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인가, 문참극인가
박창진 | 5016park@paran.com
입력 : 2014년 06월 24일 (화) 17: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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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문창극 총리후보자가 자진사퇴를 했다. 그의 온누리교회 내 강의 내용으로 온 나라가 시끌법적했다. 한쪽에서는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강의 내용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지지를 보냈다. 조선일보에 ‘문창극 후보의 역사관은 신민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사관이다’라고 광고를 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복음주의 신학교수와 목사들이 이름을 올렸다. 한쪽에서는 식민사관의 발로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교회를 해친다고, 그것은 참극이기에 문참극이라고 비난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추구한다. 누군가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그 원리에 부합된다면 신자로서 마땅히 지지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사회에서는 비난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회의 비난이 두려워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양쪽의 주장을 접하면서 지지하는 입장에서 대해 좀 상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입장이 정당하다면 문창극의 승으로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창극의 입장
첫째는 그의 강의의 일부분만을 편집한 내용이 아니라 전부를 듣고 판단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의 전체의 맥락에서 그 말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알고 평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옳다. 그의 강의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셨고 지금의 번영을 주셨으며 이제 우리 민족은 일본을 넘어서서 세계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 역사관으로 볼 때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분이 그 뜻을 따라 역사를 진행해 가신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어떤 인간 역사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나 한국동란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여러 나라들에 대한 흥망성쇠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제의 강점 자체가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뜻을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것은 죄악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선으로 바꾸어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셨으니 요셉이 깨닫고 감사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징계하셨다.
문참극이라는 입장
문창극의 입장에 대해 평가하여야 한다. 성경적으로 정당하다면 문참극이라고 조롱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일반 사회인들은 그렇게 조롱하더라도 신자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성경적으로 정당한데도 조롱하는 자리에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인 것이다.
1. 강의의 맥락
첫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옳다. 그렇다면 그의 강의의 맥락은 문제가 없는가? 그의 강의는 철저한 번영신학으로 점철되어 있다. 우리 민족의 번영을 이끌어주시는 분인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한 국가의 번영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조선인에 대해 한마디로 게으르다는 평가와 일제 병합이 연결되고 있다. 후자는 전자에 대한 징계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일제 병합이 근대화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다.
한국동란이 한국을 떠나는 미국을 붙잡고 한국이 미국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역사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형적인 사대주의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깨뜨려도 된다거나 깨뜨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최선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생각하여서도 안 된다.
2. 신학의 문제
핵심은 둘째 부분이다. 신학의 문제이다. 칼뱅은 그의 섭리론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앞에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간 역사에 대해선 성경이 간간히 예정이라고 말씀하는 부분 등이 그 근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정을 이루심에 있어서 악한 자를 사용하신다고 하였다. 신학계에서는 허용적 작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악을 주도하신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나님은 당연히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표현이 너무나 거슬리겠지만 신자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역사를 주관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도 함께 필요하다. 직간접적인 개입하심과 내버려두심이라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에는 전자에 해당된다.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전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말씀하는 내용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것이다. 앞에 언급된 요셉이나 이스라엘이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거나 심판으로 멸망하는 내용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백성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경우이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도 이스라엘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전혀 무관한 나라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중국에 대한 기술이 성경에 없는 것과 같다.
후자는 그 이외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시 81: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인용한 내용은 개인에 관한 것인데, 역사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직간접적인 개입하심이 없다. 그 일이 생겨나도록 하나님께서 직간접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전적인 인간의 자유 의지가 발현된 것일 뿐이다.
일제 병합은 내버려두심의 하나님의 역사에 해당된다. 일제가 제국주의의 욕심으로 이웃 나라를 강제로 침략하여 국권을 빼앗은 것이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악한 자에 의해 그 일이 발생하였다. http://c.hani.co.kr/hantoma/2514629의 내용에 대해 나는 동의한다. 대한민국 또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자 그 일이 발생하였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내버려두심이라는 말은 이미 정해진 법칙이 전제되고 그 법칙을 따라 진행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전제된 법칙이다. 그 법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해당된다.
큰 그림으로 보면 내버려두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표현에는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개입하심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문 후보자의 강의 내용은 여기에 해당된다.
신학은 성경 해석의 문제이다. 칼뱅의 섭리론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결과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미리 정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예정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연결된 것이다. 일반 역사는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속한다. 자연법칙과 자유 의지가 그대로 발현된다.
일제 병합은 일제의 욕심을 따른 만행이었을 뿐이다. 그 만행으로 인해 이 민족이 너무나도 큰 고통을 겪었다. 지금도 그 연정선상에서 대한민국호가 나아가고 있다. 일제부역자들이 아무런 심판을 받지 않고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그 권력을 그대로 휘두르고 있다. 근대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하고 우민화를 통해 그 권력을 계속적으로 유지해가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친일의 역사를 정확하게 밝히고 심판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후손들에 대해 직접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여야 하겠지만 나는 모든 공직을 빼앗고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에 귀속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역사를 바로세우는 기초 작업이다. 그리고 근대사를 재정립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민주 사회의 깨어있는 시민으로 자라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일제 병합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늦어졌을 수도 있다. 아니 일제의 욕심으로 인해 더 늦어졌다. 외국 문물을 더 많이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근대화가 바람직하며 그것이 일제 병합보다 더 시기를 단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제 병합이 근대화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 의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근대화에 대해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수탈과 많은 연약한 백성들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전쟁에 내몰리고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는 등의 악행을 생각하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운운할 일이 아닌 것이다.
신앙이 바른 지식을 벗어나면 폭력이 되며 하나님을 망령되게 한다.
3. 표면적인 성경 읽기의 오류
셋째는 표면적인 성경 읽기의 오류이다. 문 후보자나 지지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나 그 가운에 어떤 한 백성과 관련된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것을 일제 병합이나 한국동란에 그대로 대입해도 되는가? 전혀 아니다. 우리 민족,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나 인도하심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요셉의 경우에는 형들을 만나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면서 형들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제 병합에 대입하면 일본을 원망하지 않고 병합에 대한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 이전에 아예 요구조차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어떤 이들은 죽고 어떤 이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로 살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하박국은 힘든 과정을 거쳐 전적으로 수용하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어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리라고 고백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제 병합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야 하는가? 전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이 차고 돌아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독립 운동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고 그 기한을 임의로 줄이려는 것은 불신앙이다. 일제의 강제점령에서 해방되기 이전에 그 많은 독립 운동들은 잘못된 것인가? 전혀 아니다.
성경을 표면적으로 읽고서 아무 사건에나 대입시키면 이처럼 많은 문제들이 야기된다. 이 일에 대처하는 한국교회의 한쪽 모습을 보면 딱 이 수준이다. 성경을 표면적으로 읽고 과거의 잘못된 주장임에도 그냥 답습하는 상태이다.
현대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칼뱅은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에는 자연히 죄의 문제가 뒤따른다. 죄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냐의 문제이다. 또한 자연재해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냐는 문제도 뒤따른다.
그는 태양열과 시체의 악취를 비유하여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였다. 시체의 악취가 태양 빛 때문이지만 아무도 그 빛으로부터 악취가 나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악의 실질과 죄책은 악한 사람들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악인들의 사용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어떤 책임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비유와 그 적용은 적절하지 못하다. “~ 때문에”와 “~에도 불구하고”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태양 빛 때문에 시체의 악취가 나는 것이 아니다. 태양 빛에도 불구하고 시체의 악취가 나는 것이다. 생명이 없기에 그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악취가 나는 것이지 빛 때문에 악취가 나는 것이 아니다.
범죄나 불순종은 하나님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있게 된다. 범죄와 불순종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옳지 않다. 범죄와 불순종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지 않기를 원하셨는데, 인간이 자기 욕심에 끌려 범죄하는 것이다.
문창극의 입장에 있는 이들은 앞에 기술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말하여도 수긍하지 않는다. 우주의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칼뱅의 관점을 따라 지금까지의 생각을 고수할 뿐이다.
그들을 보면 예수님 당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떠오른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비록 율법을 말하지만 그 율법에 대한 조상들의 이해를 더 앞세웠다.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지적하였는데,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였다.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굳건하게 확신하면서 말이다. 조상들의 전통이 모두 잘못은 아니었다. 옳은 내용도 있었다. 그것을 분별하고 잘못된 것을 버려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칼뱅을 추종하는 이들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칼뱅의 주장은 옳은 내용과 잘못된 내용이 함께 있다. 분별하여야 한다. 옳은 내용은 더 발전시키고 잘못된 내용은 거부하여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아니다. 칼뱅의 잘못된 주장을 밝히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인 것처럼 반응한다. 이는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나가면서
문창극인가 아니면 문참극인가. 성경을 바르게 읽으면 답은 명백하다. 문참극이다. 이게 한국교회 주류로 이야기되는 이들의 맨얼굴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자랑한다. 참극임에도 참극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알려주어도 들을 귀가 없다. 이제까지 그렇게 들어왔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그냥 따를 뿐이다.
성경을 잘못 읽고서 생긴 잘못된 전통의 문제는 심각하다. 지금과 같은 일이 생겨난다. 사회인들에게 조롱을 받는다. “그런 하나님이라면...”이라는 조롱이다. 물론 모든 조롱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의 조롱은 옳다. 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강화되고 복음의 문이 막히거나 좁혀진다. 문 후보자를 지지하는 목사들은 거기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사건은 진지하게 우리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고 그러한 이해의 토대 위에 신자들이 바른 생각을 하도록 섬기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 현실이어서 안타깝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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