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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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가, 장미는 ‘왜’가 없다 >
1. 우울한 시기이다. 그 우울함의 짙은 그림자를 넘어설 생명 에너지를 어떻게 하루 하루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로 우울했던 잿빛의 한 주간, 내게 많은 위로를 준 글이 있다. 17세기 독일 시인인 앙겔루스 실레시우스 (Angelus Silesius)의 시, “장미는 ‘왜’가 없다; 장미는 단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이다 (The rose is without ‘why’; it blooms simply because it blooms)”이다.
2. ‘성폭행 의혹’만으로 이미 주홍글씨가 붙여진 P라는 시인이 있다. 그 의혹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진 후에도 초기에 피해자 편이라는 ‘의로운’ 사람들에 의하여 성급하게 붙여졌던 성폭력 가해자라는 ‘주홍글씨’의 낙인은 그 존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개인들은 물론 정치, 언론, 종교, 집단 등에서 무고한 의혹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회적 인내심이 총체적으로 부재하다. ‘의혹 제기’만으로 모든 이들이 달려들어서 한 사람에게 린치를 가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과 정의감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가짜뉴스나 의혹제기만으로 한 존재에 대한 사회적 죽임만이 아니라, 이렇게 존재론적 죽임까지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3. 시인은 시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며, 섬세한 존재의 결을 품고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한 섬세한 결들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한번 붙여진 주홍글씨가 쉽사리 지워질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놀랍지 않다. 그 주홍 글씨의 결과는 단지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 무고한 주홍 글씨는 그의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삶과 연결된 모든 통로를 차단 받는 도구로 소환되곤 한다. 모든 통로가 차단되는 이런 폭력적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생물학적, 사회적, 존재적 숨을 쉴 수 있을까.
4. 지난 10월 14일, P 시인이 자신의 삶을 마감하겠다는 페북의 포스팅을 우연히 읽었다. 절절한 언어로 그가 쓴 이 지구로부터의 ‘고별사’를 나의 텍사스 아침에 읽으며, 내가 개인적으로 알지못하는 ‘먼 타자’이지만, 그 존재의 절망감과 아픔이 내게도 전해져서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다행히 무사하게 그 절망의 덫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후에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참한 사회적 죽임에 대한 절망감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5. 정의와 의로움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 도처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붙이고 있는 정죄의 주홍글씨—의혹의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의혹만으로 함부로 주홍글씨를 붙였던 사람들은 사과하거나 그 오류를 되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명, 그리고 그 사람과 관련된 주변 사람들의 사회적 생명에 가하는 파괴적 '집단 린치’를 참으로 쉽사리 가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얼마나 가학적이고 폭력적 존재인가.
6. 지금도 여전히 종교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갖가지 폭력들이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 경험하듯 인간의 권력 욕망과 이기성이 만들어내고 있는 생태계의 파괴와 그로 인한 위기들이 우리의 정신세계는 물론 생물학적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그뿐인가. 사랑이나 우정은 ‘교환경제’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렸다. 철저하게 계산된 관계가 지배하고 있다. 손익계산 후에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크다는 결론이 나오면, 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더 이상 쓰지 않을 물건처럼 던져버린다. 사랑은 소비되고, 소모되고, 그 다음에 손익계산이 맞지 않으면 ‘쿨(cool)하게’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전락하곤 한다. 이런 가치가 팽배하는 사회에서 사랑의 종말이나 상실을 아파하는 것은 ‘쿨한 것’이 아니다. 손익계산을 해서 손해보는 것 같은 사랑이나 우정을 단호하게 파기하는 것이 ‘세련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모든 것이 이렇게 ‘기브앤 테이크’라는 ‘교환 경제’로 전락해버렸다.
7. 계산-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하고, 갖가지 폭력들이 종교, 정치, 문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 현대사회에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분석해보면 공허한 욕망 이외에는 살아갈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인다. 이 다층적인 부조리의 삶에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까뮤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자살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철학적 주제”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추론은 중요하다. 산문의 세계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과 합리성만을 신봉하게 될 때, 생물체같은 존재함의 방식을 파괴하는 덫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존재함이 지닌, 사랑이나 우정이 지닌, 또는 관계의 진정성이 지닌 소중함과 아름다움은 언제나 이미 ‘합리적 추론 너머의 세계’에, 시적 세계에 존재한다. 실레시우스의 시, “장미는 왜가 없다”는 이러한 ‘합리적 추론 너머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작은 문을 조용히 열어준다.
8.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왜’ 우정을, 관계를 소중하게 가꾸는가. ‘왜’는 없다. 누구도 이 지구상의 삶을 선택해서 온 사람은 없다. 그러나 존재하기 시작하게 된 그 존재함 자체가 바로 이 살아감의 의미와 이유가 된다. 장미에게 도대체 ‘왜’냐고 묻는 합리적 추론은, 존재함의 신비와 합리성-너머의 소중한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앙겔루스 실레시우스는 오늘도 우리에게 전해준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살아감에는 ‘왜’가 없다; 살아있기에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왜 사랑하는가.
사랑에는 ‘왜’가 없다; 사랑하기에 치열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9. 합리적 손익계산을 과감하게 넘어서서, 자신속에 ‘장미’를 피워내고, 가꾸어내어야 한다. ‘장미’가 상징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든, 우정이든, 관계든, 존재함 자체든, 그 ‘장미’를 소중하게 자신의 삶 한 가운데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살아남아서, 합리적 계산 너머에서 다가오곤 하는 이 삶의 축제성, 장미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지켜가야 한다. 이 세계의 부조리와 끔찍한 폭력성이 주는 절망감 한 가운데에서도, 이 삶은 예상너머의 놀라운 일로 여전히 가득하다는 것—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것 같은 폭력의 시대에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을 부여잡고 지켜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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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오용주
장미는 그저 피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름없는 풀꽃도 온힘을 다해 핍니다.
· 1 w
Sun-joong Kim
계산이성 (calculative reason)과 "아니면 말고" 의 쉽고도 오만한 판단/정죄가 아니라,
다가가 들여다보며 "너도 많이 아프구나" 보듬어주는 그런 세상을 꿈꿔봅니다.
· 1 w
Kiho Kim
정의와 공의의 이름을 빙자한 쉬운 정죄 쉬운 판단 쉬운 단절, 관계의 거래 이 모든 사안들에는 결국 자기 포지셔닝이 존재 하는 듯 해요.
누군가를 정죄하고 집단 린치를 가하며, 조롱하고 비난하고, 차단하고 단절 시키며 자기 위치를 자위해야 그나마 자기 정체성이 유지되는 사람들, 이들이 부르짖는 정의가 공허 한 이유 입니다.
사람은 단편으로 해석 될 수 없고, 삶은 더욱 다층 적인데도 이리에 따라서 언제든 그 거울을 뒤집고 파괴 해 버릴 수 있는 용기는 용감한 정의가 아닌, 무책임 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죠.
마치 사유 하지 않는 좀비들 처럼 망각과 기망의 탈을 잘도 사용하죠.
정의가 오염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1 w
강남순
아렌트가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늘 되새겨보는 것--정의의 이름으로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인 것 같습니다. 정의는 역사속에서 늘 '오염'되어 왔기에, '누구의 정의'이며, '누구의 이득'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정의인가를 늘 비판적으로 물어야 하겠지요.
· 1 w
차진희
삶은 축제,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살다가면 되겠지요. 사명감, 강박 벗고 가볍게 공기처럼 물처럼 흐르고 싶네요
· 1 w
Taekgeun Jung
조국교수...를 생각합니다.
· 1 w
Felix Hwang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 그리고 내게 최고의 보스였던 그 분.
폭력의 시대에 삶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던 그들을 그립니다.
그러면서 나는 예상너머의 놀라운 일을 기대하며 지켜냅니다.
나를!
· 1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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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선생의 헛발질.
1. "P라는 시인"은 '시인'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툭하면 자살시도와 암시로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해왔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글을 기고한 바 있음. 그 행위들이 여성혐오에 근거한 갑질이자 폭력이었다고 스스로 정의까지 내렸음. -> https://archive.is/OqkIG
무죄판결이 난 고소건을 제외해도 그는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문단내 성폭력 가해 사례로 비판받아 마땅함.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고발한 '기고' 이후에 어떤 책임을 졌는지 확인된 바 없음.
1-1. 따라서 "성폭행 의혹’만으로 이미 주홍글씨가 붙여진.."는 사실이 아님.
P시인의 경우는 피해자들의 폭로와 고발이전에 자기 자신의 가해사실들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이 먼저 이루어 짐. '의혹'이 아니라 자신이 확인한 '사실'임. 다만 그 이후에 이어진 고소고발사건이나 '미성년자 상습 성추행'이라는 새로운 의혹에 대해서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판결난 것일 뿐.
그러니까 그가 기고한 내용에선 피해자가 실제로 존재하고 상습적인 갑질(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명백하지만, 그에 대한 '법적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 물론 윤리적 책임에서도 피해자들을 일일히 찾아 사과했는지 알려진 바 없음
2. P시인은 예전에 고은에 대한 최영미 시인의 폭로로 한창 여론이 들끓었을 때, 자신도 고은의 성폭력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글을 써서 명훼고소당했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지 못해 패소한 바 있음.
P시인이 오로지 무죄판결난 고소사건과 명훼소송건을 근거로 자신의 억울함이나 피해를 호소하는 건 마치 고은이 P시인에게 승소한 명훼소송건을 내세워 문단내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된 자신의 혐의를 전부 부인하고 무고의 희생양으로 호소하는 것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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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권다미
발화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이가 자신의 지식을 적용할 현실의 접점에 대해 이렇게 안일하고 무성의한 판단으로 글을 써대는 건 그동안 그의 지적성취를 높이 사 되도록 선해하고자 하던 이들까지 물먹이고 우롱하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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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의 여성혐오를 고발합니다
※ 현재 문단의 화두인 ‘여성혐오' 문제와 관련해서 박진성 시인이 보내온 글을 싣습니다. 박 시인은 2001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고, 시집 [목숨] [아라리] [식물의 밤]과 산문집 [청춘착란]을 낸 바 있습니다. -편집자 주
진성아.
네 이름을 부르는 게 이렇게 낯설다. 그래. 나는 지금 너에게 편지를 써보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렇게 낯선 걸 보니 너는 네 자신을 아껴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글쓰기라는 게 어떤 페르소나를 쓰고 쓸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최대한 그 페르소나를 벗기고 ‘생활인으로서의 박진성’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고백하고 반성해보려고 한다.
진성아.
너는 얼마 전에 한 편의 글을 읽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문단 내의 ‘여성혐오’를 고발한 김현 시인의 글 ‘질문 있습니다’( 2016년 가을호)를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그 글은 문단 내에 만연한 성희롱과 성추행을 고발하는 글이었다. 시인에게 술자리의 다른 곳에 있는 여성들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하는 시인 1, 술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그 여성 앞에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했던 시인 2, 여성들의 이름을 쭈욱 나열해놓고 ‘따먹고 싶은’ 순서대로 나열해보라고 시킨 시인 3, 4, 5. 그리고 걸레 같은 년이라고 몸 팔아서 시 쓰는 년이라고 대놓고 여성 시인들에게 폭언을 한, “명예 남성”을 자청한 여성 시인 0. 그리고 그 수많은 일들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던 “잠재적 방관자들”. 그리고 시인이 차마 열거하지 못한 시인 1-1, 2-3, 3-5의 수많은 사례들을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네 자신이 시인 1과 2와 3, 4, 5는 아니라고 네 스스로를 일단 안심시켰다. 너는 그런 너의 모습에서 어떤 증오와 역겨움의 감정을 느꼈다. 너야말로 그 수많은 폭력들을 지켜본 ‘잠재적 방관자’였잖니? 그 방관자로서, 네 스스로가 지목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하고 위안을 삼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흉측하니. [더 멀리]라는 독립 문예지에서 동료 문인에게 혐오 폭력을 당한 다른 문인들의 제보와 기성 작가에게 혐오 폭력을 당한 지망생들의 사례들을 제보 받는다는 글을 보면서 너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두려운 거겠지. 네가 한 짓이 있으니까. 너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진성아.
너 자신을 고발해보자. 일단 너 자신부터 되돌아보자. 너는 ‘여성혐오’에 대한 개념을 최근에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 말이 ‘misogyny'라는 말의 번역에서 온 말이라는 것을, 이 말이 단순히 ’hate'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을 존중하지 않고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일련의 모든 행위가 사실은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너는 최근에야 알았다. 그러니까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여성혐오에 해당된다는 것을, 나아가 ‘어머니’나 ‘딸’과 같은 대상에게 맹목적인 예찬과 사랑의 말을 무차별적으로 퍼붓는 것도 사실은 넓은 의미에서 여성혐오에 해당된다는 것을 너는 최근에야 알았다. 이러한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으니, 모르고 그랬으니, 과거의 너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자, 네 스스로를 고발해보자.
진성아.
이십대 초중반의 ‘화려한’ 너의 여성 편력에 대해 너는 알고 있다.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갈아타면서’ 네가 사귀었던 여성들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존중하지 못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 기웃거리는 것을 무슨 소명으로 알고 살았던 시간들이 네게는 있었다. 열아홉 때, 사귀던 여자에게 버림받은 상처 때문이라고, 그래서 여성들을 ‘혐오’하게 되었다고 언제까지 네 자신을 변호할래. 그런 너의 행동들이 젊은 날의 객기였다고 언제까지 낭만적인 변론을 네 자신에게 늘어놓을래? 응? 왜 그랬니. 이제는 연락조차 할 수 없는 그 숱한 여성들에게 너는 어떻게 사과를 할래. 너는 지금 괴로워하고 있다. 너는 지금 네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 자, 더 고발해보자.
너는 결혼을 한 적이 있다. 결혼했던 그 여성을 너는 대체로 ‘무시’하는 편이었다. 무시는 사소한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사소한 것이 쌓여서 점차 큰 폭력이 된다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그렇게도 싫어하는 예전의 네 아내와 같이 살던 그 좁은 집에서 너는 하루에 두 갑씩의 담배를 피웠었지. 그렇게도 그 여자가 싫어했는데 말이다. 제발 한 번이라도 같이 장 보러 가자는 예전의 네 아내의 간청을 너는 매번 거절했었지. 그게 그렇게 어려웠니? 그러면서 예전의 네 아내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있을 때, 여자가 그게 뭐니, 라고 말하고 있던 너는 얼마나 쓰레기였나. 상대방이 바라는 건 사소한 것도 잘 못 들어주면서 ‘여성다움’을 강조하던 너는 그냥 쓰레기였다. 너도 마찬가지로 그 여자에게 존중받지 못했다고 변명하지 마라. 너는 존중할 준비도, 존중받을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인간이었다. 이혼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변명하지 마라. 사과할 때는 그냥 사과만 해라. 너는 지금 예전의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 너는 지금 너를 고발하고 있다. 자, 진짜 고발은 이제부터다.
진성아.
너는 이따금씩 네 시가 좋다고 네 글이 좋다고 찾아오는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다. 카페에서 만나 술집으로 이동하는 패턴을 너는 반복했다. 네 시 좋다고 네 글이 좋다고 찾아오는 여성들을 너는 존중하지 못했다. 존중하지 않았다.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지랄을 떨었다. 실제로, 눈이 맞아서, 모텔에 들락거린 적이 너는 있다. 그것을 말의 온당한 의미에서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혹시 네가 네 지위를 이용한 ‘갑질’이 아니었을까? 그것이야말로 ‘여성혐오’가 아니었을까? 자, 더 고발해보자. 아직 멀었다.
진성아.
너는 요즘도 자주 응급실에 간다. 너는 요즘도 자주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그럴 때, 너는 불특정의 ‘여성’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같이 있어달라고, 제발 같이 있어달라고, 안 그러면 죽어버리겠다고. 네가 그 지랄을 떨어서 달려온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과 어떻게 했니?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잠자리를 하고. 너는 그런 적이 있다. 그게 다 ‘갑질’이고 ‘여성혐오’였다는 것을 너는 최근에야 알았다.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어떤 동의도 구할 수 없다.
진성아.
너는 혹시 네 작품을 쓰면서 ‘여성’을 무조건적으로 신비화한 적이 없니? 아니라고 말 못할 것이다. 너는 네 어머니의 ‘희생’을 주제로 쓴 시로 등단이란 걸 한 적이 있다. 너는 네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을 쓴 시로 문단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너는 지나간 애인을 ‘몸으로 혹은 밥으로’ 여긴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은 적이 있다. 너는 네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쓰면 그 ‘희생들’과 그 ‘연민들’이 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너는 네 스스로를 속였던 거다. 그냥 그런 거다. 모든 작품을 단일한 잣대, 즉 ‘젠더 의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너의 작품들은 좀 유난한 데가 있었다. 네 시 속의 여성들은 어찌나 그렇게 한결같이 너의 ‘화자’들에게 희생적인지. 그 희생, 혹시 네가 강요한 거 아니니? 너는 아니라고 말 못할 것이다. 그게 여성혐오였던 거다. 그게 폭력이었던 거다. 너는 알아야 한다. 알고 반성해야 한다.
진성아.
타인을 아끼는 일이 너 자신을 아끼는 일이란 것을 너는 최근에야 알았다. 타인을 존중하는 일이 네 자신을 존중하는 일이란 것을 너는 최근에야 겨우 알았다. 네 안의 쓰레기들을 치우자. 네 안의 ‘여성혐오’를 버리자. 그때나 가서야, 너는, 비로소 시 다운 시 한 편 겨우 쓸 수 있을 거다. 반드시 그럴 거다. 미래의 너를 미리 고발해둔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그런 짓을 용납할 수 있는 네 자신은 죽었다고. 네 스스로 죽이려고 이런 글을 쓰는 거라고, 너는 다시 한 번 너에게 다짐해보자.
“사과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혀요. 게다가 사과 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한테 하는 건. 아니지. 그건 지 숨구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 영화 [우아한 거짓말] 중
글 박진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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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young A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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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명/사랑의 이름으로
강남순 교수의 페북글은 최근 점점 더 견고해지는 성폭력 부정주의에 새로운 담론 프레임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번 '애도'의 정치에 대한 글의 연장에서 보자면, 특정 사안에 대한 논평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무죄추정의 원칙, 피해자가 아닌 '피해호소인'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들은 '사법적 판단의 논리적 근거'나 '근거없음,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나 "합리적 추론", "법적 추론" 등의 논리를 동원해서 사실 관계 자체를 부인하거나,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가장 직접적인 문자적 부인의 수사를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성폭력 사실 관계를 부정하는 문자적 부인의 수사는 애도 정국을 지나면서, '슬픔은 인간 공통의 것이다', '죽음 앞에 예의를 지켜라'라는 식의 '인간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논점을 전환했다. 이런 방식을 사실 관계 규명 여부에 따라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때 논점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함축적 부인이라고 한다.
김명희,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부인(denial)의 정치학」, 한국여성학, 33호, 2017.9, 240쪽.
이렇게 담론 프레임을 전환시키는 부인의 정치에 의해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는 입장은 '비인간적', '비윤리적' 집단으로 '이유없이(근거없이)' 배치된다. (이건 이유없는 생명 담론이 만들어내는 효과다.)
이렇게 '애도', '이유없는 생명'과 같은 담론 프레임을 통해서 피해자와 피해자에 연대하는 이들은 죽음과 생명의 상실이라는 절대절명의 윤리적 소명이 요청되는 사안 앞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자기이익만 챙기는 집단" 혹은 "이해관계 때문에 인간에 대한 존중도 저버리는 집단"으로 전도되었다.
강남순 교수의 글에서 "이유가 없는 생명 그 자체"와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세속 집단"에 대한 배타적 대비는 이렇게 성폭력을 부인하는 담론 정치에 기여하고 또 영향을 받고 있다. 이 담론을 모두 특정 개인이 만든 게 아니라는 뜻에서이다. 그러니, 자신의 말이 어떤 정치적 맥락과 효과를 발휘하는 지 살피는 일이, 말을 부리는 학자의 살핌이자 이른바 담론 윤리에 대한 고민이 아닐까.
10월 18일자 기고글을 보고, 퀴퍼 앞에 거대한 벽을 둘러치고, 전철역에서, 길거리마다 "우리는 당신들을 증오하지 않고 사랑합니다", "생명은 소중하다" "기다릴게 돌아와"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집요하게 흔들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17세기 독일 시인이 노래한 "생명 그 자체의 숭고"는 소수자를 죽이는, 차별부인주의의 수사로도 작동한다.
2. 생명의 숭고함, '기득권(남성) 권력'을 돌보는 방법-새로운 돌봄 윤리와 담론이 필요한 이유
문단 내 성폭력 사건 고발이 시작되던 당시, 당사자가 아닌 연대자로서 마음을 쓰고 몸둘 바를 살폈던 이들이 많다. 마치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건이 엄청난 권력을 획득해서 무고한 작가들을 죽음에 내몰고 있는 것처럼 논의하는 일 역시 일련의 성폭력 부정주의와 기존 권력 집단의 재권력화 과정의 하나이다. 분노하거나 슬퍼하기보다, 분석하고, 생각하고, 쓰고 나누고 새로운 윤리와 담론을 만들어가면 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문단 내 성폭력 사건 고발 당시 여러 그룹의 연대자와 연대 모임이 있었으나, 많은 모임은 해체되고 다들 상처를 안고 흩어졌다. 거의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게 된 건 언어화할 수 없는 많은 힘겨움들과 부대낌 때문이다. (물론 이건 당시 미투 운동이 무기력하거나 불안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피해자와 연대자들은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운동을 진행해나갔다.)
피해자들 대부분 몸과 마음이 다 힘들고 정신상담, 심리치료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대부분 피해자나 지원자들중 많은 이들이 이런 담론장에서도 스스로 사라져갔다. 이 담론장 자체를 견디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페북을 완전하게 접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끔이라도 내 페북을 보는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오늘 이 글을 쓰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법적 지원을 돕거나 심리 지원을 돕는 이들에게 극단적 선택의 직전까지 이르는 피해자들을 돕고 함께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누구도 해 본적 없는, 게다가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피해자에 대한 전문 상담/지원 기관을 충분하게 만들고, 문화예술계, 대학, 노동계 등 특정 부문마다 고유한 성폭력 구조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청이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피해자의 생명, 피해자의 삶과 죽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미 고통으로 일그러진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사회적 구조도, 최소한의 담론적 지지 기반조차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게 이유없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되려면 자신의 말의 부림부터 살필 일이다.
이런 말들이 결국 기득권에 대한 편들기나 남성 권력의 되풀이에 불과하더라도 하나씩 곱씹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말을 곱씹는 과정은 단지 누구를 겨냥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공개로 편을 만들어서 친구끼리 누구를 조롱하고 편가르는 일과는 다른 페미니즘 정치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남성 권력을 돌보는 데 급급한 생명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성차별적-종차별적 권력을 정당화해왔고 정당화하고 있는지 페미니즘은 오래 비판해왔다. 페미니즘 정치는 마치 젠더와 무관한 체 하는 생명 존중의 논의가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권력으로 작동한 역사를 비판해왔다. 또 그와는 다른 생명 윤리와 새로운 돌봄 윤리를 만들어왔고 만들고 있다. 오늘 이 페미니즘 담론장의 논의 역시 그런 역사의 한 장면이다.
Comments
박은규
테스'형'글 때와는 다릅니다.
· Reply · 6 d
김오매
피해자의 생명, 피해자의 삶과 죽음.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가해자의 생명과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피해자의 삶에 대해서도. 안부의 신호를 보내는 행간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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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범죄 무고는 당연히 있다. 성범죄뿐만 아니라 다른 범죄에도 무고는 당연히 있다.
피해자 진술은 성범죄의 직접 증거다. 피해자 진술은 성범죄뿐만 아니라 다른 범죄의 직접 증거이기도 하다.
무고 범죄 중 단연코 1위가 뭐냐고? 뭔진 몰라도 성범죄는 아니다. (보통 마약 무고 많고, 그 외 다투다가 무고로 번지는 경우 가끔 나온다. 횡령 배임 사기 등등. 성범죄 무고도 있음)
강력범죄 중 체감상 빈도수 1~2위는 성범죄다. 얼~마나 많게요~
이런데 성범죄 무고 하나 터지면 남성역차별시대라느니 불공정의 시대라느니 이런 얘기들이 와르르 나오는 이유가 뭘까, 진짜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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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짓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며 남성을 고소한 혐의(무고)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은 A씨. 징역 6개월 형기를 마치고 나온 A씨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8일 A씨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A씨는 무고 상대방인 B씨의 법정 진술이 거짓이라는 법원 판단을 근거로 재심해달라며 19일 대법원에 항고했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A씨의 재심 청구 기각에 대한 즉시항고 사건을 심리 중이다. A씨는 “재심을 통해 내가 ‘꽃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그저 억울함을 풀고 싶은 마음”이라고 전했다. 사건은 3년 전 20대 초반 사회초년생이었던 A씨가 “술에 취해 기억이 없는 상황에서 성관계가 있었다”며 B씨를 고소하며 시작됐다.
일러스트= 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한 시중은행 신입사원이었던 A씨는 2017년 5월 회사 상사인 B씨와 술을 마셨다. 그날 밤 호텔에서 성관계를 가졌다. 이후 A씨는 B씨를 준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준강간은 만취 상태 등 항거불능을 이용해 간음할 경우 성립하는 범죄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B씨가 경찰에 제출한 녹음파일이 무혐의로 판단한 근거였다.
B씨는 성관계 도중 휴대전화 녹음 애플리케이션(앱)을 켜놨다. 해당 녹음파일엔 A씨가 대화가 가능했고 “계속 하자”고 말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A씨는 녹음파일을 근거로 ‘꽃뱀’으로 몰렸다. 오히려 무고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런데 1심 재판 과정에서 B씨가 녹음파일 일부를 편집한 사실이 드러났다. 원본 파일을 들어보면 A씨는 당시 남자친구 이름과 남자친구를 부르던 '오빠' 호칭을 여러 차례 부른다. A씨가 B씨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모두 B씨가 수사기관에 제출한 파일에서 삭제한 부분이다.1심을 맡은 서울서부지법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은 “A씨가 술과 잠에 취한 상태에서 남자친구로 착각해 성관계에 응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B씨는 A씨가 간간이 남자친구 이름을 부르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고소를 당하자 녹음파일을 제출하면서 일정 부분을 고의로 삭제해 제출했다”고 판단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울서부지법. 뉴스1그러나 2심은 지난해 2월 1심을 깨고 A씨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남자친구 이름을 부른 것은 습관적으로 나온 말일 뿐 B씨를 남자친구로 여기고 한 말은 아니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남자친구에게 호텔 방을 미리 알린 적도 없어 상대방을 착각했다는 말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A씨는 수사기관에서 “의식이 없던 상태에서 누군가 몸을 만져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부르며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고 진술했다. 1심은 이 진술을 결정적으로 봤다. 당시 A씨는 녹음파일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증거와 일치하는 진술을 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술에 취했다고 하면서 이름을 불렀다는 세부 사실을 기억한다는 게 상당히 이례적이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확정했다.
A씨가 6개월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인 지난해 10월 B씨에게 벌금형이 확정됐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B씨의 위증이 인정됐다. 판결문엔 “B씨가 재판에서 ‘음질 수정 목적으로 파일에 손을 댔다. 일부러 누락한 부분은 없다’고 말했지만, B씨가 음성파일 제출 전 남자친구를 부르는 부분과 A씨를 수차례 불러도 A씨가 만취해 전혀 대답하지 못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사실이 있다”고 적혔다.
재심청구서(기사와 관련 없음). 뉴스1형사소송법 420조에 따르면 판결의 증거가 된 증언이 확정판결로 허위로 증명될 경우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대법원 판례는 해당 증언과 유죄 인정이 직접 관련 있지 않더라도 허위 증언이 인정되면 재심 사유가 있다고 본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억울함 풀고 싶다"
편집한 녹음파일
B씨는 성관계 도중 휴대전화 녹음 애플리케이션(앱)을 켜놨다. 해당 녹음파일엔 A씨가 대화가 가능했고 “계속 하자”고 말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A씨는 녹음파일을 근거로 ‘꽃뱀’으로 몰렸다. 오히려 무고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런데 1심 재판 과정에서 B씨가 녹음파일 일부를 편집한 사실이 드러났다. 원본 파일을 들어보면 A씨는 당시 남자친구 이름과 남자친구를 부르던 '오빠' 호칭을 여러 차례 부른다. A씨가 B씨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모두 B씨가 수사기관에 제출한 파일에서 삭제한 부분이다.
1심 무죄→2심 징역 6월
A씨는 수사기관에서 “의식이 없던 상태에서 누군가 몸을 만져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부르며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고 진술했다. 1심은 이 진술을 결정적으로 봤다. 당시 A씨는 녹음파일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증거와 일치하는 진술을 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술에 취했다고 하면서 이름을 불렀다는 세부 사실을 기억한다는 게 상당히 이례적이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확정했다.
출소하고서야 인정된 B씨 위증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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