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1

Chang-Seong Hong 선禪의 합리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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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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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일이 많이 남았지만 월간불광 11월호에 낼 에세이 초고를 미리 완성했다. 올 12월까지만 이 연재를 계속하고, 미국대학의 2주 남짓한 짧은 겨울방학을 이용해 추가로 12회 분량을 더 써서 모두 24개의 짧은 에세이들을 모아 작은 책자로 만들까 생각중이다. 그러나 그 전에 두 챕터도 채 남겨놓지 않은 내 Buddhism for Thinkers를 완성하려 한다.



밑의 글은 2016년 초 깨달음 논쟁 당시 내가 사용했던 논리를 좀 더 업그레이드시킨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한국불교계가 어떤 곳인지 전혀 숙맥이었던 나는 내 글들에 쏟아진 최소 수백 개의 격렬한 악플들에 어리둥절했었다, 요즘은 알 것 좀 꽤 알아서 피식거릴 때가 더 많지만. 어쨌든 페북에는 욕설이나 저주 조롱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좋다.

밑의 글은 비교적 짧고 읽기도 쉽다. 철학자연하며 난해하게 쓰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사진은 2016년 초 깨달음 논쟁 당시 주역이었던 수불스님과 현응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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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강의실 357호 11

<선禪의 합리적 이해>



선禪은 합리적合理的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 분들이 많다. 문자로는 서지 못한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禪에는 합리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이유다. 선禪이 처음부터 이해理解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을 통한 이룸 또는 체험의 과정이라고 보는 분들께 ‘선禪의 합리적 이해’라는 이 글의 제목부터 앞뒤가 안 맞는다. 이러한 선禪의 전통을 고려하면 강의실에서 한정된 수업시간 동안 합리적인 미국대학생들에게 강의와 토론을 통해 선禪의 정신을 이해시켜 전수하는 일은 분명 불가능하다. 이번 호에서는 내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은 어떻게 시도해 왔는가를 소개한다.



개구즉착開口卽錯



 ‘입만 벙긋하면 그르친다’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은 우리가 입을 열어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진리를 왜곡한다는 말이다. (주석: 이 문장은 진리는 말로 표현해서는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신비한 체험을 통해 깨쳐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밑에서 이와 관련된 논의를 계속하겠다.) 선가禪家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념즉괴動念卽乖라며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어그러진다’는 구절도 있다. 도불가설道不可說 즉 ‘도道는 말할 수 없다’와 같이 도교道敎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이런 문장들로 선가에서는 도道 또는 진리에 대한 언어 및 개념적 접근을 금기시한다. 선가에서 말하는 도道가 힌두교의 브라만과 닮아 조심스럽지만, 진리에 대한 개념적 접근이 무용無用하다는 주장은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한국식 선문답禪問答을 소개하며 미국학생들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전통을 소개한다.



학인學人: “부처란 무엇입니까?”

선사禪師: “개똥이다!”



마치 부처가 개똥이라는 듯한 선사의 엉뚱한 답변에 학생들은 그 큰 눈들을 더 크게 뜬다. 그러면서 부처가 왜 개똥인지 끙끙거린다. 개똥화두話頭를 든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개똥은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쇠똥(bullshit)으로 헛소리 또는 넌센스라는 뜻으로 쓰였다. 점잖게 답하려면 “무無!”라고 외쳐도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넌센스라는 말인가?

 화두를 물고 참선해서 깨치라는 소리는 미국대학 강의실에서는 유효 기간이 몇 분도 안 된다. 첨단과학문명시대를 살며 실용주의가 상식인 대학생들에게 신비주의가 통할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선문禪門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서 그 정신을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다음과 같이 강의한다.

연기緣起

 부처는 삶에 대해서 무아無我를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연기緣起를 깨달아 성도成道했다. 연기란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부처의 통찰이다. 아무 것도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어서 독립적 존재가 불가능하니 스스로의 본질 즉 자성自性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공空하다. 연기의 진리를 개개인에 적용하면 무아의 진리도 쉽게 보인다. 아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어서 개인의 본체 또는 본질 즉 아뜨만도 없기 때문이다.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모습이 존재세계의 실제 모습이다. 남전불교에서는 연기를 단지 인과因果관계만으로 보지만 선禪이 소속한 대승에서는 연기를 비인과적 관계로도 확대해 이해한다. 정보통신과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상식인데, 화엄華嚴에서는 예로부터 삼라만상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왔다. 시베리아 순록 한 마리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으면 미국에 있는 나는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이 순록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예를 들어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관계를 잃게 된다. 다른 은하계 어느 행성 산기슭에서 돌 하나가 굴러도 내가 그것과 연결된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선禪은 이와 같이 세상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조건으로 연기한다는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선호한다.

 그런데 이런 연기실상緣起實相 즉 연기하는 세상의 실제 모습을 언어로 직접 기술記述할 방법은 없다. 어떤 말이나 개념도 차별(差別 differentiation)을 야기하고 이 분별은 아무 걸림 없이 연기緣起하는 세상의 모습을 왜곡해 진리로부터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사슴”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사슴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거나 말을 하는 순간 우리는 두 오류를 범한다. (1) 마치 사슴이라고 불리는 짐승들이 공통으로 고유한 본질 즉 자성自性을 갖고 있다고 보게 하며, 또 (2) 이 세상을 사슴들과 사슴 아닌 것들로 양분하며 분별해버려(differentiate) 우리로 하여금 이 두 집단이 연기로 중중무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만다.

 어떤 말이나 개념도 걸림 없이 유연하게 연기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차별하고 단절시켜서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부터 차단한다. 불교에서는 진정으로 개구즉착開口卽錯과 동념즉괴動念卽乖가 옳다. 이것이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도道나 브라만 또는 아뜨만에 대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걸림 없이 연기하는 세계의 멋진 모습을 불완전한 도구인 말이나 개념으로 왜곡해 보아서는 안 된다는 합리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옳다. 연기실상에 대해 우리는 기껏해야 “그러그러(如如)하다”는 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제 위에서 소개한 선문답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자. 불가에서는 “부처”가 종종 진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란 무엇입니까?”라는 학인의 질문은 연기하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의 참모습 즉 진리를 언어로 답하라는 요구가 된다. 그래서 선사가 “넌센스!”라고 한 것이다. 선禪의 기원이라는 염화미소拈華微笑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쉽게 이해된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석가모니는 말로 답하지 않고 단지 꽃을 들어 보였고, 가섭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미소 지었다는 설화이다. 이때 석가모니는 “차나 한잔 들게,” “하늘빛이 좋네,” 또는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이 답할 수도 있었다. 질문이 넌센스인 경우에는 엉뚱한 소리로 반응해 주는 것이 재치 있기 때문이다.

 미국학생들은 내 설명에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 관련 글을 읽은 동료교수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합리적 이해방식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위의 선문답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깨달음을 위해 중요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내 생각이다.



체험을 통해 이루는 깨침으로서의 선禪이 가진 문제



 선禪의 합리적 이해에 대한 비판은 천여 년 이상 계속되어 왔으니, 이제는 선禪에 대한 체험적 접근에 대해서도 비판적 작업을 수행해야 균형이 좀 잡히겠다. 선종사에서는 후기로 올수록 언어를 통한 알음알이로는 결코 깨칠 수 없다는 주장이 강해져 왔다. 참선으로 신비한 체험을 거쳐야만 깨치게 된다며 체험 내지 체득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었다. 깨침은 마치 단맛이나 짠맛의 경험과 같아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직접 맛을 보아야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선禪에 대한 이런 체험적 접근법은 논리적으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는 내 미국학생들에게 다음의 딜레마를 제시하며 한번 선禪의 입장에서 이 딜레마를 깨보라고 권유한다.



(1)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짠맛의 경험과 같은 것이 깨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깨침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이 되어 공空에 어긋난다.

(2) 이 짠맛과 같은 체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이 모든 다른 맛을 동일한 깨침의 기준으로 삼는 근거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즉 어떤 기준이나 근거 없이 이 다양한 체험을 모두 깨달음이라고 보아줄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답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한편 만약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또 (1)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성을 가진다는 셈이 되어 공에 어긋난다.

그래서 이런 체험에 공통점이 있으면 공에 어긋나서 안 되고, 없으면 이것이 깨달음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겨 딜레마에 빠진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특정한 경험, 체험, 또는 체득을 통해 얻은 깨침을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아직 이 딜레마를 해결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또 다른 문제는 선문禪門에서 종종 이렇게 깨침을 완성하는 신비한 경험이 실체로서의 아뜨만이나 그와 유사한 불성佛性과 하나가 되는 체험으로 여겨왔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실체론적 경향이 강한 도교의 영향아래 성장한 선禪에서 이런 신비한 실체와 합일合一되는 경험을 깨침이라고 보곤 했는데, 실체론을 거부하는 불교에서 이것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들이 참선이나 염불하다가 자못 묘한 기분이 들면 그것이 깨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당황스럽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Comments

이재형

아주 명료하군요. 선적 체험을 강조하거나 인정하시는 분들 중에서 저 딜레마를 깨실 분이 과연 계실까 싶네요.

 · 2 y

Junho Jang

ㅎㅎㅎ 미소가 떠오르는 좋은 글.

 · 2 y

김근중

공의 교리에 대한 글이 다소 난해합니다.

짠 맛이라는 (육근의 혀와 대상인 육경의 맛이 묶여서 조건화된) 일체법에서 "나이다."라는 '색'을 닦아서 결박을 내려놓는 것이 곧 "공"이라고하는 "무아"이며

무아를 먼저 설명하지않으시면,

선생님 글은 격의 불교 늪.공사상.에서 매일반 입니다.()

 · 2 y · Edited

강석두

사람의 정신활동의 90프로 이상이 무의식의 활동이라고 합니다. 말과 자전거 배우기를 어떻게 배웠냐고 물으면, 어떻게 말하고 타느냐고 하면, 설명할 길이 없읍니다. (사랑도 그렇읍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고도, 잘하는 사랑을

말로 하는 순간 사랑은 휘발성 액체처럼 증발해 날라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의식적인 설명은 내면에 일어난 일을 잘못 설명하기도 합니다. 선을 통해서 일어나는 내적 변용에도 이런 면이 있을 수 있읍니다.

말을 하는 순간, 말로 표현하는 순간 깊은 풍미와 미묘한 풍미를 잃어버릴 수 있읍니다. 그렇다고 진짜로 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표정 손짓 몸짓 행동 삶이 다 말입니다.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참 좋은 말씀입니다. 제가 짧은 윗글에서 쓰지는 않았지만 깨달음 논쟁 당시 발표한 글에서 '이언견언(以言遣言)'을 언급하며 말이 실제 모습을 왜곡시킨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이유는 말로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말이 필요없다는 이유도 말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예, 그렇다고 진짜로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실생활을 위해서는 말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언어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2 y

Junho Jang

오늘의 한 말씀.

 · 2 y

Sun Kyeong Yu

주관적인 체험(What It Is Like)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주관적인 체험이 깨달음이라는 주장은 딜레마에 빠지며, 부처님의 연기법에 어긋난다는 것이지요.

 · 2 y

Bruce W. Park

話頭를 선문답으로만 이해하여 話는 선사와 제자의 대화를 말하고 頭는 어조사로 의미를 두지않고 해석하곤 한다. 대개의 불교사전이나 심지어 불교학계에서 쓰는 불교전문사전도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화두의 頭는 머리두로서 앞선 자리, 으뜸자리, 우두머리, 맨 앞이라는 뜻도 있지만 끝 가장자리, 모서리, 뾰족한 부분의 뜻으로 날카롭게 튀어나온 부분을 의미한다. 혀끝을 설두라고 말하고, 생각의 끝을 염두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頭라는 한자는 머리라는 의미와 꼬리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한마디로 끝부분 또는 끄트머리라는 의미가 화두라는 단어에서는 적합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화두에는 대개 3가지 정도로 분류하는데 그 중 첫번째가 바로 화두라는 말이 생기게 된 까닭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달마조사께서 동토 중국에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스승은 "뜰 앞의 전나무"라고 답한다. 여기서 대화의 머리는 제자의 질문이고 대화의 끄트머리는 스승의 답변이다. 무엇이 화두인가? 물론 대화의 끄트머리인 '뜰 앞의 전나무'다. 그래서 나는 화두를 대화의 끄트머리라고 해석한다. 그 대화는 상식을 기반한 대화가 아닌 깨침을 전제로 한 대화였다. 대화의 의미가 소통인데 제자가 스승의 뜻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대화는 실패한 소통이 된다.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는 거다. 제자는 이때부터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강렬한 의심이 요구된다. 그런데 제자는 자문자답하는 내면의 대화를 하면 안된다. 단순히 '무'하고 의정만을 일으켜야 한다. 무자에 대한 의정, 즉 집중된 마음 (선정)이 오롯해지면 반야와 동등해지는 때에 이르러 화두가 타파되는 것이다. 즉 스승의 마음을 간파하여 스승의 마음과 통하게 되는 것이다. 스승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 화두타파이다. 이것을 혜능선사는 선정과 지혜가 동등한 경지라고 했던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조주선사가 답한 '무'가 대화의 끝으로 화두이다. 이 무에 대한 의심은 제자에게 마음속 대화의 머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이 던진 무를 들 때마다 생각이전의 마음에 집중하여 의심을 깨뜨리려 한다. 어째서 조주선사는 '무'라고 했는가하고 의심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간파한다면서 자문자답하며 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화두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화두를 던진 순간에 있었던 스승의 마음을 간파해야 한다. 대화는 이미 끝났다. 자문자답은 무기에 빠지는 길이고 의정을 크고 뜨겁게 하는 것은 스승의 마음에 가까이 가는 길이 된다.

 · 2 y

이경순

개념을 짓는 언어는 속성을 전제하고 분별을 토대로 하기에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통함으로써 살아갈 수밖에 없는 중생에게 있어서 이보다 값진 선물이 있겠습니까.

약간의 한계가 있다고 이 훌륭한 인간의 발명품을 평가절하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언어도단 불립문자 염화미소의 선불교가 결국 신비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언어를 끝까지 붙들고 씨름하지 않고 그냥 놓아버렸기 때문 아닐까요.

여여한 세상을 개체의 정념과 주관으로 왜곡했다 해서 그림과 시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왜곡된 인식작용 또한 지금 여기의 연기 속에서 이뤄진 최선의 결과일 것입니다.^^

 · 2 y

Bruce W. Park

언어를 경시하고 또한 버리기까지한 선문답은 언어무용론에 이르러 지식사회와의 고리를 잃고 맙니다. 본래 지식에서 비롯된 병통을 해결하려는 방편으로 간화선이 등장했는데 당시에는 성공적이엇습니다. 지식병을 치유한 환자는 과연 건강한 지식인가하는 점입니다. 어떤 지식이 문제엿는가가 아니라 지식자체를 질병의 원인으로 잘못본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지식병자를 치료하시위해 지식을 제거하는 우를 범해 무지한 자가 되었습니다.

 · 2 y

이경순

Bruce W. Park 병을 잡겠다고 사람을 잡은 꼴이군요. 쉬운 비유 감사합니다.^^

 · 2 y

Bruce W. Park

제 한글이 어물하고 뜻은 제대로 전달되어 다행입니다.

 · 2 y

김태균

<<딜레마 풀기>>

ㅡ우연히 왔다. 좋은글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종종 인용하겠습니다. 딜레마 문제가 흥미로워 불쑥 서툴게 맥락없이 적어봅니다.

ㅇ붓다는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군요.

ㅡ“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를 이미 수습했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 또한 나는 알고 보게 되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최후의 생존이니, 이제 다시 괴로운 존재를 받지 않는다.”(초전법륜경)

ㅇ붓다의 첫 다섯 제자의 깨달음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군요.

ㅡ“부처님께서 이와같이 인내와 자비로서 그들에게 최초의 법륜을 굴리기 시작하시어 최초로 곤다냐가 법안을 갖추고 수다원과를 증득하며, 차례로 네 수행도도 모두 법안을 갖춘 다음 마지막으로 무아의 특성이라 하는 안앋따나락카나경의 설법을 듣고 다섯 수행인 모두가 아라한이 되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는 오직 여섯 아라한들이 존재한다.’ 라고 선언하시어 부처님과 다섯 수행인의 깨달음이 조금도 틀림없음을 증명하시고 선포하신 것이다.”(거해스님 저작에서)

ㅇ여기서 ‘깨달음’, ‘어떤 기준과 근거’, ‘공통적으로 존재’의 개념이 다 들어와 있네요. 초전법륜경의 일부 내용을 딜레마없이 설명한다면, 샘이 낸 문제는 풀릴 듯 하군요.

ㅡ문제의 핵심은 깨달음이 1)여러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경험이라면 자성을 갖는 무엇이 되고, 2)여러 사람들에게 각각의 경험이라면 어떤 기준과 근거도 없는 어떤 것이 된다.

ㅇ일단, 이 딜레마와 연관성있는 불성/여래장 등에 대한 해법은 이미 교수님께서 푼 바 있군요. 요약한다면..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 이해하기. 같은 방법으로 해보면서 초점을 맞추어가지요.

ㅡ‘깨달음’을 ‘아라한도과를 증득할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 과정으로 이해하기’를 상정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해결된다면요.

ㅡ불성은 깨달을수 있는 가능성이고, 깨달음은 아라한도과에 이르는 가능성이고, 아라한도과의 증득은 붓다의깨침에 이르는 가능성이고..(순서의 의미는 없음. 최고의 깨달음만 주목)

ㅡㅡ문제는 깨달음이든 그 어떤 것이든 ‘최종적으로는’ 공통적인 경험과 어떤 기준과 근거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성 혹은 본성을 상정하거나 절대적인 기준과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지요.

ㅡㅡ왜냐하면, 불성과 여래장에 대한 2차 지시어적인 해석은 최상위로 붓다의 ‘깨달음’을 상정하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ㅡ이는 결국 신에 대한 논증 혹은 비판과 같은 괘를 같이 하는 바여서, 이 딜레마의 해법의 초점은 다른데 있음을 발견해요.

ㅡㅡ반대로 살펴봐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까지의 방법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실재를 피하려 한다면, 데이비슨의 사건이란 개별자도 나아가 붓다의 오온덩어리(색 포함)도 상정하기 어렵네요. 순수한 의미의 유명론 밖에는 가능해보이지 않지요.

ㅇ제가 아는 해법은 이래요. 이는 스펜서-브라운의 형식의법칙과 루만의 체계이론에 기초한 것이지요. 핵심적 키워드는 재진입(re-entry)과 자기준거(타자준거 포함)입니다.

ㅡ붓다가 최초로 경험한 깨달음은 나중에 그걸 아라한도과라 말하든 해탈이라 말하든, 어떤 본성이나 자성일 수 없고, 붓다의 체험이자 붓다가 선언한 어떤 것이네요.

ㅡ그 깨달음의 기준이나 근거는 붓다 스스로의 성찰(자기준거)로 이루어 졌지만, 그때까지 전해오는 전통과 유사 수행 경험과의 구별과 그 차이를 인식하면서 분명해 졌네요.(타자준거를 통해)

ㅡ그후, 그 깨달음의 경험은 붓다의 설법과 수행지도에 의해 인도된 다섯 수행자와 공유되었는데, 이들의 체험은 모두 붓다에 의해 아라한(도과)의 증명되고 선포되었습니다.

ㅡ깨달음은 붓다와 다섯 수행자가 공유한 경험이지만, 어떤 고정적인 기준과 근거를 전제할 이유는 없어요.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기초로 다섯 수행자의 경험을 인지하여, 이를 자신의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증명하고 선포한 것이니까요.(소통을 통한 개념의 공유과정)

ㅡ나아가, 다섯 수행자들 역시 다른 이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수행을 가르치며 다른 불자들의 깨달음을 도왔고, 그들 중 일부가 깨달음에 이르렀겠지요. 아마 그러한 전승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차이!)가 포함되어 있지만 붓다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대한 것이 이어져 내려왔지요.

ㅡ결국 붓다의 다섯 제자는 자신의 경험(자기준거)을 붓다가 자기준거에 의해 깨달음으로 증명하고 선포한 것에 기초해(타자준거) 그 차이를 인식합니다. 이를 통해 다섯 제자들은 붓다처럼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그들의 제자들의 경험과의 차이를 인식하여, 경우에 따라 아라한 증득을 증명하고 선포하여 이어지지요.

ㅡ즉 붓다의깨달음과 자신의깨달음의 차이를 인식한 붓다의제자들은 붓다의제자의제자들의 깨달음을 자신의 깨달음과의 차이를 통해 그 깨달음 여부를 증명하고 선포해 가는 것이지요.

ㅡ깨달음은 요체는 고정된 것도 공통된 것도 아닌 셈이네요.

ㅇ세가지의 질문이 요약되었다.

ㅡ붓다의 제자의 제자의 깨달음의 증명과 선포가 붓다의 제자에 의해 행해졌는데, 깨달음은 공통적인 존재로서 자성을 갖는 것 아닌가?

ㅡ붓다의 제자의 제자의 깨달음의 증명과 선포가 붓다의 제자에 의해 행해졌는데, 고정된 어떤 기준과 근거에 의한 것 아닌가?

ㅡ깨달음이 공통적인 어떤 것이라면 자성을 갖는 것이고, 어떤 기준과 근거가 있다해도 그것 역시 의심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는 어떤가?

ㅇ(1) 깨달음은 공통적인 존재나 자성을 갖는 어떤 것이 아니다. 2차 지시어처럼 혹은 의자처럼 깨달음은 공유된 어떤 개념과 체험이다.

ㅇ(2) 깨달음의 증명과 선포는 고정적인 어떤 기준과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 깨달음의 기준과 근거는 붓다의 깨달음, 깨달음의 전승을 통해 (타자준거적) 자기준거적으로 성찰된 어떤 것이다.

ㅇ(3) 깨달음은 어떤 전승되어 전해지는 공유된 경험과 체화된 혹은 발현된 어떤 것이므로(보통은 삼법인), 자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기준과 근거와 전승자 혹은 전승에 입각한 개념으로 고정된 어떤 것은 아니다.

ㅇ잘 알지 못해서, 충분히 이해되도록 적었는지 의문이 들어요.

ㅡ좀더 정확한 관점과 논리는 스펜서-브라운의 형식의 법칙(G SPENCER BROWN, Law of form)이나 루만의 사회적 체계들(Niklas Luhmann)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 1 y

Chang-Seong Hong

김태균 새벽에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다가 훌륭한 댓글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곧 탑승이어서 일단 간단히 답합니다. 2차지시어는, 아무리 유명론적으로 해석하더라도, 그 적용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비한 체험'을 모두 같은 지시어의 지시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기준을 제시할 방법이 있을까요? 깨달음이 ' 이해의 문제'라면 가능하겠지만, '신비한 경험'의 문제라면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최소한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스펜서, 브라운이나 루만은 제게는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 1 y

김태균

Yumaa Hill ㅇ깨달음의 체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정도지, 그 경험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바가 희귀하거나 중구난방은 아니지요. 물론 그걸 받아들이느냐는 각자의 몫입니다.

ㅇ기준은 전해내려오며 모아져 있는데, 공개된 일부분 외에는 전승에 따르지요. 그것 역시 각자의 몫이지요.

ㅇ유명론의 명 역시 개념 공유에 있어 비슷하지 않나요? 짠맛에도 기준이 있고 공유하는 체험도 있으며 말로도 어느 정도 표현되지요.

ㅇ타자의 경험을 어떤 준거로서 받아들이는 예는 수없이 많을 겁니다. 우리의 일상 모든 소통과 의식이 그러한 타자준거와 자기준거로 이루어져 가있니까요.

ㅇ스펜서-브라운은 러셀에게 배웠고 그의 책 서문을 러셀이 쓴 바 있지요. 영국 수학자라 하면 되겠어요.

ㅡ니클라스 루만은 독일 사회학자이지요. 그의 체계이론은 사회과학은 물론 심리학, 인지생물학을 포괄할 정도의 골격을 가지고 있네요.

고타마의 연기와 스브의 형식의법칙과 루만의 체계이론은 상당부분 통한다 여기고 있네요.

루만은 검색해 보면 아시겠지만, 널리 펼쳐져 있고, 스펜서-브라운의 저작은 관심을 표시하시면 보내드리지요.

아니면 페북에 개설되어 있는 루만방에 놀러와 보시지요.

ㅇ제가 보기에 그 딜레마는 어느정도 해법 방향은 제시된 듯 합니다만, 어떠 신지요?

ㅡ답글 고맙습니다.

 · 1 y

김근중

김태균 네.. 그렇지요.

초전법륜경에서의 쾌락과 고통이라는 양극단 마저도 개념적인 표상이기에 따라가지말고 여의라고 하시거늘,

범부는 표상적인 개념의 언어 유희로서 희론한답니다. 철학의 이름으로 붓다의 각성을 가늠한다는 모순을 하고들있지요!

불교는 "와서보라!" 고 하신 자등명 법등명을 놓치면 그 카드라고 말하는 관념적인 종교가 됩니다

 · 1 y · Edited

Chang-Seong Hong

김태균 환승 비행편에 올라 시간이 좀 있어 몇 자 더합니다. 말로 표현이 안되지만 공통된 무엇과 기준이 있다고 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공에 어긋난다고 제가 윗글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한편 유명론의 명은 그냥 이름, 소리, 그림자 정도로 처음부터 실체가 없음을 말하고있으니 공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의사소통을 위해 쓰는 허깨비 수단일 뿐 자성도 실체도 없다는 의미에서 쓰고 있을 뿐입니다. 언급하신 수학자들과 사회학자의 견해는 김선생님께서 쉽고 짧게 정리하실 기회가 있으시면 보내주십시오.

 · 1 y

김태균

Yumaa Hill 그 딜레마가 러셀이 씨름했던 역설과 달라 보이지 않아 몇가지 말씀드렸는데, 그게 파훼되는게 홍선생님에게 좋은일이 아닌지요?

 · 1 y

Chang-Seong Hong

김태균 그 딜레마가 깨지면 깨지는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깨지지 않을 뿐, 그것에 제게 좋거나 나쁠 것은 없겠습니다. 바닷물이 짜면 짜고 달면 달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제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이유와 같습니다.

러셀의 역설은 그 자체로 논리적으로 모순을 포함하는 개념을 다루면서 생기는 것이지만, 제가 말하는 체험으로서의 깨침이 내포하는 (역설이 아니라) 딜레마는 그 자체로는 논리적 모순이 없지만 불교의 중요한 원리인 공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객관적 기준의 부재라는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지만 후자는 그 자체로가 아니라 다른 원리들과 상충합니다. 그래서 둘은 각각 다른 경우에 해당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의 정신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선양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해석뿐 아니라 재정립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코멘트와 질문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 1 y

김태균

Yumaa Hill ㅇ그렇군요 ㅡ 그럼 본격적으로 함께 풀어보시지요 ㅡ

기존 지식은 보잘것 없지만, 풀고자 하는 마음은 적다 않으니 ㅡ

ㅇ딜레마의 차이를 그리 볼 수 있겠어요 ㅡ

ㅡ다만, 제가 다르지 않다 본 이유는, 언어나 논리적 사고의 모순일 뿐이고, 사람이 사는 현실은 역설을 포용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 주요한 해법이지요.

ㅇ제가 선학의 도움으로 내놓 해법과 기존의 샘이 거론하는 해법에 가장 큰 차이는,

ㅡ붓다와 붓다의 제자, 그제자, 모든 범부들이 함께 구성되어 있는 것을 드러낸 것(재진입과 준거성)에 있는데,그 차이를 크게 보진 않는 듯 하군요.

ㅡ또하나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 논점은 실재론에만 있진 않을겝니다.

ㅡ공이란 어떤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공통이란 개념처럼) 우리의 논의는 체바퀴 돌들 하겠지요. 차이와 과정/운동을 수용할 필요가 있어요.

ㅇ앞으로 논의한다면 그 점을 부각시키고 싶군요.

ㅡ우리가 깨달음을 이러저러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남긴 지혜의 그릇과 방편이라 대개의 사람들이 여긴다면...

ㅇ의기투합할 대목이 있어요, 저는 고타마의 지혜와 그 형식을 사회와 마음, 생명세계에까지 그 설명력을 넓히고 싶어요

ㅡ보다 많은 사람이 그 지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요. 그게 현대화일 수도요.

ㅡ제겐, 특히 최근엔 스펜서 브라운과 루만과 마투라나 등이 든든한 선학이지요.

 · 1 y

김태균

제가 샘의 논지를 세심하게 보진 않았군요. 공의 가르침과 객관적 기준의 상충을 논리적 모순과는 다른 원리로 보고 계시네요.

ㅡ공을 연기나 삼법인으로 쓸쩍 바꾸어선 딜레마가 그대로 일까요?

ㅡ깨달음의 내용을 자성이 없는 공이고, 깨달음의 기준은 객관이어야 하고,

ㅡ제가 봐서는 차이가 없진 않겠지만 해법은 같아 보이네요. 좀더 생각하고 이야기 나눔 풀릴듯 하네요. ^^

 · 1 y

허만항

인명학으로 돌아가야할듯

 · 1 y

김태균

불교논리학 말하는지요? 끝판왕이긴 한데 어렵다던데..

 · 1 y · Edited

김태균

ㅇ원래 딜레마는 딜레마를 낳는 법이지요. 달리 표현하면 딜레마를 구성했을때, 스스로 가지고 있는 딜레마가 드러나기도 해요.

<딜레마 골격>

1)ㅡ깨달음은 공을 알고 받아들임을 말한다.

ㅡㅡ공은 자성이 없음을 말한다.(깨달음은 자성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됨)

2)ㅡ깨달음은 전승되거나 누구나 얻을 수 있다. 전제는 깨달음의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있어야 한다.

ㅡ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있다 함은 자성이 있음을 말한다.

3)ㅡ깨달음의 내용이 공이라면, 깨달음이 전승되거나 누구나 얻는다 말할 수 없다.

ㅇ딜레마의 소재.

ㅡ평이하게 말하면, 깨달음의 내용이 공이고, 그 공은 아공/법공 즉 실재와 자성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깨달음을 누구나 얻을 수 있다면,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는 곧 자성이 있음을 말하는데, 우린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ㅡ딜레마 풀기에서 핵심은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실재하며 자성이 있냐를 논하는데 있다. 거꾸로 깨달음의 전승과 누구나 깨닫기 위해 어떤 실재와 자성이 필요한가?를 논할 수도 있다.

ㅇ약간 극단으로 몰고 가보자.

ㅡ깨달음을 공으로 설명하든 사성제로 설명하든 삼법인으로 설명하든 자성의 부재로 설명하든 붓다의 깨달음을 지시하고 있다(붓다의깨달음에도 자성이 없다). 달리 말하면, 붓다의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 공/사정제/삼법인/자성의부재/연기 등일게다. 우린 깨달음과 방편이 (차이가 있으나) 같은 의미를 갖는다 라고 여길 것이다.

ㅡ이렇게 전제하고 나면, 여기에서 깨달음의 전승을 증명(증거)하고 선포할 수 있는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이 필요하다고 도출할 수도 있다. 뒤짚어본다면, 불제자들이 공/사정제/삼법인/자성의부재/연기를 깨달을 수 있다면, 깨달음과 그 내용은 전승되거나 공통적으로 알고 받아들여진 셈이다.(이 과정에서 어떤 자성이 필요하다, 고정불변한 어떤 내용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다.)

ㅡ여기서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는 불제자들이 공/사정제/삼법인/자성의부재/연기를 깨달았느냐로 바뀐다. 나아가 그 '객관적 기준과 근거가 무엇이냐'로 발전된다.

ㅡ이를 더 밀고 나가면, 붓다의 깨달음과 그 제자의 깨달음, 또다른 누구의 깨달음은 서로 각각 다르다 로 결론내게 된다.

ㅡ즉, 사람들간의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를 부정한다면(자성이 없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 논리 그대로 가면 유아론(자기 자신의 그 의식만이 있을 뿐이라는)으로 빠진다. 붓다의 깨달음이기도 한 연기는 말 그대로 그러하진 않다.

ㅇ이러한 딜레마를 파훼하는 한가지 방법은 나가르주나가 공을 설명할 때 쓴 귀류법인데, 선학의 자유자재로움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ㅇ우린, 가장 먼저 홍샘에 딜레마의 파훼를 설득하려한다. 딜레마를 만들기도 했고 이것이 딜레마임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홍샘은 불일불이묘유 란 글을 풀이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한, 언어의 용법의 차이와 전하려는 의미의 차원(?)이 서로 다름을 드러내어 설명하려는 취지로 이해한다.

ㅡ이를 활용한다.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나 공, 자성이 없음에 대한 논의와 이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것과,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과 근거는 언어상 용법의 차이와 전하려는 의미의 차원(?)이 서로 다르다.

ㅡ'공통적인 기준과 근거'는 자성이 아니다. 기준과 근거는 (어떤) 누구나가 소통을 통해 공유/공감한 어떤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라 표현을 바꾼다해도 용어의 개념(초기 비트겐슈타인)이 아닌 맥락적 의미(후기 비트겐슈타인)를 보아서 그렇다.

ㅡ이를 테면 '공통'이나 '기준'/'근거', 나아가 '객관'이란 표현을 써도 우리는 그 언어들이 자성의 여부를 포함한 개념으로 쓰고 있지 않다. 만약 그러한 뜻으로 쓰였다면 '공통'과 (나중에 바꾼) '객관' 이든 소통하는 사람들간에 공유되지 않은, 홍샘이 생각하고 활용하는 용법이 된다.

ㅡ깨달음의 전승의 기준과 근거는 자성 여부이기 보다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연기와 공)을 체험으로 이해로 증득했느냐에 있다.(심해탈, 혜해탈) 기준과 근거는 자연스레 불가의 전통 혹은 불가 구성원의 공유된 어떤 것(구성적)이고 이를 자성(고정불변의 본질)이라 여길 이유는 없다.

ㅡ다시말하면, 우리는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에 자성이 있다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소통의 과정에서 사용된 언어와 그 용법이기 때문이다.

ㅡ해서, '객관'을 철학적 용어로 말한다 해도(이를테면 실증주의적 맥락의), 주/객관을 벗어나있는 불가의 인식을 공유한다면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ㅡ그렇다면, 결국 불가의 인식(개념 사용)을 유아론/실증주의적 인식(개념 사용)으로 꿰어 맞추어 논 딜레마, 조작적 딜레마에 불과하다.

ㅡ다른 측면에서 이 딜레마를 구성한 딜레마의 뿌리가 우리 인식속에 있는 불가적 인식(연기와 공)과 형이상학인 혹은 실증주의적 인식 등이 섞여 있는데 있지 않을까 성찰한다.

ㅇ홍샘 답글을 보며 좀더 전개해 봤어요. 중언부언이 된 셈인데, 일단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로 바뀐 점을 지적하고 싶고, 그렇다 하더라도 샘이 제기한 딜레마는 현실에서 포용될 수 있다 여겼어요.

ㅡ비트겐슈타인은 페이지만 넘기듯 살펴봤는데, 초기(논고)보다 후기(탐구)가 제겐 설득력이 있더군요. 그가 분석철학의 효시라 이야기하더군요.

ㅡ좀더 논의가 전개되면, 혹은 더 필요하다면, 스펜서 브라운과 루만을 통해 깨달음과 그 전승, 기준과 근거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지요.

ㅡ기본적인 발상과 골격은 앞서 댓글을 통해 보여드렸어요. 주체/객체(주관/객관)의 소거 혹은 대체(체계/환경와 자기준거성), 차이이론(사물을 본질보다는 차이로 구별하여 인식), 작동적 구성주의 등의 시각이 포함되어 있지요.

 · 1 y

Chang-Seong Hong

허만항 선생님께서 인명학을 언급하셨는데, 인명학(불교논리학)이 주는 통찰과 논리를 적용하면 논의가 더 매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깨달음의 내용이 공空이 아니라 깨달음은 공(空)에 대한 이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空)이란 어떤 내용이 없다는 즉 ‘자성(自性)이 없다’는 부정적(negative) 개념이지 어떤 내용이 있다는 긍정적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오해를 부를 여지를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깨달음에 어떤 공통된 내용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소가 아니다’라는 표현에 적합한 것은 이 우주에 소를 제외한 그 모든 것이 해당되는데, 이 모든 것은 오직 ‘소가 아니다’라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부정적으로만 공통이지 아무런 실재하는 긍정적 내용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치와 같습니다 (<-- 인명학이 보여주는 통찰입니다). 그리고 공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의 기준이라고 해도 공 자체가 아무 긍정적인 내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기준의 존재가 자성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역시 인명학의 통찰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 제가 사용하는 ‘객관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라는 뜻이지 실증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발표한 다른 에세이에서 밝힌 적인 있습니다. 그래서 제 글에서는 ‘공통적인’이 ‘객관적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제 에세이들을 꼼꼼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1 y

김태균

ㅇ지금은 기억에만 의존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타자의 배제’라는 개념이 소개된 홍샘의 에세이를 읽었어요. 그게 인명학에서의 논의군요.

ㅡ예전 일본 작가의 글에서 중관학이 중론에서 보듯 논리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유식이 좀더 논리를 심층적으로 다룬다며 신기하다는 듯 표현하던데, 유식쪽에서 불교논리학을 정립했던 모양이군요. 전 중론에서 그러한 형식의 논의를 본 적이 있어요.

ㅡ고타마의 가르침을 전승하고 발전하는데 있어 논쟁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이해는 되요.

ㅇ어째건, 저는 홍샘이 제시한 딜레마(진퇴양난으로 이해)를 풀어가고 싶군요. 왜냐하면, 자세히 보니 아래 인용한 대목이 좀더 눈에 띄는군요. 불제자(고타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를 자임한다면, 또한 아래의 언급이 적지 않은 이에게 딜레마로 작용한다면 함께 풀어갈 이유는 있을거예요.

ㅡ홍샘,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특정한 경험, 체험, 또는 체득을 통해 얻은 깨침을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ㅡ선문禪門에서 종종 이렇게 깨침을 완성하는 신비한 경험이 실체로서의 아뜨만이나 그와 유사한 불성佛性과 하나가 되는 체험으로 여겨왔다”

ㅇ불제자라도 워낙 다양한 이해와 경험을 가지고 있고, 붓다(고타마)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나 해석, 경험에 있어서도 다양해서 뭐가 옳으니 그르니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애매해요.

ㅡ그렇지만,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준거’로 그 가르침을 어떻게 알며 이해하고 경험하며 따르는지를 드러낸다면 불제자간의 진지한 소통이 불가능하지 않다 여겨요.

ㅡ제게 약간의 선입견이 있어요. 그 하나는 풀렸지요.(홍샘은 이 딜레마의 해결 여부에 부정적이지 않다는 결론) 그러한 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가지 전제하거나 이해를 구하고자 해요.

ㅡ불가에서 쓰는 깨달음의 연원은 ‘고타마의 깨달음’입니다. 당시에 여러 붓다가 있었고 수준과 내용은 다르지만 여러 깨달음도 있다 봐야지요. 불가에서(세계적으로도) 붓다의 대표성은 고타마가 갖지요. 즉,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에서 연원된 전승되어 공유되고 있는 깨달음을 설해진 것을 보면, 무상이나 무아에서 보듯 ‘자성(실체)’가 없지요. 좀더 나아가 ‘붓다의 깨달음’ 역시 ‘자성(실체)’이 없다 봐야지요.

ㅡ붓다의 깨달음은 해석에 따라 부파시대의 ‘아공법유’나 대승의 ‘아공법공’으로 설명되기도 하지요.(대승적 표현이겠지만) 붓다의깨달음을 부파시대의 인식이나 대승의 인식과 말 그대로 ‘동일’하다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받아들여도 될 듯 해요.(고타마는 독화살 비유에서처럼 법의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정했다 보기어렵지요. 제 이해에 기초)

ㅇ길게 전개하며 제 이해를 드러내는 이유는, 홍샘이 답글에서 쓰신 “깨달음은 공에 대한 이해”라 표현하는데 상당부분 반대하기 때문이네요. 더구나,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그리 표현해야 한다면 더더욱이지요.

ㅡ홍샘, “공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깨달음에 어떤 공통된 내용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ㅡ제 이해임을 드러내듯 좀더 명료히 하고 싶은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논의하는 깨달음은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입니다. 이는 가르침과 함께 전승되고 있지요. 고타마의 깨달음을 어떤 개념상의 깨달음으로 돌려놓고, 어떤 공통된 내용으로 규정되거나 규정되어서는 안된다는 논의는 모두 별의미가 없다고 봐요.(고타마에 근거를 둘 뿐)

ㅡ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은 따라서 ‘공에 대한 이해’라 여길 수는 있지만(나가르주나), 동일하다는 전제로 논지를 전개시키면 홍샘이 인식하는 딜레마를 빠져나올 수 없다 보아요.

ㅡ고타마 붓다 역시 공이란 용어를 쓰긴 했지만, 나가르주나식의 용법은 아니었던 것으로 들었네요. 제 반테지는 나가르주나의 공의 개념이 후세에 어떤 오해를 일으킨 부분도 있다고도 언급한 적이 있지요.

ㅇ왜 반대하느냐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은 여러가지로 설해졌는데, 이를 ‘공에 대한 이해’로 규정할 경우 필요한 수준이지만 충분한 수준은 아니지요(집합론). 연기나 사성제, 삼법인, 팔정도 등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소통하기 전에 이를 퉁쳐 ‘공’으로 묶어둘 이유는 크지 않다 봐요.

ㅡ또 하나의 측면도 중요하다 여기는데, 홍샘은 ‘이해’와 ‘경험’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쓰시더군요. 그 점 때문에 제 이해수준이 얕지만 굳이 말씀드립니다.

ㅡ고타마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와 보라’, ‘수행해 보라’, ‘누구도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설하지요. 그 깨달음은 ‘이해’일까요? 체험 등 ‘증득‘일까요?

ㅡ깨달음을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과 그 전승으로 전제할 경우, 깨달음을 ‘공의 이해’로 표현할 경우 단순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데, 깨달음의 경지를 해탈(아래 용어정리 참고)이라고 할 때, 제가 알기론 심해탈, 혜해탈, 견해탈의 세가지로 가르쳐 지고 있지요.

ㅡ수행과의 직접적인 연결은 없는 견해탈을 포함해서 해탈은 ‘이해’의 수준이 전혀(!) 아니라 증득이라 표현되며, 수행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 체득(!)을 말하지요. 사실은 단순히 경험이나 체험이라고 표현해서는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지요. 증득(證得)이 불제자들이 공유하는 표현이네요. ‘이해’는 더더욱 아니지요.

ㅡ홍샘은 에세이 어느 곳에서 이해와 경험을 쓰임새에 있어 차이를 두던데, 깨달음과 해탈, 공에 대한 증득을 ‘이해’로만 표현하려는 시도는 수행을 (암암리에) 인식수준의 어떤 것으로 보아 증득이라는 경지와 수준, 그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아지지요.

ㅡ더구나 전승되는 수행방법과 수행의 경지, 해탈로 이르는 도과에 대해 설해지고 가르쳐지는 내용을 ‘신비로운 체험’(수준)으로 보게 되는 주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을 듯 해요.

ㅡ참고할 만한 수행서가 없지는 않지만, 오래된 전승을 고수하려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어떤 상호주관적인 기준과 근거를 발견하긴 어렵지 않아요. 제가 본 수행서는 붇다빠라 반테지가 쓰신 것이지요.

ㅡ현재에도 테라와다 불가에서는 아라한 증득이 인정되어 전승되고 있더군요. 대승은 대승 나름대로 선 전통이 있으니 다른 방식으로 보살행을 하고 있다 여겨요.(전 테라와다 불가의 가르침에 익숙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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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ㅇ제가 이해하는 한 홍샘은 제가 딜레마가 없다 혹은 딜레마 파훼에 동의하시지는 않는 듯 해요. 최근 답글에서 그 내용을 볼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관련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해요.

ㅡ일단 깨달음을 공에 대한 이해으로 등치하여 설명하면, 뒤에 따르는 것이 공을 ‘자성이 없다’는 부정적 개념이라는 중론의 논의를 기초로 하게 되고, 말씀하신 인명학으로 뻗어 나가는 듯 해요. 허나 잘 살펴보면,

ㅡ전제된 딜레마는 깨달음에 관한 것이지, 애초부터 공의 이해… See more

 · 1 y

김태균

ㅇ반테지(스님)께 유마힐님을 말씀드렸더니, “그 분이 수행하면 좋을텐데..”라 표현하시는 군요.

ㅡ“다 좋던데, 유명론쪽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랬지요.

ㅡ모두 제 스스로의 준거에 의한 생각입니다.

ㅇ예전에 루만을 잘 아시는 분과 이야기 나눌 때, ‘의식과 소통의 차이’와 ‘소통과 의식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쓰는 저를 지적하시더군요. 그 지적으로 전 크게 앎의 진전이 있었지요. 아마 유마힐님이 열반과 해탈을 별로 구별하여 쓰지 않는 저를 보고 지적하는 바를 보며 새롭게 배움이 있습니다. 그냥 해탈은 깨달음의 과정을, 열반은 깨달음의 상태 정도로 구별하여 인식하고 있었거든요.

ㅡ오늘 온 것은 유마힐님에게 책 하나를 소개하면 좋겠다 싶어 왔습니다. 읽었다면 헛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또하나의 수행꺼리로 도움이 될 듯해 소개합니다.

ㅡ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의 ‘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 –초기불교의 언어.종교철학’ 이네요.

ㅡ사실은 유마힐님이랑 이야기 나누다. 제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고른 책인데, 요즈음에 읽고 있답니다. 언어쪽 분석철학에 대한 초기불교쪽의 인식일 수 있겠네요. 힌두교와의 차이도 많이 드러내기에 공감할 바도 있겠습니다.

ㅇ저 개인적으로는 유마힐님의 에세이들이 이 시대 불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겠다 여기고 있네요. 그러기에 저에게는 힘이 되지요. 몇가지 갸우뚱할 게 생기면 이렇게 댓글 달고 이야기 나누면 될 일이구요.

ㅡ당신이 정체가 뭐냐라 물으신다면, 딱히 답할 바가 없는데, 그냥 저 역시 번뇌를 내려놓고 좀더 자유와 행복하기 위해 고타마의 가르침을 따른다. 정도 답할 수 있겠네요. 좀더 나아가 봐야, 그리하여 그 속에서 배우고 익힌 바를 주변 분들과 나누는 정도..

ㅡ많이 나가봐야, 현대의 사람들에게 고타마의 가르침을 좀더 업그레이드해서 설명해 줄 방도도 챙겨보자 정도..

ㅡ책 소개하려 보니, 유마힐님이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란 책을 쓰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눈에 띄이네요.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반테지가 금방 짚어내시는구나 싶었지요.^^

ㅇ다행히 제 주변에 싸띠(sati)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반테지와 수행자들을 뵐 수 있어서, 제 몫은 아니지만 비교적 가까이에서 수행과 지혜를 함께 보고 경험할 수 있어 좋지요.

ㅡ어째든, 그간 이야기한 것이 논리나 언어쪽에 연관된 부분이 많아, 다른 주제의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못 했지만, 기회가 닿으면 그런 주제를 가지고도 배우고 익혔으면 좋겠군요.

ㅡ아무래도 현대적인 지식과 학문을 통해 불가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 나눌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아서이기도 해요.

ㅡ다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연기’는 고의 생멸에 대한 조건과 인과적 설명이기도 하고, ‘열반’은 탐진치 번뇌로 오염된 마음을 깨달음을 통해 끊어낸 변화라 볼 수 있겠어요, 그것.

ㅡ이제는 유마힐님이 깨달음을 ‘공에 대한 이해’로 새기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만, 또 쉬 놓을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지혜와 수행이 같다는 취지로 사족을 달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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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

그렇죠. 초선정 요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 또한 출리의 정사유처럼 사유입니다.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안을 감지하지않고서 중론의 인식으로 불교나라를 가늠한다는게...

그 중송의 귀경게 마저도 내외입처에서 사유를 수행하는 의미의 중도 방편이거늘...

사띠의 정념을 체험 해보시고서 인식체계를 관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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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

인식에 대한 중송과 가전연경 요지입니다.

그아래에는

"영혼과 육체는 표현만 다르고 같다"는 안목을 열어보이신 경전입니다.

용수보살 스님의 원래 '근본 중송'은

니까야 가르침속의 "중(majjhe)에 의해 법을 설한다."를 잘 체득하신 기쁨의 게송이라고 봅니다.

<중론> '귀경게' 에서의 팔불 그 자체를 '중도' 가르침으로 풀어 보면요,

"일체(sabba, 내외입처)는 '있다'의 '유' 와 '없다'의 '무' 이라는 두 극단을 따라가지않고,

두 극단의 범주 속성을 알아 더이상

다가가지않는 가운데 연기한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닌 바를 갖추게 됨에 의해서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을 설한다."

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소위 '유'와 '무'의 두 극단이 내외입처(육근과 육경, 12처)의 '근.경.식(감각접촉)'에서의 '표상'들임을 잘 알아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님"의 지혜를 가진 가운데(중, majjhe)의 안목을 <가전연경>의 '법안'으로서 잘 전승을 하셨습니다.

S12:35

<무명을 조건으로의 경>에서는,

"영혼과 육체의 몸이 서로 같다 혹은 같지가 않다. " 라고 말한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 양자는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르다.(즉, 개념 /표상이다)

비구여, 두 극단(이 묶이는 속성을 알아)을 다가가지 않는 가운데(중간, majjhe) 법을 설한다. 즉,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죽음이 있다.라고...

제 현상의

기준점이 내외입처 일체에서의 (근.경.식) 감각접촉(색신)이고, 감각접촉에서 유래한 정신작용의 "영혼은 육체의 (근.경.식의 감각 기능)몸을 떠날수 없다" 라는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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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ㅇ좀더 붓다의 지혜와 수행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능한 같은 세대의 눈으로 본 가르침이 필요할 듯해요. 저는 아래의 책과 수행이 도움이 많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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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

김태균 반테스님이 김해 사띠 아르마 방장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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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항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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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ㅁ도움 되시길..

ㅇ"붓다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즉 사성제나 연기법이나 삼법인과 같은 진리의 성격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것들이 앞서 언급한 세가지 지식의 원천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성제와 집성제는 경험적 사실이며 경험적으로 알려진다.

ㅡ이러한 두 가지 진리가 자신과 관계될 때, 이들 진리는 내적 성찰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 고통의 완전한 소멸로서의 열반은 고통의 존재로부터 추론될 수 있으며,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타당한 방법은 추론과 경험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ㅡ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연기법이 원칙적으로 작용하는 한, 그것은 내적 성찰에 의해 알려질 수 있으며, 본질적인 작용원리로써 연기법은 경험에 의해 알려질 수있다. 삼법인도 또한 경험과 내적 성찰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

ㅡ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진리를 알기 위해 왜 길고 힘겨운 수행을 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알기 위해 번뇌를 제거해야만 하는가?"(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 6장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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