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30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오미환 기자 입력: 2007

 


[스크랩]<18>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종교와 사상/우리 시대의 명저 50
2008. 7. 25.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우리 시대의 명저 50] <18> 영광이 아닌 고난의 역사, 그것을 담금질이었다 말하는…
일제 때 월간지에 연재 글 모아 1950년 책으로
고구려 이후 역사를 불행의 박물관' 혹독한 평가
학계 "주관적" 비판 불구 주체적 역사 인식 '호평'







“고난의 역사! 한국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다. 이 땅도 이 사람도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치도 종교도 예술도 사랑도 무엇도 무엇도 다 고난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고 쓰라린 사실임을 어찌할 수 없다.”

함석헌(1901~1989)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우리 역사를 그렇게 규정한다. 심지어 동서양 문명의 온갖 찌꺼기와 패악이 한데 모인 ‘세계사의 하수구’라고, ‘삼천리 강산은 불행의 박물관이요, 삼천만의 생명은 죄악의 실험관’이라고 말한다.

이보다 혹독할 수는 없다. 몸 둘 바를 모르게 후려치는 이 가차없는 자기비판은, 그러나 결코 절망이나 패배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한국사만 그런 게 아니고 인류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고 상기시키면서,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고난은 인간과 역사를 성숙시키는 시험이며, 그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수난의 여왕’ 한국의 역사는 결코 실패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도덕적으로 한층 높이 올릴 세계사적 사명이 있다고, 세계사의 고난을 온 몸으로 받아낸 민족이야말로 가장 높은 도덕으로 인류를 구할 수 있으므로 이 일은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함석헌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월간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1950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그 후 1961년 셋째 판을 내면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로 제목을 바꿨다. 처음에는 기독교적 사관에서 출발했지만,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는 아니며 모든 종교는 따지고 보면 하나라는 생각에서 그의 사관이 특정 종교를 넘어 보편적 지평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단순한 한국사 통사가 아니라 역사철학에 방점을 찍고 있다. 책 첫머리를 역사와 사관에 대한 철학에 할애하고 나서 한국 역사를 짚어간다. 내용은 통절하다. 입말이 살아있고 에두르지 않으면서 곡진하고도 우렁차게 사자후를 터뜨리는 함석헌의 글쓰기는 그 충격과 감동의 폭에서 가히 전율적이다.

그가 보기에 우리 역사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고구려가 망한 날, 우리 역사는 좁은 한반도에 갇히면서 비극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업은 비루한 외교로 반도의 절반을 얻었다는 점에서 통일이 아니라 잃어버림이라고, 그 과정에서 민족정신이 기울었다고 말한다. 고려는 주체성을 잃은 문화를 되살리고 민족을 새로 통일할 의무를 지녔으나 실패했다고 말한다.

조선 500년은 옛 고구려의 기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저앉으면서 시작했다며, 민족정신과 국민적 이상이 빠진, 다시 말해 중축이, 등뼈가 부러진 역사라고 말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 분단, 전쟁과 그 후로 이어진 역사에 대해서도 그는 통렬한 자기 반성을 요구한다. 이 모든 불의와 좌절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 해방 후 독재화 되어가는 정치 밑에서 민중이 점점 깨어나고 있음을 그 증거로 든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은 민중임을 분명하게 못박는다.

이 책은 우리말로 쓴 최초의 한국 통사이자 역사 대중화의 효시다. 함석헌 생전에 다섯 번째 판까지 나왔고 이것이 가장 널리 보급됐다. 한길사는 20권으로 완간된 함석헌 전집의 첫 권으로 1983년 이 책을 냈낸 데 이어, 2003년 요즘 젊은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어려운 말을 풀어서 다시 냈다. 한길사의 2003년 판은 지금까지 10쇄를 찍었고, 매년 4,000부 정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이 책의 힘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새삼 알 수 있다.

두 세대 전 일제강점기에 초고가 씌어졌고, 단행본으로 처음 나온 지도 반세기가 지난 이 책이 이처럼 길고 강한 생명력과 파급력을 지닌 이유는 뭘까. 작고한 역사학자 천관우는 이 책을 두고 “사료의 창고가 아닌 펄펄 뛰는 역사”라고, “함석헌은 분명한 사관을 가지고 한국사를 일관되게 서술한 우리나라 당대의 첫째가는 역사가의 하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역사적 사실의 자세한 기록보다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에 중점을 둔 것은 함석헌 자신의 뜻이었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공정한, 객관적인, 과학적인 역사를 쓰려다가 죽은 뼈다귀의 이름만을 적어놓고 말았나! 그것이 역사, 적어도 산 역사를 지어가는 씨알(역사의 주인, 민중을 가리키는 함석헌의 용어)이 살기 위해, 그 역사를 짓는 힘을 얻기 위해 읽고 싶어하는 역사는 아니다.”

사학계는 이 책과 함석헌의 사관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에 치우쳤다고, 종교적 색채가 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자 김상봉(전남대 교수)은 함석헌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이 한 권이 있어 20세기에 한국철학이 있었다”고 단언한다. 20세기 우리 역사의 불행은 남의 것을 받아들이기만 했지 주체적인 철학이 없었다는 데 있으며, 함석헌의 지성사적 의의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주체적인 인식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놓을 것을 요구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함석헌은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사의 의미를 묻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일제와 싸웠고, 독재와 싸우며 투옥과 석방, 가택 연금의 고난을 거듭했다.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누구나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함석헌은… "역사의 주인은 씨알" 한국사에 큰 족적

한국의 간디, 시대의 양심, 민중의 대변자, 지사적 사상가, 민족혼의 역사가, 겨레의 예언자, 민권 운동가, 민족의 스승, 종교가, 언론인, 싸우는 평화주의자….

우리는 함석헌을 그렇게 부른다. 그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거인이다. 함석헌을 존경하는 이들은 이 모든 표현을 합쳐서 '민족의 큰 스승'이라고 부른다.


그의 뜻과 자취는 죽지 않았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책에서 지성의 행로를 구하고 있고, 함석헌기념사업회(이사장 이문형)와 씨알사상연구회(회장 박재순)가 그의 뜻을 잇고 있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학술행사와 출판 등을 통해 함석헌과 그의 사상을 기리고 있다. 씨알사상연구회가 매달 하는 연구발표회에는 학자와 일반인 등 20~ 30명이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연구회는 최근 그간의 월례 발표회 논문을 책으로 묶어 <씨알 생명 평화>를 펴냈다. 함석헌이 1970년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도 계속 나오고 있다. 현재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이 잡지는 올해 1ㆍ2월 호로 통권 194호를 기록했다. 군부 독재 시절 민중의 자각을 깨우는 불길이 됐던 이 잡지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가 8년 만에 복간됐다.

씨알사상연구회 박재순 회장은 "함석헌은 위대한 사상가인데, 그동안 민주화운동가나 언론인으로만 많이 알려진 감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함석헌 사상은 동서문화의 창조적 융합이며 세계에 내놓을 한국사상"이라며, "우리는 아직도 함석헌 사상의 인문학적 충격과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인문학의 위기론이 높지만, 진짜 위기는 우리의 삶과 역사가 하나가 된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1970년대 등장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한국의 민중신학은 씨알(민중)을 역사의 주인으로 보았던 함석헌 사상에서 뻗어나온 것임을 환기시킨다.

빈민의 의사로 존경 받았던 고 장기려 박사는 "함석헌 사상은 500년 후에야 널리 알려질 것"이라고 했다. 그의 사상이 그만큼 넓고 크고 깊다는 뜻이다. 박재순 회장은 "함석헌 바로 알기는 아직 초보 단계"라며 "선생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정리해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함석헌 연보

1901년 평북 용천군 출생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했다가 평양고보 중퇴

1921년 오산학교 편입, 이승훈ㆍ유영모 영향을 받음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입학, 역사 전공

1928년 귀국해서 오산학교에서 교편 잡음

1938년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 거부로 오산학교 사임당함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간 복역

1945년 신의주 학생사건으로 소련군에 체포ㆍ구금

1947년 월남

1956년 <사상계> 집필 시작

1958년 <사상계>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20일간 구금

1961년 5ㆍ16을 정면 비판한 '5ㆍ16을 어떻게 볼까' 발표

1970년 <씨알의 소리> 창간

1971년 삼선개헌 반대 투쟁

19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 참가

1977년 3ㆍ1 민주구국선언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받음. 그후 형 집행정지와 1980년 복권

1979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됨. 명동YWCA사건으로 계엄사 합수부에 의해 15일 구속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번째 추천됨

1989년 88세로 타계



오미환 기자 mhoh@hk.co.kr

입력시간 : 2007/05/02 19:19:28
수정시간 : 2007/05/02 20:08:39



출처:한국일보 2007.5.2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5/h200705021918388433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