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눈]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함석헌을 철학의 이름으로 생각하게 된 동기를 내게 처음 제공한 것은 미국의 에머슨(1803-1882)이었다. 19세기 미국의 제일 중요한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에머슨은 그와 오랜 친분을 유지했던 후학 소로우와 더불어 미국적인 학문의 터를 닦았다. 한때 함석헌과 에머슨의 글을 동시에 읽기도 하면서 내린 결론은 두 사상가 사이에 유사함이 많다는 것이고, 그 유사함의 일부는 철학적이란 것이었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살았던 시대도 달랐던 두 사상가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결론만을 도출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담을 감수하면서 두 사람을 연결해보는 이유는 함석헌이 서구사상과 맺은 인연이 주로 에머슨과 같은 낭만주의의 사상가들과의 교감 속에서 이뤄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함석헌이 자주 언급하는 서양의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알 수 있고, 이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여기서 에머슨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미국의 사상에 끼친 영향,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이 유럽의 정신적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상적 독립의 발판을 마련했던 그의 역할이 바로 함석헌이 한국 사상의 독립을 위해 자처했던 역할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미국 내에서 에머슨의 그런 역할이 미국학문의 전통을 가능케 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함석헌이 남긴 정신적 유산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에머슨에 대해 많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주로 동시대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에머슨과 콩코드라는 마을에 함께 살았던 소로우와 함께 언급된다. 함석헌이 소로우의 유명한 <시민불복종>이란 글을 한국어로 번역까지 한 것에 비하면 에머슨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함석헌은 이 세 사람을 미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들로 이해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함석헌의 글에는 미국의 정체성을 이들과 연관 지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에머슨, 소로우, 휘트먼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미국의 어떤 면이 가능했고, 미국을 가능케 만든 사상적인 조건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또 에머슨은 빠졌지만 <월든>을 쓴 소로우와 <풀잎>의 저자 휘트먼이 없었으면 ’미국은 더 썩었을 것’이란 주장도 했다. 큰 맥락에서 에머슨의 이름을 포함하여 이해해도 무리는 없어 보이는 주장이다. (함석헌이 미국을 어떤 나라로 생각했기에 그들의 사상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더 썩었을 것이라 했는지는 다른 각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함석헌은 이들을 ‘야인’이라 불렀다. 이들이 야인이라면 함석헌과 추구했던 인간성에 부합하는, 즉 함석헌적인 인물들이 된다.
실제 에머슨과 소로우가 없는 미국의 사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함석헌이 19세기 중반에 완성된 이들의 사상이 미국의 본질적인 모습을 담아낸, 미국을 대표하는 학문으로 이해했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평가받던 인물은 존 듀이(1859-1952)였다. 듀이를 에머슨과 소로우나 휘트먼 같은 인물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잠시나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을 완성시켰고, 진보적인 사회개혁에도 큰 관심이 있었고, 실험적인 학교까지 세워 교육이론을 펼쳤던 듀이는 함석헌의 사상적이고 실천적인 행적과도 괘를 같이 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듀이는 함석헌이 미국을 처음 방문하기 10년 전에 이미 사망했지만, 그의 명성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세계적인 것이었다. 듀이는 동아시아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1919년 봄 두 달간 일본을 방문해 동경제국대학에서 강연을 했고, 그 내용은 <철학의 재건>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지금까지도 그의 중요한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듀이는 일본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그의 콜롬비아 대학 제자였던 호적의 초청을 받아들여 중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2년이란 긴 시간으로 보내면서 많은 강연을 했고, 특히 5.4운동으로 고조된 중국의 사회개혁과 교육개혁을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 가운데 그의 존재는 큰 화제가 되었다. 1919년 북경에 머물던 듀이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로부터 한국방문을 요청받고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했었다. 미국을 여러 번 방문했고, 미국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컸던 함석헌이 듀이를 몰랐다고 보긴 힘들다. 함석헌은 1962년 첫 미국 방문 때 하버드 대학의 은퇴 교수였던 철학자 Ernest William Hocking을 만났다. 그는 윌리엄 제임스의 제자였고 훗날 듀이와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고, 한때 듀이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란 평가도 받았던 사람이다. 큰 틀에서 듀이와 마찬가지로 실용주의의 시각으로 유럽의 철학과 대화를 이어갔던 미국의 철학자였다. 함석헌은 Hocking 교수와의 만남과 소감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만약 듀이가 그때 살아 있었다면 미국 국무성에서 함석헌과 듀이가 만나 미국의 정신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도록 주선하지 않았을까 상상도 할 수 있다. 듀이에 대한 함석헌의 침묵이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사상가로 듀이가 아니라 에머슨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은 미국의 실용주의에 대한 함석헌의 판단일 수도 있다. 특히 실용주의가 기술주의로 흐르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가능성이 생긴다. 20세기 중반 미국이 썩었다는 함석헌의 판단도 에머슨과 소로우가 꿈꿨던 이상적인 미국은 사라지고 자본주의와 결탁한 기술과 폭력의 문화가 팽배한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
에머슨과 듀이를 좀 더 연결시켜 보자. 미국 내에서도 최근까지 에머슨의 학문적 유산을 철학적인 것이라 보는 시각은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낭만주의 학풍의 에세이 형식의 글을 썼고, 자립적인 인간이해를 통해 미국의 독립정신을 표현해냈고, 시를 쓰기도 했고, 미국 실용주의의 동기를 제공했고, 당시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다는 등의 이력이 그를 이해하는 주된 관점이었다. 문학적인 사상가로도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부각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에머슨을 니체와 하이데거와도 연결시키며 독창적인 철학적인 작가로 부각시킨 사람은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이라는 미국의 철학자다. (지식사의 사적인 연결점들에 대해 비교적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니체가 에머슨의 책을 항상 들고 다녔고, 반복해 읽으며 밑줄을 긋고 여백에는 극찬의 감탄사까지 남겼을 뿐 아니라 글의 스타일까지 모방하려 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에머슨을 철학적인 사상가로 부각시킨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존 듀이였다. 1903년 시카고 시절 그는 “Emerson: the Philosopher of Democracy”(에머슨: 민주주의의 철학자)란 글을 썼다. 듀이는 에머슨의 글을 어떤 철학으로 이해했을까? 에머슨에 대한 듀이의 평가는 함석헌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듀이의 글을 들여다보자(이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듀이는 에머슨의 글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를 잘 알고 있었다. 듀이는 에머슨에 대해 철학적이라고 하기엔 논리가 약하다는 평가를 논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비판했다. 듀이에게 논리는 논증의 도구만이 아니라 직관의 반응을 구하는 논리가 있을 수 있었고, 침묵마저도 논리의 양식이 될 수 있었다. 에머슨은 ‘말’이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침묵이 말을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들에서 사유의 동기를 찾았다. 에머슨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방법론을 묻거나 그가 발전시킨 논리의 형식을 묻기 전에 그의 글에 담겨 있는 그만의 논리와 방법을 깨달아야 했다. 또 에머슨을 철학자라 부르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에머슨이 철학 이상의 학문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머슨은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시인으로 철학을 했고, 반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창조적인 사유를 했다. 이성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사유를 했던 에머슨에게 철학은 ‘아직도 거칠고도 기초적인’ 상태에 있었다. 에머슨은 미래의 철학을 시인들이 가르칠 것이라 예고했다. 그에게 철학자는 믿을 이유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지만 시인은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철학자와 시인 사이의 분쟁은 고대 희랍의 철학과 함께 시작했다. 형이상학과 예술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내는 글을 써온 에머슨은 그 분쟁을 19세기에 재현해냈다. 에머슨에게 철학과 문학의 방법론적인 구분은 인위적이고 유치한 것이었다. 에머슨이 문제 삼은 것은 정신이었다. 그 정신의 본질은 새로움에 있었다. 이전 시대의 지치고 낡은 원칙의 한계를 파헤칠 지식인을 찾았고 타성에 젖지 않은 새로운 사유를 찾았다. 에머슨이 추구했던 철학은 시스템이나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고, 삶에 정직하고 일상의 경험에 충실한 철학이었다. 그는 모든 위대한 사상이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한 경험을 설명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요구했고, 모든 사상의 대한 판단의 기준이 일상의 삶 속에 있음을 설파했다. 그에게 모든 진리는 일상에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논리의 싸움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철학이나 자신의 생각을 체계화 시키려는 철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머슨은 교리나 제도, 관습이나 체계적인 것을 싫어했고, 철학과 종교, 예술과 도덕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되돌려놓고자 했다. 신학과 형이상학의 기술과 속임수로 인해 감춰진 진리의 단순함을 찾고자 했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이해할지 고민했다. 그를 실패한 개혁자, 지혜의 철학자, 또는 덕의 삶을 가르친 선생으로 보는 등 다양한 시각이 있었다. 오늘날 플라톤의 글에서 체계와 논리의 철학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해석의 역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듀이는 에머슨 철학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듀이는 20세기가 에머슨에게 그런 역사를 제공할 것이고, 역사는 결국 에머슨을 민주주의의 철학자로 기억할 것이라 예언했다. 20세기에 민주주의가 사상적인 자기표현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에머슨에게서 찾을 것이란 예언이었다. 듀이가 말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맛서는 이념적인 제도가 이니라, 일반 대중의 경험이 사유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정신적인 평등이라는 에머슨적인 이상을 말한다.
19세기 미국에서 제일 중요한 사상가였던 에머슨과 20세기에 그 역할을 맡았던 듀이의 관계는 미국의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듀이의 사상에 에머슨이 얼마나 어떻게 반영됐는지, 에머슨의 사상에서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의 뿌리를 얼마나 찾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듀이가 에머슨의 사상을 철학으로 이해하고 옹호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듀이는 에머슨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던 해석의 역사를 직접 참여했다. 듀이에게 미국의 철학은 미국이 추구해온 가치나 이념과 분리될 수 없었고, 에머슨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미국의 철학이 논리의 놀이터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와 함께 발전한 정신사의 산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머슨에 대한 듀이의 평가를 함석헌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듀이의 글 곳곳엔 에머슨 대신 함석헌의 이름을 넣어도 이해가 될만한 문장들이 있다. 듀이가 제시한 논리와 방법의 한계, 시와 철학의 경계에 대한 성찰, 일상의 경험이 기준 되는 철학은 분명히 함석헌의 철학을 위한 논변으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듀이는 에머슨의 철학을 말했지만, 그 내용을 철학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 작업은 앞서 언급한 스탠리 카벨이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해왔고, 카벨의 이름은 앞으로 더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함석헌과 에머슨 사이에 비교가 가능한 부분을 몇 가지 언급해보자.
약 10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지구 반대편에서 각각 태어난 두 사람의 사상은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했다. 에머슨은 교회의 낡은 교리를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양심의 이유로 3년간의 목회를 그만두었다. 특히 교리나 관습에 따라 성만찬을 집전할 수 없다는 게 사임의 직접적인 이유였다. 함석헌은 예수의 대속이란 교리를 자유로운 인격이 받아드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이단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그 후 두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발전시킨 사상은 ‘스스로’, ‘자기 신뢰’, ‘자유로운 인격’과 같은 인간이해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인간은 그들에게 제도와 관습이 묶어놓을 수 없는 생각하는 영적인 존재였다. 에머슨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자아를 찾았고, 함석헌은 문명에 가려진 야성의 영성을 찾았다. 에머슨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생각의 사람’(Man Thinking)이었고, 함석헌은 좀 더 집단적인 ’생각하는 백성‘이었다. 철학의 사유를 “창백한 생각”(Pale cast of thought - 에머슨이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햄릿 대사)에서 벗어나 생각의 조건인 일상에 대한 반성으로 되돌리려는 노력도 하나의 공통점이다. 자연과 일상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함석헌은 한국의 정신을 가로막는 숙명적인 세계관이 있음을 경고했고 이를 극복할 삶의 자세를 믿음이라 했다. 에머슨이 미국을 약속과 미래와 새로움의 언어로 이해한 이유는 미국이 유럽의 낡은 제도와 교회의 교리가 낳는 억압적인 자아의식을 극복할 사명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두 퀘이커의 영향을 받았고, 한때 힌두교에 심취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퀘이커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공중기도를 싫어했다). 함석헌과 에머슨을 함께 생각할 근거를 말하면서도 기억해야 할 차이점이 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에머슨과 개인과 전체가 긴장관계 속에서도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했던 함석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또 에머슨이 당시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했다고는 할 수 없는 반면에 저항과 참여정신을 배제한 함석헌의 사상은 생각할 수 없다. (함석헌과 에머슨을 함께 읽는 글은 1회 더 쓸 계획이다).
출처: https://minjungtheology.tistory.com/946?fbclid=IwAR0oYggfItZx-EcUGotWWqKivHIWVoZHOp3rx2ak89PovIV7I895W3kAOYg [웹진 <제3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