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5

1110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 마성스님 글에 대한 문제제기 백승권 _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 불교포커스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마성스님 글에 대한 문제제기
백승권 _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
승인 2011.10.12 16:24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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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이 지난 10월 10일 기고한
'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와 관련해 
조계종화쟁위원회에서 반론글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전문을 게재합니다.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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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이하 선언)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은 이 선언을 기초한 화쟁위원회 입장에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판이 때론 서운하기도 하지만 이 선언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을 돌아보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이 선언의 품질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이를 통해 대중공사의 전통을 갖고 있으나 토론문화의 실종을 걱정해야 하는 불교계에 오랜만에 큰 이야기판이 벌어진 것은 뜻밖의 소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비판이 다 정당한 것은 아니다. 어떤 비판적 주장을 펼쳤을 때 그 근거는 반드시 사실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초가 부실하다면 그 주장은 그야말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격일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기 위해 타당하지 않은 근거를 동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10월10일자 <불교포커스>에 실린 <‘아쇼카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마성스님)>라는 글은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외면한 글이다. 바로잡지 않을 수 없어 글을 쓴다.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외면하는가

첫째, 원로회의 관련한 내용이다. 마성스님은 「시간에 쫓기지 말고 보다 신중히 문안을 다듬을 것과 불교계 내부의 문제와 관련해 보다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것을 주문했다」는 원로회의 관련 <불교닷컴>의 보도를 인용하며 「이제 아쇼카선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닷컴> 보도의 어떤 부분이 마성스님으로 하여금 그런 엇나간 판단을 하게 만들었는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원로회의 보고 과정에 배석했던 필자가 생각하기엔 그 자리에 참여했던 어떤 사람이 마성스님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생뚱맞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성스님은 설상가상으로 터무니없는 소설까지 쓰고 있다. 「원두스님(조계종 전 종정비서실장 겸 원로회의 사무처장)이 <현대불교> 10월 5일자 1면에 “조계종 화쟁위원회 종교평화선언과 관련, 불교도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라는 광고를 게재했다. 이 광고에 의하면, “동 선언은 조계종과 한국불교계에 대재앙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광고 때문인지, 10월 6일 개최된 제38차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종교평화선언과 관련하여, 원로의원들은 화쟁위를 대표해 취지를 설명한 원택스님에게 심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마성스님의 주장은 추측과 가정을 사실과 혼동하고 있다. 마성스님에게 되묻고 싶다. 94년 종단개혁 과정에서 멸빈을 당한 원두스님의 주장 때문에 원로회의가 선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상식을 벗어난 판단이다.

멸빈자의 비판 광고에 원로회의가 선언을 질책했다?

둘째, 명칭에 관한 내용이다. 마성스님은 「이 선언의 초안은 분명히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의 첫 번째 지적이후, 슬그머니 ‘종교평화선언’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21세기 아쇼카 선언’이라는 부제도 슬쩍 빼버렸다. 무슨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종교평화선언’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는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선 말문이 막힌다. 언제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인가? ‘종교평화선언’은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의 약칭이다. 약칭 사용을 개칭으로 둔갑시켰다. 그것도 자신의 「첫 번째 지적이후」라는 단서를 달아서. 심각한 아전인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성스님은 개칭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전제 위에서 「‘종교평화선언’이라면 그 주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합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종교평화선언’을 조계종 화쟁위에서 주도한다면, 기존의 초안 내용을 완전히 폐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작성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2002년 7월 12일 태국에서 창립된 UN 산하 ‘세계종교지도자회의(The World Council of Religious Leaders)’의 모든 문서에는 특정 종교의 고유명사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처님’, ‘연기적 세계관’, ‘인다라망’ 등과 같은 용어는 일체 들어갈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그 위에 가정의 가정을 펼친다. 이렇게 되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부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현실이 된다.

‘종교평화선언’ 약칭 사용을 개칭으로 둔갑

셋째, 사부대중토론회 관련한 내용이다. 지난 9월19일 사부대중토론회에 대해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화쟁위에서는 처음부터 초안을 고칠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변명만 늘어놓았을 뿐, 반대자의 의견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 자리는 선언에 대한 의견수렴의 자리다.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고 이후 최종안에 반영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선언을 만든 사람들이 이 선언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마성스님은 자신의 논문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반대자의 비판에 대해 논거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도 않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성하고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겠는가?

넷째, 불교계에 대한 폄훼다. 마성스님은 선언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밝힌 불교계에 대해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불교신문에 실린 각종 기고와 장영섭 기자의 칼럼을 화쟁위의 「전형적인 언론 플레이」라고 강변한다. 지난 9월22일 교구본사주지협의회의 긍정적 반응에 대해선 「“과연 참석한 19명의 교구본사 주지 스님 중에서 이 선언의 초안(9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스님이 있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라고 매도하고 있다.

선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지 않은 스님, 재가자, 불교학자들에 대해선 「전국의 스님 중에서 이 선언의 초안(9쪽)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본 분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재가자들이 승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선언을 보고 침묵하는 것은 지나친 보신주의가 아닐 수 없다.」고 주관적 잣대로 재단한다. 선언에 대해 마성스님과 같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모두 양식 있는 불제자고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무지하거나 로비를 받았거나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란 주장이다.

그러면서 「기독교계의 ‘바르 선언’은 물론 종교평화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에게 조계종 화쟁위에서 ‘아쇼카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자, 콧방귀를 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마성스님은 불교계의 선언을 부정할만한 대단한 근거로 기독교계 학자의 콧방귀를 제시하고 있다. 그 학자의 정체도 의심스럽지만, 평소 불교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논지를 편 마성스님이 그 기독계 학자의 주장에 춤을 추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긍정적 입장 가진 불교계 인사는 싸잡아 폄훼

마성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했던 첫 번째 글에서 제기했던 건설적 조언을 필자는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이 글에선 그런 자취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 사실을 왜곡하고 의도적 곡해를 되풀이하고 있다. 왜 토론하는가? 토론을 통해 토론하기 이전보다 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토론을 승패가 갈리는 게임으로 생각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상대방을 제압하고야 말겠다고 작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 토론은 실종되고 말을 도구로 삼은 싸움판만 남을 것이다. 토론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상대방의 의도나 글의 진의를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화쟁위는 거친 비판에 대해서도 그 비판의 정치적 배경, 감정적 앙금을 배제하고 그 문제제기의 정당성과 타당성만을 오롯이 판단해 반영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부디 문제제기를 해놓고 며칠도 되지 않아 왜 문제제기를 수용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양한 주장의 합리성을 비교하고 문제제기를 면밀하게 검토하기 위해선 당연히 합당한 절차와 시간이 걸리지 않겠는가. 토론도 부처님 법대로 하면 된다. 금강경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어떻게 남을 위해 설명해줄 것인가? 설명해준다는 관념에 집착하지 말고 흔들림 없이 설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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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관련기사icon‘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和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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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위가 2011-11-05 00:44:08


불자가 스님을 향해
언어폭력을 행하는 거 같음
좋은 표현도 많을 텐데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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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 2011-10-22 12:43:19


화쟁위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면
핵심적인 분들이 모여서 토론하되 도법스님 등의 화쟁위와 마성스님 법응스님 이학종기자 등이 모여서 끝장토론 하면서 인터넷으로 생중계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마음은 없는 것 같군요.
종회나 원로위원들만 찬성하면 된다는 것인지 뒤로 작업하는 것 같군요.
진리를 찾는 종교가 이렇게 뒤꿍꿍이 같은 짓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영원히 불교의 힌두마구니 같은 소리 듣지 않으려면 공정한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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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화 2011-10-21 10:36:28


그대가 재가불자가 인가?
부처님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지은바 대로 받는대고 하셨으니,
만약 내가 구업은 지었다면 그것은 내가 그 업대로 받게 될 것이오.
그대 또한 재가불자임을 밝히며 이렇듯 구업을 짓고 있으니
당연히 그 업은 그대가 받으면 될 것이고...

건전한 토론은 상호 이해와 존중이 필요함을 내 어찌 모르겠소?
내 언설이 그대가 보기에
"건방지고 안하무인"하고, "가당찮은 헛소리"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그대 생각이고 견해이니 내 뭐라 탓할 말은 없겠으나,
그대야 말로 감정적으로 상대를 토론의 "토"자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으로
무조건 비방하고 매도하고 있음을 깊이 반성해야 될 듯 싶소!
아무튼 우리 모두 구업을 반성하고 참회 합시다....

나무석가 모니불..._()_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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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 2011-10-20 23:19:16


스님...스님 글이야말로 "건방지고 안하무인"이네요.
백승권 국장의 글은 토론을 하려면 사실에 기초해 논의하자는 이야기죠.
"가당찮은 헛소리"는 그만하시고, 사실에 기초한 토론을 하는데 집중하시죠.
괜한 추측과 감정으로 좋은 토론거리를 편가르기하지 마시고요....
재가불자들은 감히 토론도 못하겠네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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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2011-10-17 23:20:06


조계종 새총무원장이 젊어서 개혁적으로 일 할 것을 기대한다고 한 것이 엊그제인데, 어떻게 자승이란 자는 하는 일이 불자가 원하지 않는, 개독들이 원하는 일만 하는지?
자승은 중옷 벗고 조계종에서 꺼져라! 너의 무리들까지 데리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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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처럼 2011-10-17 21:09:15


한때,색깔만 입히면 만사여의하던 때가 있었다. 용공,반미,반정부,의식화.....
그 수법을 악용한는 사람이 있다.
멸빈자가.......근본주의자가........
멸빈인사가운데는 진실한 불자가 있고, 승승장구하는 자중엔 은처승 폭력승도 있다.
멸빈어쩌고, 근본주의 어쩌고 하는 짓은 구태일 뿐이다.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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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사 단현 2011-10-17 13:17:08


화쟁위가 불교를 망치고 있다
도법스님과 어용교수들 기독교목사 등이 규합되어 만든 종교평화선언
일부 멋모르는 스님들이 극찬하면서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진상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결국 신이나 기복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부처님 가르침이
믿기만 하면 복 준다는 기독교의 잘못된 면만 쫓아 가다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도법스님 조성택교수 등이 지난 1월 27일 기독교의 목사 이찬수를 화쟁위 기획위원으로 영입해서 그들과 짜고 종교평화선언을 만든 것입니다.

불교와 타종교가 다르지 않다’
기독교도 진리다,
불교가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겠다,
타종교인에게는 전법도 하지않겠다,
제발 앞으로는 잘 지내자는 성명을 발표하는 항복선언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뱃고 있습니다.
이천수 목사가 불러주는 그대로 받아 적으셨군요.

이런 종교평화선언을 도대체 왜 하는 것입니까?
할일이 그렇게 없습니까?
화쟁의에서 하는게 도대체 뭡니까?
자승이 자신의 방패막이로 아주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 몇 스님들과 어용교수들을 모아 만든 것이 화쟁위 아니던가요?

1년에 몇십억 원 보시가 나오는 강남 제일 사찰 통장을 재가자들의 모임인 신도회에 되돌려 주신 명진스님을 잘라내기 위해서
뭔가 합의를 도출해 낼 것처럼 하다가 결국 봉은사 직영하고 명진스님을 강원도로 내치는 명분만 만들어 주신 분들이 화쟁위 아니었던가요?

그런 못된 짓은
누구든지 사찰 금고열쇠를 재가자에게 내 준 주지들은 무조건 강퇴시킨다는 확실한 본보기로 명진스님 한 분 내쳐서 본을 보였으면 충분합니다.

자승스님.
부처님 뵙기 부끄럽고 재가자 앞에 민망하지도 않습니까?
이제 또 다시 우리 한국 불교를 망치는 짓은 제발 그만두십시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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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사 단현 2011-10-15 15:44:59


삼법인이 불교의 근간입니다.
제법이 무아인데 무슨 참나 진아 주인공 하나 유식 전오식 말나식 자성 불성 영혼이 가능할까요?
이 가운데 단 하나라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가 있나요?
왜 힌두교 아트만을 가져와서 갖은 소리로 영혼이나 영원히 존속하는 절대개체를 만들려고 합니까?
불성 본성을 단정하니 여호와 성령이 비슷하거나 궁극이 같다는 소릴 하는 것입니다.
근본을 벗어났다면 불교라고 하지 말든지...

천주교와 개신교는 의식만 다를 뿐 교리는 100% 같아도 공존하면서도 싸웁니다.
아일랜드와 영국은 성공회와 개신교간에도 100년 이상 전쟁을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근본불교와 대승불교가 싸울 일이야 있겠습니까만 아뢰야식 여래장 불성 영혼사상은 힌두교이지 불교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불교기초교리조차 모르는 선방에만 들어앉아 있던 양반들인지, 도통 말귀가 없어요.
그 속에 불교기본교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허황된 소리는 차마 쓸 수 없을을 거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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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화 2011-10-14 23:44:11


화쟁위 사무국장이면 삼보에 귀의한 불자의 한 사람일진데.
어찌 어투가 이리도 건방지고 안하무인격인가?
그리고 마성스님이 지적하고 문제제기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과 해명없이
말꼬리만을 트집잡아 무조건 마성스님을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몰아부치며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를 해대는가?
그대가 생각하는 불교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사견으로 부정하셨던 유일신교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타 종교인에 대한 개종을 목적으로 한 불법의 전교를 포기한다는 그대들의 헛된 망상과 행동들만이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는 참된 불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만약에 그대가 마성스님을 불교의 근본주의자라고 몰아부치면,
그동안 여러 매채와 토론회를 통해서 이번 선언에 대해 문제제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
법응스님, 이학종 기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 역시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몰아부칠셈인가?
나 또한 수행승으로써 법응스님, 마성스님, 이학종 기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당연히 이번 선언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까닭에 당장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만약에 이번 선언을 제대로 읽어보고 분석헤 보지도 않고 무조건 화쟁위편을 들어
찬성하는 출가자나 재가자가 있다면 한국불교 역사에 크난큰 과오를 범하는 것인 줄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_()_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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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書 2011-10-14 22:10:58


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불교에도 근본주의자가 있을까. 이제까지 기독교근본주의자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는데, 이제 새로운 용어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그런 불교근본주의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화쟁위 실무자의 행보를 보면

최근 교계인터넷신문에서 마성스님이 ‘21세기 아쇼카선언’에 대하여 여러차례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 중에 가장 최근에 반론한 것이 ‘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는데,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 되었다.

반론자는 화쟁위에서 일하는 ‘백승권사무국장’으로 되어 있다. 화쟁위의 실무를 전담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백사무국장의 행보에 대하여 인터넷검색을 하여 보았더니 화쟁위의 활동이 있는 곳에 반드시 그의 발언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백국장이 한 가장 최근의 발언은 아쇼카 선언과 관련된 것으로서 “시민사회, 학자 등 다양한 견해를 듣고 선언을 발전시킬 선언의 완성안이 돌출되길 기대한다(BTN뉴스, 2011-09-22)”라고 말함으로서 그가 실무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뿐만아니라 화쟁위가 활동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예로서 작년 봉은사 사태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기 위해 면담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상호 의견을 나누고자 자리가 마련됐다(주간불교)”라고 설명하였고, 금년 초 김진숙 한진중 노조위원의 농성에 관하여 화쟁위원장이 노동부를 방문하였을 때 푸대접 받은 것에 대하여 “전경련, 상공회의소, 민노총, 한국노총 등은 성의있게 조치를 취하는데 노동부만 거절했다”면서 “정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 무성의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그가 실질적으로 화쟁위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불교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런 백국장이 마성스님의 반론에 대하여 재반론 형식을 글을 같은 매체에 남겼는데, 그가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마성스님은 불교계의 선언을 부정할만한 대단한 근거로 기독교계 학자의 콧방귀를 제시하고 있다. 그 학자의 정체도 의심스럽지만, 평소 불교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논지를 편 마성스님이 그 기독계 학자의 주장에 춤을 추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백승권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불교포커스 2011-10-12)



마성스님이 제기한 ‘아쇼카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에 대한 글에서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기 식의 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불교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에 반론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불교 근본주의자로 보는 시각을 갖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화쟁위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지난 해 총무원장 직속으로 출범된 조직이다. 주로 종단과 사회 현안을 불교의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다루고 그 해법을 찾자는 취지로 발족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단과 사회문제가 발생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갔는데, 작년의 경우 ‘봉은사 사태’와 ‘사대강사업’, 금년의 경우 ‘한진중노조사태’에 관여 하였고, 현재 가장 논란거리인 21세기 아쇼카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선언을 발표하면서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 할 수 있도록 전격적으로 발표 한 것에 대하여 일종의 ‘불교쿠데타’이자 사회와 기독교에 대한 ‘언론플레이’임을 여러차례 블로그에 글로서 올린 바 있다. 더구나 충격적인 사실은 선언문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기독교 ‘목사’도 참여 하였다는 사실이다.

지난 1월에 구성된 화쟁의 내부의 ‘기획위원회’에 기독교신학자 ‘이찬수목사’가 명단으로 올라간 것을 교계 인터넷신문의 기사에서 확인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더 놀란 것은 그 목사가 불교평론에 발표한 글과 이번 선언문의 내용이 너무나 흡사한 내용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쟁위에서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한 해명은 없고 마성스님이 제기한 글에대하여 사실에 기초한다는 명목으로 글의 내용 중에 일부를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기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화쟁위가 생각하는 불교근본주의자

이처럼 화쟁위의 선언문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는데, 대체 화쟁위가 생각하는 불교근본주의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같은 화쟁위 멤버인 조성택교수가 남긴 글에서 잘 설명된 것으로 본다.



기독교가 그러니 우리 또한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패배주의자의 넋두리일 것이다. 민족불교를 얘기하고 한반도에서 17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불교가 먼저 올바른 포교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궁금하다. 이 또한 ‘싸우면서 닮아가는“ 또 다른 모습일까 걱정스럽다.

(조성택교수,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 법보신문 2011.09.15)



위 조성택 교수의 글을 보면 화쟁위의 선언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의가 잘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불교근본주의자들을 기독교근본주의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문자에 집착하여 바이블을 곧이 곧대로 믿고 실천함으로서 갈등과 긴장을 야기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서 불교근본주의자들 역시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쟁위 연기관을 보면

부처님의 법대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처럼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다. 또 포교를 위하여 남을 귀찮게 한다든가 심지어 총과 칼로서 개종을 강요한 적도 없다.

부처님의 법대로 사는 불자들에게 “싸움하면서 닮아가는가”라며 있지도 않은 표현을 사용하여 비판하였다면, 이는 부처님을 능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능멸스런 표현은 선언문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선언문의 표기된 다음과 같은 연기관이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이것이 화쟁위에서 만든 연기관에 대한 것이다. 이 연기관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내용중에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는 표현에서 주어를 바꾸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놀라운 내용으로 바뀌고 만다. 바로 이런 연기관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자신의 글 말미에 “누구를 위한 선언인가”라고 깊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로버트 바스웰(Robert Buswell)교수의 특강에서

선언문에 실려 있는 연기관은 매우 생소하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연기관이다. 이에 대하여 대승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보통불자가 보기에 국적불명의 연기관이라고 글을 쓴 바 있는데, 사실 국적이 있는 연기관임을 알았다. 그것은 불교TV 사이트에서 본 ‘로버트 바스웰(Robert Buswell)교수’의 특강(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8회 )을 듣고 나서부터이다.

바스웰 교수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UCLA교수이다. 현재 동국대 학술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바스웰 교수는 한 때 출가수행자로서 삶을 산 적이 있다고 한다.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이 방장으로 있을 때 외국인 스님으로 약 5년간 살았는데 외국인 1세대 출가수행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바스웰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면 아쇼카선언문에 실려 있는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알 수 있었다.



중국에서 불교가 공격을 받은 이유

중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 된 것은 후한시대 68년에 백마사가 건립되고 나서부터이다. 이후 중국인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불교는 몇 백년이 지나지 않아 ‘비판’ 받게 된다. 이유는 “불교가 중국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불교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으로서 중국인들의 민족적 가치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불교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써 먹는 보편적인 방식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중국의 경우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유교와 도교라는 고도의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된 이국종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문화적 우월감과 자주성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고 본다.

또한 불교의 가치관이 중국인들의 현세적 사고와 맞지 않은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경우 세간의 일 보다 출세간적 가치를 더 크게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점이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현실주의자들과 많은 상충을 일으킨것이다.



중국의 3무 1종 법난

그 결과 여려차례 법난이 일어 났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 3무 1종 법난’이라 한다.



중국의 3무1종의 의한 법난

No
3무 1종
법난 내용

1
북위 제3대 태무제

(423~452년 )법난
440년에는 공식적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명령을 내려 많은 승려들을 살해하고, 사원, 불상, 경전 등을 불살라 버림

2
북주의 무제

(560~578년)법난
무제는 유교를 신봉하여 불교와 도교를 폐지하고 많은 승려를 환속시킴

3
당의 무종

(841~845 )법난
도교를 신봉한 무제에 의해 외래종교인 불교에 대한 비호감으로

4
후주의 세종

( 954~956)법난
국가의 재정난과 승려들의 풍기문란에 대처하기 위해





이 중 두 번째인 북주의 ‘무제’에 의한 법난이 561년에 일어났는데, 이 때 유교를 신봉하던 무제에 의하여 수 천명의 승려가 승복을 벗었고 또 환속하기를 강요 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수백개의 사찰을 파괴 하였으며, 수 천개의 불상, 특히 금이나 동등으로 만들어진 불상을 녹여 황실재산으로 귀속시켰다.



불교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

이렇게 불교가 공격당하게 되자 불교계는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대응책을 찾아야 했다. 일종의 ‘살아남기위한’ 전략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중국에서 천태종, 선종, 화엄종과 같은 토착적인 불교전통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토착불교전통들의 특징은 중국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반영하여 중국인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불교로 발전하였다. 그래야 이국의 종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불교에서 말하는 출세간적 전통에 대하여 무가치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 살아 남기 위한 대응법이라고 볼 수 있다.또 성불은 영겁이 걸린다는 인도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지금 살아있는 이 세상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종파들은 어떻게 진화해 갔을까.



인도불교와 등을 돌리고

북주의 무제에 의한 561년의 훼불사건이 나기 전까지 중국의 종파들은 대부분 인도의 유사한 종파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중국인들이 불교를 인도적 관점을 통하여 보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토착 종파들이 생겨 나면서 이들은 인도적으로 해석된 불교와 ‘등을 돌리고’ 만다. 중국인들이 불교를 이해하는 스스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더 이상 인도에서 발생한 주석서라는 중간매체에 의존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인도의 사상체계에서 등을 돌리고 직접경전을 읽어내어 중국만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만든다.그래서 이들 토착종교들은 주요경전에 대하여 ‘재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것중의 하나가 ‘화엄경’이다.

이렇게 경전에 대하여 창조적 재해석을 통하여 교리적 권위도 확보하고 동시에 중국의 문화와 현실이 반영된 새로운 해석도 개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해석학은 인도학파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중국인들만의 독특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해석방법에 있어서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단일 촉매제를 찾아서

보살도라 불리우는 인도불교의 여러 수행단계들을 ‘압축’시켜 좀 더 단순한 수행체계를 만들필요가 생긴 것이다. 중국인들은 갑작스런 깨달음, 소위 ‘돈오’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수행은 즉각적, 순간적 경험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지난한 수행과정 대신 깨달음의 통찰을 가져다 줄 ‘단일 촉매제’를 찾아 나섰다. 중국인들은 ‘이것만’ 찾으면 나머지는 쉽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것이란 무엇일까.

먼저 보살도에 대하여 탈신화화하였다. 이는 52단계에 이르는 수행법을 압축하여 하나의 단계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만 하면 즉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단일 수행법은 없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 것이다. 이것이 많은 토착불교종파의 목표이었다. 무수한 생을 거치지 않고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화엄종에서 깨달음이란?

그 방법은 “깨달음은 새로이 성취된다기보다는 원래 타고난 것을 발견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깨달은 존재가 아니라는 잘못된 믿음만 제거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토착불교종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목표이었고, 특히 화엄종이 이런 특성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화엄종의 소의 경전인 화엄경은 인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다수의 개별경전을 대승이라는 사상아래 일종의 문집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화엄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로스웰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십지품과 입법계품과 같은 몇몇 산스크리트 원전이 있는 품이 있긴 하지만 ‘중앙아시아’ 어딘가에서 편찬된 것으로 본다.

이처럼 화엄경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에서 화엄종이 발생하였는데, 화엄종에서는 이 화엄경에 대하여 ‘급진적인’ 재해석을 하게 된다. 화엄경의 상징과 비유를 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중국적 사상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 통일신라의 고승 의상대사도 참여하게 된다.



화엄경에 대한 급진적 재해석

화엄종에서는 인도사상가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 세상을 더럽고, 타락하고, 무상하고, 고통에 가득 찼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 존재 자체로 깨달음을 현실로 구현하고 있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면적, 다층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힌 그믈을 형성하며, 그 그믈 안에서 각 부분들은 모두 연결되어 거대하고 완전한 전체, 일체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개념의 근간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된 상입, 혹은 완전한 융합, 즉 원융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근본개념은 이 상호관계가 개별성을 정의한다는 갓이다. 개별적 존재가 각각 고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상호 작용을 통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지는 상호관계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산물로 보는 것이다.

대체 이런 사상은 어떤 사상을 근거로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인도의 ‘공’에 대한 통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인과에 대한 화엄의 새로운 정의는



중론학파의 공사상에 따르면 만물에 고정된 타고난 성품은 없다는 것이다. 만물에 고정된 성품이 없으니 맺을 수 있는 상호관계의 수는 무한대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맺는 관계의 산물인 것으로 본다. 마치 집에 가면 아버지라 부르고, 회사가면 사장님이라고 부르듯이 어느 하나가 우리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을 정의하는 것은 매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이 광대한 상호관계의 그믈로 보는 것이다. 화엄의 관점에서 보면 공성의 의미는 만물은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체론적으로 보는 관점을 인도에서 강조된 인과와 결합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까. 이에 대하여 로스웰교수는 “각 개인은 세상의 다른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또 그들에 의해 창조된다”고 말하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와 연결된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인과는 일방이 아니라 무한대의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에 대한 화엄의 새로운 정의라고 한다. 그래서 인과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우주는 스스로를 재창조하며 만물이 서로를 창조한다”는것이다.



‘벽돌쌓기’식의 수행을 거부하고

이러한 인과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수행에 대해서도 새로운 개념을 낳게 되는데, 그것은 “발심할 때 이미 깨달음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깨닫겠다고 발심을 하는 자체가 완벽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의 시작과 끝은 똑 같다고 말한다. 보살도 52단계 중에 어떤 단계라도 성취되면 나머지 51개의 단계가 모두 성취 된 것과 같다는 말이다. 하나만 제대로 하면 , 그 하나가 깨달음의 발심이라고 할지라도 수행의 전 단계를 완성한 것과 같다는 논리이다. 이를 바로 내안에 있는 ‘깨달음의 잠재력을 깨닫는 순간’으로 설명한다.

이런 개념은 매우 혁명적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먼 미래의 수행의 전과정을 미루면서 까지 불과의 증득을 미루고 육바라밀을 닦아 성불을 미루면서 까지 육바라밀과 52단계 수행과정을 거쳐야 되지만 화엄종의 화엄경에 대한 재해석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에서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여러 단계를 거치는 것도 화엄종에서는 관심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보살도는 ‘벽돌쌓기’식의 수행이기 때문에 현실에 바탕을 둔 중국의 토착불교의 목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증득이 아니라 수행한다는 자체가 목표라고 버스웰 교수는 설명한다.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연기관

로스웰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의 토착불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태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몇 차례 법난을 겪고 난 중국불교가 중국의 문화에 중국인들의 현세에 대한 갈망을 무시할 수 없어서 인도불교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경전에 대한 재해석으로 인한 영향이 크다. 특히 화엄경을 재해석한 화엄종학파의 경우 수행이나 깨달음에 대한 개념도 인도불교와 전혀 다르게 개념을 정립하였다. 이런 다른 모습은 ‘연기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으로 대표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등 불교의 핵심교리는 모두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에서 시작되는데,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연기법은 이와 다르다. 그것을 로스웰 교수는 ‘법계연기’로 설명한다.

로스웰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화엄종의 인과에 대한 설명은 매우 독특하다고 한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를 이용하여 현실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인과에 대한 설명은 초기불교와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인과가 ‘선형적으로’ 설명된다. 근본원인이 있고 부수적인 조건들과 합쳐져서 결과가 나오는 식이다. 주변조건이 갖추어 지면 원인이 과보를 맺는 것이다. 씨앗을 비유로 들 수 있다.

인도인들은 이 인과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만물은 모든 조건이 들어 맞아야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조건들이 제거되면 모든 만물이 소멸할 것이며 따라서 만물이 무상한다고 믿는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인과에 대한 개념, 성기(性起)

하지만 대승불교의 경우 선형적인 인과의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중론학파의 경우 인과가 ‘공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공하다”라는 말은 “만물에 타고난 고정된 본성이 없다”라는 말과 같다. 이를 ‘무자성’이라 한다. 그런데 만물이 무자성이다 보니 역설적으로 여러가지 형태를 띠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공성이 인과를 정의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 매우 급진적인 개념의 진화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인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말한다. 깨달음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과에 대한 개념을 중국에서는 ‘성기(性起)’라고 불렀다.

여기서 성은 불성을 의미한다. 이 성은 공성, 여여, 불성등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이런 불성은 중생의 마음이 깨달은 부처의 마음과 똑같다고 ‘정당화’하는데 사용하였다고 버스웰교수는 말한다.

이는 인과가 구원론적 측면에서 재해석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론이란 불교에서 해탈의 과정에 대한 이론을 말한다. 왜 이렇게 보았을까. 그것은 유정이라는 특질자체가 불성의 ‘현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처가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만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독립된 존재로 우리 주변의 만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착각만 내려 놓는다면, 우리의 불성이 회복되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본 모습이 부처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성기의 개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영겁의 세월동안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 마음이 지닌 본연의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정을 지니고 의식이 있는 매 순간마다 우리의 불성이 구현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이것이 전부이고, 이것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화쟁위와 연기관과 법계연기

그런데 화엄종에서 다루는 연기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그것을 ‘법계연기’라 하는데, 법계자체가 연기라는 말이다. 사사무애적 관점, 즉 단일현상과 다수현상간의 상호침투의 관점에서 인과를 보는 것을 말한다. 단일현상과 다수현상이 동시에 서로를 창조하고 서로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는 더 이상 선형이 아니고, 인과는 다층적인 것이 되고 만다.

하나가 이것을 만들고, 이것이 저것을 만들고, 저것이 또 이것을 만들며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서로를 만들어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단일한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연기관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관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조계종 화쟁위의 아쇼카선언문을 보면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화엄종의 연기관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연기법이 아닌 토착화된 중국식 불교의 연기관에 따른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기독교와 불교를 구분하여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고, 서로가 서로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불교근본주의자는 나쁜 것일까

이런 논점에 대하여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비판하면 불교근본주의자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화쟁위 사무국장인 백승권 국장의 말대로 “불교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죄악시 하고 있는 화쟁위의 분위기로 보아서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초기불교신봉자들은 모두 불교근본주의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문자에 집착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와 호전적인 ‘이슬람원리주의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불교펑론가 홍사성님은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불교평론에서 기술하였다.



불교는 도리어 교리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온 종교다. 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 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 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홍사성 위원,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 불교평론 2003)



유일신교의 근본주의가 말도 안되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교리에 집착하여 이제까지 범죄행위를 저질러 왔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 기독교와 반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멀리하여 비불교적이고 반불교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어서 본질과 멀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에 근거한 근본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근본주의는 멀리하면 할 수록 좋지만, 불교의 근본주의는 가까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슬픈 역사적 사실을 알고

처음 아쇼카선언의 연기관을 보았을 때 매우 생소하였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와 같은 연기관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연기관의 주어 부분에 불교와 기독교를 대입하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는 놀라운 결론이 도출되었는데, 과연 이런 정체불명의 연기관이 어디서 유래 하였는지 궁금하였다.

이런 국적불명의 연기관에 대하여 의문을 품던중 마침 불교tv사이트에서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보게 되었다. 그 강의로 인하여 그런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슬픈’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쇼카에서 사용한 연기관은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법계연기’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변형된’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중국에서 몇 차례에 걸친 법난등으로 인하여 불교가 심하게 탄압을 받아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궁여지책이 아쇼카선언문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가 득세하는 한국적 현실에서 조계종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아마도 후세사람들은 한국불교에 슬픈역사가 있었다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부처님을 능멸한 화쟁위

화엄교학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받아들여져 현재 문제되고 있는 아쇼카선언문의 열린진리관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열린진리관에 따르면 유일신교의 교리에 대해서 열린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에게는 ‘닫힌 자세’로 일관하여 불교근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조성택교수의 글에서 “싸우면서 닮아간다”든가 “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 가는가”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또 화쟁위의 실무자인 백승권 사무국장은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논지를 편 마성스님”이라는 표현을 함으로서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를 불교근본주의자로 ‘폄훼’ 하면서 부처님을 ‘능멸’하였다. 정말 불교근본주의자는 위험하고 나쁜 사상을 가진 자들일까.



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홍사성님의 글에 따르면 “불교 근본주의는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지 말장난이나 하는 희론(戱論)이 목적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 졌을 때 불교가 왜곡되고 변질되었고, 그에 따라 자기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온갖 요란한 수사와 변명으로 호도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 중의 하나가 21세기 아쇼카쇼선언에 사용된 연기관일 것이다.

길을 잃고 헤메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그 방법은 하나 뿐이다. 처음으로 돌아 가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또 목적이 어디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왜곡되어 있다면 바로 잡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근본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2011-10-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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