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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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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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정신
 
정신에서 정신으로

3.1운동을 그 밖에 나타난 결과로 하면 한 개 실패한 운동이다. 만세만 부르면, 그리하여 우리가 일본 정치 아래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세계 여러 나라 앞에 표시만 하면 독립이 곧 되는 줄로 믿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 점에서 본다면 실패다. 그러나 독립만세 부르다가 독립은 되지 않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여러 사람이 감옥살이를 하고, 한때 산천을 뒤흔들던 만세도 총칼 밑에 바람 자듯 자버리고 말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실패라 생각하고 그 한 일을 후회하고 풀이 죽어버린 사람을 하나도 없었다.
이 사실은, 이 독립운동이 실패에 돌아갔는데도 민중이 한 사람도 풀이 죽지 않았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서 크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언제나 일의 결과는 육신의 사람에게 그때그때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마는 데 그치는 것이요, 그 일이 드러내는 정신은 사람의 정신 속에 길이길이 살아 작용하여 산 역사를 이루어가는 법이다.
3.1운동은 민중의 가슴 속에 정신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것이 물결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사회에 낙심,낙망의 기분이 돌지 않고 도리어 머리를 들고 올라가려는 여러 가지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을 일으킨 것은 그 자체가 또 산 정신에서 나온 증거다.
정신은 정신에서만 나온다.
정신은 정신을 일으키고야 만다.
 
우주, 인생을 꿰뚫는 정신

그럼 무슨 정신인가? 무슨 정신이라는 것이 없다. 정신은 그저 하나 산 정신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흔히 3.1정신이라고 떠드는 소리를 듣지만 3.1정신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있다면 우주 인생을 꿰뚫는 정신이 있을 뿐이지. 해를 낳고, 달을 낳고, 천체를 낳고, 꽃을 웃게 하고, 새를 울게 하며, 사람으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정신이 3.1운동을 일으켰지, 그밖에 또 무슨 조작이 있을 수 없다.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민중 앞에서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민중이 이미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이 정신을 빼앗아 다시 팔아먹으면서 사사로이 이익을 얻으려는 협잡꾼의 하는 소리다.
알고 모르고가 문제 아니다. 가졌나 못 가졌나가 문제다. 그리고 아는 자가 반드시 가지는 것이 아니요, 가진 자가 반드시 아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에 참으로 가진 자는 도리어 가진 줄 알지도 못하는 법이요, 입으로 공교히 설명을 하는 자는 사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아노란 말은 모르노란 말이요, 했다는 소리는 아니했다는 소리다. 31정신은 스스로 가진 줄 알지도 못하는 민중의 것이다.
3.1절만 되면 보기 싫은 것은 서로 3.1정신 팔아먹으려 드는 꼴이다. 이 큰 정신의 꿈틀거림이 어느 단체나 몇몇 개인이 꾸며낸 일이나 되는 것처럼 서로 제가 먼저 했다는 거요, 제가 잘 안다는 것이다. 민중이 입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이들 협잡꾼을 쓸어버리라 해라! 3.1운동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산 정신이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할 것이 이 운동은 돌발적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이란 말이다. 전부터 무슨 사상단체나 조직체가 있어서 이 운동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요, 이 운동 후에 또 무슨 일정한 체계의 사상이나 단체가 깉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운동은 백두산이 그런 것처럼, 한라산이 그런 것처럼, 갑자기 혼자서 터져나와 천하를 진동시킨 것이다.
3.1운동의 주인이 될 인물도 단체도 없고, 그 지도 원리와 방법이 되는 사상도 조직도 없다. 이것은 누가 가지고 주인이 되기에는, 누가 그 공로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큰 운동이다. 너무도 평범한, 너무도 광범한 정신의 나타남이다. 마치 바람에 주인 없고, 비에 시킨 이 없는 것같이.
 
주인은 민중

다시 말하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난 생명의 일이요, 진리의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돌발적으로 터져 나왔다는 것은 사실은 그 힘이 언제나 어디나 준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고는 돌발할 수가 없다. 화산이 갑자기 터지는 것은 지구 속에 불이 본래 늘 있기 때문이다. 화산을 누가 만들어서 되는 것이라면 그 터질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러면 화산이 아니다. 3.1운동은 민중의 가슴 속에 본래 언제나 있는 정신이 기회를 타 터져 한때 화산처럼 불길을 뿜은 것이다. 화산의 주인이 지구라면 3.1운동의 주인은 민중이다. 화산의 불이 우주 자연의 불이라면 3.1운동의 정신은 우주 본연의 정신이다.
우리도 동경에서 누가 왔다든지, 상해에 누가 연락을 했다든지, 서울에 누구누구가 모였다든지, 33인이 어쨌다든지, 그것을 모르는 것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기회에 그 심부름은 했는지 모르나, 그 정신에 이르러는 아무도 터럭끝 만큼도 이러구저러구 할 것이 못된다. 태극기를 만들고 선언서를 찍어 사람들의 가슴에 안겨줄 때 누구라고 알고, 누구를 골라서 주었던가? 그전에 무슨 조직, 기관이 하나인들 있었던가? 실로 아무것도 없었다. 없었는데 그저 다만 민중을 하나로 보고, 전적으로 믿고 한 것뿐이다. 그들이 민중의 가슴을 들치는 부지깽이는 됐는지 모르느니라. 그러나 불은 민중 그들 자체의 가슴 속에 본래 언제부터 붙고 있던 것이요, 또 언제까지도 붙을 것이었느니라.
 
갑자기 터진 화산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갔을 때 안도산, 최린, 여운형의 세 분을 놓고 일본 법관이 묻기를, 나가면 또 다시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 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묻는 속뜻이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면 죄를 더하여 주고 다시 아니한다면 용서해주마 하자는 심산에서 나온 것임을 누구나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자연 대답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최린이 먼저 일어나 재주 있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요, 여운형은 놀랄만한 웅변을 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산은 그와는 달리 자기 차례가 오자, 허허 하고 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아, 이날껏 내가 선동해서 독립운동 된 줄 아느냐? 우리 민족이 한 것이지, 내가 하라 해서 하고 하지 말라 해서 하지 않을 것이냐?” 하는 의미의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거기가 다른 사람의 따르지 못하는 도산의 도산 된 점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어찌 재주로 될 일일까? 참이 아니고는 못 나오는 말이다. 무슨 말을 하여서 이리도 저리도 걸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벌서 참은 부족한 재주의 사람이요, 참은 생각할 것 없이 있는 대로를 뱉아도 대적의 흉계가 한마디에 부서지고 그 혼담이 서늘한 법이다. 도산은 그 자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자, 선동자의 심리를 품고 한 것이 아니요, 자신이 민중의 한사람으로 제 할 것을 한다는 정신으로 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참 정성으로 했기 때문에, 자연 그런 대답이 나온 것이다. 그것은 도산의 대답이 아니라, 민족의 대답이요, 참 자체의 대답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참 애국자, 참 정치가일 수 있었다.
그렇다, 살아도 민중 자체가 사는 것이요, 죽어도 민중 자체가 죽는 것이다. 살려는 민중을 누가 능히 줄일 수도 없고 망하려 드는 민중을 누가 능히 억지로 살릴 수도 없다. 3.1운동은 민중이 우리도 살아야겠다, 살았다 하는 한 외침이었다. 내가 아니면 이 나라를 어떻게 하나, 우리가 아니면 이 민족을 어떻게 하나 하고, 크게 걱정이나 하는 척하는 그런 따위의 협잡꾼을 물리쳐라!
 
국제적인 협동 협화정신

3.1정신은 곧 민족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옳은 말이다. 물론 민족의 정신이다.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었으니 민족정신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설명이다. 이제는 그것만으로 역사를 설명하려던, 그리하여 그것만으로 역사가 나가는 힘을 삼으려던 시대는 지나갔다. 민족정신이 3.1운동 전엔 없었던가? 물론 있었다. 있었으면 왜 힘을 못 쓰고 이제 와서야 일어났나? 이때에 와서 고종이 돌아간 것으로 민족감정이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혹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운동의 날로 3월 1일을 택한 데는 그 이유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요소는 못된다. 그렇게 큰 운동이 손에 무기 하나 없이 순전히 비폭력의 평화운동으로 일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는 그보다 다른데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때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맹에 호소하자는 데 있었다. 윌슨 대통령이 말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의하여 세계 여론에 호소하면 되리라는 것이 그 신념이었다. 이 신념이 아니라면, 고종 같은 이가 열 스물이 돌아갔다 하여도, 민족감정이 아무리 올라갔다 하여도 맨주먹으로 감히 독립만세는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거기는 민족정신 외에 다른 무엇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족주의보다는 차라리 그와는 반대된다고도 할 수 있는, 국제적인 협동, 협화를 믿는 정신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우리를 도와주려니 믿는 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파리에 모인 몇몇 정치가의 호의를 상대로 한다기보다는, 암암리에, 그 정치가들을 보내놓고 있는 여러 나라의 민중을 믿은 것이다. 이러므로 이것은 민중에게서 민중에게로 건너가는 세계적인 외침이었다. 그러나 각 나라의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민중을 속여 이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

그러나 한층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하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 협화를 믿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 동정을 믿는 것은 그 밑에는 그보다 먼저 미리 생각하는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성의 공통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지, 그들도 양심 가진 사람이겠지,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 사이에 서로 도움을 믿는다. 모순인 듯하지만, 우리가 맨주먹으로 만세를 부를 때는, 국제연맹에 호소하기 전, 누구에게보다도 더 우리 대적이라는 일본 사람에게 그것을 믿는 것이다. 2천만이 돌같이 단결한다 하더라도 일본군이 만일 하려면 한칼로 어려움 없이 무찔러버릴 수 있다 하는 것쯤은 누구나 쉬이 알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어섰던 것은 저들이 감히 칼을 못 쓸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왜 칼을 두고도 못 쓰나? 세계의 눈이 무서워서라고 하고 싶은 점도 있으나, 그보다는 역시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눈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관계보다도 인간적인 양심 때문이다. 우리가 폭력 없이 데모를 하고 그들도, 수원, 강서 사건 같은 것이 한둘 없지 않으나, 대체로 그 이상 희생을 내지 않고 만 것은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적으로 반항운동을 한 것은 순전히 미운 마음 없이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을 인간적으로 퍽 대접하고 믿어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 서로 저쪽의 잘못을 과장 선전하며 감정을 일으켜 싸워 이기려던 것은 옛날이야기고, 이 앞의 역사는, 그보다도, 서로 싸우기는 하면서도, 서로서로 사이에 숨어있는, 일을 극단의 참혹한 지경에는 이르지 못하게 하는, 서로 믿고 돕는 그런 정신, 그런 힘을 너와 나 사이에 찾아내어 기르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서도 세계를 위하여서도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3.1운동으로 인하여 얻은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정체를 드러낸 것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보다도 더 뜻있는 것은 일본사람의 인간성을 알게 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일어났다. 그들을 사자나 이리로 알고 반항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에, 우리의 편이 그들의 가슴 속에도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반항한 것이었다. 사실 나 자신 그 운동에 참여하여 본 것이지만, 그 당시에 일본사람 미운 생각 실로 없었다. 다만 우리도 살았구나 하는 기쁨에 가슴이 들먹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성을 그저 믿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저희도 사람이지 하고 믿을 때는, 그보다 먼저 그 인간성을 다스리고 있는 도덕의 법칙을 믿어야 한다. 사람을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믿음이다. 사람은 정의의 법칙에 복종하고야 말 것, 곧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대적을 이기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 대적 속에도 있는 정의 그 자체다. 도덕률 그 자체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고 보면 3.1운동을 일으킨 것은 인간 역사를 꿰뚫고 있는 윤리정신 그 자체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문천상(文天祥)의 말로 하면 ‘천지정기(天地正氣)’다. 성신이라 해도 좋고, 불성이라 해도 좋고, 자연이라 해도 좋다. 이름이야 뭐라 불렀거나, 하여간 생명의 맨 처음이며 끄트머리요, 역사의 고갱이면서 또 그 살인 그것이다. 물이 잘 흐르면 시내며 강이요, 막혔다 터지면 여울이요 폭포이듯이, 이 정신도 순하게 나가면 인생이며 문화요, 비상하게 나타나면 싸움이요 혁명이다.
밭 갈고 물 길으며, 자녀를 낳고 이웃을 이루며, 처마 밑에는 제비가 새끼를 기르게 두고 뜰 앞에는 화초가 꽃을 피우도록 가꾸는 인간의 가슴 안에는 3.1운동 같은 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언제나 늘 준비되어 있다. 다만 그 민중을 꾀어 속이지만 말라!
 
비로소 대접 받은 민중

그럼 그렇게 늘 있는 정신이 하필 3.1운동 때에 나타난 것은 웬일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때 가서야 민중이 비로소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사의 주인이 민중인 것을 분명히 알지만 정치가들이 이것을 깨닫기에는 퍽 힘이 들었다. 원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정치라면 일부 적은 수의 사람이 특권을 가지고 강제로 하는 것처럼 알아왔다. 다스린다는 말부터 그것 아닌가?
이제 다스리는 정치는 고물이다. 이때까지 정치는 일부 사람이 강제로 하는 것이므로 거기 무슨 잘못이 있어 그것을 바로잡으려 할 때 부득이 음모, 암살, 선동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일을 결정하는 힘이 민중에 있는 이상 아무 때에 가서도 민중을 얻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도 혁명이 여러 번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 원인은 한결같이 그 일을 민중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도 그렇고, 갑오경장도 그렇다. 그런데 3.1운동 때엔 처음부터 민중에 호소했다. 이점이 아주 주의할 만한 점이다. 민중을 믿었고 민중에 매달렸다. 그러므로 됐다. 민중은 언제나 자기를 부르는데 응하지 않는 법 없다. 그리고 민중이 일어설 때 막을 놈이 없다. 칼은 다하는 날이 있어도 민중은 다하는 날이 없다. 물론 언제나 일을 시작하는 것은 지식층이지만 그 지식층이 민중 앞에 겸손하지 않고는 일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해방운동이라 하더라도 권력층이 민중을 이용하려는 심리를 벗어나지 못해가지고는 일은 될 수 없다.
민중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3.1운동엔 구한국 시대의 벼슬아치가 주인도 아니요, 지식층의 학생이 주인도 아니요, 자본가가 주인도 아니요, 순전히 전체 민중이 주인이었다. 아무 음모도 없이, 아무 미리한 조직도 없이, 민중을 무조건 믿고 나서서, 하나가 “만세!” 할 때에 2천만이 한 목소리로 “만세!” 했다. 그때 바로 말없는 민중을 임금으로 모신 것이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3⦁1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문제는 없는 것 아닌데, 아무 힘 있는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일본에게 나라가 망한 후 민족은 셋으로 갈라졌었다. 그전에 지사라던 사람은 외국으로 도망하고, 깉어있던 지식층은 대개 일본에 붙어먹고, 그리고 남은 민중, 무식하고 가난한 민중은 입을 닫고 소처럼 있었다. 지사들의 생각은 꼭같이 무력혁명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애국심은 뜨거우나 그 정치사상은 낡은 것이었다. 나라의 주인인 민중을 무식한 것이라고 업신여기고, 일은 언제나 자기네가 할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3.1운동에는 그 지사나 지식층의 청년이 민중 앞에 겸손히 믿음의 손을 내밀고, 주인으로 모셨다. “우리를 따르라” 하지 않고 “당신들이 해야 됩니다.”했다. 평민은 의리 는 것이요 감격하는 것이다. 자기를 믿어주면 죽을 데라도 들어가는 것이 민중이다. 3.1운동은 이 감격으로 하나 된 민중의 힘으로 되었다. 이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사들의 낡은 꿈은 깨지고, 일본 군대의 강하기는 세계가 놀라는 것이었다. 길은 자연 어쩔 수 없이 민중의 가슴에 깃들어 있는 우주 본연의 진리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유일의 길이 참 길이다. 민중의 의기가 그렇듯 나타난즉 이때껏 대적에게 붙어먹던 층도 감격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민족통일은 이루어졌다. 민중을 제자리에 모시면 그들은 언제나 자기 할 일을 한다.
 
이 정신으로 남북통일

지금 우리에게 부닥친 것은 남북통일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는 데는 오직 한 길이 있을 뿐이다. 3.1운동에서 우리 민중의 양심을 동원하여 일본의 양심, 인류의 양심을 때렸고, 그러므로 그 힘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도 공산당을 이기는 것은 그 양심을 때리는 데 있다. 3.1운동은 실패 아니냐 하는가? 그런 소리 마라. 바다로 가는 냇물이 깊은 발 앞만 보고는 모른다. 3.1운동 아니었더라면 8.15는 없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대적을 도덕적 인간으로 믿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도둑의 사회도 성립이 되지 않고, 정의의 법칙을 지키지 않고는 무기조차도 만들 수 없다. 근본 되는 것은 이 우주의 윤리적 질서를 굳게 믿음이다. 人者無敵於天下(인자무적어천하)라, 어진(큰)이는 천하에 맞설 놈이 없다 하거니와, 어짊은 곧 민중의 마음이다. 그것이 큰 것이요 그것이 인(仁)이다. 민중은 언제나 믿는 것이요, 그러므로 평화요, 그러므로 살았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민중의 가슴이 흐려 올바른 판단을 잃고 그 본연의 힘을 잃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업자들이 민중을 그대로 두지 않고 간사하고 음험하고 잔혹한 수단으로 강제하는 때에 그렇게 된다. 3.1운동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정치로 인하여 가슴 속에 눌려 있던 정신이 한때 화산처럼 내뿜은 것이다.
걱정은 소련에 있는 것도 중공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해심으로 인한 민족의 분열에 있다. 정치적 갈라짐이 사회적 분열로까지 되어가는 데 있다.

3.1정신이 정말 있다면 38선이 걱정이겠느냐? 칼로 물을 쳐도 물은 또 합한다. 물같이 맑고 부드러우므로 하나 되는 정신 잃어버린 것이 걱정이지 칼이 걱정이냐? 그리고 이 하늘이 준 정신을 민중에게서 빼앗는 자가 누구냐? 정치업자 아니냐? 몇 해 전에 홀딱 벗겨진 우리나라 산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영국의 노련한 임업 전문가를 데려다 물은 일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 산천을 다 돌아보고 가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건드리지 말고 두어라!” 했다고 한다. 그것을 또 정치에도 옮겨서 쓸 천고의 명언이다. 제발 민중을 건드리지 말라. 그리고 믿어라! 그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제 일은 제가 하는 정신이 살아 있다. 1959.3.1
 
 
 
 
조선일보 1959년 3월 1일
저작집30; 5-15
전집20; 17-85
 
인간혁명 (1961 일우사)에 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