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10 h ·
⌈공자(孔子)의 변명(辨明)⌋ 가운데서
논어 이인(里仁) 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증삼이여,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게 꿰뚫는 것이다.” 하시자 증자께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무슨 말씀인가?” 하고 물으니, 증자께서 대답하셨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이 충서(忠恕)의 ‘충(忠)’을 수식어로 보아 ‘진실한 서(恕)’로 해석하여 ‘서(恕)’ 하나로 일관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충(忠)은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서(恕)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로서 이 둘이 보합하여 자타(自他)의 생명력을 최대로 살리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서(恕)에 대해서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는 그 나름의 설명을 했지만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고, 충(忠)에 대해서는 그런 설명이 없다.
이것은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이야기되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어느 것에 대해서도 단정적이거나 고정된 설명을 하지 않는 공자의 태도다.
그는 결코 ‘이름’을 고정되게 정의(定義)하지 않는다.
노자의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과 대비하여 공자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공자의 정명(正名)은 노자의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이것은 중요한 테마라서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충(忠)이 국가나 군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현대인들에게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충(忠)의 대상에 대한 시대적 사회적 한계에 불과한 것이다.
충(忠)은 자발적 의지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나는 이 자발성과 전념(또는 盡力)에 더하여 ‘기쁨’을 충(忠)의 가장 결정적 요소로 말하고 싶다.
충(忠)은 결코 도덕 관념 등에 의해서 강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충(忠)은 나라나 공동체를 위하여 불의를 막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헌신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 왔지만, 이제 자아(自我)를 최고로 실현하는 기쁨으로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인류가 진보한다는 가장 큰 징표로 다가온다.
일터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에 서(恕)의 문화가 자리잡는다면, 각자는 자기를 최고로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게 된다. 또 자기실현의 기쁨을 충분히 발휘(忠)하게 되는 만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도 더 쉬어진다. 이 둘 즉 서(恕)와 충(忠)이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나 국경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이상(理想)도 이런 속살을 갖추지 못한다면 뿌리 없는 나무를 키우려는 것 밖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증삼이여,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게 꿰뚫는 것이다.” 하시자 증자께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무슨 말씀인가?” 하고 물으니, 증자께서 대답하셨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이 충서(忠恕)의 ‘충(忠)’을 수식어로 보아 ‘진실한 서(恕)’로 해석하여 ‘서(恕)’ 하나로 일관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충(忠)은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서(恕)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로서 이 둘이 보합하여 자타(自他)의 생명력을 최대로 살리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서(恕)에 대해서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는 그 나름의 설명을 했지만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고, 충(忠)에 대해서는 그런 설명이 없다.
이것은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이야기되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어느 것에 대해서도 단정적이거나 고정된 설명을 하지 않는 공자의 태도다.
그는 결코 ‘이름’을 고정되게 정의(定義)하지 않는다.
노자의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과 대비하여 공자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공자의 정명(正名)은 노자의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이것은 중요한 테마라서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충(忠)이 국가나 군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현대인들에게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충(忠)의 대상에 대한 시대적 사회적 한계에 불과한 것이다.
충(忠)은 자발적 의지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나는 이 자발성과 전념(또는 盡力)에 더하여 ‘기쁨’을 충(忠)의 가장 결정적 요소로 말하고 싶다.
충(忠)은 결코 도덕 관념 등에 의해서 강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충(忠)은 나라나 공동체를 위하여 불의를 막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헌신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 왔지만, 이제 자아(自我)를 최고로 실현하는 기쁨으로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인류가 진보한다는 가장 큰 징표로 다가온다.
일터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에 서(恕)의 문화가 자리잡는다면, 각자는 자기를 최고로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게 된다. 또 자기실현의 기쁨을 충분히 발휘(忠)하게 되는 만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도 더 쉬어진다. 이 둘 즉 서(恕)와 충(忠)이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나 국경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이상(理想)도 이런 속살을 갖추지 못한다면 뿌리 없는 나무를 키우려는 것 밖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