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5

月刊 海印 부처님 오신 달, 불교와 비불교와 반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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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달, 불교와 비불교와 반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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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해인 편집실2008년 05월 315호
부처님 오신 달, 불교와 비불교와 반불교

부처님 오신 달, 5월이다. 신록으로 치장한 산이 부드럽다. 해질녘엔 은은한 연등의 불빛이 포근하다. 누군들 저 풍경에 마음이 넓어지지 않으리. 불자가 아니어도, 부처님이 누군지 모르는 이들도 5월엔 부처님을 닮아 갈 것이다.

불기 2552년의 부처님 오신 달이 열렸다. 머언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시었다. 그것은 인류사의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다. 법등法燈은 면면히 이어져 오늘도 밝게 세상을 비추고 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중생들이 고통을 여의어 행복하게 살라는 대자대비의 간절한 염원이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신가. 부처님은 불자들의 삶의 지남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방망이가 날아든다.
“한국불교는 붓다를 모른다!”25년 전 서울에 강남포교당을 열어 도심포교에 온 힘을 쏟고 있는 성열스님이 최근 펴낸 부처님 전기 <고따마 붓다>를 통해 한국불교의 비불교·반불교적인 행태를 지적하면서“한국불교는 붓다를 모른다”고 일갈했다.
“한국불교의 위기는 불교를 믿는다면서 교주敎主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붓다의 신격화는 신심이란 이름으로 더욱더 심해졌고, 불교의 신학화는 기도라는 이름을 빌려 더욱더 심각해졌다. 붓다의 신격화는 빗나간 믿음을 낳게 되었고, 불교의 신학화는 지금이 지상에서의 종교를 죽음 저 너머의 종교로 왜곡하고 말았다”고 질타하고 있다.

성열스님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학화된 불교에서는 승려는 고따마 붓다의 뒤를 잇는 수행자가 아니라 사제司祭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오늘 이 땅의 많은 출가자들이 사제의 역할에 매달려있을 뿐 붓다의 정신으로 살려는 몸짓은 적어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한국불교의 위기이다.”“출가자들의 정신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고따마 붓다 역시 죽어버린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열 스님의 지적을 물리칠 수 없는 현실이 착잡하다. 지난 4월 12일 MBC는 ‘뉴스 후’를 통해 골프를 즐기고 고가 외제 승용차를 버젓이 모는 스님들의 행태를 고발했다. 2,30년밖에 되지 않은 사찰이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국고보조금을 받는 것과 복제품을 전시해 놓고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며칠 뒤에는 대구의 한 사찰 주지스님이 말사주지를 품신해주기로 하고 선거 때 거액의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이 보도됐다. 작년에 한 본사 주지스님이 말사주지 품신 대가로 거액을 수수하고 국고보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되는 민망한 모습을 보여줬는데도, 이런 일이 또 터지고 말았다.
총무원은 보도 직후 사실 확인에 나섰다. 사실로 확인되면 징계 등의 절차를 밟겠다고 한다. 차분하고 철저한 조사와 응분의 징계가 요청된다. MBC의‘뉴스 후’를 통한 고발에 흥분할 일이 아니다. 불교를 망신주려는 의도라며 고발 내용을 젖혀두어서는 안 된다. 골프와 고가외제 승용차를 모는 스님, 말사주지를 품신하면서 돈을 받는 스님 등은 극히 일부이다. 몇 스님들 때문에 조계종이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스님들에 대해서는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으며, 그래서 일부의 문제가 종단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비췄다.

청정승가와 부정승가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어느 집단이든지 문제는 있다문제는 제도와 현실의 부조화에서 발생하기도 하며, 타락한 몇 명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문제가 생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발전의 원동력이다.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제도는 더욱 현실화되고 미래지향적으로 가꿔진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참회를 통해 참불자로 거듭나기도 하며, 문제를 예방하는 백신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관건인데, 종단 구성원 모두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특히 총무원 등 관련 기관과 기구들이 인연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제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불교와 비불교 또는 반불교도 가려야한다. 성열 스님은 수행자도 사제로 전락했다고 개탄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상기하기를 촉구했다. 불교 안의 비불교, 반불교를 구분해 불교로 가야 한다는 염원이다.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은 불교-비불교 문제를 오래 전부터 꾸준히 제기해 왔다. <불교평론> 2001년 봄호 권두언‘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란 글을 통해 “부모은중경이나 목건련경 등은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는 대표적인 위경僞經”이라고 지적하고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위경을 위경인 줄 모르거나,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왜곡된 종교적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폐기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꼴’이 된 것이다. 한국불교의 경우 위경에 근거한 종교의례와 법사法事가 아니면 사찰운영이 안 될 지경이다. 그러나 아무리 방편이라 변명해도 이는 불교적 태도가 아니다. 불교라는 이름의 힌두교, 또는 불교라는 이름의 기독교를 불교라고 우기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동북아 대승불교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이렇다.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決擇하는 것이다.”

홍 주간은 이어 <불교평론> 2003년 봄 호에서는‘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을 통해서도 비불교적이고 반불교적인 요소들이 불교의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켰다며 불교근본주의를 통한 정체성 회복을 촉구했다. “불교는 도리어 교리 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 온 종교다. 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
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 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성열 스님과 홍사성 주간의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교의 근본과 현실불교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진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실의 비불교와 반불교가 너무 팽배한 탓일까.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부처님을 찬탄하자는 데에만 있지 않다. 부처님을 닮아가자는 서원을 더욱 다질 때 찬탄의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 봉암사 결사의 모토가‘부처님 법대로 살자!’였다. 지난해 10월 결사정신을 이어가자는 대법회를 봉행했다. 그런데 벌써 너무 오래전 일인 것처럼 아득하다. 부처님 오신 달, 아름다운 5월, 저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의 합장은‘부처님 법대로 살자!’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