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9

동양포럼/ 불교에서의 존엄 개념 < 동양포럼 <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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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의 존엄 개념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1.01.24 19:18


기타지마 기신 욧카이치대학(四日市大學) 명예교수


[동양일보]시작하며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씨가 백인경찰에 의해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인종적 만행의 영상이 SNS에 의해 전 세계에 발신되자, 인종차별반대 운동이 1960년대의 ‘공민권운동’에 버금갈 정도로 전개되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일본 등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BLM운동이 전 세계에 퍼진 것은 그 근원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물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공민권운동을 지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종차별에 저항한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의 버스 보이콧 운동이 계기가 되어, 1956년에 ‘앨라바마에서의 버스 인종분리는 위헌이다’고 하는 최고판결이 내려진 직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흑인은 사고를 정지시켜 복종하고 감각을 둔화시켜 현상에 만족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한 상태에서, 존엄과 사명이 있음을 새롭게 실감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몽고메리의 새로운 흑인은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자존심을 새롭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획득하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고 있었다.”

(山本伸 外 共編, <ブラック・ライブズ・スタディーズ>, 東京: 三月社, 2020, 92쪽)



1963년의 버밍햄에서 기도를 하기 위해 행진하는 수백 명의 흑인에 대해서 경찰서장불 코너(Bull Connor)는 비라프스 목사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는데, 목사는 그것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서장은 부하들에게 방수(放水)를 위해 소화용 호스를 열라고 명령했지만, 부하들은 차마 하지 못했다. 흑인의 당당한 태도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흑인들은) 무릎을 꿇은 채 코너의 경찰견이나 경봉(警棒), 소화용 호스에 맞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힘만으로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두려워하거나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코너의 부하들은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호스를 늘어뜨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山本伸 外 共編, <ブラック・ライブズ・スタディーズ>, 東京: 三月社, 2020, 94쪽)



여기에서 우리는 존엄의 구체적인 현현으로서의 비폭력이 적대자도 바꾸는 모습을 볼수 있다.

사실 킹 목사는 인도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남아프리카에서 백인이 인도인을 차별한 근간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물질적 욕구의 추구라고 하는 굳건한 자기중심주의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위협받는 경우에는‘서양근대문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 방어의 최고 권리’로서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구조가 존재하고 있음을 간디는 파악했다.

이 자기중심주의의 포기 이외에 인간의 평화적상생의 길은 있을 수 없지만, 그것은 ‘서양 근대’의 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생겨난 것이 인도의 토착사상에 기초한 ‘사티아그라하’ 운동이다.



1. 사티아그라하(satyaagraha) 운동에서의 ‘존엄’ 개념

1907년 인도인이 ‘암흑법’이라고 부르는 인도인 거주권을 박탈하는‘아시아인 등록법’이 남아프리카 트랜스발의 백인정부에 의해 입법화되었다.

이 ‘등록’을 거부하면, 인도인은 벌금이나 투옥 또한 강제송환된다. 간디는 이‘암흑법 철폐’를 위한 저항운동을‘사티아그라하’운동이라고 명명했다.


고대 인도의 산스트리트어인‘사티아(satya)’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이외에도‘어떠한 위험도 없는 상태’즉 비폭력이라는 뜻이 있다(이 반대편에 있는 것이 폭력을 합리화하는 자기중심주의다).

동시에 우리에게 작용을 가하는‘신’이나 역사를 초월한 진실의‘존재’라는 의미도 있다. ‘아그라하(aagraha)’는‘고수하는 것’,‘열정’을 의미한다. 따라서‘사티아그라하’운동이란 비폭력에 의한, 역사를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보편적 실재로서의 ‘진리’(신)의 작용(영성의 작용)에 의한 ‘자기중심주의’로부터의 탈각을 자타에게 모두 촉구하고, 존엄성을 지향하게 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간디에게 있어서 비폭력이란 ‘진리’에 이르는 길로 “어떠한 생명체에 대해서도 고통을 주거나 괴롭히거나 살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사회로부터의도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진리’는 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는데, 그 작용을 봉쇄하고 있는 것은 자기중심주의이다. 이것을 제거하는 방법은 간디에 의하면 ‘지금까지 만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무력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자신이 ‘의도한 것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자문하는 것’이다.

간디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 서술되어 있듯이, 크리슈나신은 모든 인간에 내재함과 동시에 초월적인 신으로, 개인을 뒤흔들고 동요시킨다.

억압하는 백인에게도 크리슈나신은 내재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주의로서의 아집을 버리기만 하면 상이한 자들끼리의 평화적 상생도 가능해진다. 억압자로서의 영국인(백인)과 피억압자로서의 인도인 사이의 대립의 극복은 어느 한편에 의한 다른 한편의 굴복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


간디는 토착적 사상과 차별철폐라는 당면과제를 결합시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거기에는 서구 근대에는 볼 수 없는 외부성으로서의 타자 우선, 타자를 매개로 한 자기초월, 자타동일, 인간의 이중화와 같은 시점이 존재하고, 자기중심주의의 어리석음에 눈을 뜨라!”는‘동요’를 일으키는 영성의 작용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힌두교도뿐만 아니라 인도인 이슬람교도도, 최종적으로는 영국인(백인)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백인의 지지도 얻어서 최종적으로는‘암흑법’을 철폐시켜, 평화적인 상생사회의 출발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

킹목사가 간디의 사상에 공명한 것은 거기에서 특정 종교를 넘어서 차별과 억압을 극복하고, 평화상생으로의 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월적 신은 모든 인간에 신이 내재한다는 것을 영성의 작용으로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서 적대자도 자기 안에 내재하는신을 자각하도록 한다. 이 자각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자각이다. 이 존엄을 자각할 때 자기중심주의는 붕괴된다. 이 개념을 명확하게 제기한 것은 대승경전 <대반열반경>이다.



2.<대반열반경>에서의 불성과 존엄

<대반열반경> 제8권에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體衆生悉有佛性)’, 즉 ‘모든 사람에는 불성이 내재해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 불성은 번뇌라는 자기중심주의에가려져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볼 수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 가난한 여성이 자기 집에 금고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붓다의 말을 통해 처음으로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비유는 번뇌를 가진 인간은 스스로는 자기에게 불성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은 외부성으로서의 절대자(붓다)의 영성의 작용에 다름 아니다. <열반경>에서의 ‘불성’은 산스크리트어 ‘붓다 다투(buddha dhaatu)’, 즉 ‘붓다가 되게 하는 근본 실체’의 번역어로 완성체로서의 ‘붓다 그 자체’를 의미하고, 그 내용은 ‘고귀하고 엄숙한’ 존엄성을 함축한다.

구체적인 개체로서의 인간과 불성의 관계에 대해서 신란(親鸞. 1173~1262)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성은 곧 붓다 그 자체다. 이 붓다는 무수히 많은 모든 세계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마음(心)이다. 인간은 이 마음을 통해 붓다에 의한 구제의 맹세를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에 이 신심(信心)은 곧 불성이다. 나에게 내재하는 이 불성은 초월적 세계의 붓다의 영성의 작용에 의해 자각된 것이기 때문에 초월적 세계의 붓다, 진여와 동일하다. 초월적 세계의 붓다와 나에게 내재하는 붓다는 불이일체(不二一體)의 관계에 있다. 초월적 세계의 붓다는 진여로서, 색도 형체도 없다”(<유신초문의(唯信抄文意)> 1250년)



신란에 의하면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진여는 그 자체로는 작용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미혹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 자기를 한정시켜 개체의 형태를 취해서 현실세계에 나타난다. 따라서 이 현실세계에서의 모든 개체, 개개의 인간은 자기 안에 붓다를 모시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성으로서의 붓다의 영성의 작용, “자기중심주의의 어리석음을 자각하라!”고 하는 외침, 인간 석존에게 나타난 아미타불의 외침을 들을 때, 번뇌에 의해 불성이 가려져 있어도 누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붓다와의 일체성, 절대자와의 일체성에 눈을 뜨는 것이다. 이 상태가 존엄성의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버밍험에서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행진하는 흑인들로부터 존엄성의 구체적인 현현을 보았기 때문에 경찰들은 방수(放水) 명령을 집행할 수 없었다. 경찰들은 흑인의‘증오’가 아니라 당당한 모습, 존엄성(불성, 신)의 구체적인 모습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다. 흑인을 탄압하는 경찰들에게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엄성(불성, 신)이 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불성은 악인이나 불법을 매도하는 자에게도 내재해 있다.

정토경전 중에 가장 중시되고 있는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은 “유제오악비방정법(唯除五逆誹謗正法)”, 즉 “악을 범한 자, 불법을 매도한 자는 붓다의 구제에서 제외된다”고 하면서도, 그런 행위를 한 자도 회심참회(廻心懺悔)하면 모두 구제받을 수 있다는 함축이 들어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선도(善導, 613-681)의 <법사찬(法事讃)>(上)에 나오는 “방법천제회개왕(謗法闡提廻皆往)”, 즉 “죄를 범한 자도 불법을 매도하는 자도 회심참회(廻心懺悔)하면 모두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예를 신란은 <대반열반경> ‘범행품(梵行品)’을 인용하면서, 아버지를 살해한 아사세(阿闍世) 왕자의 회심참회(廻心懺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욕에 의한 착란’으로 살해를 범한 것으로, 살해에 대한 자각과 참회가 있기 때문에 당신의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석존으로부터 듣고, 아사제 왕자는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에 세존을 뵙지 못했다면 셀 수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 지옥에 떨어져, 끝없는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얻으신 공덕을 받들어서 중생의 번뇌를 끊고 나쁜 마음을 깨트리고 싶습니다.”

(親鸞, <顕浄土真実教行証文類(現代語版)>, 本願寺出版社, 296쪽)



아사세 왕자는 인간 석존에게서 붓다를 본 것이다. 그 붓다의 외침을 듣고 번뇌에 가려져 있던 내재적 불성은 활성화되고, 가해자였던 그는 진실에 눈을 뜨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새로운 인생을 결의한다. 존엄성을 회복한 아사세 왕자는 석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제가 틀림없이 중생의 온갖 나쁜 마음을 깨트릴 수 있다면, 저는 항상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사람들을 위해서 고뇌를 받게 되더라도 그것을 고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296쪽)



그리고 자신이 다스리는 마가다국(摩伽陀国)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 즉 진실의 깨달음을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아사세는 존엄성을 얻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의(侍醫) 지바(耆婆)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바여! 나는 목숨이 다하는 일 없이 이미 깨끗한 몸이 되었다. 짧은 목숨을 버리고 긴 목숨을 얻었고, 무상(無常)한 몸을 버리고 불멸의 몸을 얻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일으키게 하였다.(297쪽)



자기에게 내재하는 불성에 눈을 뜬 인간은 육신은 유한하지만 마음은 진실세계(정토)의 붓다와 같다. 신란은 그와 같은 인간을 내용적으로 ‘여래와 동등하고’ 현실의 모습으로서, 붓다가 되는 것이 정해진 ‘미륵과 같다’고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자대비’(광대한 타자 구제심)는 불성이라고 <대반열반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불성을 자각한 인간은 보답을 구하지 않고, 타자구제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각’을 얻은 인간의 행동은 붓다와 일체가 된 행동으로, 미륵보살이 행하는 것과 동일한 행동이다. 거기에는 완성은 없고, 항상 완성을 지향하는 ‘탈피’가 계속된다. 그런 인간의 모습을 접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동적인 ‘실감’이 존엄성이다.

불성의 자각은 불합리한 현실변혁을 위한 행동을 낳는다. 자기에 내재하는 불성을 자각한 인간은 외부성으로서의 붓다의 작용에 의해서 타자에게도 적대자에게도 동일한 불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상생의 근거가 생겨난다.



3. 불교에서 불성=존엄성의 현대적 의의

서양 근대는 초월적 신을 내재화하고, 그것을 이성과 양심으로 파악하였다. 서양 근대에서 인간은 이상과 양심을 안에 지니는 존재로, 그것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내재화된 신은 개인의 마음 속에 한정되고, 개인의 양심과 일체화된다.

이것이 서양 근대의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외부성으로서의 절대자=신은 교회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 이성과 양심을 내재하고 있는 ‘평등한 개인’으로 구성되는 국민국가로 이동되고, 세속국가 자체가 신적인 절대성을 체현한다. 이렇게 해서‘국가의 정의’라는 이름 하에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된다.

이성·양심을 안에 지니는 개인이 자기를 묻는 경우, 자기(개체로서의 나)를 뿌리치고 그런 자기(개체로서의 나)를 보는 ‘또 다른 새로운 자기’를 탄생시키는 절대자, 즉 자기 객관화를 가능하게 하는 외부성으로서의 초월적 절대자는 부재하고, 이성·양심이 자기 내부에서 자기를 묻게 된다.

그 결과 자기 초월(현재의 자기를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이성·양심은 쉽게 자기중심주의와 일체화될 수 있다. 수 있다.

현대 일본에서는 존엄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에는 ‘인간답게’, ‘나답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함축이 담겨 있는데, 거기에는 자기객관화가 없는 외부성으로서의 타자와의 상호관계성을 결여한‘둘도 없는 나’를 강조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존엄’ 개념은 ‘인간의 내적 가치’이고, ‘자율개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경우에 초월적 존재와의 상호관계를 부정하면 자기중심주의라는 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입장에 선 주체자로서의 인간에 주위 사람들은 영혼을 울릴 정도의 존엄성을 느낄 수 있을까? 거기에는 이‘나’를 살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체의 모든 기관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도 없을뿐더러, 자기와 일체화된 붓다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오로지 자기중심주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고수하는 것이 서구형 근대적 사고에 다름 아니다. 불성론은 인간에 내재하는 존엄성으로서의 붓다와, 그것을 자각하게 하는 외부성으로서의 절대자의 작용에 의한 자아고집・아집으로부터의 해방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서양 근대에는 구조적으로 우열의 이항대립적 사고, 타자를 거부한 자아중심주의가 존재하고, 그것이 사회체제와 일체화되어, 마치 보편적 원리인 것처럼 세계에 퍼지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나 루터 킹 목사는 이와 같은 서양 근대의 틀을 넘지 않는 한, 억압이나 차별 그 자체의 철폐와 인간 상생 현실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의 길은 내재적 절대자와 외부성으로서의 절대자의 변증법적 통일의 논리이다. 이 논리에 기초한 행동이 서양 근대가 해결하지 못한 상이한 인간들 사이의 상생의 기반을 제한 것이다.



맺으며

오늘날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존엄론에는 내재와 초월의 상호관계를 심화시키는 시점이 희박한 것 같다. 그것은 학문 자체가 서양 근대에 특징적인 이항대립적 사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항대립적 구조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대반열반경>의 불성론이다.

이 사상은 13세기에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仏教)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인 신란(親鸞)에 의해 이론화되었는데, 일본에 정착하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반(反)권력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주요 불교 교단의 하나인 진종(真宗) 교단뿐만 아니라 다른 불교 교단도 그와 같은 불성론을 기본적으로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 속에 정착하는 일은 없었다.

1945년 패전 후에 근대 천황제를 지탱한 국가신도(国家神道)의 부정과 서양 근대적 개인주의가 일본에 확산되는 가운데,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종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경원시(敬遠視)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거기에는 서양 근대는 종교를 지양(aufheben)했다고 하는 환상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존엄 개념을 종교와 관련시켜 심화시키는 방향은 주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내용에는 비폭력과 평화, 상호관계성, 차이와 평등의 병존, 공동체와 개인, 우애, 일즉다( 一卽多), 수복적 사법(修復的司法), 용서와 화해 등등, 오늘날의‘난제’를 해결할 개념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 개념들은 하나같이 존엄성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에도 종교와 관련지어 존엄 개념을 심화시키는 작업의 의미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룬 <대반열반경>의 불성론에는 약자와 피해자가 존엄성을 획득하도록하는 용기부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아사세의 회심참회’에서 볼 수 있듯이, 가해자와 강자도 구제받는 시점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 불성론에는 절대자의 내재와 초월의 상호관계성을 볼 수 있고,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시천주(侍天主)’ 개념과 상통하는 점도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불성론으로 위치지워지는 존엄 개념에는 오늘날 인간의 평화적 상생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서구 근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명확한 방향성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번역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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