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계의 종교 개념 수용 과정
방원일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1. 머리말
이 글은 1890년대, 1900년대 한국 개신교계에서 전통적인 도(道), 교(敎) 개념이 근대적 종교(宗敎) 개념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한 분석이다. 서양에서 생성된 종교 개념이 제국주의 확장과 더불어 근대에 확대된 양상 에 관해서 종교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캔트웰.( 스미스 1991; Asad 1993; Stroumsa 2010) 한국에 서도 ‘religion’의 번역어 ‘종교 가’ 일본을 통해 소개되어 기존의 도(道), 교(敎), 학(學), 술(術) 등을 대체하면 서 새로운 담론 질서를 형성하였다는 사실이 주요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장석만 1992) 새로운 개념이 수용되고 기존 개념을 대체하는 과정은 단번에 진행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한국 종교계 전 반보다 약간 범위를 좁혀 개신교 문헌에서 종교 개념의 변화 추이를 살핌으로써 변화의 점진적 과정을 그려 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기대되는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적, 개념의 수용은 한국 내 여러 종교 집단마다 그 속도와 양상이 달리 나타난다 근대적. 종교 개념이 개신교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Asad 1993; King 1999), 우리는 개신교계가 종교 개념 수용을 주도했을 것이라고 얼핏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신교 문헌을 검토해보면 오히려 개신교계의 종교 개념 사용이 한국 사회 일반에 비해 빠르지 않으며, 오히려 약간 늦은 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둘째 이러한, 속도 차이 때문에 개신교 문 헌에는 전통적인 개념이 활용된 용례들이 발견된다 이. 글은 개신교 문헌 검토를 통해 개념이, 전환되는 시기 에 전통적 개념을 포함한 여러 어휘가 경합하는 상황을 보이고자 한다.
2. 종교 개념의 도입
2-1. 한국에서 종교라는 어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83년에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兪吉濬)에 의해서이다. 종 래에는 최초의 종교 용례가 1883년 11월 10일의 『한성순보(漢城包報)』라고 알려져 있었지만(장석만 1992, 39), 『한성순보』 창간의 실무책임을 맡은 유길준이 1883년 상반기에 미국으로 출국하기 이전에 집필한 『세 계대세론 에서』 종교에 관한 중요한 언급이 발견되므로 최초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이예안 2018, 144). 유길 준은 각 나라의 종교의 다름을 밝힌 “종교수이(宗敎殊異)”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의 특성[殊異]은 국가의 이해에 관련되는 일이 적지 않다. 대체로 인간 생활의 신령스 럽고 빼어난 이치를 분별해보면 정신과 형체의 크나큰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 종교는 정 신에 속하고 기술은 형체에 속한다.……요컨대 각 나라에는 본래부터 전해지는 종교가 있 어 교육을 힘써 장려하여 윤리와 기강을 문란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각 나라는 유독 본래부터 있었던 종교를 굳게 지키고 다른 나라의 종교가 전파하는 것을 막아 자국 의 인민에게 다른 나라 종교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이 일이 어찌 뜻 있는 사람의 임무가 아니겠는가?1)
유길준은 종교와 국가의 연결을 강조한다 그는.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그 나라에는 원래 전해 내려오는 종교 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종교는 말 그대로 각 나라의 정신적 중심이 되는 ‘으뜸 되는 가르침[宗敎]’으로 이해 되었다 이러한. 종교 개념은 1883년 말에 발행된 『한성순보』 기사를 통해 이후 대중화되었다.2)
2-2. 고종이 1899년에 선포한 “존성윤음(尊聖綸音)”은 유교를 국가의 으뜸 되는 가르침으로 삼으려는 대표 적인 시도이다. “세계 만국이 종교를 존상함은 다 인심을 맑게 하고 치도(治道)를 내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의 종교는 어찌하여 높임이 없으며 알참이 없는가? 우리나라의 종교는 공부자(孔夫子)의 도(道)가 아니냐?” 고종 은 “ 짐이 동궁과 더불어 장차 일국(一國)의 유교의 종주(宗主)가 되어 공자의 도를 밝히고 성조(聖祖)의 뜻을 이을 터 임을” 선언하였다.( 高宗寶錄 39권, 1899년 4월 27일)
2-3. 이러한 종교 개념은 1900년대에 발간된 신문 잡지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 의 기사는 사례 중 하나이다.
조직사회로부터 형성된 나라는 반드시 종교가 있어 인민을 이끄는 것이 고금의 변치 않는 가르침이다. 중국에서는 유교로 종교를 삼고 인도에서는 불교로 종교를 삼고 서양에서는 천주 기독 희랍 로마 등의 교로 각기 종교를 삼고 일본은 신교(神敎)로 종교를 삼았는데, 오직 한국은 유교로 종교를 삼았으나 유교는 처음부터 중국으로부터 나와 근본이 동방의 것이 분명하지 않으니 따라서 한국에는 종주(宗主)의 교가 없는 것이다. (“東學論”, 『대한매 일신보』, 1906년 2월 8일)
3. 전통적 개념: 교와 도
1890년대 개신교 문헌에는 의외로 종교 개념의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유교적. 지식인이 주도하여 종교 개 념을 소개하고 사용한 것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다른 종교를 지칭하는 대목에서 종교라는 말 대신에 신학적 용어나 전통적 용어를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3-1. 타종교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는 우상(偶像)이다. 『죠션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기사에서 제사와 같은 전통적인 종교적 실천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우상론”, 『죠션크리스도인회보』 1-11, 1897년 4월 14일) 1898년 기사에서는 이러한 용법이 확장된다. “세상 사람들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대주재를 배반하고 사신(邪神)을 섬기는 이가 많아서 국가나 개인 집이나 영원한 복을 받지 못한다. 이제 우 리는 동서양 나라 사람들이 숭배하는 사신과 우상(偶像)을 대략 기록하여 대주재를 믿는 형제들에게 알리고 자 한다.” 저자는 사신과 우상이라는 표제 아래 동서양의 온갖 전통을 나열한다.(“사신과 우상” 『대한크리스
도인회보』 2-20, 1898년 3월 23일)
1) 이 글의 인용문은 대부분 현대어로 번역된 것임.
2) “종교로 말하면 印度 以南의 페르시아·터키·수단·아라비아·아시아터키는 전적으로 回回敎를 신봉하여 回回國이라 부르며, 印度 以東의 대부분의 나라는 거의 釋敎(불교 를) 믿으며, 儒敎 또한 성행한다.” “洲洋에 대해 論함” 『한 성순보(漢城包報)』 제1호(1883년 10월 31일)
3-2. 주목할만한 것은 ‘종교 이전의’ 전통적 어휘를 통해 종교가 서술되는 자료들이다. 1899년 『대한크리스 도인회보 의』 한 기사는 저자가 승려에게 기독교를 권면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불교를 비판한 후 “높은 도(道) 는 하느님의 도입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승려는 “한량없이 높고 영생하는 도를 들으니 불도를 버리고 하느님 도를 모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도학(道學) 높은 선생을 한번 찾아가 뵙고 공부를 하여 하느님을 공경 하겠다 고” 응답했다고 한다.(“중과 서로 문답한 일”, 『대한크리스인회보』 3-2, 1899년 1월 11일) 지금이라면 종교가 들어갈 자리에 ‘도 가’ 사용되었고 불교와, 기독교는 불도와 ‘하느님의 도 로’ 표현되었다.
1901년 『그리스도신문 의』 한 기사에서는 세상의 여섯 종교를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와 회회교와 불교와 파 라문교와 우상 위하는 교니라.”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무슨 교든지 죄를 사하여주는 은례가 없는 교는 믿 고 바랄 것이 못된다 라고” 비판한다.(“존경문답”, 『그리스도신문』, 1901. 8. 22) 종교는 ‘교 로’ 표현된다. 1904년 『신학월보 에』 실린 박용만의 글 “교는 정치의 근본 에서는” 종교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교 가’ 사용되 고, “대저 교도로 인하여 나라가 망라고 교도로 인하여 나라가 쇠함 을” 언급한 부분에서는 교도(敎道)가 종교 의 경쟁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박용만, “교졍치의근본”, 『신학월보』 4-5, 1904년 5월)
3-3. 초기 전도문서에서도 종교라는 어휘를 찾기는 쉽지 않다. 장원량우상론 (1896)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예수의 도를 배워 믿어 행한다 라고” 표현하고, 묘축문답 (1899)에서는 “하느님의 도를 좇고 예수를 믿는 것 이라고” 표현했다. 『세례문답』(7판, 1907)에서는 다른 종교 신앙을 “다른 도를 좇는 일 이라고” 표현했다. 역시 세례문답집 『그리스도 교통의 문답』(1911)에서는 “그리스도 교는 무엇이뇨 라는” 질문에 “하님의 구 속하시는 사랑의 도라.”라는 답변이 제시되었다.
1906년에 개정판이 나온 『순도긔록 에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교든지 백성의 마음대로 하게 하여 조금도 금하지 아니하고, 또 이르되 내가 교 하 는 일을 금하지 아니하리라. 도를 믿는 것은 사람의 본심에서 나오나니 임의로 할 것이오 능히 강박지 못할지라.”(Miller 1906, 37)
이상의 문헌들을 통해 볼 때 개신교계에서 일반명사로서 종교 개념을 사용하는 대신에 교나 도와 같은 전통 적 어휘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어휘들은 1890년대에는 지배적이었고 1900년대에도 상당한 생명력을 지녔다.
4. 종교 개념 등장
4-1. 개신교 자료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종교 용례는 1897년에 발간된 노병선(盧炳善)의 『파혹진선론』에 나 온다.
대뎌 나라이 잘되고 못되기와 사을 화고 못화기 그나라 죵교에 달녓거 우리 나라 죵교가 잇 사들이 잘못 야 나라이 약여 가지 셩쇠의 리치 로 죵교가 쇠야 그러지 산림 학쟈가 업서 그러지 모로거니와 오날 우리 나라에 드러온 예수교가 사의게 유조지 나라의 해가 되지 리허를 아로 대강 말야 모로 사람의게 혹케 노라(노병선 1897, 2)
노병선은 엡웟청년회를 조직하고 정동교회 전도인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초기 감리교인이다. 그는 한학(漢學) 을 공부하다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교인이 되었는데, 그의 종교 개념은 유교계 지식인의 영향을 받았을 것 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종교와 국가 흥망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은 당대 유교 지식인의 용법과 거의 일치한다. 『파혹진선론 에는』 전통적 개념도 함께 사용된다 저자는. 선교사들이 전한 것을 “예수 씨의 가르치신 도 라고” 지칭한다. 그러면서 동서양의 종교적 진리가 서로 통함을 “대뎌 도에 근원은 하노 브터 난거시라 엇지 셔양 하과 동양 하이 다르다 리오.”라고 표현하였다.
4-2. 개신교계 언론에 ‘종교 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첫 사례는 1899년 『대한크리스도인회보』의 기사 “종교론” 이다 기사.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 사람이 항상 자기가 행하는 교(敎) 외에 다른 도(道)는 이단이라 하며 서로 훼방(毁謗)하는데, 이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성품이라 책망할 것이 없다. [하지만] 종교를 논의하면 하느님의 도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제 남달리 총명한 성인으로 하여금 무슨 교든지 새로 설립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근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니, 하느님의 도가 어찌 종교가 아니겠는가.(“종교론”, 『대한크리스도인회보』 3-44, 1899년 11월 2일)
여기서 종교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명사로서의 뜻이 아니라 당시 유교계에서 사용하는 나라의 ‘으뜸 되는 가르침 이라는’ 의미이다. 일반명사로서는 교와 도가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07년 선교사 존스 (George H. Jones, 조원시趙元時)가 『신학월보 에』 쓴 글 "령강목 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무릇 어 떤 나라던지 종교가 있어서 나라, 풍속과 법률과 백성이 서로 교제하는 규모가 다 그 종교대로 될 것이다.”(조
원시, "령강목" 『신학월보』 5-1, 1907년 1월)
4-3. 1910년 이후 개신교계 신문에는 종교라는 말이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보편적 개념과 전혀 다르지 않게 사용된다. 1910년대 『그리스도회보 에』 실린 글들은 제목만 일별해 보아도 현재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종교와 실업의 관계”(『그리스도회보』, 1912.8.30.), “이상적 종교와 신령적 종교”(『그리스도회보』, 1913.2.15.), “종교적 신앙과 그 활동”(『그리스도회보』, 1913.4.5.), “그리스도교는 모든 종교 위에 뛰어남”
(『그리스도회보』 1913.7.28.)
5. 종교 개념의 변화: 최병헌의 경우
최병헌(崔炳憲)은 전통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에 평생 관심을 가졌던 초기 감리교인으로서 최초의 토착화신학 자이자 비교종교론자로 불린다. 그는 기독교인의 자리에서 타종교에 관한 글을 다수 집필했기 때문에 종교 개념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5-1. 최병헌의 초기 문헌에는 ‘종교 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1900년에 저술한 “삼인문답 은” 기독교인과 유 학자 둘이 나눈 변증론적 대화이다 기독교를. 권유받자 유학적 소양을 지닌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인: “우리나라의 우리 유교도(儒敎道)도 더 행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타국(他國) 교(敎)를 어느 겨를에 행합니까?”
전도인: “유불선(儒佛仙) 삼도(三道)가 모두 타국에서 왔거늘 어찌 우리나라 교(敎)라 합니 까?”(“삼인문답”,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900.3.21.)
여기서 최병헌이 사용한 개념은 ‘교 이고’ , ‘타국 교 와’ ‘우리나라 교 의’ 구분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또 한문으로 된 『황성신문』 기고문에서는 교도(敎道)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崔炳憲, “奇書”, 『황성신문』, 1903.12.22.)
5-2. 최병헌은 “삼인문답 에서” 선보인 종교인 간의 가상 대화 형식을 발전시켜 본격적인 종교변증론 『성산명 경 을』 저술하게 된다. 이 책은 “성산유람기 라는” 제목으로 1907년 『신학월보 에』 4회에 걸쳐 연재한 내용을 증보하여 1909년에 출판한 것이다. 『성산명경 은』 총 80쪽인데, “성산유람기 로” 연재된 부분은 앞의 33쪽까 지이고 그, 뒤는 출판 때 추가된 부분이다 그런데. 1907년의 “성산유람기 와” 1909년의 『성산명경 은』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성산명경 에서만』 종교 개념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성산유람기”에서는 유학자가 기 독교인 주인공에게 “그대는 서국(西國) 교(敎)를 존숭(尊崇)하는 사람이로다.”라는 대목이나 ‘하느님의 도 라는’ 표현은 있어도, 종교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성산유람기”, 『신학월보』 5-3, 19007년, 131) 반면에 『성 산명경 에서는』 “세계 종교 중에 선도가 제일 좋다”, “어찌 종교라 하리오”, 자신이 “종교가의 진리를 연구하였 다.”라고 하는 등 여러 번 등장한다.(최병헌 1909: 36, 42, 79)
증보판에만 종교가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증보판에. 종교가 등장하는 내용 중 이미 연재했던 “상산 유람기 에” 해당 내용이 있는 부분이 22쪽인데 여기서, 증보 과정에서 ‘종교 개념이’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최 병헌이 증보 과정에서 기존 연재 원고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 삽입은 매우 의도적이다. 해당 내 용은 기독교인 주인공이 유학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성산명경 에서』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세상에 나옴에 만물보다 가장 귀한 것은 하느님께서 영혼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 런 고로 능히 선악과 진가를 분별하며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이치와 삼교구류(三敎九流)의 문호(門戶)와 인의예지의 윤리와 종교 도리의 체용(體用)이 어떠한지와 심리철학(心理哲學) 의 주객관(主客觀)이 되는 것과 천지만물의 내력과 생전에 당연히 할 본분이 무엇이며 사 후에 영혼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세상일만 짐작하는 자는 문견에 고루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최병헌 1909: 21-22. cf. “성산유람
기”, 『신학월보』 5-3, 19007년, 131)
위에서 첫 번째 밑줄 친 내용은 1907년 “성산유람기 에는” 없던 내용이 삽입된 것이다 두. 번째 밑줄 친 ‘하느 님의 진리 는’ “성산유람기 에서는” ‘하느님의 도리 라고’ 표현되었던 내용이다. 『성산명경』에는 주인공 신천옹 이 새로운 문물이나 최신 학문을 언급하면서 상대 종교를 압도하고 기독교의 우월함을 보이는 장면들이 있 다 위의. 첫 번째 밑줄의 윤리 종교 심리 철학 주관 객관, , , , , 등은 전통사회에서는 사용되지 않던 새로운 용어 들인데 이는, 유교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는 우월감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우리.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최병헌이, 1907년과 1909년 사이에 종교 개념을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1909년 저술 『예수텬쥬량 교변론 에서도』 종교 개념을 사용한다.3)
3) “종교의 진리는 천산천하에 하나이고 고왕금래에 둘이 없는 것이다.”
6. 맺음말
이상의 분석에서 초기 개신교계에서 종교가 사용된 추이를 살필 수 있었다 처음에. 한국의 종교 개념 소개 와 사용이 유교계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데 반해, 개신교계는 개념 수용에 소극적이었다. 역설적이 게도 개신교 문헌에는 전통적 용어를 사용한 종교서술의 예가 풍부하다 정확한. 연대를 특정하는 것이 큰 의 미는 없지만, 1890년대까지는 거의 전통적 개념이 사용되었고 1900년대 들어서 종교 개념이 사용되기 시작 하였고 1910년 이후에는 현재와 같은 보편적 종교 개념이 일반화되었다.
개신교의 종교 개념 수용이 상대적으로 늦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는 가설 수준의 설명을 제안 하도록 하겠다. 첫째, 앞서 보았듯이 유학자들이 주도한 종교 개념은 한 나라의 으뜸 되는 가르침이었고, 한 국의 종교는 유교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개신교에서는 종교가 국가 정체성과 결합한 개념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수용하기 힘든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일병탄 이후 유교를 으뜸 가르침으로 보는 종교 개념 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종교가 자리 잡게 된다.
둘째, 1900년대 이후는 선교사들이 ‘religion’이라는 용어를 한국 전통에 적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연동된 다 선교사. 자신의 용어 정리가 한국인 신자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캔트웰. 스미스가 강조하였듯이 종교는 타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생성되는 개념이다 개신교인이. 종교 개념이 부여한 의미는 그 들이 한국 전통과 어떻게 만났는지와 연결지어 분석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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