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교리
생활속의 연기법 수행
불교 교리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은 모두 불교 수행과 연관되어 있고, 그 수행은 매일 반복되는 하루의 일과 속에서, 늘 부 딪치는 구체적인 일 속에서 실천 가능한 것이다. 내 집안, 내 일터 등과 같은 내가 처한 환경에서 바로 실천해 그 효력이 즉각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잠자는 일상사 그대로가 수행이 되어야 하는데, 일상사 모두가 수행이 되는 경지 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수행의 시작이 일상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운 교리와 일상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물 과 기름처럼 따로 놀기 때문에 아무리 불교 교리 공부를 오래 해도 불자의 삶에서 수행의 향기가 배어나오지 않는 것이다. 수행은 처음부터 일상사가 그대로 수행이 되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나 누구나 마음만 내면 실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주부가 가정에서 요리나 집안일을 할 때, 직장인이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때,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행을 즉각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연기법을 배웠다. 연기의 원리를 일상사에 그대로 적용하여 생활할 때, 이것이 바로 연기법 수행이다. 먼저 연기법을 복습해 보자.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상호 연관성을 나타내는 삶의 근원적 원리이 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네가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자연환경이 오염되면 인간도 오염되고, 생명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환경과 생명이 살아나면 인간도 건강하게 살아난다. 존재의 상호 의존성과 연관성이 연기법의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존재는 첫째, 시간적으로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조부모 등 무수한 조상님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둘째, 공간적으 로 지구촌이라고 하는 공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셋째, 외부세계에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와 의식 공간에 존재하던 기존의 개념, 관념, 가치 등 무수한 심리적 정보들과 결합하여 연기적으로 형성된 ‘나’이다. 넷째,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겨난 상대적 개념이 만들어낸 ‘나’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생각과 앎의 거품이 가득하다. 이와 같은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출발이다. 이 4가지 연기법의 기본 틀을 염두에 두고 연기법 실천을 생활속에서 응용해 보자.
연기법 수행 ① _ 공경과 감사의 생활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지구촌에 툭 떨어져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거슬러 올라가면 조부모님, 그 위의 모든 조상님들이 있었기에 지금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백만 명 이상이, 30대를 소급해서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엄격히 따져 보면, 30대 앞에 계 셨던 21억의 조상님 가운데 한 분만 계시지 않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역사의 모든 인물들이 직ㆍ간접적으로 나와 연관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분들 중에 는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영적 스승님이 있을 수도 있고, 인류의 문명을 질적으로 변화시킨 많은 성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분들 덕분에 삶은 성장과 성숙 쪽으로 진화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진리가 흐르는 방향이다. 사람이 길을 가더 라도 앞으로 가는 것이 쉬운 것은 단순히 눈이 앞을 향해 있어서가 아니라 우주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을 올라 가더라도 사람 본능적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우주의 흐름이 성장하기 때문이며, 더 멀리 여행하고 더 높이 나는 것도, 우주의 성향이 확대와 팽창, 그리고 완성과 성숙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기법의 이런 시간적 의미를 음미해 보면 모든 존재에 대한 경의와 공경의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경은 ‘나’라는 존재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 웃어른들을 올려다보는 것이요, 내 마음이 위로 향하는 행이다.
이런 연기의 원리를 모르면 일상의 삶에서 남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잘 났어 정말!’이라는 어느 연예인 의 말처럼, 우리 개개인 모두가 다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에게 고개 숙이고 남을 잘 모시기는 참 힘든 일이다. 누구나 윗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어하지 자신이 상대를 공경하고 대접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내 앞에 인사하고 굽실거리는 저 분은 단지 지위가 나보다 못하거나 여건이 어쩔 수 없어 그러한 것일 뿐, 속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 다. 나 역시 나보다 높은 분들에게 웃는 낯으로 공손하지만, 내 마음까지 상대를 공경해서 그러는 것이 아닐 경우도 있다. 참으로 진정 공경심을 일으켜 진솔하게 이웃을 모시기는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공경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공경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나이 적은 자가 많은 자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아 니라는 사실이다. 공경은 신분, 나이, 계급 및 서열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서로에게 해야 한다. 예절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서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웃어른이란, 나이만 많은 거만한 어른이 아니라 자비하고 지혜로우며 인자 한 마음을 가진 이를 말한다.
우리 가정이나 사회에 갈등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로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무지 남의 고통, 남 의 처지를 이해해 줄 줄을 모른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여 남을 무시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한다.
모든 인간은 관계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관계속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이다. 인간관계를 쉽고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 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공경이며 감사이다. 즉 공경은 만행의 근본이며, 인간관계, 개인의 성장, 자연과의 친화는 바로 감 사에서 시작된다. 감사하는 마음은 공경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부처님과 부모님을 모시듯, 소중한 친 구를 대하듯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게 된다. 이처럼 내가 지금 여기에 있게 한 모든 분들을 공경하고 생활속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첫걸음이다.
연기법 수행 ② _ 기쁨 가득한 공존의 생활
공경과 감사의 생활로 연기법을 실천하게 되면, 자연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은 공경하고 감사할 대상들로 가득함을 깨닫 게 된다. 농장의 농부와 산업 현장의 일꾼도, 학교의 선생님과 관공서의 공무원도, 철도나 버스 운전사들도 모두 고맙고 공경 해야 할 분임을 알게 된다. 또한 물과 공기와 태양도 산과 나무, 강과 들녘도 나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생태계 덕분에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을 공간적 관점에서 보면, 동시대의 지구촌에 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공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더불어 살면, 삶은 항상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연기법 수행의 둘째는 공존의 기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으면 살과 뼈 등은 흙[地]이 되어 돌아가고, 물과 피와 고름 등의 액체는 물[水]이 되어 흐르고, 몸의 열이나 따뜻 한 기운 등은 대지의 열[火]로 전환되며, 우리 몸의 운동이나 혈액의 운동 등을 원활하게 해주었던 바람의 기운[風]은 대지의 움직임, 바람이 되어 흩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산하대지는 내 몸과 무관하지 않다. 내 몸은 결국 산하대지로 환원되며 산하대지는 바로 내 몸임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런데 어찌 남의 것을 대하듯 마구 뚫고 부수고 해칠 수 있단 말인가! 개발과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수백만 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해 온 산을 뚫고 부수어 바다의 갯벌을 막는다. 갯벌 속의 무수한 생명들이 죽어간다. 늦은 밤에 공장에서 폐수를 방출하고, 공장의 굴뚝에서 마구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휴지와 음식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아무 곳에서나 침을 뱉고 코를 푼다. 이 세계는 더불어 살아야 참으로 살맛나는 환희와 기쁨의 세상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는 것이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인류가 진작부터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이 연기의 진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처럼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물이 오염되어 정수된 물을 사먹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 중심의 태도를 버리고 산하대지와 공존하고 더불어 살아갈 때 자연은 우리에게 기쁨과 환희로 보답 해 준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변화무쌍한 자태를 뽐내며 산하대지는 인간들에게 신선함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반면에 연 기법을 무시한 채 인간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으로 자연을 마구 파괴하고 우주의 생태계 질서를 교란시키게 되면 반드시 엄청 난 재앙을 초래하여 머지않아 인류는 공멸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등과의 더불어 사는 것 또한 기쁨을 주는 생활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라 하더라도 혼자가 아니라 많은 고마운 이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삶이 신나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생활에서 연기법을 잊고 살면 그 즉시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바뀐다.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승진하며 더 빨리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끝이 없다. 내가 승진하기 위해 서 동료가 퇴출당해야 하며 내 아들 딸이 대학입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다른 아이들이 떨어져야 한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내가 피해를 보면서까지 다른 사람이 잘 한 것 혹은 잘 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나의 이익을 접고 남의 이익에 찬사를 보내고 기뻐한다는 것은 성인군자가 아니고는 실천하 기가 쉽지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고의 발상을 바꾸어 연기법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그리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네트워크 시대에는 공존의 밀도가 고도화되기 때문에 ‘나만 혼자 잘 살고 남들은 못 살아도 상관없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가 진 자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지능지수를 IQ(Intelligence Quotient)라 하고 감성지수를 EQ(Emotion Quotient)라 하듯이 정보화 사회에서 서로 공존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공존지수, 즉 NQ(Network Quotient)라 한다.
공존지수가 정보화 사회의 삶을 영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측면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 인류 맞 이하고 있는 네트워크 시대는 연기법의 응용이 극대화된다는 의미이다. 농경시대에 사용했던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속담 보다는 네트워크 시대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말이 더 설득력 있고 적합하다는 것이다. 즉 NQ시대의 생존전 략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가 아니라 ‘네가 잘 살아야 나도 잘 산다’는 공존의 법칙이 유효하다. 갈수록 복합적인 상호관계 성이 확대되는 사회에서 자기만 잘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실패는 물론이고, 자신과 관계된 다른 사람에게 도 큰 피해를 입힌다. 더불어 공존하면 모두가 기쁘고 즐겁지만 남을 이기기 위해 짓밟으면 함께 슬프고 비참해진다.
그러므로 연기법 수행을 실천하는 이는 큰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고 함께 기뻐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고, 북경에 있는 나비의 펄럭이는 날갯짓이 아마존 유역의 태풍의 원인이 된다. 미시적 변화 가 거시적 변화를 가져온다. 옆집 개가 새끼를 낳아도 기뻐할 일이요, 갑돌이네가 산 주식이 껑충 뛰는 것도 기뻐할 일이다. 앞집 소녀 가장 영희가 그 어려운 와중에도 공부를 잘하여 장학생이 된 것도 기뻐할 일이다. 이처럼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세 상이 온통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연기법의 시ㆍ공간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은 항상 공경과 감사 그리고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런 연기법의 원리를 바로 적용하기란 참으로 힘들다. 이 원리를 머리로는 이해하여 실천해 야겠다는 생각을 해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입사한 직장 동료가 쾌속 승진하는 것을 보면 심통 이 나고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법이다. 당장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생각을 하여 동료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낼 수 있는 사 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힘들이지 않고 더불어 기뻐하고 좋아할 수 있다면, 위에서 말했듯이 네트워크 시대의 공 존지수가 매우 높은 연기법 수행자일 것이다.
다음에서 살펴볼 나머지 2가지 연기법 수행은 공존의 몸가짐과 말씨, 그리고 마음가짐 즉, 신ㆍ구ㆍ의(身 口 意) 3업을 다스리 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관한 것이다.
연기법 수행 ③ _ 안으로 늘 깨어있는 생활
다섯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외부의 정보와 의식 공간에 존재하던 기존의 개념, 관념, 가치 등 무수한 심리적 정보들과 결 합되어 연기적 ‘나’가 형성된다. 안으로 늘 깨어 있어 이렇게 형성된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연기 법 수행의 세 번째이다. ‘나’는 찰나찰나 연기적으로 변하고 있어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무아’라는 사실을 늘 깨어 있는 마 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공부를 할 때는 이 말이 수긍이 가고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만 우리 생활속에 실천하 려고 할 때는 ‘무아’니 ‘연기법 수행’이니 하는 말 따위는 나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상황에 이끌리고 주위 사 람들에게 휘둘려 괴로울 때, 화가 날 때, 일이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 우리는 순간순간 그 상황의 노예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도 깨어있는 마음을 놓치지 않고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며, 혹은 자신의 말과 뜻을 관조할 수 있을 때 그를 우리는 연기법 수행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친구와 싸움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싸우는 순간 친한 친구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이렇게 욕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망각한 채 그저 욕하고 주먹이 날아가고 심한 몸싸움까지 하고 만다. 이렇듯 순간의 상황에 휩쓸려 내 마 음의 중심을 잃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비로소 후회하고 한탄한다.
연기법 수행자란 누구인가? 순간순간 연기적 삶의 태도를 잃지 않는 자이다. 연기적 삶의 태도란 무엇인가? 예컨대, 화를 내 는 순간 연쇄적으로 일어날 상황들을 미리 간파하여 몸과 입과 뜻을 조절하는 것이다. 마치 바둑의 달인이 바둑판의 진행될 상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듯이, 내 몸ㆍ입ㆍ뜻의 행위가 전개될 상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이런 수행자는 어떤 돌발 적인 상황에도 휩싸이지 않고, 마음이 항상 밖을 향해 있지 않고 내면을 관조하고 있다. 이 사람의 내면은 맑고 고요하다. 마음은 언제나 당당하여 흔들림이 없으며 그 어떤 외부의 경계가 다가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연기법 수행자의 맑 고 당당한 마음이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六根]은 외부의 대상, 즉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六境]을 찾아 헤매고 다닌다. 더 좋은 경계, 더 짜릿한 자극을 찾아 집착하고 소유하고자 한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가지고 싶고, 귀로 좋은 말을 들으면 자꾸 생색내고 싶어 하며, 좋은 음식은 자꾸 먹고 싶고, 좋은 사람은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6가지 감각기관인 6근이 시키는 대로 이끌리다 보면 자꾸 욕심과 집착이 늘어나 ‘나’라는 생각만 키우고, 이 ‘나’라는 거창한 실체관념에 끊임없 이 업을 덮어씌워 결국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연기법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도 이런 실체관념의 늪에 빠져들지 않고 성성하게 깨어있는 자이다. 외부에서 그 어떤 경계가 그 를 휘젓더라도 경계에 따라 마음이 천차만별로 흩어지지 않는다. 참된 연기법 수행자의 면목은 경계에 닥쳤을 때 여실히 드러 나는 법이다. 언뜻 보기에는 모두가 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경계 앞에 서면 참된 맑음, 참된 수행자의 실상이 나타난다. 맑은 물 한 컵과 흙탕물 한 컵을 한동안 가만히 놓아두면 양쪽 다 모두 맑게 보여진다.
그러나 막대로 휘저어 본다면 맑은 물은 그대로 맑지만 흙탕물은 온통 탁해지기 마련이다.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을 제외하면, 휘저어도 맑음을 원래대로 유지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것 이다. 아무리 연기법 수행자라 하더라도 경계 없는 인생은 없으며 경계에 닥쳐 ‘욱’하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경계가 닥치면 과거 업식(業識)따라 마음은 동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업식에 놀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안으로 늘 깨어 있어 솟아나는 업식을 관조하고 있으면 그 업의 세력은 곧 약화되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연기법 수행 ④ _ 분별심과 집착을 놓아버린 자유로운 생활
육근과 육경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낸 ‘나’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생각과 앎의 거품이 가득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라는 존재는 연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눈으로 물질인 색 을 보는데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좋다, 나쁘다 분별을 하며 마음이 대상에 머물게 된다. 대상을 붙잡고 ‘나’, ‘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일으킨다. 일상의 삶을 잘 살펴보면 항상 ‘좋다-싫다’, ‘아름답다-추하다’, ‘나의 것이다-너의 것이다’ 등 분별의식 속 에서 살아간다.
이 분별심은 집착을 낳는다. 집착은 항상 탐착과 혐오라는 두 가지 양상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탐착은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 각되는 것은 강하게 끌어들이는 심리 에너지이고 혐오는 자신에게 해롭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거부하고 밀쳐내는 심리 에너지 이다. 이런 심리적 에너지가 우리들의 삶 전체에 점철되어 있어, 이 에너지의 강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는 상태에서는 그 누구도 고통과 번민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툼을 일으킨다.
하지만 대상은 늘 허망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 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이지 좋고 싫은 대상이 항상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 연이어 교차하며 흐르는 것이다. 이처럼 애착과 혐오, 사랑과 증오, 쾌락과 고통, 칭찬과 비난,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건강과 질병, 심지어 삶과 죽음까지도 매 순간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바로 생멸하는 연기적 현상을 애써 붙잡지 않고 놓아버리면, 시계추의 진동처럼 애착의 힘에서 혐오의 힘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제자리를 찾는다. 삶은 마치 좌우로 흔들리는 추와 같다. 추 스스로 중심을 찾게 가만히 놓아둔다. 억지로 그 추의 중심을 찾으려고 붙잡는 순간 추는 중심을 떠나버린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물 흐르듯 가만히 두면 되는데 좋으면 강하게 끌어들여 집착하고, 싫으면 무조건 거부하고 밀쳐내어 고통과 번민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된다. 자유와 해탈의 삶은 저 멀리 사후 열반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떤 상황에도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면 ‘지금 여기’에 바로 지고한 행복의 삶이 있는 것이 다. 이것이 연기법 수행의 핵심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생활속에서 연기법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편의상 4가지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마디로 줄 여서 말하면, 연기법 수행의 목적은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내린 ‘자아’라는 강한 철옹벽을 녹여 없애는 데 있으며, 자아중 심의 분별심에서 생긴 좋고 싫음의 두 극단을 지양하여 지혜의 발현과 자비의 실천을 꾀하는 데 있는 것이다.
연기법 수행은 기법이나 테크닉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불교수행 테크닉에도 적용되어야 할 가장 원초적인 원리이다. 비록 여러 가지 수행법들의 언어의 표현과 구체적인 행법들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다 할지라도, 이들 수행법 속에서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는 이론적 토대는 연기법이다. 즉 연기법은 어떤 형태의 불교전통에서도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수행 원 리이다. 이 원리의 특징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행복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소멸되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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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
12연기(十二緣起)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와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와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소멸을 설 명하고 있는 연기법의 기본 원리를 가장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초기경전에 보면 상황에 따라 12가지의 연기 이외에도 다 양한 종류의 연기가 있다.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정각(正覺)을 이루시기 전의 정황을 이렇게 회상하셨다. ‘정말로 이 세상 은 고통 가운데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는다. 이 고통으로 부터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 … (중략) ‘노병사[老死]의 고통은 태어남[生]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남은 어떤 존재[有]가 있 어서다. 그 존재는 집착이 모인 덩어리[取]이다. 집착은 애욕[愛] 때문에 생긴다. 애욕은 받아들임[受]에 의해 일어난다. 받아들임은 접촉[觸]에 의한 것이다. 접촉은 6가지 감각기관[六入]에 의해서이다. 감각기관은 육체와 정신[名色]이 있기 때 문이다. 명색은 의식[識]에 의해 생긴다. 의식은 의지[行]에 의해 일어난다. 그 의지는 어리석음[無明]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알게 되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즉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가 소멸한다. 그리고 유가 소멸하면 생이 없어지고 생이 없으면 노병사가 없어지고 노병사가 없 으면 수비고뇌(愁悲苦惱)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12권 285경 「불박경(佛縛經)」
12연기란 모든 괴로움을 떠나기 위해서 그 발생과 소멸을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가지로 풀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12연기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 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고통을 여의기 위함이 연기법이니 만큼 역으로 위의 경전의 순서처럼 먼저 노 사에서부터 12연기를 간단히 알아보자.
노사란 늙음과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노사는 삶의 모든 괴로움을 총칭한 근심, 비애, 고통, 번뇌[憂悲苦惱] 를 말한다. 모든 존재는 생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이 피할 수 없는 노사의 모든 괴로움은 무엇 때문에 있 는 것일까? 태어남[生]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즉 삶의 고통은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전 과정 즉 생노병사를 괴로움이라 한다.
그러면 생은 무엇이 있으므로 있는가? 생은 집착을 여의지 못한 존재[有]가 있어서다. 또한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 좋은 것 과 싫은 것을 실체가 있는 존재로 고착화시키다 보니 태어난 것은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을 맞게 된다.
존재는 어떻게 있는가? 집착 때문에 있다. 취는 집착의 의미로서 인간의 미혹한 생존은 집착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맹목적인 애증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집착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애욕 때문이다. 애욕이란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보통 목이 타서 갈증이 나면 오로지 물을 구하려 는 생각만 나는 것처럼,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충동적 욕망을 말한다.
애욕은 왜 생기는가? 받아들인 느낌과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이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 닌 느낌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인식작용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 는 심적인 힘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受)가 발생하는데 이 수 때문에 애욕과 갈애가 생기게 된다.
접촉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수가 있기 때문이다. 촉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모든 촉은 6근이 6경과 접촉 하지 않으면 결코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촉에도 6가지의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마음)에 의한 6촉(六觸)이 있다. 촉은 6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6입 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6입(根) 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그러면 촉은 무엇으로 인하여 생기는가? 그것은 6가지 감각기관(六入) 때문에 생긴다. 6입이란, 6근(六根) 혹은 6처라고 하는 데 이는 대상과 감각기관과의 대응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6입은 무엇으로 인하여 있는 것일까? 명색으로 인하여 있다. 명색이라 함은 정신현상을 표시하는 명칭과, 그리고 물질을 나타내는 색을 합친 것을 의미한다. 6입의 대상이 명색이다.
그렇다면 명색과 그에 대응하는 6입인 감각기관만 있으면 인식활동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상태에서 결코 인식현상은 일 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식이 있어야 한다. 죽은 사람이 꽃을 보거나 만질 수 없듯이, 식이 없으면 인식활동이 존재하 지 않는다. 사실 식은 명색이 있기에 존재하고 명색은 식이 있기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이 6입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기관인 6입과 그 대상인 명색 그리고 인식 주관인 식이 다 함께 갖추어졌을 때만이 사물과 접촉하는 인식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심층의식도 포함한다. 장미꽃을 볼 경우 장미 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장미꽃을 본 경험과 정보가 심층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장미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이다.
식은 어떻게 있는가? 행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으로 인하여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행이란 이미 몸과 입과 뜻에 의해서 형성된 선행 정보들이다. 이를 신런막의(身 口 意)라 한다. 장미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미 입력된 장미꽃이라는 명칭도 개념도 없다. 물론 장미꽃이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기존에 형성된 다른 정보들과 조합하여 개념과 명칭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장미꽃과 비슷한 찔레꽃이라 인식할 수도 있다.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에너지의 형태로 행이 있지 않으면 상응하는 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경험된 행위가 여력 을 남기며, 지식정보, 성격, 습관, 소질 등의 에너지로 축적된다.
마지막으로 행은 왜 생기는가? 무명이 있기 때문에 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무명(無明)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 지혜)이 없다 는 말이다.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에 대한 무지이다. 괴로움은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팔정도 중에 정견, 즉 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확 실히 체득하게 되면 무명은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의 핵심교리를 연기법의 개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체법, 삼법인, 사성제 그리고 12연기의 순으로 알아보았다. 사실상 어떤 교설을 먼저 살펴보더라도 연기법의 중심축을 벗어나지 않는다. 일체법은 존재의 연기적 구조를 다양한 관점에 서 설명한 것이고, 삼법인은 존재 현상의 연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사성제는 연기적 관찰을 통한 괴로움의 극복을 제시하는 실천적 교설이다. 그리고 12연기는 연기법 자체를 심층 분석하여 고통의 삶과 해탈의 삶을 구체적으로 밝힌 가르침이다. 이처럼 불교 교설의 중심축은 연기법이므로 어떤 교설이라도 연기법의 틀 안에 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중관, 유식, 천태, 정토, 화엄 등 다양한 교설들이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새로운 구성과 확장된 개념으로 불교 교설을 재정리했다 해도 연 기법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일체법, 삼법인, 사성제 그리고 12연기를 잘 외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생활속에서 실천할 수 없는 교설이라면 고급 지식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고상한 지식에 불과하다. 불교 교설은 제대로 실천했을 때 온전한 체험의 세계에 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종단의 각 불교대학이나 사찰의 교리강좌, 혹은 교리해설서를 통해서 교리를 통달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삶 속 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한낱 지식에 지나지 않으며 연기법을 실천하는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연기법을 축으 로 한 위의 교설들을 생활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고 실천 수행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