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7

불교언론-스님 꿈꾸던 위안부 할머니, 승가대에 잇단 보시 - 법보신문

불교언론-스님 꿈꾸던 위안부 할머니, 승가대에 잇단 보시 - 법보신문


스님 꿈꾸던 위안부 할머니, 승가대에 잇단 보시

최호승 기자
승인 2014.06.27 11:04
배춘희 옹, 26일 5000만원 기부…6월8일 91세로 운명 전 유서 당부


▲ 나눔의 집에서 살던 고 배춘희 옹이 6월26일 중앙승가대(총장 원행 스님)에 5000만원을 보시했다. 2012년 9월 3000만원을 기부한 데 이어 두 번째 선행이다.스님이 되고 싶었던 소녀는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차마 꿈이 여물기 전인 스물살도 못된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끔찍한 시간을 보냈던 소녀는 백발성성한 할머니로 눈을 감았다. 꿈은 유언으로 남았고, 조계종 학인스님 기본교육기관 중앙승가대에 소녀의 꿈이 전해졌다.

나눔의 집에서 살던 고 배춘희 옹이 6월26일 중앙승가대(총장 원행 스님)에 5000만원을 보시했다. 2012년 9월 3000만원을 기부한 데 이어 두 번째 선행이다.

지난 6월8일 향년 91세로 일기를 마친 배춘희 옹은 유서로 학교 승가교육 후원을 당부했다. 중앙승가대 총장 원행 스님과 후원회 사무처장 초우 스님이 후원금 전달식에 참석했고 나눔의 집 부원장 호련 스님이 기금을 전했다.

배춘희 옹은 평소 중앙승가대 학인스님들 교육불사 후원에 큰 원력을 세웠다.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면 출가해 부처님 법을 따르며 살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삶은 고됐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겠노라 했지만 거짓말에 속았다. 1941년 중국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 일본군은 그의 몸과 마음을 찢었고, 하루 종일 짐승 같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해방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중국과 일본을 전전하며 생을 이어왔다. 고국을 그리던 그는 1981년이 돼서야 영국 귀국했다. 스님이라는 꿈이 일본군에게 무참히 짓밟혔던 1941년, 그 후 꼬박 40년 만이었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1997년 불교계가 마련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 집에 안겼다. 그 사이 정부에서 지급한 ‘생활안정지원금’을 차곡차곡 모았다.

스님이 되리란 배춘희 옹의 원력은 학인스님 교육불사로 이어졌다. 2012년 9월26일 아름다운동행(이사장 자승 스님)을 통해 중앙승가대에 장학금 3000만원을 보시했다. 나눔의 집 법당 탱화불사에도 800만원을 보탰다. 당시 그는 “비록 내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기 계신 스님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꼭 큰스님이 되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전했다. 학인스님들을 만났고 강의실을 둘러봤다. 그는 전생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감격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건강은 날로 악화됐고, 음식은 목구멍을 넘기기 어려워졌다. 부축 없이는 움직일 수 없어 거르지 않았던 수요집회도 불참했다. 방 밖을 나가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나눔의 집 한편에 자리 잡은 방에서 독경하며 내생에라도 스님으로 살겠다는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 6월8일부터 배춘희 옹의 방에서 그치지 않던 독경소리가 끊겼다. 그의 원력은 학인스님들 가슴에서 영글어 가고 있지만 이생의 큰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최근 아베총리 내각은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동원을 인정하고 사과했던 고노 담화를 검증하며 이를 부정했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1251호 / 2014년 7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