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4

이병철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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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2 h  ·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한 이십여 년 가까이 육고기는 먹지않지만 생선과 달걀은 먹는다. 어떨 때는 간혹 우유와 치즈를 먹을 때도 있다.  
몇 해전 몽골에 가게 되었을 때, 초대형태로 따라갔던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육류라도 주는대로 먹으리라 다짐하고 갔는데, 한 20여 일 머무는 동안 도저히 육류를 먹을 수가 없었다. 먹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몸이 계속 거부하는 것이었다. 고맙게도 동행한 일행의 비상식으로 지냈던 경험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지구행성을 위한 식사법'을 접하고 완전한 채소의 식사법을 추구했던 적이 있었지만, 어릴 적 바다 근처에 살면서 익숙해졌던 입맛 탓에 멸치까지 포기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비건식을 전제로 하는 수행법도 포기했다. 그러나 갈수록 육류가 중심이 되는 식사법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와 같은 공장식 축사로 사육하는 축산은 온실가스 논쟁 여부를 떠나서라도 단호히 반대한다. 나는 도저히 그런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라는 생각에서 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셍각에 젯사상에도 육류를 올리지 않고 있다. 
가능한 육식 위주의 식사법을 삼가했으면 좋겠다. 기후온난화 방지에도 기여하고 동료 생명들도 보로하고.


─ 채식이라는 정치적 올바름
타임라인에 이런 글이 돌아다닌다.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의 축산 기여는 1.3%, 그중 소의 기여는 0.9%로 추정된다. 기후변화 때문에 쇠고기를 덜 먹자, 소를 덜키우자 운동을 하려면, 인도나, 브라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게 진정한 환경운동가의 자세다."

일단 이 글을 쓴 축산 관련자의 '팩트'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축산과 기후위기의 커넥션을 지적할 때마다 등장하는 '1.3%의 함정'에 대해서. 
나라마다 온실가스 산정 기준이 다르다. 한국의 경우, 농업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 비중은 2016년 기준으로 총배출량의 3.1%다. 이 중 축산업은 1.3%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은 농축산물의 생산 단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생산면적, 생산량, 화학비료양, 가축사육두수 등 활동자료 값만 입력하고 온실가스를 산정한다. 
유럽의 경우는 다르다. 토지 이용 방식, 모든 먹거리의 생산 과정, 해외 수입 농축산물, 생산물의 운송 방식과 거리까지도 포함해 배출량을 측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산정해서 덴마크의 농업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 비중은 17%, 독일은 6%, 영국은 7%. 전세계 평균은 14%로 추정되며, 농림업과 토지 이용까지 포함할 경우 25%에 달한다는 연구도 있다.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은 어느 해의 IPCC와 GPG 가이드라인을 따르냐에 따라 이렇게 천차만별이다. 한국의 경우는 여전히 낡은 방식으로 산정하고 있고, 유럽 방식을 따를 경우, 축산업의 '1.3%'은 배 이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 
가령, 이렇게 질문해보자. 동물사료용 콩은 어디에서 오는가? 안타깝게도 수입국 중에 남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가까이 된다(한국콩산업지). 브라질(38.5%), 파라과이(11.6%). 
맞다. 남미의 원시림을 불태우고 재배된 그 대두 콩이다. 생태학적 비극을 먹고 자란 콩이 또 탄소를 배출하며 원거리 운송으로 한국에 도착한다. 아울러 소가 먹는 목초 중 일부도 남미에서 온다. 맞다. 문제의 그 목초다. 

또 이런 건 어떤가. 한국인들은 한우만 먹고 있는가? 국내 소고기 소비 중 한우 비중은 36.4%다(2019년 기준). 나머지는 미국과 호주산 등 수입된 것들이다. 
맞다. 우리가 먹는 소고기의 절반 이상은 해당 국가의 환경운동가들로부터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축산업계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것도 탄소를 배출하며 먼 거리로 운송된다. 
1.3%밖에 안 되니, 한국에선 소고기와 기후변화의 관계를 채근하지 말라는 저 축산업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정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인들은 이미 충분히 탄소 뿜뿜 내뿜은 '진정한' 소고기를 드시고 계신다. 어디 소고기뿐이랴. 세계 최대 식량 수입국 중 하나인 한국은 농산어촌을 고사시킨 대신, 먹거리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른바 푸드 마일리지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수치로 현혹하지 마시라. 온실가스 측정 방식을 달리하면, 농업과 축산업 비중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3%? 4%? 고작 그것밖에 안 되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지들 마시라. 지금 6%를 줄인답시고 산림청에서 전 국토의 나무들을 싹쓰리로 베어내는 등 온갖 생난리를 피우며 생태적 범죄를 저지르고 계시는 중이다.  
소고기와 기후위기 문제만 나오면 쌍지심을 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최근 농민 운동의 일부에서는 저 낡은 산정 결과인 '3.1%'에 기댄 채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자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농민과 축산업자들에게 덤탱이를 씌우고 있다는 것이다.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말도 아니다. 
소고기는 고위험 비용을 안고 있는 먹거리 맞다. 수경재배로 인해 메탄을 뿜어내는 벼농사도 마찬가지고, 토지의 표토층을 기계로 갈아버리는 경운방식도 마찬가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다음이 보인다. 
오히려 내가 '소고기와 기후위기의 커넥션'을 주장하며 채식만이 답인 듯 외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어떤 강박이다. 
우선 채식을 권장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육식을 탄소의 질량으로만 환원하는 방식. 예를 들어, 소가 메탄 방귀를 뀌지 않으면 소고기는 먹어도 되는 건가? 실제로 해초를 사료로 먹는 소의 방귀는 메탄을 거의 방출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와 호주 등에서 메탄 방귀를 뀌지 않는 소와 해초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메탄 방귀를 뀌지 않고, 남미처럼 원시림을 불태우지 않고, 친환경 배출물 처리 과정으로 전환하면 소고기를 먹어도 되는 건가? 기후위기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않아야 된다는 주장은 이처럼 쉽게 기각될 운명에 처한다. 동물의 생명을 탄소로 물신화하는 건 동물의 삶을 그저 맛있는 '식품'으로만 추상화하는 자본주의 논리의 거울상 버젼일 뿐이다. 채식을 강권하기 위해 만들어낸 자가당착의 함정. 
때로 이 강박은 정치적 올바름의 채식 버젼으로 전화되기도 하고, '채식인'이라는 정체성 정치로 굳어지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는 실재 세계의 복잡한 맥락과 모순들을 특정 요소로 모조리 환원하거나 대표 재현한다. 

"나는 채식을 한다, 고로 나는 옳다."
"당신은 육식을 한다, 고로 당신은 틀렸다."

이 문장은 점심 시간에 재빨리 제육볶음 따위의 열량 높은 음식을 허겁지겁 채우고 다시 노동을 해야 하는 육체 노동자들의 삶을 배제한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쫓겨난 배고픈 기후난민 소년이 쥐고 있는 한 덩이의 소고기를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던져놓는다. 
세상엔 채식을 하는 '좋은 시민'과 육식을 하는 '나쁜 시민'의 가늠선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채식을 하는 인종주의자도 있고, 육식을 하는 반차별주의자도 존재한다. 해외에서 수입해온 값비싼 견과류와 비싼 국내산 두부를 먹으며 자신의 결정권을 선택하는 돈과 시간을 보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햄버거 하나로 한 끼를 때우고 부리나케 노동 현장으로 뛰어가는 가난한 사람도 존재한다. 
채식을 그저 자신의 선함을 강박적으로 전시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제로 여기거나, 채식의 문제를 그저 선택과 '자유의지'의 영역으로 축소 해석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말잔치. 나는 그게 불편하다.
딱히 그런 사람들이 농업의 구조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에코 페미니즘을 비롯해 채식과 재생농업의 관계를 사유하고 매개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두부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 밀가루를 비롯한 곡류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 해외 농민과 아동들의 피눈물을 먹고 자란 견과류들이 어떻게 수입되어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지 그런 문제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이들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요컨대,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채식의 정체성이 아니라 채식의 정치정치학이 아닐까. 
채식을 통해 당신 혼자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채식 인구가 늘어난다고? 육류 소비량은 더 늘고 있다. 잘 사는 북반부 국가에서는 채식 인구가 늘지만, 남반부와 개도국은 인구 증가와 함께 육류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몇 년 후에 피크를 치고 완만하게 육류 소비량이 감소할 가능성이 있지만, 지구 전체적으로는 계속 증가하게 될 것이다. 
지금 지구는 '대두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더 많은 육류를 먹기 위해 콩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반목, 기후변화에 따른 소출 감소에 따라 대두 전쟁은 곡물 가격 상승과 함께 향후 중요한 국제 갈등의 한복판이 될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이유다. 
가급적 육식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고, 또 오래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동물들의 고통을 줄이고, 기후위기에도 대응하고, 생태적 균형을 위해 '가급적' 육식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개개인의 노력으로만 환원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채식의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소득계층의 삶의 질, 재생농업, 로컬 푸드, 채식 교육과 문화 양성, 공장식 축산화의 폐절, 육류세, 축산업의 정의로운 전환..... 등등.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적어도 저소득층들도 채식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 채식의 기쁨을 누리는 사회, 그게 기본이다.