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3

배다리모임 이야기 김기근 - 함석헌 선생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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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on Pil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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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모임 이야기
김기근
함석헌 선생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선생님께서 저의 고향마을(평북 박천)에 가끔 오셔서 성경말씀을 해주셨던 짤막한 이야기를 몇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함선생님께서는 1938년에 오산학교를 사임하시고 오산학교 부근에서 사과과수원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주일 날에는 댁에서 여러분을 모아놓고 주일예배를 같이 드리기도 하면서 바쁘게 지내시던 때였습니다. 그런 바쁜 와중에도 약 2년동안을 한달에 한두 번 정도 저의 마을에까지 오셔서 성서모임을 위해 수고해 주셨습니다.
이 모임에 오시게 된 동기는 1920년초 저의 마을에 같이 살던 윤기안(서울 정의여자고등학교 창설자)씨가 내촌감삼(內村鑑三)전집, 성서조선(聖書朝鮮)지 및 가신지(嘉信誌, 矢內原忠雄 - 시내원충웅 저)등을 구독하면서 그 잡지에 기고하고 있던 함선생님을 모셔다가 성경말씀을 들어보자고 하여 모시게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산근처에서 사셨던 선생님께서 저의 마을까지 오려면 댁에서 경의선 고읍역까지 약 5리(2Km)를 걸어 나와 기차를 타고 운전역, 영미역을 지나 맹중리역에서 내려 서남쪽으로 약15리(6Km)남짓한 농로를 걸어와야 덕안면 남오동 배다리마을에 닿게 됩니다. 배다리 모임은 농가집 방에서 모이곤 했는데 당시 평안도의 가옥형태가 방과 방사이에 판자문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으므로 여럿이 모일 때는 그 판자문을 터놓아 한칸으로 통하게 해놓곤 했습니다.
당시 함선생님 나이 40을 바라보는 성숙한 장년으로 키도 훤칠하시고 재덕을 겸비하셨으므로 선망의 대상이였는데 평범한 복장을 하시고 빡빡머리를 한채 성경책을 보자기에 싸들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외진 시골의 대여섯가정 10-15명의 적은 사람들을 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함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사명감을 가지고 신앙간증과 믿음의 권고와 형제사랑을 함께 묶어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는 희생봉사의 현장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하고 생각하시며 오곤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모임이야말로 아무런 격식이나 순서에 구애될 것도 없고, 장로교나 감리교등의 교파의식도 없이 오로지 성경말씀의 참뜻만을 알기 쉽게 그리고 폭 넓게 여러 종교경전을 대조해 가면서 설명을 하셔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한 생각도, 피곤함도 없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말씀에 끌려 좌중은 뜨거운 열의에 차곤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인격적으로 단단히 결합될 수 있다면 많은 무리가 모이는 것보다 적은 수라도 알차게 합심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함선생님께서는 그 당시에 성서조선지에 히브리어 강의를 연재하고 계셨으므로 저희 모임에 오셔서 목사님이나 전도사들도 난해하여 탐구하지 않던 히브리서를 강해하곤 하셨습니다. 성경지식이 깊지 못했던 초신자들에게는 어려운 강의였지만 함선생님이 그 믿음의 열기에 감동되어 그 모임에 모두들 열심히 참여하곤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익히 아시겠지만 선생님께서는 항상 편안하게 사랑방이야기처럼 말씀을 풀어나가시곤 하셨기 때문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경청하게 됩니다.
1937 -1940년 당시에는 우리민족이 아주 깊은 함정으로 빠져들어가던 때였습니다. 주일전쟁이 시작되어 일본군벌주의자들이 동양천지를 전쟁으로 몰아 넣으려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고 우리민족에게 언어말살을 강요하고 창씨개명으로 모두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고 종교자유도 박탈하여 일본신사를 신봉하라고 강제로 참배시키고, 농산물과 일반경제는 통제경제로 묶어놓고 수탈을 당하고 젊은청년들은 지원병으로 강제징집하여 전쟁터로 몰아내는등 가히 민족생존이 존망지추에 임해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민족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함선생님께서 배다리모임에 오셔서 뜻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밤늦도록 진지하게 많은 말씀을 나누곤 하였습니다.
특히 함선생님의 가르침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물리적인 힘이나 폭력을 써서는 않되고 오직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하셨고 그것은 선생님이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주장하셨던 선생님의 높은 사상입니다. 함선생님은 늘 걸을 때에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걸으라고 가르치셨고, 맹자를 소리내어 읊으시며 걸으셨습니다. 잠시도 방심을 하시거나 잡념으로 마음이 흐트러짐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언제나 깬 마음으로 참을 놓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올바른 정신으로 우리가 몸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예수를 믿는 신앙, 바로 그것을 말씀해 주시려고 그 외진 배다리마을까지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셨고 나아가 4천만 온 국민에게 보내는 절규요, 민족을 위한 살아있는 메시지였습니다.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일 중의 하나로 1938년 중추절을 맞아 오산 함선생님댁에 모임식구들과 우리지역 배다리모임 식구가 칠악산 산정에서 함께 모여 합동야외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시간을 갖다가 박천에 있는 원수봉이 홍경래 난의 유적지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곳도 답사해보자고 하여 일행이 모두 그곳을 향하여 도보로 걸었는데 약 30리(12Km)길이었지만 좁은 길을 구비수비 걷다가 시간이 늦어져 산정까지 오르지 못하고 산기슭을 돌아 내려와 나룻배로 대령강을 건너서 헤어졌습니다. 그때에는 이런 기회를 또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후 여러 가지 주변상황이 급격히 바뀌어 유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가까이서 뵈었던 함선생님의 소박한 면을 제나름대로 표현한 이 글이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2000년 11 월14일 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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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글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페북으로 퍼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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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ㅇㄹㄱ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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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 선생님의 “배다리 모임” 이란 이야기는 귀에 익은 이름인데 이제 그 출처를 알겠네요.
    바로 그 말씀이 김기근 선생 입에서 자주 나왔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의 아버님, 김봉국 선생에게서 들은 고장이름 일지도 모르고, 또 선생님 말씀에서 익힌 이름알 수 도 있을법 하네요.
    40대 젊은 시절 내가 가지던미국생활을 기어 해 봅니다. 정신과 수련과정과 정신분석과정도 끝내고 뉴욕시외에서 병원을 반 개인사업 반으로 하든 정신치료를 바쁘게 하며 딸 둘 아들하나를 키우던 시절입니다. 무교회신앙과 함 선생님의 가르침을 정신치료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추심하는 생각이 떠올음니다.
    선생님의 인류학적이고 역사적 풀이 방법은 인간의 참 과 지혜와 믿음을 탐구하는데 불가결 한 방법이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문화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든 정신분석의 방법이 함 선생의 사상과 소통하는 바 있었기에 함 선생의 학문에 대한 존엄성과 인간성을 성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