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와 마음 -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은유이야기 수업
명법 (지은이)불광출판사201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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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쪽
책소개
‘은유와 마음’ 수업 교과서.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의 밑바탕이 된 철학, 심리학, 불교, 인류학 이론을 쉽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12편의 실제 사례 이야기를 함께 담았는데, 독자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자신의 한 조각을 발견하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함께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밀턴 에릭슨의 말처럼 “어떤 경우든 대안은 무수히 많다.” 단지 그 대안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물들지 않은 우리 안의 힘에서 나온다. 독자는 이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하고 경험하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1. 세상은 이야기로 되어 있다
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내’가 되는 기억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현재의 이야기가 과거의 사실을 구성한다
2. 삶은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
이야기가 바뀌면 삶이 달라진다
만들어진 비정상, 발명된 정신병
세 살 버릇 여든 가는 새로운 이야기 쓰기
3. 마음을 여는 열쇠, 은유
은유가 마음을 치유한다
은유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은유로 세계를 짓는다는 것
아무도 죽어 나가지 않은 집의 겨자씨
4. 은유스토리텔링, 새로운 나를 만나다
은유스토리텔링의 힘
나무는 어떻게 자라는가 ― 은지의 이야기
“내 이름은 조미정이다” ― 승환과 미정의 이야기
홀로 자라는 대나무 ― 선우 스님 이야기
당신은 벚나무의 어디를 보고 있나요 ― 은정의 이야기
잔고가 0원인 저금통장 ― 정숙의 이야기
멈춰버린 시계 ― 한 워커홀릭의 이야기
바다로 돌아간 거북이 ― 영주의 이야기
“엄마처럼 살지 마” ― 세 전업주부의 이야기
느티나무와 구렁이 ― 선주의 이야기
벼랑 위의 소나무 ― 어느 소통불능의 사람 이야기
말하는 가위 ― 진주의 이야기
스테인리스 그릇과 돌이 되고픈 소나무 ― 두 할머니의 이야기
에필로그
주석
더 보면 좋은 책
접기
책속에서
어째서 우리는 ‘세 살 때의 나’와 ‘여든 살 때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세 살 때의 나’와 ‘여든 살 때의 나’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자기동일성”이라고 한다. 자기동일성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몸과 기억이다. 몸은 내가 공간적으로 외부세계로부터 독립된 개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동일하게 존재하는 ‘자기(self)’는 기억에 의해 보장된다.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세 살 때 나’와 ‘여든 살 때 나’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24-25쪽
과거의 내가 경험하고 행동한 결과로 현재의 내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 의해 나의 과거가 구성된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억에 따라 언제든지 재구성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 31쪽
때로 나는 다른 사람 이야기의 조연이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에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 이야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끼어 있다는 것은, 데이비드 로이가 지적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 39쪽
이야기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신의 이야기가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더 큰 이야기, 즉 담론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 큰 이야기가 어떻게 쓰여 있는지, 그것이 내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물결은 저절로 방향을 바꾸듯이 거대서사가 달라지면 내 이야기도 저절로 달라진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바뀔 때 나의 이야기도 바뀌기 시작한다. 치유의 핵심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역할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47쪽
이야기치료도 해결중심치료의 하나로, “난 할 수 있어!”라고 순진하게 믿는 긍정심리학이나 모든 것을 과거 탓으로 돌리는 정신분석학과 달리, 세 살 때 버릇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부정적인 버릇이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지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버릇을 찾아내어 “세 살 버릇 여든 가는”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또는 지금까지 문제라고 생각했던 버릇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 62쪽
마음의 문제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는 바깥에 있는 상담자가 아니라 내담자 자신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듯이 문제가 있는 곳에 해결책도 있다.
- 67쪽
심리치료는 치료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융합하면서 이야기의 의미가 변화하고 경험을 향하는 새로운 관점이나 구별 방법이 계발되어 새로운 자세로 전개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들은 담론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이해 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맹목성을 깨닫게 될 때 나타나는 다른 의미의 질서 속에도 이미 부여되어 있다.
- 68쪽
무의식의 내용이 스스로를 표현하기 적합한 은유로 연결되고, 그렇게 연결된 은유가 우리 의식에 자동으로 드러난다. 그 과정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란 사실상 없다. 우리가 은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은유에 선택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은유를 통해 무의식에 저장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 130쪽
은유에서 자동 전환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후에 다시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가할 필요가 없다. 은유는 자동으로 성장하고 변화한다. 은유를 따라가기만 해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 찾고 있던 것, 또는 몰랐지만 내 안에 있던 무엇이다.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은유는 갈등이 종결되는 지점에 이르면 끝을 맺는다.
- 168쪽
명상 상태에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버리고 역할을 떠나 순수하게 공(空)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의 또 다른 모습이며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근원적 힘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곧 공, 무아(無我)를 입증하는 것이다.
- 247쪽
우리가 어떤 이야기든 될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 우리는 선한 이야기도 악한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이야기는 선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비록 공성(空性)은 선악을 벗어나 있지만, 공은 정신의 본성인 ‘자유’를 표현하는 또 다른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공성은 선의지(善意志)로 나타난다.
- 247쪽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명법 (지은이)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미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논문을 쓴 후 해인사 국일암으로 출가했다. 산사에서 엄격한 수행의 시간을 보낸 후, 학교로 돌아가 박사논문을 마쳤다. 동국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 대안연구공동체 같은 교육기관에서 미학, 명상, 불교를 강의하고 있다.
2016년, 오랜 도반들과 함께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공동체인 미르문화원을 열고 그곳에서 은유와마음연구소를 맡아 운영한다. 은유와마음연구소에서 은유이야기를 통한 치유 프로그램인 ‘은유와 마음’을 진행하며 보통사람들이 각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서 ... 더보기
최근작 : <은유와 마음>,<미술관에 간 붓다>,<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생이란 끝이 없는 이야기
‘나’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은유이야기 속에서 밝혀지는 ‘내가 모르던 나’
드디어 만나게 될 나의 무한한 가능성
우리는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 존재한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바, 다시 말해 ‘나’라는 이야기에 따라 삶은 펼쳐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때로 우리를 억압하고 삶에 그늘을 드리운다.
은유이야기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절박한 목소리를 드러내고, 문제에 물들지 않은 우리 안의 힘을 회복시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독려한다.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마음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다.
당신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은유와 마음’ 첫 번째 수업 시간, 명법 스님이 참가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참가자들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것이나 이야기한다. “음… 앉아 있는 새요.” “가시가 돋은 선인장이 떠오릅니다.” “저는 열매가 안 열리는 은행나무입니다.” “내 인생은 잔고가 0원인 저금통장이에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새는 왜 앉아 있는지, 선인장에 돋은 가시가 싫은지 좋은지, 열매가 안 열리는 은행나무 마음은 어떤지, 잔고가 0원이어서 불행한지 홀가분한지… 스님이 묻고 참가자들이 답하면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확장되고 문제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진다. 문득 떠오른 이미지에서 촉발된 이야기가 자기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음을 참가자들이 뭉클하게 실감하는 사이 이야기는 계속된다. 참가자가 왜 그렇게 아픈지, 자기가 몰랐던 것들이 왜 지금 이야기로 나오는지,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되는지 밝혀질 때까지.
인생은 끝없는 이야기지만, 한 사건에는 시작과 결말이 있다.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끝이 난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문제는 해결된다. “놀랍게도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우리의 일상은 끝이 없지만 마음의 이야기는 어느 시점에서 끝이 난다. 이렇게 종결된 사건들은 심리적으로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지나간 과거가 된다.”
‘생의 감각’이 되살아나다
부분으로 쪼개진 마음을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많은 생각들은 번뇌다. 생각과 일치하는 한 가지 관점에서만 삶을 경험하도록 우리 마음을 쪼개기 때문이다. 생각에 사로잡혀 살다 보면 1평짜리 독방에 갇힌 듯 세상과 단절된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감각하지 못해 삶의 풍요로움이 사라진다. 그렇게 삶은 회색빛으로 물들고 우리에게선 생기가 메말라간다.
은유와 마음 수업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상을 경계하느라 잔뜩 움츠리고, 시야가 좁아져 있다. 때론 자신감과 긍정성이 과도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 역시 생각의 감옥에 갇혀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런 그들이, 6회에 걸친 수업에서 은유를 통해 자기를 말과 글로 표현하면서 생각의 감옥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감각의 주체로 거듭나는 여정”인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면 거의 모두가 ‘차분한 긍정’ 상태를 보인다. 확 넓어진 눈으로 말하고, 듣고, 글을 쓰고, 세상을 느낀다. 한마디로 ‘생의 감각’이 뚜렷하게 되살아난다.
자신을 멈춰버린 시계에 비유한 어느 워커홀릭이었던 사람은, 탈진되어 일을 할 수 없는 현재 상태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며 절망했다. 스님이 그에게 말했다. “시계는 멈춰 있어도 하루에 두 번 시간을 맞힙니다. 그러니까 두 번은 살아 있는 거지요.” 이 말에 번쩍 인식이 확장된 그는, 이후 수업에서 은유의 전환이 일어나 강물이 되었다.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대로 주어지는 걸 받아들였다. 수업이 끝나고 7개월 후, 다시 수업에 참가한 그는 이제 쉴 줄 아는 느티나무가 되어 있었다.
「나무는 행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그늘 아래에서 놀다가 돌아간다. 그들이 떠나도 이젠 섭섭하지 않다. 밤이 되면 홀로 남아 휴식을 즐긴다. 방해받지 않고 잠을 푹 자려고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세요.”」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삶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어느 사건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사건을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 여기고 인생이 거기서 끝날 것처럼 미리 무릎을 꿇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건 장벽이 아니라 조금 조심만 하면 되는 낮은 문턱이기 쉽다. 당장엔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을지라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의 연결 속에서 삶은 생각 너머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건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정의하고 그 정의대로 살아가곤 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슨 일을 하며 어떤 꿈이 있고,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고… 등등 ‘나’를 여러 가지 항목으로 규정하고 산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나’를 알 수 있을까? 그렇게 정의된 ‘내’가 나의 ‘전부’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나’는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것 너머의 무수한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다. “요컨대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뭐라 말할 수도 없고 일상적 삶의 차원을 넘어서지만 동시에 일상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나’는 어떤 특정한 ‘나’로 정의되기에는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어떤 것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그것을 어떤 고정된 것, 다시 말해 정체성으로 정의하는 관점을 바꾸어 본다면 ‘나’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
우리가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은 사실 습관과 관계의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패턴은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의미, 다시 말해 우리가 써나가고 있는 ‘삶이라는 이야기’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 따라서 그 이야기가 달라지면 ‘내’가 바뀌고 ‘삶’이 달라진다. 삶은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다.
은유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수단이다. 물고기가 물을 볼 수 없듯이 우리는 삶이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데, 은유를 이용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순간 우리는 자기가 곧 이야기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이는 먼저, 이야기를 쓰는 행위가 자기와의 거리를 두는 시도이기 때문이며, 다음으로, 은유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두루 드러내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은유를 통해 내 이야기를 쓰면 ‘나’는 은유 뒤로 숨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오는 안전감 덕분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기를 숨김없이 드러내게 된다. 더군다나 은유는 우리의 무의식과 맞닿아 있어서 의식 수준의 것들뿐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 존재하는 것들까지 모조리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처 몰랐던 절반의 진실, 억눌려 있던 무의식의 목소리, 숨겨져 있던 반쪽의 자기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만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은유를 읽고 말한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자신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다. 은유를 통해 개념과 사고가 재배열되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바뀐다.” 접근할 수 없었던 것, 즉 무의식에 접근하여 그 이야기를 쓰고 새롭게 창조해내는 은유의 힘. 바로 이 힘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삶을 확장하고 새롭게 쓰게 된다.
‘은유와 마음’ 수업은 은유의 바로 이런 기능에 주목해 고안된 이야기치료 프로그램이다.
‘은유와 마음’ 수업 교과서
이 책 『은유와 마음』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의 밑바탕이 된 철학, 심리학, 불교, 인류학 이론을 쉽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12편의 실제 사례 이야기를 함께 담았는데, 독자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자신의 한 조각을 발견하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함께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밀턴 에릭슨의 말처럼 “어떤 경우든 대안은 무수히 많다.” 단지 그 대안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물들지 않은 우리 안의 힘에서 나온다. 독자는 이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하고 경험하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입니다. 접기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 불교적으로도 의미 있는 책
명법 스님의 ‘은유와 마음’은 나무 비유가 참 많이 등장하는 책이다. ‘은유와 마음‘ 치료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자신과 닮은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라고 요구했더니 외롭고 힘든 나무, 오죽(烏竹), 벚나무, 크기도 적당하고 보기 좋게 다듬어진 정원수(庭園樹), 벼랑 위의 소나무, 아무도 다가올 수 없는 벼랑에 홀로 선 낙락장송 등으로 자신들을 비유한 것이다. 물론 돈이 들어오고 나가지만 잔고가 항상 0원인 저금통, 멈춰버린 시계 등으로 자신을 비유하는 내담자(來談者)들도 있다.
명법 스님은 이야기치료는 삶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며(60 페이지) 이 이야기치료는 과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기존의 심리치료와 달리 과거에서 문제 해결의 자원을 찾는다고 덧붙인다.(61 페이지) 우리가 은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가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자신의 의도대로 은유를 조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은유는 결국 그런 모든 저항을 뚫고 휘몰아쳐서 진의를 드러내게 한다고 말하는 책 ’은유와 마음‘...
은유와, 그에 대비되는 환유에 대해 참고하기 위해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를 오랜만에 다시 펴보았다.(‘은유와 마음’이 은유를 적극 활용하는 책이라면 ‘날 이미지와 시’는 은유를 부정적으로 보는 책이다.) 지난 2007년 고인이 된 시인은 자신의 시 ‘현상실험’과 ‘후박 나무 이래 1’을 예로 들어 은유와 환유를 설명한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꿈 많은 말발굽쇠다./ 닳아빠진 인식의/ 길가/ 망명정부의 청사(廳舍)처럼/ 텅 빈/ 상상, 언어는/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이다.”란 시 ‘현상실험’에서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꿈많은 말발굽쇠,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 등으로 대치된다.
이런 대치(‘은유와 마음’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전환)가 바로 은유의 특징이다. 오랜 세월 워커홀릭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깊은 무기력에 빠져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을 찾은 한 내담자가 자신을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느티나무로 표현하다가 멈춤을 휴식으로 생각하는 관점의 전환을 이룬 뒤 홀로 있지만 그윽한 미소를 짓는 느티나무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 (은유) 전환의 예이다.
한편 “잎 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새끼를 낳은 어미 개/ 싸락눈이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 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 턱 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 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 날고”란 ‘후박 나무 아래 1’은 환유를 이해하기에 맞춤한 시이다. 이 시는 관념적이고 해석적인 ‘현상실험’과 달리 사실적이고 감각적이고 표상적이다.
오규원 시인은 조주(趙州)를 종교와 관계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선사(禪師)로 말하며 그는 일상의 간결한 언어로 법(法)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조주와 비교되는 선사로 임제(臨濟)가 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을 한 선사이다. 오규원 시인은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법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서운 선언이라고 말한다.(‘날 이미지와 시’ 37 페이지)
오규원 시인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스승의 말에서 부처를 죽이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기에 무(無)가 부처요, 우상 파괴가 도(道)가 되는 바 결국 세계(삶)를 바로 이해하려면 무를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세계를 알려면 무를 알아야 하므로 무를 모르는 한 세계를 알 도리가 없어서 무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찾아내야 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이 무(無)에 엄청난 양의 의미를 부과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엄청난 크기의 관념의 우주를 짓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결과 무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할 대상으로 바뀌기에 대선사들은 함부로 부처가 무엇인지, 법이 무엇인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날 이미지와 시‘ 38 페이지)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은유 이야기 수업’이란 부제를 가진 명법 스님의 ’은유와 마음‘은 은유 스토리텔링 심리 치유를 소개한 책이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자기와 닮은 것을 말하거나 어떤 사물에 빗대어 자기를 말하는 것이다.(11 페이지) 이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이야기가 달라지면 또는 다르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삶을 살거나 세상을 초월할 수 있다.(36 페이지) 오래전부터 정신분석을 비롯한 많은 심리치료에서 은유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75 페이지) 이는 은유 없이는 그 어떤 글쓰기도 불가능한 문학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야기치료는 해결중심 치료의 하나로 “난 할 수 있어!”라고 순진하게 믿는 긍정심리학이나 모든 것을 과거 탓으로 돌리는 정신분석학과 달리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치료법이다.(62 페이지) 이야기치료는 과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기존 심리치료와 달리 과거에서 문제 해결의 자원을 찾는다.(61 페이지) 이야기치료는 삶의 의미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세상은 우리가 참여하기 전까지 어떤 곳인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61 페이지)
저자는 완결된 사건을 기술하는 역사조차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는데 하물며 자기 이야기이랴는 말을 한다. 같은 이야기이라도 새로운 맥락에 기입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64 페이지) 이야기는 진실이지만 완결된 것은 아니다.(64, 65 페이지) 중요한 것은 심리 문제는 담론에 의해 결정되며 담론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대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67 페이지) 담론이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야기이다.(41 페이지) 심리치료에서 무의식이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유가 어떻게 마음에 작용하여 치료적 효과를 갖는가, 이다.(76 페이지)
무의식이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문학적 표현 뿐 아니라 진리, 구조 등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적인 용어도 은유라는 지적(최문규 지음 ’문학이론과 현실인식‘ 34 페이지)을 언급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은유의 유사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경험된 것이라는 점이다.(83 페이지) 가령 시간은 돈이란 은유가 채택될 수도 있고 시간은 화살 같다는 은유가 채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뇌에 은유를 담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다.(84 페이지)
은유를 통해 사물의 어떤 속성은 부각되고 다른 속성은 은폐되거나 축소된다.(87 페이지) 은유는 현실을 창조적으로 다시 기술한다. 세계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하는 것이 바로 삶을 확장하는 은유의 힘이다.(92 페이지) 은유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는 의식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무의식 차원의 것이며 모든 창조의 원천이다.(95 페이지) 코끼리를 완전하게 기술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코끼리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은유는 간접성과 다의성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해준다.(98 페이지)
심리 치료에서 문제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112 페이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선택도 훌륭한 은유가 될 수 있다.(112, 113 페이지) 은유는 객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주관의 입장을 보여주기 때문에 마음의 작동 방식과 특징을 쉽게 포착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113 페이지) 물론 이야기는 절반만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속에 있다. 그 속에 자기도 몰랐던 진실이 있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115 페이지)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과 달리 은유 스토리텔링은 은유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고 은유의 전환을 통해 이야기를 만든다.(120 페이지) 라캉 정신분석학의 상상계와 상징계처럼 은유 스토리텔링을 통해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는 상상적인 결과가 아니라 심리적 현실성을 갖는 변화를 가져다준다.(121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은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가 우리를 선택한다는 사실이다.(130 페이지) 은유의 본래 의미를 확장하고 다른 의미로 변용하는 단계를 재정의 과정이라 말한다.(131 페이지)
앞에서 ’은유와 마음‘에 나무 비유가 참 많이 등장한다는 말을 했는데 수험생들은 자신들을 하나 같이 외롭고 힘든 나무로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뭇잎이 다 떨어졌거나 폭우 속에서 떨고 있기에 절망하고 아파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발상을 바꾸면 그럼에도 견디는 건강하고 씩씩한 나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141 페이지) 내담자 중에서 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은유가 겉도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이는 그가 은유를 잘못 선택해서가 아니라 그의 은유가 모순된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151 페이지)
은유는 사물의 객관적인 특징만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과 해석도 반영한다.(159 페이지) 은유는 주관의 내면 상황을 반영하면서도 사태에 따라 사물을 관찰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161 페이지) 은유는 그 자체로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참가자는 자기도 모르는 깊은 내면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은유의 주관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으로 인도된다.(165 페이지) 은유는 현재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동시에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167 페이지)
은유를 전환시킬 때 상상으로 하니까 아무 것으로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 상태와 맞지 않는 은유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은유의 전환은 언어적 유사성이 아니라 마음의 유사성이 있을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171 페이지) 저자는 부분으로 쪼개진 마음, 산란한 마음을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부른다고 말하며 통합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문제를 바라보고 다음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덧붙인다.(192, 193 페이지)
앎이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면 번뇌에 불과하지만 통합되면 깨달음이나 지혜가 된다.(193 페이지) 은유는 서로 다른 시각을 연결하여 통합적인 인식을 얻는 데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197 페이지) 은유는 단지 심리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이고 더 무의식적인 힘들과 관여하면서 스스로 해법을 찾아내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209 페이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자 가운데 은유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씀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정의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소통에 도움이 된 것이다.(221 페이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 후 이제 자신을 조금 알게 되었다고, 자신과 친해진 느낌이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겁났지만 하고 나니까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229 페이지) 저자는 중요한 말을 전한다. 나를 초월한 높고 깊은 어느 곳엔가 존재하는 참나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에서 너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나, 그것이 진정한 연기(緣起)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닐까란 말이다.(234 페이지) 이 말은 불교적으로, 그리고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의 핵심을 압축한 의미심장한 말이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와 은유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심리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심리학을 철학적 전제 없이 심리현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보는 주류 심리학계의 믿음에 대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이 취하는 비판적 관점에 공감한다.(243 페이지) 저자는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것 외에 특별한 은유 스토리텔링 기법은 없다고 말한다.(244, 245 페이지) ’모른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내담자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한 기본자세이다.
저자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리 판단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분석가는 내담자에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섣부른 공감도 단정적 판단도 금물이다.(245, 246 페이지) 은유스토리텔링에서는 참가자가 은유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상담자는 구체적 정황을 알지 못한다. 상담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이나 상식적 판단 따위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은유 스토리텔링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자기 변화의 경험을 하도록 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상담자 스스로 변화의 가능성과 내면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내담자 내면의 힘을 일깨울 수 있다고 설명한다.(246 페이지)
나는 어떤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고 온전히 비어 있는 존재 즉 공(空)한 존재이다. 자신이 공하기에 은유 이야기는 새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정해진 것은 없다.(247 페이지) ’은유와 마음‘은 공(空), 무아(無我) 등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체득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우리의 공(空)성, 무아(無我)적 실상을 말해준다. 명상 상태에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버리고 역할을 떠나 순수하게 공(空)으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공의 다른 모습이다. 저자는 은유와 이야기는 무의식에 감춰진 무한한 원천들을 건져 올리는 방법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말한다. “심리 상담을 배우지 않았고 세상 사는 법에도 밝지 못”하고 “타고난 아둔함 때문에 늘 실수투성이”라는 저자.
나는 임제의 살불살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졌고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를 통해 임제의 그런 인식이 은유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임제의 인식은 비유적인데 부처나 조사를 비유적으로라도 죽여서가 아니라 무한 사유를 초래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물론 나는 오규원 시인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얻었다. 하지만 은유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은유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문학에서 은유를 살아 있게 쓰는 법이 궁구(窮究)되어야 할 것이다. 은유를 전이(轉移)의 잠재력이라 표현한 최문규 교수의 정의를 되새기게 된다. 세상은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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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6-12-27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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