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경에 따르면 문재인의 주변은 전대협 – 주사파로 채워졌는데, 주사파란 주체사상 즉 현대 학자들이 사이비 종교의 일종이라 분류한 북한의 사상을 신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체사상은 근세 최악의 병신인 마르크스의 계급이라는 헛소리를 바탕으로 서구와 동양의 종교성들의 피상적인 특징들을 끌어 모아 주체라는 희대의 사이비 종교 장치를 만들어냈다. 왜 그러한가? 마르크스 주의는 고정된 변인으로 다차원의 변화하는 현상을 고정시키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진시황에 대해 그가 천하의 한냉극음의 성질을 가진 천년묵은 지네의 환생이 될 것이며 자신의 가르침을 크게 훼손할 거라 했고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일으켰다. 생긴 걸로 봐서 마르크스는 이무기 내지 두꺼비가 아닐까 싶다.
이상한 나라의 조국
조국의 집안은 불교집안이라 전한다. 조국이 불교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마음공부도 중요하지만 (분배의 정의 등)잘못된 것에 대해 (계급투쟁식으로) 분노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런 조국의 발언은 당시 대한민국에 유행한 특이한 정신적 경향에 대한 증후로 읽힌다.
그것은 한글 세대의 불교계에서 만들어졌지만 그 대중적 사용에 있어서는 불교와는 상관 없는 방식으로 쓰이는 마음공부, 낮은 수준의 명상이나 마약이 만들어 내는 낮은 차원의 힌두교스럽고, 비틀즈스런 평화라는 의식 상태, 경험을 다루는 마음의 과학이 아닌데 (주로 일본과 한국에서)불교에 발을 들여 놓는 현상학적 흐름, 국제좌파연맹스런 자들이 일상에서 하는 어떤 명상 등의 심신의 몰두와 그 경향에 부합하는 흐름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최근의 대한민국의 건강한 불교계 내부에서는 이런 이상한 흐름에 대해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모양새다.
불교평론이 말하는 평화라는 것
하지만 최근 불교평론은 붇다가 전혀 말 한적 없고 가르친 적 없으며 그들의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평화라는 용어와 그 가르침을 해석하겠다며 대대적으로 글들을 배설했다. 이들은 개화기 시절 일본이 만들어 동양삼국이 쓰고 있는, 영어 peace에 대응하는 2음절 한자조어 평화에 대한 언어학적, 문화학적 정의를 내리지도 못한 채로 좌파 정권에 어울리는 허황된 언어들을 전시한다. 강조한다.
오늘날 전세계인의 평화, 평등, 행복이라는 까리한 개념은 각각 불교 수행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인식의 적멸, 관점의 평등, 감정의 지복을 가르킨다. 모두 일상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에 전설이 되었고 하위호환이 진짠 줄 안다. 이미테이션일 뿐이다.
멈추면 보인다는 틱장애 환자로서의 한국 명상의 풍경
멈추면 보인다는 명상의 수준은 상당히 대중적이다. 그것은 초급의 명상 수련자들에게는 적합할 수 있지만, 이는 정(精)에 들기 위해 하는 것이며, 지향성이 없는 경우 심각한 번뇌를 생산한다. 최상승의 경지에서는 진리와 하나이기에 멈추고 자시고 할 게 없다. 그 스스로는 모른다 해도 일승의 최상승 법을 들은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의 공덕에 미치지 못하다. 그렇지 않을 때 불교는 쉽게 불교가 아닌 것으로 오도 될 수 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법문 혹은 수행자의 무아(無我)의 겸손이란 대중의 오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막무가내로 멈추라면 경제적 활력의 결과로서의 성장을 멈추라고 하는 좌파적 주문과 겹쳐질 우려가 뒤따른다.
붇다 당대의 불교라는 세계관과 체계는 붇다가 조직한 승단, 태양과 달 처럼 붇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상업 자본가인 유마거사, 저자 거리의 상인들, 귀부인, 창녀들까지도 평등하게 함께 만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대 불교에서도 강조하는 것은 삶의 활력과 분리 되지 않은 불성이며, 이는 의심스러운 멈춤이 만들어 내는 좌파의 섹스어필을 구분해 내는 지혜로 작동한다.
지혜란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이지적 활동
붇다는 불교의 미래에 대해 경계하며 수많은 경들에서 진리와 현상의 간격이 절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불법을 하위 설명수준으로 끌어 내리지 말것, 바로 최상승의 진리와 계합되는 일승이 아닌 건 추구하지 말라고 누누히 말했다. 금강경에서도 붇다는 제자의 섣부른 감성적, 정신적 추구에 대해 그런 건 자신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다시 강조한다.
감정(평화 등의 어떤 명상에 의해 종속해 일어나는 감정도 마찬가지)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닌 걸 알게 되는 일이란, 빨간약이 입안에서 터져 쓴 맛을 내거나, 약이 목에 걸리거나, 약발로 속이 쓰린 것과 같이 불쾌한 것으로 여겨 질 수 있다. 삼계를 유전하며 고통받는 중생을 그 특성상 감정을 지닌 존재란 의미로 유정(有情)이라고도 한다.
현대적 의미의 근기란 양심지능일 수 있다. 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불교에 있어서는 특히, 불교라는 껍데기가 불교적 근기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숙세에 쌓은 인연이 안되면 살아 생전 올바른 선지식 한번 못 만나거나 그런 스승이 있어도 스스로 내면의 법을 만나지 못하고 죽는게 대다수의 불교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