는 단주에 심었던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단지 나무로 만든 단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원력을 다지고 굴리는 수행 도반입니다. 그렇기에 이름도 지어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계를 굴립니다.
쓰윽쓰윽... 쓰윽쓰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