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5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댓글 27

담마의 거울

2012. 1. 9.
근본주의, 테라와다불교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



댓글논쟁을 보았다.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이다. 그 중에 스님이 작성한 글을 읽어 보니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비록 댓글에 지나지 않지만 논문이나 기고문 등 공식적인 글에서 볼 수 없는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 댓글은 서광스님의 글이다. 불교닷컴에 등재 되어 있는 서광스님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댓글은 다음과 같다.





초기불교에 대한 냉소적 시각





우문우답....



한국제일의,
재벌회장인 이병철과 한국가톨릭 제일의 이론가인 차동엽신부의 질문과 답변은..글자그대로 우문에 우답이다.
평소에 논어를 즐겨 읽었다고 하여 그에 어울리는 질문을 하였으리라고 먼저 생각한 나의 선입견이 한참을 잘못되었다.
이리도...맹한지는 미처 몰랐다.

또한 그에 답하는 차신부의 답변은..역시나 맹탕이다.
당체...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리고..
이에 나름대로 답하신 허정스님은...이들에 맞추어 일부러 격을 낮추신것 같다.
그들에 맞추어..초기불교급의 차원에서..마치 초등생에게 답하듯 하신 것 같다.
그들에게는 초기불교급으로도 충분하다고 본것 같다.
그들에게..중관이나 유식..나아가.천태와 화엄으로 답한다는 것은 애초 어불성설이라고 보신 것 같다.
이런터에..언감생심..선불교이겠는가...

그러나..
행여..이것이 허정스님..종단의 불학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의 전부라면 곤란하다....

(서광스님)





이글은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의 새로 취임한 허정스님(필명 후박나무)이 불교닷컴에 기고한 글에 대한 것이다. 이병철회장의 영적질문 24가지에 대한 불교측의 답변형식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이 글에 대한 댓글에서 서광스님은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초기불교적 답변에 대한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니까야만 맹신하는 자들은 외눈쟁이라고





니까야와 아가마에 대한 이해....



아래에서 보면,
경전형성과정의 초보적 지식마저 결여된 글이 보인다.
그결과 니까야에 대한 맹목적인 맹신이 드러난다.

십사문제로 인한 근본분열이후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
이때에 상좌부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 2차결집이다.
그후 다시 2차분열이 연이어 일어나고...마침내는 상좌부12부파,대중부 8개부파가 나타났다.
도합 20개부파에서 다시 무수한 분파가 일어났다.
이중...상좌부에서는 설일체유부가 갈라지고.그 설일체유부에서 다른 부파가 생겨났다.

이러한 20여개부파는 각자 자기부파 나름대로의 경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중..상좌부가 만든 것이 니까야이고,설일체유부가 만든것이 아가마이다.
그런즉..상좌부계통이 아닌 대중부에도 그들 나름의 경전이 있엇다.

이렇게 각 부파의 수많은 경전이 있었음에도...
유독..상좌부의 니까야와 설일체유부의 아가마만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중의 분별설파가 니까야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북인도에서 번성한 설일체유부는 아가마를 사용하였는데..이것이 나가세나왕을 거치면서 지위를 굳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접하는 초기 잔존경전인....상좌부계통의 상좌부 분별설파의 니까야와 설일체유부의 아가마만이 300년 넘게 구전되어온 부처님 말씀의 전부라고는 볼수가 없다.
이들은 부처님 말씀의 일면을 전한 것일 뿐이다.
그것도 대중부에 의하여 배척된 상좌부계통의 것이다.

그러므로...
고단한 불교사의 전체를 보고...균형적인 눈을 가지도록 하자.
외눈에 짝눈을 가지고..부처님을 모두 본것처럼 하지 말자.



(서광스님)





이글은 니까야의 맹신에 대하여 비판한 글이다. 그런 니까야는 20여개 부파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경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이 부처님 말씀의 전부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까야만 맹신하는 자들은 외눈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친설과 불설



친설과 불설, 불설과 비불설에 대한 논쟁은 매우 뜨겁다. 이런 논쟁에 대한 글이나 기사, 논문은 수도 없이 발표 되었다. 또 부파불교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초기경전 즉 니까야가 부처님의 ‘친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초기경전이 친설이라면, 대승경전은 ‘불설’이 될 것이다. 대승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부처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 많은 경전이 찬술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친설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런 가르침의 전승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자들도 있을 수 있으나 여러자료에 따르면 제1차결집과 2차결집을 거쳐 3차결집으로 공인된 것이 니까야라 한다. 또 니까야의 경우 원형의 훼손없이 전승가능하다는 것이고 더구나 무상, 고, 무아,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면 친설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서광스님은 현재의 니까야가 잔존 부파의 경전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주류불교(Main Stream Buddhism)란



대승불교에서는 동남아 불교 즉,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한다. 이는 대승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고, 실제로 선사들의 법문에 소승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기도 한다.



또 하나의 사실을 든 다면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원시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원시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덜 성숙된 불교, 미완성의 불교라는 뉘앙스가 매우 강하다. 이는 모두 대승의 교리가 더 수승하다는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에만 바라보는 시각일 뿐 전세계적으로 테라와다불교는 주류불교(Main Stream Buddhism)라고 말하고, 원시불교는 초기불교(Early Buddhism)라고 칭한다.



그런데 초기불교에 대하여 주류불교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Mainstream Buddhism"

a term used by some scholars for the early Buddhist schools.

(Schools of Buddhism, 영문위키피디아)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불교학파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메인스트림부디즘에 대한 것이다. 일부 학자는 초기불교학파(the early Buddhist schools)에 대하여 주류불교(Mainstream Buddhism)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학파가 주류불교라면 그 맥을 잇고 있는 테라와다불교 역시 주류불교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동국대학술원장인 로버트 버스웰 교수가 불교tv강의에서 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주류불교라는 명칭을 붙여 준 것 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학파는 어떤 것일까.



북전에서 본 부파불교 계보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초기불교학파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초기학파(Early schools)

·         Sthaviravāda(상좌부)

o    Pudgalavāda ('Personalist') (c. 280 BCE)

o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Vibhajjavāda (prior to 240 BCE; during Aśoka)- 독자부(犢子部)

§  Theravāda (c. 240 BCE) 테라와다

§  Theravāda subschools (see below)

§  Mahīśāsaka (after 232 BCE)

§  Dharmaguptaka (after 232 BCE)

§  Kāśyapīya (after 232 BCE)

§  Vatsīputrīya (under Aśoka) later name: Samitīya

§  Dharmottarīya

§  Bhadrayānīya

§  Sannāgarika

§  Mūlasarvāstivāda (third and fourth centuries)

§  Sautrāntika (between 50 BCE and c. 100 CE)

·         Mahāsaghika ('Majority', c. 380 BCE–(대중부)

o    Ekavyahārikas (under Aśoka)

§  Lokottaravāda

o    Golulika (during Aśoka)

§  Bahuśrutīya (late third century BCE)

§  Prajñaptivāda (late third century BCE)

§  Cetiyavāda

o    Caitika (mid-first century BCE)

§  Apara Śaila

§  Uttara Śaila

 

(Schools of Buddhism북전에서 본 계보영문위키피디아)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표시된 초기학파(Early schools 근본부파)를 보면 상좌부와 대중부로 크게 두 파로 나누어져 있다이후 19개로  지말 부파가 성립되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현재의 테라와다불교라 불리우는 테라와다부파가 설일체유부에 속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더구나 대중부의 경우 BC380 년에 성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남전 디빠왕사에서는 

 

이에 대하여 인도불교사(권오민교수역경서원)를 보니 두 가지 전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하나는 분별설부전승(남전)이고또 하나는 설일체부전승(북전)이다위 영문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계보는 설일체부전승에 대한 것이다그렇다면 분별설부 전승(남전)에서 어떻게 표기 되어 있을까.

 

인도불교사책에 따르면 위 계보와는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다테라와다에서 설일체유부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테라와다-타지부-설일체유부로 되어 있다.

 

이렇게 부파불교를 보는 시각이 북전과 남전이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특히 테라와다불교를 설일체유부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묘사한 북전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이에 대하여 한국어판 위키피디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편근본 분열의 발생 계기와 관련하여서는 북방불교의 자료와 남방불교의 자료 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현대의 학자들은 남방불교의 자료가 사실인 것으로 보고 있다.

(부파 불교한국어판 위키피디아)

 

 

근본분열과 관련하여 북전과 남전의 차이가 있는데남전의 자료를 더 신뢰한다는 말이다이는 스리랑카의 디빠왕사(도사(島史 · Dipavamsa)에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파불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디빠왕사에 따르면 근본분열이 일어난 원인이 2차 결집때문이라 한다. 2차 결집의 결정에서 불복한 비구들이 독자적인 결집을 열어 계율을 수정한 것이다그래서 상좌부로부터 이탈하여 대중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2차 결집후에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나뉘게 되어 근본 분열이 일어났는데이는 순전히 계율에 관한 문제로 갈린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3차 결집이 일어난 후 부파 분열은 이와 양상이 다르다계율에 대한 해석 뿐만 아니라 교리상의 견해지도자간의 대립지리적 조건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쇼카대왕의 3차 결집이후에 더욱 더 분열이 심화 되었는데이는 3차 결집으로 인하여 쫒겨난 비구들이 새로운 부파를 만든 것도 한 요인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처님 당시부터 근본가르침을 고수해온 교단은 테라와다이었다고 한다그래서 3차 결집이 끝난 후 아쇼카대왕은 테라와다(상좌부)불교를 공인하고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하였다그 중의 하나가 스리랑카이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이 원본의 훼손없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승될 수 있었는데이는 스리랑카라는 지리적 이점과 법을 지키려는 비구들의 노력에 대한 결과라 한다.

 

하지만 인도대륙에서는 3차 결집이후 쫒겨난 비구들이 모여서 다시 만든 것이 자신들의 만의 교리를 갖는 부파를 만들었는데 주로 대중부라 한다.

 

한편 상좌부에서도 여러가지 요인에 의하여 부파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설일체유부라 한다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1차결집에서부터 3차 결집에 이르기 까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따르는 테라와다불교가 주류임을 알 수 있다.

 

원형을 그대로 보전하고자

 

부파분열후 인도대륙에서는 대승으로 변형되고  밀교로 바뀌어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그러나 고립된 섬나라인 스리랑카에서는 원형을 그대로 보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런 점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역자 대림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제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출가자들의 제일의 관심은 오직 법이었지 결코 중생이 아니었다그들에게 중생이니 인간이니 하는 것은 법이 아닌 개념(pannatti)일뿐이었다그들은 법을 배우고 연구하고(pariyatti, 교학그것을 내 삶에 적용시켜 도를 닦고(pariyatti, 도닦음그래서 무상무아의 법의 실상(보편적 성질)을 꿰뚫고 통찰하여(pativedha)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생을 다 바쳤다.

 

이처럼 법을 참구하며 평생을 바친 스님들이 부처님의 법을 참구하여 출가사문이 된 성스러운 과실(samannaphala, 沙門果)을 증득하고 불법이 오래 오래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전승해온 가르침이 상좌부불교이고 아비담마이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빠리얏띠)하고 그것을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빠때빳띠괴로움에서 벗어나(빠띠웨다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 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 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대림스님청정도론해제)

 

 

 

스리랑카비구

 

 

 

3차 결집후 일어난 부파불교와 대승운동이 대륙에서 일어나 불교가 변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에서는 3차 결집후 공인된 불교를 잘 보전함으로서 오늘날 니까야로 전승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대륙에서 불교는 어떻게 변질되었을까.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은

 

아쇼카대왕의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은 일종의 이단들이다일아스님의 책 아소까에 따르면 이단들에 대하여 흰옷을 입혀 쫒아냈다고 한다그런데 쫒겨간 비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 수 많은 종단이 존재한다그런데 대부분의 신생종단들이 주류측으로부터 외면당해 생겨난 것이라 한다또 재산상 문제 때문에 새로운 종단을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이는 기성 주류종단으로부터 밀려 난다고 하여 속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던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관련 종파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3차 결집후 이단으로 판정받아 흰옷을 입고 쫒겨나간 비구들이 할일이 무엇이었을까불교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그래서 자신들을 받아 주지 않는 주류불교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만든 것이 부파불교로 본다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대승불교가 일어난 요인에 대하여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이 주도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보이고 있다.

 

설일체유부를 제압하기 위하여

 

오늘날 대승불교에서는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른다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소승이라는 개념은 부파불교를 지칭한다근본 분열이후 20개에 달하는 지말부파를 말한다.

 

이런 부파 불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 대승불교라고 볼 수 있다이때가 대략 기원전후로 본다.

 

이렇게 대승불교에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대승이라고 칭하고부파불교를 소승이라고 칭하였는데 김종욱교수의 불교TV강의에 따르면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날 당시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부파가 상좌부계통의 설일체유부이었다고 한다이에 반하여 대승불교는 세가 매우 미미하였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이 어떤 조직이든지 소수가 다수의 가장 큰 세력을 잡기 위해서는 헛점을 노린다고 한다김종욱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대승에서 설일체유부를 따라 잡기 위하여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 공사상이라 한다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논리를 전개한 것이 공사상이라는 것이다.

 

공사상이 출현하게된 배경

 

그런 공사상은 어떤 것일까김종욱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소수가 다수를 제압하려면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상이다공사상을 가장 잘 표현 하고 있는 경전이 반야경인데 6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이 반야경을 축약하여 핵심만 모아 놓은 것이 ‘반야심경’이다이 반야심경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공()’이 될 것이다공은 빈것이다그래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공을 설명하려면 먼저 역사적내지 교리사적 접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불교교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아와 연기라고 볼 수 있다무아가 없는 불교는 있을 수 없고 연기없는 불교 또한 상상할 수 없다이처럼 무아와 연기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그런데 무아와 연기의 해석방법을 놓고서 대승이 출현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부파불교시대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부파는 설일체유부이었다이제 막 대승불교운동이 일어 날 시점에 대승불교의 세력은 보잘 것 없었다소수가 다수의 세력을 제압하려면 논리적 모순점을 찾아 내어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대승불교의 공사상도 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을 논박하기 위하여 개발된 논리라 볼 수 있다바로 그것은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 된다.

 

설일체유부의 주장

 

대승불교에 ‘아공법공’이라는 말이 있다()는 당연히 공한 것이고법 또한 공한 것이라고 해서 공사상의 핵심적인 논리를 말한다그런데 대승에서 소승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는 논리중의 하나가 ‘아공법유’라는 것이다.

아공법공이나 아공법유나 공통점은 아는 공하다는 것이다이는 무아를 기본적 베이스로 깔고 가는 것이다만일 무아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모두 아공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법에 있어서 유부는 실유를 주장하고대승에서는 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는 법을 이루고 있는 요소즉 자성(自性)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모든 현상은 생성되고 소멸된다상호의존하고 조건지워져 생성소멸하는데 있어서 어떤 ‘요소(element)’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 하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사상이다그 요소를 75법으로 본 것이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사기에 들어 있는 필름통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예를 들어 75개의 필름이 있어야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스크린에 비친 영화의 내용은 무상하고 영화 또한 이 극장 저 극장 옮겨 다니며 볼 수 있지만 영화를 나오게 하는 필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상이 무상하고 무아라고 하더라도 오온이 존재 하듯이 기본적으로 75법이 실유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따라서 75법이 존재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그래서 ‘일체유부’라 한다.

 

또한 실유한다는 것은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바로 75법만이 독립적으로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이 것이 부파불교시대에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주장이다.

 

공사상이 출현한 배경

 

후발주자인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유부의 주장을 깨뜨려야만 살아 남을 것이다그래서 유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잡은 것이 ‘자성’에 관한 것이다특히 문제를 삼은 것은 75법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체가 있다는 것은 연기법과 모순된다는 것이 대승의 견해이다연기라는 것이 수 많은 조건들과 상호의존성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인데 자기만 떨어져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이다그래서 자성과 연기가 양립 할 수 없다는 것이 중관학파의 주장이다.

 

 

자성=실체성=연기-à인정(설일체유부)

자성=실체성=연기-à부정(대승불교)

 

 

자성에 실체가 있다면 연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나온 사상이 ‘공사상’이다연기라고 하는 것이 관계성을 말하는데 고립된 실체성이 있다면 자성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게 된다그래서 무자성이라 주장한다즉 다음과 같은 논리이다.

 

연기=관계성=무자성=

 

무자성은 비운다는 의미이다그래서 공()이라 한다비운다는 것은 공의 의미인데그렇다면 무엇을 비운다는 것일까그것은 바로 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것이고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고립된 실체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따라서 공은 ‘연기적 관계성’에 대한 또 하나의 묘사라고 볼 수 있다그러므로 중관학파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도식이 성립된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결국 중관학파가 비판 하고자 하였던 것은 연기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이글은 불교 tv사이트에서 김종욱 교수의 공사상 강의에 대하여 녹취하여 정리 한 것이다블로그에 여려차례 올렸는데또 올렸으니 자기 표절한 셈이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

 

이처럼 연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부와 중관학파는 정 반대로 보고 있다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파

학설

  

설일체유부

아공법유

(我空法油)

비록연기하지만 요소들은 실재하고 자성은 있다

중관학파

아공법공

(我空法空)

바로 연기하므로 요소들은 실재하지 않고 자성은 없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 ‘아공법유’라는 말이다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보았을 때 설일체유부와의 논쟁이었으나 지금도 남방 상좌불교를 폄하 할 때 사용하는 논법이 아공법유이다그러나 이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설일체유부의 주장과 달리 법을 ‘찰나적’ 존재로 본다항상 실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로 보는 것이다그래서 법은 고유의 성질을 갖는 ‘자상’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는 ‘공상’이렇게 두가지 큰 특징으로 본다따라서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전통의 경우 아공법유가 아니라 ‘아공법공’이 된다.

  

재가자들이 삶의 바쁘기 때문에 어려운 공사상을 접하기 힘들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활용하면 어렴풋이나마 공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공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재가자들이 삶의 바쁘기 때문에 어려운 공사상을 접하기 힘들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활용하면 어렴풋이나마 공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공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성진아상락아정의 바탕은

 

이렇게 인도대륙에서 소수의 대승운동주의자들이 다수의 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을 공격하여 마침내 인도대륙에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이후 공사상의 논리는 더욱 더 개발되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진아론적’ 법문을 선사로부터 듣게 되었다.

 

이런 대승불교의 사상에 대하여 서광스님은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기본적인 소양부터 쌓아야...

 

아래,
불자님의 글을 보고...한마디합니다
.

오는 3월부터 새로 조계종의 종정이 되실 진제스님이 법문에서 항상하시는 말씀이...불성.진아.상락아정입니다
.
이 말은...진제스님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종정이신 법전스님과 몇일전에 입적하신 지관스님도 항상하시던 말씀입니다
.

이 분들은...앞의 두분은 모두 종정이시고..지관스님은 선..율 삼장에 두루 통하여 당대최고의 학승이자,율사로 모든 종도들의 존경을르 받던 분들입니다
.
그러한 분들이 그와같이 말씀하실 때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

..불성이니,진아니,상락아정이니 하는 말의 바탕에는 중관의 공관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반야사상의 최고봉인 금강경인 까닭입니다
.
그러므로..이말들의 참뜻은..외도나 소승의 논사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견해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아래의 불자님은
...
이것을 망각하고...무지한 일반론에서 설을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
이것은...불교이해의 기본적인 소양이 의심스러운 것으로서..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이 되지않습니다
.

그럼에도
..
굳이 이와같이 글을 올리는 것은..보기에 딱하여서입니다
.
바라건데..공부를 처음부터 다시하시라..

 

(서광스님)

 

 

 

불성이나 진여의 밑바탕에는 중관의 공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그런 공관은 어떤 것일까.

 

공관이란 무엇인가

 

다시 김종욱 교수의 강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시설(假施說)된 것쁘라즈냡띠(prajñapti)

 

중관학파의 주장대로 아()나 법이나 모두 공한 것이라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이 된다이 때 일체는 아나 법을 말하고개공은 유부의 75법 즉요소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그래서 중관학파는 75법을 요소(element)로 보지 않고 단지 기능(function)으로 본다이처럼 요소가 아닌 기능을 보는 것은 오온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제법을 요소가 아닌 기능으로 보는 것은 수학의 함수(function)로 설명할 수 있다제법이 x축과 y축의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된 점이 아니라 x축과 y축 사이의 관계에서만 한 점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본다따라서 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래프가 그려지는 방식에 따라 거기에 맞추어 설명 될 수 밖에 없다그래서 고정된 요소(element)가 아니라 기능(function)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이나 75법 역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중관학파의 입장이다이처럼 서양식의 기능에 걸맞는 개념이 중관학파의 ‘프라즈냡띠(prajñapti)’이다.

이 프라즈냡띠를 한자어로 표시하면 ‘가()’라 번역된다정확하게 표현하면 ‘가시설(假施說)’이다이때 가()는 가짜가 아니다잠정적이라는 것이다임시로 설치해 놓은 가건물 같은 것이다그 가건물은 가짜 건물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임시로 세워 놓은 건물을 말한다. 50층짜리 빌딩을 지을 때 일하는 사람들의 숙소식당 같은 것이다그렇다면 일체가 다 공하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자신도 공한 것

 

일체가 모두 공하다는 이야기는 아든 법이든 모두 공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함수적 기능으로서 쁘라즈냡띠 즉가시설로서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있는 것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문제는 일체가 모두 공한 것이라면 문자적으로 보아서도 그 모든 것안에는 공()도 포함되어야 한다‘공자신도 공한 것’이 되고 만다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我法空 空亦復空(아법공 공역부공)

모든 것이 공이고또 공이어서 모든 것이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공 역시 공한 것이다.

 

아도 공하고법도 공하고공도 공한 것이다이렇게 계속 공으로 나가면 ‘허전’하게 된다이렇게 모든 것을 비워 나간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의 작용은 이렇게 진행 되고 있지 않은가이렇게 마음의 작용에 촛점을 맞추면 ‘유식사상’으로 가게 된다.

 

공가중(空假中삼제(三諦)

 

공도 공한 것이라면 그 공이란 무엇인가그 때의 공은 쁘라즈냡띠(가시설)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공이 맞다실상은 연기 하므로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 있는 공이 맞지만 그 실상에 대하여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묘사 할 수 있다따라서 실상은 가시설(쁘라즈냡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상이 공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붙잡고’ 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그런 이들을 ‘무기공’ 내지 ‘공병’에 걸린 것으로 본다.

 

공이라고 하는 것이 철저하게 부정의 방식인데 가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다라는 긍정이다그렇다면 진짜 실상은 무엇일까중관학파에서는 진짜 실상은 ‘중도’ 밖에 없다고 말한다여기에서 중도란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공과 가의 ‘중간 정도의 입장’이다.

이렇게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공(진제)이라 하고가시설된 방편의 입장을 가(속제)라 하고이 두가지 진리를 포괄하여 유무 양변을 떠나 중(중도)이라 한다이것이 중론(中論)이라고 명명한 요인이다이 공가중(空假中)을 중관학파에서는 ‘세가지 진리’라 하여 3제라 하는데 다 ‘대등한’ 입장으로 본다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진리

  

진제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의 입장

(施說)

속제

가시설된 방편의 입장

중도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여 성립

 

 

(김종욱굣수제25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 - 공()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불교tv 2008-04-07)

 

 

 

불교TV의 김종욱 교수의 강의에서 중관의 공관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알게  해 준다그런 공관은 나가르주나(용수)에 의하여 정리 공가중 3제로 정리 되었는데이사상의 핵심은 중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이 중도사상은 유무양변을 떠난 것이라 한다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여 성립되는 것이 중도라 한다이런 중도사상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의 중도 사상과 다른 것이다공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불교에 부처님의 중도가 있다면 대승에서는 용수의 중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다른 것인데인도불교사(경서원)에서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한 것이 용수의 중도사상이라 한다마치 부처님이 브라만교의 아뜨만을 비판하여 불교가 성립되었듯이대승불교는 용수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여 성립된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할 리가 없을 것이다그래서 대승논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니까야를 내버려 두고 별도의 경전제작에 들어간다그것이 공사상과 보살사상 등의 대승이념이 담겨 있는 반야경법화경화엄경 등과 같은 대승경전일 것이다.

 

한놈만 조지면 된다?

 

 

단현은 근본주의자입니다....

 

단현은 불교근본주의자입니다.
초기불교를 맹신하는 근본주의자입니다
.
이 근본주의자는...불교관련의 카페나 블로그등을 돌아다니며 ..심지어 무비스님등의 존경하는 스님들께도 온갖 비방과 폭언을 퍼붓고 있습니다
.

본래..근본주의자는..기독교근본주의자이던,이슬람근본주의자이던...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배타적 근성에 의하여 대화의 상대가 되지않는 것입니다
.
이런 근본주의자와 댓글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
그러므로...장황하게 글을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

자신은
...
스스로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하나..그는 아래의 글에서 보듯이 틀림없는 근본주의자입니다
.
근본주의자 특유의..맹신적 기질,배타적 성향.공격적 기질등이 그것입니다
.
그 예가..대승을 부정하고,대승의 경전과 논장을 불살라야 한다고 하며,대승의 보살을 마구니 취급하는 것등이 모두 그것입니다
.

때로
..
이 사람은...가끔 겸손을 가장한 글들을 올리기는 하나..이 모든 것은 위장입니다
.
세불리할경우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
이 일천제는...스스로 알아서..무시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서광스님)

 

 

 

스님의 댓글을 읽어보면 일관성이 있다오로지 한 사람의 네티즌을 지목하여 근본주의자로 몰아 붙이고 있다마치 안티조선운동을 보는 것 같다조선중앙동아라는 여러 보수신문중에 대장격인 조선만을 타겟으로 비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수 많은 네티즌 중에 오로지 한명만 지목하여 집중으로 공략하는 것이다시쳇말로 한놈만 조지면 된다라는 것이다그런 한명에게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고 일천제라는 최악의 명칭을 붙여 주고 있다더구나 불교근본주의자들에 대하여 맹신적 기질,배타적 성향.공격적 기질등이 있다고 하여 상종도 못할 인간들로 취급하는 것이다.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불교근본주의자들은 그렇게 나쁜 인간들일까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왜 문제시 하는 것일까이에 대하여 홍사성님은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불교는 도리어 교리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온 종교다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그래야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홍사성 위원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불교평론 2003)

 

 

불교에는 근본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원래의 가르침을 크게 훼손하기 때문이다그런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요인이 여럿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요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대표적으로 용수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공사상을 성립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대승불교의 말로는

 

이렇게 공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대승불교는 어떻게 되었을까다음의 표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불교 전통 연표

연표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 v • d • e • h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 불교

대승 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

 

천태종 · 선종 · 토종 · 일련종

진언종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범례:

 

상좌부 불교 전통

 

대승 불교 전통

 

밀교·금강승 전통

출처(부파 불교한국어판 위키피디아)

 

이 표는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각 불교전통을 보여 준 것이다.

 

인도대륙을 보면 초기불교(Early Buddhism, 원시불교)와 부파불교를 거쳐 대승불교 시대가 시작 된다그리고 밀교화 되어 13세기가 되면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중의 하나로서 불교로서 정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성립된 대승불교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여 마침내 밀교로 바뀌었을 때 힌두교와 더 이상 구별이 되지 않았을 때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이다이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한국에서 변형에 변형을 거듭해온 대승불교가 종교평화선언이라는 명목으로 유일신교의 교리도 인정하자는 열린진리관을 주장하고 있다이는 다름 아닌 대승불교 전통의 산물로 보여진다.

 

만일 불교가 유일신교의 열린진리관을 받아 들였을 때인도대륙에서 밀교화된 불교가 힌두이즘속으로 사라졌듯이불교가 유일신교 속으로 융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하여

 

하지만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에 전래된 테라와다 불교는 그 원형을 훼손시키지 않고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 테라와다 불교는 아쇼카대왕시절 3차결집으로 공인된 불교이다이는 20개의 지말 부파로 갈리기 전의 일이다따라서 초기불교의 전통이 고스란히 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원음은 어떻게 하여 훼손됨 없이 전승될 수 있었을까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역자 대림스님은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랑카에서 상좌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 주석서들을 빠알리가 아닌 싱할리어로 전승해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고실제 그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다른 신흥사상과 섞지 않고 전승할 수 있다는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파로 자연적으로 스리랑카의 상좌부는 스리랑카에만 고립되게 되었을 것이다인도의 강한 문화적 정치적인 입김에서도 상좌부 전통을 잘 고수해오는 장점도 있지만 반면 자연 국제 불교의 흐름과는 고립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인도전역특히 남인도에 상좌부 가르침은 상당히 퍼져있었을 것이지만 스리랑카 상좌부의 입장에서는 그것마저도 신흥사상과 섞인 것으로 의심하였을 것이며 실제로 인도의 상좌부가 마힌다가 전한 것과 같은 고주석서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스리랑카 대사(大寺)의 스님들은 더욱더 그들의 싱할리 주석서를 고수하였을 것이고 다른 부파에 노출시키기를 꺼려왔을 것이다.

 

(대림스님청정도론 해제)

 

 

대림스님은 원음이 훼손되지 않은 이유로서 지역적 원인과 이를 지켜 내기 위한 비구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징은 대륙에서의 공사상유식사상 같은 변화무쌍한 사상적 흐름에 물들지 않았고더구나 싱할리어로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하지만 더 큰 요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 내기 위한 비구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고 하는데이런 노력은 초기경전에서도 보인다빠알리 삼장의 율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들이여어느 때 나는 적어도 500명의 많은 무리의 비구들과 함께 빠와에서 꾸시나라로 가는 큰길을 따라 가고 있었소그때 나는 길을 비켜서 어떤 나무 아래 앉았소그때 꾸시나라에서 오는 어떤 나체 고행자가 만다라와꽃을 들고 빠와로 가고 있었소나는 보고 이렇게 물었소.

 

‘그대는 우리 스승님을 아십니까?

 

‘네 압니다고따마 시문은 일주일 전에 열반하셨습니다그래서 이 만다라와꽃을 그것에서 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존자들이여이 소리를 듣고 욕망을 초월하지 못한 어떤 비구들은 땅에 쓰러져 팔을 내저으며 이리 저리 뒹굴고 통곡하면서 ‘너무 빨리 세존께서 열반하셨다너무 빨리 선서께서는 열반하셨다너무 빨리 세상의 지혜의 눈이 사라졌구나!’라고 비통해 하였소그러나 욕망을 초월한 비구들은 시중하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슬픔을 안으로 새기면서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그런데 어떻게 무상한 것을 영원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말하였소.

 

나는 비구들에게 말하였소‘존자들이여이제 그만들 슬퍼하시오 그만들 한탄하시오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은 거기에는 변화가 있고 이별이 있다고모든 태어난 것들은모든 존재하는 것들은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입니다그런데 무너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나이 많아서 출가한 수밧다라는 비구가 앉아 있다가 하는 말이 ‘그만하면 됐습니다그만들 슬퍼하시오우리는 이 위대한 사문으로부터 벗어났소스승께서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고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하시며 우리를 억압했습니다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소.

 

존자들이여,

담마가 힘을 잃고 담마가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계율이 힘을 잃고 계율이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담마가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담마가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계율을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계율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

계율을 함께 외웁시다.

 

(율장 쭐라왁가 11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이 열반하였을 때 나이 많고 늦게 들어온 비구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자이 을 들은 깟사빠 존자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그래서 급히 500명의 아라한을 소집하였는데이것이 1차 결집의 원인이라고 한다이유는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내자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는 주류불교

 

이상 불교닷컴에서의 서광스님의 댓글에 대한 반론형식으로 글을 꾸며 보았다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테라와다불교가 초기불교를 계승한 주류불교라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20개에 달하는 부파불교가 성립되기 이전의 불교로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겨 있는 불교를 말한다이런 초기불교는 2차 결집후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 분열이 되긴 하였지만 계율에 관한 문제로서 교리의 훼손은 없었다하지만 3차 결집으로 인하여 쫒겨난 비구들이 별도의 교파를 형성하면서 본격적인 분열이 시작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이를 부파불교시대라고 한다대승불교에서 소승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부파불교를 말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했던 설일체유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선사들은 아직도 남방의 테라와다불교를 소승이라 지칭하는데이는 불교의 역사를 몰라서 하는 말일 것이다불교역사를 보면 남방테랑와다불교는 소승이 아니라 주류불교라는 것이다이는 3차 결집으로 공인된 불교가 바로 테라와다불교이고이 공인불교를 아소까대왕이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전법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한나라가 스리랑카인데스리랑카에서 공인불교가 원본의 훼손없이 이제까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적 특성과 담마 아닌 것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피눈물나는 비구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12-01-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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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불사 단현2012.01.09 23:13 신고

    연꽃님 고맙습니다.
    글이 길어서 답글로 올리기 곤란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골라 올릴까 합니다_()_

    답글
  • 한생각2012.01.10 12:26 신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계종 신도들이 이 글을 읽을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답글
  • 파사현정2012.01.10 14:45

    부처님이 어떠한 분인지,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부처님의 능력은 어떠한 위신력을 갖고 계시는지, 붓다의 삼신은 무엇인지, 연화장세계는 어떠한 세계인지 등 불교를 알지 못하면서 지극히 좁은 소견에 사로잡혀 불교를 포교한다는 것이 결국은 비방하고 있으니, 이를 어쩌나? 정말로 언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업을 짓고 있구나!!!
    법을 설하거나 포교를 할려면 위의 내용은 알고(최소한 아라한 이상이 되어야 법을 모독하지 않음, 사실상 아라한도 부족함) 해야한다는 것을 고언하는 바입니다.

    답글
    • 마성2012.01.12 02:01 신고

      '파사현정'은 아라한과 부처가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아라한이 곧 부처님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붓다의 열 가지 호칭(如來十號)은 응공(아라한)= 정변지= 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분 석가모니불을 일컫는 말입니다. 동일한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후대 아라한의 경지는 낮고, 부처(佛陀, 깨달은 사람, 즉 覺者)의 경지는 높다고 생각하는 것자체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다른 불교의 교리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 파사현정2012.01.12 15:06

      마성님, 초기불교의 큰스님이신 마성스님이신지, 혹은 아닌지를 몰라 "님"으로 하였습니다.
      만약 마성스님이시면 마성스님으로 정정하겠습니다.

      저의 글이 여래십호도 모르고 글을 올렸다고 봅니까? 위의 글이 그정도의 수준의 글이라 여기시는지요?
      아라한과 붓다는 천지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본성을 철견하고 두타행을 하여 이 몸에 대한 착이 떨어져 나가면 아라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3대아승지겁을 수행(대중생고공양과 복덕, 지혜 증진)을 하여 삼신이 갖추어져야 붓다인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도 아라한과 붓다를 일부 구분하고 있지요, 특히, 법화경의 비유품에 사리불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고, 지금까지 본인이 붓다로 착각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려면서 스스로 반성하기를 색신이 갖추어져야 붓다라는 것을 깨닫게되지요, 즉 색신은 보신을 말하며, 붓다는 삼신을 갖추어야지 붓다인 것입니다.
      본인의 순수한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법을 잘못 이해하거나 알면은 위대한 부처님을 모독, 폄하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명심하여야 하며, 법을 말씀할때는 조심 조심하여야 합니다.
      좀더 깊이 부처님 법을 이해하여 법설해주시기를 간곡히 고언하는 바입니다.

    • 원불사 단현2012.01.12 23:20 신고

      마성스님 말씀은
      아라한과 부처님은 다를 바가 없는데
      파사현정님이 부처라는 대상에 대한 정의를 위신력, 삼신 연화장세계 등으로 전지전능한 신적으로 격화신키는 것은 옳지않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저 마상 무아를 체득하신 아라한으로 그리고 뭇 제자를 교육시키신 스승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지적으로 보입니다.
      즉 스승으로서 부처님을 아라한과 구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붓다를 인간이나 아라한의 경지를 넘어서는 특별한 경지로 분별하여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라 생각됩니다.

      제 말씀 역시 스님 말씀을 왜곡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 파사현정2012.01.13 11:23

      단현님!
      아라한과 부처님이 같다니요?
      아라한은 본성을 철견하고 두타행을 통해 이 몸의 모든 착을 끊어버리는 수준의 공부를 완성할 때 아라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삼신을 갖추어야 붓다인 것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차이는 천지현격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이상입니다
      붓다의 삼신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세계인 연화장세게를 알지 못하고 무슨 불교 교리를 논한다는 것입니까?
      님의 수준에서는 부처님을 신격화한다고 하겠으나, 님께서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라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사료합니다만....
      현재의 세계 불교가 이렇게 왜소화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저의 견해를 진정으로 깊이 사유해 주시기를 충언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원불사 단현2012.01.17 23:52 신고

      파사현정님
      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세계에 대해서 저는 아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혹시 대승적으로 변질된 부처상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신지요?
      설명을 조금이라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대승불교에 대한 공부가 전무하다시피해서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설명해 주시거나 자료를 링크해 주시면 읽고 답을 적겠습니다_()_

    • 파사현정2012.01.18 07:12

      단현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처님의 세계, 즉 연화장세계를 모르고 무슨 불교를 이야기하십니까?
      화엄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는 법화경과 화엄경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지금까지 위대한 불교를 얼마만큼 왜곡하고 왜소화해서 잘못알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파사현정 합장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0

    (으아~ 또 댓글이 길게 달아지네요. 연꽃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리고 그냥 가겠습니다! 종이 값 많이 나오는 것 아니죠?)

    1# 美 한인교회 수, 한국의 3배..`현지화' 요원 [연합뉴스] 2012년 01월 11일(수) 오전 02:01

    교회 분열, 사이비 목사 시비도 잦아(애틀랜타=연합뉴스) 김재현 특파원
    = 미국에 진출한 한국 개신교회 수가 공식 통계로만 4천 개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미국 내 한인 350명당 1개꼴로, 교회 수 5만여 개, 국민 1천명당 1개 꼴인 한국보다 3배 가까이 많은 수치다. 최근 미국 `크리스찬 투데이'에 따르면 2011년 12월 현재 미국 내 한인교회 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4천96개로 집계됐다. 캐나다를 포함하면 4천511개다. 미국 내에서 한인 인구에 비해 교회가 가장 많은 지역은 남부 아칸소 주로 무려 175명당 1개의 한인교회가 있다. 2010년과 비교해선 전체 한인 교회 수가 48개 줄었는데, 이 신문은 교회 성장세가 주춤한 것은 1999년과 2000년, 2007년에 이어 4번째라고 전했다. 그러나 목사가 예배당 없이 자택에서 목회를 하는 비등록 `가정 교회'를 포함하면 한인 교회 수는 5천 개가 넘을 것으로 분석됐다. 애틀랜타의 한 개신교계 인사는 "한인교회의 성장세가 주춤한 것으로 보이지만 더 이상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할 공간이 없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인동포 대상 개신교회 수가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한국인 목회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 내 개신교 신자들이 초대형 교회로 몰려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는 것이 새로운 미국 진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한인교회의 교단 별 분포를 보면 한국처럼 장로교가 43%로 여전히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고 이어 침례교 18%, 감리교 14% 순으로 신도 수가 많았다.

    10일 현재 미국 개신교계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선 침례교가 25%로 최대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어 성결교 9%, 루터교 5%, 장로교, 감리교 각각 약 4% 수준이다. 한인 교회가 미국에 진출한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미국 교단에 흡수되거나 융화되지 못한 채 고국의 영향력 하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의 모든 한인 목회자들이 동포들을 대상으로 신자 확보에 나서는 과정에서 교단 및 교회 내 분열과 사이비 목사 출현 등 부작용도 생겨나고 있다. 등록 한인 개신교회만 200개에 이르는 애틀랜타에선 지난해 목사가 연수비자로 한국의 여대생 등을 유인해 돈을 뜯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한국의 유명 대학 졸업생들이 목사의 소개로 현지 기업에 취업한 뒤 집단 생활을 하면서 봉급을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답글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1

      2# “신은 죽었다니까! 왜들 아직도 그러니!”

      제 댓글 중 어디선가 서양철학사를 보면서 Surprise, Surprise, Surprise 를 느꼈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그간 제가 하고 있는 공부가 불교 – 서양철학 – 불교의 순서가 되고 있습니다.
      2년 전 처음 대림/각묵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 서문에서 개념과 궁극적 실재의 분류를 대했을 때만 해도 철학/종교 등의 인문 분야는 깜깜 맹인이라 빤냣띠와 빠라맛타의 의미를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냥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철학을 심심풀이로 가끔 보던 중, 갑자기 어라! 하는 순간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Surprise! 다름이 아닌 바로 불교적 사유와 서양철학의 사유가 만나는 순간들이었던 거죠.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중세신학에서의 보편논쟁입니다. 보편논쟁의 사안은 바로 개념의 실재성 여부였고요.
      결국 윌리암 오컴의 유명론이 승리한 이후 신앙과 철학, 의지와 이성이 완전히 결별합니다. 아마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걸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명론의 승리 그 자체는 이후 이어지는 후속적 사유들에 의해 “신”은 개념이자,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수도사인 윌리엄 오컴이야 허구인 신을 선택했지만요.

      나중에 보니 요새 초딩용 철학 관련 서적에도 보편 개념은 허구이다, 명사나 이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등을 설명하는 예화를 소개하고 있더라구요. (초등5-6 ~ 생각의 높이를 키우는 “철학 교과서” p.52 – 포유동물은 없다, 저자 임병갑) 저도 그랬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유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신학을 하는 사람들, 종교다원주의자라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인문학을 하고 있다지만 사실 이러한 사유를 모르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절대 그 동네에 못 붙어 있습니다. 어느 분 말씀대로 그걸로 먹고 살아야 한다면 별수 없이 그냥 거기서 살아야겠죠. 여기 늘 오시는 어느 분이 가끔씩 입버릇처럼 ‘말이나 언어는 관념일 뿐이다’ 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분도 도가 꽤 높으신 분(?)이구나 라고 항상 느낍니다. 그러한 사유 자체가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수행의 기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아니 죽었다가 부활해도 유일신 종교 쪽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못합니다. 우리는 붓다의 위대한 선취를 누리고 있는 거죠.

      이제는 저도 빤냣띠와 빠라맛타의 의미적 분류가 우리 불교적 사유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지금 봐도 개념은 허구이다, 명사는 허구이다 라는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1년 이상 그 주제를 지니고 지내오면서, 철학 책들 여기 저기를 뒤지고 다닌 셈이죠. 그러나 아직도 마누라에게 이 개념을 잘 설명 못 하겠어요.
      보편논쟁의 종결자인 윌리엄 오컴 조차도 정작 본인은 신앙을 선택 했는데, 제 이해가 늦었다고 해서 그리 흠은 아니겠죠?
      그렇지만 누가 저더러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가 뭐니 물으면, 보편논쟁이라고 얘기할 겁니다. 두 번째는? 보편논쟁, 세 번째는? 보편논쟁. 그래도 그 다음은? 칸트와 쇼펜하우어. 또? 응, 철학자들 전부. 모두가 서로 징검다리야.

      보편 개념은 목소리의 울림이며, 허구이다. 명사는 보편 개념이다. 개는 짖지 않는다. 신도 죽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주장은, 오온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거짓입니다.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칸트철학의 반절이 그것이고요. 그러니 신의 존재를 초이성/비이성적으로, 의지적으로, 주관적으로 우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의 실천이성이 나온 것이고요. 하이네는 칸트가 앞문으로 신을 내쫓고 뒷문으로 다시 신을 끌어들였다고 표현합니다. 신의 존재가 허구이니, 오온이 경험할 수 없는 거고, 경험할 수 없으니, 오취온의 의지적 욕심으로 더욱 더 원하게 되고, 그래도 증명이 안되니 신비주의의 동굴이 결국 피난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보충 필요 ~ 신비주의 경험들을 저는 완전 사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신비주의 경험은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 과정의 경험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추정을 합니다. ~ 도비도지견청정 직전에 겪는 십관수염 중의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선지식의 지혜에 의한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 조금 자신이 있으신 분이 답을 주시면 무척 고마울 텐데요.)

      신의 부재는 이미 오래 전에 철학적 사유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 13-14세기 윌리엄 오컴에 의해서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니까, 니체가 나중 나중에야 “신은 죽었다”라고 시적 언어의 은유로써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100년이 지나야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거라고 니체 스스로 예언했습니다.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요.

      개념과 실재의 의미적 분류 자체가 신을 배제하고 들어가는 사유입니다.
      보편논쟁의 유명론적 결말은 개념의 비실재성 증명이자, 신의 죽음의 선구적 선언이며
      특히 파르메니데스-소크라테스-플라톤 이후 잘못 됐던 서양철학 사유의 방향을 교정하는 출발점입니다.
      (http://blog.daum.net/bolee591/16154821 ~ 하나님/진공/기독교_삼위일체/불교_삼신사상에 관한 글을 읽고 썼던 글입니다.)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3

      3# 이제 연꽃님이 열심히 글을 쓰는 이유의 반절은 알겠습니다. 최근처럼 나의 생각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열심히 글을 쓴 적은 이 번이 난생 처음입니다. (사실 누구보다도 오히려 제가 더 놀라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사유의 과정을 명료하게 하고자 노력은 해 왔지만, 글을 쓰면서 정리하는 것과는 분명 또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연꽃님이 진화하고 계시듯이, 저도 이제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자신도 들고요.

      사실 이 댓글은 써 놓고도 올리지 않겠다 하고 일부러 결심을 했었습니다. 최근 제가 조금 너무 나서다 보니,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표현으로 계속 오버할까 겁이 나서요. 연꽃님의 조용한 사유 공간에 계속 묻어가는 느낌도 들어 이제는 사실 좀 신경이 쓰입니다. (연꽃님, 요새 제가 좀 너무 나대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관련의 위에 옮긴 뉴스를 보니 또 생각이 달라지네요. 완전 정제되지 않은 생각이라도, 비록 구업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냥 여기까지만 가자 하고 말입니다. 기사에 나오는 “유신론적 혼돈”의 상황을 제 아이가, 제 조카가, 제 친구의 자식들이 겪을까 두려워서요. 정말이요! 우리 국내에서도 그러한 데, 이역만리까지 가서도 삶의 고통을 삶의 고통으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삼사라 해야 하는 현실이 무서워서요. 정말이요!

      우리는 유일신앙 과잉시대의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는 미국에까지 넘치는 모양입니다.
      그 유일신앙인들은 우리의 친지이자 우리의 친구들입니다. 한국불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입니다. 불교를 같이 이해 하는 것, 철학적 사유를 공유하는 것.
      어느 것이 더 현실적으로 작동을 잘 할까요? 각자의 선택입니다. 저는 후자를 선호합니다. 물론 여기 오시는 많은 분들처럼 저도 일단 먼저 불교를 선택했었으며, 그래서 불교적 사유들을 어느 정도 “읽고 난 후” 철학을 대했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이해가 수월했습니다. 철학적 탐구의 궁극적 대상이 불교의 대상과 동일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죠. 반면 유일신 종교는 신학을 할 수 있을 뿐, 이제 태생적으로 철학은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일 터이고요. 사실 불자이신 분들은 따로 철학이 절실하지는 않습니다. 철학 자체를 하고 계시니까요. 그러나 막 붓다의 가르침에 입문하는 경우라면, 수행 이전의 사유 단계에서는 정말 요긴합니다. 지금의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현실적 이유는 주변과의 관계적 방법론 때문에 유용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철학과 종교, 불교와 유일신 종교와 관련한, 그 동안 애매모호하게 여기는 차이들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타종교인들을 종교적으로, 비종교적으로 진정으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러한 이해를 위한 자극으로써 서양철학사적 핵심의 추적에서 중요하고도, 제일 중요한 주제인 보편논쟁을 신문 기사와 관련하여 소개해 봤습니다.

      남경태씨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TV평생대학, 남경태/생각의 역사 3편 중, 2편_이성의 발견, 47~49분)
      중세철학과 근대철학의 단절도 물론 크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근대철학의 붕괴로 시작되는 현대철학은 “2500년 만에” 처음으로 나오는 철학 혁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굉장히 특수한 시대이다.
      (눈먼쥐 추천도서 = 더 많지만 ~ 플라톤_국가 + 남경태_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철학 + 이진경_철학과 굴뚝청소부)

      저의 결론적 의도는 이렇습니다.
      이상의 논리와 함께, 열심히 “행간”을 감안하시면 저희 불자들에게 있어 개인적 공간에서의 타 종교와의 마찰은 정말 불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또 타 종교와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우리의 생활 주변의 변화를 원한다면 정말 종교적이고 (연꽃님처럼), 그리고 비종교적인 사유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황차, 우리 불자들끼리의 대화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유일신 종교의 신앙인들도 같이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일곱.눈먼쥐.하나의 나 홀로 종교선언
      나와 여러분 사이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의 진리가 있으며 (아, 아직 저는 못 봤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진리가 있습니다.
      나의 진리와 당신의 진리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섭섭하지만요.
      그러나 분명 당신은 내 앞에 있으며, 분명 당신 앞에는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느낌을 제가 압니다. 저도 아직은 당신과 같이 윤회를 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서로 진정한 품위의 아쇼카 선언적 사유를 각자의 마음과 몸에 지니고 살기를 감히 간청합니다.

      아침이 오고 있네요.
      Everybody, Happy Birthday to You! (니체식 아침 인사? ~ 매일, 매일이 우리의 생일입니다!)
      그리고 또 진정 생일을 맞고 싶지 않은 분들께는, 내일은 생일을 맞지 않는 길을 찾으시기 기원합니다. __()__

    • 진흙속의연꽃2012.01.12 07:43 신고

      장문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글의 내용이 심오하여 별도로 카피하여 보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글을 쓸 때 참고 하기 위해서 입니다.
      글에서 말씀하신대로 글을 쓰다 보니 공부가 되고 진화 되고 있는 듯한 느낌 입니다. 그것은 2006년도의 글쓰기와 지금의 글쓰기를 비교해 보니 확인히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A4한장 채우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썼다하면 A4로 열장은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글쓰기 중독이 되지 않았나도 생각해 봅니다.

      __()__

    • 원불사 단현2012.01.12 23:02 신고

      기독교의 좋은 자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랫글 마성스님 지적처럼 저 역시 눈먼쥐님의 글을 읽기가 너무 피곤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대충 훌터보기도 하였지만 주제가 무엇인지 결론이 무엇인지 당최 알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취미삼아 쓰신다고 하지만 연꽃님의 진지한 연구와 성찰의 글에 사족처럼 불필요한 님의 글로 주제를 흐리게 한다 싶어 여간 안타깝지 않았습니다.

      도반님께 감히 부탁드리지만, 앞으로는 핵심만 아주 간단히 몇 자로 요약해서 주제에 합당한 답글을 쓰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긴 글을 쓰실 수 있는 능력이 부러울 뿐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부디 짧지만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마성2012.01.12 02:11 신고

    '일곱.눈먼쥐.하나'님은 언어의 경제학을 모르십니까?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인도철학에서는 처음부터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이론이 곧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철학이요, 종교이며, 인문학이요, 과학이고, 심리학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입니다. 서양철학으로 우회하여 불교를 만난다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인생은 일회일기(一會日期)입니다. 시행착오를 겪고 돌아오면 늦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생방송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2 16:04

      감사합니다. 마성스님의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언어 경제적으로)

      언어 비경제적으로.
      (일부러 글의 재미 삼아 쓰는 방식이오니 애교로 봐 주십시오. 통과하셔도 되고, 안 하셔도 되고)
      제가 이 댓글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추 2달쯤 되네요.
      이제는 스스로도 웬 지 오버할 것 같아 “누가 나 좀 말리도!”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던 상태였는데
      마성스님의 지적을 받으니 뜨끔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사합니다. (사실은 엄청 뜨끔합니다!!!)
      최근의 글은 저 스스로도 오히려 당황스러워 하는 편입니다. 저의 현재 모습과 제가 바라는 방향의 괴리 때문에요.

      제가 알고 있는 것들만을 써야 했다면 저도 이전 글들을 분명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스스로가 공부하는 학생인걸요. 일곱 눈먼 쥐 중의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을 나타내고자 했고요.

      댓글 공간에 대해서까지 언어 경제성의 기준은 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글의 표현 방식 자체에 대해서 하신 지적이라면 정말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표현의 경제성도 상황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경제성, "듣는 사람"의 경제성 따로따로 아닐까요?
      여기 댓글 공간에서는 듣는 사람들이 불특정 되어 있으므로 그 경제성을 따질 근거가 없고요.
      그보다는 댓글 공간은 대화 또는 담화의 성격, 오히려 편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 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네 골목 같아요. 우리 어릴 때 놀던 곳 기억나시죠? 요즘은 그런 곳이 드물지만.
      댓글 전에는 분명 못 느꼈는데, 이제는 글들이 서로 섞이다 보니 자주 오시는 분들이 조금씩 마음으로 알아지네요.
      또 여기에서 여러 번 글을 쓰다 보니 댓글 공간이 자기 계발의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언어적 표현은 경제성이 그 속성이겠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딱딱해요! 어쨋든 댓글 공간은 자유입니다!

      다시 언어 경제적으로. (마성스님, 여기부터 읽어주세요.)
      아마도 이제 긴 글은 더 안 쓸 것 같아요. 제 안에서 커져가는 괴리 때문에요. 마성스님의 지적 때문이 아니고요.
      그러나 그 괴리가 줄어들면 그 때는 다시 여러 분들과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을 것 같고요.

      제가 여기에 글을 썼던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먼저, 제가 늦게나마 홀로 종교를 찾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은 곳이 이 사이트이기 때문에 연꽃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 첫째 이유이었고요. (2년 전 불교 용어들을 검색하면 여기를 안 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꽃님의 이 사이트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설명의 품질도 괜찮은(?) 편이었고요. 어느 곳과 비교해서도요.)

      둘째, 당연하겠지만 제 생각으로도 연꽃님이 가시고 계시는 지금의 방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댓글 공간의 중구난방을 살펴 보십시오. 제가 쓴 첫 글은 옳다고 생각되는 연꽃님 글의 논지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웃기죠? 또 연꽃님의 주장도 어느 때는 강렬하십니다. 그것을 거북스러워 하시는 우리 동네 분들도 계시고요. 그 중재적 의견을 제시하고자 했던 경우도 있었고요. 또 웃기죠? (속으로 얼마나 쑥스러웠는데요!)

      셋째, 두 번째의 이유와도 어느 정도 중복되지만, 가끔씩 나타나는 유일신 종교에 계신 분들의 출몰 때문에 자극을 받은 것도 그 이유가 됩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에 자극된 것이 아니라, 그 쪽 분들 중 여기에 들르는 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에 자극 받아서입니다. 불법의 전달은 너무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8만4천 법문이겠습니까? 교회에 가서 법문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차라리 철학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이트에 들르시는 유일신 종교를 가지신 분들의 흥분과 혼돈을 가라 앉히시라고, 저의 경우에 분명한 효과를 보았던 서양철학을 먼저 유일신 종교 쪽에 계신 분들에게 권한 셈입니다. 어제 친구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집안 대대로 카톨릭인데 요새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됐더군요. 정말 의외였습니다. 철학을 이야기 했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인도철학에서는 처음부터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이론이 곧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철학이요, 종교이며, 인문학이요,
      과학이고, 심리학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입니다."

      저도 여러 번 말씀 드리긴 했습니다만 마성스님의 말씀대로 불자는 굳이 철학을 따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과잉의 대한민국에서 불법을 펼치실 분들은 굳이 서양철학을 해 보셔도 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승가 교육 과정에도 서양철학 개론을 포함시켜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자식에게 먼저 철학을 가르치겠습니다.

      "서양철학으로 우회하여 불교를 만난다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인생은 일회일기(一會日期)입니다.
      시행착오를 겪고 돌아오면 늦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생방송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이 일기일회라면 마성스님이 저를 약 올리시는 겁니다 (웃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도 인생 늦게에서야 불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인생은 다기다회입니다. 어차피 윤회까지 하는데요, 뭐. 너무 무겁습니다! 저도 상실을 경험하고서야 종교를 찾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중생들은 상실을 경험해야만 진정으로 종교를 찾게 된다고 볼 때, 아직 상실을 경험하지 않으신 분들은, 그리고 아직 불자라고 스스로 주장할 수 없는 분들은 서양철학도 분명 도움이 되는 하나의 경로가 된다고 봅니다. 세상에나! 마성스님께 개기고 있는 저를 보십시오. 제가 그 증거입니다. (죄송합니다!) 순서는 물론 초기불교의 교학체계에 대한 글들을 많이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한 다음입니다. 저는 불교 1년, 서양철학의 동반 1년 반, 이제는 불교 위주로만 갈 예정입니다. 출가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습니다만 아직은 제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제 방법을 찾아야죠.

      댓글 공간의 중구난방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긴 글은 분명 짜증나겠지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누가 제 대신 긴 글을 쓰면, 저는 그 글 다 읽을 겁니다.

      마성스님께 한 가지 부탁 말씀 올리옵니다.
      제가 들이대는 이유들을 배려해주신다면, 연꽃님의 이 사이트에 가끔씩 더 자주자주 들르셔서
      마성스님이 지적하시는 연꽃님의 글에 대한 지도와 함께, 그 아래 댓글 공간에서 헤매는 중생들을 위한 안내를 청합니다.

      분명 마성스님이 주신 글의 행간을 읽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__()__
      (마성스님, 이 글은 제가 스님께 드리는 개인적인 글이라 읽으셨든지, 안 읽으셨든지 하루 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답글은 주시지 말기 바랍니다. 제가 염치없어서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은 참 대책이 없네요! 아울러 저의 무례함도 용서해주시기를 정말로 정말로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 마성2012.01.12 18:28 신고

      일곱.눈먼쥐.하나님께!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입니다.

      제 덧글로 말미암아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많이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님의 글도 읽었습니다. 지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서양철학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의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묘약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쿠르트 프리틀라인 지음 <서양철학사>를 탐독한 적도 있습니다. 특히 분석철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에 심취하여 <시공불교사전>을 펴낸 곽철환 선생님과 밤을 새우며 토론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수행을 통한 자기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불교로 회귀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 방학을 맞이하여 민족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왕초보 씨리즈의 <왕초보 아함경박사 되다> 원고를 집필 중입니다. 가능하면 집중을 위해 인터넷에 올려진 글을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페이스북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간혹 글을 쓰다가 피곤하면 머리도 시킬 겸 이곳에 들어와 몇 편의 글들을 읽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읽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인터넷상에 댓글을 단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자 끄적였습니다.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는 '파사현정'과 같은 분들을 위해 제가 이미 발표한 논문을 올리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길게 댓글를 쓰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분들이 불교의 바른 법을 만나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마성 합장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2 20:13

      답 글을 주시오니 제가 오히려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마성스님의 책이 나오게 되면 사 두었다가 언제 스님 사인 받으러 가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스님처럼 이생에서 어떻게든 반드시 수행의 길을 찾아 들겠습니다.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__()__

    • 파사현정2012.01.13 14:51

      존경하는 마성스님!
      스님의 좋은 말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집필하시는 <왕초보 아함경박사 되다> 이 책이 진정으로 불교와 부처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함경은 소중한 부처님의 친설이지만 부처님의 위대한 모든 사상을 다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즉, 부처님께서 인류 문명의 초창기에 인연(선근)이 있는 분들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 비교철학을 집필중에 있습니다. 몇년이 소요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주요내용으로 불교의 철학사상은 초기불교의 사상으로 부터 부파불교, 중관 및 유식사상, 선불교와 티벳밀교, 대승경전의 주요사상까지 다루면서 그리스 철학과 중세철학, 그리고 근현대의 과정철학까지 포함한 서양철학, 그리고 6파철학과 자이나철학을 포함한 인도철학, 그리고 대학·중용과 주자학, 양명학, 조선의 성리학 등 유가사상과 도가사상 등을 포함한 동양사상을 아우르면서 부처님의 위대한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싶은 마음으로 집필중에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화엄경과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세계와 부처님을 잘 표현하였지만 사실은 이것도 부족한데, 지금의 불교는 이것마저 픽션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아무쪼록 존경하는 마성스님의 이 책이 나와서 많은 분들을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파사현정 합장

  • 마성2012.01.12 02:32 신고

    '진흙속의 연꽃'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말할 수 없는 주제들을 다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불필요한 사설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글이 너무 산만하고 길다는 말입니다. 200자 원고지 15매를 넘으면 이미 앞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비판을 하려면 확실히 명료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작은 장대한데 결론은 미미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위의 글도 결론이 명료하지 못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서광의 견해가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네티즌들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무거운 주제는 다루지 않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감정을 자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다 논리적인 근거로 논파하기를 바랍니다. 두서없는 글을 올리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글
    • 진흙속의연꽃2012.01.12 07:39 신고


      지켜 보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 보고 있는 수 많은 눈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잘 써야 된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이 번 글의 경우 약간 감정이 실려 쓰다 보니 12폰트로 하여 A4로 19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일요일날 썼는데 아침 일찍 시작 하여 도중에 일 좀 보고 계속 쓰다 보니 저녂때 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글과 함께 보냈는데 지적하신대로 산만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출가자를 상대로 글을 쓴다는 것이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학문적으로 그리고 세간에서 유명한 분이라서 여러가지 자료를 곁들이다 보니 길어지게 된 것 입니다.

      매일 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하되 성역 없는 글을 계속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__()__

    • 원불사 단현2012.01.12 23:08 신고

      스님께서는 그 어떤 카페에도 답글을 쓰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더구나 초기불교의 대학자로서 존경해 마다않은 스님께서 직접 주시는 가르침이라 연꽃님에 대한 기대가 지대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더구나 일체의 활동을 접으시고 집필 중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재가자을 격려하시니 감사하기 이럴 데가 없습니다.
      단현 합장_()_

  • 이쁜하마2012.01.12 22:58

    연꽃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일곱~님의 글도 잘 읽었구요. 마성스님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Dhamma님께서는 여전히(?) - 아! 실례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만- 대승불교를 옹호하고 계시구요.
    뭔가를 잡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하겠지만,
    상황상황에 따라선 자신도 변해야함을 요사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__()__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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