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2

연찬문화연구소 | 화쟁(和諍)의 보편화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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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和諍)의 보편화

남곡추천 1조회 36316.12.22 16:11댓글 2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새벽에 일어나 원효(元曉)를 생각한다.

 

중용(中庸)은 진리를 향한 오래된 지혜이며, 화쟁(和諍)은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이다.

변증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 그것을 진보를 위한 철학적 기초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중용이나 화쟁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해하거나 심지어 비난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정반합(正反合)의 연속적 과정을 통해 도달해가는 목표가 중용이며, 거기 도달하는 평화적 방법이 화쟁이다.

피로 얼룩진 거친 과정을 넘어서, 인간의 지능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평화적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화쟁은 모순을 호도하거나 봉합하면서, 타협하고 협상하는 기술(테크닉)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화쟁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화쟁을 할 수 있는 인문적 철학적 바탕이 허약하고, 고질적인 편가름과, 생각이 온통 자신과 패거리의 이익과 그 위협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수구 세력과 함께, 이른바 변증법적 사고로 무장했다는 거친 투쟁관에 알게 모르게 고착되어 있어, 수구를 못 벗어나는 점에서는 보수 못지 않은 세력 등,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사실을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개인이든 집단이든)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사실에 접근한다.

이것을 자각하고 불가지론이나 애매한 결론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사실(진실, 옳음)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고귀한 특성이다.

과거의 현자(賢者)들의 공통된 자각이며, 현대에 와서 과학적 지식으로는 보통의 상식으로 되고 있지만, 현실의 사고방식과 실천에서는 아직 많이 유리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화쟁의 바탕이다.

 

원효의 말하는 방법은 ‘동의도 않고 동의하지 않지도 않으며 말함(非同非異而說)’이다.

이것을 협상과 타협의 테크닉으로만 보거나 양비론이니 양시론이니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화쟁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이것이 전적으로 옳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전적인 동조가 없는 것이어서 리(理)를 따르는 것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전적인 배격이 없는 것이어서 정(情)을 해치지도 않는 것이다.

이렇게 리(理)에 어긋나지도, 정(情)을 해치지도 않는 말하는 법이 원효의 화쟁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동의하지도 동의하지 않지도 않는게 아니라 일심의 근원(一心之源)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일심의 근원(一心之源) 같은 표현에는 다소 동의하지 못할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 불교의 세계관으로 표현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공자의 무적무막 의지여비(無適無莫 義之與比; 옳다 아니다 단정하지 않고, 끝까지 의를 좇는다)와 바탕에서 통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테크닉을 넘어선 화쟁의 능력이다.

 

ㅇㅇㅇ 의원이 ‘진영을 넘어서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이야기한 것은 우리 정치권에도 이런 기운이 점점 자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 타협과 협상의 기술을 넘어 본질적인 힘으로 자랄 수 있도록 서로 응원하고 힘을 보태야 할 것 같다.

화쟁은 과학이며 진보다.

 나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다.

 원효의 호연지기를 소개한다.

 "펼침과 합함이 자재하고(開合自在) 주장하고 반대함이 걸림이 없으며(立破無碍), 펼쳐도 번잡하지 아니하고 합하여도 좁지 아니하며 주장하여도 걸림이 없고 반대하여도 잃음이 없는 것이 일심(一心)이다."

(以開合自在 立破無碍 開以不繁 合以不狹 立以無碍 破以無失)

7세기의 원효의 사상이 21세기에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 때는 마음의 선각자들이 자각하는 세계였는데, 이제는 세계 그 자체가 진화해야할 목표로 보이는데 까지 왔다. 두 문(門), 종교와 과학, 주체적 자각과 사회적 실천, 마음과 현상이 서로 어울려 개합자재(開合自在)하고 입파무애(立破無碍)한 세계를 향해 세상은 나아가고 있구나! 산개(散開)하면 개인이고, 보합(補合)하면 공동체다. 지금은 산개하여 개인이 해방되는 시기이지만 무질서와 혼란으로 번잡하지 않고, 보합하면 공동체이지만 서로 침범하고 간섭하는 좁은 세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을 세우거나(立) 무엇을 파기하여도(破) 사리사욕에서가 아니라 공의(公意)공욕(公慾)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걸림이 없다. '내' 생각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아서 주장하여도 걸림이 없고, 반대하여도 잃음이 없는 무타협(無妥協)의 세계에 노닌다.
 

이러한 마음, 이러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진정한 호연지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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