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눈 - 시선의 변화와 문명의 대전환
김용호 (지은이)돌베개2011-11-07
376쪽
책소개
서양의 지식과 동양의 지혜를 하나의 체계로 결합한 새로운 문명론. 현재의 과학혁명을 ‘시선의 변화’, 나아가 ‘새로운 눈의 탄생’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선의 변화’란 ‘관점의 변화’와는 다른 것이다. 관점의 변화는 이론들 간의 차이, 혹은 입장의 차이를 낳는 데 그친다. 반면 시선의 변화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사에서 말하는 패러다임 전환 이상의 변화다. 이 정도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생겼다’고 해야 적절하다. 현재의 과학혁명을 새로운 눈의 탄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류에게 아주 낯선 새 시선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파급효과는 과학뿐 아니라 인류사 전체에 미칠 수 있다. 통상 현재 진행되는 과학혁명은 서구 근대의 고전과학이 현대과학으로 바뀌는 정도로 이해되어왔다. 그 정도면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선의 변화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낡은 과학과 철학은 ‘두 눈’의 시선에 근거한 것이고, 새로운 과학과 철학은 저자가 ‘제3의 눈’이라고 부르는 아주 새로운 시선에서 생겨난 것이다. 제3의 눈은 새로운 의미를 보고 아는 지각체계이자 ‘온전’을 지향하는 앎의 체계면서, 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가는 운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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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의 말 | 시선의 변화로 문명의 전환을 읽다
서문 | 제3 눈의 탄생
1부 사라지다
01 물체, 사라지다
자연 속 물체를 찾아서 | 사회 속 물질을 찾아서 | 물체의 소멸
02 정신, 없어지다
일반정신을 찾아서 | 특수정신을 찾아서 | 정신 없는 사회
03 나, 소멸하다
나의 발생 | 살아 있는 너 | 나-너의 교직 | 나 증후군 | 허무와 맹신
2부 드러나다
04 빔, 드러나다
빈 마당 | 빈 나 | 온전 마당 | 빈 자유
05 빔, 품어 펼치다
본다, 그래서 꿈꾼다 | 나타났다 사라짐 | 형태공명 | 품어 펼침
06 의미, 떠오르다
의식의 연원 | 물질의 연원 | 우주를 만드는 의미 | 의미로 지은 집
3부 흔들리다
07 요동, 퍼지다
혼돈의 가장자리 | 문명 전환의 구조
08 토대, 진동하다
그물 짜기 | 대립의 뿌리 | ‘아니다’가 가리킨 곳
09 문명, 흔들리다
여섯 번째 대멸종 | 문명과 생명의 충돌 | 살아남느냐 배우느냐
4부 온전하다
10 온전, 향하다
온전을 향한 운동 | 지류들의 합류 | 온전한 앎 | 제3의 눈을 뜨는 나비
꼬리 주 | 그림 목록 | 참고자료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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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본다는 것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행위다. 원숭이들도 보이지 않는 창문 저편에서 인간이 쳐다볼 때는 보통 때와 다른 행동을 취한다. 시선에는 에너지가 담겨 있다. 어떤 시선이냐에 따라 다른 에너지가 전달되고, 따라서 다른 반응을 일으킨다. ‘나’와 ‘대상’의 이분법적 구분은 두 눈 시선의 착시에 기초하고 있다. ‘너’와 구분된 ‘나’는 아인슈타인의 표현처럼 시각적 기만이다. ‘나’는 시지각의 기만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나’가 미혹된 것이라면 ‘너’도 미혹 접기
근대 서구인들은 세계인들에게 경쟁은 모든 존재에게 피할 수 없는 조건이며, 자아를 향상시키는 계기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경쟁은 이원적 거리감의 착시와 이원론의 환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존재 불안은 대해 있음의 산물이다. 모든 존재를 ‘대해 있음’으로 규정한 서구 근대 문명은 구성원들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먹고 발전했다. 이분법적 착시와 환상에서 생긴 ‘나’는 우리가 겪어온 질병의 근원이다. (97~98쪽) 접기
한국도 프랑스 같은 선진국처럼 소비사회가 되었다. 소비사회는 필요나 수요에 따라 소비하는 게 아니라 상징적 의미사슬을 따라 소비한다. 상징의 사슬이 물결치는 바다에서, 삶의 내재적 가치를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상징이 풍겨내는 의미에 기꺼이 신용카드를 내민다. 사람들은 금방 지겨워지고 허무해지는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소비한다. 그들을 위해 광고가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제시한다. ‘서구적 몸매와 얼굴’이라는 첨단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한국은 성형수술 부문에서 세계 1위를 달린다.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이들은 실재하는 무슨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치조차 소멸한 허무의 껍질들을 핥고 버릴 뿐이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이 시대에서는 소비야말로 진정한 허무주의자다. 한국은 이 문명이 배고픔을 진정시켜줄 수는 있으나 그 대가로 삶의 의미를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명쾌히 보여주었다.
(104~105쪽) 접기
그리스 시대부터 서구 철학은 있음의 본질과 그 원리를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서구 종교에서는 신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 세상에 직접 개입하는 초월적 있음이었다. 모든 종교행위는 그런 ‘신의 존재를 믿느냐’를 확인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토록 있음에 집중했기에 20세기 들어 전면에 부상한 빔을 서구 사상의 전통에서 적절히 이해할 방도는 없었다. 서구인들이 있음의 소멸과 허무를 동일시한 것도 그것을 이해할 만한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 사상사에서 빔을 가장 적극적으로 탐색한 것은 수학에서 영(0)이라는 개념을 발명한 인도인들이다. 그중에서도 불교는 사상과 실천 모두에서 빔을 적극적으로 대면했다. 그 가르침은 빔이 주는 의미를 이해할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한국의 절에서 예불 때마다 암송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 논의의 맥락에서 번역하면 ‘사물은 곧 빔이다’ 혹은 ‘모든 사물은 비어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제3의 눈이 발견한 것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134~135쪽) 접기
사람들은 오늘날을 ‘급변의 시대’라고는 생각하지만, 하늘의 뜻이 바뀌는 혁명과정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있는 문명 간의 마지막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다가오는 전쟁이 마지막인 이유는 그 결론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귀결은 둘 중 하나다. 새 문명이 1만 년 넘게 지구를 지배해온 구문명을 밀어내고 새로운 삶의 원리로 자리잡느냐, 아니면 인류를 포함한 지구생명체의 대부분이 몰살하느냐다. 문명이 성공적으로 전환하느냐, 아니면 인간이 멸종하느냐로 그 귀결이 분명히 갈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건 문명 전환의 과제를 대면하고 있다. (286쪽)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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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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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태어났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에서 대중 문화 연구로 석사와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화방송 객원 연구원, 크리스천 아카데미 기획 연구원, (주)미디어밸리 조사연구팀장을 거쳐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같은 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이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문화 비평서 『와우 : 김용호의 영상 화두』와 『문화 폭발과 문화 전략』 『몸으로 생각한다』 등은 1990년대 말에 신선함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서구의 문화 이론, 물리학 등 과학 분야의 연구 성과, 그리고 ... 더보기
최근작 : <창조와 창발>,<제3의 눈>,<신화, 전사를 만들다> … 총 1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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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현대 문명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선의 변화’로 살펴보는 통섭학적 고찰
오늘날 우리는 시선의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은 낡은 시선이 전적으로 새로운 시선으로 대체되는 과정이다. 이 책은 현재의 과학혁명을 ‘시선의 변화’, 나아가 ‘새로운 눈의 탄생’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선의 변화’란 ‘관점의 변화’와는 다른 것이다. 관점의 변화는 이론들 간의 차이, 혹은 입장의 차이를 낳는 데 그친다. 반면 시선의 변화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사에서 말하는 패러다임 전환 이상의 변화다. 이 정도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생겼다’고 해야 적절하다. 현재의 과학혁명을 새로운 눈의 탄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류에게 아주 낯선 새 시선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파급효과는 과학뿐 아니라 인류사 전체에 미칠 수 있다. 통상 현재 진행되는 과학혁명은 서구 근대의 고전과학이 현대과학으로 바뀌는 정도로 이해되어왔다. 그 정도면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선의 변화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낡은 과학과 철학은 ‘두 눈’의 시선에 근거한 것이고, 새로운 과학과 철학은 필자가 ‘제3의 눈’이라고 부르는 아주 새로운 시선에서 생겨난 것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서구의 지식과 동양의 지혜를 결합한 과학철학적 논의이자 새로운 문명론
인류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 담론을 ‘시선의 변화’라는 키워드로 고찰한 독특한 문명론이 출간되었다. 『제3의 눈-시선의 변화와 문명의 대전환』은 성공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용호 교수가 20여 년간 화두로 삼아온 서양의 지식과 동양의 지혜를 하나의 체계로 결합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저자는 1만여 년 전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지구상에 최초로 등장한 인간의 문명을 ‘두 눈 문명’으로, 20세기 초부터 등장한 ‘있음’ 너머의 세계를 보는 눈을 ‘제3의 눈’으로 명명하면서 현재 지구와 인류가 거대한 문명 전환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아는 만큼 보고, 본 만큼 산다. 우리가 보고 이해한 의미는 다시 우리의 삶으로 펼쳐진다. 그것이 문명 형성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다. 새로운 시선이 생긴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보고 이해한다는 뜻이며, 새 의미에 따르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펼쳐낸다는 뜻이다. 문명은 의미에 기초해 생성되며 의미는 시선에 의해 생성되기에 어떤 시선을 갖느냐는 어떤 세계를 사느냐의 문제이자 어떤 문명을 사느냐의 문제가 된다.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다양한 학문 분야의 이론들을 거론한다.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여러 이론들로부터 언어학, 철학 등의 인문사회과학 이론들, 나아가 종교나 신화, 동화도 중요한 전거로 활용하고 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크로스오버학’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 다양한 분야의 이론들을 논하는 이유는 새로운 시선의 광범위한 파급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시선이 분과와 분야의 벽을 투과하여 퍼진 하나의 거대한 눈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그 눈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눈이자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갈 눈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따라서 핵심은 여러 이론과 철학들을 관통하는 경향성에 있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제3의 눈’이라고 명명한 새 시대의 눈이기 때문이다.
제3의 눈이란 무엇인가
‘내면의 눈’으로 간주된 제3의 눈(third eye)은 물리적 시각체계를 넘어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눈을 가리킨다. 이 눈은 사람의 마음도 보고, 먼 데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과거와 미래의 사건들까지도 본다. 20세기 초부터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처음에 이들은 소수였고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는 이런 이상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 출현할 뿐 아니라 상호 결합하는 양상까지 보인다. 이들은 지구라는 거대 몸체 속에서 작동하는 신진대사 체계도 보고, 태양과 지구 사이의 빈 공간이 휘어 있다는 것도 본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도 잠자며 꿈꾸는 것과 같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 세계의 든든한 기둥인 시간과 공간이 환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전 같으면 정신병원에 수감될 만한 주장들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이 유명한 과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신기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목격하고 주장하는 바의 공통점은 두 눈에 보이는 ‘있음’들과 그 질서는 사물의 실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있음의 세계 배후에 뭔가가 있고, 그것이 두 눈에 보이는 세계의 감추어진 연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없음’을 보면서, 없음이 있음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20세기 들어 인류에게 나타난 새로운 눈, 그것이 바로 ‘제3의 눈’이다. 제3의 눈은 과학혁명을 일으킨 시선이면서 동시에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일으키고 있다. 과학과 문명의 두 가지 수준에서 진행되는 혁명은 서로 공명하면서 서로를 증폭시킨다. 제3의 눈은 새로운 의미를 보고 아는 지각체계이자 ‘온전’을 지향하는 앎의 체계면서, 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가는 운동이기도 하다.
시선의 변화와 그것이 가져온 새 문명의 토대
진화의 역사상 영장류의 시선은 세 번의 큰 도약을 통해 완성되었다. 5만 5,000년 전 원숭이 조상 카르폴레스테스의 눈은 얼굴 옆면에 위치해 있었다. 이 눈은 몸의 뒤쪽까지 볼 정도로 넓은 지역을 감시하여 포식자들을 피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거리 감각이 없는 2차원적 ‘평면시’(平面視)였다. 이후 500만 년이 흐르자 원숭이 조상의 눈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두 눈이 얼굴 앞면으로 모아진 이 원숭이 조상의 이름은 쇼쇼니우스로, 눈이 감지하는 전체 시계(視界)는 좁아진 반면 거리와 입체 감각이 두드러지게 진화한 ‘입체시’(立體視)를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세상은 존재감을 갖는 ‘있음’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3,300만 년 전 지구에 한랭화가 불어 닥쳤을 때 등장한 카토피테쿠스라는 원숭이는 줄어든 먹이를 더 잘 찾기 위해 빛을 느끼는 시세포 수를 늘린다. 이에 따라 ‘중심와’(中心窩)와 안구 방이 만들어지면서 영장류의 시선은 비로소 안정된 영상을 얻게 되었다.
그들의 시선을 물려받은 인간은 세상을 있음과 없음, 확실성과 불확실성, 나와 너(주체와 객체), 물체와 정신 등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에 기초한 서구 철학은 데카르트에 의해 완성된 이래 인간의 의식체계 전반을 강고하게 지배해왔다. 이로써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약탈과 제국주의적 침탈, 물질만능주의 등이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데이비드 봄을 비롯한 여러 물리학자들과 소쉬르의 전통을 이어받은 기호학자들에 의해 그 믿음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의 걸출한 과학자들의 놀랄 만한 발견이 이어지면서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없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서구의 이러한 자각은 2,500년을 이어온 동양의 불교철학과 맥이 닿아 있다. 무아(無我), 빔[空], 무상(無常) 등으로 대표되는 불교의 가르침은 20세기 들어 서구의 과학이 도달한 결론을 이미 오래전에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리학과 동양사상,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과학과 불교와의 만남은 지식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어 온전한 앎의 체계를 세우려는 거대한 문명 조류의 표면적 양상이었다. 우리의 앎이 우리의 세계를 창조해왔다는 전제에서 보면, 고삐 풀린 지식을 지혜의 고삐로 다시 움켜쥐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문명의 흐름을 바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실천이 된다. 그 실천을 통해 지식 영역에서 출발한 제3의 눈은 지혜의 시선과 공명의 장을 이루며 온전한 앎을 펼쳐내는 샘이 될 수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문명의 토대는 완성된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결합으로 진정한 창조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때
이러한 거대 담론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 메시지는 무엇일까. 21세기는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패러다임을 요한다. 지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라는 신호로 끊임없이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인류의 문명은 처음으로 인간의 생존 가능성 자체가 의문시되는 국면에 돌입했다. ‘살아남느냐 멸종하느냐’, 인류는 지금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제3의 눈이 전하는 메시지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투명하게 알고, 그 앎에 기초하여 지구적 책임을 자각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지구 생명의 위기와 더불어 인류의 집단적 향상이라는 드문 기회 앞에 섰다. 이는 분명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개개인과 인류 전체를 위한 각성의 계기이며 동시에 수준 높은 새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벅찬 기회이기도 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지난 100여 년 동안 한국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상당 부분 서구화되었다. 관점의 서구화는 과거의 지식 패러다임에서는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편향성을 극복하고 서구 문화의 강점과 약점, 그 특수성과 보편성을 평정하게 바라보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동일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 평정한 시선이 있어야 오랜 세월 중국에 기대온 관성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미국에 기대온 새로운 관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바로 그 자유로움 속에서야 진정한 창조적 역량이 발동한다. 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자기 안에 있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결합해낼 때 한국 문화가 새로운 문명의 창조에 기여할 바는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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