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유교의 서(恕)를 통한 관계 치유 – 과거의 관계 속에서의 서( )恕 와 현대의 관계 속에서의 서( ) -恕 김민정(서강대학교)

 


[유교분과 1발표]

유교의 서(恕)를 통한 관계 치유

– 과거의 관계 속에서의 서( )恕 와 현대의 관계 속에서의 서( ) -恕

김민정(서강대학교)

서론

종교적 인간은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해나간다 소외감을. 느끼거나 치유가 필 요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과 자신 외의 세계와의 관계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다 코로나라는. 최근의 상황은 인간관계에 대한 정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대해 다 시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 글에서는 관계 속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유교의 실천행위인 서(恕)를 통해 어떻게 지금 여기에

그 실천행위를 적용해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1. 인(仁)으로 향하는 길인 서(恕)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두드러지게 양극화된 선(善)과 악(惡)의 대결구도로 짜여지지도 않을뿐더러 한 사 람이 겪는 하루의 시간 속에서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선택과 결단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사 회의 모습이 어렴풋이 큰 조류를 이룬다. 공자는 그 같은 수많은 선택의 목적지로 인간이라면 인(仁)한 사람 이 되어야 한다는 종교적 인간상을 세운다.

인(仁)에 대한 정의와 개념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교의 이상에는 늘 인(仁)이 중심에 자리 한다. 공자는 부정의하고 어지러운 세상이 달라지길 원했지만 체제를 바꾸거나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형태로 고치려하기보다 인간 내면의 근본 변화로 달라지길 원했다. 그리고 공자가 말한 그 근본변화가 목표로 삼아 야 할 정점에는 인(仁)이 자리 한다.

공자는 一以貫之를 하는 방법이 충(忠)과 서(恕)에 있다고 설명한다 주자학적. 설명에 따르면 충(忠)은 자기 의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 마음의 진정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서(恕)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라 설명한다 정자. (程子)는 “자신으로써 남에게 미침은 인(仁)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 침은 서(恕)이다...하늘의 명이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충(忠)이요 건도, (乾道)가 변화하여 각기 생 명(性命)을 마루고 있다는 것은 서(恕)이다. <중용 13장 의> 이른바 忠恕違道不遠이란 것은 바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뜻이다.” )라고 했다. 忠과 恕를 마음의 실천규범으로 삼으면 저절로 하늘의 뜻과 통하는 인(仁)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서(恕)는 인(仁)을 이루는 방법이 된다 인간. 내면의 근 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다다라야할 목표가 인(仁)이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서(恕)라 한다면 서 (恕)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켜 사회적 유토피아인 평천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된다. 누구나 소외받지 않 은 사회 하늘의, 도와 맞닿는 위로를 인간관계에서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상을 우리는 서(恕)에서 찾을 수 있 다. 그렇다면 유교에서 말하는 서(恕)는 무엇인가?

2, 유교의 서(恕) 서(恕)는 ‘己所不欲, 勿施於人, 즉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그러면. 온 나라 어디서든 원

망이 없고 지역사회 어디서든 원망이 없을 것이다.’2)로 대표된다.

그러나 서(恕)를 더 세분화하여 살펴보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소극적인 양면 의 서(恕)3)인 은백률(silver rule)에 해당하는 서(恕)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적극적으로 베푸는4) 황 금률(golden rule)의 서(恕)가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서. (恕)에는 반드시 ‘나 와’ ‘내가 아닌 타자(他者)’라는 관계가 전 제된다. 이 관계에서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서(恕)라는 기제가 발동된다. 먼저 적극적이든 소 극적이든 나의 경험과 감정과 익숙한 윤리 안에서 타자를 헤아리게 된다. 나를 준거로 해서, 내가 타자를 헤 아리고 그도 내가 원하는 일을 원할 것이라는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는 추정이 일어난다 그러고. 나서 적극적 으로 행동을 하는 황금률(golden rule)을 행할 수도 있고, 내가 싫어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싫어하는 행동을 내가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타인을 도모 하는 은백률(silver rule)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 라는’ 한 개인의 기준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남이 못하는 것에 대한 몰이해, 그가 원하지 않 는 것을 원한다고 미루어 생각하는 착각 등 수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들은 나의 이해와 상대 의 이해가 맞아들어야 배려로써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지. 않은 서(恕)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거 나 오히려 상대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솝, 우화의 ‘여우와 학 에서’ 자기에게 맞는 그릇을 상 대에게 내놓는 행위는 상대가 받아들이기에 폭력이 된다 상대를. 중심으로 한 배려가 아닌 나를 기준으로 한 불순한 행위의 서(恕)로 오염 되어버린다 맛있는. 음식을 내 방식으로 미루어 상대를 대접하겠다는 선한 의도 가 선한 결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황용은 황금률에는 행동을 하는 사람과 피행동인(彼行同人)의 차이가 분명히 있고 하나의, 공통된 표준이 사용되는 것은 특수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5) 뿐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참는 것 역시 내가 나에게 강요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무조건적인 배려가 자신에게는 폭력으로 돌아오며 이것을 서(恕)로 미덕으로, 여기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말한 충서(忠恕)의 개념을 주자는 천도(天道)와 연결시켜 이야기 한다. 일반적인 감 정과 주관 속의 나를 미루어 생각하는 서(恕)가 아닌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은 서(恕)라고 분명히 말한다.6)

 

也. ... 中庸所謂 『忠恕 違道不遠』 斯乃下學上達之義.

2) 『논어』 12:2.

3) 『논어』 15:23. ‘자공이 물었다. 종신토록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씀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恕)이

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4) 『논어』 6:30.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남도 통해주는 것이다. 자기 처지로부 터 남의 처지를 유추해내는 것(能近取譬)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5) Yong Huang, 『A Copper Rule Versus the Golden Rule: A Daoist-Confucial Proposal for Global Ethics , (Philosophy East and West. 55(3) 2005), P.397.』

6) 『중용』 15. 忠恕違 道不遠 ,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도(道)에 가까운 서(恕)란 자기 기준과 경험을 순수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전제로 한 다 자기. 자신이 수양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 라는’ 주관적 준거의 서(恕)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폭력이자, 비합리적인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수양한 서(恕)는 사람마다 내재된 천이 부여한 성스러운 이치를 드러내게 된다. ‘나 를’ 제대로 헤아리고 모든 사람들 안에 담보된 하늘의 이치를 깨닫지 않으면, 서(恕) 는 인(仁)으로 연결되는 객관성을 잃게 된다. 자신 안에 있는 천리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자신을 도(道) 와 합일한 상태를 갖추어야 나를 미루어 타자를 배려하는 이타심이 제대로 발휘해 비로소 인(仁)과 합일(合一)을 이룬다고 볼 수 있겠다.7)

3. 서(恕)와 유교의 인간관계 서(恕)는 자신 하나의 수양에 국한한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혹은, 우주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까지 확장된다 다산. 정약용은 인(仁)을 관계성 안에서 해석했다. “‘인(仁)’이라는 명칭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가까이는 오교(五敎)  (부의(父義), 모자(母慈), 형우(兄友), 제공(弟恭), 자효

(子孝))에게서 멀리는 천하 백성에 이르기 까지 모든 사람과 그 사람이 그 본분을 다하는 것, 이것을 일러 ‘인 (仁)’이라고 한다.” 라고 말했다. 다산에게 있어서 인(仁)이란 효(孝), 자(慈), 충(忠), 신(信) 등 개개인이 상호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상대 존재에 대해 행할 필수적인 역할윤리의 덕목의 총칭임을 알 수 있다.8) 인 (仁)은 혼자서 정의되는 개념이 아닌, 개인과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끌어져 나온다. 이보다 훨씬 먼저 장재는 <서명(西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건을 아버지라 하고 곤을, 어머니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 아득하게 작지만 이에, 혼연히 그 가운데 있다. 그 러므로 천지에 가득한 것은 나의 몸이며 천지를, 이끄는 것은 나의 性이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이 나 와 함께하는 친구이다 군주는. 내 부모의 적손이고 ,대신은 적손의 가상(家相)이다. 나이 많은 이를 존경할 때 는 내 어른을 섬기는 듯이 하고, 외롭고 약한 사람을 사랑할 때는 내 아이를 돌보는 듯이 한다. 성인은 덕에 합한 자이고 현인은 빼어난 자이다.”9)

<중용 에서> 공자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인데 나는, 그 가운데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서 아비를 섬김이 능하지 못하고,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서 임금을 섬김이 능하지 못하고,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서 형을 섬김이 능하지 못하고, 붕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서 내가 먼저 베풂이 능하지 못하다 .”10)라고 관계에 대한 유교적 프레임을 언급한다.

유교에서 관계에 대한 질서와 분별은 수없이 강조되고 있는데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부부(夫婦)ㆍ장유 (長幼)ㆍ붕우(朋友) 다섯 관계는 가장 보편적인 유교적 인간관계 프레임이다 가까운. 관계의 질서가 잡히면 확 장된 관계에서도 화합과 편안함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 시점에서 유교의 관계 프레임은 오륜을 기본으로 한 보수적 수직적 위계적인, , 관계이며 자유로운 교류가 배제된 관계로 평가된다 도교. 역시 유교가 내세우는 경계와 구별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경계가 그어지고 개념이 생겨나면 그 개념을 세

 

7) 풍우란, 박성규역, 『중국철학사』. (까치, 1999), P.122. 송명도학의 육왕학파는 인간에게 본디 완전한 良知가 있고,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다 성인이다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양지를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절대로 그릇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8) 안외순, 『茶山 丁若鏞의 관용(tolerance) 관념 : 서(恕) 개념을 중심으로』. (동방학, 19, 2010), P,248.

9) 『장재』 서명(西銘) 乾稱父, 坤稱母, 予玆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 吾其體, 天地之帥, 吾其性, 民吾同胞, 物吾與也. 大君者吾父母宗子, 其大臣宗子之家相也. 尊高年所以長其長, 慈孤弱所以幼吾幼, 聖其合德, 賢其秀者也,

10) 『中庸』 13장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以事父未能也. 所求乎臣以事君未能也 所求乎弟以事兄未能也 所求乎朋友先施之未能也

우려 했던 원의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소외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부부사이의 별(別)에 대한 해석이 그러하다 이덕홍은. 부부유별(夫婦有別)의 별(別)에 서 두 가지 의미를 파악하였다 하나는. 남편과 아내가 공동의 영역을 가지며 이는 타인으로부터 배타적인 영 역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부부가 공동의 영역을 공유하나 일상생활은 남자는 밖에서 여자는 안에서 생활하 면서 안과 밖이 구분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 별(別)에는 ‘내외지간(內外之間)에 서로 함부로 하지 않는 다’(內外有別)와 ‘정해진 짝이 있어 서로 어지럽히지 않는다’(不相亂偶)라는 뜻이 함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덕홍은 전자의 방향으로 기울고 후자의 견해는 무시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문제점에 대해 애통해한다. 정호 는, 불상난우(不相亂偶)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지만 내외유별(內外有別)은 도(道)를 닦는 군자에게나 다그칠 수 있는 것이지 보통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 그만큼 부부사이 의 별(別)이 내포하고 있는 도리에는 상대를 미루어 이해하고 서로 공경하는 태도라는 진정성이 담긴 마음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관계 속에서의 인(仁)은 개인이 각각의 역할 속의 상대를 향한 쌍무호혜적(雙務互惠的)인 사랑이다. 정약용 은 인(仁)인이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라고.’ 하며 쌍무호혜적(雙務互惠的) 사랑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존재,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숙명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귀결은 제가와 치국은 물론 평천하(平天下)와 협만방(協萬邦)의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공자는 “군자의 도(道)는 비유하면 먼 곳에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하며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 로부터 함과 같다.” )라 하여 유교의 성인은 가까운 관계를 미루어 생각하여 먼 관계까지 인간이 가져야할 도(道)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루어. 생각하는 서에는 결국 관계성이 설정되어 있고 서는 단순히 나의 경험과 주관을 미루는 차원이 아닌 하늘의 도(道)와 맞닿는 인간의 마음 안의 성(性)이 인(仁)에 방향 지워져 있어야 한다.

4. 현대 사회에서 ‘관계 변화와’ 그 안에서의 서(恕) 언어학자이면서 구조주의자인 소쉬르는 체계성의 테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단순한 차이들을 임의로 한정함으로써 단번에 체계적인 차이와 대립들로 변환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녹색 신호등이 자신의 고유한 속성에 의해 어떤 가치를 부여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것과의 차 이 즉, 빨강 신호등과의 부정적 차별적 대립적, , 관계에 의해 특정한 가치인 ‘가다 라는’ 의미를 획득한다는 말 이다. ) 마찬가지로 유교의 관계도 많은 가능성들과 차이를 단순하게 오륜으로 한정해서 고유한 속성이 아 닌 대립적 관계 안에서 특정 가치를 부여했다.

현대 사회에서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부부(夫婦)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 의 관계로 인간관계를 상정하 는 일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저항도 강하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사회적 관계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중 층적인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고 각 개인의 관계맺음과 거기서 파생되는 역할도 너무나 다양하다. 지금 우리 가 이루는 사회적 생태계는 공자의 시대에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가상 공간에서 수많은 관심과 취미로 모이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소셜 네트워크, 가정을 이루고 후손을 남기는 것에 대한 인식의 변화, 상하 위계적이었던 조직관계는 이익을 창출하는데 서로 도모하거나, 서로 상생하는 관계로 변화 되었다 또한. 가정 내에서도 여성이 경제력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남녀의 내외 차별이 아니라 서로 하는 일이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공감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더 이상 개인은 가족 안에서, 사회 안에서 제한되거나 자의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신과 만 나 어떠한 관계를 이루는가의 ‘상호작용(相互作用, interaction)’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게 정의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과 세계마다 개인을 다른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일면으로만 자신을 이해받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전인적인 모습의 ‘나 로’ 이해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개인들은 자신을 온전히 이 해받을 수 있는 ‘관계의 부재(不在)’와 근본적 외로움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관계 내에서의 서(恕)는 본인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나를 미룬다고 하는 상황이 다른 타자를 온전하 게 이해하는 완전함을 갖지 못한다. 또한 자신과 타자와의 ‘상호작용(相互作用’으로 정의하는 관계에서 심리 적, 사회적, 인지적, 철학적인 원리로는 ‘온전함 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만나는 접점의 이해관계마다 자신을 해석하고 정의내리는 부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전인적으로 봐 줄 수 있고 알아주는, 존재는 초월적인 신이나 전지(全知)한 존재로 소급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초월을 관 계 내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이고 수양적인 면을 내포한 서(恕)가 있어야 한다. 단순한 타인에 대한 이 해가 아니라 사람 내에 있는 천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적용하는 “천리(天理)를 담보한 서(恕)”, 즉 유 교의 이상적인 서(恕)는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성스러운 본질을 갖는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관계 안에서 가능하면 모두가 행복한 좋은 사회를 꿈꾼다 이것은. 공자의 노력 처럼 체제나 지도자를 바꾸는 것이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야 가능하다 물론. 너무 이상적이고, 오래 걸리 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그러한 무리수에 투자를 한다. 그것만이 온전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도 이미 종교생활에는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상적이고. 교리적인 차원의 윤리 와 삶 현대, 세속사회와 맞지 않는 발걸음으로 걷는 기존 종교적 보수성 안에서 많은 신앙인들은 갈등과 긴장 을 겪었다. 그리고 종교생활이 종교시설이나 회당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지며 명상과 신비, 같은 관심사 등의 무리로 기존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코로나라는 팬데믹이 우리를 성스러운 공간과 공식적 으로 결별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종교적 성인의 몫이 특정 종교적 색채 안에서 혹은 수도원이나 사당, 승가 에서 기대되지 않는다 성스러움의. 모순과 세속과의 긴장과 갈등이 복잡하게 공존하는 세계 안에서 개개인이 무가치한 가치들에서 가치 있는 것을 명확하게 그려내려는 시도들이 종교적 삶으로 자리 잡고 있다.16) 유교는 기존 종교가 갖는 보수성, 비타협성, 정형화된 인간관계 틀 등, 현대와 갈등을 갖는 모든 요소들을 가장 짙게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인들에게 유교는 화석화 된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다는 편견이 강하다. 그러나 유교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특정 장소 특정,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 다는 점에서 생활 속의 종교라 볼 수 있다. 유교는 현실과 자신이 마주하는 관계 속에서 이상적인 삶을 실현 시키고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천리를, 매 순간 실천하는 구체적인 예(禮)를 늘 작동 시킨다.

유교가 우리 시대에 맞는 관계를 다시 상정하여 개인 대 개인 개인과, 사회 인간과, 만물에 대한 관계의 프 레임을 ‘상호작용(相互作用)’에 설정하여 각기 만물이 가진 존엄성을 개체의 특성대로 이해한다면 천리를 담

 

16) McGuire, Meredith B, 『Lived Religion : faith and practice in everyday life』. (Oxford University, 2008), P.6.

보한 서(恕)를 중도(中道)에 맞게 내세울 수 있다 그렇게만. 하더라도 아직 잔재한 유교적 관계의 부작용, 서로 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유교는 현실적 관계 안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성인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려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 안에서는 세속 안에서 어떻게 성스러운 관계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여 공명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 유교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恕를 주관적 준거가 아닌 타자를 위한 진정한 배려와 이해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 간의 의사소통과 통섭을 통한 오픈된 환경이 필 요하다. 과거의 유교 공동체가 맺은 관계 안에서 천리(天理)가 내재된 서(恕)를 현대화된 관계에 적용시킨다 면 유교적 관계가 가진 경직된 위계와 서열의 부정적인 모습을 거두고 인간의 상호호혜적(相互互惠的) 관계 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論語集註]

[論語古今註]

[中庸]

1. 풍우란, 박성규옮김 (1999) 『중국철학사』, 까치.

2. 양국영 (2006) 『유교적 사유의 역사』, 황종원외 옮김, 유교문화연구소.

3. Mc Guire, Meredith B (2008) 『Lived Religion : faith and practice in everyday life』. Oxford University.

4. 정정기, 옥선화 (2011) 『조선시대 가족생활교육에서 부부유별의 의미 간재 이덕홍의 ‘부부유별도 를’ 중심으로』, 가정과 삶의 질 연구.

5. 안외순 (2010) 『茶山 丁若鏞의 관용(tolerance) 관념 : 서(恕) 개념을 중심으로』, 동방학, 19.

6. 박지혜, (2015) 『유교사상에 나타난 사회성 교육 고찰』, 열린교육연구.

7. 최용호, (2012) 『구조주의 언어학과 차이의 언어학』, 프랑스학연구 59.

8. Yong Huang (2005) 『A Copper Rule Versus the Golden Rule: A Daoist-Confucial

Proposal for Global Ethics , Philosophy East and West. 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