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2

1407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①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셰핑

월간조선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①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셰핑
無冠의 聖女 서서평, 과부와 고아들의 어머니로 잠들다


글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 22년간 선교… 강냉이 가루 두 홉 남기고 영양실조로 殉職
⊙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現 한일장신대) 설립
⊙ 광주 제중병원 간호사로 봉선동 한센병 환자 돌봐… 한센병 아이 입양

梁國柱
⊙ 65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인 ‘서빙더네이션스’ 대표와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 저서 :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셰핑(서서평). 1934년 7월 7일, 전라도 광주에서 이색적인 추도식(追悼式)이 열렸다. 1912년 전라도 땅에서 22년3개월 동안 치열한 삶을 살았던, 1934년 6월 26일 53년9개월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처녀 선교사의 추도식이었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서서평(徐舒平), 미국 이름은 엘리자베스 셰핑(Elizabeth Johanna Shepping·1880~1934)이다.

추도식은 그가 죽고 난 지 12일 만에 치러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시신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시신을 해부한 결과, 사인(死因)은 놀랍게도 만성 영양실조와 풍토병이었다. 선교사 생활비로 받았던 월급은 자신의 몸 하나 지켜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소식은 선교사들뿐 아니라 광주 지역을 놀라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그가 남긴 재산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가릴 담요 반쪽, 노동자의 일주일 품삯에 지나지 않는 7전과 강냉이 가루 두 홉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를 아는 이들은 그가 남긴 재산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서서평 자신이 가난함에 익숙할 정도로 근근이 살아왔기에 빈곤에 삶의 궤적(軌跡)을 맞춘 그에게 가난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요 동반자였다.

그는 한센인들로부터 아들 딸 13명을 입양해 키워냈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李一聖經學校·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시작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어머니”라 불렀다.

특히 이 학교의 학생은 광주 지역에서 공부하기 위해 통학하던 학생보다 서서평이 입히고 재우며 먹이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서서평은 친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경제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는 언제나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남자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그가 죽자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하여 “빈자(貧民)의 자모(慈母)” “환생(再生)한 예수(耶蘇)”라며 그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영양실조로 죽은 선교사



1934년 6월 26일 53세의 나이로 그가 죽자 신문은 그를 ‘빈자(貧民)의 자모(慈母)’ ‘환생(再生)한 예수(耶蘇)’라고 추모했다.
《동아일보》는 1934년 6월 29일 자 사설로 ‘위대한 인류애, 서서평씨 영전에’라는 글을 올렸다. 보리밥 된장국에 고무신을 끌고 다녔던 서서평을 소개하며 큰 사역(使役)에 종사하는 몇몇 외국 선교사와 스스로 조선 여성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조선 사랑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울부짖으며 지적했다.

“백만장자의 위치에 지지 않을 집에 편히 앉아서 남녀 하인을 두고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어떤 선교사들의 귀에 서평양의 일생은 어떠한 음성을 가지고 들려질까? 그보다도 동족의 비참한 생활에는 눈을 감고 오직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고 있는 수많은 조선 신여성들의 양심에 과연 어떠한 자극을 주고 있을까? 서서평씨의 일생은 조선의 신여성 대중 앞에 일대 거화(炬火·횃불)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국의 여성으로서 감히 이러하거늘 조선의 여성으로 그 뒤를 따를 자 몇몇이뇨!”

서서평이 즐거이 택한 가난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부와 재물을 한국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눈 데서 비롯됐다. 그가 이 땅에 와서 행한 삶의 방식은 누가 강요해서 이행된 것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였다. 그러기에 그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추도식은 단순히 기독교인들만의 모임이 아니었다.

당시 호남을 대표하던 식자층과 사회인사, 지방유지가 총출동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최원순(崔元淳) 선생, 광주 YMCA 창설자이자 ‘빈민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흥종(崔興琮) 목사, 김신석(金信錫) 호남은행 취체역,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동했던 동경 유학파 출신 김용환(金用煥) 선생, 전남도지사와 《호남신문》 사장을 지낸 언론인 최영욱(崔泳旭) 박사, 정광호(鄭光好) 제헌 국회의원 등이었다.

조선간호협회를 대표한 이효경(李孝敬) 선생, YWCA와 전국 여전도회를 대표한 김필례(金弼禮) 선생, 이일학교를 대표한 김윤식 장로 등이 추도자로 나섰다. 당시 원근 각처의 수많은 선교사가 참석하였건만, 추도예배에서 축도 순서 이외에는 맡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천국 환송 잔치’인 셈이었다. 1927년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죽은 후 광주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된 셈이다.

그것도 한국 사람이 아닌 외국인 선교사요, 처녀의 신분임에도 말이다. 그것은 그에 대한 존경과 광주를 비롯한 호남 지역에 끼친 그의 선한 영향력이 었다. 그가 죽자 수백 명의 광주천(光州川) 거지들과 한센병 환자들, 과부들과 고아들이 어미 잃은 시름과 슬픔에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그 통곡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마치 비행기 소리 같았다고 한다.

오웬기념각(전라남도 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기 위해 1914년 건립한 건물)에서 양림 동산의 장지(葬地)에 이르기까지 장례행렬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처럼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가 함께 울고 가슴 아파했던 일대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은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료 선교사 사회에서 ‘왕따’ 당하기 십상이었던 그가 조선인들과의 교감을 통해 이토록 높은 존경과 유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알렌과 언더우드, 그리고 아펜젤러 등 1884년 이래 수많은 선교사가 한국을 찾아와 각양각색의 공헌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기도 했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이나 남장로교 선교사 조셉 놀란(Joseph W. Nolan) 등은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서울과 광주에 세우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오늘날 한국의 근대 교육이 가능했던 원동력인 수많은 교육기관을 세웠다. 1884년부터 선교사들의 파송이 없어진 1975년까지 90년 동안 장로교와 감리교 등 여러 교파를 망라해 2200명의 선교사가 그야말로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선교사가 죽어갔다. 당시에는 스프루(sprue)라는 풍토병과 이질, 발진티푸스 등 전염병과 갖가지 돌림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이 없었던 탓이다. 선교는 고사하고 자신의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것이 당시 선교사들의 고단한 삶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평균 25년에서 30년씩 한국에서 선교했다. 남장로교 출신의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선교사 부부나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개 25년 정도 일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뒤 3년에서 5년 이내에 죽었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기를 한국에서 보내면서 진액을 쏟아부은 탓이다.


어머니, 개신교로 개종하자 “딸로 여기지 않겠다”며 연 끊어

서서평은 1880년 독일 비스바덴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는 그를 할머니에게 맡긴 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졸지에 그는 할머니 밑에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서서평은 어머니의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를 만난 그는 가톨릭 계통의 미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민권을 받는다.

간호전문학교로 진학해 1901년 정식 간호사(R.N)가 된 그는 20세 무렵 뉴욕시립병원에 근무하게 된다. 간호학교 시절, 서서평은 동료 간호사와 함께 개신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됐고, 그때 개신교의 명쾌한 구원관(救援觀)에 매료된다. 이때의 감동으로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가톨릭을 떠나 개신교로 개종했다. 이 때문에 당시 개신교를 이단으로 여겼던 어머니는 “다시는 너를 딸로 여기지 않겠다”며 모녀 간의 연을 끊었다. 서서평은 어머니와 떨어져 외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간호사로서 열성을 갖고 일했다. 유대인 요양소, 유대계 결핵 환자 수용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지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사회봉사를 해나갔다. 이 경험은 훗날 조선에서 선교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서평은 뉴욕시에 있는 성서교사 훈련학교를 다니며 밤에는 병원 일을 했다. 신학교 교육을 받으며 그는 “영적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으며, 새로운 생명이 마치 포도주처럼 내 핏줄들을 가득 채웠다”고 고백했다. 이 공부를 통해 그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에 불탔다. 실제로 서서평은 이미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사역했고, YMCA 운동에도 참여했다.

서서평의 이런 경험은 훗날 조선에서 최흥종, 김필례가 YMCA와 YWCA를 세울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1911년 신학교를 졸업한 서서평은 동기생들이 일본, 뉴멕시코, 중국 등 곳곳으로 선교사로 나가자 진로를 고민했다. 이때 서서평은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간호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광주 제중원의 윌슨 선교사가 간호 전문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선교부에 요청했기 때문이다.

서서평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원해 합격했다. 그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선교사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1911년 한국행 여객선을 탔다. 꿈에도 그리던 선교사의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조선으로 가는 배 안에서 20여 일 동안 뱃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조선 입문’ ‘조선 선교 역사’ ‘조선 교회 현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미국에서 간호학과 신학, 교육학을 이미 공부한 그였기에 한국에 와서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서서평이 조선에 파송될 때는 한일합병(韓日合倂) 직후로 그녀의 나이 31세였다.

조선땅에 도착한 그는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다. 발음도 좋고 말도 유창했다고 한다. 후에 정신여고 교장을 지낸 김필례씨는 “셰핑 선교사는 한국말 발음도 한국 사람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창했고, 웅변가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한자도 배워 한자와 한글이 섞인 구약성경(舊約聖經)을 읽었다. 당시 일제강점기였던 상황을 감안해 일본어도 배웠다.

그는 뼛속까지 조선인이 되고자 애썼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 남자용 검은 고무신을 신었다고 했다. 된장국은 그 독특한 냄새 때문에 서양 사람들이 가장 혐오했지만, 그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조선에 동화되기를 자처했다.

그는 고아들을 등에 업고 다녔다. 당시에는 한국의 고아, 병든 자를 양육하기 위해 미국에서 들어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 처녀 선교사들이 광주 양림동 선교사촌에 살고 있었다. 서서평을 비롯해 수피아 여학교 교장이었던 플로렌스(Florence Root), 도슨(Dodson), 매퀸(Mcqueen Anna), 프리처드(Pritchard Margart) 등이 그런 분들이다.


換差益으로 여행 즐긴 선교사들



광주기독병원에서 일한 윌슨 박사(오른쪽 두 번째)가 자신이 잡은 멧돼지를 걸어놓고 일행과 포즈를 취했다.
선교사들의 삶의 행태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사역 현장인 한국에 와서 적당히 즐기면서 자신의 능력과 시간 범위 내에서 일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국에서 즐기던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한국에서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광주의 기독병원에서 일했던 윌슨(Robert M. Wilson) 박사는 틈만 나면 자동차를 몰고 지리산과 무등산에서 사냥을 즐겼다.

이분은 도가 지나쳐 한번 사냥을 나가면 일주일 이상을 산에 텐트를 치고 사냥을 했다. 본인은 총을 갖고 다녔지만 총이 없었던 한국인들은 땅을 파고 그 위를 대충 덮어 위장을 해 곰을 잡았다. 한번은 윌슨 박사가 이를 모르고 발을 헛디뎌 곰을 잡기 위해 쳐놓은 위장 굴로 떨어진 일도 있었다.

일부 선교사는 환차익(換差益)을 악용, 여행을 즐기기도 했다. 1달러에 2엔의 고정 환율로 달러를 바꾸어주던 그때, 상하이(上海)나 다른 지역에 가면 3엔에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적당히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면서 일한 선교사들이 현장에서 오랫동안 버티며 일할 수 있었다.

대신, 그들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다. 사역이 끝난 뒤 고국으로 돌아간 경우, 미국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들, 미국식 사고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현지 사역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하나의 부류는 일중독에 걸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선교 사역 이외에는 한눈을 파는 일 없이 밤낮없이 일했다. 현지인들과 같은 ‘삶의 방정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활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내일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

현지인들은 대개 이러한 부류의 선교사들을 존경했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삶을 산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선교는 일종의 자기 포기다. 선교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품는 일이고, 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행위인 것이다. 선교사 자신들의 조국에서 출세하고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목포를 거점으로 신안과 전라도 일대의 섬에서 사역했던 맥칼리(H. D. McCallie)는 “고국의 형제들이 학교에서 일하게 된 것이 매우 좋은 일”이라면서도 “나는 백 번을 고쳐먹고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한국을 선택할 것이다.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조국을 사랑하지만 조선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1925년 그를 돕는 조사(助事)로 다섯 명의 한센인을 채용하기도 했다.


22년 동안 한 차례만 안식휴가 사용



조선땅을 밟은 지 3년째인 1914년 무렵의 서서평(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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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서서평의 삶은 후자에 속했다. 동료 선교사들은 광주선교부 구내에서 주말마다 모여 승마를 즐겼다. 서서평은 그런 유희나 도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화순과 담양, 순창, 영광 등지로 전도여행을 떠날 때 항상 노새를 타고 다녔다. 요즈음처럼 아스팔트로 포장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흙탕 길에 어쩌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빗길에 미끄러진 노새가 서서평을 팽개치고 광주로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를 도와 마부 노릇 하던 아이는 노새를 잡아오느라고 되돌아갔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 없는 처지라 진흙탕 길을 헤치고 인근 마을을 찾아다니며 조선 사람들이 내어주는 문간방에서 쥐벼룩을 마다하지 않고 지친 육신을 뉘었다. 두세 달에 걸친 시골 순회라도 다녀올 경우, 그가 도착하는 날은 입양해서 기르던 아이들의 온몸에 가득한 이와 서캐(이의 알)를 가려내느라 밤을 새워야 했다.

서서평, 그는 몸과 마음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조차도 조선에 바친 사람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결혼한 부부는 7년마다, 처녀 총각 등 단신으로 온 사람들은 5년마다 1년씩 안식년 유급휴가를 주었다. 일하면서 지친 몸과 향수병을 달래려는 의도였다. 그동안 현장에서 일할 때 헌금을 보내 일을 도운 후원자들에게 보고(報告)도 하고 지속적인 후원을 약속받기 위한 목적도 있다. 군 복무 중인 병사들이 휴가를 목놓아 기다리듯, 선교사들에게 안식년이란 금쪽같이 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서평은 22년 동안 사역하면서 단 한 차례밖에 휴가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마 규정대로 네 번에 걸친 안식년 휴가를 제대로 누렸더라면, 그의 생명 역시 조금은 더 연장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계산적이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한없이 미련한 사람이었다. 이런 미련함이 서서평을 서서평답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서서평의 주된 관심은 언제나 조선인들이 걸머진 짐을 어떻게 하면 덜어줄 수 있느냐 하는 데 있었다. 1930년 8월,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낸 일 년간의 안식년을 마치고 조선을 향해 태평양에 오르면서 후원자들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이번 출국에는 처음 선교사로 부임하던 때와는 달리 미지(未知)의 세상에 대한 위대한 모험심 같은 큰 흥분은 없었습니다. 대신, 제가 선교사로서 부적합한 것은 아닌지 불안했습니다. 오히려 조선의 생활방식에 더 순응하겠다는 큰 결심을 하였습니다.

조선에서 보낸 지난 17년6개월을 돌아볼 때, 조선인들의 높은 이상과 생활방식을 과소평가하는 큰 실수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비기독교 동양인의 생활상태가 얼마나 비천한가와는 상관없이, 서구문명을 나름대로 이상화한 까닭에 과거에는 동양인들을 저평가했지만, 사실 조선에는 아름다움, 사랑, 그리고 훌륭한 것들이 많습니다. 한 해 동안 고향에 있으면서 총체적으로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인으로서의 제 사고(思考)란 조잡함과 결점투성이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이르신 대로 조선으로 돌아가서 조선의 짐을 기꺼이 덜어주려고 합니다. 조선은 지난 4년 연속 흉년(凶年)을 맞았고, 우리가 일 년여 동안 일본 정부에 학교 승인을 요청했지만, 아직 받지 못한 학교 건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번 방문 기간에 이일성경학교를 위한 후원금을 확보하기를 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이 빚에 쪼들리고 있는 (미국) 교회 앞에서 지어야 할 많은 건물에 대한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여성들의 담배 구입비용을 조선의 모든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사회적 정신을 거의 잃어버렸기에 조만간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심각한 영적 가난을 들었고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봉선동에서 한센병 환자 돌봐



1910년대 한센병 환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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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은 조선에 처음 들어와 광주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에서 간호사로 봉선동(鳳仙洞)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1926년 광주에 몰리기 시작한 한센병 환자들은 130km 떨어진 여수의 율촌면(栗村面)으로 옮겨갈 무렵에는 그 숫자가 630명에 달했다.

조선총독부는 광주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2만5000엔의 한센병 시설 이전 비용을 지불했다. 그 무렵 조선에는 2만명의 한센인들이 있었다. 주로 전남·경남 등에 많았다.

소록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수용시설은 선교사들이 운영했다. 호주장로교가 운영하던 부산 감만동의 상애원(相愛園), 북장로교가 운영한 대구, 남장로교가 운영한 광주와 여수의 애양원(愛養園)이 그것이다. 특히 소록도가 위치한 고흥은 외딴 섬으로 이곳에 유치된 한센인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여수 애양원으로 가고 싶어 영화 <빠삐용> 같은 탈출을 시도하다 거친 바다에 빠져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26년 광주 봉선동에서 한센인촌이 여수로 옮겨간 이후로도 광주에는 여전히 한센인들로 차고 넘쳤다. 서서평이 봉선동 교회를 맡았을 때, 광주의 한센인촌에는 241명의 남성과 185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있었다.

지원금 가운데 한센인을 위한 치료와 숙식비용이 매달 1인당 3달러50센트가 들어갔다. 한센인들은 영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였다. 하지만 서서평은 그들을 설득해 하루에 한 끼를 굶어 모은 돈으로 제주도 모슬포와 추자도에 전도인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이는 성경에 쓰인 대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기독교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한센인들을 위한 봉사나 섬김을 교회 개척과 분리해 불필요한 사역으로 여겼다. 그런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들을 위한 사역에 교회가 나서자,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존경도 덩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1909년 4월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선교사가 동료 선교사인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의 죽음을 앞두고 목포에서 광주로 진료 차 오던 중 길거리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한센인 여성을 구해준 사건은 지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한센인 여성을 자신의 말에 태워 광주로 데리고 와서 살 집을 마련해 주고 병을 고쳐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한센인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핀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포사이드 선교사의 행동은 지역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덩달아 선교사들의 사역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설을 위해 영국 에든버러 나환자협회와 뉴욕 나환자협회가 거금을 지원했고, 훗날 일본의 왕실에서조차 정기적인 후원금을 보내왔다.


한센인들의 대행진



한센인 아이 요셉을 등에 업은 서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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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1932년 ‘한센인들의 대행진’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나 3·1운동, 6·10만세 사건, 1907년에 일본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은 독립운동과 일맥상통한다. 반면 ‘한센인의 아버지’ 최흥종과 더불어 서서평이 지도한 ‘한센인 대행진’은 순수한 민권운동으로 기록된다.

한센인 대행진은 일제가 한센인들을 강제로 정관수술토록 해 이들의 씨를 말리려고 했던 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됐다. 150여 명의 한센인들이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 총독에게 항의하기 위해 광주를 떠났다.

서울로 향하던 도중에 이 소식을 들은 지방 동조자들이 가세해 대열은 무려 400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총독부 앞에서 꽹과리를 울리고 온몸으로 울부짖으며 항의 집회를 이어갔다. 우가키 총독은 하는 수 없이 이들에게 더 이상의 정관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이들을 위한 후생 시설을 소록도 안에 지어주기로도 약속했다. 한센인들의 처절한 생존 싸움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으로 짚고 넘어갈 일은 단순히 조선인들만의 저항이나 대행진이었다면 일본 정부가 어떻게 대했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 관헌이 사회적 기강을 내세워 강압 정책을 펼쳤더라면 대행진이 과연 무혈(無血)로 끝날 수 있었을까.

이미 서서평은 1919년 독립운동 인사들을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가 옥바라지 한 경력이 있어 일본 정부는 서서평을 껄끄럽게 여겼다. 이처럼 서서평 같은 외국 선교사가 가세함으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없애려 했던 총독부가 이를 서둘러 무마한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최흥종은 1912년부터 1934년에 이르기까지 서서평과는 동지적 관계로 힘을 합친 믿음의 사람이었다. 여하튼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서서평의 관심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였다.


과부와 고아들의 어머니로



1930년대 서서평의 모습. 1911년 조선땅에 도착할 때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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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 사회는 여성과 아동에 대한 인권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름조차 없던 여성들은 갖가지 이유로 천대받기 일쑤였다. 더욱이 딸을 낳게 될 경우, 개천에 내다버리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서평은 지방 나들이에서 여성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가 만났던 500명의 여성 가운데 본인의 이름을 갖고 있거나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을 거두어들여 이들을 먹이고 가르쳐 ‘전도부인’을 삼았다. 삶의 나락에서 구원을 받았던 이들은 서서평을 어머니로 섬겼다. 그들은 서서평의 선교를 도와 복음 전파 사역의 첨병으로 변했다. 그가 1922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몸져 누운 병상에서 불우한 여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이일학교(李一學校)의 시작이다. 서서평 사후(死後) 이일학교는 전주로 옮겨져 오늘날 한일 장로교신학대학교로 변신을 하게 된다.

천대받는 여성과 고아의 어미로서 서서평은 우리나라에 여성운동의 기폭제 역을 감당한다. 이 일은 주로 1922년을 정점으로 이뤄졌다. 광주에서 만난 여장부 김필례를 지도해 YWCA를 조직하도록 했다. 광주 YWCA가 서울 YWCA보다 먼저 조직되는 계기다.

또 김필례와 더불어 광주 제일교회 내에 여전도회를 조직한다. 이 여전도회를 시작으로 호남 전 지역과 제주 지역의 여전도회를 통해 교회가 살고 여성이 사는 큰 틀을 만들었다. 현재 한국 기독교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서서평 선교사가 세운 이 조직의 성원이다.

이러한 여성운동이야말로 여성 자신을 일깨우고 교회를 살리며 민족 계몽을 통해 나라를 변화시키는 촉매 작용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서서평의 관심은 그늘지고 소외된 여성과 고아들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올곧은 관심사인 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여성운동에는 한결같이 수피아와 정신 여학교 교장을 지낸 김필례와 호남 여성운동의 대모 조아라(曺亞羅)가 든든한 우군(友軍)이었다.

서서평은 1919년 여름까지 서울의 세브란스에 머무르며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의 간호사 양성에 대한 꿈은 아쉽게도 군산 병원에서부터 세브란스에 이르기까지의 4년간이 전부였다. 군산에서 가르치던 학생들을 이끌고 세브란스로 옮겨와 간호사들을 가르치기 전 이미 스프루라는 풍토병에 걸린 것이다.

간호사를 교육하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신 조선에 와 있던 간호 선교사들의 모임인 ‘재선기독교 간호사회(在鮮基督敎看護士會)’를 조선인들까지 참여하는 조선간호부회(朝鮮看護婦會)로 발족시키고, 내리 11년 동안 회장을 맡았다. 오늘날의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이다.

당시는 예방 간호나 방문 간호라는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유교적 예법으로 치던 시절이라 부녀자가 간호사가 돼 외간 남정네의 상처를 치료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간호사를 구하고 이들을 교육시킨다는 것 자체가 난관이었다. 지금은 해마다 새내기 면허 간호사가 1만4000명에 이르고, 국내에 머무르는 간호사 숫자가 40만명에 이르는 대형 단체에, 간호사가 교사와 더불어 결혼 상대 0순위라는 사회적 인식이 세상의 변화를 말해준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記章’은 없으나…

1934년, 서서평은 병상에서 죽기 전 이렇게 기도했다.

“내가 품고 있는 포부는 하늘만큼이나 원대한데, 풍토병 때문에 천직으로 알았던 병원 일도 그만두어야 했고, 이일학교 경영도 못 하고 있습니다. 3년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하나님의 사업을 더하고, 끝맺음을 짓지 못한 조선간호부회의 국제 간호협의회 가입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아픔을 덜어주시고 3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서평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에 대해 감사했다. 그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많고, 감사할 조건도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히 여겼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죄 씻음 받을 기회를 주시니 감사했고, 조선 백성들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에 감사했다. 그는 또 자신의 몸을 의학연구 자료로 제공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신 것도 감사히 여겼다.

그의 나이 쉰넷, 평범한 간호사로 살다 간 그에게는 간호사 최고의 영예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도 없고 ‘국제 간호대상’도 없다. 살아생전 그가 받은 상이라고는 거친 들판에서 구슬땀 흘리며 나누던 해맑은 웃음뿐이다.

그런 그가 살다 간 이 땅에서 몸서리치는 감동과 가치 있는 삶을 살았던 덕에 제2, 제3의 서서평이 되려는 간호사가 줄을 잇는다. 그는 살아생전 아무런 상도 명예도 누리지 못했지만 지금도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은 그의 아름다운 청춘 스물두 해, 그의 올곧은 헌신과 섬김을 최고의 것으로 만들었다. 서서평, 우리 시대의 작은 영웅은 아무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 우리는 흉내라도 낼 작은 용기라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