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전쟁: 불살생과 대량살생 / 심재룡
[특집] 현대사회와 불교윤리
[KBS 제작 달라이 라마와의 미공개 인터뷰 포함]
[15호] 2003년 06월 10일 (화) 심재룡 jrs@snu.ac.kr
불교는 평화의 종교다. 불교의 계율은 불살생을 가장 큰 덕목으로 가르친다. 역사상 불교권에서는 살생을 주무기로 하는 전쟁이 공격적으로 치러진 적이 없다. 이 근거로서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불경을 전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불경과 계율이 제시하는 불살생 원칙에도 불구하고 불교사회에서 전쟁과 갈등은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비일비재하다.
왜 그럴까? 불교사회에서도 '성전(聖戰)' 또는 '의로운 전쟁'과 같은 개념은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선 불교의 규범적 반전·평화관을 제시한다. 대량살생 곧 전쟁은 계율의 문제로 접근하기에는 버거운 또 다른 차원이 있는 모양이다.
최근에 불거진 불교권역에서의 전쟁 내지 대규모 갈등은 과연 불교적으로 정당화되는지 아니면 어떤 비판을 받고 있는지 이들을 반성함으로써 불교의 사회적 발언과 참여가 지닌 한계를 지적해 보고자 한다. 불교의 전쟁관에 대한 실증적·역사적 반성은 이제까지 시도된 적이 드물기 때문에 이 글의 한계 역시 자명하다. 귀납적 연구를 통해 모든 불교권을 망라한 일반적 결론을 도출하기란 불가능하다. 혹시 불교를 영원 불멸의 진리로 이해하는 독자 제현에게 반성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1. 《법구경》에 나타난 반전 평화 사상: 상좌불교권의 규범적 평화관
죽이거나 죽는 자는 한낱 그림자이거나 허깨비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인간의 현실적 세계를 긍정하면서 불교는 영구한 평화를 희구하며, 이의 실현을 위해 오직 한 가지 길을 제시한다. 불교의 초기 경전 군에 속한 《법구경》의 빨리어 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에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 법정 스님이 옮긴 《진리의 말씀 『법구경』》에서 따옴(불일소책, 1984, p.12). 한역에는 여기에 '참을 인(忍)' 자를 덧보태어, 원한을 품기보다는 참음으로써 끝없는 한풀이의 종언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 방법이야말로 여래의 진리임을 표방한다(不可以怨以怨 終以得休息 行忍得息怨 此名如來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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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고전적 평화사상은 바로 이 한 마디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인도의 정통 사상으로 인정하는 힌두이즘의 고전 《바가바드 기따》에 나타난 전쟁 또는 살생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에 따르면, 그 주인공 아르쥬나는 친척을 죽이는 전쟁을 행함에 아무 원한도 지니지 않고,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허깨비를 치듯이 살육을 행해도 그 것은 오직 무사의 의무를 행하는 것일 뿐이라 한다. 혹시 전쟁 중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태어남이 약속되어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한다. 그러나 《법구경》은 다시 태어남을 약속하기 보다는 죽음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온갖 싸움이 사라질 것을.{{) 《법구경》 제6절. 이 부분의 법구경의 번역은 대부분 법정 스님의 《진리의 말씀》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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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보편성을 눈앞에 두면 싸움의 종식된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 가짐을 유도하여 싸움 내지 갈등을 해소한다고 해야 할까?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자는 괴로와 누워있다.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은 승패를 버리고 즐겁게 산다. (법구경 201절)
《기따》는 범법자를 제거하는 의로운 전쟁을 통해 세계의 질서(法, dharma)를 보전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한다는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반해, 《법구경》은 단도직입적으로 행복의 기준으로서 승패를 떠나 고뇌와 탐욕과 원한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즐거웁게 사는 길을 제시한다.
《기따》에 나타난 힌두적 성전관(聖戰觀)과 《법구경》에 나타난 불교의 평화관은 이렇게 정반대이다. 더욱이 불교에서는 그처럼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자세한 실천방도까지 제시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평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흔히 부처님께서는 사회사상가로서는 부족한 분이라거나 심지어는 실패한 분이라고까지 하는 주장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가 과연 정당한지를 생각해 보자. 필자는 빨리어 불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생각을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즉 평화로운 사회, 평화로운 인간관계, 평화로운 마음씨, 이렇게 세 가지 모습으로 부처님의 반전·평화사상을 그려봄으로써 그러한 부정적 평가를 바꾸어 보고자 한다.
'평화로운 사회'란 인간들이 즐겁게 살 수 있는 사회다.
단지 제 마음의 즐거움만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즐거움이 있는 사회다. 불교에 따르면 개인의 도덕적 행위와 적당한 부(富)가 함께 할 때 평화로운 사회는 가능하다고 한다. 빨리어 불전 《앙굿따라 니까야(A guttara-nikaya)》(II. 75)에는 "정의로운 지배와 경제적인 안정이 온 백성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저들로 하여금 네 가지 즐거움을 함께 누리게 한다"고 적혀있다.
첫째, '소유의 기쁨'(attisukha)이다. 지나친 탐욕이 아니라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적당한 부에 만족하는 기쁨이다. 둘째, '부를 사용하는 기쁨'(bhogasukha)이다. 위의 소유를 제대로 의롭게 사용할 때 느끼는 기쁨이다. 본래 소유는 도구적 가치를 지닐 뿐 그 자체가 궁극적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셋째, '빚이 없는 기쁨'(ananasukha)이다. 단순한 금전적 빚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일체의 의무를 수행하고 더 이상 사회에 빚을 지지 않는 자는 즐거울 수밖에 없다. 넷째, '허물이 없는 기쁨'(anavajjasukha). 오직 의롭고 덕 있는 도덕적 삶을 누리는 자에게나 이 기쁨은 가능하다.
불교가 그리는 평화로운 사회는 단지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 표현을 넘어 고상한 도덕성이 삶의 질을 결정하여 사회 구석구석에 웃음꽃이 핀다.
위와 같이 평화로운 사회의 구성원들간에는 네 가지 덕성이 보인다. '친절함'(metta), '남의 고통을 나누어 가짐'(karuna), '남의 기쁨을 나누어 가짐'(mudita), 그리고 고통과 기쁨을 비롯하여 '온갖 고난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이다. 흔히 한자로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하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네 가지 마음가짐은 불교적 평화를 이룩하는 대인관계의 기본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아마 사무량심 가운데 친절 하나만이라도 실행하면 한 사회는 물론 국제관계마저 단숨에 바꾸어 평화가 찾아 올 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단순한 사회 또는 국가 간의 평화보다는 한 개인의 마음에 깃든 영구한 평화의 구축에 있다 할 것이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는 불자가 아무리 사회와 국가의 평화를 외친다 한들 그 것은 헛된 공염불일 것이다. 팔정도를 따라 마음을 가라 앉혀 올바른 수행을 거친 자는 소위 마음 속의 부정적 삼대 요소, 즉 탐욕과 화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마음가짐을 지니지 않게 된다.
이처럼 흔들림이 없이 평화로운 마음씨를 일러 불교에서는 열반(nirv a / nibbana)이라 한다. 열반을 궁극의 목표로 수행정진하는 사회가 곧 불교식으로 평화로운 사회요, 그 구성원이 평화를 진작하는 평화의 일꾼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모습을 다시 한번 뭉뚱그려 평화로운 불교적 이상향을 그려 보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누구나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단순 소박한 생활을 영위한다. 둘째, 인간의 기본적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기본적 인권이 보장된다. 셋째, 통치자와 행정요원들은 모두 의롭고 도덕적이다. 넷째, 모두에게 일터가 주어지고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된다. 다섯째, 사회구성원은 적어도 다섯 가지 불교의 계율을 자발적으로 지킨다. 여섯째, 도덕의 인과응보를 믿어 남을 해치지 않고 누구나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도와가며 살아간다.
2. 불교적 사회와 전쟁
빨리어 불전에 보이는 규범적 평화 사상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사회라고 전쟁이 없을 수 없다. 스스로 남을 침략하지는 않아도 침략을 받을 경우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당연하다. 부처님께서 평화적 사회를 구현하는 매우 구체적인 가르침을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불법(佛法)을 수지하고 성불(成佛)을 기원하며 전문적으로 수행에만 전념한다는 승려들이 계율적 가르침을 무시하고 세속인들이나 씀직한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종종 이권다툼이나 권력투쟁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을 접어 두기로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혹시 불교는 그 사회·정치·경제 등 인간의 모듬살이와 관계된 분야에서만 모든 문제를 심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결국 어딘가 사상적으로 부족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폭력과 갈등에 대한 불교적 해결, 즉 원한을 사랑으로 되돌려 주자는 주장은 허공에 메아리치는 공염불인가? 우리는 경전에만 의지하여 불교의 반전·평화 사상을 마냥 규범적으로 들먹이기만 하지말고, 구체적으로 어느 사회에서 어떤 경우에 피치 못해 전쟁이나 폭력을 사용하게 될 적에, 저들이 어떤 정당화를 사용하는지 알아 볼 것이다. 우선 최근 몇 백년간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의 무력과 전쟁에 시달리던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들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자.
1) 동남아 소승불교권의 경우
근세에 서양의 제국주의자들과 전쟁을 수행한 동남아 불교국가들의 전쟁을 연구한 트레버 링에 따르면, 정작 어느 특정 국가의 종교와 전쟁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짓는다.{{) Trevor Ling, Buddhism, Imperialism and War (George Allen and Unwin, 1987). 한글 부분역에는 한길사의 "오늘의 사상신서" 제30권으로 편찬된 《현대사회와 불교》(이재창, 월폴라 라훌라 외, 1981)의 pp.348∼366을 참조할 것. }}
이렇다면 불교권의 국가들은 물론 어느 종교를 국교로 삼던가 주요 종교로 신봉하는 나라들의 전쟁은 적어도 종교 탓만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국가권력이 존속하는 한, 경우에 따라 전쟁과 평화는 늘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사실 종교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기 때문에 생겨나는 전쟁이 많다.
특이한 것은 이들 동남아 국가들에서 불교 및 전통 종교의 영향으로 대인 관계에는 비공격성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정작 전쟁 상태에서는 지나친 잔인성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태국과 미얀마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대인관계에서 도발의 회피는 그 근원을 불교의 소승경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위에 언급한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는 《법구경》의 고전적 가르침과 비폭력·불살생이라는 규범적 가르침의 전통은 동남아 제국의 일반 불교도들 사이에 엄청난 감화를 끼쳤음에 틀림없다. 동남아 제국에서 보이는 사회적 대인관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개인적 도발적 충동들을 직접적으로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간접적으로 불완전하게 남의 험담을 즐기는 식의 발산이 많다는 것이다.
또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충동들을 자신의 정신역학 내부로 고립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적국에 대한 전쟁 상태는 그들이 군대 조직 속의 규율에 적응하기 전에 전쟁의 폭력을 이용하여 분노의 덩어리를 아무런 통제 없이 발산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심리적 설명이다. 이 설명으로 우리는 혹시 불교국가의 군대가 왜 위험한 상황에서는 비겁하고 승리할 경우에는 잔인성을 보여주는지 얼마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관찰이 혹시 최근 크메르루주의 잔학상을 부분적으로는 설명할 수는 있지도 모르겠다.
2) 대승불교권의 경우
한편 대승불교권 국가에서 전쟁은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는가? 중국과 일본의 경우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승불교의 보살도에서 그 정당화의 싹을 찾는다.{{) 중국의 경우는 John J. M. de Groot의 "Militant Spirit of the Buddhist Clergy in China", T'oung Pao, Series 1·2, no.2 (1891), pp.127∼139 참조. 일본의 경우는 Paul Demieville의 "Le Bouddhisme et la Guerre", Melange publies par l, Institut des Hautes Etudes Chinoises 1 (1957), pp.347∼385참조. }}
보살은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보다 작은 악을 제거하는 데 불살생을 범하지 말라는 중계를 어기더라도, 그로 인해 그 보살은 보다 많은 중생을 구제하므로 그 보살의 일신(一身)은 비록 지옥도에 떨어져 고통을 받더라도 올바른 길, 즉 정도(正道)는 아니지만 방편으로서 악인을 살상함이 보살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살의 방편적 살생 가능설은 이런 계산에서 정당화를 얻는다.
한 명의 흉포한 강도를 죽임으로써 오백 명의 선량한 보살들을 살리려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강도를 죽인 보살은 지옥도에 떨어지더라도 그 살인은 오백 명이 살고 한 명이 죽고 또 한 명이 지옥에 떨어짐으로써(그 보살도 궁극적으로는 구제되겠지만) 계산상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권에서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론(?)의 절정은 최근 우리 민족이 겪은 한국전쟁의 대량살상, 즉 한국전쟁에 참가하기를 권장하는 당시 중국불교협회장 조박초의 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51년 《현대불학》 4월호에 실린 다음과 같은 문장은 대승불교판 보살도의 극단적 이용이다. 이는 불교 본연의 모습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항미원조 국가보위 인민지원군(抗美援朝國家保衛人民志願軍)'에 입대하여, 석가모니께서 자비의 화신으로 모든 중생을 대신하여 고난을 무릅쓰고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 적들을 죽인 정신을 실지로 배우는 길이다.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미제(美帝)를 쓸어 없애는 것이야말로 불교 교리에 충실한 것이므로 아무도 비난 할 수 없을 뿐더러 당연히 공덕을 쌓는 길이다.{{) 졸고, 〈근대 이후의 중국의 불교연구〉, 《동양의 지혜와 선》, p.371 참조. }}
3) 스리랑카 내분의 경우
정통 상좌불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스리랑카는 타밀족과 싱할라족과 사이의 내분을 겪고 있다. 특히 최근에 스리랑카는 싱할라 단일 민족의 국가로서 그 국토의 일부를 결코 타밀족에게 분리이양하지 않겠다는 국가민족주의가 팽배하여 타밀족을 몰아내는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법구경》으로 대변되는 상좌불교의 절대평화론자와 단일민족국가를 위해 타밀족을 몰아내겠다는 전쟁론자 사이에서 스리랑카는 사상적 갈등을 겪고 있다. 학자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경이 아닌 《마하방사》, 즉 스리랑카의 역사서에서 그 전쟁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부처님과 거의 동시대를 살던 두투게무누 대왕은 다밀라 종족을 살상한 것을 못내 괴로워하다가 '깨친 분들'(아라한)에게 이렇게 위로의 말을 들었다한다.
군주께서 살해한 것은 1.5인입니다. 인간의 왕이시여! 한 사람은 당신이 홍포한 불법에 귀의하여 오계를 수지한 사람이지요. 나머지 믿음이 없는 불신자거나 부도덕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은 인간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대왕께서는 불법에 영광을 돌리시었으니 걱정일랑 놓으십시오.
아라한들에게 불법의 홍포는 두투게무누 대왕이 불살생계를 범하여 고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겠다. 정법수호를 위한 의로운 전쟁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이와 같이 불경이 아닌 역사책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스리랑카 민족주의자들은 전쟁을 옹호하고 있다. 불경의 절대평화론을 불경 이후 세속적 문헌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를 통해 완화시키는 것이다.
결국 불교보다는 단일 민족 국가를 만들겠다는 민족주의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찾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금년도 2003년 전자저널 《불교윤리(Buddhist Ethics)》에는 스리랑카의 불법과 전쟁에 대한 학술회의를 기록한 최신 문건이 올라 있다. 현대 스리랑카의 의전론에 대해서는 Tessa Bartholomeusz, "In defence of Dharma: Just War Ideology in Buddhist Sri Lanka", Journal of Buddhist Ethics 6 (1999), pp.1∼16 참조. }}
4) 현대 일본 선(禪)학자들의 전쟁옹호론 :사무라이의 칼과 야마도 다마시 소위 일본정신론
서구를 모방하여 근대화를 모색하던 메이지유신 당시 불교계는 타락하고 반사회적인 종교라는 비난과 함께 '폐불훼석(廢佛毁釋)'{{) 불교를 제거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파괴한다는 뜻. }}이라 불리는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탄압에 맞서 일본 불교계에서는 근대적인 지도자들이 나타나, 교단의 타락상은 불교의 순수한 정신적 뿌리로부터 벗어난 것일 뿐 불교 자체의 문제는 아님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른바 '신(新)불교' 운동을 전개하여 서구의 경험적ㆍ이성적 과학 사조와 조화될 수 있는 것으로 불교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본 정부가 요구했던 국가의 정체성(코쿠타이[國體]) 확립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하여, 일본이 천황의 신적인 지배 아래 문화적으로 동질적이며, 정신적으로 진보하게 되었음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일본이 점차 제국주의화함에 따라 그들은 아시아인들의 공통된 문화적ㆍ정신적 기반인 불교 또한 일본에서 가장 진보된 형태로 나타났다는 주장을 펼쳤다.
곧 순수한 불교는 오직 일본에만 남아있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선(禪)과 일본의 무사도(武士道)가 일치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누카리야 카이텐(滑谷快天, 1867∼1934)은 《사무라이의 종교》라는 책에서 선의 윤리는 사무라이의 윤리와 동일하며, "무사도는 전장의 군인들뿐만 아니라 생존 경쟁을 하고 있는 모든 시민들도 따라야 한다"{{ Nukariya Kaiten. Religion of the Samurai: A Study of Zen Philosophy and Discipline in China and Japan (London: Luzac, 1913), pp.50-51. }}고 말했다. 그런데
선의 본질이 무사도의 정신, 그리고 일본 정신과 통한다는 주장은 결국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복과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미화하는 데 봉사했음을 시사한다. 선의 어용화가 일본의 근대국가로의 진행과 맞물려있음을 볼 수 있다. 스즈키 타이세츠 역시 이러한 논점을 그대로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평정과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은 일본인에게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며, 막강한 적 앞에서 겁내지 않고 적에게 공정하게 대하는 무사도의 가르침은 선 수련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D. T. Suzuki, "The Zen Sect of Buddhism", Journal of the Pali Text Society (1906), p.34. }}
5) 티벳 자치를 주장하는 달라이 라마의 경우
필자는 지난 해 망명 중의 달라이 라마를 달람살라로 찾아갔다. 이제 그가 주장하는 정법수호와 티벳 문화 보존, 그리고 중국과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그의 의지를 들어보았다. 아마도 부처님의 평화사상은 망명 중의 달라이 라마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의 인터뷰는 본시 KBS가 기획한 《21세기의 지도자》 가운데 정신적·종교적 지도자로서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이미 90분 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아직 방영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그 중 일부를 발췌·전재하는 것이다.
심재룡:
당신은 아이들의 교육을 통해 티벳의 문화를 보존하고, 결국에는 독립 대신 정치적 자치를 성취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난밤에 티벳 친구들에게 술을 마시기 전 건배할 때 쓰는 말을 묻자, '랑젠', 즉 '독립'이라고 했습니다. 티벳의 일반인들은 당신이 제의하는 불완전한 자치가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바랍니다. 당신은 과거에 주장했던 바와 같이 비폭력이 당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란 것을 그들에게 어떻게 설득시키겠습니까? 서민들이 당신의 바램에 동의할까요?
달라이라마: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폭력이며, 다른 하나는 독립입니다. 비폭력에 관한 한, 설명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비폭력, 혹은 비폭력적 방식은 더 인간적인 방법이며, 긴 시각에서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며, 적어도 부작용의 위험은 현저히 적습니다. 만약 폭력이 개입된다면 어느 정도 만족감을 얻게는 되겠지만 긴 안목으로 볼 때는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될 것입니다.
특히 티벳의 경우, 우리들의 비폭력적 접근, 비폭력적 투쟁 때문에 외부 세계에서 우리를 돕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내의 중국인들까지도 티벳의 투쟁과 현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처지에 공감하고 관심과 함께 그들의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폭력 노선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비폭력 노선이 도덕적으로 바른 길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건설적인 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티벳인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티벳청년단"은 우리 공동체에선 상당히 큰 조직인데, 비폭력에 관한 한 이 풀뿌리 조직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 문제는 독립입니다. 여기 있는 "청년단"의 공식적인 입장은 완전한 독립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접근방식에 대해 아주 비판적입니다.
심재룡: 그렇습니다. 그것이 저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달라이라마: 내가 알고 있는 바, 이 시점에서 독창적인 문화유산을 가진 티벳이라는 나라는 실제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유서 깊은 나라가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이 현 상황입니다. 달라이라마로서 나는 전통적으로 일정한 의무를 지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실질적으로 모든 티벳 국민들은, 종교인이건 아니건, 불교도이건 아니건, 거의 모든 티벳인들이 나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게 많은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돌보고, 돕고, 그들에게 봉사할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고 중대하기 때문에 나는 티벳 동포들이나 다른 동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의무는 티벳을 보호하고, 티벳의 환경을 보호하고, 티벳의 문화를 보호하고, 유서 깊은 문명을 보존하는 것"이라고요. 나는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 다음 먼 미래는 티벳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티벳 국민들에게 말입니다! 내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고 빤디뜨 네루가 인도 의회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최종적인 발언은 티벳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말이죠. 나는 그 말이 지극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원리는 물론이고, 민주주의 원칙에 따르면 국가의 미래는 온전히 국민들에 달려 있고, 그들 스스로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의 사명은 티벳의 문화, 티벳의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티벳이 중국의 수중에 있는 동안 티벳 자연환경의 보존은 홍수의 대비와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중국 본토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산림의 대규모 벌채로 티벳의 자연환경이 훼손되면, 그것이 중국인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다음엔 문화유산의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티벳 불교의 정신적 전통을 포함한 티벳 문화가 살아남고, 또 보존된다면, 그것은 중국의 문화와 정신적 전통을 풍요롭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심재룡: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달라이라마: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는 중국 정부의 문제인데, 그들은 티벳, (그들로 봐서는) 서(西)중국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경제개발은 우리가 바라는 바이며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정치 분야에서 안정의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 정부 초미의 관심사는 안정과 통일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나의 접근법인 중도 노선이 진정한 안정과 통일을 성취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심재룡: 중도라면 문화의 다양성을 화해시킨다는 뜻이겠지요?
달라이라마: 그렇습니다. 만약 중국정부가 티벳인들에게 일정한 권한과 신뢰를 보여준다면, 전자에 대한 후자의 태도는,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으로, 훨씬 긍정적이 될 것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중국 정부는 언제나 억압을 행사합니다. 불평불만이나 분노가 표출될 때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들의 대응은 언제나 억압입니다. 오늘날 티벳에서 중국의 지배는 실제로 무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심재룡: 티벳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테러 행위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테러'와 부시 대통령의 입장을 보십시오. 나는 뉴욕에서 일어난 새로운 테러 사태에 대해 부시에게 보낸 당신의 서한을 읽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나는 당신이 올바른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셨지요. 당신은 부시 대통령 입장에서 올바른 결단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달라이라마: 그건 다른 얘기입니다. 우선 제가 하던 얘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하여간 총칼 아래서의 안정과 통일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안정은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경제개발을 위해서 통일과 안정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나는 통일과 안정, 그리고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나의 접근방법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곳 다람살라의 "티벳청년단"과 티벳에 있는 티벳인들은 과거의 경험 때문에 중국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고, 중국공산당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현실을 보고자 한다면, 그래서 중국 정부의 최대 현안을 성취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 왜 진정한 의미의 자치인가를 논의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방법과 바른 길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안정과 통일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 토론하고자 한다면, 나는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많은 티벳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은 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감성보다는 인간의 지성과 지혜를 써야 합니다. 이제 당신의 다음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큰 질문입니다. 첫째, 나는 온 세계가 점점 테러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심재룡: 테러의 횡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어떤 정치학 교수는 '문명의 충돌'을 얘기합니다. 대담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탈레반 정권에 의해 폭파된 바미안 불상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교적 어법으로 일종의 '업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만행을 시발점으로 미국의 테러참사가 있었고, 아프가니스탄과 그 이슬람 동맹국들이 현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테러의 횡행에 대한 당신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아직도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나의 비폭력과 평화로운 중도노선을 수용하십시오"라고 말이죠.
달라이라마: (파안대소) 나는 비폭력적인 방법이 단지 소극적이기만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질문은 실제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미리 말씀드렸듯이, 대체로 이 세상이 점점 폭력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세계는 테러의 지배 하에 있지 않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실제로 한 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주 소수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의적인 사람들은 인류가 지구상에서 진화해 온 이래, 인간이라고 불리는 두 발 달린 생물체가 걷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존재해왔습니다. 몇몇 악의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던 것입니다. 주된 차이점이 있다면 이러한 악의적인 사람들이 어떤 도구와 방식을 쓰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소수의 악의적인 사람들이 엄청난 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계가, 특히 자유세계가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에 대항해서 단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옳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목적이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행위 자체가 끔찍하고 부정적이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끔찍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에 대항하기 위한 범세계적인 조치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응방식이 문제가 됩니다. 테러리스트들은 폭력을 씁니다. 그런데 먼저 이 경우에는 목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특정 국가나 지역 내지 장소가 관련되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옷 속에 작은 벌레가 한 마리 있다고 합시다. 당신은 벌레 때문에 옷에 불을 지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속 좁은 인간이나 바보가 하는 짓입니다. 당신은 옷을 들추고 벌레가 어디 있는지 찾아낸 다음, 그것을 집어서 내다 버리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테러의 경우에도 교육이나, 때로는 대화를 통한 비폭력적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이 분노하고 있는 이유를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들이 왜 폭력을 쓰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이나 경제적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압박을 받습니다. 앞으로 테러에 대한 미래의 방어수단으로 대화를 더욱 더 자주 가져야 합니다.
심재룡: 저의 질문에 자세히 대답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달라이라마: 당신의 첫 질문은 너무 컸습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심재룡: 저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당신이 가진 낙관론의 근거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대규모의 보복이 테러행위에 대한 대응으로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했습니다.
달라이라마: 대응수단으로 폭력을 쓴다면, 예컨대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나는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의에 찬 사람들, 즉 테러리스트들은 은신처에 숨거나 어떻게 해서든 도피할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미국인들, 그리고 미국인들이 선출한 미국의 지도자들이 일반적으로 자유와 평화를 충분히 구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은 결국에는 이 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바램이자 기도입니다. 당신은 또한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의 불상 얘기를 언급했습니다.
물론 그 소식을 듣고, 온 세계 사람들, 특히 불교권의 모든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고 또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불교권에서 그 파괴에 대해 적대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불상 파괴와 같은 모든 행위는 물론 몰상식하고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일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한 개인, 한 종교"라는 생각, 그리고 "하나의 진리"라는 생각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공동체 차원에서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진리를 수용하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영역에서 다원주의는 필수적입니다. 통상적으로 저는 집회의 군중들이나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의 종교와 하나의 진리라는 생각은 정당하고 또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나 개인의 경우, 나는 불교도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불교는 유일한 종교이고, 유일하게 효용성 있는 진리입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종교, 하나의 진리라는 개념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두 사람이나 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런 생각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습니다.
나의 기독교인 친구들이나 이슬람교도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혹은 세 사람이나 네 사람만 있을지라도 그 상황에서는 여러 개의 종교, 여러 개의 진리라는 생각이 현실적이고, 적절할 것입니다"라고 말이죠.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이 다시 나감. 이런 정전사고가 인터뷰 중 서너 번 있었다. 인터뷰 다시 중단, 달라이 라마께서는 "오 잠시 문제네!"라고 하시면서 매우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셨다. 잠시 후 인터뷰 계속)
하여간 나는 특정 종교 내에서나, 종교적 전통들 간에 다원주의를 확산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많은 종교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적으로 온 세계, 혹은 모든 인간이 불교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다 기독교도나 무슬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요 세계종교는 그 전통이나 철학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동일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공통되는 수행원리 역시 공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전통은 우리에게 사랑, 자비, 용서, 관용, 평안, 자율 등의 동일한 덕목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통되는 근거, 공통되는 책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전통들 간에 조화를 증진시키는 일은 가능하며 또 필요한 일입니다. 불상의 파괴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그것이 불교와 무슬림, 그리고 기독교 세계간의 이해와 상호작용의 부재에 기인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다른 전통에 대해 특정한 태도를 키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무슬림들이 불교에 대해 좀 더 알고, 세계를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분명히 불교가 인류가 가진 중요한 종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상의 파괴가 불교 공동체에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인해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심재룡: 종교와 문화의 다원주의 수용과 관련해서 나의 다음 의문은 소위 '문명화된 사람들' 가운데 권력층들은 여전히 온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신의 관념을 고수하고 있고, 또한 그들 자신만의 정의(正義)를 가지고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관용과 자비, 그리고 사랑이라는 정신적 자세를 유지하고 가르치며 보존할 수 있을 것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다른 관점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교 용어로) '무지'와 '증오'에 가득 차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끊임없이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언제나 "남보다 자신"을 강조합니다. 나는 보통 사람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 옳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일 가운데에서 내가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주제입니다. 나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포함해서 많은 문제들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점에 관해서 나는 우리의 정신적 성향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감정이 얼마나 나쁘고 파괴적이며 부정적인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날의 일상사에서 가족 차원, 공동체 차원, 그리고 개인적 차원의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자비라든가, 대화의 정신, 화해와 용서의 정신, 배려하는 마음, 보살피는 마음 등 건설적인 감정들은 개인적 차원의 행복은 물론, 가족이나 사회, 국가, 그리고 심지어 국제적인 차원의 행복에 도움이 되고 또 유용합니다. 다른 한편 복수심이 표출하는 증오와 과도한 탐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들이 마음의 일부로서 단지 '성향'이라고 간주해서 통상적으로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도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감정들을 당연한 것, 정상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잘못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감정의 세계에서는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명상을 통해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명상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종교인 내지 신앙인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은 종교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비신앙인들, 즉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행복한 삶, 하나의 행복한 가정, 하나의 행복한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관심사입니다.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상관없이 이 점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고, 관점의 차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모든 사람의 관심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십시오. 변화, 특히 감정의 변화는 주로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심재룡: 그것이 지적인 교육이 아닌 정서적 교육을 통해 이루어집니까?
달라이라마: 지성을 통해, 지성을 이용해서 이루어집니다! 지성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의 파괴적인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그것을 깨닫고, 또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 확신은 자동적으로 부정적 감정의 강도를 약화시키게 됩니다. 일단 자비심과 마음의 평화가 가져다 주는 유용성을 깨닫게 되면 결국에는 모종의 열정과 의지력이 증진됩니다.
그러므로 실제 체험에 근거를 둔 인간의 지성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현재 많은 사회사업가, 임상의사, 심리학자, 그리고 다른 사람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학교 내의 학생의 범죄를 포함해서 사회 안의 범죄율의 증가가 가정이나 사회 차원의 자비심의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연구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료 영역에서도 어떤 신체적 질병은 부정적 감정에 기인합니다. 자비심과 같은 정서는 신체적 조건을 더 건강하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몇 가지 과학적 증거가 있습니다. 제 말은 과학적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우리는 지식을 활용하고 또 학교나 공동체의 구성원과 그것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감정에 주목하고 또 그것을 계발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요소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부유하거나 지나치게 부유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물론 18세기나 19세기에는 민주적인 자유국가에서도 착취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혁명을 통해 변했습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은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때로 그들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국가에 속한 개인적 차원에서는 물론, 전 지구촌 차원에서도 여전히 부와 가난 사이에 개재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잘못된 것입니다. 산업화된 나라들이 있지만, 지구상에는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아마도 한국도 포함되겠지만 재화의 과잉이 있고 지나친 소비를 하고 있습니다.
심재룡: 그리고 비만, 부유한 사람들의 거대한 배…….
달라이라마: 그와 동시에 한국의 경우, 북한 사람들은 아직도 굶주리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식량의 부족으로 더욱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넓게 보면 북한 사람들 중에서도 부유하고 잉여물자를 가진 사람이 있는 반면, 남한 사람들 중에도 때로는 생필품이 부족한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기하고 또 좌절을 겪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정신적 자세나 관념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우리가 '나'와 '그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우리는 나의 행복이나 괴로움, 고통이 나의 것이고,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라는 것, 그것은 '당신'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과 즐거움은 이차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자비심을 실천하는 것이 남을 위한 것이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심재룡: 그러나 사랑과 자비는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지요!
달라이라마: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이기적인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느낍니다. (웃음) 자비심 혹은 남을 보살피는 마음은 나의 행복과 나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사물의 겉모습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분석해 보면, 한 인간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개인은 동료나 타인들이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일상적 요구로서 우리는 주거와 가구, 편의시설, 음식, 의복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일 개인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으며, 일단의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생활의 기본 수단은 사회적 토대를 필요로 하고, 따라서 나의 미래는 남에게 의존하거나 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예컨대 우리가 좋아하건 말건 경제적 측면과 환경적 측면에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 세상이 이제는 한 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라든가 '그들'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기능할 수 없습니다. 나의 미래, 혹은 우리의 미래는 타인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인들의 이익을 배려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타인들의 이익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더욱이 타인들을 착취하고 파멸시키며, 고통을 가한다면 그 결과 당신 자신이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남의 이익을 배려하는 것은 실제로 그 자신의 미래에 엄청난 이익이 됩니다. 다음으로 자비심의 실천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타인을 보살피는 마음에 관해 명상하는 순간, 그 즉시 당신의 마음 속에 내적인 힘이 강화됩니다.
그로 인해 당신에게 용기와 의지력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두려움과 의심은 감소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 나, 나"라는 생각만 한다면 그의 정신적 영역은 더욱 협소해지게 됩니다. 정신적 영역이 좁아지게 되면, 심지어 조그만 문제조차도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남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넓어지고.
따라서 자신의 문제가 사소한 것으로 보이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참여한 적이 있는 미국에 있는 어떤 실험실의 과학자들에 의하면, 어떤 의학자가 발표한 연구논문이 "나를, 나의, 내가"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이 심장마비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긴장하게 되고,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어서 더 많은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조차도 나빠집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것들을 바로 가르치는 것이 사람들을 제대로 교육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과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가장 정통적인 불교의 평화관을 피력하고 계신 듯하다
6) 월남전의 와중에서 전쟁의 살육과 부정 부패한 정권에 항거 분신자살한 스님을 정당화하는 틱낫한 스님의 경우
틱낱한이라는 베트남 스님이 지은 시를 소개하겠다. 현대 아시아 불교의 보다 더 사회 참여적인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 시를 감상해보면, 그들의 태도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된다는 과거 전통적 불교도들의 태도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여기 이 시 속에는 과거의 전통과 단절된 아주 극단적이고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불교철학을 구성해내려는 노력이 들어 있다.
내 본래 이름으로 저를 불러주세요.
내가 내일 떠나리라 얘기하지 마세요.
오늘도 나는 여기 이 자리에 있을 것이므로.
깊이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세요.
매 초마다 매 순간마다 나는 여기 옵니다.
봄철 새싹이 돋아나는 나뭇가지의 새싹으로,
아직 날개는 여리지만 날려고 비상하려는 작은 새처럼,
새로 지은 둥지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려
안타깝게 노력하는 조그만 새처럼,
꽃 가운데(花心), 그것을 갉아먹으려 돌아다니는 자벌레처럼,
딱딱한 돌덩어리 속에 숨어 있는 영롱한 보석처럼,
나는 매순간마다 여기에 옵니다.
여전히 나는 여기 있습니다.
웃고 웃으려고 여기 옵니다.
두려워하고 희망하려고 여기 옵니다.
내 가슴의 맥박소리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죽음과 탄생을 상징합니다.
저는 강물 위에서 내 몸을 탈바꿈하는 조그마한 나비입니다.
그런데 나는 바로 봄이 오면
그 나비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조그만 새입니다.
맑은 연못에서 즐겁게 헤엄치는 조그만 개구리입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다가드는 물뱀입니다.
저는 온몸이 뼈다귀만 앙상한 우간다의 어린 아기입니다.
제 발가락은 마치 대나무처럼 가늘고,
그런데 나는 동시에 우간다에 죽음의 무기를 팔아먹는 무기상입니다.
저는 피난민 보트에 몸을 숨긴 열두 살 난 어린 소녀입니다.
해적에게 몸을 망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열두 살 먹은 소녀입니다.
그런데 저는 동시에 그 해적 놈입니다.
제 가슴은 아직 이 세상의 고통과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악한 가슴을 가진 해적 놈입니다.
저는 그 정치국원입니다.
제 손에는 엄청난 권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저는 바로 제 백성들에게 피의 빛을 변제해야 하는 바로 그 놈이올시다.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제 기쁨은 마치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 같습니다.
하도 따듯한 물이라서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을 피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제 고통은 눈물의 강입니다.
하도 가득 차서 사해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고통의 강물입니다.
제 본래의 참다운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세요.
제 웃음과 흐느낌을 동시에 들을 수 있도록,
그래서 제 고통과 기쁨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본래 이름으로 저를 불러주세요.
그래서 깨달을 수 있도록,
그래서 제 가슴이 항상 열려 있도록,
자비의 문이 항상 열려진 채로 있을 수 있도록.
세상은 모두 연기(緣起)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으니, 독립된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허상이고,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며, 너도 기쁨이고 나도 슬픔이며, 슬픔과 기쁨은 서로 교차하는 것이라는 불교 연기사상을 시로 나타낸 것이다.
즉 우리는 연대 또는 참여라는 개념을 통해서 세상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이 시 속에 담겨 있다.
위와 같이 참여불교, 민중불교, 고통불교, 부처님불교가 아닌 중생불교가 주장된 것은 1920년대 암베드까르라는 인도의 불가촉천민 지도자에게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그는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서도 신분차별 때문에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인데, 5천 명의 불가촉천민과 더불어서 불교로 집단 개종을 주동한 사람이다.
그가 주장하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불교가 주장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제4의 불교라 불리는 이 새로운 불교운동이 제시하는 고통 극복과 해결의 방법은 심리적인 해결이 아니라 맑스 식의 혁명처럼 구조적이고 사회 맥락적인 방법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도덕적이지만, 사회가 비도덕적이며 부도덕하다는 주장이 있다. 은행에 다니는 은행원은 자기가 헤아리고 있는 돈이 정주영의 돈인지, 전두환이 세탁을 한 돈인지 알 수 없다. 그 은행원은 월급을 받아 부모도 모시고,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한다.
핵심은 개인의 도덕성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부도덕한 구조적 연관이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내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잘못되는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전체 구조와 맞물려 있는 것이고 은행원이 되는 순간부터, 사복형사가 되는 그 순간부터 구조적으로 고통의 구렁텅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이 세상에 부도덕한 악(고통)은 없앨 수가 없다. 혁명은 판을 뒤엎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 참여불교의 경우 아직 판을 뒤엎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너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다. 우리는 모두 고통을 받는 중생이다. 열두 살짜리가 강간을 당했고, 해적은 강간을 했다. 하지만 그 둘 모두 구조적 연관 속에 있는 것이지 이놈은 나쁜 놈, 이놈은 좋은 놈 이런 것은 아니다.
3. 불교식 평화 건설법: 비폭력·불살생의 철저한 확대 실천
이제 우리는 이 지상에 존재하고 존재했던 역사상의 불교국가에서 평화의 모범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적 견지에서 평화는 어떻게 진작할 수 있을 것인가? 불교식 평화 진작은 기본적으로 비폭력의 실천에 있다. 그 것은 단지 생명을 지닌 존재를 죽이지 않는다는 소극적 불살생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로 불교의 오중계 모두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불교의 윤리적 삶을 실천하는 데 있다. 다시 한번 오중계를 생각해보자.
1) 일체의 생명을 존중해서 이를 내 것으로 빼앗지 아니할 것입니다.
2) 생명 아닌 물건도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3) 육욕에 따르는 일탈행위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4)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5)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체의 음식을 절제하겠습니다.
얼핏 이것들만 철저히 지키면 자동적으로 이 세상에 평화가 올 것 같은 희망을 품을 법도 하다. 그 한 예로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자는 불교도의 결의는 다음과 같이 철저한 조건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 살생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출 때 진정한 의미의 살생이 된다.
1) 동물이거나 인간이거나 살아있는 생명이 있을 것.
2) 자기의 행위가 생명과 관계되어 있음을 알고 있을 것.
3) 살생을 마음 속에 품을 것.
4) 이 '살생'이라는 생각을 적절한 방법을 동원하여 실행에 옮길 것.
5) 그 결과 실제로 생명이 없어지는 죽음이 일어날 것.
이 중 네 번째 요건인 살생의 방법으로 경전에는 여섯 가지가 나열되어있다.
1) 직접 자기 손으로 죽임.
2) 남을 시켜 죽임.
3) 총을 쏘거나 화살, 막대기 등을 동원하여 죽임.
4) 땅에 파묻거나 숨이 막히게 하여 죽임.
5) 술수를 써서 죽임.
6) 마술을 동원하여 죽임.{{) H. Saddhatissa, Buddhist Ethics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1970, p.89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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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이처럼 철저하게 살생을 분석하는 이유는 일체의 살생을 악으로 간주하여 비폭력·불살생을 생활화하기 위해 그 구체적 반대 보기, 즉 폭력의 실상을 직시하여 이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굳히는 데 있다. 만약 위의 계를 철저히 지키자면 불교도는 아마도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채식주의자가 반드시 평화론자로 직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불교식 오계를 모두 철저히 지킨다고 해서 이 지상에 평화가 도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 그럴까?
잠시 폭력의 유형을 생각해 보고 불교가 평화 진작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에 한계를 있음을 살펴서 이 소론의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평화학의 정착에 노력하는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의 지론에 따르면, 폭력에는 직접적·구조적·문화적 폭력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Johan Galtung (Professor of Peace Studies, University of Hawaii), "The Role of Buddhism in the Creation of Peace", Seeds of Peace Vol.5 No.1, 1989, pp.9∼11 참조. }}
마치 현대 사회의 법률가들이 작성하는 법조문의 정확성을 방불케 하는 위의 살상 분석의 틀을 보면 불교가 직접적 폭력에 대처하는 치밀성은 경탄할만하다. 그러나 구조적·간접적 폭력에 대해 불교는 철저하지 못하다.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이한 것을 보면, 불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두 번째 계율인 도둑질 않기도 마찬가지이다.
직접적인 개인적 도둑질에 대한 경고와 규제는 철저한 반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구조적으로 들어있는 착취의 과정에 대해서 불교는 과연 제대로 눈을 뜨고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다음의 문화적 폭력은 위의 직접적·구조적 폭력을 방조하는 문화적 양태를 지칭한다. 물론 불교가 그러한 문화가 아닌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역사상에 전쟁과 폭력을 행한 불교 군주와 불교 국가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요즘의 불교인들은 평화의 진작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책을 제시한다. 현대 평화학의 결론적 방안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불교 특유의 생활방식을 가미한 불교적 평화진흥책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Dialogue New Series, Vol XVI Nos.1-2-3, 1989, pp.37ff. 특히 pp.53∼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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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을 구제하고 고용의 기회를 확대할 것.
2) 생활수준을 높일 것.
3) 교육기회를 확충할 것.
4) 건강 보건 시설을 제공할 것.
5) 인권을 보장할 것.
6) 무력사용을 철폐할 것.
이 모든 방책에 동조하면서 불교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탐·진·치의 제거라는 인간의 근본적 자기 개조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개인의 평화 없이 사회의 평화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 강령이다. 이제 불교도는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기본 강령을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자연 사이에까지 확대하는 실천적 용기를 발휘할 때이다.
심재룡
서울대 철학과 졸업. 미국 화와이대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 논문으로 〈보조 지눌국사의 선교일치론〉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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