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3

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 오마이뉴스

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 오마이뉴스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 42화

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YWCA 위장 결혼 사건
20.08.26 08:52l최종 업데이트 20.09.17 09:01l
김성수(wadans)

공감111 댓글4

큰사진보기
▲ YWCA 위장결혼식에 참석한 함석헌 (우측)
ⓒ 함석헌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함석헌(1901-1989)은 1979년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YWCA 강당에 도착해서야 그 날의 행사는 사실 위장 결혼식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한 달 전인 10.26 사건 이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발표에 반발해 재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석헌은 현장에서 들었다. 그래도 함석헌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이용당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YWCA 강당에 모인 함석헌을 비롯한 전 대통령 윤보선과 해직교수 김병걸, 그리고 백기완, 임채정, 양순직 등은 박정희 유신 독재 체제의 청산과 군의 정치적 중립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낭독했다. 하지만 성명 낭독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들이 강당에 난입했다. 강당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곳에 모인 140여 명은 불구속 입건되었고, 함석헌 등 주동자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로 끌려갔다. 함석헌은 이곳에서 15일간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보안사에서 "함석헌이 젊은 군인들에게 매를 맞았다. 수염이 다 뽑혔다" 등의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함석헌의 자녀들은 면회도 안 되던 터라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애가 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

보름 후에 나온 아버지를 보고 함석헌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몸에 온통 푸른 멍이 든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함석헌의 3녀 함은자(1929-2017)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했다'며 필자에게 한탄하기도 했다.

친일 콤플렉스가 있는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사상가 함석헌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1970년 함석헌이 창간한 월간지 <씨알의 소리>는 2호를 내고 폐간됐다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해 승소하고는 유신정권 하에서도 계속 발간됐다.

하지만 전두환은 달랐다. 1980년 전두환은 무슨 이유로 폐간한다는 공문 한 장도 없이 <씨알의 소리>는 물론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발간한 <현존>, 서울대 교수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 등 170여 개의 잡지를 하루아침에 강제 폐간했다. 언론대학살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행한 것이다. 그래서 함은자의 말처럼 (무식한)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했다는 말이 나왔다.

YWCA 위장 결혼 사건 후 보안사로 끌려간 함석헌 등 재야 인사들은 불법 구금상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함석헌은 자신이 보안사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생전에 이야기한 적이 없고 글로 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몇 인사들은 당시 보안사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경험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그 중의 일부를 살펴보자. 아래는 지난 1987년 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간한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큰사진보기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후 연행되는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5-6명의 군인들이 머리 수술한 부위 일부러 걷어차

이철용은 당시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실무자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강당 현장에서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어 다음날 오전 11시경 서빙고동에 있는 보안사로 이송되었다. 계엄사에 도착한 후 지하실로 끌려가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은 후 곧바로 방으로 데려 가더니 5-6명의 군인들이 군홧발로 온몸을 가리지 않고 걷어차는데, 그들의 표정을 기억해보면 죽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사랑으로 가득 찼던 그들이기에 우리를 원수 잡듯, 개 패듯 달려들어 짓이기는 것이 마치 나라를 위하는 행동인 양 도도하고 원한에 찬 얼굴들이었다.

그런 후 2층 취조실로 데려갔다. 거기서도 검은 테이프를 감은 야구 방망이 같은 것으로 온몸을 얻어맞고 발길질을 실컷 당한 후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받기 전에 당한 매질로 머리가 찢어져 조사실 옆에 있는 간이병원에 가서 일곱 바늘을 꿰매었다. 그때 그곳에는 김용복 선생(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신학박사)이 기절하여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으며 눈 밑이 찢어져 다섯 바늘가량 꿰매었다. 조사를 받은 후에는 지하 감방으로 다시 끌려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했는데 2분 간격으로 군인들이 들어와서 구둣발로 걷어찼으며 특히 머리의 수술한 부분을 일부러 걷어찼다.

이런 고문을 하면서 도중에 "내가 각하를 모시고 있던 경호원인데 각하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지랄이냐" "너는 빨갱이보다 더한 놈이다" "각하가 나라를 위해 얼마나 애쓰신 줄 아느냐" "함석헌도 빨갱이다" "유신이 죽은 줄 아느냐" 등의 위압적이며 모욕적인 말로써 기를 죽였으며, 거기서 풀려날 때 "나가서 맞았다는 얘길 하면 다시 와서 죽을 줄 알아라"는 협박을 받았다.

김병걸(1924-2000)은 문학평론가다. 그는 1974년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다가 서울산업대학교 (구 경기공전)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나는 1979년 11월 25일 오후 포승줄에 묶여 서빙고동 보안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지하 감방에서 "옷 다 벗어!"하면서 얄팍한 군작업복을 던져 주었다. 속옷을 다 벗고 군작업복으로 갈아입자 내 방으로 5명의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나를 둘러싸고 군화 발길질, 몽둥이질, 고무신으로 얼굴후려치기 등 1시간 정도 사정 볼 것 없이 고문했는데, 엎어지고 나뒹굴고 쓰러져서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그런 다음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빨간색 카펫이 깔린 조사실로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조서를 받기 전에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 뒤로 휙 젖히며 본 사건의 자금 출처부터 캐었다. 자금 출처가 '이북이냐, 조총련이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감아쥔 내 머리채를 벽에다 몇 번 박아치기하며 "'나는 혁명가입니다'라고 말해봐!" 해서 내가 "아닙니다" 하니 벽에 나를 기대어 세워놓고 군홧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얼굴, 가슴, 다리, 옆구리 등을 사정없이 갈겨대었다. 쓰러지면 바로 서게 해서 갈기고 또 쓰러지면 다시 세워 깔아뭉갰다.

그들은 겁에 질린 나에게 "'나는 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해봐, '나는 민주인사입니다'라고 말해봐, 이 새끼야!"하며 강요했다. 나는 도저히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아닙니다"해도 군홧발 짓이기기는 사정없이 가해졌다. 2시간 정도를 그렇게 당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한 후 다음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양 무릎을 꿇어 앉혀 놓고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에 굵은 몽둥이를 끼워 넣고 그 상태에서 허벅지를 군홧발로 지근지근 살이 뭉개지도록 짓밟는 것이었는데, 내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며 나가자빠지거나 엎어지면 몽둥이로 등, 어깨, 허리 할 것 없이 마구 내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xxx 라고 말해봐!"하는 말에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면 고무신짝으로 얼굴을 내리갈겼다. 이렇게 해서 두 번 기절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먼저 고문을 가한 후 비로소 조사를 시작했으며, 조사가 끝난 후에는 스스로 걸어갈 수가 없어서 두 명의 군인이 나를 끌어다 내 감방에 데려다주었다.

둘째 날도 첫날과 같은 고문을 한 후에야 조사를 하곤 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받은 몽둥이질, 군화 발길질, 고무신짝으로 얼굴 후려치기 등은 이루 다 기억할 수가 없다.

3일간을 이렇게 계속해서 고문조사를 받았다. 그 후 수사 윤곽이 잡히면서 좀 나아졌는데, 그러나 조사를 끝내고 내 지하 감방에 오면 우리를 감시하는 헌병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감방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마침 심심한데 잘 되었다는 듯 시비를 걸거나 별 이유도 없이 군홧발로 공차 듯 걷어찼다. 하루 5, 6회 가량 그 짓을 당했다.

이런 치욕과 울분의 일주일 동안은 팔을 마음대로 들어 올릴 수도 없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서 화장실 갈 때도 부축 받아 간신히 기다시피 다녔으며, 용변 보기도 큰일을 치르듯이 해야 할 만큼 힘에 겨웠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석방된 후 자신들이 당한 고문을 들으니 대부분 내가 당한 이상의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같은 건물 안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밀폐된 방에서 각기 다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형편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열흘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고문을 따로 하지는 않았으나 아침 6시에 기상해서부터 오후 10시 취침할 때까지 식사 시간과 화장실을 가는 외에는 방 안에 바른 자세로 정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만 눈이 옆으로 돌아간다거나 허리가 약간만 굽어져도 참을 수 없는 욕을 당하면서 군홧발로, 몽둥이로 맞아야만 했다.

이때의 나는 손발은 군홧발에 밟혀 시꺼멓게 멍이 들었고 다리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그 자리에 피가 엉겨 붙어 있었으며 온몸에 피멍이 들어 신음과 공포 속에서 지내었다.

나는 17일 만에 보안사에서 석방되었는데 그 후 시내 백병원 원장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지금의 이 상태로는 진찰조차 어려우니, 3-4일 집에서 목욕을 하면서 안정하면 가라앉을 부분과 그렇지 않은 문제의 부분이 나타날 터이니 그때 가서 치료해 보도록 합시다"하였다.

1980년 1월 8일 현재에도 30분도 안 되는 시간을 걷거나 버스를 타고 나면 주저앉고 싶을 만큼 괴롭다. X-레이에 나타난 바로는 명치뼈가 회복하기 어려운 절단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한다. 다른 동지들의 상태에 비하면 나는 고문 당했다는 소리를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들이 감옥에서나마 건강만이라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보안사에서 풀려나올 때 "이 안에서 지냈던 일이나 건물 위치, 얻어터진 사실 등은 국가 기밀에 속하느니만큼 밖에 알리면 이적행위가 되니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침묵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앉아, 일어서를 수천 번 계속했다

박철수는 당시 한신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강당에서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다음날 오전 8시경 보안사로 넘겨졌다. 거기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고문당한 사실은 이렇다.

1. '앉아, 일어서'를 수천 번 계속했고,
2. 나로선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무릎 끓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릎을 꿇되 앞정강이를 붙인 채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발목을 안쪽 복숭아 뼈가 밖으로 향하게 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었고,
3. 꼬라박기(일명 원산폭격)를 시켜 장시간 견디지 못하고 자세가 흐트러지면 몽둥이로 내리쳤고,
4. 무릎 사이에 알루미늄으로 된 침대 각목을 끼우고 한쪽을 스팀파이프에 고정시켜 꿇어앉은 자세에서 밑으로 누르는 것이었으며,
5. 엎드려 뻗친 자세를 시킨 다음 엉덩이를 몽둥이로 지칠 때까지 후려치고,
6. 고무신으로 얼굴을 후려치거나,
7. 철창에 매달리기를 수십 번 시키는데 만약 힘에 부쳐 땅으로 떨어지면 그 벌로 창살 밖으로 다리를 내밀게 한 후 여러 차례 군화로 발길질을 하였고,
8. '빈대 붙어있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벽에 다리와 팔을 최대한 확 벌려 밀착시키고 목은 바짝 뒤로 젖히는 동작을 시켜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고,
9. 손바닥 그리고 손등을 몽둥이로 수 십 번씩 내려치거나,
10. 조사받는 이틀 동안 꿇어 앉혀 놓고 눈을 감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고문을 가해 잠을 전혀 못 자도록 했으며,
11. 벽에 등을 붙인 자세에서 양팔을 똑바로 위로 올려서 손바닥을 벽에 붙이게 한 후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는 동작을 시키고
12. 이외에도 '빨갱이 새끼', '간첩 새끼' 등의 욕설을 퍼부어 됐고, 내가 있는 지하실에서 한강 하수구로 곧바로 통한다는 등으로 겁을 주었으며 또한 지하 감방에서 계속 '으악!', '어머니!', '아버지 !' 등의 고문으로 인한 비명이 들려와 정말 죽어나가는 게 아닌가 하여 극도의 불안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틀 동안을 이렇게 지내고 유치장으로 넘겨질 때 위와 같은 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경우엔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각서에 날인하도록 강요했다.

YWCA 위장결혼 관련자들은 이런 가혹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후에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가혹한 고문과 5.18 헬기 사격

지난 24일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의 16차 공판기일이 열렸다.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성 전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특조위 조사 결과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씨 측 변호인은 이 증언에 의구심을 표했지만 김성 부위원장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군 기록, 목격자 조사 등을 통해 5월 27일 전일빌딩을 비롯해 이전에도 송암동, 광주천, 조선대 절개지(뒷산) 등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진술했다.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부터 약 6개월 지난 1980년 광주에서 5.18 광주학살이 일어났다. 함석헌을 비롯한 민주화운동가에게 가혹한 고문을 하고, 광주 거리 곳곳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인 만큼 헬기로도 시민을 사격했을 것이다. 그의 만행은 언제쯤 단죄받을 것인가.


▲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당 관계자들과 함께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한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은 지난 19일 5.18 국립묘지를 찾아 "권력자의 진심 어린 성찰을 마냥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에서 그 시대를 대표하여 제가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라고 사죄했다.

그가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김종인은 1980년 전두환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재정분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자금과 실무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 공로로 전두환에게서 보국훈장을 받았다.

김종인은 이 자리에서 "저는 신군부가 만든 국보위에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다. 여러 기회를 통해 과정과 배경을 말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심에 빠진 광주시민들과 군사정권에 반대한 국민에겐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라며 "다시 한 번 이에 대해 사죄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