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141> 존엄성의 가치를 노년 철학에 적용하기 -상-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1.03.21 19:41
원혜영 충북대 윤리교육학과 강사
원혜영 박사
[동양일보]나는 여기서 노년 철학에 관련한 두 권의 책을 소개하기 전에, 최근 영화배우인 안젤리나 졸리가 GEEF 2021(Global Engagement & Empowerment Forum, 2월 5일)에서 난민과 이민자의 어려움에 대해, 그리고 여성과 아이가 겪고 있는 인권 훼손에 대해 강조한 부분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이 여성이기에 공감을 크게 받은 것도 있지만, 우선적으로 그녀가 가진 영향력을 영화배우로 한정하지 않고, 인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가졌기에 공유하고 싶다. 여성은 남성보다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감성적으로 가졌다.
예전에는 단순히 여성이 모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여성은 태어나는 그 태생부터 자신이 소수자이고, 약자로 사회적 공동체에서 인정받기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적응하면서부터 감성적인 존재였다. 사회적 차별과 태생적으로 공동체에서 온전한 인정을 경험하지 않은 존재는 그런 감성이 불합리하고 자신감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이 아이와 노인을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가치 있게 대한다는 사실에서, GEEF 2021에서의 토론은 풍부하고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교류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소수 약자에 관련한 인간 존엄성의 실상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면서도 여전히 퇴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안젤리나는 실망스럽다고 전한다. 그녀에게 인상 깊게 느꼈던 점은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그녀가 전문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찰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이와 여성에 대한 투자는 어떠한 것보다 실용적이고 발전적이며 공동체에 이익이 크다”라고 한 그녀의 말은 나에게 깊이 새겨졌다. 미래지향적인 공동체를 꿈꾼다면 지금 한없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공동체 일원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되고, 나약한 여성이 사회적 존재로 자리하면서 직· 간접적으로 인류 공동체를 위해 도움을 주고 있기에 관심을 끈다. 전폭적인 지원이 아이와 여성을 위해 쓰이는 것은 미래를 위한 것임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제도와 인식이 변하기를 바라는 그녀의 희망은 언제쯤 실현될지 모르겠다. 그녀의 희망이 우리 모두의 희망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뿌리 깊은 이해가 전 지구적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건들, 과정들, 그리고 법률이 있어야 할까? 이런 일들에 앞장서는 사람이 따로 있고, 여전히 유린당하고 침해하는 제도, 국가, 민족 그리고 개인이 존재한다. 공동체란 정말 미묘하면서 복잡하다. 모든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고 연관되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에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항상 해결책과 대안에 관련된 모색은 뒷전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의 시대에도 인간은 서로를 보듬어 나가기보다는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낸다. 팬데믹 현상이 전 지구가 연결되어 있다는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식층과 미래학자들은 소수 약자 및 소외된 인간에 대한 배려를 존엄성이란 이름으로 강조한다. 팬데믹 시대는 우리가 우리의 공동선과 인류의 발전을 위한 열망과 함께 집단 및 모임의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음에 큰 영감을 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이와 여성뿐만 아니라 노인은 사각지대에 놓인다. 사회는 소수 약자에 대한 유린, 학대, 폭행 등의 사건에 대한 묘사와 문제 제기가 공감대를 얻기까지 무수히 반복되기만 하는 것 같다. 대안과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느리기만 하다. 더 큰 문제는 인식의 전환이 사회적인 공감대를 얻고 삶의 실생활에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이고 인문학적 토대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건 사고의 단편적 상황인식이 아니라 이제는 뿌리 깊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인식의 전환이 개개인을 변화시킬 때 효과는 크다.
최근 나온 두 권의 책은 인식적 전환으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어 권장한다. 나름대로 대안 및 철학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소개한다. 특히 노년 세대에 관련한 인식의 변화에 의미 있는 진전을 기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을 가졌다. 두 학자 모두가 남성이기에 냉철하고 합리적이기도 하다. 이들은 한일 양국에서 노년철학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 그들은 노년기를 보내는 동안의 생활 흐름에 익숙한 서술을 위주로 논의한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추었다. 여성 작가라면 더 감성적이고 노골적이며 직접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비교와 아쉬움도 있다.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를 보고 느끼며 드러내지 않는 깊은 감정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이렇게 노년을 여유롭게 즐기며 사십시오.”라며 말하는 듯하다. 딸들이 살뜰하게 부모를 챙기는 것과는 다른 거리두기가 느껴진다.
그들의 글은 철학적인 인간존재의 객관화를 위한 것이다. 늙으신 아버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장점, 배우고 싶은 점, 그리고 존경보다는 그들에게 이제까지 수고스러운 삶을 내려놓고 편안한 노후를 권하며, 그 과정을 그대로 서술한다.
김양식의 <나이듦, 가슴 뛰는 내일>(수륙책방, 2020)은 인문학적인 사고를 토대로 하여 나름의 대안을 위주로 다루었고, 오하시 겐지(大橋健二)의 『노년철학 하기』는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흥미롭게 서술한다.
<나이 듦, 가슴 뛰는 내일>에서는 한국사회의 노년기에 접어든 계층에게 “나이 들면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을 인정하고, 현재의 모습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을 필요성”(김양식, 위의 책. 116)으로 설득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의 노년층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취약하다. 황금의 노년기를 맞이하는 계층은 취약한 노년기를 보내는 부류와는 상대적으로 차이가 크다. 노년기에 접어든 모든 계층이 ‘가슴 뛰는 내일’을 맞이할 수는 없다. 후손들의 불안한 삶이 노년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책은 어느 정도 안정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그리고 인문학적 지식이 탑재되어 있을 때, 공감하기 쉽다. 나이 듦은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단조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활기차게 삶을 살도록 독려한다. 책의 소제목들에서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을 수용한다. 언제 어디서나 미소 짓는다. 단순한 삶을 산다. 배우는 것을 즐긴다. 도전한다. 세상과 소통한다. 규칙적인 운동을 습관화한다. 나이 들어가는 미덕을 실천한다. 내면의 고요함을 즐긴다. 자연과 대화를 나눈다. 죽음을 초월한다.’(김양식, 위의 책. 124-153) 등등이다. 열심히 살아온 노년기의 인생에 보너스처럼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이 든다는 것 자체를 즐기는 노년기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어렵고 힘든 노년을 맞이하는 인생도 여기에 공감하길 바란다.
인생에 모든 것을 성취해서 걱정 없이 보내는 부류보다는, 자신들의 입지와 자식들의 형편을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보내는 부류가 읽기에는 많은 것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하루하루의 처지를 걱정하며 빈곤하고 외로운 노년기에 ‘좋은 습관 길들이기’(김양식, 위의 책. 215)는 이제까지의 가져왔던 자신의 습관을 고치기에는 더욱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환경이 좋은 노년기를 맞이하는 노인들에게 개선하고자 하는 여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이제까지의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높은 교육 수준과 자기관리에 철저한 삶을 살았던 노년에게 이런 것들은 쉽다. 더 유유자적하고 평온하게 보내길 바라는 것은 경직된 습관을 가졌던 노인들에게 어려울 수 있다. 노년기의 삶의 질은 습관이 좌우한다. 다시 자신의 습관을 고치고 바꾸는 것이 노년기에 가능할 수 있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삶의 공간이 점점 좁아져 끝내 집안에 고립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김양식, 위의 책. 240)라는 문구는 이제 이것은 노년기의 일상만이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전 인류에 해당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노년의 삶을 역지사지하는 상황에 놓였다. 단순히 정착하고 고정된 삶이 노년기에만 해당하지 않는 현실을 목격한다.
다양한 인간존재의 어느 순간의 단편적인 상황이 아니라 전 인류의 상황임을 새삼스럽게 알아차린다. 나이 들어가면서 그 이전의 활발한 생활, 즉 모임이 소중했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인류는 지금 노년의 생활처럼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류의 이기심에 경종을 울리고 반성하는 계기를 이번 팬데믹 상황이 알려준다. 노인들도 젊은 날의 치기와 이기심, 그리고 배려 없는 마음들을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다. 팬데믹을 겪은 우리가 지난날의 활기찬 삶을 잃어버리고 그리워하고 후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년의 삶에 명상 수행하는 것은 죽음을 좀 더 친숙하고 두렵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좋은 방편이다. 명상 수련의 기본적 자세는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걱정도 잊고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기본적 자세의 중요성을 인식시킨다. 노년기의 삶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노년기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이다.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는 부류와 불행하게 보내고 있는 부류의 양쪽에 명상 수행은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평화로운 일상을 행복하게 보내는 마음 자세이다. 노년기에 새로운 번영이나 파트너십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평온과 잔잔한 미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계보다는 옛 동지를 챙기기 마련이다. 이기심에 시달리고 젊었을 때처럼 아직도 잡고 싶은 욕심이 있는 노인들에게 이 책은 좋은 주제들을 선사한다.
또한 노인은 TV를 시청하는 것에 시간을 소비할 정도로 비생산적으로 시간 죽이기를 하고 있고, 바둑만 두거나, 온종일 탁구만 치거나, 서재에서 책만 보는 것도 바람직한 시간 관리가 아니라고 제시한다. 사회활동이 줄어들고 외부정보에서 차단될 위험성이 있는 수동적인 자세보다 적극적인 시간 관리와 활동을 권장한다.(김양식, 위의책, 247-249)
시간 관리는 성숙한 나이 들기의 연장선임으로 젊을 때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좋은 습관이 들었다면 다행이지만, 고쳐지지 않을 수 있다. 나이 들면서 더 편안하고 느슨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나는 추천하기에 저자의 의도와 맞지 않을 수 있다. 김양식의 <나이 듦, 가슴 뛰는 내일>에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있을 노년기의 다양한 삶의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오오하시 겐지의 <노년철학 하기>는 일본에서 노년기의 다양한 논의를 토대로 한다. 철학하기라는 제목으로 업그레이드된 저서이다. 종전의 일본 노인 문제에 대한 비판서이기보다는 사실 그대로의 서술을 토대로 철학적 생각하기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꼰대’라는 닉네임처럼 외부 대상화하기보다는 노인 자체의 내부적인 감성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는 면도 놓치지 않았다. 현실적인 문제도 그대로 드러낸다. 연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노인들, ‘악몽의 노후’에 대해서도 ‘하류 노인’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온후한 노후를 맞이해야 할 노인들이 소매치기가 되는 초고령사회의 어두운 현실도 솔직하게 말한다. ‘괴롭다’, ‘외롭다’, ‘쓸쓸하다’, ‘슬프다’라며, 너무나 긴 노후를 ‘생지옥’이라고 한다. (오하시 겐지, 위의 책, 36-38)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노인의 비극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한국은 일본보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고독에 괴로워하는 노인의 실체를 말할 수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년철학 하기>는 단순히 노년기의 생활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내재화한다. 즉, “일본에는 내부로 향하는 전개가 있어서, 그 논리가 일본의 모든 공간성에 각인을 남기고 있다”라고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크게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부로 작게 하나로 뭉치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 학자 이어령도 단적으로 ‘축소지향의 일본’(1982)이라고 한다. 오하시 겐지는 종속, 의존하는 회사 시스템이 건전한 시민의식을 형성하게 만들지 못하고, 자유로운 시민사회정치의 존재도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오하시 겐지, 위의책, 96-98) 그는 일본 사회가 가진 통합력이 장점으로 발휘되고도 있지만,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의 훼손을 간접적으로 말한다. 일본 사회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보다 자유로운 시민사회정치가 발달했다고 보이는데, 노년의 존엄성과 인격 모독은 일본보다 더한 이유는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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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존엄성의 가치를 노년 철학에 적용하기(하)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1.04.11 20:39
댓글 3
[동양일보]오오하시 겐지는 노년철학을 특별한 관점으로 이야기해서 주의를 끄는데, 그것은 현대 일본사회가 가진 단점을 보완하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노년철학에 대해 말하는 그는 슈펭클러, 마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나타낸다.
“식물은 우주와 일체로서 자기의 신체의 연장이 우주 그 자체인 것에 반해, 동물은 우주를 자기의 몸속으로 받아들여 버린다는 점에서 소우주적 존재라고 말한다. 식물은 우주와 일심동체이지만, 동물은 우주에 대해서 자폐적이다.”
침묵의 자세 안쪽에 완만하게 생동하는 영혼을 숨기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 대지에 서며, 우주의 생체리듬에 조용히 몸을 맡겨 살아가는 식물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것은 직립의 모습으로 우주와 맞아떨어진다. 뇌의 폭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주와 일심동체의 관계 속에 삶을 영위하려는 동물과는 다른 하나의 생명이다. 이러한 생명의 본연의 자세는 늙은 인간에게 어울린다고 한다.(오하시 겐지 위의 책, 192)
그는 또한 구마자와 반잔(態沢蕃山)의 팬이다. “나이 들어 가르치라”라고 하는 구마자와 반잔의 말을 좋아한다. “나이 들면 조용히 지갑을 열고 사라지라”는 한국인들의 말과는 역설적으로 다르다.
구마자와 반잔은 각 세대에 맞는 삶의 방식으로 “어릴 때는 배우고 청년일 때는 행동하고 나이 들면 가르쳐라”(<集義和書> 제1권)를 강조한다. 나이 든 사람이 가르쳐야 할 것은 단순히 지식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조화의 필연으로 생을 얻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함께 만물을 만들고 길러야 한다. 즉 <하늘>의 조화의 움직임에 동조하고, <대지>의 삶을 영위하며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더 좋은 미래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할 책임이 있다.
나이 든 인간이 삶과 이야기로 보여주고 가르쳐야 한다.(위의 책, 196) 한국사회는 노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보다는 다음 세대로 자리를 양보하는 것에 방점을 둔다. 한국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와 지위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의 노인이 사회적인 참여에 활발하게 여지를 남겨 두는 것과는 다른 인식적 차이로 대비된다. 공동체에서 배제되는가, 아니면 그대로 일원이 되어 있는가의 차이가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근대 세계가 요구해 온 인간 모델은 “무엇을 이루었는가? 어느 정도 위대하며, 얼마나 벌었는가?”라는 행동 가치, 성과가치를 중시하는 ‘human doing’형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보람이나 평생 현역, 1억 총활약, 혹은 생산성 등을 강조하는 것이다. 정관(靜觀)이나 관조(觀照)의 깨달음과 관련된 명상 형태는 정반대로 주어진 생명 자체를 존중하는 존재가치인 ‘human being’형의 마음 사용법이다.
그저 멍하니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며, 나뭇잎이 흔드는 바람의 시원함을 느끼고 온종일 느긋하게 마음을 놀게 해주는 ‘생명’을 맛본다. 생명이 출현하는 이런 ‘무위의 시간’에 마음을 놀게 해주는 즐거움만큼 오늘날 일본 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없다.(위의 책, 200)
김양식의 <나이듦, 가슴 뛰는 내일>에서도 이점을 강조하고 있어서, 한일 양국이 명상 수련이 노년기에 필요하다는 관점에는 이견이 없다. 한국은 기(氣) 철학의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면, 일본 고유의 생사관은 풍부한 자연환경이 낳은 자연과의 일체감과 현세 긍정적 낙천주의로 통하는 곳에는 그들만의 ‘즐거움’이 있다.
이 책에서 특별한 점은 인간, 여기서는 이목이 총명한 남자만 해당한다는 조건의 서술이 있었다. 하늘과 땅, 양극의 왕래는 진정한 여행자 또는 지덕이 뛰어난 남성을 조건으로 한다.
“움직이는 자의 몸은 가로, 뿌리내리는 자의 몸은 세로, 사람은 제대로 가로로 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세로이다”<皇極經世書>
새와 짐승 등 모든 동물의 몸은 타고난 가로 방향이다. 몸이 땅에 평행하므로 활동적인 동(動)이다. 초목 등 모든 식물의 몸은 타고 난 세로 방향이다. 몸은 땅에 수직으로 세우기 때문에 부동(不動)이다. 동물인 인간의 몸은 본래 수평이지만 식물처럼 수직이다.
인간은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하다. 동(動, 가로)으로 부동(不動, 세로)을 겸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 본성의 이기성과는 다른 관점이다.
프랑스 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의 이러한 강직한 수직 몸을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인간 고유의 경직된 자아, 이기주의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순수 자연에서 분리된다. 그것은 지면에서 위쪽 수직으로 향한 인간의 신체가 높은 곳으로 향하는 방향을 정해졌기 때문이다” 높이로 향하는 방향은 착각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생기(生起)이며, 지워 없앨 수 없는 증언이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은 이 높이에서 나오는 것이다.(<전체성과 무한>,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옮김, 그린비, 2018; 위의 책, 302-303)
하늘로 향하는 식물 축과 대지에 귀속하는 동물 축을 겸비한 양극적인 인간 신체가 천지를 왕래한다. 이런 견해로 인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우주를 대우주에 한없이 개방하는 거룩한 실천을 하는 존재로 귀결하고 있다.
오오하시 겐지가 논하는 이 지점은 훌륭하지만, 총명한 남성에 해당한다는 부분에서는 노년 철학이 늙어가는 남성에게만 특권적 의식을 주어서 국한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된다. 또는 지덕이 뛰어난 남자만 거론하고 있어서, 인간의 범주에 다른 인종들(여자, 아이, 지덕이 없는 노인 등등)을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식견을 주고 있어 흥미로움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특히 노년의 시간은 속세에서 떨어져 나와서 나와 마음을 넓게 함으로써 자연을 무한히 받아들이는 ‘무위의 시간’에서 생기는 즐거움이라고 소개한다.
고대 유교의 천인합일 사상을 받들어 ‘천지 뜻에 순종하는’ 정관(靜觀)을 강조한다.
“한가함은 항상 즐거움이 많다. 바쁜 사람도 가끔 여유를 찾아 마음을 기르는 것이 좋다. 한가하고 조용한 마음이 아니면 재미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라며(<낙훈> 上) 정관과 한가함에서 생기는 재미를 말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피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말한 관조(觀照)를 상기시킨다. 하늘의 관조야말로 인간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한 그들처럼, 자연의 모습과 변화가 눈 앞에 펼쳐진다. 생생히 약동하는 천지를 바라보는 것이 인생의 큰 즐거움이라고 본다.(위의 책, 198-199)
한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하여 노년기의 보내는 정관 및 관조의 즐거움을 젊은 층도 누리고 있다. 일명 ‘불멍’이라고 하여 불을 피워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을 즐기거나, ‘물멍’이라고 하여 수족관에 물고기를 기르면서 ‘멍!’ 때리며 바라보는 시간을 즐긴다.
노년기의 생활인 한가롭고 조용한 마음을 젊은이들도 누린다. 코로나를 겪은 세대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비대면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느긋하고 평온한 삶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노년기에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코로나로 인해 젊은 사람들의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확대된 양상은 예측하지 못한 것들이다.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스웨덴학자 랄스 토르스탐(Lars Tornstam)이 제창한 “노년이 되면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합리적 세계관, 즉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역할기대, 사회적 평가, 사회적 배려로부터 이탈한다. 물건이나 사회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 집착 초월과 자기중심성이 감소하는 자아 초월을 거쳐, 일원론적 세계를 벗어난다.
‘우주적 초월’로 이행하여 최종적으로 깊은 행복감을 맛본다고 한다. 일명 ‘노년적 초월’이라는 노인론이다. 이런 세계관은 동양권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도교의 생사일여(生死一如),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지만물일체설이 그것이다. 우주적 차원으로 향하면서 지상적인 자타 일체감에 심신을 맡겨 인식한다.(오하시 겐지, 위의 책, 196)
‘속세에서 떨어져 나와 오감을 작동하여 달맞이꽃을 음미하고 산수를 감상하고 바람을 노래로 읊는’(오오하시 겐지, 위의 책, 198) 여유로운 생활이 노년의 시기가 아니라, 지금 전 인류에게 요구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하여 노년의 시기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알게 되었다. 고립감, 소외, 거기에 관련된 인권 및 존엄성의 가치를 알아가는 노력을 하기도 전에, 노년기의 입장에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이 자리 잡아서 이해하게 되었다.
인류는 코로나의 불행한 시기에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얻어가는 경험을 하게 될 줄 알았을까? 그리고 노년기에 관련된 글을 쓴 양국의 한·일 학자들은 이렇게 젊은 세대들이 노년기에 접어들지 않아도 충분하게 ‘무위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줄 알았을까?
동양일보 dynews@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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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4-12 15:51:04
더보기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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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4-12 15:50:15
더보기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1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답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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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4-12 15:47:38
더보기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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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