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영성, 그 사회적 치유
김경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1. 들어가는 말
한국 종교학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학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오늘 모임의 주제가 “종교와
영성, 그 사회적 치유 라고” 했다. 제안을 받아든 필자는 맘이 참 착찹했다. 착찹한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유는 셋으로 압축되었다.
첫째 건강한, 상태의 살아있는 종교라면 마땅히 그 모습이 ‘영성적 이라야’ 할 터인데 오늘의 한국 종교가 영 성적임을 잃어버렸다는 자괴감이다 함석헌이.
비유로서 정곡을 찔러 말했듯이 “종교는 구슬이 아니요 씨다.”1) 그런데 한국의, 종교인들은 자기가 귀의한
종단은 만고불변한 진리의 금은보화 상자를 간직 보관한 ‘진리의 궁 궐 이요’ 인류를 먹여 살리는 ‘영적 양식 창고 라고’ 자임한다 자라나는. 나무로서 끊임없이 새싹과 새 꽃을 피어 낸 후엔
아름다운 꽃마저 떨구어 버리고 뭇 생명이 먹도록 열매를 맺는 나무이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치유는, 건강한 의사가 병들고 신체부위가 고장난 환자를 고치는 일인데 이, 시대
한국 종교가 과연 감 히 ‘사회적 치유 기능 감당 이라는’ 생각을
할 자격이 있는가의 부끄럼이다 일반사회. 중평이 오히려 병든 한국 종교를 염려하고 한국종교계가 치유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루가복음서11:35)고 하셨는데
종교계,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분렬시 키고 미움과 증오심을 가중시킨다 심지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선가(禪家)의 가 르침이 무색할 정도로 손가락에, 금반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내 손가락만 보라!”고 우중을 기만한다. 알 고 보면 사찰 성당 교회당 경전 수도원
교의 성직자 등등, , , , , , , 그 모두가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 한 것 아닌가?
셋째, 문명사적으로 볼 때, 21세기 시대사조는 엄정하게 말하면 종교시대가
아니고 과학시대요, 인간의 모 든 경험과 가치판단을 경험과학적이고 물질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설명하려
든다 인간의. ‘마음’, 정신, 신비체 험, 영성등도 두뇌기능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 인류역사에서 종교의 빛과 그림자를 철저 하게 폭로하고, 역사학과
진화생물학을 융합시켜 베스트셀러 책 『사피엔스 와』 『호모데우스 를』 저술한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
Harari)도 “의식은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이며 신비로운 것이다”2)고 고백하 고 있다.
인간의 마음 의식이, 수수께끼이며 신비한 것이라면 그것의 드러나는 현상인 ‘영성 도’ 신비한 인간생명 현상 이다 세속화. 물결에 휩쓸려가면서 생물학적이고
기계론적 실재관에 점점 쇠뇌당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영 성이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의 학회모임 주제가 난감
1) 『함석헌 전집』(한길사, 1983), 제3권, 197쪽.
2) 유발 노아 하라리 지음, 전병금 옮김, 21『 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김영사, 2018), 477쪽
한 세 번째 이유다. 이상에서 언급한
우리들의 주제가 던지는 난감함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한국 종교계가
본래 갖추어야 할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분열되고, 적대적 갈등 속에 시달리는 한민족 과 한국사회의 ‘자해적 자살경련 을’ 치유하기 위하여, ‘종교화 된 과학의 탈선 과’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감시와 통제
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다.
2. 종교현상학 입장에서 ‘인간의 영성 을’ 이해하는
의미
‘종교와 영성 그, 사회적 치유 라는’
오늘 우리모임의 주제자체에서 보면 종교와 영성이라는 두 단어가 어떤 관계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영성(靈性) 어휘가 한자어로서 있어 왔고 한국인들 언어생활에서도 사용되어
왔 지만 그 어휘의 개념파악은 단순하지 않다.
영성(靈性)이라는 한자어에서 영(靈) 이라는 글자는 [1]층
구조로 구성되어있는데 “비가 내리니 무당이 춤을 추는 형국 으로” 표현되었다. 은유적으로 말해서, 신기 신령(
, 至氣, 계시, 은혜 가) 사람 마음에 접해오니, 대극 적인 두 가지 실재 곧 하늘과 땅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영원과, 시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정신 과 물질 등등 온갖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있던
것이 하나로 통전되고, 그 전일성 체험에서 무당(종교인, 사 람 은) 엑스타시 가운데서 신명나서 춤추는 형국이다.
영성(靈性)을 이해할 때, 인간 품성의 3가지
현상으로서 요약하는 지성(知性), 감성(感性), 덕성(德性)에 한 가지 특성을 더하여 주로 종교적 영역과 관련된 “인간 마음
정신 의( ) 특수기능”(a special funtion of
human mind)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영성은. 종교인들만 발달된 인간정신의 특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 생명의 본래적 존재양태’(authentic mode of
human life)로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영성을, 이해하되 방법 론적으로 말하자면 종교현상학적 방법(method of
religious phenomenology) 입장에서 이해하고 설명하 려한다 게라르두스. 반
댈 레에우(Gerardus van der Leeuw)는 그의 명저 『종교현상학 입문 에서』 다음같이
말했다.
종교는 두 가지 양성으로 나타난다. 즉, 종교는 삶을 확장시키고 고양시키고 심화 시켜서 그 극한에까지 혹은 그것을 초월하는 것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가 하면, 그것은 종교는( ) 또한 삶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어떤 다른 것이 삶 속으로 침 입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전자가,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후자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수평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수직적인 선이 있다. 곧 종교성이 있 고 계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동반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를
우리는 구원이란 이름으로 종합한다. 인간은 이 구원을 자신의 종교 (종교성
에서) 찾으나 그 구원은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3)
위 인용문에서 우리는 ‘영성 도’ 종교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즉 곧 본래적 인간본성의 구원상태요 건 강한 인간적 삶의 존재양식이라고 보고자
한다. 영성은 인간 마음속에 내재한 본연의 가능태가 현실태로 실 현되면서 고양되고 심화, 확장되고 자기초월을, 하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성은 인간이 ‘소유형태 로’ 간직하 고 활용하는 정신기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초월로 부터
그 밝음, 맑음, 하나임,
어짐(仁), 새로워짐, 미 래개방성을 선물로서 받아드려야 하는 것이다.
현상학적 방법이 존재론적 형이상학이나 논리실증주의 방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인간적 삶이란 그 무 엇을 체험하는 것과 체험된 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하여 낸다는 것이다. 종교현상학적
방법은 ‘지극히 근본적인 경험론’(Max Scheler)이다.4) 그러므로 필자는 본론으로 들어가서 “종교적
영성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종교학적 명제나 교의적 공식보다는 “참된
영성적 사람은 이렇게 삶을 살아가더라”라는 삶의 존 재양태를 주목할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참된 영성적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Life style)을
서술할 것 이다.
3. 영성은 본래적 인간의 존재양태요 존재방식: 참된 영성적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
첫째특징: 영성적
사람은 주체적 자아의식을 확실히 갖되 그것이 ‘연기적 실재’임을
안다.
영성을 인간 본성의 심성이
갖추고 있는 존재론적 특성이라고 보든지 혹은 초월적인 ‘거룩한 것’(Das
Heilige)이 인간의 심성 혼(魂) 속에
접촉함으로서 발생하는 계시 응답적 특성이라고 보든지 관점 견해에 두 가지 입장이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결실로서 영성이 밝아진 사람은 또렷한 주체의식을 갖되, 개인의
주체성이 소라껍질 속에 속살을 감춘 어폐류 같은 실재가 아니고 관계적 참여 속에서 생기(生起)한 실재라는 것을 동시에 자각한다.
불교적 표현으로 하면 깨달음의 근본적 본질인 ‘因緣生起論’이 말하려는 진실의 가르침을 깨닫고, 세상 살아 가면서 피할 수 없는 ‘’주체 객체- 이분법 ‘(主體 客體- 二分法)을 끊임없이 초극하려는 삶을 산다. 주객이분법의 초극은 말같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원론상 인정하면서도 구체적 생활 속에서는 참 어려운 것이다. 현대 적 용어로 말하면
실존적 자기의식을 가지면서도 그 실존은 이미 사회성을 전제하고 사회성 안에서만 형성되 는 실존임을 자각한다는 말이다. 영성적 사람은 고고한 유아독존적 자유인이 아니다. 동시에 영성적
사람은 전체에 몰입되거나 집단사회를 구성하는 몰인격적 원자단위가 아니라 주체적 자아의식을 또렷이 갖는다.
둘째특징: 영성적 사람은 각각 개성이
다른 구체적 마음들을 갖고 살지만, 마음은 본시 ‘하나임’을 깨닫 고 한마음을 성취하려는 삶을 지향한다.
한자경은 ‘한국인의 심성과 철학적
지향 이라는’ 주제의 첫 문장에서 다음같이 선언적으로 말한다: “일심(一心)은 한마음이다. 한은
하나(一)라는 뜻과 크다(大)는 뜻을 동시에 내포한 단어로서 일과 대를 합해 천(天)이 되므로 일심은 곧 천심(天心)이다....각각의 개별자 안에서 개별자를 생명체로 유지하는 그 힘이 곧 무한한 일 심인 것이다.... 이 일심을 통해 각각의 개체는 자기경계를 넘어 다른 개체와 하나로 숨쉬고 하나로 느낄 수 있다.”5)
시천주(侍天主) 해설에서 수운, 최제우는 ‘하늘님 모심 의’ 의미와 현상을 세가지로 압축했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 해설하면
“모심이란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는 ‘다른
개체와 하나로 숨쉬고 하나로 느낄 수 있고’, 뭇 사람들이 하늘님을 한시도 몸에서 옮겨놓을 수 없는
존재자체라는
4) dnldhk
rkxdms cor, 25-28Whr.
5) 한자경, 『한국철학의 맥』, 제 장3 . 한국인의심성과 철학적 지향 (이화여대 출판부, 2008), 58쪽.
것을[2] 즉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증언하기를 “하느님께서는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 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사도행전 17:24-28). 바울의 증언을 들어보면 서구 기독교가
발전시켜온 ‘초월적 유신론 는’ 처음 기독교인의 신앙을 대표하는
사도 바울과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알수 있다.
함석헌은 1970년 4월 그의, 개인 월간지 『씨의
소리 를』 간행하면서 ⌜우리가 내세우는 것⌟ 선언문 안에
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씨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하나하나 속에 있습니다.”6)
위에서 살펴본 한자경 최수운
사도바울 함석헌이, , , 말하듯이 참다운, 영성적 인간의
존재방식과 삶의 지향 성은 “생명이란 개체적이면서도 전체적 하나요 한,
마음 이라는 자각 이” 뚜렷한 사람을 말한다 그. 사람이
어 떤 종파 어떤, 학파 어떤, 정치정당 어떤, 이데올로기를 갖고 사는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은 본시
하나이며, 분리 독립되어있는 개별자가 아니라 하나다 라는‘ 의식, ‘한 마음 의식 이’ 있느냐의 여부로 그 종교 인, 그 정치인, 그 지식인 그, 노동자의
사람됨과 영성적임의 정도가 판가름 난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사회의 정파싸움, 종파간 배타적 우월결쟁의식, 경제적 빈부격차에서 계층간 불통, 남북정치 이념적 갈등을 보면 결 국 한국인은 본시 한국인의 삶의 철학의 본질인 ‘하나의 영성 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의 모든 심성속에 있는 ‘하나의
마음 이’ 쪼개지고 편린처럼 작아지고 갈등 속에 빠지는 이유중 가장 큰 이유를 다른 논리로서 말하면
인간이란 ‘해석학적 동물 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이해하고 사회현상을 바라 볼 때 이미 사람마다 플라톤이 비유로서 말하는 ‘동굴에 갇힌자의 편견 이나’ 바울이 경험한 ’눈의 비늘 을‘ 지 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영혼의 눈을 덮고있는 ‘無明의 백태(白苔)’(具常) 때문이다. 태어 난 이후 자라면서 각 사람이 처한 삶의 조건과 경험이 사물을 보고 사건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지평 을’ 형성한 다 자기의.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해석학적 지평 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확신하면 할수록 그는 독단, 독선, 광 신, 이념노예가 되면서 사회갈등의 원인이 된다. 영성적 인간이란 누구나 함몰되기 쉬운 상대적이고 제한적 인 자신의 ‘해석학적
지평 을’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극복초월하면서 진리의 보편성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셋째특징: 영성적
사람은 신비적 활홀감 속에서 망아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은 더 밝아지고, 덕성은 더 맑아지고, 특히 감성이 더 예민해져서 ‘작은자, 낮은자, 눌린자
의’ 희비애락을 예민하게 공감
(compassion)하고
고난의 동반자(suffering companion)[3])되기를
짐스러워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유마거사가 앓는 것은 중생들이
앓기 때문이라 했다.[4])
“중생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 (大悲)에서 온다 는” 아름답고도 위대한 깨우친 자의 말은 결코, 앞서 깨우친 자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중생들 을 향한 동정, 시혜, 가르침 등등의
우월감이나 자만의식은 털끝만치도 없는 것이다. 대비(大悲)는 글자 그대 로 ‘큰 슬픔 이지’
대자대비(大慈大悲)이 줄임말이 아니다. 자녀가 병들어 고통하고 아프면 부모는 그 자녀의 고통과 아픔보다 더 크게 아프고 고통을 느낀다. 왜 그런가? 부모자식관계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일부 타락하거나 변질된 기독교
영성운동사를 보면 기사이적 능력을 통해 방언과 신유능력을 가진 자를 영 성가라고 오해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런
초능력자도 있을 것이나 그런, 초능력자를 모두 영성가라고 보아서 는 위험하다 초능력의. 유무를 떠나서 타자 특히 한몸 생명공동체를 이루는 생명체들 중에서 ‘낮고
천대받고 억압받는 자들 의’ 고통과 인간비애가 ‘일심동체
심정으로서’ 곧 나의 아픔으로 느낄 뿐만 아니라 그런, 정신적
육체적 개인과 사회의 질병고통 원인제공과 책임의 일부를 자기도 피할 수 없는 자임을 진지하게 자각하는 데서 온다.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논설문에서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 이 곧 민중이다 그. 민중을
더럽다 하고 학대하는,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아프게 하는자다”[5])
한국의 민중 신학이 말하려는 요지도 그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전래되던 초기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 는 중산층
이상의 종교가 되었고 기득권자과, 더불어 자기를 강화하는 부자들이 모여 제일 큰 교회당을 짓는 종교가
되었고, 인간본성의 본래적 측은지심으로서 우리사회 어려운 겨레들을 위한 보편복지정책을 ‘좌파정 치 이데올로기 라고’ 몰아붙였다. 그러한 교회들의 교회강단과 목회자들이 영성을 말하고 영성적임을 강조하 는 것은 넌센스이다.
영성적 사람의 셋째특징으로서
예민한 감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참종교인은 교리나 법 문의 암송이나 지식에 있지
않다 신앙. 곧 믿음을 반지성과 병행하는 것인 줄 착각하는 반지성적 종교와 바리 새이즘에 병든 경직화된
도덕종교는 미래가 없으며, 종교로서 인간의 비판적 지성과 덕성을 마비시키는 ‘대 중의 아편 이’ 될 뿐이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의 내수도문(內修道文) 제 조목에1 다음
같은 말이 나온다. “하인을 내 자식과 같이 여 기며 육축, (六畜) 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꺾지말며 어린자식을 치지말고
울리지 마소서”[6])
말 못 하는 육축이라도 아끼며, 추운 겨울을 이기고 갓 돋아난 새로 벋어나온
나뭇가지와 새순을 농경사회라고 해 서 함부로 꺾거나 낫으로 베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알버트. 슈바이쳐이 ‘생명외경 사상보다’ 더 예민한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감성이다 이런. 것을 영성적 감성이라 부른다 다음시대에. 열리는 생태학적 문명의
단초는 이런 예민한 감수성에서 부터 시작될 것이다.
넷째특성: 영성적 인간은 인간 심성에
본유적으로 주어져있는 초월적인 영(靈) 그 자체가 사람의
영성 (靈性)으로서 맑고 밝게 발현되기 위해서 삶 속에서
명상과 수행(修行)을 일상화 하는 사람이다.
『중용 에』 이르기를 “천이 명한 것이 곧 성이다”(天命之謂性)고 헸다 주희는. 이 구절에 두 가지 의미를 보았 다 첫째는. 도의 본원은 하늘에서 나왔기 때문에 바뀔 수 없다는 것 둘째는. 도의
본원실체가 사람 자기 몸에 갖추어져 있어 떠날 수 없다는 뜻이다.[7]) 유교나
불교에서 위대한 현인들은 신성, 천리, 본연지성, 도심, 불 성 진여등,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간에 그것들이 본유적으로 주어져 있을지라도 실현시켜야하는 실재이며, 또 한 사욕과 탐욕으로
덮이고 변질되기 쉬운 것이므로 끊임없는 수양과 명상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영성 또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본연적 심성을 유학자들은 ‘허령통철’(虛靈洞徹/권근) 하고 ‘허 령불매(虛靈不昧/ 정도전)라고 보았고[8]), 불교 고승들은 ’성자신해‘(性者神解 / 원효))하고
공적영지(空寂靈智 / 지눌)
한 것으로 보았다.[9]),
그 모든 언표들은 사람의 마음의 본래적 실재성, 당위성,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지 현실성, 구체성, 사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마음의 본연지성은 본디 신령스러우며 맑고 밝으며 신령하게 자신과 만물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능태로서 갖추어 있지만 가능태는 아직 현실태는 아닐 뿐만 아 니라 끊임없이, 탐진치 삼독(三毒))과 기질지성(氣質之性)과 죄업으로 침윤당하고 변질되고 있다,
현대 한국 종교계의 위기 특히 세인의 질타를 받고 있는 한국 기독교 개신교
의( ) 위기는 수행과 명상이 신앙 인의 삶속에 체질화 되어있지 않고 성경문자주의, 교리주의, 성직자가 집례하는 예배를 ‘보는’ 예전객관주의 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수행과. 명상은 반드시 특정장소에서 일정기간 집중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한국. 불교계
의 큰 자산은 하안거 동안거 기간 중 용맹정진 엘리트 젊은 불자 3,000여명이 해마다 좌선명상 수행에
정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럴 형편 이나 여건이 않되는
직장인 가정부는 영성수련이 불가능할가? 잠들기 전 짧은 명상 좋은, 종교시나
음악을 들으면서 평소 일에 집중하기, 홀로 있는 시간 갖기 가벼운, 등산길과
동내 재래시장 돌아보기도 좋은 명상과 수행의 방편이 된다. 맘챙기기가 중요하지 여건이나 때와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섯째 특징: 영성적 사람의 특징으로서
꾸밈없는 소탈함, 단순성, 어수룩함, 모나지 않음, 별나지 않음 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영성적 사람의 풍기는 외모는 비범하지 않음에 있다.
스승엔 3종류가 있다는 말 우리는 듣는다 첫째부류. 선생은 자기가 아는 것과
연구한 것을 부지런히 제자들 에게 가르치는 선생이다 둘째부류. 선생은 이론이나 말로서 훈계보다 모범으로
보이고 삶으로써 교화를 끼치 는 스승이다 셋째는. 존재함 그 자체가 풍기는 감화가 있고 함께있는 자들이
예기치 않는 영감을 받는 스승이 다 첫째 둘째 셋째를. , , 교사등급 기준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지만
인생여정에서, 평균 20년 동안 집중으로 배 우는 과정을
뒤돌아보면 세, 번째 선생님들 안에서 영성적 품성이 영글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엔 정말로
완성된 것은 어딘가 모자라는 것 같고(大成若缺), 참으로
가득찬 것은 비어있 는 것처럼 보이고(大盈若沖), 참으로
교묘한 것은 서툰 것 같고(大巧若)拙), 참 잘하는 웅변은 더듬는 것처럼 들린다(大辯若訥)고 글을 남겨 우리를 충고했을 것이다. 발제자는 , 국내외 기라성 같은 석학들을 논외로 하 고, 직접 인격적 감화를
많이 받은 3분 선생이 계신데 장공 김재준, 신천옹 함석헌, 소금 유동식 선생님이시 다. 그런데, 그 세분이 한결 같이 남기신 글을 보면 놀라운 내용들인데 말씀하시는 것이나 생활하시는 걸 가 까이에서 보면
하나같이 눌변이요, 평범이요, 어리숙함이 공동특징이다. 세상의 전문직종 중에서 비교적 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들라면 정치인, 교직 종사자(교사, 교
수), 언론인 그리고, 종교인 성직자 일( ) 것이다 그들이. 참으로 영성적 수행과 품성도야에 실패한다면, 가장 세 상을 어지럽게 하고, 분란을 일으키며 참 도(道)를 왜곡시키며, 그것으로
밥을 먹고사는 불쌍한 지식도매자 들이 될 것이다 국회의사당에. 정치는 없고 정쟁만 소란하며, 상아탑 대학엔 철밥통 지식판매자는 많아도 문 명 살리는 지혜자는 없고 신문,
방송 유튜브엔 편파적 선동뉴스기사는 차고 넘치는데 정론이 드물고, 종단의 설교단과 법문강론
단상엔 만고찬란한 교리강론은 번지르르 한데 민생의 맘은 강팍해지고 황폐해지고 머리 둘 곳이 없다.
“道常無爲而無不爲”[10])는
만고의 진리다. ‘영성 이’ 도(道)는 아니지만, 위리엄
스미스가 신비체험의 현상학적 특징으로서 열거하는 4가지 특성 곧 언표불능성(ineffability), 인식론적 특성(noetic quality), 일시성 (transiency), 수동성(passivity)중에서 영성특징으로서
언표불능성과 수동성은 겹치는 면이 있다고 보인 다.15)
여섯째특징: 영성적 인간은, 특히 21세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우주창공에 떠있는 지구 녹색행성에서 호모사피엔스가 갖는 생태학적 자리매김에 대한 각별한 자각과 함께, 진화과정 속에서 점증해가는 진 선미의 창발현상에 경외감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녹색행성 지구 살리기와 생태문명에로
전환에 힘쓴 다.
찰스 다윈의 진화이론이 발표된
지 150년이 지났다. ‘진화이론 은’ 생명의 출현 생명종의, 다양화, 돌연변이, 자연선택등에 관한 본래적 의미에서 과학적 ‘가설 이므로’ “진화이론은 진화한다.” 무릇 모든 과학이론은 좀 더 정밀하고 정확한
이론에 의해 보완되어 가거나 대체되어 간다 진화론을. 받아드리면 필연적으로 무신론자 가 되거나 물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도킨스( ) 과학이론을 종교적 도그마로 변질시키는 일종의 형 이상학이다. “다윈 과학과 유물론이데올로기는 구분되어야 한다.”16)
‘종교와 영성 이라는’ 주제를 놓고 생각해야 할 점은 21세기 인류는 전통적으로 생각해왔듯이 인간 본연지성 (本然之性)으로서 혹은 ‘신의 형상’(image
of God)로서 인간성 속에 본유적으로 갖춘 영성함양에 관심 가질 뿐 아니라 ‘생태론적
영성’(ecological spirituality) 함양에 맘을 써야한다. '생태론적 영성의식 이란‘ 유기체 적 ’지구생명‘(Global Life) 또는 ’온생명 장회익‘( ) 이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가 갖는 바른 정위치를 자각하는 영성이다.17)
떼이야르 샤르뎅에 의하면 지구는 45억년동안 크게 지질권형성(Geosphere), 생물권형성(Biosphere), 정 신권형성(Noosphere)을 단계적으로
이뤄가면서 성장해가는(진화해가는) ‘전일적 생명 이라고’ 본다. 장회익 은 생물권과 정신권 개념을 통전하여 유기체적 온생명
혹은 지구생명(global life)라고 부르고, 지구생명을
하나의 유기체적 몸에 비유할 때, 인류는 ‘중추신경계 에’ 해당하는 위상이 자기의 ‘생태론적 정위치 라고’ 보 았다 사람. 몸에서 ‘중추신경계
는’ 몸의 일부이며 신체를, 구성하는 구성소이지만 유일하게, 자기 몸의 현상전 체를 ‘몸으로서 자각하는’ 자기 의식적 신체기관이다 중추신경계는. 몸을 환경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예방하 고 신체메카니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건강하게 지탱되도록
봉사해야 한다.
21세기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생태학적 영성 이란’ 바로 그러한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바른 위상과 그 에 걸맞은 책임을 감당하려는 자기의식을 가진 영성이다. 동시에 생명현상 특히 인간생명현상은 유물론적 다윈주의자가 생각하듯이 긴긴 시간의 과정 속에서 우연히, 물질분자들의 합성에 의해 아무 목적도 없이 발 생하고 진화한다는 순수 유물론적 진화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생태학적. 영성이란 오늘날 주류적 진화과학자 들이 주장하듯이 지구생명이 진화가 ‘이기적
유전자 들의’ 단순한 생존과 번식욕구로서 설명되어지는 것이라 고 보는 단순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21세기
생태학적 영성은 생명계에 나타난 비극, 아픔, 어두운 그림자들을
이겨내면서 녹색지구 온생명은
“아름다움의
심화확장을 향한 끊임없는 추동”(universe's incessant impetus toward the
intensification and expansion of beauty)"18) 이라고 보는 영성을 말한다
그래서. 길가에 핀 사소한 들꽃을 경외감을 가지 고 사랑하며 삶을 비관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힘쓴다. 진보신학자 김재준은
16) 존 F.호트지음, 박만 옮김, 『다윈 이후이ㅡ 하느님: 진화의 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35Whr.
17) Teilhard de Chardin, TheFutureofMan,(Harper and Row,1964), p. 163. ; 장회익, 『삶과 온생명』(솔, 1998), 182-187쪽.
18) 존 F. 호트, 위와 같은 책, 225쪽.
“그러므로 십자가는 가장 철저한 인간혁명, 사회혁명, 종교혁명의 표징이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기존질서 에 안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11])고
갈파했다.
일곱째특징: 영성적 인간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경구를 수도승처럼 고뇌하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기보다
삶의 전과정을 통해 날숨과 들숨처럼, ‘메멘토 모리’ 함으로써
삶과 죽 음을 경계짓고 있는 두꺼운 알껍질이나 고추집을 얇고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의 삶을 산다.
본래 시와 민속학을 전공한 김열규는 그의 역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를 통해 한국의 어느 종교 학자나 사상가들보다도
한국인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통찰을 하도록 기여했다 김열규는. 현대 한국인들에 게 있어서 “죽음은 정말 몰가치하고 개성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흔해빠진. 것이
되고 그래서 거의 모든 죽음 은 별것 아닌게 되고 말았다”[12][13])
고 탄식하고 고발한다.
문제는 죽음이 소외되면 삶이
소외되고 죽음문제가, 그 분야 전문가들의(의사, 장의사, 성직자, 묘원공원
운 영자 의) 일거리로 분업화되면 죽음은 상업화 종교, 의례화
비인간화되고, 만다 영성적. 인간은 삶이란 경이로 운 것이고
죽음은 신비로운 것으로 본다. 죽음을 경박하게 망각하려 들지도 않고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라 고 여기지도
않는다. 영성적 인간은 죽음을 진지하게 여기면서 삶이 경이로운 것임을 더욱 각성하고 사랑한 다.
영성적 인간은 마치 바다 거북알이나
타조알처럼 껍질이 단단하게 되어서 알 속의 ‘생명을 보호하던 그 껍 질 을’ 일생동안 ‘메멘토 모리 라는’ ‘생각의
품 안에’ 품고 살면서 서서히 죽음과 삶을 경계 짓는 두꺼운 껍질을
‘부드러운 각막 처럼’ 만든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올 때 각막처럼, 부드러워진 껍질을 깨고 갖나온 독수리새끼 가 더 넓은 바다와 창공에로 몸을 던지듯
영원에로 몸을 맡긴다 이생을. 보호하던 삶의 두꺼운 껍질은 귀중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식 경험 재산
명예 종교가. , , , , 두꺼운 알껍질을 구성하는 주성분이지만, 그것들에
너무 집착하면 새 생명의 탄생이 어렵고 몹시 힘들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영성적 사람이다.
영성적 인간의 죽음이해는 구체적으로 그의 신념과 신앙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지만 공통점은 죽음 은 ‘하나의 전환의 계기 이며 시공조건과’ , 인과율과
육체에 제약받던 속생명이 더 높고 숭고한 질서 안에서 자 유롭게 ‘승화 된다는’ 신념을 지닌다 그러므로. 영성적 인간은 이생의 삶 끝날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기보 다 “삶과 죽음을 합친 새로운 전체로서의 삶을 산다”.21)
4. 나가는 말
우리의 주제에서 결론은 따로
없다. 현대인의 삶이 점점 더 ‘빅부라더 알고리즘 의’ 보이지 않는 독재시대를 살게 될 위험이 커가고, 지구 생태계의 위기와
기후붕괴는 다음세대 우리들 후손의 삶을 총체적으로 위협하 는 지구촌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계층간, 세대간, 직종간 견디기 어려운 갈등을 겪으면서 삶의 행복지수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어디에서. 부터 치유의 손길 이 시작될 수 있을까?
사회구성원 모두가 ‘정치적 동물
이나’ ‘경제적 동물 됨에’ 힘쓰기보다 ‘영성적 사람 됨에’ 맘을 돌려야 한다고 종교계가 사회를 향하여 ‘충고, 조언, 평가, 판단 정혜신 을’( ) 하려들지 말고, 종교인들 스스로가 보다 성숙한 영성적 존재가 되는 길 곧, 삶과 수행이 일치되는 길을 걸어야할 것이다.
[참고도서]
1.
게라르두스 반 델 레에우 지음, 손봉호, 길희성 옮김, 『종교현상학 입문』(분도,1995)
2.
월터 T. 스테이스 지음, 강건기, 정륜 옮김, 『신비사상』(동쪽나라,1995)
3.
윌리엄 제임스 지음, 김성민 정지련, 옮김,『종교체험의 여러모습들』(기독교서회,1997)
4.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분도출판사, 2003)
5.
한자경, 『한국철학의 맥』(이대출판부, 2008)
6.
이기영, 『원효사상』(홍법원, 1967)
7.
이영무 역해, 『유마경 강설』(한국불교출판부, 1993)
8.
정병조, 『육조단경』(한국불교연구원, 1989)
9.
김열규, 『메멘토모리』(궁리,2001)
10.
성해영,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신비주의』(서울대출판문화원, 2017)
11.
장회익, 『삶과 온생명』(솔,1998)
12.
함석헌, 『함석헌 전집』, 제3권(한길사, 1883)
13.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연세대출판부, 1997)
14.
박희준평석,『백서(帛書) 도덕경』(까치,1991)
15.
김경재, 『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삼인,2016)
16.
존 F. 호트지음 박만, 옮김, 『다윈이후의
하느님』(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17.
유발 N. 하라리지음, 21『 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김영사,2018)
18.
Richard E. Palmer, Hermeneutic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9)
19. P.Tillich, SystematicTheology, 3vols in on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1] ) 게라르두스 반 델 라우 지음, 손봉호 & 갈히성 옮김, 『종교현상학 입문』(분도출판사, 1995), 29쪽.
[2] ) 잡지 『씨의 소리』, 매월호
뒷표지면에 실리는 ⌜우리가 내세우는 것⌟ 참조.
[3] ) John Cobb.Jr, A Christian Natural Theology( The Westminster
Press, 1974), p. 221.
[4] ) 李英茂 역해, 『유마경 강설』,(한국불교출판부, 1993), 231-234 쪽.
[5] ) 함석헌 전집, 제3권, 147쪽.
[6] ) 『해월신사법설해의』(천법출판사,
포덕141), , 505쪽.
[7] ) 한자경,
위와 같은 책, 281쪽. 각주14 참조.
[8] ) 위와 같은 책, 168-171쪽.
[9] ) 위와같은 책, 76-119쪽.
[10] ) 백서(帛書) 도덕경, 박희준 평석,(까치1991), 제37장, 146쪽.
[11] ) 김경재,
『장김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삼인, 2016), 93쪽.
[12] ) 김열규,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궁리, 2001), 159쪽.
[13] ) 위와 같은 책, 2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