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교보문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교보문고

소득공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궁리 | 2001년 10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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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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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인문 > 철학 > 한국철학 > 한국철학일반

한국인의 죽음론 고찰서. 죽음의 의미를 끈기 있게 고찰하는 한편, 고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태도를 심도있게 서술했다. 이를 통해 우리네 삶과 죽음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고, 죽음의 공포를 덜어내고 정을 붙이려면 죽음과 절실하게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자소개

저자 : 김열규작가 정보 관심작가 등록
국어학자/국문학자
목차
제1부 거듭 되새기는 죽음들
- 삶을 위한 죽음의 사상 ...29
- 우리들. 죽음을 내다보는 존재 ...44

제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 죽음은 삶과 함께 자란다 ...59
- 우리들 죽음의 자화상 ...64

제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 그대. 삶과 죽음 사이를 바람처럼 오가는 이여 ...149
-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158
- 몰라보게 되는 죽음들 ...165
- 과잉 상태의 죽음 ...177
- 열린 죽음 ...196
- 죽음이라는 전역 ...204

제4부 죽음의 문화적.신화적 형상
- 지는 잎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217
- 신화가 일군 죽음들 ...258

제5부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고
- 죽음을 위한 몇 가지 슬픈 사연들 ...273
- 죽음의 유머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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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것은 삶이 그 자신의 숨결을 그리고 핏기운을 다그치기 위해서 있는 말이라야 한다. 죽음을 잊으면 삶이 덩달아서 잊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그 사이 '죽음론'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지 못했다면 삶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두려움과 몸서리, 비통과 탄식, 좌절감과 절망, 상실감과 허무, 그러면서도 엄숙과 장중함.

이것은 삶이 그 자신의 숨결을 그리고 핏기운을 다그치기 위해서 있는 말이라야 한다. 죽음을 잊으면 삶이 덩달아서 잊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그 사이 '죽음론'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지 못했다면 삶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두려움과 몸서리, 비통과 탄식, 좌절감과 절망, 상실감과 허무, 그러면서도 엄숙과 장중함.

이것들을 죽음을 더불어서 우리는 경험한다. 더 이상 비길 게 없는 엄청난 감정의 복합체다. 그 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자니 어둡고 습지고 침울했다. 공포롭기조차 했다. 하지만 끝내는 밝음과 화함으로 책을 끝맺기로 했다.'메멘토 모리.'삶을 다그치듯 죽음을 잊지 말자.
- <책머리>중에서

본문 중에서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
죽음을 죽는다
우리들이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이라서 그 이상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곧 인간의 죽음이란 얘기는 단단히 또 똑똑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 강조와 더불어 인간의 죽음, 생물이 누리는 유일한 죽음에 관한 얘기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없어지는 것뿐이다. 잘 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못 된다.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죽는다.

인간은 그 죽음을 생물학적인 사실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유일한 존재다. 인간에겐 인간 스스로 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갖는 지상의 존재 이유 바로 그것이고 가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체 성장과 소멸의 당연한 과정의 일부로서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설혹 그 과정에 껴들어 있다고 해도 죽음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값을 지닐 수 있는 엄연한 왕국이다.

인간에게 목숨이 있는 동안, 인간은 생물학적인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에 매여 있지 않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다. 이 생물의 사슬을 깨기 위해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당위이고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애써 얻어낸 수확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의해 인간은 비로소 생물학을 넘어선 것이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생물학적인 사실로 해서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형이상학과 영혼의 종교학에 짙게 물든 빛과 더불어 우리들을 찾아든다. 정신과 영혼의 자기 증명을 위해 우리들은 죽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법도 한 것이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명료하게 정신 및 영혼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최종적인 여행 목적지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죽음은 거듭 자유의 징후가 될 수 있다. 죽음의 필연성은 종국적인 해방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쿠제의 말은 그러기에 음미해봄직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에 기댄 피아론적인 명제가 아니다. 인간은 절대로 목숨이 지는 그 순간에 자기 죽음을 갖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숨이 지는 순간의 죽음은 이미 자기 죽음이 아니다. 남의 죽음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흔히 임종이라고 하는 그 죽음이 자기 죽음이 아님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의식, 인간의 자의식 저 바깥으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사뭇 먼 암묵의 어느 우주공간으로 유성처럼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인간 의식으로 잡혀지지 않는 것을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식과 주먹은 인간이 뭣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두 개의 큰 도구다.

인간은 목숨이 지는 그 찰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미 죽음을 갖는다. 인간은 죽음과 따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죽음을 미래의 어느 모르는 시점에 두고, 그 시점에 도달하기까지 죽음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인간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수시로, 죽음을 갖는다. 살아가면서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는 게 다름아닌 인간적 삶의 양상이다. 그것은 무척 개성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삶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죽음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한 누군가의 말은 매우 그럴듯한 것이다. 또한 죽음과 성애(性愛), 곧 타나토스와 에로스를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둘을 서로 얽혀서 상호 기생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아주 그럴듯하다고 해야 한다.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도 생물학적인 테두리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으려 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로서 명기되어야 할 명제다.

죽음을 문화로 가꾸다
인간은 죽음을 생물학에서 풀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연에서 풀어놓았다. 죽음이 자연의 이법으로 절로 인간을 찾아오는 것을 인간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떠오른 해가 지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갈잎이 지는 것은 자연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인간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그것에 기댄 비유법으로만 처리하기를 인간은 바라지 않았다.

인간들은 죽음을 대단히 인위적인 것, 매우 인공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그런 뜻으로 인간은 죽음을 만들고 생산한 것이다. 제 손으로 손수 죽음을 제작한 것이다. 죽음을 만드는 생산 공정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꽤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가장 규격적이고 엄정한 것은 공산품이 아니다. 인공위성 따위도 아니고 유전공학 따위도 아니다. 그렇다면 뭣일까.

그것은 바로 의식, 종교적 의식이다. 죽음은 의식에 의해 문화가 되었다. 죽음, 그것으로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이 육체의 것이기를 그만두게 된 사실과 무관할 수 없다. 인간 죽음은 인간 육체에 딸린 게 아니다. 육체의 종말, 말하자면 시신의 해체와 부패는 사실 죽음의 의식의 관여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인간 죽음을 떠난 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물질적인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문화로 가꾸어왔다. 죽음을 문화가 되게 가꾸었고 뒤이어서 죽음을 문화 속에 가꾼 것이다. 에드가 모랭이 그의 유명한 저서 『인간과 죽음』에서 “이리하여 인간은 그 기원이 있은 뒤 줄곧 죽음을 그들의 풍족함과 그들의 갈망에 의해 길러온 것이다”라고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들은 소극적으로 죽음이 문화라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다. 사형제도가 빚는 죽음, 전쟁이 빚는 죽음은 인간 문화가 생산한 죽음의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앞서와는 좀 달리 이런 뜻으로도 인간은 죽음을 생산한다. 죽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부러 고안해낸 인간적인 장치가 다름아닌 사형이고 그리고 전쟁이다. “죽음의 의식(意識)이 남겨놓은 마지막의 것, 그것이 곧 인간 자아이다”라는 명제에 맞추어서 “죽음의 의식이 남겨놓은 또 다른 마지막의 것, 그게 곧 문화다”라고 해도 큰 잘못은 없다.

'죽음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자연이 아니라 문화였기 때문이다. 하긴 자연에도 역사란 말을 쓰기는 한다. 가령, 지각의 역사, 지구의 역사, 그리고 우주의 역사란 말이 실제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란 것이 결정론적인 변화인데다, 그 변화의 폭이 엄청나게 크다. 몇십, 몇백만 년을 예사로 넘나든다. 거기에다 그런 것을 역사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것에는 주체가 없다.

일어날 변화가 확인될 수 있는 것뿐이다. 따라서 자연의 경우는 역사라고 부르기보다 변화라고 부르는 게 옳다. 덩달아 자연의 역사란 개념에 또 다른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다. 이 경우, 시간이란 게 완전한 중성이다. 변화의 주체가 능동적인 행위로 참획하는 그런 시간 개념의 존립이 불가능하다.

역사란 아무래도 문화의 몫이지만, 죽음의 역사가 기술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자연이 아닌 문화라는 것에 대해 말해주게 된다. 이른바 가정의례준칙에 묶인 오늘의 사람들이 조선조 말의 사람들이 누렸던 죽음과 같은 죽음을 누릴 수 없음은 사뭇 뻔한 일이다. 또한 주자가례에 묶인 조선조인들의 죽음이 불법에 귀의한 고려인들의 죽음과 다르리란 것은 아주 뻔한 일이다.

이같이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의 테를 벗어나고 자연의 테를 벗어남으로써 인간다움을 지닌 죽음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죽음은 정신이나 영혼의 몫이 되고 문화의 몫이 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경우, 조선조 말기를 거쳐 극히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들도 확연하게 가족구성원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죽은 이는 가버린 가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족으로서 한 집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보이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끼리 사이의 교섭보다 더 긴밀한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는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호적부에서 삭제될 때, 죽은 이는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서 삭제되는 것이다. 사망신고서는 영원한 퇴거증명서다. 이 두 가지 죽음 사이에, 커다란 문화체계의 차이가 있음을, 역사의 차이가 있음을, 그리고 죽음을 정신화하고 영혼화하는 관점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 소개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밑속학 전공.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역임.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 연구교수 역임. 현재 인제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저서:『한국인의 시적 고향』『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아리랑, 역사여 겨레여 소리여』『어머니, 동화는 이렇게 읽어주세요』『빈 손으로 돌아와도 좋다』『한국인의 신명』 등이 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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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l 2018-07-05 07:33:36 총 4 중4 구매 정독해요
삶에 대한 성찰과 가치 부여를 새롭게 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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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ha88 2018-06-22 01:26:44 총 4 중4 구매 좋아요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내려놓게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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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죽음학의 대부! he**kmh | 2013-06-2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김열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서울: 궁리, 2001.
 
“죽음의 손상으로 삶의 훼손이 단적으로 얘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듯이, 죽음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308)
 
이 책은 한국 학자에 의해 쓰여진, ‘죽음’에 대한 에세이의 대표적인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작품과는 비슷한 관점이지만, 좀 더 한국스러운 글들이 담겨져 있다. 오히려 서양서적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워낙에 방대한 내용의 글들이 담겨있을뿐 아니라 한국사를 잘 모르는 까닭일 거다. 하지만 한글이라는 문자로 너무나도 잘 쓰여진 ‘죽음’에 대한 산문집이다. 너무 매력적이고, 인용할만한 문구들이 너무도 많았다.
 
문제제기를 하는 대목들은 다채롭고도 폭넓다. 죽음이라는 것이 절망적인 까닭은 그야말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38-9), ‘죽음의 몰개성’(67-8), 삶에 이어 죽음마저 박탈당하고(214),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장례식이 산 자를 위해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져 형식을 존중하는 의례는 지나치게 간소화되었다.(167, 282-3) 한편, 우리 모두 홀로코스트의 공범이 될수 있다는 점까지 직시할 수 있게 해준다.(306)
 
이러한 잔혹한 현실을 직면할 때에라야 비로소 대안을 세울 수 있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한계가 인간 존재의 실제 모습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270) 그런 까닭에 “죽음을 예성하며 삶이 재구성될 때부터 사람들은 죽음조차 살게 된다. 에누리없이, 문자 그대로 죽음을 사는 것이다.”(221) 죽음을 달관하고 미리 준비하고 연습했던 사람들의 ‘비창감’을 본받아야 하겠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닫기
'죽음의 선물을 받다'- 한국인의 죽음론을 통해 본 죽음의 의미와 가치 ch**edu59 | 2010-11-25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우리의 삶 주변엔 수많은 죽음이 공존하고 있고 죽음을 떼어놓고는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와 가까이 있지만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할 만큼 우리는 이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외면한다.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기억은 나 또한 가지고 있는데, 어릴 적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두려움 또한 컸다. 항상 부모님이나 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무서워 밤잠을 못 이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두려움은 커가면서 조금씩 극복이 됐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부정하고 망각하려는 태도를 갖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우리들이 외면하는 ‘죽음’이 ‘삶’만큼이나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말한다. ‘죽음’이란 ‘소멸’과는 구분되는,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를 뛰어넘은 것이며, ‘죽음’은 오직 인간에 의해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서도 큰 의미를 가지며 그러므로 인간이 ‘죽음을 생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떠한가? 전 세계는 전쟁, 대량학살 등으로 죽음을 ‘대량생산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유명 연예인의 자살부터 노인, 초등학생의 자살까지 ‘자살공화국’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또한 뇌사, 안락사 등이 윤리적 문제로 이슈가 되고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는 이 시대에 저자의 죽음에 대한 담론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특히 우리, ‘한국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한국의 전통적 문화 중 많은 부분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언어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상반된 모습들이었다. 사람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 말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쓰는 대신에 ‘돌아가시다’, ‘숨이 끊어지다’와 같이 돌려 말하는 우원법을 흔히 사용하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도피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배가 고파 죽겠다’, ‘기가 죽는다’처럼 사람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말들에는 오히려 죽음이란 낱말을 과용하고 오용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전통적인 죽음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조상들은 죽음을 ‘떠나감’이 아닌 ‘돌아감’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승은 생명의 원천이며 본향으로 여겨졌다. 이는 오늘날 죽음에 관한 인식과는 매우 다른 부분이다.
이처럼 조상들은 죽음을 단지 두렵기만한 것이 아니라 신성하고 경건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장례와 관련된 여러 의식들이 존재했다. 저자는 지붕위에서 떠도는 영혼을 부르는 초혼 의식부터 곡성, 염, 상복과 상장 등의 다양한 의식들이 죽음과 관련해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다. 어찌 보면 복잡해 보이는 이러한 의식들은 조상들이 그만큼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저자는 한국의 전통적인 죽음의 모습과 더불어 현재의 죽음의 모습까지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바라보는 오늘날 한국인의 죽음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죽음이 의학적 결함이나 한계 등으로 간주되는 등 죽음은 인간의 물리적, 생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 장례 의식이 간소화 되고, 장례가 상업화되었다. 이제는 집이 아닌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장례의 모든 절차 또한 가족이 아닌 장례 관련 업체에서 모두 해 준다. 이러한 장례 의식의 쇠락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현대인들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결국 죽음을 중요하게 생각해 장례를 경건하고 신성한 절차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고 시신을 ‘처리’하는 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장례 문제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좀 더 확대하면, 본질을 잊은 채 편리성만을 추구하는 현대 물질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전통적 장례 의식이 사라지고 변해가는 모습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무관심한 현대인들의 행태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고층 아파트에서 관을 크레인으로 옮기고 아픈 환자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게 하는 것 등이 악상중의 악상에 해당한다며 이를 무성의한 것이라고 비판하는데는 조금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흐름이 있는 것인데, 오늘날 과거 조상들이 행하던 전통 의식을 모두 행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여건이 여의치 않다면 의식을 간소화하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의식을 간소화함에 따라 거기에 깃든 사상이나 생각까지 없어지는 것은 큰 문제이다. 그러나 전통적 의식을 간소화한다고해서 이를 모두 악상이고 무성의 한 것이라 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인 듯 해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나의 생각 또한 ‘산 자의 관점’에서만 죽음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일면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러한 전통적 의식에 너무 비중을 두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오히려 관의 이러한 형식적 요소들이 죽음을 무겁고 이질적이게 느끼게 할 것이다. 죽음을 웃으면서 맞이하자는 작가의 메시지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전통적 의식과 문화와 연관된 ‘한국인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새롭게 조명한 이 책은 오늘날 죽음의 의미를 되살린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삶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이 곧 삶으로 이어진다. 즉, 오늘날 우리사회의 죽음의 위기는 거꾸로 삶의 위기임을 말해준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책의 제목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자체로 큰 메시지가 된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알고 생에 대한 열정, 열의를 불태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죽음의 선물’이다. 이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대신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게 되니, 나 역시 죽음에게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닫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qu**tz2 | 2001-12-18 | 추천: 0 | 5점 만점에 3점
한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통곡한다. 마치 그것이 모든것의 끝이라도 되는 마냥. 상가집에 갔다온 사람들의 몸가짐은 조심스러워진다. 다른 이의 불행이 나에게 악을 가져다 주진 않을까 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느때부터인지 잘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배척했던 것 같다. 삶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의 말도 있긴 했지만, 이러한 표면화된 표현이 굳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은 산 자들에게 늘 배척되기 마련이었다. 무덤이나 화장터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 동네마다 일어나는 님비현상은 어쩌면 산 자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주는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늘 그렇듯 산자들은 죽은자들에 대해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거만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피함을 원했던...

이 책은 그러한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바라볼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산업사회의 도입과 함께 죽음에 있어서도 도래된 몰개성화, 무가치화, 대량화 등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차량이 지나갈 지라도 어느 누구 하나 그 차량을 보며 성호를 긋는다던지 조용히 묵념한다던지 하는 사람은 존재치 않는, 오히려 그 장례식 차량 조차도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차량과 속도경쟁을 벌이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차가운 외침이랄까.

이 책의 그러한 관점이 때론 신선하게 느껴진다. 삶과 죽음은 정확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삶의 태동에 죽음이 숨쉬고 있고, 죽음은 삶을 영양분으로 삼아 서서히 커가고 있는 것이라고... 영양분인 삶이 다 떨어졌을 때 마침내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가끔씩 사람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보다 그것을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으리라 본다.

이 책은 죽음의 역사에 대해 굉장히 정확하게 고찰하고 있었다. 각 시대의 죽음에 대한 관점, 무덤의 모양 등을 통해, 태초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죽음을 삶과 분리시켜 생각하고 두려워하진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태양이 뜨는 동쪽방향을 향해 일제히 뻗은 무덤과, 산이 있는 곳을 향해 자리잡고 있는 무덤들은, 죽음이 한 사람의 영원한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상징함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예였다. 아이가 죽었을 경우 번데기처럼 나뭇가지에 매달아 또 다른 삶이 잉태되길 기원했던 모습, 죽은 이의 옷가지를 흔들며 그의 영혼이 혹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갈망해보았던 것. 이와 같은 것들은 오늘날은 도무지 꿈꾸지 힘든 것인듯 하다. 단 4일만에 죽음의 모든 과정이 끝나야 하는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에....

중간에 인용된 제망매가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가장 여실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누이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부모와 자식이 나뭇가지와 낙엽에 불과하다는 식의 표현을 담고 있다. 자식의 모든 삶은 부모로부터 비롯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모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땅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존재임을... 어떻게 보면 너무도 쓸쓸하고 오늘날 죽음이 가지는 단절의 의미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낙엽의 떨어짐이 부식 아닌 보다 더 큰 세계, 미타찰을 향한 나아감임을.... 또 다른 영생을 위한 한걸음 다가섬임을,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잊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신선한 내용의 이 책에도 무언가 문제점이 있긴 있는 듯 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무슨 죽음을 기억할 것인가. 처음 이 책을 손에 잡았을 때 나는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을 기대했었다. 그 내용이 조금은 어려울지라도,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이 이 책을 통해 벌어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난 지금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역사적 고찰, 현재의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 제기 정도에 그친 듯 하다. 새로운 의미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는 있으나, 애초에 기대했던 거대한 의미는 함의하지 못하고 있는듯 해 조금은 아쉽다.

둘째, 계속적인 내용의 반복성이다. 역사적 고찰은 정말로 신선하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그 어떤 책에서조차도 죽음, 그것도 우리 나라 죽음의 역사를 이렇게 내실있게 다루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많이 읽은 내용이 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뒤에서 2-3번씩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문장 자체가 아주 비슷하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으나, 조금은 다른 말로, 요약 정리하는 방식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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